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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KISE☆에 해당되는 글 10건
- 2014.12.04 [옐로우캡 우09] 녹황 소설본 수량조사
- 2013.11.10 [적황]
- 2012.10.20 [녹황청] Triangular
- 2012.10.04 [립황] 목소리의 맛
- 2012.10.01 [녹황] 꿈의 대화
글
[옐로우캡 우09] 녹황 소설본 수량조사
황우온리 옐로우캡 [우9] '내 동경의 대상과 교육계가 완전 수라장'에 위탁하는 녹황 소설 'Jigsaw Puzzle into Place'의 수량조사를 합니다. 몇 부나 뽑아야 할 지 감이 안 와서 하는 수량조사입니다ㅠ 꼭 사실 분만 응답해주세요.
고등학교 졸업 8년 후 정도의 시점으로, 연예인이 된 키세와 정신과 의사가 된 미도리마의 이야기입니다
A5/중철/24~28페이지/2500~3000 - (현재 절찬 작업 중이라 아직도 예상이 안되는 점 양해 바랍니다ㅠ)
수량조사는 이 쪽에서! ▷ http://me2.do/xwSng2s2
▽Sample
1.
“하하, 서프라이즈!”
“왜 말이 없어요? 반갑지 않슴까?”
“조금 반겨주라고요, 미도리맛치.”
“와 미도리맛치가 녹아내려요. 신기하다. 만져봐도 됨까?”
“왜… 왜, 말을 안 해요? 저도 그런 거 하기 싫었어요. 누가 그딴 얘기 다신 꺼낼 줄 알고. 이길 수 있었는데……. 저도 3점슛 쏠 줄 알아요!”
“…얌전히 들어오라는 거다, 키세.”
2.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들어오자마자 코코아 내놓으라고 말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먹고 싶었어요.”
“사먹으라는 거다.”
“일주일 동안.”
“…….”
“집에 처박혀서 TV만 보는데, 코코아 선전이 나와서 그 때부터 갑자기 먹고 싶었어요. 일주일 동안! 난 집 밖에 일주일 동안 못 나갔다구요!”
빼애애애액-
그런 효과음이 있다면 미도리마는 기꺼이 그 단어를 키세의 옆에 오려 붙여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끄에에엥 코코아! 코코아! 이건 뭐, 다섯 살 짜리 애도 마트에서 이렇게 울진 않을 거다. 미도리마는 한숨을 내쉬며 전기포트를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 훌쩍거리면서 소파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는 키세는 아닌 게 아니라 안 본 사이에 꽤 수척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상담을 왔을 때가 3주 전이었나.
미도리마는 스케쥴러를 살펴보았다. 3주. 미도리마와 키세는 늘 그 정도의 간격으로 만났다. 일주일은 너무 짧고, 한 달은 너무 길어 그 중간인 보름인데 시간이 안 맞으면 어영부영 미뤄지고 하는 애매한 시간.
그 때는 종일 시간이 날 것 같다며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겸사겸사 진찰도 좀 받고?
키세는 늘 자신의 문제를 가볍게 말하고 제 가치를 과소평가했다. 처음 농구부에서 봤을 땐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오만했던 키세 료타에게 이런 평을 내릴 줄은 15년 전의 미도리마도 몰랐을 것이다.
고작 지역 학생 모델에 불과했던 키세가 그럭저럭 지나갈 만한 사람들이 알아보는 연예인이 된 건 스무 살의 얘기였다. 패션모델로 활동하기엔 걸음걸이며 포즈를 배울 시기를 농구로 훌륭하게 날려먹고, 연예계로 진출할 생각은 없다던 키세를 미도리마는 대학교 1학년 때 버스 정류장에서 봤다. 청바지 광고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키세를 보게 되는 빈도가 점점 늘었다. 다음해 여름에는 TV에서 3점 슛을 쏘는 키세가 나왔다. 탄산음료 광고였다. 카피라이트가 뭐였더라. “원하는 건 언제나 놓치지 않아”. 촌스럽기 그지없는 대사였는데 키세 료타의 데뷔를 말할 땐 빠지지 않는 말이었다. 인지도를 높인 체육계 연예인 특집 예능에서도 그렇게 소개됐다. 프로만큼은 아니지만 화려했던 과거 영상이 나왔다. 그 영상들 사이엔 테이코 농구부원들이 섞여 있었고, 덕분에 미도리마는 졸업할 때까지 별명이 ‘슈터’였다.
원하는 건 언제나 놓치지 않아, 이 광고는 안 본 사람이 없지만 키세 군은 실력에 비해서 운이 안 따랐다고 하던데요.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던 거죠.
방금 전 영상이 농구부 마지막 경기였다고.
네. 그 뒤로는 못하게 됐슴다.
방청객들의 안타까운 탄식 뒤로 마지막 경기에서 분에 못 이겨 펑펑 울어버렸다는 키세의 부끄러운 고백과 그 뒤로 연예계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사회자의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그 날이었나. 키세가 술에 잔뜩 취해 처음으로 미도리마가 살던 집 문을 두드렸던 건.
그 다음 해에는 서점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포스터에서 키세를 볼 수 있었다. 연예인 키세 료타의 화보집. 심야 단막극에 출연하고 일일드라마에도 나왔다가 어쩌다보니 황금시간대 드라마도 맡고, 운이 좋았슴다.
키세는 낄낄대며 말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삼십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미도리마가 문을 두드리고, 키세의 등을 두드리고, 양변기의 레버를 내렸다.
키세가 유명해 질수록 미도리마의 집에 들르는 횟수도 빈번해졌다. 평소와는 다른 비척대는 발소리와 미도리마를 부르기 전 한 번 멈추는 박자를 미도리마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미도리마는 대학을 졸업했고 레지던트까지 거쳐 새끼 전공의 타이틀을 달았다. 미도리마는 키세에게 제 명함을 건넸다. 지금 떠올리면 당시의 미도리마는 어찌됐든 전공의가 된 걸 자랑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와, 미도리맛치 대단함다! 멋있슴다!” 손뼉을 짝짝 치면서 키세는 명함을 자세히 보다 물었다. 풍선처럼 부풀어 있던 감정이―
“미도리맛치는 뭔가 그런 거랑 안 어울리는데. 왜 그런 걸 담당으로 선택했슴까?”
펑.
키세의 의문은 어찌보면 타당했을 것이다. 의대에 입학했을 때부터 미도리마는 외과에서 탐내는 인재였고 본인도 맘이 없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번드르르 해 보이지만 응급상황이라도 생기면 밤낮 없고, 수술이라도 들어갔다간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이 소요되는 이 직종에서 외과는 탑클래스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이 필수인 마당에 책상 앞에 붙어 공부만 하던 애들이 버텨나기야 하겠는가. 그 와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도합 6년이나 꾸준히 농구를 한 데다 전국구 수준의 대회에서도 강호라 불리던 학교의 에이스였던 학생이라니. 자세히 뜯어보면 학점도 좋고 손놀림은 전에 없이 섬세해 모자란 게 없다. 저건 무조건 외과다! 안돼도 외과에서 끌고 간다! 라고 다짐했던 교수들은, 그러나 미도리마가 제출한 전공 선택지를 보고 좌절해야만 했다.
이후 수많은 회유와 협박을 감히 키세는 상상할 수 있을까.
키세가 멀쩡한 정신으로 미도리마의 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났을 땐 미도리마도 키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그의 첫 매니저는 골초라 키세도 몇 대를 얻어 피웠고 술 마실 때는 그도 얇은 필터를 물게 되었다. 립스틱처럼 생긴 새빨간 열 개들이 담뱃갑을 미도리마는 매트리스 틈새에서 발견했다. 불면증은 스케쥴이 없을 때 더 심해졌다. 키세는 단순히 잠이 줄어들었을 뿐이라 주장했지만 하루 두 시간의 수면을 누구도 잠이 줄었다는 수준으로 말하진 않았다.
“새삼스럽게.”
인터하이 이후론 늘 그랬슴다. 학교 다니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지갑 안에 굴러다니는 알약은 수면유도제와 진통제였다. 수면제를 처방받으려면 정신과를 가야 되는데 그건 싫고, 비 올 것 같으면 무릎이 쑤시거든요. 이제는 굳은살이 박였던 흔적조차 없는 매끈한 손으로 키세는 알약을 두 개 털어 넣었다.
(중략)
“앞으로 잘 부탁함다, 미도리맛치.”
“무엇…을 말이냐.”
“잠잠해질 때까지 이 집에서 신세지기? 아침에 다녀와요,도 해주고 올 때는 잘 다녀왔어? 라고도 해줄게요.”
“뭣 때문에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미도리맛치도 알지 않슴까. 앞으로 2주치 스케쥴이 전부 캔슬됐슴다. 기자들은 밖에서 죽치고 있을거고. 난 집에서 코코아 먹고 싶어서 죽을 거고, 팬들은 팬들대로 난리지. 무섭다구요. 자고 일어났는데 슬쩍 문 열어 보면 포스트잇이 쫙 붙어있다니까요. 오빠가 남자를 좋아한다니 응원할게요, 같은 건 귀엽기라도 하지. 더러워서 못 봐주겠다는 것도 있고, 아니 그전에 난 연애를 안하는데!”
“…내가 거절하면?”
“거절할 거에요?”
선조들이 말하길, 웃는 낯엔 침 못 뱉는다고. 다 마신 코코아 잔을 자연스럽게 내미는 키세에게, 또 그걸 습관적으로 받아들고 설거지하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미도리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얘기나 하는 거다, 키세.”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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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황]
지인 그림 보고 예전에 썼던 적황(→청)을 발굴
나는 너를 오랫동안 지켜봐왔지. 우리가 공유한 시간만큼, 누구나, 서로를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도, 너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지. 키는 그 시절부터 훌쩍 커 있었지만 속은 그 어리고 풋내나는 중학생이던 시절을 전부 봤어. 이제 막 싹을 틔운 풋풋한 여린 잎이 매일 양분을 받고 자라는 것도, 마디가 굵어져 봉오리가 움트는 것도, 그리고. 그리고 너무 이른 봄에 계절을 잘못 알아버린 꽃이 채 펴지 못하고 다시 불어 온 한파에 얼어 말라 비틀어지는 것도, 전부, 전부 보고있지.
"그래서. 슬퍼, 료타?"
침대를 바꿀까. 한밤중에 벨을 눌러 쳐들어 오는 것도, 제 집 마냥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드러눕는 것도 익숙해졌지만 원체 키가 큰 그에게 1인용 싱글침대가 맞을 리가 없다. 작은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천장을 본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천장을 바라보는 너는 어째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의아했다. 이제 료타는 모든 걸 체념한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키세 료타는 아오미네 다이키를 사랑한다. 거기에 대해선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다. 사람의 몸이 70%의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과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지구가 공전하며 태양의 주변을 도는 것처럼 그저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서 왜 물이 70%를 차지하고 있는지, 중력이 왜 존재하는지, 지구가 왜 도는지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왜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뿜으며 식물은 왜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산소를 내뿜는지 감히 인간의 영역으론 짐작도 할 수 없는 부분을, 건드릴 수 없는 당연한 전제에 대하여 이유를 물을 수 있을까? 키세 료타는 단지 아오미네 다이키를 사랑할 뿐이다. 다이키가 료타에게 특별했던 건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인 거다.
"왜 울지 않아?"
"…아카싯치는, 꼭 이럴 때 그런 걸 꼬치꼬치 물어야 돼요?"
