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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5 [코드기어스/스자루루] 생존 에튀드(Etude : Existence)
- 2018.12.30 [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 2018.04.04 [A3!/오미사쿄] 노을의 끝
- 2018.03.30 [A3!/오미사쿄] 첫키스
- 2018.03.29 [A3!/마키사쿄] 여름의 눈
글
[코드기어스/스자루루] 생존 에튀드(Etude : Existence)
코드기어스 신극 국내 개봉 기념 몇 년 전 냈던 원고 공개합니다. 망국의 아키토 2부 기반.
모티브가 된 곡은 ㅅㅍ의 에튀드 곡 중 하나입니다.
숨을 죽이고 다가선다. 잠든 얼굴은 평온하다. 그는 생각한다. 자신도 잘 때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니. 본 적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어쩌면 그런 나날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날들. 까마득히 높은 계단을 올라 붉은 기둥의 문을 지나, 푸른 신록이 울창하고 햇볕이 따사롭던 나날. 하카마를 입고 다다미가 깔린 도장에서 목도를 휘둘렀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 정적인 것들은 젬병이었다. 대신 동체 시력은 어릴 적부터 좋았다. 활자를 읽는 것보다 몸으로 익히는 게 훨씬 편했다. 내일 배울 것들을 생각하며 잠드는 밤은 즐거웠다.
집에 불청객이 찾아온 다음엔 침묵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정적인 흐름. 익숙치않던 것이 익숙해졌다. 셋이 좁은 방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잤다. 즐거웠다. 내일 같이 뭘 하고 놀까 고민하며 잠들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바로 몇 달 전까진 평온히 잠들었으리라. 간혹 한숨 대신 내뱉던 죽고 싶다는 원초적 소망과 얕은 잠에서조차 까마득한 벼랑에서 추락하던 나날들이 멀었다.
흰 정복, 가냘픈 레이피어, 그의 손에서 떠나간 검이 심장을 가볍게 찌르던 순간 전신으로 퍼지던 열정들.
전선의 비참함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견뎌낼 수 있었다. 꽃향기가 흐드러지던 밤, 뭉근한 그 향만큼이나 이상은 달았다. 높고 아름다웠다. 내일의 할 일을 곱씹으며 잔다는 것. 그 얼마나 충만한 감각이었는지? 잃어버린 것만이 추억이 된다 - .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흩어져 사르락 거리는 소리를 낸다. 얇은 이불 밑으로 살짝 드러난 가늘고 흰 목. 영면에 빠진 그녀의 파리한 목을 상기한다. 그녀가 한 발의 총상으로 죽은 것에 가끔 감사할 때가 있다. 사지육신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시체를 무수히 많이 보았기에 감사하며 마지막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고, 그 가녀린 전신을 낙인처럼 지져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져진 흉터에 남자가 겹쳤다.
길고 바른 자태는 그들의 유전일까.
가지런히 놓여있는 오른손 중지 손가락에 거뭇한 잉크가 배어있다. 꼼꼼한 남자에게는 드문 일이다. 남자는 볼펜 대신 잉크를 찍어 쓰는 고전적인 방식의 만년필을 선호했다. 그런 점조차, 그녀를 닮아있었다. 그녀는 좀 더 클래식한 형태의 깃펜을 애용했다. 물론 외형만 그렇고 안에는 잉크를 넣을 수 있는 홈이 있고 만년필과 비슷한 형식으로 카트리지를 넣을 수 없다는 것만 빼면 훌륭하다.
지금 그 깃펜은 그의 왼쪽 가슴에 있다. 그녀의 기사였던 그에게 유품으로 남겨졌다. 황제의 열두 기사 중 한 명이 된 지금도 소중하게 품고 다닌다. 주머니 위로 드러나는 형태를 손끝으로 더듬을 때마다 그는 아득하게 멀어진 날들을 생각했다. 가느다란 검의 끝이 예리하게 그의 심장을 쿡 찔렀을 때 전신으로 퍼졌던 그 열정. 온기. 다정함. 행복. 사랑. 온갖 아름다운 가치들의 이름. 한순간에 무너질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손에 들어오는 것들은 모두 바람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그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토록 우악스럽게 뺏길 줄 누가 알았을까. 정원은 폐허가 됐고 꽃은 만개한 채로 짓뭉개졌으며 이상은 무너지고 모든 것들은 한 줌 재가 되었다. 폐허의 일부가 되었어도 생이 붙어있는 그만이 쓸쓸하다.
슬프냐고?
전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슬픔은 어느 순간 분노와 증오로 화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스자크, 나는 브리타니아를 부숴버리겠어.
어린 날 들었던 떨리는 목소리를 그는 상기해본다. 단백질 타는 역겨운 냄새가 짭짤한 바닷바람과 섞여 들척하게 달라붙던 여름.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꽉 쥔 주먹과 굳은 눈동자에도 무게감이 없는 말이었다. 망상이다. 그래서 잊고 있던 말이었다.
그 여름부터, 상대방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기이한 동질감과 표현할 수 없는 역설을 느끼며 몇 번이고 상상한다. 수백, 수천, 수만 번. 눈앞의 남자가 말할 때마다, 미소 지을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로 치환한다. 그에게 삶은 죄악이기에,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각할 때마다 그 남자를, 제로를 죽이면, 죽이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고.
강박적인 되뇌임은 뇌 안의 시냅스를 멋대로 굴린다.
그는 열두 살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 죽어도 묘비조차 세워지지 못하는 일련번호의 총알받이. 어제 키스하고 사랑을 나눈 온기조차 내일이면 고깃덩어리가 되어 소각되는 무자비한 살육전. 총기는 가질 수 없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알고 있다. 무언가 푹 하고 터지는 소리, 부드러운 거죽을 파고들어 근육 깊숙하게 나이프를 박는 감각. 나이프를 감싸면 손가락 한 마디도 남지 않았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머리를 돌로 찍어 내렸다. 식사용 나이프로 남자의 목을 갈랐다. 달리는 기차에서 남자의 얼굴을 바닥에 눌렀다. 귀청을 찢는 비명이 이내 너덜거리며 튀어 오른 핏덩이로 사라졌다. 갈비뼈가 부러진 걸까. 구멍 난 폐로 남자가 가쁘게 호흡하면서 자신을 보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발로 짓이긴다. 펑하고 터진 끈적한 피와 회백질의 뇌수가 흰 제복에 점점이 튀었다.
