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싕님의 맥가엘 개인지 <천국보다 먼Far from Heaven>에 드렸던 축전을 공개합니다.
싕님의 오리지널 맥가엘 스토리인 <천국보다 먼>의 본편 설정을 상당수 차용하고 있으므로 원작기반은 아닙니다.
축전을 맘에 들어해주신 싕님께 감사의 말씀 드리며 저도 싕님 책 다시 읽으러 갑니다 모두 해피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암막커튼으로 바꿨다. 그것은 맥길리스의 첫 번째, 아주 사소한 반항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하늘하늘한 여름용 레이스 커튼은 집들이 기념으로 러스탈 에리온이 선물한 것이었다. 가엘리오는 러스탈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물에는 죄가 없다는 주의인지라 그 커튼을 방에 들여놓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가엘리오는 매일 맥길리스의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그 커튼을 활짝 열고 바깥 날씨를 가늠한 후, 운동을 나가거나 아침을 먹곤 했다. 바짝 구운 베이컨이나 소시지에 서니사이드업, 주방의 재료에 따라 베이글이나 식빵, 스위트피와 버터에 구운 아스파라거스, 옥수수 같은 걸로 바뀌기도 했으며 막 짠 오렌지 주스나 우유 같은 게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컵에 담겨 함께했다. 가엘리오가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원에서 트랙을 돌고 있을 무렵 맥길리스는 느지막이 일어난다. 가엘리오가 어디에 갔을지 알고 있으면서도 기이할 정도의 낯섦과 불안 속에서 헤매며 진하게 내린 커피와 빵 쪼가리를 입 안에 던져놓고 가엘리오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나는 개인가?
맥길리스는 자조적으로 그런 생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과거의 영광이 된 지금, 노쇠하고 탁한 음으로 우주를 울리던 금빛의 뿔피리는 없다. 늙은 사자는 죽었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주 기나긴, 미지의 자유였다. 가엘리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어느 것에나 정력적이었으며 따라서 이 정력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맥길리스는 어땠냐면 가엘리오가 있어야 하루가 돌았다. 가엘리오가 아침 운동을 나갔다 오길 기다렸고 가엘리오가 소파에 늘어져 있는 맥길리스의 등에 “좀 움직여, 맥길리스!”하고 잔소리를 해대다 한 번씩 차야만 게으르게 일어나 청소를 하거나 씻거나 운동을 하거나 책을 봤다. 가끔은 가엘리오의 눈을 피해 통속소설을 쓰기도 했고 이 빌어먹을 통속소설이 잘 팔리게 된 이후엔 그의 눈을 피해 인터넷으로 편집자와 회의를 하기도 했다. 숨만 쉬고 있어도 시간은 갔고 그 하릴없는 시간이 아쉽지 않았다. 가엘리오에 의해 움직이는 24시간과 365일이라니. 행복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가엘리오는 없다.
“나 없다고 매일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그렇다고 먹기만 해서 살찌면 안돼.”
가엘리오는 엄마처럼 잔소리했다. 엄마. 어머니, 그런 존재는 맥길리스의 생에 단 1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아, 가엘리오. 너는 언제나 내게 부재한 모든 것을 채워주는 존재야. 암막커튼의 기능은 너무 완벽해서 햇빛 같은 건 전혀 들이치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맥길리스는 존재하지 않는 햇빛을 피하려는 것처럼 베개를 얼굴에 파묻었다.
갈루스 보드윈은 볕이 들이치다 못해 완벽하게 햇빛에 휩싸인 프랑스 루시옹에 포도밭을 사들였다. 한 때 별을 달고 있던 자치고는 꽤 소박한 노후가 아닌가 싶었지만 작업용 체크셔츠와 멜빵바지에 커다란 갈퀴를 들고 있는 갈루스 보드윈을 상상하면 50년차 농부처럼 잘 어울려 맥길리스는 쉽사리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안 갈 거야?”
“안 가.”
