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왜, 말을 안 해요? 저도 그런 거 하기 싫었어요. 누가 그딴 얘기 다신 꺼낼 줄 알고. 이길 수 있었는데……. 저도 3점슛 쏠 줄 알아요!”
“…얌전히 들어오라는 거다, 키세.”
2.
“미안함다, 미도리맛치….”
“들어오자마자 코코아 내놓으라고 말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먹고 싶었어요.”
“사먹으라는 거다.”
“일주일 동안.”
“…….”
“집에 처박혀서 TV만 보는데, 코코아 선전이 나와서 그 때부터 갑자기 먹고 싶었어요. 일주일 동안! 난 집 밖에 일주일 동안 못 나갔다구요!”
빼애애애액-
그런 효과음이 있다면 미도리마는 기꺼이 그 단어를 키세의 옆에 오려 붙여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끄에에엥 코코아! 코코아! 이건 뭐, 다섯 살 짜리 애도 마트에서 이렇게 울진 않을 거다. 미도리마는 한숨을 내쉬며 전기포트를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 훌쩍거리면서 소파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는 키세는 아닌 게 아니라 안 본 사이에 꽤 수척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상담을 왔을 때가 3주 전이었나.
미도리마는 스케쥴러를 살펴보았다. 3주. 미도리마와 키세는 늘 그 정도의 간격으로 만났다. 일주일은 너무 짧고, 한 달은 너무 길어 그 중간인 보름인데 시간이 안 맞으면 어영부영 미뤄지고 하는 애매한 시간.
그 때는 종일 시간이 날 것 같다며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겸사겸사 진찰도 좀 받고?
키세는 늘 자신의 문제를 가볍게 말하고 제 가치를 과소평가했다. 처음 농구부에서 봤을 땐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오만했던 키세 료타에게 이런 평을 내릴 줄은 15년 전의 미도리마도 몰랐을 것이다.
고작 지역 학생 모델에 불과했던 키세가 그럭저럭 지나갈 만한 사람들이 알아보는 연예인이 된 건 스무 살의 얘기였다. 패션모델로 활동하기엔 걸음걸이며 포즈를 배울 시기를 농구로 훌륭하게 날려먹고, 연예계로 진출할 생각은 없다던 키세를 미도리마는 대학교 1학년 때 버스 정류장에서 봤다. 청바지 광고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키세를 보게 되는 빈도가 점점 늘었다. 다음해 여름에는 TV에서 3점 슛을 쏘는 키세가 나왔다. 탄산음료 광고였다. 카피라이트가 뭐였더라. “원하는 건 언제나 놓치지 않아”. 촌스럽기 그지없는 대사였는데 키세 료타의 데뷔를 말할 땐 빠지지 않는 말이었다. 인지도를 높인 체육계 연예인 특집 예능에서도 그렇게 소개됐다. 프로만큼은 아니지만 화려했던 과거 영상이 나왔다. 그 영상들 사이엔 테이코 농구부원들이 섞여 있었고, 덕분에 미도리마는 졸업할 때까지 별명이 ‘슈터’였다.
원하는 건 언제나 놓치지 않아, 이 광고는 안 본 사람이 없지만 키세 군은 실력에 비해서 운이 안 따랐다고 하던데요.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던 거죠.
방금 전 영상이 농구부 마지막 경기였다고.
네. 그 뒤로는 못하게 됐슴다.
방청객들의 안타까운 탄식 뒤로 마지막 경기에서 분에 못 이겨 펑펑 울어버렸다는 키세의 부끄러운 고백과 그 뒤로 연예계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사회자의 내레이션이 이어졌다.
그 날이었나. 키세가 술에 잔뜩 취해 처음으로 미도리마가 살던 집 문을 두드렸던 건.
그 다음 해에는 서점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포스터에서 키세를 볼 수 있었다. 연예인 키세 료타의 화보집. 심야 단막극에 출연하고 일일드라마에도 나왔다가 어쩌다보니 황금시간대 드라마도 맡고, 운이 좋았슴다.
키세는 낄낄대며 말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삼십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미도리마가 문을 두드리고, 키세의 등을 두드리고, 양변기의 레버를 내렸다.