환상만은 황홀하다. 몇 번이고 그의 손으로 죽었던 남자는 지금은 단지 평안한 잠을 누리고 있다. 진절머리 나는 꿈은 이제 그만 꾸고 싶다. 그는 요즘 까마득한 벼랑으로 떨어지는 대신 제 심장이 도려내지는 꿈만 꾸었다. 매끈한 원으로 구멍 난 가슴으로는 그녀가 찌르던 레이피어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 유리병으로 옮겨 간 그의 심장이 쿵쾅거릴 때마다 고인 핏물이 경쾌하게 찰랑거린다. 텅 빈 왼쪽 가슴에 팔을 집어넣으며 깔깔대던 남자가 그의 가슴위로 올라타 유리처럼 찬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싼다. 그와 남자는 시선이 마주친다. 남자는 그의 이름을 부른다. 스자크, 하고 언제나와 변함없는 어조로.
그는 거울처럼 반대로 해본다. 를르슈, 하고 이름을 부르다가 어느 새 낯설어진 발음에 그는 깜짝 놀라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되돌려준다는 의미만을 담은 겉치레다. 중요한 것은 이 다음에 이어지는 행위다. 장갑 밑으로도 가벼운 맥박이 느껴진다. 천천히 짓누른다. 두 손바닥 안에 꽉 잡히는 가느다란 목덜미. 어느 새 잠에서 깬 눈동자가 그를 응시한다.
“―스자크.”
불현듯 불린 이름에 스자크는 눈을 깜박인다. 번져가는 붉은 노을에 눈이 부시다. 태양을 가르며 북서쪽으로 향하는 열차는 9시간 동안 달려간다. 출발한 지 세 시간 쯤. 선 채로 잠이 든 걸까. 지루할 법 하기도 했지만 근무 시간에 졸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기왕이면 유페미아의 꿈을 꾸는 쪽이 훨씬 좋았다. 꿈에서까지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질색이었다.
“스…자크!”
봐.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남자는 현실에서도 스자크의 눈앞에 있다. 절박하게 스자크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면 창가 쪽 테이블에 앉은 남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
지금 달리는 8량의 기차는 눈앞의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준비된 것이다. 겉으로는 수수해 보이지만 방탄은 기본, 편의에도 부족함 없이 따로 있고 바닥에는 천연 양모 카펫, 천장의 등은 섬세한 유리 세공으로 장식되어 있다. 오직 황제와 황족들만을 위해 움직이며 황족 다음의 권위를 지닌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도 탈 수 없다. 이 열차의 주인은 쿠루루기가 아닌 이 남자다.
남자가 황족이냐 하면, 지금은, 아니다. 쥴리어스 킹슬레이. 지지부진하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유로피아 작전의 서부 전선을 전담할 군사(軍師). 브리타니아 남부 해안 마을에서 태어났다. 으레 모든 브리타니아 군인들이 졸업하는 사관학교는 다니지 않았다. 군에는 자원입대한 직후 줄곧 황제 직속으로 전략 총괄을 맡았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작전 참여는 처음이다. 스자크가 보기에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기록에도 남자는 제 삶을 의심하지 않는다.
스자크가 그의 호위를 겸해 유럽 전선에의 출전을 명 받은 것은 일주일 전. 온통 검은색이지만 안대와 목깃, 망토에 새겨진 문양만은 황금색이다. 그것은 제국의 상징, 꽃이자 검이다. 신성 브리타니아의 영광 아래에서 남자는 그럴듯한 충신처럼 보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고압적인 전형적인 브리타니아 귀족의 모습이다. 이전의 그는 이런 사람을 몹시 싫어했는데, 아이러니한 일이다.
스자크는 그가 싫었다. 단순히 꺼리는 게 아니라 혐오했다.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다. 그가 온유하고 예의바르며 겸손한 사람이었더라도 스자크는 그를 싫어했을 게 분명하다. 저에게는 까닭 모를 혐오감을 비치는 스자크를 보면서도 남자는 웃을 정도로 대담했고 무심했다. 오히려 스자크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즐기는 기색마저 보였다. “스자크”. 부를 때마다 그가 불쾌해하자 쥴리어스는 기꺼이 그에게 하대하며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도 스자크의 이름을 멋대로 지껄이는 것이 그 남자의 본질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셈이다.
“뭔가 문제라도, 킹슬레이 경?”
긴 머리카락과 얼굴의 반을 가린 안대에 남자의 고개 숙인 얼굴은 스자크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상당히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입술을 꽉 깨물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신음하듯 스자크를 부르는 게 고작일 정도로.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약을 챙겨먹지 않으면 발작 수준까지 가는 극심한 편두통이 만성이다. 그의 말로는 열두 살 때부터 그랬다고 했으니 습관이 될 법 한데도 그는 약 먹는 것을 종종 잊어버렸다. 근 일주일간의 경험상, 곧 있으면 바닥에 뻗어 사지를 가누지 못한 채 바르작거릴 것을 알면서도 스자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물었다.
“물을……, 스자…크!”
무엇 하나 굽힐 줄 모르는 남자가 이 때만은 스자크에게 고개를 숙이고 애원한다. 끔찍한 호위생활에서 유일한 낙이었다. 스자크는 약 올리듯 천천히 움직였다. 컵에 물을 따르고 걸어가며 이 물을 머리 위에 쏟아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지니. 스자크의 발소리만을 듣고 성급하게 뻗어진 쥴리어스의 팔이 스자크가 들고 있던 물컵을 쳐버렸다.
“저런.”
일말의 동정심조차 없는 무의미한 말이 스자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졸지에 얼음물을 흠뻑 뒤집어 쓴 쥴리어스는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을 닦을 기력도 없는 건지 중얼거리며 욕을 짓씹을 뿐이었다.
“참을성이 부족하시군요.”
“…닥쳐.”
“약 정도는 혼자 드실 수 없으신 겁니까.”
“너……!”
스자크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의 극심한 두통은 눈을 후벼 파는 쑤심과 뇌를 쉐이커에 갈아버리는 울렁거림, 어지러움, 목이 찢어질 것 같은 갈증을 동반한다. 얼굴을 타고 떨어져 입술로 스미는 한 방울조차 기꺼이 혀를 내밀어 축일 정도로 메마른 그의 앞에 컵을 내려놓는다.
“부디.”
약통을 여는 손이 바들바들 떨려 알약들을 테이블 위에 흩뿌린다. 두 알을 집어 입 안에 털어놓고 컵을 집어 들면 이번에는 얼굴 대신 테이블 위에 또 반을 쏟는다. 머리에서, 테이블에서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노을을 버금도 반짝인다. 먹먹하게 젖어드는 바닥의 카펫을 스자크는 바라본다. 겨우 ‘먹는다’라는 행위를 완수한 몸이 소파 뒤로 늘어진다. 밭은 숨, 두터운 색으로 점점이 번진 원들이 피처럼 보인다. 스자크는 그의 머리를 휘어잡았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선연한 것들. 쿠루루기 스자크는 보았다. 힘을 잃어가는 가쁜 숨소리도 들었다. 다만 생생한 눈동자가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안대가 젖었네요.”
