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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30 [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 2017.08.12 인어공주 맥가엘
- 2017.06.02 [맥가엘] 리퀘박스 여덟 번째
- 2017.05.27 [맥가엘] 새가 말했다 01
- 2017.03.28 [맥가엘] 리퀘박스 일곱 번째
글
[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싕님의 맥가엘 개인지 <천국보다 먼Far from Heaven>에 드렸던 축전을 공개합니다.
싕님의 오리지널 맥가엘 스토리인 <천국보다 먼>의 본편 설정을 상당수 차용하고 있으므로 원작기반은 아닙니다.
축전을 맘에 들어해주신 싕님께 감사의 말씀 드리며 저도 싕님 책 다시 읽으러 갑니다 모두 해피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암막커튼으로 바꿨다. 그것은 맥길리스의 첫 번째, 아주 사소한 반항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하늘하늘한 여름용 레이스 커튼은 집들이 기념으로 러스탈 에리온이 선물한 것이었다. 가엘리오는 러스탈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물에는 죄가 없다는 주의인지라 그 커튼을 방에 들여놓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가엘리오는 매일 맥길리스의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그 커튼을 활짝 열고 바깥 날씨를 가늠한 후, 운동을 나가거나 아침을 먹곤 했다. 바짝 구운 베이컨이나 소시지에 서니사이드업, 주방의 재료에 따라 베이글이나 식빵, 스위트피와 버터에 구운 아스파라거스, 옥수수 같은 걸로 바뀌기도 했으며 막 짠 오렌지 주스나 우유 같은 게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컵에 담겨 함께했다. 가엘리오가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원에서 트랙을 돌고 있을 무렵 맥길리스는 느지막이 일어난다. 가엘리오가 어디에 갔을지 알고 있으면서도 기이할 정도의 낯섦과 불안 속에서 헤매며 진하게 내린 커피와 빵 쪼가리를 입 안에 던져놓고 가엘리오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나는 개인가?
맥길리스는 자조적으로 그런 생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과거의 영광이 된 지금, 노쇠하고 탁한 음으로 우주를 울리던 금빛의 뿔피리는 없다. 늙은 사자는 죽었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주 기나긴, 미지의 자유였다. 가엘리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어느 것에나 정력적이었으며 따라서 이 정력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맥길리스는 어땠냐면 가엘리오가 있어야 하루가 돌았다. 가엘리오가 아침 운동을 나갔다 오길 기다렸고 가엘리오가 소파에 늘어져 있는 맥길리스의 등에 “좀 움직여, 맥길리스!”하고 잔소리를 해대다 한 번씩 차야만 게으르게 일어나 청소를 하거나 씻거나 운동을 하거나 책을 봤다. 가끔은 가엘리오의 눈을 피해 통속소설을 쓰기도 했고 이 빌어먹을 통속소설이 잘 팔리게 된 이후엔 그의 눈을 피해 인터넷으로 편집자와 회의를 하기도 했다. 숨만 쉬고 있어도 시간은 갔고 그 하릴없는 시간이 아쉽지 않았다. 가엘리오에 의해 움직이는 24시간과 365일이라니. 행복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가엘리오는 없다.
“나 없다고 매일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그렇다고 먹기만 해서 살찌면 안돼.”
가엘리오는 엄마처럼 잔소리했다. 엄마. 어머니, 그런 존재는 맥길리스의 생에 단 1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아, 가엘리오. 너는 언제나 내게 부재한 모든 것을 채워주는 존재야. 암막커튼의 기능은 너무 완벽해서 햇빛 같은 건 전혀 들이치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맥길리스는 존재하지 않는 햇빛을 피하려는 것처럼 베개를 얼굴에 파묻었다.
갈루스 보드윈은 볕이 들이치다 못해 완벽하게 햇빛에 휩싸인 프랑스 루시옹에 포도밭을 사들였다. 한 때 별을 달고 있던 자치고는 꽤 소박한 노후가 아닌가 싶었지만 작업용 체크셔츠와 멜빵바지에 커다란 갈퀴를 들고 있는 갈루스 보드윈을 상상하면 50년차 농부처럼 잘 어울려 맥길리스는 쉽사리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안 갈 거야?”
“안 가.”
그 날 아침도 그랬다. 맥길리스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태양을 피하려는 헛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번 놀러 오라는데. 아주 큰 와이너리를 만들었대. 아직 포도 수확을 못했으니 와인은 못 만들었지만. 가엘리오가 여상하게 말하는 소리를 맥길리스는 그저 흘려들었다. 알미리아가 아쉬워할 텐데. 가엘리오는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맥길리스를 슬쩍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도 가끔은 잔상이 드리웠다.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역사스페셜 야망의 불꽃>이. 미묘하게 겹치는 현실과 영원히 침묵하게 된 뿔피리가 상상력이 부족한 가엘리오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치졸한 독점욕이라면 맥길리스는 기쁨에 차 기꺼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프랑스까지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가엘리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말했듯이 그에겐 상상력이 부족했고, 맥길리스를 지나치게 신뢰했다.
“잘 다녀와, 가엘리오.”
공항까지 마중 나갈 부지런함도 맥길리스에겐 결여되어 있었다. 가엘리오가 떠나는 꼴을 굳이 거기까지 가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가엘리오의 체류 일정은 약 보름이었고 오늘은 1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지난 2주는 그야말로 맥길리스에겐 방탕과 나태의 나날이었다. 암막커튼으로 바꾼 뒤 낮엔 내내 잠을 잤다. 일어났더니 몇 시인지 가늠도 안됐다. 커튼을 걷었더니 희미하게 햇빛은 남아있었다. 가엘리오가 없다고 생각하면 입맛도 없었지만 착실하게 배는 고팠다. 성의 없이 군데군데 조금 탄 부분이 있는 소시지를 포크로 씹어 먹으면서 소파에 앉은 맥길리스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고, 나초를 먹었고, 팝콘을 먹었고, 콜라나 커피를 마셨다. 이 때까진 가엘리오의 ‘나 없다고 매일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그렇다고 먹기만 해서 살찌면 안돼.’라는 문장이 아직 온전하게 맥길리스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가엘리오가 없을 때의 반항은 소파에서 팝콘을 먹거나 낮밤을 바꿔버리는 정도일 뿐, 나름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했고 가엘리오가 돌아오면 놀아야 되니 연재 비축분을 써둔다는 계획도 있었다.
액제전은 끝났지만 안정기에 들어선 걀라르호른 내부에선 잡음이 끝나지 않았다. 이윽고 아그니카 카이엘을 향한 숙청의 칼날이 벼려지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아그니카를 다룬 모든 창작물에서 하이라이트였지만 동시에 모든 창작물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그니카 카이엘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존재가 역사서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후 가장 유력한 건 역시 암살설이었으나 일각에선 그가 정치판에 이골이 나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아라야식의 부작용으로 와병생활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맥길리스는 모든 영웅의 말로가 그렇듯, 범부(凡夫)의 시기질투에 덧없이 져버렸을 거라 생각했지만 로맨스는 언제나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그러니 고지식하고 청렴하며 올바른 보드윈 경은 아그니카의 암살도 방지하고 아그니카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신붓감도 물리치는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다. 아그니카보다 보드윈이 더 멋있어 보이는 건 맥길리스의 기분이 나쁘고 그렇다고 아그니카가 보드윈을 데리고 사랑의 도피? 아니 이건 말도 안된다. 아그니카 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신중하고도 세심하며 현명한 전개가 필요한 가운데 맥길리스는 도통 묘책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가엘리오가 없어서일까? 가엘리오에겐 도저히 보일 수 없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가엘리오가 없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맥길리스의 삶을 구성하는 건 언제나 가엘리오다.
맥길리스는 지난 여행에서 사 온 태왕칠성기 비디오를 꺼냈다. 삭제된 코멘터리 분량만 보고 일을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그 비디오를 재생하는 순간, 맥길리스의 머릿속에 있던 가엘리오의 충고는 반의 반토막이 되어 남았다.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1화도 아니고 마지막화도 아니고 중간부분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게 새로웠다. 58화의 내용은 21화의 복선을 회수한 것이다. 21화의 주요 에피소드는 3화에서 시작하고 67화에서 끝난다. 바로 이어지는 68화는 아그니카를 둘러싼 세븐스타즈의 음모가 시작되는 편이니 앞으로 써야 할 소설 전개를 위해서도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아그니카 카이엘이 바알을 처음 몰고 출격하는 에피소드는 <일곱별이 나르샤>쪽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야망의 불꽃>에서 MCgilis가 탄 바알도 의외로 재현율은 높았지…….
가엘리오 몰래 숨겨둔 블루레이 박스를 꺼내, 처음엔 인상 깊었던 장면 한두 화만 봐야지, 했었지만 웬걸. 1화부터 100화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시청이 되고, 다른 파생작까지 보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임을 맥길리스가 예상하지 못한 점이 크나큰 실수이리라. 몇 번이고 같은 작품을 다시 보면 예전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보인다. 이 부분에선 음향 효과가, 이 부분에선 카메라의 연출이 좋았고 배우의 표정연기는 이런 쪽이 인상 깊다든가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맥길리스는 처음 보는 것처럼 작품들을 감상했다.
낮밤은 진작 바뀌었고,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 잠들기도 며칠. 그렇게 일주일을 텔레비전 앞 소파에서 앉은 채로 보내고서야 맥길리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하필이면 또 뉴스가 끝나고 시작한 광고가 문제였다.
‘슈퍼걀라르호른대전X, 당신은 지금, 건담을 탈 준비가 되었는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배경음은 야망의 불꽃에 나왔던 그것이었다. 노래만 들으면 역시 훌륭하기 짝이 없는 이 드라마는 몬타크 홀딩스의 모라토리움을 극복하기 위해 또 어딘가에 팔린 모양이었다. 맥길리스가 호기심에 검색해 보면 반다미남코에서 <일곱별이 나르샤>, <태왕칠성기>, <야망의 불꽃>, 후속작인 <라그나로크 : 걀라르호른 제7공화국> 같은 대하드라마뿐만 아니라 고증 문제로 대차게 욕을 먹었지만 판권이 전 콜로니로 팔린 <별들의 후예>, 통제국 소속 하사의 잠입 로맨스물인 <풀 메탈 아머>, 사관학교를 배경으로 한 전쟁드라마인 <세븐 시드 데스티니> 등 걀라르호른 관련 드라마의 판권을 모두 사들여 등장 캐릭터와 기체로 만든 게임이었다.
이런 게임은 뭐라고 하는 거지?
어느새 단말기에 게임을 다운받은 맥길리스는 차분히 튜토리얼을 시작했다. 어느 시공간에 함께 모이게 된 걀라르호른의 장교들이 원래의 시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쟁에 휩싸인 우주에 평화를 되찾기 위해 플레이어는 전투를 치러야 한다. 게임의 구성은 실험적이었다. 다른 시공간에 살며, 계급도 소속도 제각각인 인원들이 단지 같은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상이나마 모여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발상이다.