키세가 유명해 질수록 미도리마의 집에 들르는 횟수도 빈번해졌다. 평소와는 다른 비척대는 발소리와 미도리마를 부르기 전 한 번 멈추는 박자를 미도리마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미도리마는 대학을 졸업했고 레지던트까지 거쳐 새끼 전공의 타이틀을 달았다. 미도리마는 키세에게 제 명함을 건넸다. 지금 떠올리면 당시의 미도리마는 어찌됐든 전공의가 된 걸 자랑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와, 미도리맛치 대단함다! 멋있슴다!” 손뼉을 짝짝 치면서 키세는 명함을 자세히 보다 물었다. 풍선처럼 부풀어 있던 감정이―
“미도리맛치는 뭔가 그런 거랑 안 어울리는데. 왜 그런 걸 담당으로 선택했슴까?”
펑.
키세의 의문은 어찌보면 타당했을 것이다. 의대에 입학했을 때부터 미도리마는 외과에서 탐내는 인재였고 본인도 맘이 없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번드르르 해 보이지만 응급상황이라도 생기면 밤낮 없고, 수술이라도 들어갔다간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이 소요되는 이 직종에서 외과는 탑클래스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이 필수인 마당에 책상 앞에 붙어 공부만 하던 애들이 버텨나기야 하겠는가. 그 와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도합 6년이나 꾸준히 농구를 한 데다 전국구 수준의 대회에서도 강호라 불리던 학교의 에이스였던 학생이라니. 자세히 뜯어보면 학점도 좋고 손놀림은 전에 없이 섬세해 모자란 게 없다. 저건 무조건 외과다! 안돼도 외과에서 끌고 간다! 라고 다짐했던 교수들은, 그러나 미도리마가 제출한 전공 선택지를 보고 좌절해야만 했다.
이후 수많은 회유와 협박을 감히 키세는 상상할 수 있을까.
키세가 멀쩡한 정신으로 미도리마의 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났을 땐 미도리마도 키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그의 첫 매니저는 골초라 키세도 몇 대를 얻어 피웠고 술 마실 때는 그도 얇은 필터를 물게 되었다. 립스틱처럼 생긴 새빨간 열 개들이 담뱃갑을 미도리마는 매트리스 틈새에서 발견했다. 불면증은 스케쥴이 없을 때 더 심해졌다. 키세는 단순히 잠이 줄어들었을 뿐이라 주장했지만 하루 두 시간의 수면을 누구도 잠이 줄었다는 수준으로 말하진 않았다.
“새삼스럽게.”
인터하이 이후론 늘 그랬슴다. 학교 다니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지갑 안에 굴러다니는 알약은 수면유도제와 진통제였다. 수면제를 처방받으려면 정신과를 가야 되는데 그건 싫고, 비 올 것 같으면 무릎이 쑤시거든요. 이제는 굳은살이 박였던 흔적조차 없는 매끈한 손으로 키세는 알약을 두 개 털어 넣었다.
(중략)
“앞으로 잘 부탁함다, 미도리맛치.”
“무엇…을 말이냐.”
“잠잠해질 때까지 이 집에서 신세지기? 아침에 다녀와요,도 해주고 올 때는 잘 다녀왔어? 라고도 해줄게요.”
“뭣 때문에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미도리맛치도 알지 않슴까. 앞으로 2주치 스케쥴이 전부 캔슬됐슴다. 기자들은 밖에서 죽치고 있을거고. 난 집에서 코코아 먹고 싶어서 죽을 거고, 팬들은 팬들대로 난리지. 무섭다구요. 자고 일어났는데 슬쩍 문 열어 보면 포스트잇이 쫙 붙어있다니까요. 오빠가 남자를 좋아한다니 응원할게요, 같은 건 귀엽기라도 하지. 더러워서 못 봐주겠다는 것도 있고, 아니 그전에 난 연애를 안하는데!”
“…내가 거절하면?”
“거절할 거에요?”
선조들이 말하길, 웃는 낯엔 침 못 뱉는다고. 다 마신 코코아 잔을 자연스럽게 내미는 키세에게, 또 그걸 습관적으로 받아들고 설거지하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미도리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