물을 잔뜩 머금은 두터운 천이 스자크의 장갑을 적신다. 반항하지 못하는 얼굴에서 우악스럽게 안대를 벗겼다. 줄곧 어둠 속에 있던 동공이 갑작스러운 노출에 수축한다.
“눈은, 괜찮으신지?”
점막은 민감해서 혀의 돌기조차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눈을 크게 벌리고 스자크는 혀로 반들반들한 눈알을 핥는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눈꺼풀을 손으로 벌린다. 아파하면 좋겠다. 뭉그러질 때까지 입 안에 넣고 굴리고 싶다. 걸쭉하고 기분 나쁜 액체가 식도를 타고 스멀스멀 넘어가서, 그러면 나는 위산으로 그 날개 달린 새를 산화시키는 거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지니.
상상 속에서 툭-,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
“부정하진 않을게.”
스자크의 생각보다 흔쾌히 를르슈는 인정했다.
“너와 나는 사실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지. 샤리가 예전에 그랬어. 우리는 정 반대라고.”
이제는 그것도 추억이네.
덧붙인 한 마디가 스자크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잃어버린 것만이 추억이 된다. 잃어버린 무수히 많은 것들을 되새김질 하는 얼굴은 파리하지만 사금처럼 반짝였다. 스자크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때때로 그에게서 그런 종류의 반짝임을 발견하곤 했다. 자신에게는 도저히 없을 법한 그것이 최근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나나리도, 미레이도, 샤리도, 카렌도, 리발도, 그 외의 많은 사람들도 어느 순간 때때로 그렇게 강렬한 빛을 낸다.
“나는 살고 싶어.”
이제 와서, 얼마나 무의미한 말일까. 스자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죽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아. 누군가를 지켜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지. 넌 죽고 난 다음의 네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있어? 난 상상해. 내가 죽었으면 나나리도 곧 죽었을 거야. 어머니랑 같이 죽었을까? 아리에스 궁의 알현실 말야. 그 뒤라면 황궁 내의 어딘가 라든가, 독살의 가능성도 있어. 그 때의 우리는 실권을 전부 잃어버린 상황이었으니까. 코넬리아가 힘썼을 거라고 해도 빈틈은 많아. 어머니에 대한 경애와 유피의 호의 같은 정 말고는 실리가 없지. 일본에 와서, 그래 스자크. 너도 봤지. 신원 확인도 못하고 전염병이 돌까봐 그 자리에서 태웠어. 시체 타는 냄새가 그렇게 역겨운 데도 나나리는 헛구역질 한 번 하지 않았지. 그것 말고도 많이 봤잖아? 너는 군인이니까. 유피도…….”
“…가끔 네 뻔뻔함엔 혀를 내두르게 돼, 를르슈.”
“잊지 말라고 얘기하는 거야. 유페미아를 죽인 건 나니까. 좋아. 그럼 전쟁을 무사히 지나쳤다고 해보자. 그 다음 한동안은 괜찮았어. 앗슈포드 백작은 이상한 사람이야. 너도 알잖아? 회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백작을 쏙 빼닮았어. 그렇지만 그녀는 손녀고, 자식은 안 닮았거든. 우리가 졸업하는 순간 우리는 아마 죽었을 거야. 클럽하우스에 계속 기거하고 있었으니 학생들의 이목이 있어 재학 중엔 안됐겠지. 생각해 봐 쓸모가 없잖아. 황족으로 복귀할 마음이 우리에게 전혀 없는 이상 우리는 어딜 가도 쓰레기거든.”
를르슈는 시종일관 웃는 표정이었다. 한 때 스자크는 그를 죽이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한 적 있었다. 그 때마다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질척한 체액으로 엉망이 되어 끅끅거리며 짐승의 소리를 냈다. 그를 죽이는 방법을 수도 없이 많이 상상했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웃는 표정은 없었다. 살기 위해서 추악하게 발버둥치는 것이 지금까지 스자크가 상상하던 를르슈의 모습이었다.
“크로비스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 샤리의 아버지는 생각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병사들은 어땠을까. 후회하지 않아. 전부 내 선택이었으니까.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고 누구나 삶을 염원해. 아, 너 빼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신기한 것을 쳐다보는 눈을 하는 를르슈를 동시에 스자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랬다. 우리는 극과 극이었다. 스자크는 아마, 제가 처음 사람을 죽인 일이 없어진다 해도 삶을 종교처럼 맹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는 누구든 평화롭게 살아남을 수 없다. 윤리를 집어던진 인간들이 어떤 저열한 짓을 하고 살아남는지 그도 봐왔을 것이다. 차별, 구속, 억압, 유린, 학살. 사전의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을 늘어놓고 무작위로 섞어 숨이 붙어있다면 생존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가 살인자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스자크와 를르슈는 하다못해 친족을 죽였다. 본래 브리타니아의 수도 펜드래곤의 궁에 거주해야 할 이들이 도쿄 임시 정청에 머물러 있는 이유 또한 비슷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수만의 사람을 한 줌 재와 1초의 단말마도 없이 소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무색할 만큼 통째로 들려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이들의 대지 위로 스자크와 를르슈의 목숨이 붙어있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삶을 기쁘게 여길 재간이 스자크에겐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스자크.”
그래도 어째서 를르슈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뻔뻔해. 그래도 살아있는 게 좋아. 손뼉 치고 뛰놀고 싶을 정도로 기뻐. 추악하고 비겁하지.”
아니야. 스자크는 속으로 말했다.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목 끝까지 들이찬 말을 스자크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틀린 거야.”
스자크의 눈이 세 번, 깜박인다. 커다란 망막에 담기는 제 상을 보면서 를르슈는 또 웃었다. 지금까지 줄곧 스자크는 를르슈에게 틀렸다고 말했지만 를르슈가 그 사실을 한 번도 인정한 적은 없었다. 자존심에 주장을 굽힌 적도 없으니 스자크로서는 놀랄 수 밖에 없는 얘기겠지.
“나는 틀렸어. 강자만이 살아남는다. 그게 브리타니아의 국시. 약자였던 주제에, 그토록 아버지의, 브리타니아의 방식을 싫어했으면서도 나도 별 다를 바 없었어."