환상은 실존하지 않을 때만 빛을 낸다. 선망이 되기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충분히 미화되고 왜곡되어 포장되어 있었다. 마지막 숨을 쥐어짜냈던 뿔피리소리를 맥길리스는 기억하고 있다. 장엄하고 묵직한. 작은 휴대전화의 액정 안에서 빛나는 건 맥길리스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고철덩어리 그레이즈는 제법 괜찮은 색으로 빛났고 랜스를 휘두르면 어느 정도의 속도감도 느껴졌다. 낡은 깃발은 한 번도 지상에 내려온 적 없는 것처럼 펄럭였고 희고 푸르며 금실로 마무리 된 정갈한 제복은 새삼스럽게 맥길리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정작 맥길리스의 정복은 옷장 깊숙한 곳 어디에서 먼지 쌓여가고 있을 텐데도 그랬다.
튜토리얼이 끝나니 맥길리스의 격납고엔 10대의 기체가 롤아웃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일에 쌓인 기체들을 맥길리스는 떨리는 마음으로 벗겨나갔다. 런칭 기념 이벤트인 바알이 나올 확률은 1.85%. 고만고만한 그레이즈 리터나 맨로디, 초기 발큐리아 모델 같은 게 나오는 동안 실망과 실망을 반복하던 맥길리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마지막 황금색 베일을 벗겼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슈발베 그레이즈였다.
가엘리오와 맥길리스가 머리를 맞대고 그레이즈의 이런저런 점을 뜯어고쳐 각 경제권에 치안용으로 팔아먹으려 했던. 물론 이 대학 창업동아리 같은 발상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단순 치안용으로 사용하기엔 쓸데없이 고성능으로 비쌌고, 반응성이 너무나 뛰어난 덕에 일반 병사들이 운용하기 쉽지 않다는 게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과거의 쓰디쓴 실패담을 드라마 작가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친절하게 드라마에도 삽입했다. 당연히 맥길리스와 가엘리오의 동의는 없었다. 시험용으로 단 두 대를 만들어 좋아하는 색으로 도색하고 운용은 겨우 한두 번이나 한 채로 격납고에 처박혀 어디론가 사라진 그것들은 드라마에서는 꽤 멋지게 우주를 날고 있어서 그것만큼은 가엘리오도 마음에 들어 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바알보다야 못하지만, 보라색 슈발베 그레이즈는 괜찮은 성능을 갖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파일럿 뽑기에서도 맥길리스는 딱 하나의 황금색 가면을 얻었고, 그 안에는 가엘리오가 있었다.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가엘리오는 원래 슈발베 그레이즈의 조종사고, 이 게임은 기체에 꼭 맞는 파일럿을 탑승시키면 스킬이 발동된다. 하나뿐인 슈퍼 스페셜 레어 카드의 기체와 파일럿이 제자리를 찾는 일도 드무니 운은 나쁘지 않다.
『내게 맡기면 돼. 언제나 그랬듯이.』
분명 이 게임의 파일럿 모델은 드라마의 배우일 텐데도, 우아하게 굽어진 옆머리를 살짝 돌리면서 걀라르호른의 제복을 입고 흰 장갑을 낀 손을 흔드는 가엘리오는 퍽 진짜 같았다. 한 때 맥길리스는 그 제복이 가엘리오의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걀라르호른의 제복을 입는 게 정해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맥길리스는 또한 분명하게 걀라르호른의 해체식날 시원하게 웃고 있던 가엘리오도 기억하고 있었다. 가엘리오의 제복은 맥길리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롱 안에 처박혀 있을 것이고, 제복의 주인은 지금쯤 프랑스에서 농장의 작업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엘리오의 미래는 언제나 무한했고, 그것은 가엘리오에게 모두 잘 어울렸다. 걀라르호른이라는 이름에 얽매인 건 오히려 자신인지도 모른다.
맥길리스는 긴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가엘리오를 툭 건드렸다. 『부디 웃어주세요.』 낭랑한 가엘리오 – 역의 배우 – 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목소리도 썩 비슷해 정말 가엘리오가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맥길리스는 힘을 내어 다시 롤아웃 버튼을 눌렀다. 그럭저럭 쓸 만한 키마리스와 그림겔데의 카드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바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맥길리스!!!!!”
우편물을 확인한 가엘리오가 2층 창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결국 가엘리오가 없는 동안 마감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한 맥길리스는 아침부터 급하게 타자를 눌러야 하는 신세였다.
공항에 마중 가는 것도 잊어버려 간신히 청소기나 돌리다 집에 돌아온 가엘리오를 맞이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어찌나 엉망이었는지 맥길리스는 일주일 내내 대청소에 시달렸고, 이불을 밟고, 커튼을 빨았으며 그 뒤로도 소파 밑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팝콘이나 나초 조각 같은 것들로 잊을만하면 잔소리를 들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지 가엘리오의 목소리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이제 웬만하면 팝콘은 안 나올 때도 됐는데. 맥길리스가 제 죄도 모르는 채로 어깨를 움찔하는 사이,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맥길리스는 급하게 Ctrl+S를 누르고 노트북 전원을 끄는 대신 책을 펼쳤다. 하필이면 잡힌 책이 Life of Agunika라 가엘리오의 눈치를 보게 생겼으나 별 수 없었다. 어떤 걸로 혼이 나든 이 소설이 걸리는 것보단 나았다. 누구라도 본인 조상으로 이렇고저렇고…한 내용을 보는 것은 싫지 않겠는가. 맥길리스가 손에 잡히는 아무 페이지나 잡아 넘기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가엘리오.”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한 거야, 맥길리스?”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맥길리스가 돌아보면 인상을 잔뜩 쓰고 문 앞에 선 가엘리오는 바닥이 울리도록 맥길리스의 앞으로 와 들고 있던 종이를 탁, 소리가 내려놨다.
청소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안도한 맥길리스의 눈이 종이 위의 글자를 훑는다. 카드 명세서였다.
맥길리스가 생각하기에 전자 명세서를 보내주면서 굳이 종이로 된 명세서를 보내주는 카드사는 회계 감사를 해보면 분명 다른 쪽으로 돈이 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장부엔 카드명세서 발행에 필요한 원가로 기재하고 다른 데 비자금을 챙기는 거다. 흔한 수법이지. 맥길리스는 이 부정한 카드회사의 내부감사가 꼭 이뤄지길 바라면서, 그러나 지금 당장 고발을 할 수는 없기에 가엘리오 앞에서 “아…….”하고 침음을 흘렀다.
대문짝만하게 쓰인 이번 달 카드 결제액은 평소 맥길리스의 사용 금액을 두 배 정도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대체 이 ‘반다미남쿠’라는 건 뭐길래 카드값이, 얼마야 이게, 하나둘셋……. 120만 걀라나 썼잖아?”
가엘리오의 표정은 심각했다. 내가 네 사생활에 간섭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혹시 사행성 도박이라도 하는 거야, 맥길리스? 도박 중독은 고칠 수 있대. 지금이라도……. 심각한 표정으로 상담센터의 전화번호를 검색해보는 가엘리오가 당장이라도 맥길리스의 이름으로 상담 예약을 잡을 것 같아 맥길리스는 부랴부랴 이실직고했다. 아니. 이 경우엔 이실직시인가?
맥길리스가 휴대전화를 꺼내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면 ‘슈퍼걀라르호른대전X’라는 묵직한 성우의 음성과 함께 ‘오르펜즈~’,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너 설마 그 끔찍한…!”
가엘리오의 기겁한 얼굴이 마치 당장이라도 짐을 싸 프랑스로 날아갈 듯했다.
“아니야, 가엘리오. 내 말을 들어봐.”
『감사부 소속 무관으로서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할 거야.』 맥길리스가 가엘리오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사이 로딩을 마친 게임의 메인화면에선 메인 캐릭터로 설정해 둔 가엘리오의 고정 대사도 흘러나왔다. 더욱 더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가엘리오의 시선을 마주하며 맥길리스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설명하게 위해 노력했다. 스러진 역사는 어느 순간, 어느 시점에서 신화가 되곤 한다. 걀라르호른은 그 시점을 지나치게 빨리 맞이하여 상상력을 가미, 보편적인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빌어 나타나게 되었음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노라고. 맥길리스의 일장연설을 주욱 들으며 간신히 납득하는 듯했던 가엘리오는 가장 중요하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어디가 120만 걀라나 쏟을 부분인데?”
맥길리스의 격납고에는 SSR 키마리스도, SSR 키마리스 트루퍼도, 녹색의 그레이즈 리터와 맨로디, 푸른색의 슈발베 그레이즈와 검고 커다란 그레이즈도 있었으나 흰 색의 기체는 없었다. 가엘리오가 그걸 보면서도 그 어떤 이상함도, 혹은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 맥길리스는 답답해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 준 얘기는 모두 이해했지, 가엘리오?”
“응.”
“보상을 받으려면 내가 게임 속 전투에서 이겨야 해.”
“응.”
“이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카드가 필요해. 더 높은 공격력의 카드가.”
“그래.”
“그래서 새로운 카드를 뽑기 위해 롤아웃을 하는 거야.”
“그 전투에서 이기면 뭐가 좋은 건데?”
“보상을 얻을 수 있어.”
“보상이 뭔데?”
“새로운 카드.”
가엘리오는 열심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혀, 이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카드를 얻기 위해서 카드를 얻어야 한다는 논리의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가엘리오 앞에서 맥길리스는 롤아웃 창을 열었다.
차갑고 검은 우주에서 창백하고 푸르게 빛나는 바알 카드가 이번 이벤트 대상 카드였다. 성능적으로는 이번 목성 해적소탕 이벤트가 끝나는 동안 공격력이 두 배, 스킬발동확률이 17% 올라가고, 미적으로는 우주를 배경으로 고독하게 떠있는 바알의 비장한 모습이 고아하고 세련된 미를 내보이는 카드다. 120만 걀라, 580연을 돌리고도 아직도 맥길리스가 손에 넣지 못한, 바알.
“그으렇단 말이지.”
“너도 한번 해볼래?”
맥길리스는 휴대전화를 가엘리오 쪽으로 밀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훨씬 빠르다. 가엘리오가 여전히 미심쩍고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롤아웃 버튼을 누르면, 열 기의 기체들이 주르륵 뜬다. 황금색의 베일이 세 개. 설마설마 하면서도 맥길리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액정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네가 말한 게 이거야, 맥길리스?”
곰곰이 액정을 보던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게 휴대전화를 넘겼다. 눈을 비비고, 허벅지를 꼬집고, 혀를 깨물어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희고 푸른 날개, 금빛의 우아한 쌍검, 언밸런스하게 귀여운 이마의 뿔까지.
틀림없는, 바알이다.
120만하고도, 방금 전에 5만 걀라를 더 결제해 얻은 아그니카 카이엘의 무장기. 걀라르호른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 기체.
“가엘리오.”
“응?”
“너는 역시, 내 하나뿐인…….”
맥길리스는 감격에 겨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푸른 눈에 스펙트럼이 넓은 보라색 머리카락, 어느 옷이나 잘 어울리고 어느 것이나 될 수 있는 가엘리오가 있어야만 맥길리스는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그걸 나는 운명이라고 부르지, 가엘리오.
