그런 말을 얼핏 들은 거 같았다. 무나카타 레이시가 고개를 들면 그러나 상대방은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자리를 빼고 앉았다. 평일 오후의 카페는 한적하기 그지 없는데다 여기는 흡연실이라 더더욱 사람이 없어 빈자리가 하릴없이 널부러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굳이 무나카타의 앞에 자리 잡았다. …좋을대로. 한숨 섞인 대답을 들었는지 시선을 저 밖으로 향하고 있던 상대가 무나카타에게로 시선을 돌려 눈을 깜박인다. 창으로 비쳐드는 한낮의 햇빛에 묵직한 뿔테안경 너머, 잿빛 홍채의 테두리가 희미하게 푸른 색으로 빛난다.
예쁜 색이구나.
무심코 생각한다. 이제 갓 스물이나 넘겼을 법한 앳된 얼굴이었지만 생기가 있는 것은 오로지 눈동자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색조나 생기가 부족한 얼굴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인상이 너무 엷어 그 너머가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피부는 하얗지만 홍조조차 돌지 않았고 검은 색도 아니고 조금 바랜듯한 잿빛 머리는 누가 보기에도 푸석푸석했다. 자타공인 직감이 좋은 편인 무나카타 레이시는 첫인상만으로도 사람을 직감적으로 파악했고 대체로 그것은 모두 맞았으나 이번만큼은 그 나이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딘가의 제복같은 푸른 옷은 단정하게 다려져 주름이 잡혀있었으나 오래 입었는지 팔꿈치나 소매 끝이 살짝 닳아있었고 품이 맞지 않는지 약간 헐렁한데다 목덜미가 풀어헤쳐져 있어 튀어나온 쇄골이 제법 도드라져 보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가는 골격이라 미성년인가? 싶기도 하지만, 앞으로 넘어온 긴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은 상대는 당연하다는듯 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꺼내두고 다시 시선을 저 멀리로 돌린다.
이미 앉아 자리를 잡은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고 자신에겐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아 무나카타는 다시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책상 위에 고전적인 방식 - 양초로 봉해진 - 의 서류봉투가 놓여져 있어 열었더니 이 책이 들어있었다. 어떤 소인도, 수신인이나 발신인도 없었던 수상쩍기 짝이 없는 봉투와 마찬가지로 책 역시 하얀 양장본에 제목도 출판사도 저자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직접 쓴 것 같은 활자만큼은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읽는 책도 나름의 재미는 있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얼추 읽은 바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일곱명의 왕이 있는 세계에서 두 세력이 하나의 살인사건을 두고 각자 진범을 찾아 다니는 내용이었다. 소재의 특이성은 둘째 치더라도 문장이나 그 필체가 어딘지 무나카타에게도 친숙한지라 이 자리에 앉아 거진 백페이지를 몰두해서 보았다.
"계속 찾고 있었어."
이제 막 끊겼던 문장을 찾아 집중하려던 무나카타를 의식 밖으로 끌어낸 것은 나즈막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면 상대는 느슨하게 턱을 괴고 라이터를 톡, 토독 하고 테이블 위에 튕기고 있을 뿐, 무나카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잘못들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면 그러나 상대의 입술이 움직였다.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하고 무시하기엔 꼭 무나카타를 두고 하는 말 같아 무나카타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읊조리는 말은 무나카타도 본 적 있는 그림의 제목이었다. 캔버스 위의 푸른 배경이 인상 깊었으나 그 뿐이었던.
"내 이름은 알고 있었어. 명함에 적혀 있었거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냐.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고 일만 하지. 서비스직은 언제나 바쁘거든. 원하는 사람은 많아. 다들 아프거나 슬픈 건 싫으니까. 그래서 전화를 하면 우리는 가서 명함을 내밀고 친절한 설명과 함께 계약을 성사 시키지. 우리는 많은 걸 보고, 또 대가를 받아."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니까?"
"기억나요?"
줄곧 먼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이 물끄러미 무나카타에게로 향한다. 안경 너머로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어딘지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으나 도통 기억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기억나지 않는군요."
어쩐지 기대하는 눈빛에 조금 망설였지만 무나카타는 어디에서도 눈 앞의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잠시나마 반짝, 하고 빛났던 눈동자가 한 번 눈꺼풀 밑으로 숨어들더니 이내 먹혀 공동(空洞)이 되어버린다. 생기 없는 눈이 다시 저 먼 곳을 본다.
"기대하진 않았어. 매일 당신의 조각을 봤어."
"조각?"
"유리조각 같은 모양으로 나오거든. 모두 색이 다르지만 당신 건 유독 조각도 크고 선명한 파랑이라."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 대신 얼굴을 테이블 위에 얹은 상대는 손을 테이블을 더듬어 담배를 한 대 빼어물더니 익숙하게 불을 붙인다.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면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이 왜 이리도 선뜩한지. 하얀 손 끝에서 피어나는 연기는 공기 중을 푸르스름하게 유영하는 대신 무지개색으로 반짝인다. 신기하게 허공을 응시하면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로 허하게 웃은 그가 훅- 하고 무나카타에게 연기를 내뱉는다. 습관적으로 켈룩거렸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 말인즉 전에 저와 당신이 만난 적 있다는 뜻이군요."
"당신이 전화했어. 기억을 지워달라고. 우린 그런 일을 해."
"제가…? 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리고 그 기억의 조각을 모아. 원하는 게 있어. 무얼 원하는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원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계속 이런 일을 하면서 돌아다녀. 시간이나 공간도 관계없어. 누군가가 원하면 찾아가서 우리가 원하는 것도 찾는거지."