"내 침대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정도는 물어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내려가든가."
"바닥에서 자면 허리 아픔다."
"그럼 그냥 말해 봐."
들어줄 사람도 없잖아? 그렇지만 말하고 싶지, 료타?
그 말도 안되는 이유에 빌붙어 나는 키세 료타를 사랑한다. 다만 저 한심하고 멍청한 꼴을 그대로 답습하고 싶진 않아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외롭고 불쌍한 키세 료타. 언제나 웃어야 하는 키세 료타. 속에서부터 서걱서걱 말라부스러지는 네 옆에서 나는 아주 가끔, 이렇게 물을 뿌린다. 말하고 싶지? 웃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데, 억지로 웃어야 되는 불쌍한 료타. 나에게만 말해 줘. 나에게만 기대 줘.
머뭇거리던 입술에서 긴 한숨이 뿜어져 나온다. 겨울의 찬기를 머금은 숨이 방 안에 얼음처럼 퍼진다. 얼음의 조각을 끌어안고도 아름다운 너를 보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너는 죽어서도 이토록 아름다울까.
"…슬픈,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슬프다는 건 아니에요. 사실, 슬퍼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이건 화가 난다. 난 화가 났어요."
"뭐에?"
"피임교육은 질리게 들었을 텐데 제대로 처리도 못한 아오미넷치의 멍청함과 마찬가지로 피임 생각 안 한 그 멍청한 여자가 한심해서, 한심해서 정말 질릴 정도로 화가 나요! 화가! 멍청한 것들! 나이가 몇인데! 지들이 뭘 한다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아오미넷치는 아직 더 갈 수 있는데! 그 창창한 앞길을 멍청하게 날려버린 그 멍청함에!! 가슴만 밝히니까 그 꼴이 되는 거 아냐!!! 바보같은 자식!! 멍청한 새끼!!!"
"그리고?"
"그리고요? 그리고라고? 그래요, 나한테도 화가 나지. 저 멍청한 새끼를 그래도 좋다고 좋아하고 있는 나한테도 화가 나지. 화 나요. 짜증나고, 당장 목을 졸라서 죽여버리고 싶어. 거울을 보면, 오늘 나한테 씻고 자라고, 그런 개소리 하지 말아요 아카싯치. 거울을 보면 말이죠, 한심한 얼굴이라서 진짜 당장 어디 갖다 쓰레기통에 쳐박아 버리고 싶어요. 지금 당장!"
아아. 민원 들어올 지도. 힐끗,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새벽 한시, 십칠분. 민원 들어오겠지. 평일인데. 주말도 아니고. 핏발 선 키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 제풀에 지쳤는지 다시 드러눕는다. 가지런히 누운 너는, 순식간에 생기를 잃어 관에 누운 시체가 되버린다. 그래. 그 작은 침대에 억지로 몸을 구겨넣고 가만히 누운 너는 시체같다. 작은 관에 갇힌 불쌍한 너. 아름다운 너.
"잘 거야?"
"잠들겠죠. 피곤하니까."
"불 꺼줄게."
"옷 벗고 자란 말은 안해요?"
"료타는 어린 애가 아니니까. 그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불을 끄기 위해 손으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내면 물끄러미, 네 시선이 박힌다.
"아카싯치는, 이런 저를 도대체 왜 좋아해요?"
"네가 다이키를 좋아하는 이유를 나에게 설명할 수 있어?"
"……."
"그런 거야. 난 좀 더 있다 잘 거니까 내 자리는 비워둬. 너같이 덩치 큰 녀석을 구석으로 몰아넣기엔 나는 보다시피."
으쓱 어깨를 한 번 올리면 네가 꾸물꾸물 벽 쪽으로 딱 붙어 눕는다. 덩치는 나보다 배는 큰데 그러고 있는 꼴이 우스워 한 번 픽 웃으면 샐쭉하니 눈꼬리를 올려 불만스런 표정으로 쳐다본다.
"잘 자, 료타."
"아카싯치가 올 때도 깨어있을 것 같지만 일단 미리, 아카싯치도 잘 자요. 내일 아침에 뵙겠슴다."
꾸벅 인사를 하고 너는 다시 천장을 바라본다. 우리 집 천장에는 하나하나 세어 볼 무늬도 없는데.
불을 끄고, 눈을 감은 너를 본다. 작은 침대에 몸을 우겨넣고 가지런히 누워있는 너. 꽉 찬 그 침대는 너의 관이다. 말라비틀어져서 네가 마지막으로 돌아올 곳은 여기다.
침대를 바꾸는 건 고려해볼까.
죽어서도 아름다울 너라면 지금 당장, 죽어버리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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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황청] Triangular
그 유명한 초시공신데렐라....가 아니라 생각해보니 저건 사카모토 마야였죠?
넹. 키세가 양날개엔딩을 맞이하는 정신나간 삼각관계.... 청황도 좋고 녹황도 좋고... 포기할 수가 없었던 나의 이 욕심....
이라고 할지 삼각관계는 그 때는 좋은데 늘 엔딩을 맞이하려면 씁쓸한 게 결국 한 명은 버려지는게 싫습니다.
사랑하는 건 똑같이 사랑하는데 왜 보답받지 못하는 거죠. 그런 느낌으로 썼지만 분량이 정신나갔어....
저렇게 원고를 했으면 하루에 카피본 두권은 쓴 셈인데 기가 막힐 지경. 그렇다고 하루에 쓴 건 아니고 합해서 진짜 14시간 정도 투자한 것 같지만. 어쨌든 이 이후에 진이 빠져서 쿠로바스 쪽은 건드리질 못하겠어요.... 힘드네요...
키세는 너무 예뻤다...........ㅠㅠㅠㅠㅠㅠㅠㅠ
1.
키세 료타는, 미도리마 신타로가 불편했다.
왜냐고 물으면 아마 어영부영하다가 그냥 얼버무리고 말겠지. 미도리마가 딱히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소문이 나쁜 것도 아니다. 190cm가 넘는 장신에도 위압감 같은 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인상이고, 성적도 농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에 오히려 성실한 연습벌레다. 그럼에도 키세는 미도리마가 불편했다. 늘 앞을 똑바로 바라보는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일순 사람을 꿰뚫어버리는 것만 같고 그가 종종 키세를 빤히 바라볼 때면 키세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불쾌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테이코의 멤버들이 모두 각자 다른 학교로 진학했을 때 키세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조금 안도했다. 문득 눈이 마주치면 그 눈동자가 순식간에 자신을 칭칭 옭아매고 무장해제되어 까발리는 듯한 뱀 앞의 먹이같은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미도리맛치가 어쩐 일임까."
마주보고 싶었지만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을 키세였다. 미도리마에게 먼저 문자가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할 얘기가 있는 것이다. 나와. 간단명료한 문자에서 그 눈동자만큼이나 강한 의지를 느꼈다. 미도리마가 무슨 얘길 할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으면서도 직감적으로 키세는 들키고 싶지 않은 사실을 미도리마가 알고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아오미네의 집에서 나오던 참이었지만 이 상태에서 미도리마에게 잡혔다간 원치 않은 부분까지 모조리 까발려질 지도 모른다. 뭔데여, 미도리맛치. 문자로 하면 안됨까?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나와. 그리고 지금 이 상태. 북적거리는 저녁 시간의 패스트푸드점에서 먼저 불러낸 주제에 미도리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괜히 다 마신 컵의 얼음을 빨대로 뒤적거리며면서 키세는 어둠이 내린 창 밖에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피곤해 하는 듯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배려심 따윈 없이 사납고 전희도 후희도 없다. 키스도 없고 그냥 말 그대로 섹스. 섹스파트너? 섹스프렌드? 프렌드까진 되려나? 아오미네에게 키세의 위치가 어디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잊고 있던 나른한 둔통이 다시금 상기되어 살풋 인상을 찡그리면 아무 말도 없이 키세를 보고만 있던 미도리마가 어느 새 그걸 캐치했는지 입을 열었다.
"어디 상태라도 안 좋은거냐."
"별로 그런 건 아님다. 어쩐지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요."
"아오미네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키세는 그러나 미도리마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흠칫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에? 갑자기 거기서 아오미넷치 얘기가 왜 나옴까?"
설마, 하면서도 미도리마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어 키세는 일단 발뺌했다. 다시 한 번 유리창으로 힐긋 자신의 얼굴을 보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수습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얼굴이라면 미도리마에게 먹힐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키세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딱히 얘기하지 않아도 네가 더 잘 알고 있는 거다, 키세."
그 말에 휘적거리던 키세의 빨대가 움직임을 멈췄다. 미도리마의 눈동자는 사람을 꿰뚫는다. 어떤 포장도, 거짓말도 미도리마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은 떠벌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심한 미도리마의 성격 탓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라고 봐도 좋은걸까. 미도리마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걸까. 아니 언제부터? 머릿 속으로 햇수를 헤아려본다. 중3, 고1, 고2 족히 3년이다.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던걸까. 미도리마는 알면서도 눈 감아 준걸까. 자신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머릿 속이 백지장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도 미도리마는 그저 키세를 보고만 있었다. 핏기가 싹 가시며 새하얗게 질려가는 키세의 얼굴에 미도리마는 살풋 한 쪽 눈을 찡그리다가 얕은 한숨을 내뱉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는 않는 거다."
"…미도리맛치를… 그렇게 쉬운 사람으로 보진 않슴다."
미도리마가 말할 때까지 키세의 안에서 미도리마가 누군가에게 사실을 얘기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와중에도 그런 가능성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미도리마의 고지식함이 키세 안에도 자연스럽게 가정된 덕분일까. 미도리마가 알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있다니 불현듯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알았슴까."
"졸업한 직후에."
"그렇게 빨리요? 티날 일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치가 빠른 거다."
졸업 직후라니 거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잖아.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아 키세는 지금까지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등을 의자에 기댔다. 딱딱한 등받이가 차가워 옷 너머로도 한기가 올라온다.
"…이젠 적당히 해두는 거다."
"이 때까지 얘기한 적도 없잖슴까. 그런데 갑자기 왜…"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해도 흩어지는 말들을 붙잡을 수가 없다. 갈라진 목소리는 아오미네 때문일까, 미도리마 때문일까. 자꾸만 깜박깜박하는 정신을 붙잡고 있으면 머릿 속엔 왜? 라는 물음만이 남아있다. 갑자기 왜? 지금가지 참고 있었다면 앞으로도 말하지 않으면 안됐을까? 딱히 미도리마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혐오감 때문이라면 진즉 얘기했을텐데 갑자기 이 시점에 왜?
"나는 남의 일에 끼는 건 성미에도 맞지 않고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확실하게 모르면서 '친구'라는 명목으로도 이런 데에도 끼어들 이유는 없지만…"
그 다음, 처음으로 미도리마는 잠깐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가 숨을 들이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거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미도리마는 그렇게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가뜩이나 혼미한 정신이 미도리마가 한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끄러운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담담하게 내뱉은 말은 오히려 현실성을 뚝 떨어뜨려서 키세는 무심코 허벅지를 꽈악 꼬집었다. 아파! 본인이 꼬집고도 얼얼할 정도로 오래가는 통증에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으려면 미도리마의 다시 꿈같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아오미네를 좋아하고 있으니 혐오할 리는 없겠지."
"…그…렇죠?"
"내가 이런 말 하니 이상한가?"