그러나 말은 아껴둬야 했다. 섣불리 무언가를 입 밖에 냈다가 일을 망치는 일은 신화에도, 민담에도, 속설로도 존재했다. 맥길리스는 말없이 가엘리오를 끌어안고 두 뺨에 키스한 다음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가엘리오가 돌아온 뒤로도 청소와 잔소리에 시달려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간지러워, 맥길리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면 아직도 햇볕 냄새가 났다. 바깥의, 아니 어쩌면 아주 약간, 프랑스의 태양일지도 모른다. 맥길리스는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처럼 갸릉댔다.
그 뒤로 맥길리스는 종종 가엘리오보다 일찍 일어났다. 가엘리오가 일어나기 전, 잠이 든 긴 손가락으로 롤아웃 버튼을 누르면 한정 이벤트 카드가 나오는 확률이 유난히 높았다. 반다미남쿠의 이름으로 나오는 카드 명세서의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으므로 가엘리오의 잔소리는 더 심해졌지만 맥길리스는 게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불행히도 아직 바알을 타야 할 아그니카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맥길리스 본인의 카드도 나오지 않아 바알은 제 짝을 찾지 못한 채 얌전히 격납고에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맥길리스는 일단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카드값이 궁해지니 막혀있던 원고도 어떻게든 써지기 시작했고, 하늘같은 이해심의 가엘리오는 마침내 ‘슈퍼걀라르호른대전X’를 깔았다.
“맥길리스 이거 좋은 건가?”
단지, 무료 다이아로만 카드를 뽑는 가엘리오가 과금 랭커인 맥길리스보다 좋은 카드를 갖고 있는 것만이 고통이었다. 맥길리스는 무과금으로 한 방에 이벤트 배수 카드를 뽑은 가엘리오의 계정과 방금 전 결제버튼을 누른 제 계정을 비교해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친우, 동료, 사랑, 운명, 그 무엇이 됐든 가엘리오의 SSR은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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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맥가엘
인어인 가에가 보고 싶어서 짧게 맥가엘 현대패러렐...누가 써줬으면 좋겠다
푸른 빛의 너울을 좇고 있노라면 긴 꼬리의 그림자가 시선 밖에서 스쳤다 사라졌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광원을 제외하곤 수족관은 칠흑이라 그 자체로 혹은 우주 같았고 간간히 비추는 빛은 그래서 각기 다른 별 같았다. 우리는 때때로 그 우주에서 아슬아슬한 시간을 즐겼다. 아름답게 유영하는 푸른 빛꼬리를 쫓아가면 그 곳에 네가 있었다. 지상에 발 붙이고도 우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자유분방함이 너였다. 그러나 방랑자의 고독은 네게 없었다. 네겐 언제나 돌아갈 대지가 있는 거 같았고 실제로 그러했으며 그렇기에 어디론가 사라져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거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했는가. 나에게 대지는 없었고 우주는 자유로웠지만 불안정함 그 자체였다. 간혹 나는 맨몸으로 우주 한복판에 내쳐질까 두려웠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너무나도 잘 아는 어둠이, 숨을 내쉬는 대로 그대로 내 육신을 얼어붙게 할 것이었고 부서지기 전까지 한낱 데브리가 되어 떠돌 비참함에 몸서리쳐지는 날이 있었다. 너는 그런 두려움 없이 용맹하게 우주를 누빈다. 사지가 달린 커다란 고철이 생명을 가진 것처럼 부드럽게 춤추며, 인어 같은 꼬리가――…
"――――"
끄으으으응, 하고 앓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바짝 마른 입을 입술로 억지로 축이며 맥길리스는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을 꺼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는 건 지옥이다. 기억도 안 나는 찝찝한 꿈을 꾸고 난 뒤엔 더더욱. 간밤에 보일러가 꺼진건가. 이불을 걷어내니 한기에 몸서리가 처진다. 역시 내게 규칙적인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아. 조금 더 게으른 인생을 살고 싶다. 회사를 차릴까. 아니 그것도 출근해야 되잖아. 역시 건물주가 좋겠어. 건물을 사자. 무의미한 소망을 되새기며 맥길리스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침이 싫었다. 일어나면 일상생활이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저혈압이라는 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아주 골을 때리는 게 영 기분이 더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지각을 한 적은 없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모범적인 현대 샐러리맨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누가 알기나 하나. 맥길리스는 정말 규칙적인 생활이 싫은 사람이었다. 취미가 뭐에요? 휴일엔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물으면 성심성의껏 독서와 클래식 감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제 완벽해보이는 인생과 얼굴에 어울리는 삶이 완성되니까. '아, 그렇구나 정말 그러실 거 같아요.' 하는 상대방의 대답에 맥길리스는 '취미는 프라 조립이고, 특기는 집에서 빈둥대는 겁니다.' 같은 대답을 목구멍으로 욱여넣고 그저 웃곤 했다.
그러고 보면 프라, 안 한 지 오래됐다.
맥길리스는 방구석에 쌓인 초합금 티타늄 바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달 전 예약 걸어놓은 게 드디어 배송왔는데 일이 바빠 뽀얗게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연말이라 처리할 일은 산더미고 매일같이 회식에 그렇다고 해서 휴일까지 반납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최근엔 그 외에도 할 일이 생겨서 도저히 개인적으로 뒹굴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원흉은 이 문 너머에 있다. 맥길리스는 무겁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눈꺼풀을 손으로 비비며 욕실의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맥길리스!"
어두컴컴한 욕실에서 아침은 대체 어떻게 알아채는 거지. 형광등을 켜면 물에 젖은 푸른 비늘이 반짝였다. 매일 아침 보는 광경이지만 매일마다 비현실적이라 맥길리스는 간혹 이게 꿈인가 생각하고, 그 다음엔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엔 좋아서 물을 찰박대는, 찰박대다 못해 펑펑 튕겨내서 얼굴에 기분나쁘게 끼얹어지는 물방울에 역시 현실이구나 생각하며 칫솔을 입에 문다.
"매일 아침 건강하구나, 가엘리오."
칫솔을 입에 물고 웅얼대는 맥길리스를 보며 가엘리오는 튼튼한 이를 드러내며 미소짓는다. 저게 '사람'이라면 꽤나 호감가는 모양새일 것이다. 오묘하게 빛나는 푸른 머리카락, 어떻게 관리되는 건지 탱글탱글한 옆머리, 제 얼굴만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준수한 외모에 늘 쾌활하고 붙임성도 좋다. 맥길리스는 양치질을 하면서 멍하니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첫만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지만 맥길리스는 우주와 바다에 약했다. 공포증, 이라고 전문적인 진단을 내릴 수준은 아니지만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끝도 없는 우주나 바닥 없는 심해를 생각하면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할 수 없어 외계생명체가 나오는 영화는 질색이었다. 인류는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생명체가 아니란 말야. 불퉁한 소리를 내뱉으면 옆에서 가엘리오가 "응? 뭐라 그랬어?" 하고 묻는다.
"아무것도 아냐."
동물도 싫고 식물도 싫고 인간도 싫고 친구라면 플라스틱 로봇이면 족한데 왜 제 옆엔 인간이 아닌 생명체가 있는 걸까요.
맥길리스는 거울 너머로 아침부터 힘이 넘치는 가엘리오를 본다. 얼굴은 사람이다. 긴 목과 제법 근육이 있는 각 잡힌 어깨와 가슴, 허리, 여기까지도 사람이다. 그에게도 심장은 있고 목에 아가미는 없다. 그렇지만 허리, 허리를 넘어가면 거기서부턴 기묘한 형태가 된다. 어느 부분을 경계로 부드러운 피부는 단단한 낱개의 비늘이 된다. 그가 사람이라면 필시 그 상체와 같이 탄탄한 근육으로 짜여져있을 다리 대신 길고 푸른 꼬리가 있다. 그 유명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인어랑 정말 똑같다. 그렇다. 그는 인어였다. 인어. 위는 사람, 밑은 물고기. 인외 생명체 주제에 인간의 인지범위 내에 있는 형체라는 점에서 맥길리스는 그게 제 환각이 아닐까 의심했다.
좀 더 물고기처럼 생겨야 되는 거 아냐? 인어가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부터 너무 인간친화적이잖아.
그러나 그는 환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욕실 바닥에 널린 세면대의 파편을 보며 맥길리스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는지 모른다.
"안녕."
그 쾌활한 목소리에 결국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말았다. 맥길리스와 비슷한, 아니 더 큰가?, 덩치에 하다못해 예쁜 여자라면 그럭저럭 로맨스 판타지를 생각할 수라도 있지. 그는, 아마도, 남자였다. 염색체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인류의 보편적인 외형을 생각해본다면 일단은 남자가 분명했다. 사람 말도 했고, 이름도 말했다. 가엘리오.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오늘도 출근해 맥길리스?"
"응."
"언제 돌아와?"
"글쎄. 해지고, 다섯시간 더 지나서."
"오늘도 늦게 오는구나, 맥길리스."
힘차게 찰박대던 꼬리가 조금은 힘없이 흔들리는 것같기도 했지만 맥길리스는 그것을 무시하고 쉐이빙크림을 씻어냈다. 첫만남. 해산물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회식으로 조개찜을 먹은 것부터 잘못됐다. 구색 맞추려고 억지로 먹은 커다란 대합에 무언가 씹혀서 봤더니 진주였다. 제법 큰 거라 '혹시 이거 팔 수 있지 않을까?'하고 주머니에 쑤셔넣고 온 것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일단 세면대에 담가놓은 것도 잘못됐다. 무언가 와장창하고 박살나는 커다란 소리에 숙취에 댕댕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더니 진주 대신 맥길리스만한 사람, 아니 인어가 나타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내다버렸을 것이다. 욕조 밖을 나갈 수 없는 가엘리오 덕분에 2주가 지난 지금도 맥길리스의 욕실엔 세면대가 없었다. 아. 그래. 진짜 저게 다 원흉이지. 불편한 샤워, 먼지 쌓인 프라박스, 추워 죽겠는데 주말마다 욕실에서 가엘리오와 놀아줘야 되고 바닷물의 염도를 맞추기 위해 소금을 몇 킬로나 사고 - 설마 중학교 수학에서 염도 맞추는 문제가 그렇게나 나오던 이유는 언젠가 나타날 인어를 위한 것이었을까? - 언제 고칠지 모르는 세면대의 수리비도 꽤나 들 것이다. 식비. 그래, 식비도 있다. 가엘리오는 꽤 대식가다. 생선을 냠냠 먹는다. 보고 있노라면 흉물스럽기 그지 없어 그의 식사시간은 되도록 방해하지 않지만 바다와 관련된 전반이 싫은 맥길리스는 생물고등어나 갈치를 사오는 것만도 곤욕이다.
"확 실험실에 넘겨버릴까."
"거기 가면 맥길리스랑 같이 있을 수 있어?"
생선의 종류라면 기가 막히게 알아 맞히지만 인간생활에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인어인 가엘리오는 아무것도 모른다. 글쎄. 거기 가면 커다란 수조에 들어가서 헤엄치게 될까? 맥길리스는 아쿠아리움의 고래를 생각한다. 긴 원통형의 수조 속에서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벨루가, 기껏해야 농구장만한 크기의 물 속에서 뱅뱅 돌기만 하는 상어. 분명 간신히 몸이나 담그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이 욕조보단 넓겠지만 일단 가엘리오가 실험실에 넘어간다면 그 전에 짐작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 세상은 위험하다고 그랬대며. 사실은 위험한 데가 맞아."