"좋은 일이란 건 뭡니까? 그게 보수인가요? 아니, 그 전에, 제가 기억을 지워달라고 말했단 겁니까? 어떤 류의?"
"원래대로면 일은 거기서 끝나야했는데……."
남자는 무나카타의 말은 넘겨버리고 제 말만을 잇는다. 공기 중을 떠도는 반짝반짝한 무지개빛 연기 속에서 무나카타는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록 눈 앞의 사람은 어쩐지 익숙한 형태로 변화해가고 있었다. 아니, 사람은 그대로였으나 그 위로 어떠한 상이 고스란히 겹쳐보였다. 쳐진 눈꼬리, 불퉁한 표정,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이를 가늠하기 쉽고 생기있는 얼굴.
"이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상대가 버리고 싶어하는 기억을 갖고 와. 그걸 모아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보이기 마련이거든.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거야."
내가 어디서 왔고,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입꼬리는 슬쩍 올라갔으나 어딘지 체념의 기색이 강했다. 모든 걸 내려놓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무나카타의 머리 속에서 홀연히 재생된다.
"나조차 잊어버린 걸 당신이 갖고 있었다는게 우스워서……."
그래서요, 실장.
허공으로 흩어지는 부름에 무나카타는 아까 전에 느꼈던 선뜩함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깨달았다. 분명히 본 적 있었다. 저 먼 기억 속에서 창백한 얼굴이 미소지었다. 실장. 그가 지금 입고 있는 푸른 옷 어딘가에서 진득한 얼룩이 번져나간다. 담배연기에 섞여 역한 쇠냄새가 코를 찌른다. 손 끝에 닿는 뜨듯미지근한 액체에 퍼뜩 시선을 내리깔면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하얀 표지 위에도 스물스물 붉은 얼룩이 스며들고 있었다. 얼룩에 번져가는 잉크의 색을 알고 있었다.제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의 잉크색이었다. 익숙한 필체가 제것이라는 사실을 무나카타는 이제야 알았으나 왜 기억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아. 혹시 이게 자신이 요청했다는 기억의 일부일까.
깨달음은 빨랐으나 상황의 변이는 그것보다 더 빨랐다. 두꺼운 책이 굴곡이 있는 쇳덩이로 변해 손에 착 감긴다. 예리한 칼날, 장막을 가르고 무나카타의 안에서 또 다른 기억을 꺼낸다.
"당신이 수거를 요청한 건 스오우 미코토의 기억 뿐이었지만."
군데군데 하얗게 비어버린 그림들은 그가 말한 낯선 이의 이름일까. 그건 관계없었다. 눈 앞의 광경은 여전히 평온한 오후의 카페였으나 동시에 아예 다른 곳으로 변한 것 같았다. 눈발이 휘날리는 삭막한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뼈 사이의 견고한 근육을 비집고 들어가는 감각은 손에 선명했으나 동시에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이 무나카타의 안을 파고들었었다.
"당신이 내 걸 갖고 있어서 가지러 왔어."
얼룩덜룩하게 물든 그의 푸른 제복에 뻥 뚫린 구멍이 보인다. 가는 손가락이 담배갑을 열어 날렵하게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생소한 모습이었다. 기억 속의 그는 아직 미성년자라, 담배 따위는…….
그 순간 무나카타 레이시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유리조각.
기억.
선명한
파랑.
사람을 이루는 건 무엇일까. 영혼에 색을 붙일 수 있을까. 한 사람을 만드는 기억은, 기억의 조각은 동시에 영혼의 조각이라고 봐도 좋은걸까. 순식간에 무언가 몰아쳤으나 동시에 손 쓸 수 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지개빛의 연기가 공기 중에 가득 들어찬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겨우 찾았어."
"분명히 당신에게 주었던 내 마음이겠지."
"정말 오랜 시간을 헤맨 거 같아."
"가져가도 돼?"
대답을 요하는 물음은 아니었다. 무나카타가 거절한다 해도 그는 제 것을 찾아갈 터였다.
후시미, 사루히코……!
겨우 내뱉은 이름은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그 가슴에 뻥 뚫렸던 구멍이 메워진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아 넣듯 꼭 들어맞아 구멍은 흔적도 없이 온전하게 채워졌다. 무나카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그것 뿐이었다. 휘황찬란한 빛의 입자들 사이에서 그의, 후시미 사루히코의 그림자가 조금씩…….
제법 재밌는 책이라 꽤 인상깊게 남았는지 꿈을 꾸었다.
한 명의 왕을 죽이면서 끝이 났던 책의 뒷얘기였다. 똑같이 무너진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그의 부하가 그를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하얀 눈이 날리는 설원에서, 그렇지만 남자의 생존본능은 몹시도 질겨 동시에 그 부하의 심장도 관통했다. 이상하게 먼저 숨이 끊어진 건 나중에 찔린 부하 쪽으로 활자로 읽었음에도 그 얼굴이 제법 또렷하게 그려졌다. 윤기 없는 검은 머리, 평소에도 하지만 핏기가 빠져 창백하게 질린 얼굴, 테두리가 겨울 하늘처럼 빛나는 회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다 곧 눈꺼풀에 가려 사라지고 말았다. 어울리지 않게 천진한 얼굴이었다. 마침내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는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고, 꿈에서는 똑똑히 들었으나 무나카타가 꿈을 상기하는 사이 이내 꿈을 꿨다는 사실만 남고 모든 것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입 안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다 자각한 순간, 무나카타 레이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 지도 잊어버렸다.