"너무 피곤해서 헛걸 들은 거 같슴다. 당장 집에 가서 자고 싶어요."
"네가 들은 게 진짜니 자기 자신을 의심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언제부터 그랬는데요?"
"모르는 거다. 하지만 자각했던 건 작년인가."
"그것도 꽤 오래됐네요, 미도리맛치."
"알아들었으면 아오미네와의 관계, 그만 두는 게 좋은 거다."
"어째서요?"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미도리마의 말과 아오미네와 키세와의 관계는 별개의 문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확실하게 존중할 줄 아는 미도리마가 아오미네와의 관계를 그만두라니, 설마 질투? 라고 하기엔 미도리마가 자신을 좋아한 것도 너무 오래됐다. 중학교 동창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는데 결국 중점을 두고 있는 건 아오미네라니, 키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섹스 말고는 남은 게 없는 빈털터리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아오미네를 뼈저리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서글펐다.
"좋아하는 사람이 가망없는 짝사랑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혹사하는 꼴은 더 이상 못봐주는 거다."
"아오미넷치가 강요하는 건 아님다. 제가 먼저 매달렸고 좋아서 하는 건데요."
"널 갉아먹으면서 말인가. 애초에 네 성격이면 아오미네에게 좋아한다고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겠지."
좋아한다더니 순 거짓말인가. 가감없는 미도리마의 말은 정말로 냉정하게 자신을 파악하고 있어서 키세는 반박할 의지조차 잃어버렸다.
"가망없는 짝사랑이라고 하지 말아요. 미도리맛치가 절 좋아하는게 사실이라면 미도리맛치도 마찬가지잖슴까."
그러니까 이건 화풀이다. 짝사랑이란 게 얼마나 힘든지, 미도리마가 이 얘길 꺼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면서도 키세 료타가 미도리마 신타로를 좋아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무참하게 짓밟고 상처입히는 것은 키세가 상처입은 걸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은 못된 심보였다. 키세의 날카롭게 올라간 목소리에 잠깐 헛숨을 들이킨 미도리마의 어깨가, 무너진다.
그제서야 이건 실수였다고, 키세는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미도리마도 사람인데, 미도리마라면 자신과는 달리 이 정도쯤은 냉정하게 받아칠 수 있을 줄 알았다.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내가 주제 넘었던 거다. 그 정도는 확실하게 예상하고 있었어. 다만, 아무리 예상하고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 느껴지는 충격은 예상보다 훨씬 크군."
안경을 벗어 렌즈를 닦으며 인상을 찡그린다.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여 키세는 새삼 미도리마의 속눈썹이 무척 긴 편이라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어느 쪽이든 현실도피다. 세심하게 렌즈를 닦는 미도리마를 바라보며 키세는 이제는 녹아내린 얼음물을 빨대로 빨아먹었다. 곧 빈 컵의 공기가 빨대를 통과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그것 말고는 키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도리마가 다시 반듯하게 안경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면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미도리마의 눈동자보단 속눈썹이 신경쓰였다. 깜박일 때마다 길게 눈 밑에 그림자를 지우는 속눈썹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네가 그렇다면 아오미네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종용하진 않겠어. 반대로 제안을 하지."
"제안 말임까?"
"네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땐 반드시 아오미네보다 나에게 먼저. 필요하다고 느끼면 언제나 나에게 연락을 하는거다."
"제가 왜요?"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떠벌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냐, 키세."
그 말에 키세는 미도리마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황당함을 느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도리맛치가? 벙쪄서 하릴없이 미도리마를 바라보고 있으면 미도리마가 보일듯 말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거다. 시간이 늦어서 먼저 일어나지."
으에? 아니, 잠깐, 저기요 미도리맛치?
의자 다리에 걸고 있던 다리가 꼬여 우당탕탕 큰 소리가 나는데도 미도리마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가게를 나갔다. 뻗은 손이 목적지를 잃어 키세는 다시 허탈하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가, 어떻게 되는거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미도리마의 뒷모습은 방금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시도때도 없는 거냐, 키세! 나는 내일 시험이라고 말한 거다!"
"하지만 미도리맛치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달라면서요. 저는 미도리맛치의 말을 따른 것 뿐임다."
"평소에도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말을 다 잘 들으면 착한 아이겠죠. 저는 착한 아이가 아님다."
"그거라도 시인하니 다행인 거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불만만 잔뜩 내뱉는 것과는 다르게 뛰어왔는지 미도리마의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나갈 일도 없는 새벽 한 시인데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데다 가방까지 챙겨들고 온 것을 보니 오늘도 자고 갈 모양이었다.
"자고 갈검까, 미도리맛치?"
"네 응석 다 받아주고 다시 집에 갔다올 시간이 없는거다."
"헤헤, 그래도 받아줄 맘은 있는거네요."
"…시끄러워."
옷 갈아입는 것도 귀찮은지 씻고 나와 시트만 둘둘 감은 채 거실에서 헤실헤실 웃는 키세의 얼굴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위기감도 없는건가. 막 씻고 나왔는지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키세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어주며 도대체 왜 이런 녀석이 좋은 거냐, 나는. 수도 없이 물었던 말을 미도리마는 자기 자신에게 또다시 반문해본다. 몇 번이고 되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이 녀석을 좋아한다. 그 고백 이후로 벌써 1년이 넘었고 처음에는 미안하다는 듯 미도리마를 연락하던 키세도 뻔뻔해져서는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해 미도리마를 불러냈다. 부른다고 냉큼 달려가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키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기쁜 것은 어쩔 수 없다.
서랍 한 켠을 뒤져 미도리마가 갈아입을 옷을 내주고 키세는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위로라든가 말은 그렇게 해도 키세가 미도리마를 불러내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미도리마를 불러내는 날은 백퍼센트 키세가 아오미네랑 자고 온 날이란 걸 알지만 둘 다 암묵적으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키세 대신 키세의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전문용어가 그득한 의학서적을 뒤지며 공부하는 미도리마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키세는 입을 열었다.
"미도리맛치 안 잡니까?"
"내일이 시험이라고 아까도 얘기한 거다. 너도 시험기간이잖아?"
"원래대로라면 저도 내일 시험이지만 촬영이 있어서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다른 날 치기로 했슴다."
"스탠드가 눈 부시면 안대라도 하는 거다."
"답답해서 싫슴다. 그냥 얼른 자요, 미도리맛치. 저라면 모를까 미도리맛치는 벼락치기 하는 것도 아니잖슴까. 여기."
그렇게 말하며 매트리스를 팡팡 내리치면 미도리마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하면서도 결국 스탠드를 끄고 키세의 옆에 누웠다. 혼전순결을 지킨다더니 누구와는 다르게 미도리마는 키세와 같이 자면서도 한 번도 엄한 짓은 한 적이 없었다. 도발하듯이 미도리마의 품에 파고들면 몸을 뒤로 빼다가도 벽에 닿아 갈 곳이 없어지면 한숨을 내쉬고는 미도리마는 팔을 둘러 키세를 껴안았다.
이기적인 걸 알지만 이 체온이 맞닿을 때 드는 안정감이 키세는 좋았다. 전희도 후희도 없는 거칠기만 한 섹스를 끝내고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아오미네와 몸만이라도 연결된다면 그걸로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한 번 이런 식으로 체온을 느끼니 제법 지치는 일이었다고 키세는 실감했다. 홀로 집에 돌아왔을때 문득 느낀 허무가 무섭도록 싫어 미도리마를 불렀다. 도와줘. 그렇게 말했었나.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문 앞에 그저 쭈그리고 앉아있으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생각해보면 그 땐 고3이었고 미도리마는 의대를 진학한다고 바빴을 텐데 문을 열면 미도리마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서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 이유를 키세는 지금도 모른다. 그냥 울다가 등을 토닥거리는 그 리듬과 품이 좋았던 것 같다.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 같아서 키세는 미도리마를 놓지 못했다.
"미도리맛치 진짜 절 좋아해요?"
"인정하긴 싫지만 널 좋아하는 거다, 키세."
"그렇구나."
나도, 좋아한다고 대답해 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키세는 까무룩히 잠에 빠져들었다. 별로, 대답을 바라진 않는 거다. 잠결에 얼핏 미도리마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키세 군 여자친구 있어?"
다음 날 미도리마는 가볍게 아침밥을 챙겨두고 키세를 깨우고는 집을 나섰다. 아직은 어슴푸레한 시간이었는데도 도서관에 가서 한 번 더 책을 봐야된다고 했다.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희미한 온기만이 남아있는 옆자리가 추워서 결국 키세도 본의 아니게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촬영장의 코디가 옷매무새를 점검해주다 말고 그렇게 물어 키세는 뜨끔하면서도 태평하게 물었다.
"여자친구 없슴다. 알면서 왜 그럼까."
"그치만 여기, 키스마크 아냐?"
그렇게 말하며 코디가 손 끝으로 짚은 곳은 목 뒤의 어깨 쪽이었다.
"옷으로는 가려지니 별로 상관은 없지만 키세 군 가끔 여기에 키스마크 달고 온 적 있어. 여기에만 딱 하나. 굉장한 여자친구네. 모델 일 하는 거 터치 안해? 알면서 남기는 거지? 벗기는 순간, 짜잔 하고 나타나서 소유권 주장하는 거잖아."
"어… 아… 음, 그럴…까요?"
"그런거지. 여자친구가 키세 군 많이 좋아하나보다."
식은땀이 줄줄 나는 대화를 하면서 키세는 후보를 꼽았다. 아오미네한테는 늘 자국 남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는데다 적어도 어제는 저기에 아오미네가 닿은 적은 없다. 그럼 미도리맛치? 그냥 얌전히 안고만 자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왠지 속은 듯한 기분이 들어 키세는 뚱한 표정으로 촬영에 들어갔다.
"어이, 키세. 표정 풀어, 표정."
"죄송함다."
감독에게 사과를 하고 애써 촬영에 몰입하면서도 목 뒤가 몹시 신경쓰였다.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할 처지는 못되지만 아오미넷치도 남긴 적 없는데! 라고 생각하니 왠지 억울했다. 당장이라도 미도리마에게 전화해서 따지고 싶을 걸 참으면서 불현듯 자고 있는 자신의 목을 가만히 물었을 미도리마를 생각하니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키세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 지금 표정 좋았어! 카메라에서 눈을 뗀 감독의 말에 그렇슴까? 하고 외치며 키세는 맘을 고쳐먹었다. 이번만은 봐주겠슴다, 미도리맛치.
목 뒷부분에서 간질간질하게 열이 피어 올랐다.
2.
아오미네 다이키에게, 키세 료타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가냐."
"내일도 스케쥴이 있어서요."
없어도 갈거잖아. 목 끝까지 그런 불평이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딱히 키세가 자고 가야 할 이유는 없었고 그런 관계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키세는 도쿄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착실하게 집에 돌아갔다. 자취하는 주제에 통금도 아니고, 나른하고 달콤한 애프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엉망진창이 되어 울며 그만해달라고 빌고, 매달리고, 애원했던 주제에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냥 멀끔한 얼굴로 나온다.
"아오미넷치도 적당히 나 말고 슬슬 다른 사람 구해봐요."
게다가 최근의 키세는 저런 얘길 꽤 자주하고 있었다. 한없이 가벼운 말투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키세는 늘 아오미네에게 둘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님을 상기시켰다.
"누구."