"그럼 그 말은 농담이겠네. 맥길리스는 날 위험하게 하지 않을테니까."
"나를 언제 봤다고 그렇게 믿어?"
"지지난주?"
"넌 2주 만난 사람을 어떻게 믿지?"
"하지만 맥길리스는 나한테 욕조도 내줬고 쉬는 날엔 나랑 놀아주잖아."
아냐? 반문하는 맑은 푸른 눈에 맥길리스는 말문이 막힌다. 순진하고 사람을 너무 잘 믿는 도련님 같으니라고. 속으로 궁시렁대지만 이런 종류의 절대적인 믿음은 뭐랄까…….
"그래도 너무 믿지는 마."
맥길리스는 걸터앉아 있던 욕조에서 일어나 욕실 밖으로 나갔다. 매일 기를 쓰고 일찍 일어나도 가엘리오와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서 매일 아슬아슬하게 집에서 나가게 된다. 잘 다려진 셔츠, 슈트, 코트를 걸치고 맥길리스는 욕실의 불을 끈다. 심해의 저온과 어둠에 익숙한 가엘리오는 오히려 추운 겨울 기후와 어두운 욕실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가엘리오의 고향은 어느 깊은 바다라고 했지만 대합의 원산지를 고려하면 그렇게 한류도 아닐 것이다. 바다의 기온이 아무리 낮아도 건조한 영하의 기온만큼 추울 수 있을까?
"다녀올게."
"다녀와, 맥길리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비늘의 끝머리가 문득 오늘의 꿈과 겹친다. 어둠을 가르는 커다란 빛무리. 우주를 유영하는 아름다운― 뭐였더라? 그냥 나가려다가 결국 욕실 안으로 들어가 한 번 머리를 쓰다듬고 만다. 착한 애완동물처럼 가엘리오는 머리를 한껏 맥길리스의 손에 비빈다. "정말로, 간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몸이 단순히 출근하기 싫어서인지 어쩐지 모르는 채로 맥길리스는 추운 겨울 밖으로 나섰다. 출근해서 돈 벌어야지. 돈 벌어서 건물을 사야겠다. 지하에 커다란 수영장이 있는 주택을. 바다만큼은 못해도 수족관보다 훨씬 큰 수영장이 있는 집을 사면 가엘리오도 조금은 자유로울지 모른다. 최소 실험실보단 낫겠지.
그렇게 마음 먹고, 통장을 스치는 월급에 절망했던 맥길리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맥길리스, 어서와!"
가엘리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앞에. 문… 앞에, 서 있…?
맥길리스보다 살짝 높은 눈높이로, 목, 어깨, 허리, 다리와…… "가엘리오." 맥길리스는 긴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응 맥길리스! 어때? 괜찮아? 맥길리스는 위에서 봐도 잘생겼구나!" 같은 말을 재잘대는 가엘리오의 어깨를 잡으며 맥길리스는 입을 열었다.
"일단, 옷을 입자."
가엘리오는 서 있었다. 푸른 빛을 반사하는 비늘 달린 긴 꼬리가 아니라 다리로, 나체로.
*
퇴근하자마자 졸지에 남의 나체부터 보게 된 맥길리스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가엘리오에게 난데없이 다리가 생긴 것도 모자라, 가엘리오는 그 다리로 어떻게 서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다리를 움직이는 법을 몰랐다. 고장난 로봇처럼 어기적대며 한발자국씩 떼다 끝내 바닥에 엎어지다시피 주저 앉는 가엘리오를 질질 끌고 방까지 데려가 긴다리를 구부리고 펴고, 뜯지 않은 새 속옷과 제가 입던 바지를 입혀놓고 나니 한겨울에도 땀이 날 지경이었다.
"불편해애애애."
애처럼 말을 질질 끌며 불퉁한 표정을 하는 가엘리오는 다리를 꿈지럭대긴 했지만 맥길리스의 탈진한 얼굴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새삼 주변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었다. 놀라고 덥고 거치적거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코트와 슈트재킷에 주름이 간 것도 그렇고 걸리적거리게 긴 다리가 구부려지지도 않고 쭉 뻗어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도 그랬다. 그제야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의 다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가엘리오?"
긴 다리는 맥길리스의 생각보다 훨씬 길고 유연해보였다. 적당히 근육이 붙어있어 탄탄했고 맥길리스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발도 그러했다. 모난 데 없이 매끄러운 다리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꾹꾹 눌러대면 가엘리오가 간지러운 듯 무릎을 움찔거리다 묻는다.
"맘에 들어 맥길리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잖아, 가엘리오. 설마 처음부터 다리가 있었던 건 아니고."
가엘리오의 꼬리는 맥길리스가 확인해봤다. 설마 특수분장인가 싶어서 허리부터 비늘이 난 부분을 몇번이고 문지르고 손가락으로 찔러보기도 했다. 진짜 생선비늘처럼 매끄럽고 기이했으며 누르면 인간의 체온보다 차갑고 인간의 근육보다 더 물렁하게 들어가는 그 꼬리가 분장일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만지고 난 후엔 손바닥에 남은 기묘한 촉감과 어디선가 희미하게 나는 것 같은 비린내에 맥길리스는 실례되지만, 만진 후엔 손을 박박 씻기도 했다. 소름끼치도록 낯선 그것을 맥길리스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 제 손바닥에 와닿는 건 인간의 피부, 인간의 근육이었다. 체온만큼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래도 전보단 훨씬 따뜻했다.
"정말…사람 같네."
"그렇지?"
칭찬으로 알아들은 건지 가엘리오는 퍽 뿌듯한 표정이다. 이리저리 제 다리를 돌리고 뻗고 발목울 돌렸다가 구부렸다가 하는 게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리고 묻는 말엔 회피하고.' 맥길리스는 여전히 매서운 눈초리로 보고 있으나 다른 행동을 하는 가엘리오는 정말 모르는 건지.
그럴 리는 없다.
맥길리스가 보기에 가엘리오는 머리가 꽤 좋은 편이었다. 어떤 마술인지 몰라도 그들의 대화는 처음부터 가능했다. "왜일까? 나는 처음부터 인간의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어." 가엘리오의 말을 생각해 보면 인어 중에서도 인간과 의사소통이 되는 건 극히 드문 부류일 것이다. 아니면 유일한. "그래서 가끔 해안가에 놀러 나오기도 하고. 인간한테 걸리면 큰일난다고 엄청 혼났지만 그래도 재밌는걸." 그래서 의사소통의 기본이 되는 제스처나 대화의 흐름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했다. 파도에 묻어오는 소리의 편린들을 엮어 상식을 만들었다. 언어만 안다고 해서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니 어떤 눈치와 문맥의 흐름을 읽는 건 분명 가엘리오의 영민함 덕이었다. 그러니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묻는 말에 꾸준히 회피할 것이고, 끊임없이 물어본다면 아마 대답은 해주겠지만
'그렇게까지 뭘 물어봐야 되는 사이는 아니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일단 이 어지러진 방을 치워야 되고, 이 커다란 인어가 욕실 밖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어떻게든 해야하고
"우와와앗!"
가엘리오의 비명과 함께 쾅-, 쿵-, 쨍그랑-, 뚜둑- 같은 소음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다 훅 그쳐버리고 말았다. 가엘리오가 서툰 다리로 또 한번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미끄러진 게 분명했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있던 컵이 어느 새 바닥에 떨어져 유리조각들이 비산해 있었고 그 위로 흩날린 서류들,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가엘리오와 테이블 밑에 있던 MG 바알 초합금 티타늄 박스가 구겨져…….
맥길리스의 사고는 거기에서 뚝- 하고 멈춰버렸다. 아무리 바빠 좀 내버려두긴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됐다. 마지막에 들린 뚜둑- 소리가 너무나도 불길하기 짝이 없어 맥길리스는 호흡이 가빠졌다가, 얼굴이 새하얘졌다가 새빨개졌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가 간신히 숨이 트이고, 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가엘리오―!"
작은 방에 머리를 쥐어싸맨 두 사람의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나란히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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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리퀘박스 여덟 번째
'맥가엘로 가엘리오의 홍차 테스터가 되어주는 맥길리스가 보고싶습니다. 맥길리스 입맛에 맞는 홍차를 찾아주기 위한 가엘리오의 눈물겨운 애정우정신뢰에 기반한 맛의세계로 떠나는 모험을...'
부제는 가엘리오와 비밀의 홍차공장 정도로...짧습니다.
"음, 이 정도면 적당할까."
가엘리오는 신중하게 모래시계를 보며 티팟을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가향차는 꽃의 단 냄새가 났다. 맥길리스는 이런 차를 좋아한다. 아마도. 이것저것 시험해봤다. 처음엔 클래식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아삼, 다즐링, 얼그레이. 개중에서 반응이 좋았던 건 얼그레이였다. 거기에서 향이 강한 걸로, 다시 맛이 강한 것으로 옮겨갔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브랜드의 전부 사들였다. 알록달록한 틴케이스가 가엘리오의 기숙사 방에 쌓여갔다. 가엘리오는 사실 그런 종류의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맥길리스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주말에 집에 들고 가 부엌 찬장에 쌓아두었다. 차를 쌓아두다 보니 어느 덧 상미기한이 아슬아슬해져 사용인들은 시럽을 만든다 밀크티를 끓인다, 이제 그만 좀 사라고 야단법석이었지만 거기까진 가엘리오가 알 바 아니었다. 3g의 찻잎, 섭씨 70도의 따뜻한 물, 아름다운 티세트, 그것들을 정성스럽게 다루면서 가엘리오는 마치 연금술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혹은 아름다운 공주를 위한 궁극의 진상품을 찾는 광대라든가.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공주, 맥길리스는 호불호를 표현하는 반응이 굉장히 약한 사람이었다. 기호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알아채기는 힘들었다. 맥길리스는 손님인 주제에 제 취향을 주장하는 뻔뻔함은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가엘리오가 그의 반응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면밀한 탐구가 필요했다. 언제나 조각같은 미소 속에서 단 하나의 진짜를 찾아내야 했다. 입술의 움직임, 입꼬리의 각도, 미세한 얼굴근육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노라면 어쩐지 스토커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좋아할 만한 차를 찾고 싶었다. 같은 차를 마시고 그가 좋아하는 세계를 공유하고 싶었다. 또는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의 세계를 공유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너무 과분한 욕망인가?
"어때?"
"괜찮아."
음. 실패구나.
맥길리스는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는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었다면 살짝이나마 느슨해지는 눈썹 부근의 근육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가엘리오는 쓴웃음을 삼키며 결국 둘 중 누구의 취향도 아니게 된 차를 음미했다. 시트러스와 베르가못의 향기가 나는 차는 생각보다 달지는 않았다. 지난번 시트러스 계의 다른 차는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이었던 걸 고려하면 꽃향기는 너무 강했을지도 모른다. 가엘리오는 마음 속의 체크리스트에서 베르가못 위에 가위표를 그어두었다. 다음엔 과일차를 선택해보자. 어느 게 좋을까. 망고?