후시미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있던 다리를 내렸다. 후시미는 무나카타가 불편했다. 고작 중학생이던 자신이 네 번째 검의 주인으로 임명되었을 때, 마중 나온 푸른 옷의 종자들은 모두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오래 전 주인을 잃어 을씨년스러운 집무실에 후시미가 처음 앉아 한 일은 전면적인 인원교체였다. 전국의 관공서, 체육선수들, 리크루트 사이트의 쓸만한 인재들을 전부 끌어모아 재지도 않고 연락했다. 왕이 되었다면, 호무라를 견제할 만큼 충분히 강대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미사키가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스오우 미코토와 비등한, 후시미의 명령을 아무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막강한 조직. 한 번에 백 명 단위의 인원이 새로 들어왔고 후시미를 인정하지 못해 나가는 사람도 있었으며 혹은 후시미가 내보낸 사람도 있었다. 손가락 하나로 그들이 갖고 있던 힘을, 긍지와 자존심을 모두 거둬가는 권능은 몹시 즐거웠다.
무나카타는 경찰청 캐리어 출신이었을 거다. 첫 인스톨레이션의 날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시선을 기억한 건 조직 개편이 끝날 무렵이었다. 각 소대에서 필요한 인물들을 다시 뽑아 특무부를 편성하고 아와시마 세리를 부장으로 임명했지만 사실은 무나카타가 더 적절했을 지도 모른다. 스물넷의 청년은 적당히 괴상한 유머감각 - 촌스럽다 - 과 유연한 성실함 - 요컨대 농땡이 치면서 할 일은 다 한다 -, 우아하고 고상한 검술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와시마를 택한 것은 그거야, 재수 없으니까.
한 번 검이 택한 사람은 부서지기 전까진 왕이라는 사실을 후시미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종종 후시미는 어쩌면 무나카타가 왕에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지 모른다. 무나카타가 후시미를 보는 시선엔 늘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었다. 깔보는 것도 아니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닌. 딱히 무얼 하는 것도 아닌데 무나카타와 마주할 때면 묘하게 긴장되었다.
건네받은 서류를 대충 훑고 후시미는 책상 끝으로 던졌다. 무나카타와 오래 있는 건 별로 정신건강에 좋은 일이 아니다.
"문제없네. 나가 봐."
"실장, 저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만."
"뭐?"
"제가 싫으십니까?"
어느 새 성큼 다가온 무나카타가 위에서부터 후시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후시미는 인상을 썼다가도 솔직하게 답했다. 아니라고 말해도 되도 않는 변명일 뿐이라는 걸 후시미도 잘 알고 있었다.
"응. 싫은데."
"왜요?"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아뇨,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듯이."
"그럼 됐잖아?"
"다만 싫어하는 이유를 알면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해서요."
"왜? 그런 거에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닐 테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 받으면 역시 가슴 아프지 않습니까?"
잘못 들었나 싶어 후시미가 말 없이 눈을 깜박이면 무나카타는 또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실장을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헛소리."
"진짜인데요. 그래서 선물도 준비했고."
그렇게 말하며 무나카타가 내민 것은 작은 과자상자였다. 후시미는 쓰레기통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아와시마가 아침부터 가져다 준 과자를 차마 버릴 수 없어 어떻게든 꾸역꾸역 먹다가 기어이 두어개쯤 버린 게 바로 한 시간 전이었다. 녹인 초콜릿에 팥을 섞어 굳힌 100% 수제 - 그런 걸 시중에서 팔아도 곤란하다 - 빼빼로 덕분에 초콜릿 과자는 더 이상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한 시간 전이었다.
"안 받아주십니까?"
"그……."
무나카타의 갑작스런 고백은 둘째 치더라도 후시미는 그냥 빼빼로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남의 호의를 쓰레기통에 쳐박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할까 우물쭈물 하는 사이 무나카타는 빼빼로 상자를 북 뜯고는 내용물을 꺼냈다. 가느다란 막대기를 후시미의 입에 밀어 넣고는 말하는 꼴이 가관이다.
"받아들인 걸로 알겠습니다."
"누가……!"
"저런. 떨어지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무나카타는 손을 내밀어 후시미의 턱을 살짝 들더니 빼빼로의 끝부터 천천히 부러뜨렸다. 똑, 똑, 똑,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무나카타의 얼굴이 성큼 가까워지고, 마침내 눈밖에 보이지 않는 정적이 길어졌다. 놀라서 크게 뜨인 후시미의 눈에 무나카타가 슬며시 눈꼬리를 접어 웃는 게 보였다.
그거다.
무나카타가 후시미를 보던 시선이 어떤 종류였는지, 후시미는 겨우 눈치챘다. 입에 얌전히 물고만 있던 과자를 사납게 깨문다. 짭짤한 피맛과 함께 예상치 못한 습격에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무나카타의 얼굴이 보였다.
"누굴 애 취급 하는 거야, 무나카타?"
사납게 웃으면서 후시미는 맛도 보지 않고 빼빼로를 목 깊숙히 삼켰다. 아주 작은 조각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앞니로 씹은 자국이 선명한 무나카타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게 만족스럽다. 무나카타가 후시미를 보는 시선은, 그거다. 모든 것을 어린애 장난이라고 취급하면서 어쩔 수 없지, 라고 무조건적으로 인자하게 내려다보는 시선. 언제나 나는 당신의 우위에 있다는 더럽게 기분 나쁜 표현. 좋아한다고? 같잖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그 또한 무나카타의 우위 표현이라고 후시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개의 마운팅 같은 거다. 얼핏 보면 애정 표현 같지만 사실은 단순한 서열 표시다.
"과자쪼가리는 보기도 싫고 댁 얼굴도 마찬가지인데 좀 꺼져주지?"
"그래도 자르진 않으시네요?"
"……."