그 날 아침도 그랬다. 맥길리스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태양을 피하려는 헛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번 놀러 오라는데. 아주 큰 와이너리를 만들었대. 아직 포도 수확을 못했으니 와인은 못 만들었지만. 가엘리오가 여상하게 말하는 소리를 맥길리스는 그저 흘려들었다. 알미리아가 아쉬워할 텐데. 가엘리오는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맥길리스를 슬쩍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도 가끔은 잔상이 드리웠다.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역사스페셜 야망의 불꽃>이. 미묘하게 겹치는 현실과 영원히 침묵하게 된 뿔피리가 상상력이 부족한 가엘리오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치졸한 독점욕이라면 맥길리스는 기쁨에 차 기꺼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프랑스까지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가엘리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말했듯이 그에겐 상상력이 부족했고, 맥길리스를 지나치게 신뢰했다.
“잘 다녀와, 가엘리오.”
공항까지 마중 나갈 부지런함도 맥길리스에겐 결여되어 있었다. 가엘리오가 떠나는 꼴을 굳이 거기까지 가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가엘리오의 체류 일정은 약 보름이었고 오늘은 1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지난 2주는 그야말로 맥길리스에겐 방탕과 나태의 나날이었다. 암막커튼으로 바꾼 뒤 낮엔 내내 잠을 잤다. 일어났더니 몇 시인지 가늠도 안됐다. 커튼을 걷었더니 희미하게 햇빛은 남아있었다. 가엘리오가 없다고 생각하면 입맛도 없었지만 착실하게 배는 고팠다. 성의 없이 군데군데 조금 탄 부분이 있는 소시지를 포크로 씹어 먹으면서 소파에 앉은 맥길리스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고, 나초를 먹었고, 팝콘을 먹었고, 콜라나 커피를 마셨다. 이 때까진 가엘리오의 ‘나 없다고 매일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그렇다고 먹기만 해서 살찌면 안돼.’라는 문장이 아직 온전하게 맥길리스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가엘리오가 없을 때의 반항은 소파에서 팝콘을 먹거나 낮밤을 바꿔버리는 정도일 뿐, 나름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했고 가엘리오가 돌아오면 놀아야 되니 연재 비축분을 써둔다는 계획도 있었다.
액제전은 끝났지만 안정기에 들어선 걀라르호른 내부에선 잡음이 끝나지 않았다. 이윽고 아그니카 카이엘을 향한 숙청의 칼날이 벼려지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아그니카를 다룬 모든 창작물에서 하이라이트였지만 동시에 모든 창작물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그니카 카이엘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존재가 역사서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후 가장 유력한 건 역시 암살설이었으나 일각에선 그가 정치판에 이골이 나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아라야식의 부작용으로 와병생활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맥길리스는 모든 영웅의 말로가 그렇듯, 범부(凡夫)의 시기질투에 덧없이 져버렸을 거라 생각했지만 로맨스는 언제나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그러니 고지식하고 청렴하며 올바른 보드윈 경은 아그니카의 암살도 방지하고 아그니카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신붓감도 물리치는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다. 아그니카보다 보드윈이 더 멋있어 보이는 건 맥길리스의 기분이 나쁘고 그렇다고 아그니카가 보드윈을 데리고 사랑의 도피? 아니 이건 말도 안된다. 아그니카 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신중하고도 세심하며 현명한 전개가 필요한 가운데 맥길리스는 도통 묘책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가엘리오가 없어서일까? 가엘리오에겐 도저히 보일 수 없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가엘리오가 없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맥길리스의 삶을 구성하는 건 언제나 가엘리오다.
맥길리스는 지난 여행에서 사 온 태왕칠성기 비디오를 꺼냈다. 삭제된 코멘터리 분량만 보고 일을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그 비디오를 재생하는 순간, 맥길리스의 머릿속에 있던 가엘리오의 충고는 반의 반토막이 되어 남았다.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1화도 아니고 마지막화도 아니고 중간부분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게 새로웠다. 58화의 내용은 21화의 복선을 회수한 것이다. 21화의 주요 에피소드는 3화에서 시작하고 67화에서 끝난다. 바로 이어지는 68화는 아그니카를 둘러싼 세븐스타즈의 음모가 시작되는 편이니 앞으로 써야 할 소설 전개를 위해서도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아그니카 카이엘이 바알을 처음 몰고 출격하는 에피소드는 <일곱별이 나르샤>쪽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야망의 불꽃>에서 MCgilis가 탄 바알도 의외로 재현율은 높았지…….