"그나저나 이제 슬슬 더워지는걸."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민에 빠져 있던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도 느슨하게 해두고 셔츠 단추를 두어개쯤 풀어헤친 맥길리스는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의 따가운 햇빛 속에서 긴 금색의 속눈썹이 자꾸만 깜박이며 빛을 반사했다. 내비치는 쇄골 위의 흰 피부에는 어렴풋이 땀방울 맺혀있는 듯도 했다. 그러고 보니 계절은 어느 새 이렇게 더워졌다. 요즘은 날씨가 좋아졌다고, 저는 셔츠 소매를 둘둘 말아 팔꿈치까지 걷어붙여두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차가운 차가 필요한 날씨였다.
늦은 깨달음이었다. 강의동이 있는 건물엔 최신 자동공조장치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인적 드문 구관은 일정 기온 이상에서만 최적 온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아직 냉방장치가 돌지 않고 있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인데다 인적이 드물어 오히려 다른 쪽보다 기온이 낮았기에 가엘리오는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맥길리스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게다가 가엘리오는 원래 한여름에도 뜨거운 차를 마시는 쪽이었지만 맥길리스는 아니었겠지. 맥길리스가 들고 있는 오래된 책의 책장도 거의 넘어가지 않고 열린 창문으로는 간간히 후덥지근한 미풍만 들어올 뿐, 미적지근하게 고인 열기에서 뜨거운 차는 마실만 한 게 못됐다.
"아, 미안. 역시 뜨거운 차는 힘든 거구나."
"아니, 그건 아닌데."
입으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맥길리스는 아까의 한 모금 이외에는 목을 축일 용도로도 찻잔을 들지 않았다. 맑은 수색의 찻물을 아깝게 바라보며 가엘리오는 자신의 불찰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냉침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급랭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이 도서실엔 냉장고나 얼음,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당연하지. 도서실이니까. 물 이외의 음료는 반입금지인 것을 가엘리오가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하나씩 가져다 둔 것이다.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일 땐 쌀쌀한 계절이었으니 차를 같이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기포트, 그냥 컵으로는 아쉬워 티세트, 자주 마시는 차의 틴케이스도 이 곳에 있었고 그 시절에 가져다 둔 담요도 아직 이 곳에 있었다. 날이 따뜻해질 무렵엔 맥길리스가 끼어들어 방과 후엔 같이 이 곳에서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으나 원래는 가엘리오 혼자만의 아지트 삼아 있던 곳이다. 어느 새 사유지화 된 도서실을 바라보며 '이건 안 되나?'하고 가엘리오는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복도 끝에 있는 자판기에 생각이 미친 건 그 때였다.
"아. 밖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하나 뽑아올게."
가엘리오는 날렵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예의상 아니라고 말할 맥길리스가 소파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가엘리오를 올려다 보고 있는 것을 보니 시원한 음료가 필요한 게 확실했다.
"어느 게 좋아? 나는 잘 몰라서."
인공적인 단맛이 입에 끈적하게 남는 게 싫어 가엘리오는 시판되는 음료를 사먹어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탄산수 정도. 하지만 맥길리스는 탄산수는 싫어한다. 그 미묘한 맛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나도 잘 몰라. 아무거나 부탁해, 가엘리오."
한참의 침묵 후에 맥길리스는 그렇게 답했다. 하긴, 맥길리스도 자판기 음료는 잘 안 먹지. 이상하게 그런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시판되는 음료는 집에서도 마셔보지 않았고 제 돈 주고 사먹어 본 적도 없었다. 가엘리오에겐 첫 음료수인 셈이었다. 첫 도전이라는 타이틀이 새삼 두근거려 가엘리오는 냉큼 저 복도 끝으로 달려가 처음 이용하는 자판기 앞에 섰다.
이 커다란 기게의 사용법은 알고 있다. 인식기기에 학생증을 가져다대고 원하는 품목의 버튼을 누르면 된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음료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유맛, 복숭아맛, 그냥 사이다, 콜라, 이건 탄산인지 아닌지…….
빨리 버튼을 누르라고 깜박이는 버튼들 앞에서 괜스레 초조해지는 마음에 쿵쾅대는 심장을 누르고 가엘리오는 황급히 메뉴들을 훑었다. 아이스티……. 이건가?
덜컥 버튼을 연달아 두 번 누르니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캔 두 개가 나온다. 일단 차가워서 합격점이었지만 맛은 도무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엘리오는 두 개의 캔을 껴안고 다시 도서실로 달려갔다. 그 사이 맥길리스는 완전히 소파에 기대어 늘어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눈꺼풀이 정말 곧 잠이라도 들 것 같았다.
"이거 어때?"
가엘리오가 노란 캔을 내미니 맥길리스가 받아들면서 무심코 말한다.
"너는 진짜 홍차를 좋아하는 구나."
"어? 어… 그런가?"
"고마워, 잘 마실게."
"이거 맛있는 거야?"
"글쎄. 안 마셔 본 거니까."
맥길리스의 옆에 나란히 앉아 캔을 딴다.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선뜻 입에 대기가 묘해 머뭇거리는 찰나 맥길리스가 과감히 음료수를 입에 털어넣는다.
세상에. 가엘리오는 드디어 답을 찾았다. 아주 의도치 않게.
맥길리스의 옆모습을 관찰하며 가엘리오도 음료를 한 모금 입에 물었지만 슬프게도, 가엘리오의 취향은 아니었다. 아이스티라고 쓰여 있었지만 홍차라기엔 너무 달았고 끈적거렸으며 어쩐지 텁텁한 맛이 났다. 하지만 맥길리스는 아닌 거겠지. 가엘리오는 테이블 위에 줄지 않고 남아 있는 다 식은 홍차와 제 손에 들린 캔을 보았다.
"어때?"
"괜찮아."
아까와 같은 대답이었지만 반응은 전혀 달랐다. 만족스러운 듯 느슨하게 풀어진 맥길리스의 미간과 눈매가 아름다웠다. 어쩐지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무해 가엘리오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맥길리스의 취향인 것이다. 가엘리오는 머릿속의 체크리스트에서 모든 항목을 전부 그어버린 다음 커다랗게 적었다.
노란색 아이스티.
「가엘리오, 준비는 다 됐어? 화성까진 3개월 정도 걸릴 거야.」
"알고 있어, 맥길리스. 너야말로 집이 그립다고 울지나 말라고."
가엘리오는 트렁크에 제복과 속옷들을 던져 넣으며 통신을 계속했다. 여분의 셔츠, 생활복, 찻잎도 다 챙겨 넣었다.
"아 맞다."
「거봐. 잊어버린 게 있지?」
맥길리스가 그거 보라는듯 코웃음치며 가엘리오를 비웃는다.
"아니거든? 다 챙겼어. 내일 봐."
「그럼 내일.」
가엘리오는 선반 위에 올라가 있던 노란 통을 잘 밀봉한 뒤 트렁크에 집어 넣었다. 맥길리스는 이 차를 가장 좋아한다. 가엘리오의 기준에선 차라고 말하기엔 미묘할 정도인 달고 신 인스턴트 아이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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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새가 말했다 01
제목은 아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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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소년 가엘리오는 정원의 티테이블에 턱을 괴고 불퉁하게 앉아 있었다. 카르타가 맥길리스를 끌고 간 지 벌써 30분은 된 것 같았다. 두 사람 몫의 차는 다 식었고 가엘리오의 잔은 깨끗이 빈 지 오래였다. 뜨거웠던 스콘도 이제는 버터를 올려도 녹지 않을 지경이 되었고, 직전까지 정면으로 들이치던 햇빛은 어느새 옆으로 비껴나 커다란 가문비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었다. 태양의 직접적인 온기를 잃은 바람은 쌀쌀해서 가엘리오는 트레이 밑 칸에 놓여있던 담요를 꺼내고야 말았다. 그 담요는 아주 커서 두르면 어린애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쓸쓸하게 빈 양 옆의 의자를 번갈아 보다 가엘리오는 고개를 돌린다. 카르타와 맥길리스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다. 저 끝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밑이다. 어제 맥길리스가 오지 않은 사이 토끼가 파놓은 굴을 발견했고 카르타는 아마 그것을 보여주려고 맥길리스가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그를 끌 고 간 것이다. 가엘리오의 눈앞에서.
가엘리오는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콘은 따뜻할 때 버터를 녹여 먹는 게 좋다. 찻잎은 오래 우러나면 떫은 맛이 강해지고 본래의 엷은 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오늘은 체리가 들어간 가향차였다. 그 엷고 부드러운 단 맛은 마시지 않아도 애저녁에 사라졌을 게 뻔했다. 바닥에서 춤추는 가문비나무 잎의 그림자가 증명하듯 테이블에 적당한 햇볕이 드는 시각도 이미 지나버렸다. 곧 있으면 명백하게 해는 지평선과 맞닿을 것이다.
오늘의 티타임은 명백하게 가엘리오가 주인이었고 그들은 손님이었다. 그런데 주인을 바람맞히고 손님들이 휑하니 사라져버리다니!
코끝이 알싸하게 매워지고 눈이 따뜻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게나 억울하면 같이 가서 놀면 될 텐데 가엘리오는 오기로 꿋꿋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가엘리오는 내일이면 아홉 살이었다. 아홉 살의 가엘리오 보드윈은 여덟 살과는 조금 달라야 했다. 매사에 침착하고, 아버지처럼 우아하게 대처하고 유능하게 상황을 이끌어나가야 하며 하찮고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호스트로서의 품위와 예의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어른스럽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싶었던 가엘리오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그의 짧은 다리는 의자 위에서 점점 난폭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전부 카르타 탓이다. 예의 없는 카르타! 남의 집에 놀러 와서 아는 체도 하지 않는 카르타 때문이다. 조심성 없는 카르타! 예쁜 치마가 좋다고 새 옷을 입고 와놓고 잔뜩 흙놀이를 한 다음 더럽혀졌다며 가엘리오 탓을 하는 카르타 때문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카르타! 가엘리오에게 이것저것 시켜놓고 원하는 걸 갖지 못하면 생떼를 부리는 카르타 때문이다.
가엘리오는 고개를 숙이고 매끄러운 담요의 끝자락을 움켜쥐어 조금 더 몸 위로 끌어당겼다. 예의 없고, 조심성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카르타, 가엘리오보다 세 살 많은 카르타는 맥길리스를 좋아한다. 가엘리오는 그것을 카르타보다 더 먼저 알았다. 카르타는 가엘리오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맥길리스에겐 친절했다. 그녀의 얼마 안되는 호의와 친절이 맥길리스에게 무시당하자 이내 본성을 드러냈지만 그래도 가엘리오에게 대하는 것보단 천 배쯤은 친절했다. 좋아한다는 건 아마 상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더 잘해주고 싶은 거고?
‘그렇지만 왜 카르타는 화를 냈다가 싫은 소리를 했다가 잘해주는 걸까.’