무나카타의 말은 놀랍도록 맞는 말이었다. 당장 내쫓아 버리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지만 무나카타는 후시미의 이성이 뜯어 말릴 정도로 조직에 필요한 인재였다.
"저는 당신의 그런 점을 좋아합니다."
"…꺼지라고."
"감정적이지만 냉정하고 그래서 귀여워요."
"씨발, 이게 진짜!"
"그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이유가 있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는 없죠. 좋아해서 좋은건지, 좋아서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거든요."
후시미는 아까 던져놨던 서류를 다시 주워들어 집어던졌다. 날카로운 종이 끝에 무나카타의 얼굴엔 상처가 하나 더 생겼으나 무나카타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씩씩거리며 분에 못이긴 후시미가 무나카타의 멱살을 잡았으나 무나카타는 후시미가 주먹 쥔 손을 가볍게 떼어내고는 대신 그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의 왕."
가볍게 문이 열렸다 닫히고 후시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등에 새빨간 입술 자국이 선명했다. 손가락으로 벅벅 문지르는 데도 비릿한 피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애꿎은 종이에 볼펜만 뭉개다가 기어이 스오우는 펜을 놓았다. 아직 라운지에 갔다 온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새벽이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낮 기숙사 내에서 흡연이라면 당장 사감의 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벌점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기숙사 강제 퇴사라는 최악의 경우까진 가고 싶지 않았기에 스오우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과제 마감은 앞으로 삼일쯤 남았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가늘게 뜬 눈으로 옆을 바라본다. 깔끔하게 개켜진 이불을 보는 것도 벌써 나흘. 월요일에 평소대로 침대를 정리한 뒤 나간 룸메이트는 그 뒤로 쭉 부재중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왔을 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스오우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몇 개의 비평 발제와 레포트를 빼면 평소엔 널널한 스오우와는 달리 그 쪽은 시험기간이든 아니든 언제나 바빴다.
룸메이트가 없는 시간이 많으면 아무래도 편하다. 지난 4일 스오우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이왕이면 쭉 룸메이트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스오우와 동갑인 그는 잔소리가 심하고 생활 패턴도 맞지 않아 빈번하게 말싸움 하기 일쑤였다. 주말에도 번갈아가면서 하는 청소를 스오우가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한바탕 싸운 뒤였다. 그가 없는 사이 방은 난장판이었다. 일부러 보란 듯이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던져 놔 치우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
지겹군.
스오우는 그렇게 침대에서 미적대다가 일어났다. 시간강사인 교수의 시간표가 어떻게 꼬였는지 이번학기 중세국어는 여섯시부터 아홉시까지 풀강이었다. 슬슬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뭔가 허전해 휘적휘적 방 안을 둘러보다 스오우는 방문을 잠궜다.
기숙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미 룸메이트가 있었다. 정리를 하던 중이었는지 책장에 전공서를 꽂는 중이었다. 옷까지 포함해서 달랑 두 박스 정도인 스오우와는 달리 상대는 책만 두 박스 정도였다.
"무나카타 레이시, 기계공학 2학년입니다."
문을 열고 마주친 눈에 앞으로 스오우의 룸메이트가 될 그, 무나카타 레이시는 자기소개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안경 쓴 샌님이라니 벌써부터 피곤해질 게 뻔해 스오우는 마지못해 손을 붙잡고 인사했다.
"스오우 미코토, 국문과 2학년."
"국문과?"
"불만인가."
"아니…."
한참을 위아래로 훑던 시선이 스오우의 얼굴에서 다시 멈춘다.
"당연히 체대생일 줄."
"말이 짧아졌군."
"동갑이면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가 없잖아. 아니면 존댓말을 듣고 싶나요, 스오우?"
"징그러우니 사양하지."
"그럼 저녁에 약속은?"
"없는데."
"짐 정리 끝나면 잠깐 생활 규칙부터 정해봅시다."
진짜 제대로 잘못 걸렸군.
인사 뒤에 규칙 운운 하는 룸메이트라니 벌써부터 빡빡한 앞날이 그려져 스오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 치고는 꽤 잘 지냈다. 스오우의 실내 흡연을 몇 마디의 잔소리로 묵인해줬고, 가끔은 반 강제적으로 야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 귀찮은 스오우의 지갑에서 철저하게 반액을 가져간 뒤 치킨을 주문했다 -.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연어초밥이나 서로인 스테이크 같은 걸 우아하게 먹을 것 같은 녀석이 닭다리를 뜯고 있는 걸 보면 묘하게 웃겼다. 방에서 뭘 먹는 건 철저하게 싫어해 항상 휴게실에 들고 가서 먹는 무나카타가 방에서 삼각김밥이나 도너츠를 우겨 넣고 있을 때는 눈이 돌아갈 만큼 과제가 쏟아지는 때라는 것도 스오우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부과대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귀찮아 하는 것도 스오우는 알고 있었다. 총학생회 회의를 갔다 온 뒤에는 책상에 늘어져 "지겨워."라고 푸념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런 부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그린듯한 모범생이라 끼고 있던 이어폰도 벗고 뒤를 돌아봤던 기억이 있다. 11월은 선거철이라 무나카타는 과제와 더불어 이리저리 불려다녔고 스오우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기력을 다해 씻은 뒤 - 무나카타는 아무리 피곤해도 꼭 씻고 잤다 - 머리만 말리고 잠들기가 일쑤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을 손이 차갑고 입술이 버석해서 "개고생이군."이라고 말하면 무나카타는 "개고생이지." 험악하게 내뱉고는 다시 한 번 키스했다.