"지금은 안 그렇다고?"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은 맞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뿐. 죽을 각오가 없으면 남을 죽일 수 없어. 알량한 위선이라고 해도 좋아. 너는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나 죽이는 게 아냐."
를르슈의 올곧은 시선이 스자크를 향한다.
"원래대로라면 넌 어딘가에서 죽었겠지. 네 의사와는 관계없이 내가 너에게 명을 내려 네 목숨을 거뒀고, 가졌다. 그러니 너에겐 정당한 자격도 이유도 있어.“
를르슈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눈치 챘다. 스자크는 쓰게 웃었다. 다른 것들은 꽤 솔직하게 인정하고 내뱉었던 주제에 위로만큼은 서툴러서 이토록 에둘러 말해야 한다.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 쓸데없다고 말하는 스자크에게 를르슈는 그렇게 답했다.
⁕
그는 처음 브리타니아 대륙을 밟았을 때를 생각한다. 지금과 꼭 같이, AREA11부터 브리타니아까지의 9시간 동안 같이 있던 상대를 생각한다.
쿠루루기 스자크는 유복한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일찌감치 죽었고 아버지는 한 나라의 총리였으니 아이에게 할애할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많았으나 그 누구도 스자크의 말상대가 되어주지는 않았기에 스자크는 혼자였다. 전쟁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사람은 넘치게 흘러갔으나 그들은 군인이었다. 흘러만 갔다. 누구도 그의 곁에 남지 않았다.
그런 연유에서 상대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쿠루루기 스자크와 가장 많이 시간을 공유한 사람이며 과거에서 지금까지 연이 이어진 얼마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구속복을 입히고 온 몸을 뒤틀며 되지도 않는 반항을 하는 남자를 기절시켰다. 눈은 가리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 채로 스자크의 맞은 편 시트에 앉아 창공을 지났다. 그 와중에도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아름다움이 보여 스자크는 곤란했다. 쿠루루기 스자크는 때때로 그에게서 그런 것들을 보곤 했다. 지위가 없어도 높은 단상 위에 있는 것처럼 오만해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 모두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경애를 바칠 것이다.
비슷한 형태로는 되었다. 그의 기사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많은 이들이 때로는 자신과 반목함에도 그를 사랑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기만이었다.
긴 비행시간이었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이상하게 목도 마르지 않았다. 사람은 최대 열흘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가만히 앉아서 스자크는 줄곧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만약이 되풀이되었다. 만약 후쿠오카 기지에서 그와 손잡지 않았더라면, 나리타 혹은 도쿄 항만에서 그를 포획했더라면, 그의 정체를 일찌감치 알았더라면, 그가 전쟁 이후 브리타니아로 얌전히 돌아갔더라면, 그가 차라리 일본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의 여동생이 아니라 그가 총을 맞아 죽었더라면――.
만약은 실현되지 않을 것의 총칭이며 소망의 다른 발음이다. 한 번도 제 이외에 누군가가 죽는 것을 염원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기어이 그 지경까지 자신을 내모는 상대가 증오스러웠다. 자신이 바스라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난 8년 동안 수라장 속에서도 줄곧 지켜왔던 신념 -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 자신만을 위해서 힘을 쓰지 않겠다는 - 도 그의 앞에서는 만신창이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부조리한 폭력조차 건드리지 못했던 스자크의 신념을 그는 단 한 방의 총성으로 깨끗이 무너뜨려 버렸다.
너는 내가 잘못되었다고 애기했지.
그는 침묵한다.
아냐. 네가 틀렸어.
—침묵.
너는 그냥.
그는 머리가 좋았다. 500가지의 수신호를 만들고 전교생의 이름과 얼굴을 외울 정도로, 성적을 눈에 띄지 않는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의 지휘를 파악하고 행동 패턴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상대를 속이고 속이고 또 속일 정도로. 그러다 기어이 제 자신도 속여 넘긴 것이다. 그는 스자크에게 늘 바보라고 얘기했지만 이 부분은 분명 스자크가 옳다.
스자크는 마른 침을 삼켰다.
너는 그냥…….
……침묵. 침묵. 침묵. 쓰러진 그는 말이 없다. 침묵은 긍정일까?
스자크는 대신 지금의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 때와는 달리 둘만의 기차 안은 수다스러웠다.
“야만적이야.”
“무식하고.”, “배려심도 없지.”
“안구를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아직도 두통의 기미가 조금 남은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끊임없이 비난을 쏟아내는 쥴리어스의 목소리를 스자크는 시종일관 무시했다.
“내가 죽지 않아서 아쉬워?”
그러나 그 말에는 반사적으로 시선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마주친 눈동자가 ‘걸려들었다’라는 호기를 내뿜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회피할 수도 없어 스자크는 적당히 에둘러 답했다.
“글쎄요.”
“아쉽다는 얘기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쥴리어스는 보송보송하게 마른 안대를 손으로 지분거렸다. 정중한 손놀림으로 얼굴과 머리의 물기를 닦고, 안대를 씌우고, 조심스럽게 소파 뒤로 눕힌다. 죽이려고 생각하면서 상대를 그토록 정중히 돌보는 것. 고지식한 것도 참 힘든 일이다.
“명령만 아니면 죽였을까?”
그가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은 쥴리어스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스자크도 별로 감추지는 않았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따갑게 와닿는 시선은 호위가 아니라 감시다. 경멸과 혐오. 손이 닿을 때마다 꺼림칙해 움츠리는 그의 어깨. 그래도 잡아야 한다면, 으스러뜨릴 듯 손가락 마디마디 온 힘을 실어 쥔다. 의도한 건 아니다. 쥴리어스 킹슬레이가 본 쿠루루기 스자크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할 줄 아는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기사였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어떤 지는 둘째 치고 - 쥴리어스는 스자크가 무의식적으로 얹어두는 왼쪽 가슴에 '처음'으로 받았던 기사장과 깃펜이 들어있음을 알고 있었다 - 그는 결코 배반하거나 약은 꾀를 부리지는 못하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온전히 그의 무의식이었다.
뇌가 으깨지는 고통 속에서도 억센 손아귀와 진득하게 눈알을 핥던 혀의 감각. 스자크가 그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묘하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그토록 사무치는 원한이 제게 닿을 일이 있었나 생각해보지만 스자크와 만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이 죽는 게 무섭나?"
쥴리어스의 맥락 모를 말에 스자크가 눈을 깜박였다.
"기록을 봤어. 쿠루루기 일등병 시절부터 나이트 오브 세븐까지. 전시 중에도 인명구조 기록이 꽤 있더군. 상대방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말하는 게 습관이고 공격할 때는 상대 기체를 가동 불능 상태로 두는 것에만 만족한다지? 뭐, 일격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게 효율성이야 더 좋지만."