"요즘 스캔들 나고 있는 사람, 있지 않아요? 귀엽던데. 가슴도 아오미넷치 취향이고. 맨날 나보고 가슴없다고 불평하느니 그 쪽이 훨씬 낫잖아요?"
키세가 말하는 사람은 아마 지난 달쯤에 아오미네를 무섭도록 쫓아다녔던 여자였던 것 같다.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바로 프로로 입단해 희대의 루키로 떠오르고 있는 아오미네에게도 파파라치란 게 붙기 시작했다. 일부러 큰 가슴을 잔뜩 밀착시키며 팔을 끌어안는 여자가 그토록 천박해 보인단 걸 아오미네는 그 때 처음 깨달았다. 분명 취향은 큰 가슴이었는데 막상 그런 여자가 붙으니 혐오스러운 이유는 뭘까. 한 번만 같이 잠이라도 자자고 끈질기게 붙는 걸 쳐내는 와중에 사진이 찍혔고 다음 날 아침 스포츠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걸 키세가 못 봤을 리는 없었다.
"입 닥쳐."
"무섭슴다, 아오미넷치."
불편한 기억을 상기시킨 덕분에 부글부글 속에서 열이 끓어올라 세게 말했는데도 키세는 깔깔거리며 아오미네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쭉쭉 폈다. 자자, 스마일. 웃기는 커녕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얼굴을 한 대 쳐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훅 끼치는 비누냄새와 샴푸냄새가 달짝지근해 대신 아오미네는 키세를 바짝 끌어안고 키스했다. 아까까지와는 달리 희미하게 입 안에 치약맛이 남아있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아 전부 핥아먹을 듯이 강하게 빨아들이고 정신없이 넘쳐흐르는 타액을 삼키고 키세의 약한 부분을 훑어내린다. 가지 마. 우리가 이렇게 지낸 게 몇 년인데, 어디가 약한 지 어디를 좋아하는지 어디를 어떻게 자극하면 느끼는지, 아오미네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녹아내릴 정도로 흐물흐물하게 만들면 분명―――
"오늘따라 이상함다, 아오미넷치. 엄청 거칠었던 데다, 키스도 자주 하고 뭔가 새로운 AV라도 본검까?"
밀어낸 것은 키세였다. 열이 올라 새빨개진 얼굴로도 키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토록 농염했던 키스가 키세에겐 아무 의미 없었다는 듯, 신발장 앞에 있는 거울을 보며 아오미네가 붙잡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해 제자리로 돌린다. 뒤돌아 선 셔츠의 목깃 안에 아직까지도 선명한 키스마크를 상기하면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키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럼, 나중에 봐요 아오미넷치."
쾅- 문이 닫히고 키세는 허망할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젠장."
정작 키세는 아무렇지 않게 가버렸는데 방금 전까지 몇 번을 뺐는데도 자기 주장을 해대는 아랫도리에 아오미네는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사실 이렇게 열을 낼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재미로, 심심풀이로, 혹은 호기심으로 시작했고 그게 생각보다 훨씬 괜찮다고 생각해서 지속됐다. 테이코 시절의 애들이 알면 놀라 뒤집어질 테지만 아오미네와 키세의 관계는 제법 오래됐다. 중학교 졸업 전부터 고교시절에도 부활동과 키세의 스케쥴이 없어 시간만 맞는다면 만나서 뒹굴었다. 아오미네가 먼저 「올래?」라고 문자를 보내면 키세는 몇 시까지 간다고 간단한 답변을 보냈다. 만나는 장소는 늘 아오미네의 집이었다. 적당히 부모님이 안 계신 시간에 만나서 진이 빠질 때까지 뒹굴고 그럼 키세는 잽싸게 사라졌다. 체위를 포함한 모든 주도권은 아오미네에게 있었지만 딱 하나 안되는 건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 뿐이었다.
"넌 되고 나는 안돼?"
짧은 손톱에도 긁히면 따갑다. 화끈거리는 어깻죽지를 부여잡고 투덜대면 키세는 잔뜩 주눅 들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절대 안됨다, 아오미넷치. 전 모델이잖아요. 피팅할 때는 다 보인다구요."
동성섹스도 경험은 있어요. 한 번 해볼래요, 아오미넷치?
중학 3학년 겨울 즈음 키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여자하고도, 남자하고도 뒹굴었단 소리고 아오미네가 아니더라도 곱상하게 생긴 키세 료타에겐 상대가 많았을 거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나체를 보고, 그 표정을 봤을 터였다. 처음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괜히 생각하면 화가 나서 지금까지 눌러 삼켰고 언제 어디서 갑자기 불러내고 키세의 몸은 늘 흔적이 없었으니 키세에게 다른 타인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잘 관리된 하얀 피부에 딱 하나, 선명하게 남아있는 붉은 흔적을 보는 순간 아오미네는 거의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맛봤다. 키세가 야한 표정으로 허덕거리고 있는데도 방금 전까지 느끼고 있었던 간질간질하고 들뜬 열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머리가 찬 물을 끼얹은 것 마냥 차게 식었다.
"야, 이거 뭐냐."
믿을 수가 없어 손으로 문지르다가 뭐가 잘못 묻었나 싶어 벅벅 지우려고 하면 거친 마찰에 목 뒤의 여린 살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앗, 아… 아파요, 아오미넷치!"
"이거, 뭐냐니까."
분노를 씹어누르며 물으면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된 건지 울상이다가 아오미네가 계속 다그치자 뭘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뭐긴 뭐야, 키스마크지."
그 말에 키세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아아,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희미하게 홍조를 띠고 있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표정없이 뻣뻣하게 굳어서는 눈동자를 굴렸다.
씨발, 어떤 새끼길래. 진짜 제대로 뒹굴었나? 키스 마크를 남기는 걸 키세가 막지 못할 정도로?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오미네는 단 한 번도 키세에게 키스마크를 남길 수 없었다. 무심코 물어버리면 키세는 눅진하게 녹아있다가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작은 자욱은 커녕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아무리 거칠게 해대도 키세는 씻고 나오면 항상 말끔한 얼굴로 집에 돌아갔다. 소리를 하도 질러서 '그럼 이만'이라고 말하는 키세의 목소리가 반쯤 쉬었을 때야 겨우 만족해서 웃었던 것 같다. 그게 아오미네가 키세에게 끼칠 수 있는 최대의 영향이었다.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서 먹어치워버릴 것처럼 그 흰 피부를 물들여 버리고 싶었다. 누구도 아닌, 아오미네 다이키만이 키세 료타를 이렇게 만들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 흉폭한 독점욕에 아오미네 자신도 가끔 놀랐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키세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키세 료타? 훌륭하지. 지금은 농구도 그만뒀지만 처음으로 아오미네 본인을 카피했을 때의 그 오싹한 스릴은 잊을 수 없었다. 얼굴은 당연히 모델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을만큼 잘생겼고 곱상하다. 긴 눈꼬리를 예쁘게 접어 샐쭉하니 웃을 때는 누구나 심장이 두근거릴 테고 아오미네도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여기에 그런, 낯간지러운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감정을 붙이긴 싫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키세에게 말할 수는 없겠지. 키세에게 아오미네는 어차피 많고 많은 파트너 중 하나일테니.
결국 키세는 대답을 회피했고 대답 대신 아오미네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다. 그대로 휩쓸려 똑바로 묻지 못한 것이 계속 앙금으로 남아 아오미네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진짜 미치겠네."
들고 있던 휴지를 쓰레기통에 신경질적으로 던져넣고 아오미네는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래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섹스하고도 수음하는 자신은 정말 병신이었다. 아니면 미친놈이거나.
"미도리맛치, 저한테 뭐 잘못한 거 없슴까?"
키세가 음흉한 눈초리로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묻는 말에 미도리마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세를 본 것은 꼭 일주일 만이었다. 지긋지긋한 중간고사는 오늘에야 겨우 끝났고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잘까 생각하고 있으면 키세에게서 예의 호출이 들어왔다. 시험 끝나자마자 놀러가냐는 어머니의 말을 애써 변명해 넘기고 키세의 집에 도착하면 새벽 한 시. 도착하자마자 피곤해 보인다며 미도리마를 냉큼 침대에 눕히고 옆에 누워 도망갈 수도 없게 몰아넣고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빤히 모르는 척 하는 키세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일단 얼굴 좀 치우는 거다."
반짝반짝하지만 피로감이 진득하게 묻은 얼굴에 무슨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키세가 생각하는 미도리마 신타로는 아마 애인을 사귀어도 손이나 잡을까 싶은 정도겠지만 불행히도 미도리마는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앞에 두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키세는 늘 잠에 들기 위해 미도리마를 부르지만 미도리마에게 그 날은 그대로 잠을 설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꽉 끌어안은 팔의 무게와 가슴팍에 안긴 체온을 느끼면서 미도리마는 늘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적어도 4년간 얌전히 팔베개 내지는 라이너스의 담요 노릇을 해준 사람에게 그 정도는 용서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쪽도 사람인거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미도리마는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했다. 키세는 아마 아오미네에게도 그런 짓은 허용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것은 키세의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을 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잊을 수 있도록 만든 어떤 장치였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미도리마는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한거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지금까지 계속 남겼다면서요?"
"계속은 아닌거다!"
"그럼 상습적으로 남겼단 사실은 진짜?"
"부…정하지는 않는 거다."
"도대체 몇 번이나 그랬어요? 코디 누나가 지적해줘서 혼났슴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거다."
"뭐, 미도리맛치니까 봐줄게요."
눈을 감고 키세에게서 어떤 단죄가 떨어질 지 기다리던 미도리마는 키세의 그 말에 다시 눈을 떴다. 키세는 예쁘게 한 번 웃어주고는 미도리마를 꽉 끌어안았다.
"미도리맛치는 상냥함다."
"이거 놔. 불편한 거다."
"싫어요. 미도리맛치는 나를 좋아하죠? 그럼 이것도 좋은 거 아님까?"
"상대가 잘못된 거다."
"뭐가요?"
"네가 이렇게 대할 상대는 아오미네겠지."
그렇게까지 말을 하고 미도리마는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 둘만 있을 때는 한 번도 아오미네를 화두에 올리지 않았다. 어찌됐든 키세를 사랑하는 미도리마에게 있어 아오미네는 암묵적인 적이었고 키세에게는 눈물겨운 짝사랑의 상대이었으며 그렇기에 그 이름은 금기의 단어였다.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레 키세를 바라보면 키세의 얼굴이 희미하게 울 것처럼 일그러지다가 다시 웃고는 미도리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슴다, 미도리맛치.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됨다."
"……."
"이제는 정말 괜찮은 거 같아요. 슬슬… 그만두려구요."
갑자기 떨어진 폭탄선언에 미도리마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다 반문했다.
"미안한 것이다, 키세. 잠깐 내가 졸았던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 아님다, 미도리맛치. 그만 둘 거에요. 아오미넷치가 날 봐줄 확률은 여전히 제로고, 아오미넷치에게도 좋은 여자가 생길 것 같거든요."
"그건, 지난 주 신문의 얘기인가."
"오늘 슬쩍 떠봤는데 부정하진 않았으니까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그 여자 말고도 아오미넷치는 이제 정말 굉장한 사람이 될 거니까 여자팬들도 잔뜩 달라붙을 거고 그럼 취향에 맞는 여자도 분명 있을 거고 아오미넷치가 그만 두자고 하기 전에 제가 먼저 그만 둘검다."
"…울어도 좋아, 키세."