그 개고생을 무나카타는 올해 더 큰 스케일로 하고 있었다. 갈수록 학생회 지원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부과대가 과대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 같았다. 개고생을 사서 한다며 스오우가 비웃으면 무나카타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희미하게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게 마지막일 것 같았다. 폭설과 함께 학기는 끝을 맞이했다. 눈이 소복하다 못해 무지막지하게 쌓여 자동차 한 대도 움직이지 못하고 대부분의 학교가 휴교되거나 회사마저 휴일이 된 날부터 며칠을 얼어있던 눈이 오랜만의 영상 기온으로 다 녹을 때까지 스오우와 무나카타는 딱 붙어 지냈다. 말 그대로.
짐을 싸야되는데 더러워진 시트 그대로 들고 갈 수는 없다면서 무나카타는 새벽 두 시에 세탁기를 돌렸다. 그 층에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은 둘이 마지막이었다. 건조기에서 시트를 꺼내 온 무나카타가 박스 안에 잘 개어 넣는 걸 보면서 스오우는 담배를 물었다.
"불 좀."
"방에서는 안 핀다더니."
"밖에 나가면 얼어죽을 거 같아서."
밤샘이 많은 과 혹은 그럴듯한 직책에 있는 자들의 필연인지 우연인지 무나카타도 흡연자였다. 처음엔 내색을 안했지만 몇 번 밤을 새고 오면 옷에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묻어 났다. 아무리 휴대용 탈취제를 들고 다녀도 학부생의 7할이 흡연자인 상황에선 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얇은 입술에 흰 담배를 물고 무나카타는 스오우의 얼굴을 살짝 제 쪽으로 돌렸다. 들이쉬는 숨을 따라 맞닿은 곳에서 부터 빨간 불씨가 야금야금 옮겨갔다.
"감사."
"별 말씀을."
흰 연기가 내뿜어져 찬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는 찰나 한 번 더 키스했다. 입에서 쓴 맛이 나, 둘 다 인상을 찡그리고 웃었다.
열쇠가 헛돌았다. 어둠 속에서 이불만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던 침대에 둥근 형체가 있음을 스오우는 눈치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사람이 있든 말든 켰을 테지만 방을 비운 나흘 내내 제대로 된 잠은 자지 못했을 테니 스오우는 약간의 자비를 발휘하기로 했다. 스탠드를 켜고, 옷을 갈아입고 가만히 드러누워 있으면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과제는 여즉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고 십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나온 여류 시인의 날카롭게 찢겨진 스테인레스 같은 시를 비평하기엔 무언가 진부한 단어들만 떠올랐다.
낡은 기숙사의 문은 나무였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가볍기까지 해서 바람 한 번 잘못 불었다간 온 복도에 울려퍼지도록 꽝-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에 신경쓰기가 싫어 스오우는 창문을 열고 불을 붙였다.
"시……"
"C? 국문과에선 C언어도 배웁니까? 아, 그것도 언어구나."
"잠이 덜 깼으면 다시 가서 침대에 누워라, 무나카타."
"불이나 좀."
멋대로 창틀에 올려둔 스오우의 담뱃갑에서 한 대를 꺼내 무나카타는 입에 문다. 머리도 말리지 않고 잤는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얼굴이 평소보다 퀭했다. 스오우의 담배로부터 불을 얻고 있는 무나카타의 속눈썹만큼은 여전히 길었다.
"안 본 사이에 10년은 늙은 것 같은데."
"괜찮아. 네 옆에 있으면 원래 고등학생 같아 보여."
"미쳤군. 언제 들어왔지?"
"여섯시."
"나흘 내내 밤 샜나?"
"라꾸라꾸에서 여덟시간 정도. 과대는 라꾸라꾸 특권이 있어."
창틀에 턱을 얹고 무기력하게 담배를 물고 있는 무나카타의 입술에서 담배를 뺏어 들고 스오우는 키스했다. 마지막일 줄 알았던 키스의 쓴 맛도 올해는 익숙해졌다.
"놀랐나?"
다음 학기 새로 배정 받은 방에도 무나카타는 있었다. 작년보다 더 늘어난 전공서적들을 꽂아넣으며 무나카타는 말했다.
"룸메이트 신청서를 넣어도 실제로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서."
"네가 딱히 편한 룸메이트는 아닌데."
"이 쪽도 물론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은데. 밑에 내려가서 룸메이트를 바꾸겠어?"
"…잘 부탁하지, 무나카타."
"물론, 스오우."
까다로운 줄 알았던 룸메이트는 생각보단 나쁘지 않았다. 스오우의 실내 흡연을 몇 마디의 잔소리로 묵인해줬고, 연어초밥이나 서로인 스테이크를 먹을 것 같은 입술로 키스를 잘했다. 방에서 뭘 먹는 건 철저하게 싫어해 항상 휴게실에 들고 가서 먹는 무나카타가 방에서 삼각김밥이나 도너츠를 우겨 넣고 있을 때는 눈이 돌아갈 만큼 과제가 쏟아지는 때라는 것도 스오우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고, 과대의 직책을 몹시 귀찮아하지만 사실 그걸 한 이유는 과방의 안락한 라꾸라꾸 침대 때문이란 것도 안다.
쿠사나기는 조용히 호무라의 덧창을 닫았다. 주말에도 손님은 많지 않은 바에 평일 저녁이라고 손님이 많을 리는 없었다. 간혹 저녁 후에 칵테일 한 두 잔을 즐기는 손님은 있어도 날이 바뀌는 시간까지 버티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11월 초에는 원래 이리도 추웠나. 집에 가면 슬슬 겨울 옷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좀 이르지만 오늘은 슬슬 폐점 준비를 해볼까 하면서 문 밖에 Close 팻말을 걸려고 밖에 나가면 저 골목 끝에 서성이는 긴 그림자가 보였다.
"사루야."