그것은 언제나 가엘리오의 수수께끼였다. 오늘도 그렇다. 아침부터 가엘리오의 방에 들이닥쳐서 맥길리스가 언제 올지,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면서도 카르타는 맥길리스는 예쁘지만 품행이 나쁘고, 거만하고, 그렇지만 책을 잘 읽고 머리가 좋다는 험담과 칭찬을 번갈아 했고, 한 시간이 지나도 맥길리스가 오지 않자 ? 당연하지! 맥길리스는 오후 두 시에 오겠다고 했는데 카르타가 온 건 오전 열 시였으니까! - 복도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보드윈 저택에 깔린 양탄자의 갯수를 세어볼 것처럼돌아다니던 카르타는 그것도 질렸는지 가엘리오가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 곰인형에게 못생겼다고 말한 다음 가엘리오가 조립 블록으로 만든 성이 예쁘지 않다고 멋대로 뜯어고치고 가엘리오의 머리가 길었다며 자르는 게 좋겠다고 가위를 들고 쫓아다녔다. 가엘리오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도망칠 즈음에야 맥길리스가 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타는 위협하듯 찰캉거리던 가위를 내던지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 이제야 오다니. 나를 기다리게 한 사람은 누구도 용서할 수 없어.”
카르타는 비장하게 일요일 아침 8시마다 방영되는 아동 드라마의 악당 같은 대사를 말하고는 거울을 보며 묶은 게 맘에 들지 않는다, 오늘은 입술색이 예쁘지 않은 것 같다, 가엘리오의 방에서 부산스럽게도 난리를 피우다가 새침하니 나갔다가, 또 혼자 나가긴 쑥스러웠는지 버럭 소리쳤다. “빨리 나와! 너 때문에 늦었잖아!”
가엘리오도 아직은 맥길리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게 부끄러웠으니 거절하지 않고 같이는 나갔다만 카르타는 맥길리스를 보자마자 대뜸 늦었다고 화를 내다가 잘 왔다고 환대하고 - 여긴 우리 집인데? 가엘리오는 입술을 삐죽였다 -, 앞뒤가 맞는 게 하나도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한텐 뭐든지 잘 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가엘리오는 카르타를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것이 카르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방식이다. 가엘리오는 코를 훌쩍이며 담요를 더욱 바짝 여몄다. 찬바람이 더욱 쓸쓸해졌다.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내버려둔 채 맥길리스의 손을 잡고 쌩하니 가버린 건 가엘리오를 따돌리려고 했던 게 아니다. 카르타는 나쁘지 않다. 그냥 가엘리오와 같이 발견했으니 가엘리오에겐 더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맥길리스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미처 가엘리오는 신경 쓰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애랑은 매일매일 같이 있고 싶고 대화도 많이 하고 싶고……, 이해는 하지만!
“나도 친해지고 싶은데에, …….”
가엘리오는 결국 어른스러워지기를 포기하고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자세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지금은 춥고, 아홉 살은 내일이니까 오늘까진 이래도 괜찮겠지. 옆머리를 배배 꼬며 테이블에 뺨을 납작 붙인 가엘리오는, 다시 일어나 다 식은 스콘을 입에 밀어 넣고 꼭꼭 씹은 다음, 도로 엎어졌다.
지금이라도 카르타를 쫓아가 차를 다시 내올테니 돌아오라고 할까. 그렇지만 흥이 식은 카르타는 테이블 밑에서 가엘리오의 정강이를 퍽퍽 차댈 게 분명했다. 맥길리스는, 평소처럼 무관심하게 앉아서 한마디도 하지 않겠지.
그것을 생각하니 가엘리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쓸쓸하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끝이 차갑고 텅 빈 기분이었다. 뜨거운 눈시울을 자꾸 찡긋거리고 있으면 테이블 모서리에 닿은 가슴팍에선 자꾸만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어제 저녁에 고르고 고른 색종이로 모양을 내고 꽃을 자르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를 붙인 생일 파티 초대장이었다. 맥길리스에게 줄 초대장에는 특별히 꽃과 나비에 더해서 푸른 깃털이 아름다운 새를 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채도 높은 선명한 코발트블루에 눈 주변과 아랫부리 안쪽이 진한 개나리색인 그 새를,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자주 보는 조류 도감에서 처음 보았다.
“예쁘다.”
맥길리스의 어깨 너머로 그가 읽는 책을 흘끔대던 가엘리오는 무심코 감탄사를 뱉고야 말았다. 얼마나 예쁘고 깊은 파란색이던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자연에서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훌륭하게 예쁜 파란색을 가진 커다란 새가 두꺼운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그려져 있었다. 가엘리오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않던 맥길리스는 그 소리에 힐끔 가엘리오를 돌아보았다. 볼썽사납게도, 가엘리오는 목을 쭉 빼고 그림을 보느라 냉담한 눈동자가 가만히 저를 오래도록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시선은 온통 그 커다란 새를 향해 있었다. 맥길리스의 얇고 마른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다 한참 후에 형태를 갖고 움직였다.
“보실래요?”
가엘리오는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돌려 맥길리스를 보았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맥길리스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긴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꺼풀이 한 번 약하게 움찔했다. 가엘리오는 처음엔 맥길리스가 제게 말을 했다는 것도 몰랐다. 한참을 두리번대고, 말없이 책을 옆으로 내밀어주는 맥길리스의 자세를 보고서야 가엘리오는 방금 전의 소리가 저를 향한 말이며, 제게 건네는 제안이었고 맥길리스가 제 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응!”
가엘리오는 꾸물꾸물 무릎으로 기어 맥길리스의 옆에 앉았다.
Hyacinth Macaw. 맥길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책에 쓰인 새의 이름을 읽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는 약 3.3피트. 다른 앵무보다 크고, 금강 앵무 중에서는 가장 큰 종이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읽어주는 내용보다 그의 목소리에, 옆에 닿는 체온들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맥길리스의 어깨는 따듯했고, 머리카락은 가엘리오의 코끝에서 금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는 조용하고 느리고 목울대 어딘가에서 아주 깊이 울려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되게 친한 것 같다.”
그 말은 아마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거란 사실을 가엘리오는 금세 깨닫는다. 낮은 목소리로 푸른 새에 대한 설명을 천천히 읽던 맥길리스가 침묵해, 바람이 잔디와 우거진 나뭇잎을 쓸어내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자 가엘리오는 까닭 없이 적막이 무서워 숫제 울 것 같았다.
“왜, 맥길리스. 계속 얘기해 줘.”
그러나 무엇이 그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소년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 사실 맥길리스 본인도 이유를 모르기에 가엘리오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평생 알 수 없었다 – 맥길리스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떠났다. 가엘리오의 곁에 남은 것은 푸르고 큰 앵무새의 이미지뿐이었다.
지금도 그 날과 비슷한 것 같았다. 사방은 온통 괴괴한 적막이었고 바람 소리 말고는 일절 들리지 않았으며 이 정원에는 푸른 새의 그림과 저만이 있었다. 소년 가엘리오는 약간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고 기본적으로 내향적이었고, 대신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그 이상으로 감정적으로 예민한 부분이 있어 내버려두면 어느새 찰나의 감정들을 잡아내 그대로 골몰하곤 했다. 보편적으로 이것은 내향적인 아이들의 특기였으나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 또한 그의 내향성에서 기인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그러한 사실들을 말하지 않았고 최대한 숨겼는데 그래서 가엘리오의 공상은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곤 했다.
지금이 그 찰나였고 순간이었다. 가엘리오의 공상이 이 정원에서 하늘로, 우주로, 진공의 블랙홀에서 의식의 까마득한 저변, 무의식의 세계로 밀려나가고 나서야 카르타와 맥길리스는 그늘지고 쌀쌀한 테이블 옆에 나타났다. 마실 수 없는 주인 잃은 차들은 버려진 지 오래였고 접시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치워졌으며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지면과 하늘 중간에 있게 된 시각이었다.
“일어나, 가엘리오.”
카르타는 무의식의 세계를 유랑하는 작은 항해자가 앉은 의자를 걷어찼다.
“꼴사납게 그게 뭐니. 침이나 흘리면서 자고.”
가엘리오는 반사적으로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카르타의 뒤에 있는 맥길리스의 시선이 가엘리오를 슥 스쳐간다. 손등에 묻어나는 것에 벌게지는 얼굴을 무시하고 가엘리오는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어디 갔다 왔어! 기다렸는데!”
침착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목소리였다.
“소리 지르지 마, 얘. 너 오늘 우리한테 줄 거 있지?”
가엘리오를 실컷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 주제에 카르타는 당당하기까지 했다. 고압적인 태도로 손을 내미는 카르타의 태도에 정신 차리고 보니 가엘리오는 이미 품에서 잔득 구겨진 초대장을 내밀고 있었다.
“좋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정원에서 할 건 다 한 거 같아.”
“아, 뭐야 정말! 나는 여기서 계속 기다렸는데! 네가 좋아하는 버터 스콘도 부탁했단 말이야!”
“어머. 그거 좋네. 가자, 가엘리오.”
그러고 카르타는 제 집인양 쏙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가엘리오는 망연하여 사라지는 카르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르타의 뒤를 쫓지도 않은 채 제 옆에 서 있는 맥길리스를 돌아보았다.
“무슨 얘기 했어?”
“아무것도.”
맥길리스는 앞머리를 만지작대며 답한다. 평소에는 말도 안 하는 주제에, 저렇게까지 말하면 카르타와 어떤 대화든 했다는 얘기였다. 무언가 분하고 억울해 가엘리오는 발을 쿵쿵 구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다가 멀찍이서 천천히 걸어오는 맥길리스를 기다리고는, 가엘리오는 또한 구깃구깃한 초대장을 내밀었다.
“내일이 내 생일이니까, 놀러 와!”
봉투에 커다랗게 그린 푸른 앵무새를 맥길리스가 알아보았을지 가엘리오는 잠깐 신경 쓰였으나 분한 게 더 컸다. 치졸한 소년의 마음은 그를 외면해 높고 긴 계단을 쪼르르 올라갔다.
⁕
찬바람을 맞은 탓에 몹시 피곤했는지 앉아서 짧고 깊은 낮잠을 잤는데도 가엘리오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그렇게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홉 살의 아침은 특별하지도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아홉 살이 되면 어른스러워지겠다고 결심한 가엘리오는 어쩌면 그 날은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도련님의 어울리지 않는 음울함을 보드윈의 사용인들은 생일을 맞아 한층 성숙해진 것이라 믿었다.
“아홉 살 생일 축하드려요, 도련님.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그런 건가요? 오늘따라 의젓하시네요.”