"별로…. 이젠 눈물도 안 나와요. 언젠가는 와야 될 끝이 온 것 뿐이니까. 아오미넷치랑 만나고 온 다음이면 늘 상상했죠.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리고 아오미넷치가 이제 놀이는 끝, 이라고 갑자기 말해버리지 않을까. 그럼 난 어떡해야 되나. 만날 때에도 혹시 다른 말이 나올까봐 무서워서 쓰러질 것 같이 피곤해도 도망쳐 나왔어요. 집까지 질질 끌고 오면 나 혼자 있는 게 너무 싫어서, 아오미넷치의 흔적이 남아있으면 내가 혼자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지니까 항상 일부러 아오미넷치네 집에서 씻고 나는 평생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은 받을 수 없겠구나 생각했어요."
"키세."
"되게 이기적인데, 미도리맛치가 날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완전 우쭐했슴다. 죽지 않았구나, 키세 료타! 역시 나!"
"너도 은근히 성격이 나쁜 거다."
"헤헤, 알고 있슴다. 그치만 미도리맛치는 다 알면서도 성실하게 날 사랑해줬잖아요?"
"이렇게 들으니 내 자신이 한심해 지는거다."
"만약에 아오미넷치랑 끝내고 대신 미도리맛치 옆에 달라붙어 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그것은 두 번째의 폭탄이었다. 사실 자신은 지금 자고 있는 거 아닐까. 어제까지 시험을 치고 와서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미도리마가 안경을 벗어 협탁 위에 올려두고 눈을 부비면 이번엔 키세가 냉큼 선수를 쳤다.
"미도리맛치 졸지 않았슴다! 사람이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면 좀 똑바로 들어요!"
"고백…?"
어안이 벙벙해 키세의 말을 되풀이하면 키세가 미도리마의 얼굴을 양 손으로 꽉 붙잡고 희미해진 시야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렇슴다! 미도리맛치에게 고백한 검다!"
"나한테? 네가? 하지만 그것도 가능성이 제로인 거다, 키세."
미도리마가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로 내뱉으면 키세가 풀이 확 죽은 얼굴로 미도리마에게서 멀어졌다.
"나 진짜 나쁜 놈이었네요, 미도리맛치. 거기서 이런 말까지 하면 미도리맛치에게 진짜 제일 나쁜 짓 하는 것 같으니까 그냥 그만 둘래요. 나 같은거 좋아하지 말아요, 미도리맛치. 미도리맛치한테도 얼마든지 좋은 사람 생길 수 있잖슴까? 지금까지도…"
미도리마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누워 얼굴은 커녕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우울하게 중얼대는 키세를 미도리마는 손을 뻗어 세게 끌어안았다. 놀랐는지 키세가 엑- 하고 입을 닫아버렸지만 키세는 명확하게 미도리마의 품에 있었다.
"내가 좋아서 붙어있었으니 괜찮은 거다, 키세."
"…저는 미도리맛치를 실컷 이용했는데요? 앞으로도 못된 마음으로 이용해 버릴텐데?"
"그래도 괜찮아. 너는 될 수 있는 것만 실행하지 불가능한 건 말조차 꺼내지 않으니까. 네가 그 말은 한 건 분명 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거겠지?"
"모름다. 너무, 오래 좋아해서 숨쉬는 것 만큼 익숙해졌는데 미도리맛치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게 사랑인지는 모름다. 미도리맛치가 절 좋아해 주는 것만큼 좋아할 수 있을지는 자신 없슴다."
"그러지 않아도 좋아."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키세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게 옷 너머로 느껴진다. 미도리마가 키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벅차오르는 숨을 애써 누르면 키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미도리맛치 시험도 끝났으니 어디 놀러 갈래요?"
"어디?"
"그냥 뭐 밥도 먹고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고?"
"그래."
"그럼, 불 끌게요."
팔만 뻗어 켜져 있던 스탠드를 끈 키세가 다시 미도리마를 꽉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것은 서로의 심장소리 뿐이었다.
3.
날은 화창했다. 외출하려는 것치고는 꽤나 느즈막한 아침을 맞이했다. 미도리마는 밤새 계속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녘에나 겨우 잠이 들었었는데 거기에 시험기간의 여파가 겹친 모양이었다. 키세도 키세 나름대로 피곤했는지 둘이 일어난 시각은 거의 비슷했다. 씻고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빵에 계란프라이로 토스트를 점심으로 먹은 다음에도 집에서 밍기적대다 이 좋은 날 집 안에만 있는 것은 아깝다며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키세 너 오늘 약속 있냐?」
「없으면 잠깐 보자.」
「너 문자 씹냐?」
「전화한다.」
「촬영 아니지?」
몇 통의 문자 끝에 곧이어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당연히 아오미넷치. 이걸 받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면 이미 신발까지 신은 미도리마가 문가에서 키세를 불렀다.
"안 가는 거냐, 키세."
"앗, 가요가요!"
뭔가 중요한 일이라면 문자로 얘기하겠지. 겨우 맘을 잡았는데 더 이상 미련을 두는 것은 싫었다. 웅웅 소리를 내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밀어넣고 키세는 미도리마를 쫓아 밖으로 나섰다.
문자는 열다섯 통, 전화는 열 통. 마지막 전화까지 벌써 다섯 시간이나 흘렀거늘 키세는 문자 한 통조차 없었다. 평소같으면 문자 한 통에 냉큼 답장이 왔을텐데도 상황이 이상했다. 촬영 중인가? 오늘 스케쥴이 있다고 어제 얘기하긴 했지만 모모이에게 물어보면 어디서 알아왔는지 오늘 키세의 스케쥴은 없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잘못된 정보가 아니냐고 다시 확인해도 모모이는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 아님 널 피하나 보지! 뭐 잘못한 거 있어?
잘못한 거? 아오미네는 곰곰히 머리를 굴렸지만 키세가 딱히 자신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잘못한 거라면 중학동창이랑 절대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못할 이렇고 저런 일을 했다는 것 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호동의를 토대로 이뤄진 정당한 일이었다. 다 마신 콜라의 얼음을 와드득와드득 씹으면서 아오미네는 유리벽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밤새 고민을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걸까, 키세 료타를? 거기에 대한 답도 아직 모르겠다. 그렇지만 머릿 속에서 키세의 목덜미에 남은 희미한 흔적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걘 내거야. 네가 언제부터 걔랑 뒹굴었는지는 몰라도 걘 내 거라고. 치밀은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키세가 다른 사람이랑 뒹굴거라면 차라리 아오미네와 만나는 횟수를 늘리는 쪽이 훨씬 나았다. 처음 할 때부터 고통스러워 하고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겨우 쾌감을 느끼고 몇 마디 말에도 수치스러워 하며 얼굴을 가리던 키세가 아오미네랑 자면서도 다른 사람하고 섹스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중학교 때의 그 청순한 얼굴로도 동성이랑 경험이 있다고 말했으니―
"아, 그 새끼도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도대체 누구야? 그렇게 어린 녀석을 꼬드겨서 섹스하자고 그런 건.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파삭-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구겨진 컵에서 얼음이 튕겨나가는 소리에 스낵바의 모든 사람들이 아오미네를 쳐다보았지만 아오미네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리창 밖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한 순간 아오미네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화기는 그 때부터 몇 번을 울리다가 겨우 그쳤다. 슬쩍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면 부재중 전화가 무려 열 통이나 있었지만 그 뒤로 문자는 없었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님다, 미도리맛치. 저녁은 뭐 먹을까요?"
별로 급한 일은 아니었나보지. 그렇게 생각하며 키세는 휴대전화를 자연스럽게 주머니 속으로 밀어넣었다. 영화관에서 먹은 팝콘 덕분에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이 시간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차라리 장을 봐서 집에서 요리를 해먹을까? 그 말에 의외로 미도리마는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어느 쪽이라도 요리는 자신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아무 생각없이 둘러보다 급하게 볶음밥으로 메뉴를 결정하고 몇 가지 재료를 사들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야!!!!"
불현듯 크게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움찔하고 몸을 굳히면 키세가 잘못 들은 건 아니었는지 미도리마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차마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아 꼼짝없이 굳어있으려면 한 쪽 팔이 강하게 낚아채졌다.
"너 왜 연락 씹냐?"
"아, 아오미넷치."
"스케쥴 있대며."
"설마 스케쥴이 딴 남자랑 데이트냐? 누구야, 이 새끼는? 얘가 걔냐? 네 목덜미에 흔적 남긴?"
"목소리가 너무 큰 거다, 아오미네."
정신없이 키세를 몰아붙이는 아오미네의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까지 아오미네와 키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모자는 확실하게 눌러쓰고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자연스럽게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는 키세의 모자 위로 후드를 덧씌워주고는 조용히 아오미네를 제지했다.
"어라, 미도리마?"
"오랜만이다, 아오미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처음이든가. 근데 왜 네가 여깄어? 야, 너 미도리마랑 있었으면 내 연락 받아도 됐잖아."
키세에게만 신경을 쏟느라 옆에 있던 사람이 미처 미도리마라곤 인식 못했던 건지 미도리마를 확인하자마자 아오미네는 급격히 풀어진 인상으로 미도리마에게 인사했다. 쩌렁쩌렁한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좀 수그러들자 키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던 찰나 이번엔 미도리마가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목덜미 쪽을 얘기하는 거라면 네가 맞는 거다."
그 말에 키세도 아오미네도 쩍- 얼어붙었다.
"그래서."
키세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죄인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명백하게 화가 난 것 같은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도리마도 꼬신거냐, 키세?"
"말이 천박해, 아오미네."
"어이, 넌 입 좀 닥쳐봐. 나는 얘한테 묻는 거야."
"나와 키세의 관계라면 전적으로 내 쪽의 문제야. 내가 먼저 고백한 거다."
"뭐?"
설마 미도리마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아오미네의 눈이 경악으로 커져 미도리마를 향했다. 담담하게 키세의 옆에 앉아 말을 잇는 미도리마의 태도엔 한 치의 거짓도 없어보였다.
"너와 키세의 관계도 들은 거다."
"그걸… 얘기해?"
"정확히는 내가 눈치챈 거지만."
씨발. 나즈막히 으르렁거리는 아오미네의 욕설에 미도리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오미네의 행동이 험한 것쯤은 상관하지 않았지만 키세가 움츠러드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키세는 아오미네에게 이런, 바람 난 첩실같은 취급은 당할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나는 왜 네가 화가 났는지 모르겠군."
"내가 지금 화가 안 나게 생겼냐? 나랑 만나면서도 너랑 만났단 게 말이 돼?"
"내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닌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진짜 개같은 소리였다. 갑자기 키세는 내내 연락은 받지 않더니 옆에 있는 건 친구, 좀 안도했다 싶으면 키세를 좋아한다고 폭탄선언에 어울리지도 않게 쫓아다녔다니. 아오미네에게 미도리마 신타로는 명실상부 좀 괴짜긴 해도 흠잡을 데 없는 우등생이었다. 스토커 기질이라든가 하는 건 정말 상상하기도 힘들었고 키세에게 키스마크를 찍는 것조차도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별로 문제는 없는 거다. 내 쪽의 짝사랑이라는 거니까."
"허."
"아오미네 다이키, 너야말로 키세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는거다. 키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휘두르는 건 그만해줬으면 좋겠는데."
"좋아해? 휘둘러? 그래, 좋아한다고 하면 어떡할래?"
"아오미넷치."