"그러면 상관없는 얘기 아닌가요?"
"그냥 궁금한 거야, 스자크. 우리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너는 전쟁의 적조차 죽이려 들지 않으면서 나를 죽이고 싶어 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만큼 억제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적의를 드러내는 것도 사양하지 않지. 그래도 죽이지는 못해. 왜?"
"논점이 이상하군요. 이유는 물어보지 않는 겁니까?"
"말해 줄 만한 이유라면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대해서도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관심은 없어."
"어째서?"
"죽고 사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지?"
당연하게 반문하는 쥴리어스에게 스자크는 말을 잃었다. 그는 정말로 스자크의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스자크가 맘만 먹으면 목이 비틀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쥴리어스는 무방비하고 거만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당장 죽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편한 자세냐, 그렇게 묻고 싶은 표정인데 스자크."
오른쪽 눈을 치켜뜨고 스자크를 바라보는 그는 역시 긴장은커녕 스자크에 대해 한 점의 경계심조차 띄우고 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지. 사람이 죽는 게 두려워?"
"그럴…지도."
"본인이 죽는 건?"
"그건 두렵지 않습니다."
"왜?"
"언제나 원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살아라.
그 명령이 스자크를 지금 여기까지 이끌고 있었다. 그건 하나의 저주였다. 스자크의 가장 싫은 모습을 억지로 만든다. 의지를 배반한 몸이 그의 몸을 멋대로 움직여 스자크의 생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수치스러울 정도로 싫었다.
쥴리어스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진다. "쓸모없군." 단호하게 내뱉어진 말에 스자크는 그와 있는 도중, 처음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어째서입니까?”
“이봐, 스자크. 전쟁은 뭐라고 생각하지?”
“또 다른 말이군요.”
“맥락은 그대로야. 답해 봐.”
“군인에겐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고 받들 뿐.”
“회피하기엔 적합하지만 멍청한 답이다.”
쥴리어스의 시선이 스자크가 그를 보는 것만큼이나 경멸스러워졌다.
“일반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그들은 피해자니까. 하지만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주제에 신념조차 없다면 그건 쓰레기야.”
“신념은 있습니다.”
“피해자를 줄이고 싶다는 어설픈 선의 말인가? 그래, 그게 진심이라면.”
“진심입니다.”
“남을 구하다가 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말야. 내심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이 있어?”
신랄한 어투였다. 얼마나 덧없는 말인지도 알고 있었으나 남을 지키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뒤에 이어진 말을 스자크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승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갈망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휘둘리기만 하는 그대는 차라리 이등병이었던 게 훨씬 나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쥴리어스 경. 당신에게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한껏 비꼬는 말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에게 어떤 의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황제의 꼭두각시 주제에 제 처지도 모르면서. 당장이라도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너는 세계를 배반해, 배신당해 여기에 형벌처럼 끌려왔노라고. 바닥에 쳐박혀서 비틀어진 신념을 네 것이라 믿으면서 네가 그토록 증오하던 브리타니아의 밑에서 개처럼 봉사하고 있다고. 사상누각처럼 쓸려나갈 허무한 영광을 으스대고 있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가 어떤 답변을 해도 스자크는 비웃을 자신이 있었다.
“생존은 본능이야. 사회질서가 인간을 고등하게 만들었지만 전쟁에선 불가능해. 살아남기 위해 승리한다. 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욕망이다. 타인의 죽음도, 그래, 두렵지만 나는 내가 죽는 게 싫다, 스자크.”
놀랍도록 원초적인 대답이었다. 스자크는 옳았다. 태평양을 지나며 바다 위에서 그에게 물었던 말의 대답이기도 했다. 침묵은 긍정. 스자크는 옳았다. 나나리도, 마리안느의 일도 모든 것은 핑계다. 그는 그냥 제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을 뿐이다. 구차하게.
“맘에 안든다는 표정인데.”
스자크의 표정에 쥴리어스는 또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관심 없다고 해도 누군가에게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멸시받는 것을 두고 볼 취미는 없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황족보다 아래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내가 위겠지?”
“전시에서는 경의 명을 우선할 수도 있지만 당신에게 복종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상관없어. 그대의 전공은 전술이고 나는 전략이지. 그대를 이 전선에서 가장 빛나게 해주지, 스자크. 이 전선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겠어.”
“무슨 뜻입니까?”
“자네를 철저하게 적을 섬멸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아. 스자크는 역시 그가 싫었다. 또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살아라, 라고. 그게 그의 본질이었다.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남을 기만하고, 쿠루루기 스자크를 괴롭히는 걸 더없이 즐기는 남자.
⁕
―죽고 싶지 않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었다. 창으로 비치는 햇빛에 눈을 깜박인다. 느긋한 하루였다. 오늘은 휴가에요. 나나리가 손을 잡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여유로운 하루를 보장받았다.
시간은 바쁘게 흘렀다. 직접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바빴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매일의 스케쥴은 가득 차 있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차라리 란슬롯으로 9시간 동안 쉬지 않고 비행과 전투를 반복하는 쪽이 더 나은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도 지금은 박물관에 부서진 채로 존재하는 파편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군인이 일해야 되는 나라는 필요 없다. 18살 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소년병으로 살아온 사람도 이제는 바뀐 직책에 익숙해져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종종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얼굴만 잘 가린다면 이제는 알아보는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에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손으로 제 손가락이나 겨우 쥐면 다행일 것 같은 아이가 엄마의 응원에 힘입어 걸음마를 시작한다. 길고양이가 가볍고 힘 있게 걷는다. 크레이프를 파는 노점에는 몇몇 커플이 줄을 서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 밖으로 산책을 나온 피곤해 보이는 직장인들도 있다.
선글라스를 끼고서도 모두가 눈부셨으며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후지산의 사쿠라다이트가 폭발해 재가 창공을 뒤덮었던, 말 그대로 잿빛의 풍경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트메어프레임의 잔해들이 수직낙하하고 어디선가 끊임없이 폭발음이 들리기도 했다. 웅웅거리는 기계음 사이로 간혹 사람의 비명이 들리기도 했었다. 팩트 스피어의 끝자락에서 부서진 채로 날아가는 콕핏과 혹은 떨어지는 사람 같은 것들을 보기도 했다.