가엘리오는 이례적인 우울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내버려두고 혼자 돌아다니거나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평소 같은 일이었으나 어제의 일은 유난히 사무쳤다. 가엘리오는 옷을 챙겨 입고 선생님이 오실 방에 앉아 카르타와 맥길리스를 기다렸다. 생일파티라고 거창하게 초대장을 만들긴 했으나 대체로 그들은 가엘리오의 집에 모여 수업을 들었고 놀다 해가 지면 갔으니 그 날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시각에 그들이 도착했고 짧은 아침 인사 후, 오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기 전에 맥길리스가 한번 이 쪽을 쳐다보는 듯 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필기와 작문, 지리와 역사까지 끝나면 점심시간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면 이미 테이블 위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갓 구운 따뜻하고 쫄깃한 빵과 신선한 양상추에 달고 상큼한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 예쁘게 장식된 과일이 각자의 앞에 먹을 만큼 놓여 있었다. 따뜻한 스프부터 천천히 먹고 있으면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작게 잘려 나왔다. 한 입 크게 넣고 우물거리면서도 가엘리오는 별 맛을 느끼지 못 했다. 시선은 맞은편의 맥길리스에게 고정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맥길리스는 아주 느리게 빵을 썰어 입에 넣었지만 먹는 속도는 가엘리오보다도 빨랐다. 스테이크 조각을 조금씩 베어 물고 샐러드를 오래오래 씹는데도 그랬다. 예전엔 이보다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커다란 빵을 뭉텅뭉텅 떼어 빵가루 하나도 흘리지 않고 입에 넣었다. 그건 가엘리오에겐 마술 같은 일이었다. 따라하고 싶어도 가엘리오는 그 정도의 커다란 빵을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입에 넣는 건 힘들었고 곧 목이 메어서 우유 없이는 씹어 삼키기도 힘들었다. “맥길리스는 대단하구나. 빵을 엄청 빨리 먹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어린 말이었다. 맥길리스의 먹는 속도는 예전보다 훨씬 느려졌지만 여전히 맥길리스는 입가에 소스 하나 묻히지 않고 야무지게 커다란 덩어리를 입에 넣어 깔끔하게 먹을 줄 알았고 여전히 그것은 가엘리오에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스테이크 조각이 들어가고 사라진다. 하나씩 빠르게 맥길리스가 제 몫을 평정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가엘리오는 쉽게 배가 부르곤 했다.
“도련님, 입맛이 없으세요?”
오렌지주스를 가져 온 하녀가 묻는다. 가엘리오는 퍼뜩 시선을 돌렸으나 그 전에 맥길리스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가엘리오는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맥길리스의 접시도, 카르타의 것도 모두 비었는데 제 것만 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아니!”
가엘리오는 허겁지겁 급하게 포크로 찍어 고기를 욱여넣었다.
점심 식사가 모두 끝난 후에야 케이크가 나온다. 의례적인 생일 파티 노래는 매우 무성의했다. 카르타는 건성이었고 맥길리스는 어색하게 입만 뻥끗거렸다. 그 때까지도 가엘리오는 심드렁했다.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가 한 조각씩 앞에 놓여졌다. 너무 달아서 먹고 싶지 않아 포크를 뚱하게 바라보던 가엘리오의 눈앞에 바스락대는 포장지의 봉투가 내밀어지기 전까진 그랬다.
“자, 선물.”
“아 선물은 주네.”
“무슨 반응이 그래? 그럴 땐 고맙다고 말하는 거야. 너도 빨리.”
가엘리오의 심드렁한 반응에 칼같이 쏘아붙인 카르타가 맥길리스의 옆구리를 툭 친다. 맥길리스는 머뭇대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맥길리스?”
“생일, 축하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어서 가엘리오의 기분은 순식간에 다시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고마워!” 아까와는 딴판으로 즉각 나온 말에 카르타는 눈을 흘겼지만 가엘리오에겐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맥길리스의 포장지부터 뜯었다. 작은 판넬 위에 그려진 새였다.
“이게 뭐야? 직접 그린 거야?”
“왕관 앵무.”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충분했다. 뺨이 발그레하고 노란 왕관 같은 긴 앞머리가 서 있었다. 그게 꼭 맥길리스 같다고 생각했지만 가엘리오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예전의 일화를 비추어 보면 맥길리스와의 교우 관계에서 섣불리 말을 하는 건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일 선물 같은 건 한 번도 준비해 본 적이 없다고 맥길리스가 그러지 뭐니. 그렇게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들었어.”
“언제?”
“어제. 네가 꼴사납게 테이블에 침 흘리면서 자던 때 말이야.”
“그건 너네가 날 버리고 가서 그런 거잖아.”
“그럼 생일 선물 준비하는데 받을 사람 데려 가니?”
가엘리오는 그 말에 눈을 깜박였다. “어제 나 빼놓고 간 게 그거 때문이었어?” 가엘리오가 물었다. “그래. 아무거나 그림이라도 그리라고 했지. 내가 그렇게 시킨 거야.” 카르타가 어깨를 으쓱대며 답했다. 가엘리오의 반응이 맥길리스 뿐만 아니라 카르타에게도 고무적인 성취감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콧대가 높아진 카르타를 옆에 두고 가엘리오는 다시 맥길리스를 보았다. 맥길리스는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쑥스러워 하고 있구나! 가엘리오는 그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맥길리스가 준 판넬을 조심스레 내려두고 다음 선물 봉투를 뜯어 보았다. 카르타가 준 건 커다란 인형이었다.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가엘리오는 여전히 작은 인형을 안고 잔다. 그리고 커다랗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연보라색의 망아지 인형은 역시 가엘리오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가엘리오는 그 두 개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고마워 카르타. 고마워 맥길리스!”
도련님의 반나절짜리 의젓함은 선물 앞에서 사라졌다. 한껏 들뜬 가엘리오는 힘차게 포크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카르타도, 맥길리스도 포크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조그만 합창 후에 아이들은 전투적으로 케이크를 먹었다. 기세 좋게 시작한 것에 비해 가엘리오는 곧 질리기 시작했지만 케이크는 훌륭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가엘리오가 그것을 전부 맥길리스에게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맥길리스는 초콜릿 케이크를 아주 잘 먹었다. 예전에 보았던 감동적인 속도로,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가엘리오는 그게 좋았다. 그러니까 초콜릿 케이크와 맥길리스와 카르타와 레몬색의 새와 망아지 같은 게.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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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리퀘박스 일곱 번째
리퀘박스 일곱 번째
'후회공 맥길리스 인생 2회차 실패해서 3회차 돌파하는 거 써주세요..가엘리오는 쉬운 남자가 아니니까'
49화 이전에 푼 썰에 막 섞이니까 엉망진창이 되어버려서 뭔가 정신산만하고 대충대충이지만 앞으로도 다른 설정 회귀물 리퀘박스에 두 개쯤 더 있어서 그냥 막 해보았습니다. 퀄리티가 들쭉날쭉 하는데 초안은 너무 오래돼서 까먹었고 이번화가 너무 많이 먹여주니 소화하기도 힘들고 마음이 급하네요.
그 아름답고 고결한 수정 같은 남자가 말하길, "부탁이야. 말하지 말아 줘", ……어찌나 아늑했는지 가끔 눈 먼 장님이 되고 싶었다. 과거는 다리를 얽매고 그를 한 번도 놓아준 적 없었다. 푸른 수정에 비치는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는 세상의 뒷면을 모르는 귀하게 자란 이였다. 잘 마른 양지와 푸른 잔디 위만 걸었던 반들한 구두가 하수도가 역류해 시궁쥐가 뛰노는 곳을 걷는 것은 저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제 과거를 털어놓고 싶은 심정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스칠 희미한 경멸, 당혹감, 어색함 같은 것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소문은 천 리를 가고 모든 일은 길면 꼬리가 잡힌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말은 실증된 격언이었다. 따라서 맥길리스 파리드는 그것을 모르는 척 했다.
그의 고결함, 결벽하기까지 한 완고한 성정은 결국 맥길리스 파리드를 용서하지 않았다. 기도를 꿰뚫은 총탄이 몸 속 어딘가에 박혀있을지 짐작해보려 했다.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 안되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뻗은 손이 매정하게 쳐졌을 때, 그래도 목덜미를 움켜쥔 그 손아귀의 힘에 안도하고 말았다. 끝까지 나를 놓지 않은 너에게 감사한다.
아. 가엘리오. 나는 네가 내 앞에 무릎 꿇기를 간절히 원했다. 내겐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은 것들이 그대에게 팔다리처럼 당연하게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절망의 깊이를 너는 알까. 나는 신에게 기도했다. 구원이 없던 시절부터 기도했다. 새벽의 문이 열리는 시각, 창으로 스미는 푸르스름한 빛을 통해 그의 존재를 느꼈다. 나에게도 권리를 달라고. 네가 가진 것 전부 내가 가질 수 있기를. 비참함, 슬픔, 고통, 체념, 낙망, 번민, 좌절,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대신 네가 갖기를.
그러면 내가,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숨이 멎었기 때문이다.
*
맥길리스가 가엘리오를 만난 건 열 살의 봄이었다. 차에서 막 내린 꼬마아이의 머리카락은 꾀죄죄한 옷차림과는 달리 단정했다. 순간 헛것을 보았나 싶을 정도로 어색해서 맥길리스는 눈을 비볐다. 태어날 때부터 실밥 하나 없는 매끄러운 실크셔츠를 입을 것 같은 얼굴인데 부드러운 살갗이 쓸릴 것 같은 싸구려 옷을 입고 있는 게 그렇게나 낯설었다. 낯선 환경에 조금은 겁 먹고 긴장한 수정 같은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다 맥길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먼 거리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울 것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 맥길리스는 순간 깨달았다.
저건 가엘리오다.
가엘리오 '파리드'였다. 운명이 그에게 가엘리오를 데려다 준 것이다. 완벽하게 소망하는 대로. 비틀린 욕망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눈물을 닦아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완벽한 반대의 위치라면 좀 더 거리낌 없이 한껏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차갑고 어둡고 컴컴한 파리드의 저택으로 끌려 들어가는 가엘리오를 보면서도 맥길리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거기서부터 잘못됐을까.
(중략)
카르타는 종종 "쟤, 널 좋아하는 거 아냐?" 하고 말했다. "글쎄." 좋아하는 거 아냐? 가 아니라 그냥 좋아한다. 가엘리오가 말하기 훨씬 전부터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맥길리스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책을 읽는 맥길리스를 가엘리오가 끊임없이 흘깃대고, 맥길리스가 한 번 읽었던 책들을 그대로 품에 넘치게 안고 종종걸음으로 쫓아오거나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할 때도 시야 한 구석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던 가엘리오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지.
처음엔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몰라서, 그 다음엔 어떻게 써야 될지 고민하느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예전보다 갑절은 노골적이고 몇 곱절은 다정한 그 시선은 모르는 척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나 과거를 기억하는 건 가엘리오 뿐만이 아니다. 맥길리스는 전부 알고 있었고 능란하게 제게 닿는 호의를 한껏 즐긴 다음 자비롭게 애정을 베풀 수 있었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가 까마득한 과거, 혹은 미래, 혹은 다른 세계를 기억한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기에 처음 만났을 때 가엘리오가 펑펑 울면서 맥길리스를 끌어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어울리지 않게 시치미를 뚝 떼고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
맥길리스가 그것들을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눈치였다. 그래서 맥길리스도 모른 척 했다. 그 편이 좋았다. 아는 척 하면 가엘리오는 다시 과거의 분노들을 생각할지도 몰랐다. 약간의 죄책감, 후회 같은 걸 곱씹으며 맥길리스 앞에 언제까지나 약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가엘리오가 좋았다.