조용히 부르는 이름은 꽤 오랜만이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소리가 어찌나 어색하던지 쿠사나기는 내심 그 어색함이 소리로까지 전달되지 않기를 바랐다. 가로등의 역광 속에서 둥근 빛 주변을 맴돌던 인영이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본다. 쿠사나기는 겨우 오늘 겨울옷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애는 이미 두툼한 파카를 껴입고 있었다. 후드까지 뒤집어 쓴 그림자가 망설이다 천천히 쿠사나기에게로 걸어온다.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내가 니도 못알아볼라꼬."
"들어가도 돼요?"
"퍼뜩 들어온나. 밤되니 쌀쌀허네."
여전히 망설이면서도 후시미는 실례하겠습니다, 란 인사를 빼먹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쿠사나기의 뒤를 따라간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걸 보고도 후시미는 눈을 깜박이다 지정석 마냥 빛도 들어오지 않는 저 끝자리에 앉는다.
그러고보니 저 애는 늘 저 자리에 앉았다. 떠들썩한 소파나 홀의 중앙이 아니라 늘 바의 끝자락에 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가끔 쿠사나기가 넌지시 말을 걸어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고개를 내젓곤 했다. 때때로 후시미의 시선이 중앙이 아니라 쿠사나기 쪽을 향하는 때도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적막한 시선을 등으로 받아들이면서 쿠사나기는 후시미가 언젠가는 영원히 이 바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막 나갈 것처럼, 겉옷도 벗지 않은 채로 여전히 바라만 보는 후시미에게 쿠사나기는 가볍게 제 앞을 두들겼다.
"이 짝으로 와라. 손님도 없는데 와 어두캄캄헌데 있노."
한참을 망설이다 자리를 옮긴 후시미는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로 무언가 망설이고 있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후시미가 호무라에 온 게 꽤 오랜만이라 쿠사나기는 조금 들떠있었다. 용건 없이는 올 것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이 시간에 후시미가 이 근처를 배회할 일 같은 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모르는 척 "뭐라도 맹글어줄까?"하고 물으면 후시미는 크게 숨을 들이 쉰 뒤 입을 열었다.
"쿠사나기 씨. 혹시 기억해요?"
"응?"
"생일이 되면 한 잔 쏘겠다고 했던 거."
…….
하긴, 했을 거다. 몇 년 전 호무라엔 아직 성인 딱지도 못 뗀 어린애들이 많았다. 안나를 제외하면 후시미와 야타가 제일 어렸다. 쿠사나기는 그런 애들에게 간혹 성인이 되면 한 잔씩 원하는 걸로 첫 술을 내어 주겠다 했고 지금까지 몇몇이 그렇게 쿠사나기에게서 칵테일을 받아먹었다.
"어차피 별 기대도 안 하긴 했지만."
쯧, 혀 차는 소리에 쿠사나기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구나, 오늘은 후시미의 생일이었다. 어영부영 10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11월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더니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약속한 것은 자신이었고 후시미는 그 약속을 위해 여기까지 왔으니 이건 명백하게 쿠사나기의 잘못이었다.
"하하, 사루야 그래서 니 뭐해줄까."
"빈 손으로 얻어먹으러 온 거 아니에요."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한 웃음에 후시미는 살풋 인상을 찡그리고는 파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어차피 쿠사나기 씨 생일도 못 챙겨줬으니 쌤쌤이라고 치죠."
달칵, 소리를 내며 내밀어진 것은 매끄러운 광택의 지포라이터였다. 쿠사나기가 지금까지 쓰던 것과는 그리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말단에 매끄러운 음각으로 쿠사나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뭐꼬, 이기."
"칵테일 값."
"내가 기냥 주기로 했는데?"
"생일 선물?"
"사루야, 니랑 내는 생일이 반년이 차이나요. 구색으로도 할 말이 아니구마."
"그럼 칵테일 플러스 알파로 쳐요. 그리고 쿠사나기 씨 아직 중요한 말을 안했는데."
"뭐……."
그러나 쿠사나기의 목소리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도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는 제법 크고 길어진, 우악스러운 손으로 후시미가 쿠사나기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눈은 감지 않았다. 손은 우악스러웠지만 혀만은 서툴고, 눈동자는 올곧게 응시하면서도 흔들렸다. 달그락하고 안경 프레임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맞닿은 코가 생각보다 훨씬 차가워서 쿠사나기는 조금 놀랐다. 후시미는 전부 차가웠다. 줄곧 주머니 안에 넣고 있던 손과 파고드는 혀만이 따뜻했다.
떨어지고 난 후에야, 쿠사나기는 제가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도 후시미의 체온만큼 따뜻하다는 걸 알았다. 얼굴이 시려지도록 밖에 서 있었으면서 얼마나 꽉 쥐고 있었던 걸까.
"축하한다고."
"……."
"생일 축하한다고, 태어난 걸 축하한다고, 얘기 안했어요, 쿠사나기 씨."
"아…, 아아, 그래… 내가 그 말을 안했든?"
"칵테일은 쿠사나기 씨가 아무거나 골라주세요. 그리고 방금 전은, 플러스 알파."
쿠사나기는 이 시선을 안다. 그 예전부터 쿠사나기의 등 뒤로 닿고 있던 적막한 시선. 사실 그 예전엔 아니었을 거다. 매달리던 일말의 희망은 다른 것으로 종류를 바꿨지만 어느 쪽이든 쿠사나기에게 그 본질은 똑같아 보였다. 그 때도 지금도, 그리고 쿠사나기는 외면한다. 쿠사나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한다 사루야."
"…감사합니다."
줄곧 쿠사나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던 후시미가 쿠사나기의 말에 눈을 감으면서 답했다.