가엘리오 몰래 숨겨둔 블루레이 박스를 꺼내, 처음엔 인상 깊었던 장면 한두 화만 봐야지, 했었지만 웬걸. 1화부터 100화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시청이 되고, 다른 파생작까지 보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임을 맥길리스가 예상하지 못한 점이 크나큰 실수이리라. 몇 번이고 같은 작품을 다시 보면 예전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보인다. 이 부분에선 음향 효과가, 이 부분에선 카메라의 연출이 좋았고 배우의 표정연기는 이런 쪽이 인상 깊다든가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맥길리스는 처음 보는 것처럼 작품들을 감상했다.
낮밤은 진작 바뀌었고,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 잠들기도 며칠. 그렇게 일주일을 텔레비전 앞 소파에서 앉은 채로 보내고서야 맥길리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하필이면 또 뉴스가 끝나고 시작한 광고가 문제였다.
‘슈퍼걀라르호른대전X, 당신은 지금, 건담을 탈 준비가 되었는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배경음은 야망의 불꽃에 나왔던 그것이었다. 노래만 들으면 역시 훌륭하기 짝이 없는 이 드라마는 몬타크 홀딩스의 모라토리움을 극복하기 위해 또 어딘가에 팔린 모양이었다. 맥길리스가 호기심에 검색해 보면 반다미남코에서 <일곱별이 나르샤>, <태왕칠성기>, <야망의 불꽃>, 후속작인 <라그나로크 : 걀라르호른 제7공화국> 같은 대하드라마뿐만 아니라 고증 문제로 대차게 욕을 먹었지만 판권이 전 콜로니로 팔린 <별들의 후예>, 통제국 소속 하사의 잠입 로맨스물인 <풀 메탈 아머>, 사관학교를 배경으로 한 전쟁드라마인 <세븐 시드 데스티니> 등 걀라르호른 관련 드라마의 판권을 모두 사들여 등장 캐릭터와 기체로 만든 게임이었다.
이런 게임은 뭐라고 하는 거지?
어느새 단말기에 게임을 다운받은 맥길리스는 차분히 튜토리얼을 시작했다. 어느 시공간에 함께 모이게 된 걀라르호른의 장교들이 원래의 시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쟁에 휩싸인 우주에 평화를 되찾기 위해 플레이어는 전투를 치러야 한다. 게임의 구성은 실험적이었다. 다른 시공간에 살며, 계급도 소속도 제각각인 인원들이 단지 같은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상이나마 모여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발상이다.
환상은 실존하지 않을 때만 빛을 낸다. 선망이 되기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충분히 미화되고 왜곡되어 포장되어 있었다. 마지막 숨을 쥐어짜냈던 뿔피리소리를 맥길리스는 기억하고 있다. 장엄하고 묵직한. 작은 휴대전화의 액정 안에서 빛나는 건 맥길리스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고철덩어리 그레이즈는 제법 괜찮은 색으로 빛났고 랜스를 휘두르면 어느 정도의 속도감도 느껴졌다. 낡은 깃발은 한 번도 지상에 내려온 적 없는 것처럼 펄럭였고 희고 푸르며 금실로 마무리 된 정갈한 제복은 새삼스럽게 맥길리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정작 맥길리스의 정복은 옷장 깊숙한 곳 어디에서 먼지 쌓여가고 있을 텐데도 그랬다.
튜토리얼이 끝나니 맥길리스의 격납고엔 10대의 기체가 롤아웃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일에 쌓인 기체들을 맥길리스는 떨리는 마음으로 벗겨나갔다. 런칭 기념 이벤트인 바알이 나올 확률은 1.85%. 고만고만한 그레이즈 리터나 맨로디, 초기 발큐리아 모델 같은 게 나오는 동안 실망과 실망을 반복하던 맥길리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마지막 황금색 베일을 벗겼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슈발베 그레이즈였다.