그러면서도 불만스러운 건 가엘리오가 결코 그 이상을 맥길리스에게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은총을 받은 듯 기뻐하면서도 먼저 손 내밀지는 않았다. 과거를 기억하는 가엘리오는 예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그의 대담함은 이 애정 어린 집안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패배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성정, 맥길리스는 한 때 가엘리오가 누렸던 모든 것 - 그의 방, 그의 가족, 그를 사랑했던 사용인들 - 을 마음껏 누리면서 생각했다.
맥길리스가 '보드윈'을 누리는 대신 가엘리오는 '파리드'의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맥길리스라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엘리오."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맥길리스는 대신 호의와 애정 가득한 얼굴로 가엘리오를 보았다.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앞머리를 만지작대는 버릇이 꽤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유야 알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맥길리스'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맥길리스가 앞머리를 배배 꼬고 있으면 가엘리오는 어딘가 안도감을 느끼는 얼굴로 웃곤 했다.
그래. 이제는 다 지난 얘기다.
익숙한 사관학교의 기숙사에서 맥길리스는 방학 동안 저택에 다녀 온 가엘리오를 보며 죄책감을 덜었다. 이즈나리오 파리드는 명백한 소아성애자에 일관된 취향까지 있어서 금발에 여리여리한 팔을 가진 곱상한 아이들만을 탐했다. 그 취향에 금발도 아닌 가엘리오가 어떤 연유로 그의 후계자가 되었는지는 실로 의문이었으나 어쨌든 가엘리오는 이제 열일곱이었다. 예전 과거를 상기하면 - 물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으나 - 가엘리오는 진작 이즈나리오의 시선 밖에 났을 것이다. 아무리 과거를 기억해도 맥길리스는 어린아이였고, 무력했고, 그래서 가엘리오를 구할 수는 없었으니까, 가엘리오도 그랬잖아. 그랬겠지.
"집에서는 잘 쉬고 왔어?"
"응? 아, 아아. 너는, 아 그래. 여동생이 태어난다고 했지. 몇 달째야? 이름은 정했나?"
"알미리아래."
"예쁜 이름이네. 빨리 보고 싶다."
그에게 알미리아는 그저 여동생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가엘리오의 눈동자에 떠오른 애틋함에 맥길리스는 부끄럽게도, 질투해버리고 말았다. 카르타를 볼 때도 가엘리오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애틋함, 애절함, 연민과 사랑은 모두 제 것으로만 남았으면 했다.
아. 그런 사람 한 명 더 있었지.
맥길리스는 지금은 화성 어디엔가 소년으로 남아있을 그를 떠올렸다. 가엘리오가 임관한다면 아마 가장 먼저 그를 찾을 것이다. 임관한 시점에선 아직 아인 달튼은 사관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겠지만 보드윈이든 파리드든 세븐스타즈의 지위를 가진 이상, 그는 매년 입학하는 화성지부 사관생도의 명부를 볼 수 있고 아인 달튼이란 이름을 찾는 것도 시간 문제다. 그리고 그런 아인을 돕기 위해서는 지금은 착취 받는 소년들인 수염 달린 꼬맹이들과의 싸움도 막아야 한다. 가엘리오는 한 번 겪었던 미래를 바꾸고 싶어할 게 자명했다. 바알, 아그니카 카이에르, 그런 허황된 수단과 가엘리오는 거리가 멀지만 과연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지.
맥길리스는 한 번 더 머리를 꼬았다. 맥길리스는 이제 혁명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가엘리오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중략)
"너…, 알고, 있었어?"
셔츠 한 장으로 비에 젖은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핏기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입술을 애써 꽉 깨물며 가엘리오가 맥길리스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투명하게 젖어 달라붙은 직물 너머로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멍과 울혈들이 명백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 남자가, 아직도 가엘리오를 탐하고 있었다고? 머리가 띵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진작 그만뒀어야 하는 행위다. 가엘리오는 애저녁에 그 모든 학대에서 벗어났어야 옳았다. 그는 여전히 커다란 골격과 아름다운 보랏빛 머리카락과 잘 붙은 근육들을 갖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즈나리오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야만 했는데…….
"나를 봐, 맥길리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어질어질한 시야에서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시선과 마주친다.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엘리오는 한번도 그런 감정으로 맥길리스를 대한 적 없었다. 하다못해 그 마지막 최후의 순간조차도 가엘리오는 울었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번민에 몸을 태우며 그래도 사람은 똑바로 미래를 걸어야 하기에 가엘리오는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알고 있다고……."
가엘리오의 푸른 눈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빗물과 눈물이 섞여 얼굴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지금도 거부 당할 것 같았다. 맥길리스는 섣불리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알…아."
"즐거웠어? 내가 네 대신 고통스러워 해서?"
"아, 니야."
"모든 걸 알면서도 무시한 거라고?"
가엘리오는 여전히 결벽했다. 맥길리스의 지난 삶을 가엘리오가 똑같이 살았다면 그럴 수 없었다. 오물이 묻고 구겨지고 찢어져 아무리 다시 펴도 예전처럼 깨끗해질 수는 없는데, 가엘리오의 결벽은 지금까지 한번도 상처 입지 않았던 것처럼 견고하고 투명했으며, 그래서 지금, 삭아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나는 가엘리오."
"말해."
"너만 있으면 돼."
진심이었다. 이 세상은 사람 한 명이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맥길리스의 혁명이 그저 반역으로 끝났듯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이 거대하고 형체 모르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을 막을 수는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당장 원하는 것만을 하기에도 벅찬 삶이다. 맥길리스는 그래서 이 인생을 오로지 가엘리오를 사랑하기 위해 쓰기로 했고, 가엘리오가 저만을 사랑하길 원했다. 그렇게 만들었다. 맥길리스도 나름대로 애썼지만 이즈나리오에게서 착취 당하던 꼬마들까지 뭘 어쩌겠는가. 이즈나리오를 죽이라고? 물론 그렇게 하면 가엘리오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을 구할 수는 있었겠지. 그렇지만 이즈나리오를 죽인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될 공산이 컸다. 그건 말도 안 되지. 가엘리오를 만나기 위해 이 인생을 살고 있는데. 몇 년만 참으면 가엘리오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가엘리오가 그 정도 고통도 못 참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건 너무 안이한 변명인가.
맥길리스는 혼란스러웠다. 가엘리오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엄청났던 모양이다. 그는 맥길리스 뿐만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의 고통도 전부 대신하고 있었나. 그토록 타인과 자신의 구별이 확실한 주제에 어째서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 것일까. 예전의 가엘리오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가엘리오는 남과 어울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누군가를 쉽게 헐뜯거나 비난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두를 구원하고 싶다는 성스럽고 고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오만했다. 높은 곳에서, 때로는 맥길리스가 놀랄 정도로 냉담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함부로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가엘리오에겐 없었었다.
무엇이 어떻게 그를 바꾸어 놓은 것일까.
"나는, 이렇게 되어서 너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네가 가진 고통의 반도 몰랐다고 알았으니까 그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네가 행복하면, 누군가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사랑하고 그래서……."
"너를 위해서였어, 가엘리오."
맥길리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모르는 척 하면 행복해질 수 있었다. 정말로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엘리오에겐 납득되지 않겠지. 실제로 가엘리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분노는 여전히 명징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한 때 원했던 격렬한 감정은 지금에 와서는 가장 기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맥길리스는 체념하며 눈 감았다.
너무 어려워.
너무 어려워, 가엘리오. 너를 사랑하기만으로도 벅찬데 내가 다른 것들을 신경 써야 해?
억울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맥길리스가 눈을 감고 이유 없는 분을 삭이는 동안에도 가엘리오의 손엔 여전히 이즈나리오를 쏜 총이 쥐어져 있었다. 가엘리오가 자처해서 손 안의 애완견처럼 굴었는데도 여전히 다른 이를 착취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이즈나리오를 단죄한 수단이었다. 아직은 모르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이 비밀스러운 별장을, 가엘리오의 위치를, 너무 길들여져서 이제는 갈 곳 없는 아이들, 정확하게 미간에 총알이 박힌 이즈나리오 파리드의 시체를.
"아냐. 내가 잘못했지. 맞아. 나는 언제든지 네 고통을 반으로 나눌 수 있으면 했어. 그게 내가 믿는 사랑이었으니까."
"가엘리오?"
"네게는 그게 아니었을 뿐이고. 내가 멋대로 믿은 거야. 멋대로 기댔고 그래서 멋대로 배신 당했다고 느끼는 거지. 네가 내 고통을 나눌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안녕이야, 맥길리스.
이번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두 번째 안녕이라는 말. 목소리는 총성과 빗소리에 섞여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남은 것?
"가…엘리오?"
맥길리스의 앞에 남은 것은, 굳게 닫힌 눈의 얼굴 뿐이었다. 절대적인 거부였다. 눈물을 닦아줄 틈이 없었다.
(중략)
나는 지금 신에게 농락 당하고 있나?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흘깃대며 생각했다. 그에겐 그런 면도 있었다. 냉담과 경멸, 원래의 가엘리오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갈무리하는 데 능숙했고, 두 번째의 가엘리오는 그런 감정은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맥길리스를 사랑하고 미래를 다잡는 것만으로도 벅차 정신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 때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다. 무심하게 맥길리스를 스쳐가는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고 단지 투명했다. 이번에는 세븐스타즈의 누구도 아니었다. 세 번째의 맥길리스는 여전히 거짓말처럼 가엘리오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가엘리오는 파리드의 이름을 받지 않았다. 억지를 써서 여행을 핑계로 그렇게나 뒷골목을 찾아 헤맸는데, 그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가엘리오가 멀쩡하게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맥길리스는 그 때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으나 가엘리오의 성격에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보드윈의 은총이 없는 가엘리오는 분명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맥길리스는 또한 어지러웠다. 누구도 믿지 않는 가엘리오는 다른 사람이었다.
간절하게 원했었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비참함, 슬픔, 고통, 체념, 낙망, 번민, 좌절,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대신 갖기를.
그러면 내가 구해줄 수 있을 텐데.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아낌없이 사랑하고, 처음으로 너를 애정한 사람이 되어 영원히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로 자신은 그럴 수 있을까. 어떤 소리도 그에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가엘리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었고 실제로 귀찮아서 쳐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언젠가부터 체념했는지 멀리서 보기만 했지만 그조차 부담스러워 외면하는 게 대다수였다. 그래도 가엘리오는 한참을 바라보다 자리를 뜨곤 했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하는 게 이렇게나 터무니 없이 무서울 줄은 미처 몰랐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혼잡한 복도에서 약간 부딪힌 어깨에 일부러 말을 걸어보았으나 가엘리오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대로 뒤돌아서려는 가엘리오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의아함 섞인 시선이 겨우 여기에 닿았다. 맥길리스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입 열었다.
"나는, 맥길리스."
"알고…있는데, 그래서?"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으나 가엘리오는 그래도 성실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변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네 이름을 알고 싶어."
물론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맥길리스는 듣고 싶었다. 신의 농락이든 뭐든 좋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맥길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의향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했다. 차근차근, 제대로.
"…가엘리오."
이번에는 틀리지 않게 너를 사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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