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엘로 가엘리오의 홍차 테스터가 되어주는 맥길리스가 보고싶습니다. 맥길리스 입맛에 맞는 홍차를 찾아주기 위한 가엘리오의 눈물겨운 애정우정신뢰에 기반한 맛의세계로 떠나는 모험을...'
부제는 가엘리오와 비밀의 홍차공장 정도로...짧습니다.
"음, 이 정도면 적당할까."
가엘리오는 신중하게 모래시계를 보며 티팟을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가향차는 꽃의 단 냄새가 났다. 맥길리스는 이런 차를 좋아한다. 아마도. 이것저것 시험해봤다. 처음엔 클래식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아삼, 다즐링, 얼그레이. 개중에서 반응이 좋았던 건 얼그레이였다. 거기에서 향이 강한 걸로, 다시 맛이 강한 것으로 옮겨갔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브랜드의 전부 사들였다. 알록달록한 틴케이스가 가엘리오의 기숙사 방에 쌓여갔다. 가엘리오는 사실 그런 종류의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맥길리스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주말에 집에 들고 가 부엌 찬장에 쌓아두었다. 차를 쌓아두다 보니 어느 덧 상미기한이 아슬아슬해져 사용인들은 시럽을 만든다 밀크티를 끓인다, 이제 그만 좀 사라고 야단법석이었지만 거기까진 가엘리오가 알 바 아니었다. 3g의 찻잎, 섭씨 70도의 따뜻한 물, 아름다운 티세트, 그것들을 정성스럽게 다루면서 가엘리오는 마치 연금술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혹은 아름다운 공주를 위한 궁극의 진상품을 찾는 광대라든가.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공주, 맥길리스는 호불호를 표현하는 반응이 굉장히 약한 사람이었다. 기호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알아채기는 힘들었다. 맥길리스는 손님인 주제에 제 취향을 주장하는 뻔뻔함은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가엘리오가 그의 반응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면밀한 탐구가 필요했다. 언제나 조각같은 미소 속에서 단 하나의 진짜를 찾아내야 했다. 입술의 움직임, 입꼬리의 각도, 미세한 얼굴근육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노라면 어쩐지 스토커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좋아할 만한 차를 찾고 싶었다. 같은 차를 마시고 그가 좋아하는 세계를 공유하고 싶었다. 또는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의 세계를 공유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너무 과분한 욕망인가?
"어때?"
"괜찮아."
음. 실패구나.
맥길리스는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는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었다면 살짝이나마 느슨해지는 눈썹 부근의 근육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가엘리오는 쓴웃음을 삼키며 결국 둘 중 누구의 취향도 아니게 된 차를 음미했다. 시트러스와 베르가못의 향기가 나는 차는 생각보다 달지는 않았다. 지난번 시트러스 계의 다른 차는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이었던 걸 고려하면 꽃향기는 너무 강했을지도 모른다. 가엘리오는 마음 속의 체크리스트에서 베르가못 위에 가위표를 그어두었다. 다음엔 과일차를 선택해보자. 어느 게 좋을까. 망고?
"그나저나 이제 슬슬 더워지는걸."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민에 빠져 있던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도 느슨하게 해두고 셔츠 단추를 두어개쯤 풀어헤친 맥길리스는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의 따가운 햇빛 속에서 긴 금색의 속눈썹이 자꾸만 깜박이며 빛을 반사했다. 내비치는 쇄골 위의 흰 피부에는 어렴풋이 땀방울 맺혀있는 듯도 했다. 그러고 보니 계절은 어느 새 이렇게 더워졌다. 요즘은 날씨가 좋아졌다고, 저는 셔츠 소매를 둘둘 말아 팔꿈치까지 걷어붙여두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차가운 차가 필요한 날씨였다.
늦은 깨달음이었다. 강의동이 있는 건물엔 최신 자동공조장치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인적 드문 구관은 일정 기온 이상에서만 최적 온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아직 냉방장치가 돌지 않고 있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인데다 인적이 드물어 오히려 다른 쪽보다 기온이 낮았기에 가엘리오는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맥길리스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게다가 가엘리오는 원래 한여름에도 뜨거운 차를 마시는 쪽이었지만 맥길리스는 아니었겠지. 맥길리스가 들고 있는 오래된 책의 책장도 거의 넘어가지 않고 열린 창문으로는 간간히 후덥지근한 미풍만 들어올 뿐, 미적지근하게 고인 열기에서 뜨거운 차는 마실만 한 게 못됐다.
"아, 미안. 역시 뜨거운 차는 힘든 거구나."
"아니, 그건 아닌데."