―살아라.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점멸하는 붉은 등이 그것들을 온전하게 지워버렸다. 간혹 꿈을 꾸는 날들이 있다.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과 경험이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이 둔했다. 드러나지 않게 온 몸을 칭칭 둘러싸고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남은 것은 칼날이 피부와 근육, 뼈를 관통해서 나아가는 감각뿐이다. 기온도, 소리도, 하다못해 제 뺨에 닿았던 손조차 가면 너머라 그저 턱-하고 가면을 흔든 채로 그저 의미 없이 사라졌다.
흰 옷이 햇빛을 반사해 난연하게 빛났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검은 필름이 붙은 시야는 색맹이다. 번진 빛이 조금씩 까맣게 물들어 죽어갔다.
그대를 가장 빛나게 해주지.
같은 얼굴의 다른 이름인 그가 그렇게 말한 적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가 아름답다. 애늙은이처럼 관조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려면 종종 그 말이 떠올랐다. 그가 끌어안고 있던 인과관계, 겉치레를 벗어던진 순수한 그의 본질이었다. 오만한 그는 자신을 발밑에 꿇리기 위해 말했다.
그대를 이 전선에서 가장 빛나게 해주지, 스자크. 이 전선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겠어.
그가 솔직하게 말하는 데에 서투르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말들은 제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솔직한 말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영달보다도 드높은 찬미가 제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
지금 그 이름을 내뱉는 것은 죄이므로 입술을 짓씹어 삼킨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넘겨주었다. 서로의 소망과 상반되는 행위를 벌로 받았으나 기회는 늘 살아남은 사람에게 있다. 죽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남은 행복도 전부 세계에 바치라고 말했던 주제에, 왜.
—나는 죽는 게 싫어, 스자크.
처음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너무 늦은 얘기라는 것도 떠올렸다.
⁕
황력 2018년, 브리타니아의 수도가 소멸되는 등 세기의 전투 끝에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제 99대 황제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세계를 통일했다.
그의 억압적이고 악랄한 독재 방식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규탄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브리타니아의 세계 지배를 앞당겼을 뿐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브리타니아와 대등한 힘을 갖고 있던 유럽전선이 그해 초, 사실상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비등하게 흘러가던 전쟁의 승기가 브리타니아 쪽으로 흐른 것은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당시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크가 파견된 이후이다. 훗날 세계를 손에 넣은 황제의 기사, 나이트 오브 제로가 된 그의 무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나 전투 기록을 보면 오히려 그의 등장은 매우 적었으며 철저히 전략의 싸움이었다.
브리타니아의 실권을 노리던 유로 브리타니아 세력의 싹을 자름과 동시에 전쟁의 승리를 가져온 명민한 책략가가 거기에 있었음에는 분명하다. 빠르고 정확하며, 주변의 지형과 기습을 아끼지 않는 유연하고 매끄러운, 그러나 잔혹할 정도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고 피아를 가리지 않는 승리만을 거머쥐는 방식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나 제로의 것과도 비슷하나 이 자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서부 유럽 전선에서 쿠루루기 스자크의 활약은 완벽 그 자체였다고 한다. ‘하얀 사신’이라는 이명 역시 그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죽을 때까지 활약한 이였으나 그토록 두드러진 것은 서부 유럽 전선이 유일하며, 쿠루루기 스자크 개인을 논할 때 유럽 전선의 활약을 빼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쟁에서 두드러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살아있음을 반증한다. 쿠루루기 스자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당시의 그는 가장 격렬하게 살아있었노라 말하고 있었다.
- Etude Existence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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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싕님의 맥가엘 개인지 <천국보다 먼Far from Heaven>에 드렸던 축전을 공개합니다.
싕님의 오리지널 맥가엘 스토리인 <천국보다 먼>의 본편 설정을 상당수 차용하고 있으므로 원작기반은 아닙니다.
축전을 맘에 들어해주신 싕님께 감사의 말씀 드리며 저도 싕님 책 다시 읽으러 갑니다 모두 해피맥가엘!
지옥보다 가까운
암막커튼으로 바꿨다. 그것은 맥길리스의 첫 번째, 아주 사소한 반항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하늘하늘한 여름용 레이스 커튼은 집들이 기념으로 러스탈 에리온이 선물한 것이었다. 가엘리오는 러스탈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물에는 죄가 없다는 주의인지라 그 커튼을 방에 들여놓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가엘리오는 매일 맥길리스의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그 커튼을 활짝 열고 바깥 날씨를 가늠한 후, 운동을 나가거나 아침을 먹곤 했다. 바짝 구운 베이컨이나 소시지에 서니사이드업, 주방의 재료에 따라 베이글이나 식빵, 스위트피와 버터에 구운 아스파라거스, 옥수수 같은 걸로 바뀌기도 했으며 막 짠 오렌지 주스나 우유 같은 게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컵에 담겨 함께했다. 가엘리오가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원에서 트랙을 돌고 있을 무렵 맥길리스는 느지막이 일어난다. 가엘리오가 어디에 갔을지 알고 있으면서도 기이할 정도의 낯섦과 불안 속에서 헤매며 진하게 내린 커피와 빵 쪼가리를 입 안에 던져놓고 가엘리오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나는 개인가?
맥길리스는 자조적으로 그런 생각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과거의 영광이 된 지금, 노쇠하고 탁한 음으로 우주를 울리던 금빛의 뿔피리는 없다. 늙은 사자는 죽었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주 기나긴, 미지의 자유였다. 가엘리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어느 것에나 정력적이었으며 따라서 이 정력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맥길리스는 어땠냐면 가엘리오가 있어야 하루가 돌았다. 가엘리오가 아침 운동을 나갔다 오길 기다렸고 가엘리오가 소파에 늘어져 있는 맥길리스의 등에 “좀 움직여, 맥길리스!”하고 잔소리를 해대다 한 번씩 차야만 게으르게 일어나 청소를 하거나 씻거나 운동을 하거나 책을 봤다. 가끔은 가엘리오의 눈을 피해 통속소설을 쓰기도 했고 이 빌어먹을 통속소설이 잘 팔리게 된 이후엔 그의 눈을 피해 인터넷으로 편집자와 회의를 하기도 했다. 숨만 쉬고 있어도 시간은 갔고 그 하릴없는 시간이 아쉽지 않았다. 가엘리오에 의해 움직이는 24시간과 365일이라니. 행복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가엘리오는 없다.
“나 없다고 매일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그렇다고 먹기만 해서 살찌면 안돼.”
가엘리오는 엄마처럼 잔소리했다. 엄마. 어머니, 그런 존재는 맥길리스의 생에 단 1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아, 가엘리오. 너는 언제나 내게 부재한 모든 것을 채워주는 존재야. 암막커튼의 기능은 너무 완벽해서 햇빛 같은 건 전혀 들이치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맥길리스는 존재하지 않는 햇빛을 피하려는 것처럼 베개를 얼굴에 파묻었다.