홧김에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아오미네에겐 겨우 정답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도리마가 키세를 좋아한다고 명확하게 인지한 순간부터 당장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 드는 건 이 때문이었다. 내가 키세 료타를 좋아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키세가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키세의 표정은 울 것 같았다.
"내가 뭐 잘못했냐. 내가 너 좋아한다 그러면 어떡할래, 키세."
"맘에도 없는 소린 그만둬요."
"진짜인데. 쟨 되고 난 안되는 이유가 뭐야?"
"이제 겨우… 포기하려고 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래요?"
아오미네의 치기어린 거짓말이라고 해도 울컥 눈물이 솟구친다. 오랜 시간이었다. 5년. 처음엔 이런 말을 듣는 것도 키세는 상상했었다. 그렇지만 아오미네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젠 정말로 정리해야 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같은 꼴을 겪게 하고 있는 미도리마에게도 너무 미안했고 이런 자신이 불쌍했다. 차라리 미도리마를 좋아하게 되어버리면 그러면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얘길 꺼낸 게 겨우 어제인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미련도 못 버리잖아요."
손으로 훔쳐도 눈물이 닦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흘러내려서 계속 눈을 비비면 미도리마가 옆에서 손을 붙잡았다.
"눈, 상하는 거다."
"놔요, 미도리맛치. 미도리맛치는 분하지도 않아요? 화도 안 나요? 겨우 어제라구요! 맘 잡은 게 겨우 어제인데! 5년을 그렇게 병신같이 굴다가 진짜 그만둬야 겠다고 생각했더니 오늘에서야 저러는데, 그 말에도 흔들리는 나는 진짜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고 미도리맛치도 멍청이고! 진짜 사람 좋아하는 게 뭐가 이렇게 힘들어요? 차라리 나를 붙잡아요, 미도리맛치. 아오미넷치는 너무 힘들단 말이에요."
펑펑 쏟아지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미도리마의 착잡한 얼굴도, 아오미네의 벙찐 얼굴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은 정말 못되처먹은 녀석이었다.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고 차라리 잡으라고 매달리는건 책임전가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사람은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은 속이 배배 꼬여 있었다.
"야, 키세. 너 왜 내가 붙잡는다는 선택지를 쏙 빼놓는데?"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하던 아오미네가 키세의 다른 한 손을 낚아챘다.
"이것 좀 놔요, 둘 다! 왜 내 맘대로 울지도 못해."
"네가 나 좋아하고 나도 너 좋아하고 그러면 끝이잖아? 울지 말고."
아오미네의 손가락이 키세의 눈가를 훔쳐내면 또렷하게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오미네의 얼굴이 보였다.
"나… 난 이제, 몰라요. 모름다. 아오미넷치는 너무, 힘들어요."
"이제부터 안 힘들게 하면 되잖아."
"미도리맛치는 계속 지켜줬어요. 내가, 막무가내로 굴어도… 다 아는데, 알면서도… 아오미넷치한테 내가 속으로 좋아한다고 말한 것 만큼, 미도리맛치는 나한테 얘기해 줬단 말이에요."
키세에게 자신이 짐이 되고 있는걸까? 미도리마는 다시 눈물로 흐려지는 키세의 눈가를 훑으며 생각했다. 만약 키세가 자신에게서 떠나간다면 미도리마는 놔줘야 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에서는 놓칠 수 없었다. 이제와서. 키세의 말이 맞다. 화가 안 날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오미네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걸 미도리마는 꾹 눌러참아야 했다. 키세가 우는 걸 몇 번이나 보고, 나중엔 메말라서 울지도 못하는 등을 토닥여줬다. 아이처럼 미도리마를 꽉 붙잡고 안겨드는 키세를 자신을 택한다면 분명히 지금의 고통을 몽땅 보상받을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그 고통의 편린조차 보지 못한 주제에 이제서야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오미네가 우스워 미도리마는 키세의 얼굴을 돌렸다.
갑작스런 키스에 벌어진 입에 혀를 넣고 고른 치열의 안 쪽을 훑었다. 동그랗게 벌어진 눈이 제대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빨아들이듯이 키세의 혀를 잡아당기고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어 물같은 타액을 삼키면 미처 정리되지 못한 호흡도 같이 들어왔다. 그 습윤한 공기에 미도리마가 조금 웃으면 키세가 억울하다는 눈동자로 헐떡였다.
"붙잡을 거다, 료타."
눈꼬리에 남은 눈물의 흔적을 핥으며 미도리마는 아오미네를 보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오미네의 얼굴이 와작- 구겨지더니 키세를 제 쪽으로 잡아당겨 끌어안고는 귓바퀴를 핥았다. 발개진 얼굴로 키세가 아오미네를 올려다보는 젖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야해서 아오미네는 훅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꼼꼼하게 키세의 목 뒤를 핥고 미도리마가 남겼다던 키스마크의 위를 아오미네는 입술로 깨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미도리마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경직되어 있는 것을 보며 아오미네는 미묘한 승리감에 고취되어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저… 아오미넷치…?"
"물론인 거다."
"미, 미도리맛치?"
말을 할 새도 없이 키세의 입술은 다시 미도리마에게 먹혔다. 뒤에는 아오미네, 앞은 미도리마라니 둘 다 꽉 붙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아 도망갈 틈이 없었다. 키세는 아까와는 다른 울고 싶은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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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황] 목소리의 맛
목소리를 먹는다는 집착은 장르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것이다...
카사마츠+키세 조합은 카니발리즘처럼 격한 느낌은 아니고(이 쪽은 오히려 당연히 청황!) 립황이든 황립이든 카사마츠가 키세를 포용하는 위치인데 어쨌든 저는 청<-황<-립의 구도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카사마츠 센빠이 사랑해여ㅠㅠㅠ 언젠가는 키세를 쟁취할 수 있을거야ㅠㅠㅠㅠ 그나저나 녹황청은 언제 쓴담...
초콜릿은 달고, 샤벳은 시고, 눈물은 짜고, 약은 쓰고, 네가 웃는 소리는 달고, 기분이 나쁠 땐 시고, 울 때는 짜고, 그 애를 생각하고 있을 때의 목소리는 쓰다. 너무 써서 죽을 것 같다.
"선배, 뭐하고 있슴까? 곧 쉬는 시간 끝나는데 연습 안감까?"
인터하이가 끝나고 첫 연습이다. 다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를 맞이해 들떠있는데도 카사마츠는 왠지 우울했다. 학교에 나와도 기운이 쭉 빠져 체육관 뒤 벤치에 가만 앉아있으면 건방진 후배가 어깨를 툭 치며 묻는다. 이 새끼, 한 대 패줄까? 평소같았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발부터 나갔겠지만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짭짤한 맛에 카사마츠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쉬는 시간 곧 끝난다더니 키세는 묻지도 않고 카사마츠의 옆에 털썩 앉았다. 특별히 아끼는 브랜드의 미네랄 워터를 입에 콸콸 부어넣다가 카사마츠에게도 권한다. 남아있는 희미한 맛을 지우기 위해 물을 들이키면 키세가 입을 열었다.
"방학은 어떻게 지내셨음까?"
"그냥 뭐."
인터하이가 끝난 여름의 막바지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집에서 나갈 생각조차 들지 않아 오랜만에 카사마츠는 마음을 편하게 먹고 여유롭고 느긋한 생활을 즐기려고 했지만 패배의 뒤끝은 확실히 씁쓸했고 가라앉은 여운은 오래갔다. 집 안의 공기는 언제나 그렇듯 화목했고 따뜻하고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는 훈김이 올라오는 밥의 맛이 나는데도 방에만 들어가면 그 쓴 맛이 계속 입 안에 남아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카사마츠는 목소리를 들으면 '맛'으로 인식했다. 그것은 꽤나 불편했는데 좋든싫든 늘 입 안에 다른 맛이 맴돈다는 건 언제나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었고 사람에 따라 구역질이 날 정도로 괴상하고 기이한 맛이 나기도 했다. 이미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기분이 좋으면 대체적으로 그건 좋은 맛이었고 나쁘면 아주 쓰거나 텁텁하거나 진득하게 입 안에 달라붙어 있기도 했다. 단순히 이미지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그 맛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마다 느껴지는 목소리의 맛은 제각기 다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 밍밍한 맛이었다. 쥬스에 물을 풀어놓은 듯한 희미하고 멀건. 괜찮은 녀석이라면 괜찮은 맛이 났고 별로인 사람이라면 그 맛도 별로였다. 아니, 애초에 맛이 좋지 않는 사람들하곤 대화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카사마츠가 멀어졌고 나중에 다른 얘길 들었을 때 그러려니 하는 걸까. 잘 모른다. 이 쓸모없고 무어라 이름 붙이기도 뭣한 능력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람을 상대할 때 뿐이라고 믿고 싶으니까 믿는 거다.
기적의 세대의 끄트머리라곤 하지만 키세 료타는 굉장한 녀석이었다. 테이코 시절의 경기를 본 적도 있었고 학생 모델이라고는 해도 이것저것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얼굴만은 키세가 카이조에 입학하기 전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그게 인간성하고는 다른 거지.'
그래서 올해 첫 부활동에서 키세를 볼 때까지 카사마츠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만약,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로 좋지 않은 맛이 날 경우 피해야 되지만 주장을 맡고 있는 이상 졸업할 때까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제발 평균만 되어라, 하고 빌고 빌다가 신입생 인사 직전까지 느지막히 들어갔다. 눈꼬리가 예쁘장하게 올라가고 이목구비가 큼직한, 한 쪽 귀에는 피어싱까지 한 후배는 찾아볼 필요도 없이 눈에 띄었다.
"첨 뵙겠슴다. 1학년 키세 료타임다!"
구경 온 여학생들이 꺄꺄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카사마츠는 생경한 감각에 혀를 씹어야만 했다. 상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거늘 눈가를 찡그리는 카사마츠가 이상했던지 키세는 아주 친절하게 - 재수없다 -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물어봤더랬다.
"선배, 무슨 문제라도…?"
"아니. 3학년이고 주장인 카사마츠 유키오다."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키세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달았다. 차갑고 시원한 레몬소다나 풍선껌 같은 맛일까. 아니 그것보다 훨씬 쌉싸래하고 아득한 단 맛이었다. 물을 마셔도 사라지지 않는 뒷끝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좋은 녀석일 거라고, 카사마츠는 한결 마음을 놓고 3학년, 마지막 고등학교 부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키세는 그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은 편이라 그다지 다양한 맛이 나진 않았다. 우는 소리를 해도 기본적으로 맛은 변하지 않았고 기분이 좋으면 그것보다 살짝 새콤하고 나쁘면 셨다. 세이린과의 연습경기에서 패했을 땐 조금 짠 맛이 났지만 그것조차 달달했다.
그렇지만, 그건.
"쓰네."
"네?"
"아니."
아직도 썼다. 하게 해주세요, 카피.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목소리는 몹시도 썼다. 경기가 끝난 뒤엔 더 썼다. 너무 짜서 쓴, 바짝 타 버린 쿠키 부스러기 같은, 말을 하면 할수록 배어나오는 목소리는 너무 써서 혀가 저릿할 지경이었다. 입맛이 뚝 떨어져 경기가 끝난 뒤의 회식에서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것을 동료들과 감독, 키세는 패배로 인한 풀죽음이라고 생각했던듯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고 키세는 오히려 다음엔 열심히 하겠슴다, 같은 제법 기특한 소리도 했지만 그 때마다 느껴지는 아릿한 쓴 맛에 오히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여운을 떨쳐내는데 방학을 몽땅 할애했는데 다시 만난 키세의 입에서는 여전히 짜고, 쓰디 쓴 맛이 배어나왔다.