입으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맥길리스는 아까의 한 모금 이외에는 목을 축일 용도로도 찻잔을 들지 않았다. 맑은 수색의 찻물을 아깝게 바라보며 가엘리오는 자신의 불찰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냉침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급랭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이 도서실엔 냉장고나 얼음,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당연하지. 도서실이니까. 물 이외의 음료는 반입금지인 것을 가엘리오가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하나씩 가져다 둔 것이다.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일 땐 쌀쌀한 계절이었으니 차를 같이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기포트, 그냥 컵으로는 아쉬워 티세트, 자주 마시는 차의 틴케이스도 이 곳에 있었고 그 시절에 가져다 둔 담요도 아직 이 곳에 있었다. 날이 따뜻해질 무렵엔 맥길리스가 끼어들어 방과 후엔 같이 이 곳에서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으나 원래는 가엘리오 혼자만의 아지트 삼아 있던 곳이다. 어느 새 사유지화 된 도서실을 바라보며 '이건 안 되나?'하고 가엘리오는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복도 끝에 있는 자판기에 생각이 미친 건 그 때였다.
"아. 밖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하나 뽑아올게."
가엘리오는 날렵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예의상 아니라고 말할 맥길리스가 소파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가엘리오를 올려다 보고 있는 것을 보니 시원한 음료가 필요한 게 확실했다.
"어느 게 좋아? 나는 잘 몰라서."
인공적인 단맛이 입에 끈적하게 남는 게 싫어 가엘리오는 시판되는 음료를 사먹어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탄산수 정도. 하지만 맥길리스는 탄산수는 싫어한다. 그 미묘한 맛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나도 잘 몰라. 아무거나 부탁해, 가엘리오."
한참의 침묵 후에 맥길리스는 그렇게 답했다. 하긴, 맥길리스도 자판기 음료는 잘 안 먹지. 이상하게 그런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시판되는 음료는 집에서도 마셔보지 않았고 제 돈 주고 사먹어 본 적도 없었다. 가엘리오에겐 첫 음료수인 셈이었다. 첫 도전이라는 타이틀이 새삼 두근거려 가엘리오는 냉큼 저 복도 끝으로 달려가 처음 이용하는 자판기 앞에 섰다.
이 커다란 기게의 사용법은 알고 있다. 인식기기에 학생증을 가져다대고 원하는 품목의 버튼을 누르면 된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음료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유맛, 복숭아맛, 그냥 사이다, 콜라, 이건 탄산인지 아닌지…….
빨리 버튼을 누르라고 깜박이는 버튼들 앞에서 괜스레 초조해지는 마음에 쿵쾅대는 심장을 누르고 가엘리오는 황급히 메뉴들을 훑었다. 아이스티……. 이건가?
덜컥 버튼을 연달아 두 번 누르니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캔 두 개가 나온다. 일단 차가워서 합격점이었지만 맛은 도무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엘리오는 두 개의 캔을 껴안고 다시 도서실로 달려갔다. 그 사이 맥길리스는 완전히 소파에 기대어 늘어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눈꺼풀이 정말 곧 잠이라도 들 것 같았다.
"이거 어때?"
가엘리오가 노란 캔을 내미니 맥길리스가 받아들면서 무심코 말한다.
"너는 진짜 홍차를 좋아하는 구나."
"어? 어… 그런가?"
"고마워, 잘 마실게."
"이거 맛있는 거야?"
"글쎄. 안 마셔 본 거니까."
맥길리스의 옆에 나란히 앉아 캔을 딴다.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선뜻 입에 대기가 묘해 머뭇거리는 찰나 맥길리스가 과감히 음료수를 입에 털어넣는다.
세상에. 가엘리오는 드디어 답을 찾았다. 아주 의도치 않게.
맥길리스의 옆모습을 관찰하며 가엘리오도 음료를 한 모금 입에 물었지만 슬프게도, 가엘리오의 취향은 아니었다. 아이스티라고 쓰여 있었지만 홍차라기엔 너무 달았고 끈적거렸으며 어쩐지 텁텁한 맛이 났다. 하지만 맥길리스는 아닌 거겠지. 가엘리오는 테이블 위에 줄지 않고 남아 있는 다 식은 홍차와 제 손에 들린 캔을 보았다.
"어때?"
"괜찮아."
아까와 같은 대답이었지만 반응은 전혀 달랐다. 만족스러운 듯 느슨하게 풀어진 맥길리스의 미간과 눈매가 아름다웠다. 어쩐지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무해 가엘리오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맥길리스의 취향인 것이다. 가엘리오는 머릿속의 체크리스트에서 모든 항목을 전부 그어버린 다음 커다랗게 적었다.
노란색 아이스티.
「가엘리오, 준비는 다 됐어? 화성까진 3개월 정도 걸릴 거야.」
"알고 있어, 맥길리스. 너야말로 집이 그립다고 울지나 말라고."
가엘리오는 트렁크에 제복과 속옷들을 던져 넣으며 통신을 계속했다. 여분의 셔츠, 생활복, 찻잎도 다 챙겨 넣었다.
"아 맞다."
「거봐. 잊어버린 게 있지?」
맥길리스가 그거 보라는듯 코웃음치며 가엘리오를 비웃는다.
"아니거든? 다 챙겼어. 내일 봐."
「그럼 내일.」
가엘리오는 선반 위에 올라가 있던 노란 통을 잘 밀봉한 뒤 트렁크에 집어 넣었다. 맥길리스는 이 차를 가장 좋아한다. 가엘리오의 기준에선 차라고 말하기엔 미묘할 정도인 달고 신 인스턴트 아이스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