흰 손이 떨어져 나갔고,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후시미에겐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베르무트, 슬로 진, 보드카와 레몬을 넣고 섞었다. 넓은 잔 입구에 설탕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내주면 후시미는 이름도 묻지 않고 마셨다.
"첫 술 치고는 도수가 좀 쎈가?"
"아뇨… 딱 좋았어요. 한 잔 얻어 마셨으니 갈게요."
그렇게 말해 놓고서도 후시미는 한 모금의 술을 남기고 도망쳤다. 도망쳤다, 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을 지 모른다. 쿠사나기가 시계를 보니 확실히 지금 돌아가 잔다고 해도 통상적인 출근시간에는 조금 부족한 잠을 자게 될 터였다. 어디까지나 쿠사나기의 자만이었다.
마지막 손님이 나갔으니 다시 문 밖에 이번에는 확실하게 Close란 팻말을 걸어둔다.
잔을 들고 새빨간 혀가 핥아 먹던 반쯤 녹은 설탕을 쿠사나기도 입술로 훔쳐보았다. 아직도 차가운 술은 입에 넣으면 그 색만큼 화끈한 열을 지니고 혀 뒤로 넘어간다. 빨간 색은 후시미랑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느낌만큼은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이름, Kiss of Fire, 그대로. 그리고 쿠사나기는 줄곧 주머니 안에 넣어뒀던 후시미가 준 라이터를 꺼내 서랍 속으로 집어 넣는다. 불꽃처럼 사그라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저도 어디 나갈 때는 젖도 못 뗀 애들이 차 끌겠다고 열댓명 씩 달려드는데요. 먹은 짬밥이 얼마인데 제가 차나 끌고 문 열어 주고 우산 받쳐주고 해야 됩니까?"
"그렇습니까? 하지만 대위의 표현을 빌리자면, 짬 덜 찬 애새끼들 데리고 올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런 시기에."
고아하게 미소 짓는 입에서 '짬 덜 찬 애새끼들'이라니. 설마 무나카타의 입에서 그런 표현이 나올 줄은 몰랐던 후시미도 불평불만을 내뱉던 입이 딱 다물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나카타는 후시미의 손에 들린 우산을 받아들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긴다. 이러니 저러니 말은 많아도 결국 폭우가 쏟아지는 길에도 안전운전 해가면서 그의 말 그대로 문 열어주고 우산도 받쳐준다. 참 번거로운 부관이다.
"그럼 아와시마 대령 데려오면 되잖습니까."
"그녀야말로 나갈 땐 젖 못 뗀 애들이 대위보다 더 달려든답니다. 짬 더 먹으셔야죠."
이렇게까지 나오니 후시미는 또 할 말이 없어진다. 결국 혀 한 번 차고 모자나 고쳐 쓸 무렵에는 본관 앞이었다.
전선에서 전투식량 먹듯 잽싸게 해치워진 대규모 진급식 이후로 후시미는 본부가 처음이었다. 휴전 서류가 휴지 조각 되는 건 순식간이라 수도가 한 번 신나게 털린 뒤 쓸만한 계급들이 모두 죽어 새파랗게 어린 사관생도들이 아무렇게나 계급장을 받고 나간 전쟁이었다. 한 번 나가서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빈 공간을 어떻게든 채워보려고 1,2계급 특진은 기본이었다. 어찌나 계급이 자주 바뀌었는지 지난주에 하사였던 녀석이 이번주엔 원사였고 이제 막 소위 임관한 녀석을 그 다음 달에 보면 대위이기도 했다.
본래라면 기껏해야 하사나 달고 있어야 할 후시미가 거기에 다이아몬드도 건너 뛰고 꽃을 달고 있거나 마찬가지로 무나카타가 별을 달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반년 동안 서너번쯤 계급이 바뀌게 되면 외우기도 귀찮아 이름으로 부르기 일쑤였다.
적국이 소강상태이긴 해도 종전은 아직 기미도 안 보이는데 전선에 있는 모든 준장 이상을 소집한 걸 보면 무언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이전 중역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현재는 모든 군을 통솔하고 있는 고쿠죠지가 지병 악화로 드러누웠다는 소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무나카타가 다가오자 한층 긴장한 헌병들한테 한 번 웃어주고 후시미는 비에 젖은 우산을 던졌다.
"이거 나 다시 나올 때까지 니 앞에 딱 펴놓고 말려 놓고 있어라. 누가 뭐라 그러면 무나카타 준장이 시켰다고 그래."
"충성! 알겠습니다!"
"우리 말고 누구 왔냐?"
"오늘 출입하신 분들은 말할 수 없습니다!"
"뻣뻣하게 굴지 말고. 어차피 올 사람 다 아는데."
"내 왔다. 내. 하이고, 우리 사루 많이 컸네. 아들한테 우산 던지는 버릇은 어디서 들었노? 니 원래 여기 있으려면 지하에 처박혀 있어야 카는 거 알제?"
보기 좋게 일그러진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시미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긴 팔이 걸쳐진다. 뒤에서 담배 한 대 피고 왔는지 반쯤 젖은 소매 끝에선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났다.
"사루야. 인사해야제. 니 옛날 상사 아이가."
"인사는 이 쪽에 먼저 하셔야죠, 쿠사나기 대령."
"어이쿠, 무나카타 준장도 거기 있었습니까? 오랜만이시네예."
"오랜만입니다."
"야 잘 써먹고 있습니꺼? 전선에서 이탈한 아를 용케도 써먹네."
"후시미 군은 우수한 인력입니다. 탈영으로 썩히긴 아까운 인재죠. 그 쪽처럼 무식하게 일단 돌격하고 보는 여단에서는 영 빛을 못 발할 인재이기도 하고요."