갈루스 보드윈은 볕이 들이치다 못해 완벽하게 햇빛에 휩싸인 프랑스 루시옹에 포도밭을 사들였다. 한 때 별을 달고 있던 자치고는 꽤 소박한 노후가 아닌가 싶었지만 작업용 체크셔츠와 멜빵바지에 커다란 갈퀴를 들고 있는 갈루스 보드윈을 상상하면 50년차 농부처럼 잘 어울려 맥길리스는 쉽사리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안 갈 거야?”
“안 가.”
그 날 아침도 그랬다. 맥길리스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태양을 피하려는 헛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번 놀러 오라는데. 아주 큰 와이너리를 만들었대. 아직 포도 수확을 못했으니 와인은 못 만들었지만. 가엘리오가 여상하게 말하는 소리를 맥길리스는 그저 흘려들었다. 알미리아가 아쉬워할 텐데. 가엘리오는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맥길리스를 슬쩍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도 가끔은 잔상이 드리웠다.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역사스페셜 야망의 불꽃>이. 미묘하게 겹치는 현실과 영원히 침묵하게 된 뿔피리가 상상력이 부족한 가엘리오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치졸한 독점욕이라면 맥길리스는 기쁨에 차 기꺼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프랑스까지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가엘리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말했듯이 그에겐 상상력이 부족했고, 맥길리스를 지나치게 신뢰했다.
“잘 다녀와, 가엘리오.”
공항까지 마중 나갈 부지런함도 맥길리스에겐 결여되어 있었다. 가엘리오가 떠나는 꼴을 굳이 거기까지 가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가엘리오의 체류 일정은 약 보름이었고 오늘은 1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지난 2주는 그야말로 맥길리스에겐 방탕과 나태의 나날이었다. 암막커튼으로 바꾼 뒤 낮엔 내내 잠을 잤다. 일어났더니 몇 시인지 가늠도 안됐다. 커튼을 걷었더니 희미하게 햇빛은 남아있었다. 가엘리오가 없다고 생각하면 입맛도 없었지만 착실하게 배는 고팠다. 성의 없이 군데군데 조금 탄 부분이 있는 소시지를 포크로 씹어 먹으면서 소파에 앉은 맥길리스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고, 나초를 먹었고, 팝콘을 먹었고, 콜라나 커피를 마셨다. 이 때까진 가엘리오의 ‘나 없다고 매일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그렇다고 먹기만 해서 살찌면 안돼.’라는 문장이 아직 온전하게 맥길리스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가엘리오가 없을 때의 반항은 소파에서 팝콘을 먹거나 낮밤을 바꿔버리는 정도일 뿐, 나름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했고 가엘리오가 돌아오면 놀아야 되니 연재 비축분을 써둔다는 계획도 있었다.
액제전은 끝났지만 안정기에 들어선 걀라르호른 내부에선 잡음이 끝나지 않았다. 이윽고 아그니카 카이엘을 향한 숙청의 칼날이 벼려지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아그니카를 다룬 모든 창작물에서 하이라이트였지만 동시에 모든 창작물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그니카 카이엘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존재가 역사서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후 가장 유력한 건 역시 암살설이었으나 일각에선 그가 정치판에 이골이 나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아라야식의 부작용으로 와병생활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맥길리스는 모든 영웅의 말로가 그렇듯, 범부(凡夫)의 시기질투에 덧없이 져버렸을 거라 생각했지만 로맨스는 언제나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그러니 고지식하고 청렴하며 올바른 보드윈 경은 아그니카의 암살도 방지하고 아그니카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신붓감도 물리치는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다. 아그니카보다 보드윈이 더 멋있어 보이는 건 맥길리스의 기분이 나쁘고 그렇다고 아그니카가 보드윈을 데리고 사랑의 도피? 아니 이건 말도 안된다. 아그니카 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신중하고도 세심하며 현명한 전개가 필요한 가운데 맥길리스는 도통 묘책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가엘리오가 없어서일까? 가엘리오에겐 도저히 보일 수 없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가엘리오가 없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맥길리스의 삶을 구성하는 건 언제나 가엘리오다.
맥길리스는 지난 여행에서 사 온 태왕칠성기 비디오를 꺼냈다. 삭제된 코멘터리 분량만 보고 일을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그 비디오를 재생하는 순간, 맥길리스의 머릿속에 있던 가엘리오의 충고는 반의 반토막이 되어 남았다.
‘누워있지만 말고, 밥 잘 먹고.’
1화도 아니고 마지막화도 아니고 중간부분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게 새로웠다. 58화의 내용은 21화의 복선을 회수한 것이다. 21화의 주요 에피소드는 3화에서 시작하고 67화에서 끝난다. 바로 이어지는 68화는 아그니카를 둘러싼 세븐스타즈의 음모가 시작되는 편이니 앞으로 써야 할 소설 전개를 위해서도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아그니카 카이엘이 바알을 처음 몰고 출격하는 에피소드는 <일곱별이 나르샤>쪽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야망의 불꽃>에서 MCgilis가 탄 바알도 의외로 재현율은 높았지…….
가엘리오 몰래 숨겨둔 블루레이 박스를 꺼내, 처음엔 인상 깊었던 장면 한두 화만 봐야지, 했었지만 웬걸. 1화부터 100화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시청이 되고, 다른 파생작까지 보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임을 맥길리스가 예상하지 못한 점이 크나큰 실수이리라. 몇 번이고 같은 작품을 다시 보면 예전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보인다. 이 부분에선 음향 효과가, 이 부분에선 카메라의 연출이 좋았고 배우의 표정연기는 이런 쪽이 인상 깊다든가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맥길리스는 처음 보는 것처럼 작품들을 감상했다.
낮밤은 진작 바뀌었고,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 잠들기도 며칠. 그렇게 일주일을 텔레비전 앞 소파에서 앉은 채로 보내고서야 맥길리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하필이면 또 뉴스가 끝나고 시작한 광고가 문제였다.
‘슈퍼걀라르호른대전X, 당신은 지금, 건담을 탈 준비가 되었는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배경음은 야망의 불꽃에 나왔던 그것이었다. 노래만 들으면 역시 훌륭하기 짝이 없는 이 드라마는 몬타크 홀딩스의 모라토리움을 극복하기 위해 또 어딘가에 팔린 모양이었다. 맥길리스가 호기심에 검색해 보면 반다미남코에서 <일곱별이 나르샤>, <태왕칠성기>, <야망의 불꽃>, 후속작인 <라그나로크 : 걀라르호른 제7공화국> 같은 대하드라마뿐만 아니라 고증 문제로 대차게 욕을 먹었지만 판권이 전 콜로니로 팔린 <별들의 후예>, 통제국 소속 하사의 잠입 로맨스물인 <풀 메탈 아머>, 사관학교를 배경으로 한 전쟁드라마인 <세븐 시드 데스티니> 등 걀라르호른 관련 드라마의 판권을 모두 사들여 등장 캐릭터와 기체로 만든 게임이었다.