"아오미넷치는."
불현듯 키세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눅진하게 엉겨붙는 오래된 단 맛이 희미하게 여운만을 남기고 대신 쓰고 짭짜름한 맛이 엉켜있었다.
"저는 아오미넷치를, 어쩌면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름다."
키세가 테이코의 동창들을 얘기할 때는 평소와는 늘 다른 맛이 나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아오미네 다이키는 특별했다. 키세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면 항상 진득한 초콜릿 같은 엉겨붙는 단 맛이 느껴지곤 했다. 그건 때론 짜기도 해서 카사마츠는 일찌감치 키세 료타에게 아오미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위치임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아오미넷치는 굉장함다. 아마 그것도 전력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함다. 제가 이만큼 성장했으니 아오미넷치도 더 성장했겠죠. 앞으로 윈터컵도 있고 졸업할 때까지 시합도 꽤 많이 남았으니 몇 번 더 마주칠 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오미넷치를 평생 이길 수 없을 지도 몰라요."
맛은 둘째치고서라도 키세답지 않은 말이었다.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키세의 물만 들이키고 있으면 키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겨야만 함다. 1on1은 안될 지 몰라도 선배가 절 믿어주니까 다음에 붙으면 꼭 이기고 싶슴다. 카사마츠 선배랑 함께면 왠지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듬다."
"그거 위로냐?"
"엇, 그게 그렇게 되는검까?"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순진한 척 바라보고 있는 키세의 얼굴에 괜시리 부아가 치밀어 카사마츠는 들고 있던 생수병을 던져버렸다.
"이거나 갖고 가라, 임마."
"으에 다 먹었잖슴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물 한 병 갖고 무슨 생색이야. 애초에 그딴 거나 골라마시는 네가 이상한 거지. 그냥 다 똑같은 물이잖아."
"아님다! 미묘하지만 맛에 차이가 있다구요!"
키세가 또 징징대기 시작했지만 카사마츠는 일어나 바지 뒤를 툭툭 털었다. 제 마음도 정리가 안된 새파란 후배한테 위로를 받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 카사마츠는 키세의 정강이를 발로 콱 차버렸다.
"일어나. 쉬는 시간 끝났다. 언제까지 퍼질러 앉아있을 거야?"
"선배가 먼저 앉아있었던 거잖슴까!"
"그래서 뭐?"
"…아님다. 일어나겠슴다."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고 투덜대며 일어나는 키세의 목소리는 어느덧 평소처럼 활기찼고 맛은 그래도 약간 달작지근하게 돌아온 것 같았다. 아프다며 종아리를 문질거리는 키세를 내버려두고 걷고 있으려면 뒤에서 키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사마츠 선배, 같이 가요!"
문득 키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 더 달아졌음을 카사마츠는 깨달았다. 아오미네를 부를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달달한, 이상한 맛 같은 건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짙은 농도의 단 맛을 입 안에서 천천히 되새김질하고 있으면 총총총 달려온 후배가 옆에 바짝 붙어 보폭을 맞춘다.
"선배, 방금 거 진짜 아팠슴다."
"더 세게 때려줄까?"
"조절 좀 해달란 뜻이었는데요!"
카사마츠는 손을 들어 자신보다 한 뼘은 큰 키세의 머리를 콱 잡고 부비적거렸다. 아아아, 선배 머리 망가짐다! 키세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입 안에 남아있던 질척거림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래. 차라리 내 이름을 불러라. 네가 그 애를 생각할 때마다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써서 죽을 것만 같다. 그냥 나를 불러. 만약 내가 그 애라면, 나는 너에게 죽어도 이런 맛을 내게 하진 않을텐데.
그, 오래되어서 원래의 단 맛을 잃어버린, 눈물 범벅이 된 쓰디 쓴 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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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황] 꿈의 대화
모처 리퀘. 쌍방향 짝사랑은 진리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의 한계란 마치 키세에게 아오미네 같은 것일까....
사이클을 못 돌리고 밤새고 추석맞이 하는데 진짜 미치는 줄... 겨우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생활로 돌아간 것 같긴한데 오늘도 집에 오자마자 뻗어서 자다가 4시에 일어났으니 잘 모름... 짝사랑 헉헉 짝사랑 이러고 있는 와중에 지금 쓰는 것도 짝사랑이란 게 유멐ㅋㅋㅋㅋ키세 짝사랑 그만해....ㅠ
꿈을 꾼다.
매일매일매일매일. 질릴 정도로.
눈 앞에 없어도 손으로 그 얼굴의 윤곽을 만들어 내고, 머리카락 끝까지 손으로 쓸어내렸을 때 어느 지점에서 어떤 느낌으로 끝나는지, 어떤 감촉인지 알고 있다. 목울대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쇄골이 얼마만큼 튀어 나왔는지, 어깨의 선은 어떠한지, 셔츠를 벗기 위해 들어올린 견갑골과 근육의 움직이는 모양, 주먹을 쥐었을 때의 뼈의 굴곡, 살짝 튀어나온 갈비뼈, 손목과 발목의 피부로 비치는 파란 핏줄의 엷은 색감까지 모두 알고 있다.
우스운 건 미도리마는 맨손으로 키세를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져본 것은 겨우 경기중에 하이파이브를 했을 때 닿아본 손바닥 뿐일까. 매끈하게만 보이는 손은 - 사실 처음엔 정말로 그랬지만 - 마디마디 굳은살이 잡혀있었다. 그 감촉에 처음엔 조금 놀랐었던 것도 미도리마는 기억한다. 단지 그 뿐. 현실에서의 키세 료타, 그와 보냈던 2년여의 시간은 단지 그것뿐인데도 현실에서는 꿈처럼 무심하게 넘겼던 모든 일상의 그가 꿈에서는 현실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미도리맛치. 그렇게 부를 때의 목소리와 입술, 얼굴 근육, 목의 움직임, 살짝 웃을 때의 눈꼬리, 치켜올라간 속눈썹. 현실에서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꿈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인것 마냥 미도리마를 잠식하고 달라붙어 내뱉는 숨소리와 저 안 쪽에서 울리는 둔중한 심장소리를 온 몸으로 듣게 해놓고 키세는 귓가에 속삭인다.
꿈이다.
눈이 번쩍 떠져 시야에 들어오는 익숙한 천장을 확인한다. 삐삐삐삐- 거리며 작은 소리를 내는 알람을 끄고 오른손으로 침대 옆의 탁상을 더듬거려 안경을 쓴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의 쌀쌀한 공기는 조용했다. 미도리마는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약간의 스트레칭을 하고 욕실로 걸음을 옮겨 양치질을 하고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한다. 물에 젖은 왼손을 잘 닦아 말린 다음 테이핑을 다시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방에서 나와 오하아사를 챙겨보며 아침을 먹고 가방과 럭키아이템을 챙긴다.
미도리마는 모든 일에 있어 정해진 순서를 지키는 편이었다. 자의식이라곤 요만큼도 작용하지 않는 꿈조차 그러하다는 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미도리마는 늘 현실보다도 생생하고 생경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꿈을 언제나 꿈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처음은 다를지언정 늘 키세가 귓가에 속삭이는 말은 똑같았으니까.
"그런 말, 꿈인게 당연한 거다."
- 좋아해.
평생을 가도 현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니까.
「미도리맛치 심심함다(?ω?).」
「미도리맛치 뭐해요오´ㅅ`」
「미」
「도」
「리」
「맛」
「치」
「♥」
휴대전화의 진동이 연속으로 여섯번쯤 울리자 미도리마도 더 이상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죽어.」
짤막하게 보낸 문자는 늘상 보내던 말이었지만 5분, 10분, 20분이 지나도록 답신이 없으니 뭔가 이상하다. 몇 번이나 폴더를 달각거리다가 잠깐 고민했다가, 미도리마는 신중하게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진짜 죽은 ㄱ」
거기까지 썼을 때쯤 지이이잉- 하고 울린 진동에 얼른 수신메시지함을 확인하면 다행히도 키세의 문자였다. 조금은 안도한 마음으로 무어라 문자를 보낼까 고민하고 있으려면 지금까지 답신을 못한 게 한이었던 것마냥 미도리마의 휴대전화가 쉴 새없이 웅웅대기 시작했다
「(?Д`)???」
「저 진짜 울 거에요!」
「오늘은 우울해서 미도리맛치랑 놀고 싶었는데」
「저 진짜 우울하단 말이에요」
「울 거야. 내 맘도 모르는 나쁜 미도리맛치(` A ´)」
「너무함다 오늘 놀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전 왕따임까? 아무도 안 놀아줘(?Д`)???」
「미도리맛치를 믿었던 제 잘못이었슴다. 이제 문자 안할래요」
어이, 잠깐. 여기서 진짜 끝인거냐?
늘 키세에게 일방적으로 오던 문자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끝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울어? 누가? 키세 료타가? 우울해?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상황에 미도리마의 머릿 속이 핑핑 돌아간다. 키세 료타를 아는 사람에게 말한다면 누구나 깜짝 놀랄 정도의 얘기였다. 우울하다고? 키세가? 그 키세 료타가? 적어도 미도리마가 아는 키세는 늘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한 사람들에겐 아낌없이 호의를 표현하며 달라붙어도 내려다보는 기색이 강한, 제멋대로인 공주나 왕자 타입이랄지. 키세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니까 우울할 수는 있어도 그걸 결코 남한테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게 미도리마의 키세에 대한 인식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걸까?
키세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심각한 일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머릿 속이 전부 키세에게로 향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카나가와까진 얼마나 걸리더라? 교통편은? 카이조까진 어떻게? 키세네 집은 어디었지? 하나하나 꼽아봐도 전부 모른다는 사실이 미도리마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만약, 정말로 키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니. 키세는 그 정도로 심각하게 말하진 않았다. 그냥 조금 사소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소한 일인거지?
부정적인 생각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들어온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생소하고 초조한 감각이 안에서부터 마구 들끓어 폭주한다. 결국 미도리마는 주소록을 뒤져 타카오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방과 후 청소를 하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바쁜 북적거리는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미안. 오늘 연습은 못 가는거다.」
문자를 확인한 타카오가 무슨 일이냐며 문자에 전화까지 해댔지만 그런 건 확인할 새가 없었다. 계속 울려대는 휴대전화의 진동을 무시한 채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교실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나가려면 미도리마를 이토록 끝까지 밀어붙인 원흉은 놀랍도록 평탄한 얼굴로 저 쪽에서부터 천천히 교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라, 미도리맛치?"
저 쪽에서부터 손을 흔들고 미도리마를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키세, 키세였다. 방금 전까지 미도리마에게 부정적인 사고를 잔뜩 불어넣은 주제에 본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의 얼굴로 서있었다. 여기에 있을 수 없는 키세의 얼굴에 미도리마는 잠깐 또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키세는 지극히 평소같은 얼굴이니 이것은 현실이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무슨 일 있슴까."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목소리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서 미도리마는 순간 맥이 탁- 풀리고야 말았다.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그거야 네가 우울하다고 그러니까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지금까지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멀쩡한 키세의 얼굴에 초조 대신 분노가 비등점가지 끓어올랐지만 미도리마의 이런 행동은 키세에게도, 그리고 본인에게도 분명히 비정상적인 대응이었다. 소리치려던 말을 억지로 안으로 우겨넣고 미도리마는 애써 평안을 가장한 채 입을 열었다.