"하하. 고로코롬 얘기하시면 이 짝도 좀 섭섭한데. 앞에 다 뚫어주고 편한 길 만들어주는 게 누군데 그라시면 안되지예."
"퇴역신청서 쓰시면 되는걸. 그나저나 대령이 여기 왔으면 스오우도 왔단 얘기군요."
"계집애처럼 보채지 마라, 무나카타."
"저런. 기왕이면 얼굴 보고 싶지 않아서 물은 겁니다."
다들 양반은 못되지. 무나카타와 후시미가 뒤를 돌면 제복 셔츠를 반쯤 풀어헤친 스오우가 어느 새 다가와 있었다. 왼팔에는 붉은 완장, 가슴에는 무공훈장이 종류별로 두 개나 달려있다. 스오우 미코토가 이끄는 속칭 호무라는 무조건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최전선 돌격 여단이다. 반면 후시미가 소속된 무나카타의 여단은 기본적으로 치밀하고 신중한 작전에 따라 움직이는 엘리트 정예 부대로 이전부터 작전 방향에 관해서는 충돌이 잦았다. 더불어 사관학교 동기라는 지휘관 둘의 상성은 극도로 맞지 않아 그럴싸한 계급장 달고 있는 이들 중엔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무나카타의 얼굴이 서늘하게 비소를 띄우나 스오우는 머리 한 번 쓸어올리고는 그 뿐이다.
"어차피 들어가면 볼 건데."
"그 때까지 피하고 싶어서요."
"왜? 뒤가 젖나?"
"더러운 말 하지 마시죠, 스오우. 귀가 썩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 얘기 아닙니까?"
"자자, 둘이 흘레붙든 뭘하든 관심은 없는데 때와 장소는 가려가면서 캐야지, 아들 밍구스러워 안 카나."
쿠사나기가 박수를 치며 가볍게 환기하면 그제야 둘은 입을 다문다. 애써 어색한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헌병들을 뒤로 한 채 넷은 입구에 도착한 지 10분 만에 겨우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복도에는 군화소리만이 울렸다.
*
"그럼 그렇지. 날 여기 왜 데려오나 했네."
"좋아할 줄 알았는데요."
"어떤 미친 놈이 적국에 목 들이밀고 가는 걸 좋아합니까? 돌았어? 미리 말도 안 해놓고 '그건 후시미 대위가 할 겁니다.' 라고 말하면, 어? 회의실 사람들 다 나만 쳐다보잖아."
"하지만 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거기서 안한다고 뻗대요? 쿠사나기 씨가 퍽이나 좋아하겠네. 아까 얘기 하는 거 못 들었어요? 나 영창 못 보내서 아쉽대잖아."
"일단 나가서 얘기합시다, 후시미 군."
"아,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코쿠죠지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모두 침묵을 고수하는 가운데 입을 연 건 코쿠죠지의 대리라며 나타난 남자였다. 키는 후시미보다도 작았고 얼굴은 훨씬 앳됐으나 하대는 거리낌이 없어 동안인 건지 어린 건지 후시미는 종잡을 수 없었다. 군 전체를 통틀어 중앙 본부에 출입하는 이들 얼굴은 웬만하면 외웠다고 생각하는 데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사나 야시로라고 합니다."
어깨의 금장에 별이 세 개. 무나카타나 스오우보다도 두 계급이 높았고 공식적으로는 단 한명도 없는 자리였다. 심각한 계급 인플레이션을 겪는 와중에도 코쿠죠지는 그 자리를 비워 놓았었다. 군권의 독재인가 싶으면서도 모두 전선에 나가니 쿠데타를 일으킬 여력은 없었다. 모두 그의 존재를 몰라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혹자는 허리의 홀스터에 손을 얹기도 했으나 이사나는 한 번 웃고는 말을 이었다.
"제 신원은 나중에 확인하시고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코쿠죠지 대장은 현재 중태이며 군 내부에 첩자가 있어 이를 물색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두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냥 설명이었을 뿐이다. 이미 얘기는 모두 되어 있었던 듯 이사나는 일사천리로 설명했고 무나카타가 그 다음을 이었다. 내부에 첩자가 있다, 몇 몇을 잡긴 했지만 철저하게 머리는 함구한다, 적국의 목적이 뭔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쪽에서도 보낸다, 기타등등 이라는 말을 한 귀로 열심히 흘려듣고 있던 후시미는 무나카타의 청산유수 끝에서 제 이름을 들은 것이다.
아 진짜! 버럭 소리를 질러대도 무나카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보란듯이 쿵쿵대는 소리를 내면서 후시미가 막 무나카타를 쫓아 문을 나서는 때였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대기가 짓눌렸다.
"이건 또 뭐야!"
반사적으로 후시미가 무나카타의 앞을 감싸고 주변을 살펴보면 주차장 쪽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꽃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모든 사이렌이 왱왱거리면서 깜박거린다. 1급 경계 경보, 1급 경계 경보를 발령합니다. 사병들은 관내 모든 출입구를 통제하고 신속하게 위치로…….
"화려하네요."
"지금 태평하게 불꽃놀이 감상할 때입니까. 야, 여기 우산 계속 있었냐?"
순식간에 분주해진 주변과는 달리 무나카타는 여유로운 말투였다. 한 대 쥐어 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후시미는 우산부터 찾았다.
"후시미 군도 만만치 않은데요."
"같은 선상에 두시면 곤란하죠. 이번에 개발부에서 쓸만한 걸 만들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후시미는 우산의 손잡이를 빠르게 두 번 눌렀다. 딸깍- 하고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우산 손잡이가 분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