가엘리오와 맥길리스가 머리를 맞대고 그레이즈의 이런저런 점을 뜯어고쳐 각 경제권에 치안용으로 팔아먹으려 했던. 물론 이 대학 창업동아리 같은 발상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단순 치안용으로 사용하기엔 쓸데없이 고성능으로 비쌌고, 반응성이 너무나 뛰어난 덕에 일반 병사들이 운용하기 쉽지 않다는 게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과거의 쓰디쓴 실패담을 드라마 작가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친절하게 드라마에도 삽입했다. 당연히 맥길리스와 가엘리오의 동의는 없었다. 시험용으로 단 두 대를 만들어 좋아하는 색으로 도색하고 운용은 겨우 한두 번이나 한 채로 격납고에 처박혀 어디론가 사라진 그것들은 드라마에서는 꽤 멋지게 우주를 날고 있어서 그것만큼은 가엘리오도 마음에 들어 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바알보다야 못하지만, 보라색 슈발베 그레이즈는 괜찮은 성능을 갖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파일럿 뽑기에서도 맥길리스는 딱 하나의 황금색 가면을 얻었고, 그 안에는 가엘리오가 있었다.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가엘리오는 원래 슈발베 그레이즈의 조종사고, 이 게임은 기체에 꼭 맞는 파일럿을 탑승시키면 스킬이 발동된다. 하나뿐인 슈퍼 스페셜 레어 카드의 기체와 파일럿이 제자리를 찾는 일도 드무니 운은 나쁘지 않다.
『내게 맡기면 돼. 언제나 그랬듯이.』
분명 이 게임의 파일럿 모델은 드라마의 배우일 텐데도, 우아하게 굽어진 옆머리를 살짝 돌리면서 걀라르호른의 제복을 입고 흰 장갑을 낀 손을 흔드는 가엘리오는 퍽 진짜 같았다. 한 때 맥길리스는 그 제복이 가엘리오의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걀라르호른의 제복을 입는 게 정해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맥길리스는 또한 분명하게 걀라르호른의 해체식날 시원하게 웃고 있던 가엘리오도 기억하고 있었다. 가엘리오의 제복은 맥길리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롱 안에 처박혀 있을 것이고, 제복의 주인은 지금쯤 프랑스에서 농장의 작업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엘리오의 미래는 언제나 무한했고, 그것은 가엘리오에게 모두 잘 어울렸다. 걀라르호른이라는 이름에 얽매인 건 오히려 자신인지도 모른다.
맥길리스는 긴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가엘리오를 툭 건드렸다. 『부디 웃어주세요.』 낭랑한 가엘리오 – 역의 배우 – 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목소리도 썩 비슷해 정말 가엘리오가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맥길리스는 힘을 내어 다시 롤아웃 버튼을 눌렀다. 그럭저럭 쓸 만한 키마리스와 그림겔데의 카드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바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맥길리스!!!!!”
우편물을 확인한 가엘리오가 2층 창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결국 가엘리오가 없는 동안 마감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한 맥길리스는 아침부터 급하게 타자를 눌러야 하는 신세였다.
공항에 마중 가는 것도 잊어버려 간신히 청소기나 돌리다 집에 돌아온 가엘리오를 맞이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어찌나 엉망이었는지 맥길리스는 일주일 내내 대청소에 시달렸고, 이불을 밟고, 커튼을 빨았으며 그 뒤로도 소파 밑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팝콘이나 나초 조각 같은 것들로 잊을만하면 잔소리를 들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지 가엘리오의 목소리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이제 웬만하면 팝콘은 안 나올 때도 됐는데. 맥길리스가 제 죄도 모르는 채로 어깨를 움찔하는 사이,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맥길리스는 급하게 Ctrl+S를 누르고 노트북 전원을 끄는 대신 책을 펼쳤다. 하필이면 잡힌 책이 Life of Agunika라 가엘리오의 눈치를 보게 생겼으나 별 수 없었다. 어떤 걸로 혼이 나든 이 소설이 걸리는 것보단 나았다. 누구라도 본인 조상으로 이렇고저렇고…한 내용을 보는 것은 싫지 않겠는가. 맥길리스가 손에 잡히는 아무 페이지나 잡아 넘기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가엘리오.”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한 거야, 맥길리스?”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맥길리스가 돌아보면 인상을 잔뜩 쓰고 문 앞에 선 가엘리오는 바닥이 울리도록 맥길리스의 앞으로 와 들고 있던 종이를 탁, 소리가 내려놨다.