"…별로. 네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 거다. 어쩐 일인거냐, 키세."
아까까지 긴장했던 여운이 남아있어서일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몇 번을 속으로 가다듬고서야 겨우 괜찮은 목소리가 나왔다. 키세는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주변을 흘긋거리더니 머리 위로 느긋하게 손을 올리고는 미도리마에게 다시 물었다.
"미도리맛치 연습은요?"
"오늘은… 없는 거다."
그러고보니 타카오에게 오늘 연습은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키세가 멀쩡하다면 가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곧 키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 미도리맛치, 오늘 저랑 놀아요!"
미도리마의 팔 소매를 잡아끄는 키세에게 끌려가면서 미도리마는 계속 울리고 있는, 아마도 타카오에게서 오고 있을 전화의 진동을 무시한 채 휴대전화를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놀자고 했던 것 치곤 키세가 간 곳은 소소하기 짝이 없었다. 근처의 오락실에서 인형뽑기, 레이싱이나 슈팅게임 정도. 오락실과는 거리가 먼 미도리마가 할 수 있는 건 농구게임뿐이었지만 키세는 '엑, 여기까지 와서 농구하긴 싫슴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덥다며 길거리를 지나다 묻지도 않은 채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다 미도리마의 손에 쥐어주고 키세는 아이처럼 잔뜩 들떠서 뛰어다녔다. 마지막 종착지는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어울려줘서 고맙다며 키세는 미도리마의 몫까지 계산하고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배가 고팠는지 햄버거의 포장을 벗겨 우악스럽게 한 입 베어무는 키세와는 달리 미도리마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일단 머릿 속에서 뱅뱅 돌아다니는 의문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맥락없이 나온 말에 키세가 햄버거를 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미도리마를 쳐다보았다. 뭐가 말임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만 아직까지 입 안에 있는 것이 있어서 키세는 우물우물 씹기만 하며 눈짓으로 물을 뿐이었다.
"우울하다고 한거다, 키세."
미도리마가 진지하게 물어보면 키세는 놀랐는지 켁켁거리며 콜라를 집어들고 쭉 빨았다. 목울대가 세 번쯤 움직이고 키세가 겨우 살았다는 듯 숨을 내뱉다가 입을 열었다.
"미도리맛치 기억력 좋네요.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네 시간도 안됐는데 잊어버리는 게 바보인 거다."
"그냥 별 일 아니었슴다."
그렇게 가뿐히 말하며 키세는 다시 햄버거를 베어물었다. 미도리맛치는 안 먹슴까?
"거짓말."
아무 생각 없이 미도리마의 입에서 단어가 튀어나갔다. 키세는 깜짝 놀랐는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도리마를 쳐다보았지만 별로 정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거짓말도 적당히 하는 거다, 키세."
"거짓말 아님다."
"무슨 일 있는거지? 고민이냐?"
키세의 얼굴은, 최근 들어선 직접 만날 일은 별로 없었지만 오히려 전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웃는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한치의 물러남도 없는 미도리마의 태도에 키세가 콜라의 빨대를 질근질근 씹더니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설마 연애때문에 고민인 건 아니겠지, 키세."
키세가 생각보다 쉽게 가라앉아서 당황한 미도리마가 분위기를 애써 띄워보려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 쪽이 미도리마의 당황을 가중시켰다. 키세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기 때문이다.
"미도리맛치, 의외로 감이 빠르네요."
그렇게 웃는 키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감각이라 미도리마는 여기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지뢰를 터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소처럼 그냥 키세의 문자따위 무시해버리고 말걸. 괜히 오지랖을 떨어서 미도리마 스스로 함정을 파고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키세의 진심인 연애상담 따위 미도리마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들어줄검까?"
"…안 들어주면?"
"그냥 가겠죠?"
그렇지만 알면서도 함정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미도리마가 여기서 나간다면 키세는 그대로 그 고민을 안고 가겠지. 누구한테도 털어놓는 일 없는채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빙빙 돌리고 돌려 그냥 놀아달라는 정도로만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문전박대 당할 것이 눈에 보이듯 뻔했다. 가시밭길로 뛰어드는 고행의 고통을 눌러참으며 미도리마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물었다.
"해 봐."
미도리마의 그 말에 놀란 쪽은 키세였나보다. 진짜임까? 묻는 말에 미도리마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면 키세가 머리를 긁적이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다시 빨대를 질근질근 씹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거창한 건 아님다. 짝사랑이거든요."
"짝사랑? 네가?"
"그렇슴다. 비웃는 거 아니죠, 미도리맛치?"
멋쩍게 웃는 키세의 얼굴은 진심인 것 같았지만 키세가 연애상담도 모자라 짝사랑이라니. 머리가 핑 돌아버릴 것 같은 걸 묵묵히 참고 고개를 끄덕이면 키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도리맛치는 절대로 짝사랑 하지 말아요. 이거 진짜 힘듦다. 게다가 호의도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같은 학교?"
"아뇨.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임다. 그 때는 맨날 붙어있어도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이상하게 떨어지니까 좋아한다고 깨닫더라구요. 되게 웃긴데, 그 사람하고는 손도 잡아본 적이 없는데 꿈에 자꾸 나와요. 전부 기억해서 외워버릴 정도로. 그래서 기억해요. 목소리라든가, 손의 모양이라든가, 앞에 서면 어떤 눈높이에 있구나 하고. 꿈에서는 자꾸 이름을 불러줘서 진짜인 게 아닌 건 알지만. 그 사람 한 번도 이름은 불러준 적 없거든요.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것 같고. 아닌가? 어울려주는 정도면 친한건가?"
"…말은 해본거냐. 고백은?"
들으면 들을수록 속이 뒤집어지는 걸 꾹꾹 눌러참고 말하면 키세는 다시 웃었다.
"그 사람은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해도 절대 안 믿을걸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정색할 지도 모름다. 그렇게 깨지는 것보단 지금처럼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게 훨씬 낫잖아요. 오늘은 그냥… 조금 센치했을 뿐임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도 없고 겨우 답장이 오나 싶어서 확인했더니… 평소같은 말이긴 했는데 좀 맘에 걸리더라구요. 어쩌면 진짜 내가 그 사람한테 그 정도밖에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뛰어내려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거기까지가 미도리마의 한계였다. 죽어? 누가? 네가? 상상만으로도 눈 앞이 새카매지는 암전이었다.
- 좋아해.
미도리마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을 넘치도록 해줄텐데 그걸 가뿐히 무시하는 상대가, 눈 앞에 있으면 죽어라 패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만 웃어."
무엇보다 저딴 식으로 웃게 하는 상대가 미도리마는 싫었다. 저런 식으로 웃는 키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라 구역질이 올라온다. 차라리 키세를 패서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족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미도리마가 으르렁거리며 내뱉은 말에 키세가 놀랐는지 어색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그럼까, 미도리맛치. 무섭게시리. 못난 얘기해서 화났슴까?"
"그만, 웃으라고 한 거다."
"안돼요. 전 웃는 걸로 먹고 사는데요? 게다가 여기서 웃는 것도 안 하면 울검다."
"그럼 울어."
"네?"
"너는, 확실히 속에 있는 말은 잘 하지 않지. 그래서 나는 네가 운다거나 하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거다. 매일 웃으니까. 하지만 그딴 식으로 웃을 거면 차라리 우는 게 나은 거다. 화났냐고? 그래. 화 났지. 설마 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도 못하고 속으로만 질질 짜는 타입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그런 식으로 질질 짜댈 널 생각하면 화가 나는게 당연한 거다."
"질질 안 짜요. 안 울게요, 미도리맛치. 남고생이 남고생 앞에서 울면 당연히 짜증나잖아요."
"그딴게 아냐!"
분에 못 이겨 테이블을 탕- 내려치면 키세 뿐만 아니라 점내에 사람들이 모두 미도리마를 한 번씩 쳐다봤지만 올라간 언성은 내려갈 줄 몰랐다.
"꿈? 매일 꾸지. 나도 외울 수 있을 거 같아. 정작 한 번도 만져본 적도 없는데 전부 손에 잡히는 것처럼 생생하고 1초 전의 일처럼 전부 기억 나. 보이고, 만지고, 들리고, 그리고 웃고는 얘기해. 좋아한다고. 그러면 꿈에서 깨는 거다. 그런 건 현실이 아닐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매일 꿈에서 깨는데 화가 안나?"
"미도리맛…치?"
"차라리 나에게 고백해라, 료타. 매일 불러줄게, 이름. 답장도 꼬박고박 해주고 매일 옆에 있어주고 좋아한다고 말할테니까.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정말 미칠 것 같은데… 너한테서 정말로…"
좋아해.
그 목소리로 들리는 단어가 오롯이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간절히 바랬다. 꿈인걸 알면서도, 그 소리가 들리면 꿈에서 깨버리는 걸 알면서도 미도리마는 원했다. 그리고 꿈에서 깨면 늘 생각한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꿈을 꾸면 그 순간은 천국이지만 나머지는 지옥이다.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미도리마는 오늘도 꿈을 꿀 수 있길 간절히 원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알면서도 희망고문을 하는 것처럼 괴롭히는 그 꿈을 싫어하면서도 사랑했다. 키세에게 오는 무의미한 문자들에도 들뜨는 자신이 우스워서 밀어넣고 밀어넣고 또 외면하려고 했다. 차라리 완전히 지워버릴까. 그렇게 생각하고도 싶었지만 할 수도 없었다. 그 문자들을 하나하나 저장해놓는 자신이 그토록 바보스러웠던 순간이 있을까. 미도리마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게 끝이다. 지금까지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끝이었다. 키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뜨면 키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놀랐을까. 당황해할까. 농담이라고 말할까? 제발, 그 말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미도리마는 빌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부 털어놨는데도 가벼운 농 취급을 받는다면 미도리마는 정말 죽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빌고 또 비는 미도리마의 귀에 들린 단어는 단 하나였다.
"거…짓말."
"거짓말… 아냐."
빗나가지 않는 예상대로의 대답에 미도리마는 눈을 꽈악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키세가 가버린다면 좋을텐데.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미도리맛치, 듣고 있슴까? 매일 꿈에서 미도리맛치에게 얘기함다. 백마디, 천마디, 그것보다 더 많이 밤새도록 매일같이. 목이 쉬도록 얘기하면 미도리맛치는 이름을 불러요. 그러면 꿈에서 깨죠.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건 꿈인가요 아니면 진짜인가요? 빨리 대답해줘요, 미도리맛치. 이게 꿈이면 나는 좀 있으면 현실로 돌아가야 되니까. 네?"
귀에 들리는 단어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미도리마는 자신이 순간 그대로 까무룩히 잠에 든 줄 알았다. 눈을 뜨면 순간 조명이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지만 익숙한 아침의 천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눈 앞에는 키세가 있었다. 말하고 있었다. 꿈처럼. 아니, 꿈이 아닌 현실.
"미도리맛치, 듣고 있슴까?"
거기엔 키세 료타가 있었다.
미도리마가 기억하는 그대로. 그 얼굴, 목, 셔츠 아래의 목울대,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 밑에서 맥동하는 푸른 핏줄과 그 목소리를 가지고 꿈보다 더 달콤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좋아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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