청소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안도한 맥길리스의 눈이 종이 위의 글자를 훑는다. 카드 명세서였다.
맥길리스가 생각하기에 전자 명세서를 보내주면서 굳이 종이로 된 명세서를 보내주는 카드사는 회계 감사를 해보면 분명 다른 쪽으로 돈이 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장부엔 카드명세서 발행에 필요한 원가로 기재하고 다른 데 비자금을 챙기는 거다. 흔한 수법이지. 맥길리스는 이 부정한 카드회사의 내부감사가 꼭 이뤄지길 바라면서, 그러나 지금 당장 고발을 할 수는 없기에 가엘리오 앞에서 “아…….”하고 침음을 흘렀다.
대문짝만하게 쓰인 이번 달 카드 결제액은 평소 맥길리스의 사용 금액을 두 배 정도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대체 이 ‘반다미남쿠’라는 건 뭐길래 카드값이, 얼마야 이게, 하나둘셋……. 120만 걀라나 썼잖아?”
가엘리오의 표정은 심각했다. 내가 네 사생활에 간섭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혹시 사행성 도박이라도 하는 거야, 맥길리스? 도박 중독은 고칠 수 있대. 지금이라도……. 심각한 표정으로 상담센터의 전화번호를 검색해보는 가엘리오가 당장이라도 맥길리스의 이름으로 상담 예약을 잡을 것 같아 맥길리스는 부랴부랴 이실직고했다. 아니. 이 경우엔 이실직시인가?
맥길리스가 휴대전화를 꺼내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면 ‘슈퍼걀라르호른대전X’라는 묵직한 성우의 음성과 함께 ‘오르펜즈~’,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너 설마 그 끔찍한…!”
가엘리오의 기겁한 얼굴이 마치 당장이라도 짐을 싸 프랑스로 날아갈 듯했다.
“아니야, 가엘리오. 내 말을 들어봐.”
『감사부 소속 무관으로서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할 거야.』 맥길리스가 가엘리오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사이 로딩을 마친 게임의 메인화면에선 메인 캐릭터로 설정해 둔 가엘리오의 고정 대사도 흘러나왔다. 더욱 더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가엘리오의 시선을 마주하며 맥길리스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설명하게 위해 노력했다. 스러진 역사는 어느 순간, 어느 시점에서 신화가 되곤 한다. 걀라르호른은 그 시점을 지나치게 빨리 맞이하여 상상력을 가미, 보편적인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빌어 나타나게 되었음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노라고. 맥길리스의 일장연설을 주욱 들으며 간신히 납득하는 듯했던 가엘리오는 가장 중요하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어디가 120만 걀라나 쏟을 부분인데?”
맥길리스의 격납고에는 SSR 키마리스도, SSR 키마리스 트루퍼도, 녹색의 그레이즈 리터와 맨로디, 푸른색의 슈발베 그레이즈와 검고 커다란 그레이즈도 있었으나 흰 색의 기체는 없었다. 가엘리오가 그걸 보면서도 그 어떤 이상함도, 혹은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 맥길리스는 답답해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 준 얘기는 모두 이해했지, 가엘리오?”
“응.”
“보상을 받으려면 내가 게임 속 전투에서 이겨야 해.”
“응.”
“이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카드가 필요해. 더 높은 공격력의 카드가.”
“그래.”
“그래서 새로운 카드를 뽑기 위해 롤아웃을 하는 거야.”
“그 전투에서 이기면 뭐가 좋은 건데?”
“보상을 얻을 수 있어.”
“보상이 뭔데?”
“새로운 카드.”
가엘리오는 열심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혀, 이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카드를 얻기 위해서 카드를 얻어야 한다는 논리의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가엘리오 앞에서 맥길리스는 롤아웃 창을 열었다.
차갑고 검은 우주에서 창백하고 푸르게 빛나는 바알 카드가 이번 이벤트 대상 카드였다. 성능적으로는 이번 목성 해적소탕 이벤트가 끝나는 동안 공격력이 두 배, 스킬발동확률이 17% 올라가고, 미적으로는 우주를 배경으로 고독하게 떠있는 바알의 비장한 모습이 고아하고 세련된 미를 내보이는 카드다. 120만 걀라, 580연을 돌리고도 아직도 맥길리스가 손에 넣지 못한, 바알.
“그으렇단 말이지.”
“너도 한번 해볼래?”
맥길리스는 휴대전화를 가엘리오 쪽으로 밀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훨씬 빠르다. 가엘리오가 여전히 미심쩍고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롤아웃 버튼을 누르면, 열 기의 기체들이 주르륵 뜬다. 황금색의 베일이 세 개. 설마설마 하면서도 맥길리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액정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네가 말한 게 이거야, 맥길리스?”
곰곰이 액정을 보던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게 휴대전화를 넘겼다. 눈을 비비고, 허벅지를 꼬집고, 혀를 깨물어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희고 푸른 날개, 금빛의 우아한 쌍검, 언밸런스하게 귀여운 이마의 뿔까지.
틀림없는, 바알이다.
120만하고도, 방금 전에 5만 걀라를 더 결제해 얻은 아그니카 카이엘의 무장기. 걀라르호른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 기체.
“가엘리오.”
“응?”
“너는 역시, 내 하나뿐인…….”
맥길리스는 감격에 겨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푸른 눈에 스펙트럼이 넓은 보라색 머리카락, 어느 옷이나 잘 어울리고 어느 것이나 될 수 있는 가엘리오가 있어야만 맥길리스는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그걸 나는 운명이라고 부르지, 가엘리오.
그러나 말은 아껴둬야 했다. 섣불리 무언가를 입 밖에 냈다가 일을 망치는 일은 신화에도, 민담에도, 속설로도 존재했다. 맥길리스는 말없이 가엘리오를 끌어안고 두 뺨에 키스한 다음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가엘리오가 돌아온 뒤로도 청소와 잔소리에 시달려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간지러워, 맥길리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면 아직도 햇볕 냄새가 났다. 바깥의, 아니 어쩌면 아주 약간, 프랑스의 태양일지도 모른다. 맥길리스는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처럼 갸릉댔다.
그 뒤로 맥길리스는 종종 가엘리오보다 일찍 일어났다. 가엘리오가 일어나기 전, 잠이 든 긴 손가락으로 롤아웃 버튼을 누르면 한정 이벤트 카드가 나오는 확률이 유난히 높았다. 반다미남쿠의 이름으로 나오는 카드 명세서의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으므로 가엘리오의 잔소리는 더 심해졌지만 맥길리스는 게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불행히도 아직 바알을 타야 할 아그니카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맥길리스 본인의 카드도 나오지 않아 바알은 제 짝을 찾지 못한 채 얌전히 격납고에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맥길리스는 일단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카드값이 궁해지니 막혀있던 원고도 어떻게든 써지기 시작했고, 하늘같은 이해심의 가엘리오는 마침내 ‘슈퍼걀라르호른대전X’를 깔았다.
“맥길리스 이거 좋은 건가?”
단지, 무료 다이아로만 카드를 뽑는 가엘리오가 과금 랭커인 맥길리스보다 좋은 카드를 갖고 있는 것만이 고통이었다. 맥길리스는 무과금으로 한 방에 이벤트 배수 카드를 뽑은 가엘리오의 계정과 방금 전 결제버튼을 누른 제 계정을 비교해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친우, 동료, 사랑, 운명, 그 무엇이 됐든 가엘리오의 SSR은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Fin.
'Orphans > 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어공주 맥가엘 (0) | 2017.08.12 |
---|---|
[맥가엘] 리퀘박스 여덟 번째 (0) | 2017.06.02 |
[맥가엘] 새가 말했다 01 (0) | 2017.05.27 |
[맥가엘] 리퀘박스 일곱 번째 (0) | 2017.03.28 |
[맥가엘] 리퀘박스 여섯 번째 (0) | 2017.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