이런 게임은 뭐라고 하는 거지?
어느새 단말기에 게임을 다운받은 맥길리스는 차분히 튜토리얼을 시작했다. 어느 시공간에 함께 모이게 된 걀라르호른의 장교들이 원래의 시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쟁에 휩싸인 우주에 평화를 되찾기 위해 플레이어는 전투를 치러야 한다. 게임의 구성은 실험적이었다. 다른 시공간에 살며, 계급도 소속도 제각각인 인원들이 단지 같은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상이나마 모여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발상이다.
환상은 실존하지 않을 때만 빛을 낸다. 선망이 되기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충분히 미화되고 왜곡되어 포장되어 있었다. 마지막 숨을 쥐어짜냈던 뿔피리소리를 맥길리스는 기억하고 있다. 장엄하고 묵직한. 작은 휴대전화의 액정 안에서 빛나는 건 맥길리스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고철덩어리 그레이즈는 제법 괜찮은 색으로 빛났고 랜스를 휘두르면 어느 정도의 속도감도 느껴졌다. 낡은 깃발은 한 번도 지상에 내려온 적 없는 것처럼 펄럭였고 희고 푸르며 금실로 마무리 된 정갈한 제복은 새삼스럽게 맥길리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정작 맥길리스의 정복은 옷장 깊숙한 곳 어디에서 먼지 쌓여가고 있을 텐데도 그랬다.
튜토리얼이 끝나니 맥길리스의 격납고엔 10대의 기체가 롤아웃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일에 쌓인 기체들을 맥길리스는 떨리는 마음으로 벗겨나갔다. 런칭 기념 이벤트인 바알이 나올 확률은 1.85%. 고만고만한 그레이즈 리터나 맨로디, 초기 발큐리아 모델 같은 게 나오는 동안 실망과 실망을 반복하던 맥길리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마지막 황금색 베일을 벗겼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슈발베 그레이즈였다.
가엘리오와 맥길리스가 머리를 맞대고 그레이즈의 이런저런 점을 뜯어고쳐 각 경제권에 치안용으로 팔아먹으려 했던. 물론 이 대학 창업동아리 같은 발상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단순 치안용으로 사용하기엔 쓸데없이 고성능으로 비쌌고, 반응성이 너무나 뛰어난 덕에 일반 병사들이 운용하기 쉽지 않다는 게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과거의 쓰디쓴 실패담을 드라마 작가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친절하게 드라마에도 삽입했다. 당연히 맥길리스와 가엘리오의 동의는 없었다. 시험용으로 단 두 대를 만들어 좋아하는 색으로 도색하고 운용은 겨우 한두 번이나 한 채로 격납고에 처박혀 어디론가 사라진 그것들은 드라마에서는 꽤 멋지게 우주를 날고 있어서 그것만큼은 가엘리오도 마음에 들어 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바알보다야 못하지만, 보라색 슈발베 그레이즈는 괜찮은 성능을 갖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파일럿 뽑기에서도 맥길리스는 딱 하나의 황금색 가면을 얻었고, 그 안에는 가엘리오가 있었다.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가엘리오는 원래 슈발베 그레이즈의 조종사고, 이 게임은 기체에 꼭 맞는 파일럿을 탑승시키면 스킬이 발동된다. 하나뿐인 슈퍼 스페셜 레어 카드의 기체와 파일럿이 제자리를 찾는 일도 드무니 운은 나쁘지 않다.
『내게 맡기면 돼. 언제나 그랬듯이.』
분명 이 게임의 파일럿 모델은 드라마의 배우일 텐데도, 우아하게 굽어진 옆머리를 살짝 돌리면서 걀라르호른의 제복을 입고 흰 장갑을 낀 손을 흔드는 가엘리오는 퍽 진짜 같았다. 한 때 맥길리스는 그 제복이 가엘리오의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걀라르호른의 제복을 입는 게 정해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맥길리스는 또한 분명하게 걀라르호른의 해체식날 시원하게 웃고 있던 가엘리오도 기억하고 있었다. 가엘리오의 제복은 맥길리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롱 안에 처박혀 있을 것이고, 제복의 주인은 지금쯤 프랑스에서 농장의 작업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엘리오의 미래는 언제나 무한했고, 그것은 가엘리오에게 모두 잘 어울렸다. 걀라르호른이라는 이름에 얽매인 건 오히려 자신인지도 모른다.
맥길리스는 긴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가엘리오를 툭 건드렸다. 『부디 웃어주세요.』 낭랑한 가엘리오 – 역의 배우 – 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목소리도 썩 비슷해 정말 가엘리오가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맥길리스는 힘을 내어 다시 롤아웃 버튼을 눌렀다. 그럭저럭 쓸 만한 키마리스와 그림겔데의 카드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바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맥길리스!!!!!”
우편물을 확인한 가엘리오가 2층 창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결국 가엘리오가 없는 동안 마감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한 맥길리스는 아침부터 급하게 타자를 눌러야 하는 신세였다.
공항에 마중 가는 것도 잊어버려 간신히 청소기나 돌리다 집에 돌아온 가엘리오를 맞이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어찌나 엉망이었는지 맥길리스는 일주일 내내 대청소에 시달렸고, 이불을 밟고, 커튼을 빨았으며 그 뒤로도 소파 밑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팝콘이나 나초 조각 같은 것들로 잊을만하면 잔소리를 들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지 가엘리오의 목소리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이제 웬만하면 팝콘은 안 나올 때도 됐는데. 맥길리스가 제 죄도 모르는 채로 어깨를 움찔하는 사이,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맥길리스는 급하게 Ctrl+S를 누르고 노트북 전원을 끄는 대신 책을 펼쳤다. 하필이면 잡힌 책이 Life of Agunika라 가엘리오의 눈치를 보게 생겼으나 별 수 없었다. 어떤 걸로 혼이 나든 이 소설이 걸리는 것보단 나았다. 누구라도 본인 조상으로 이렇고저렇고…한 내용을 보는 것은 싫지 않겠는가. 맥길리스가 손에 잡히는 아무 페이지나 잡아 넘기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가엘리오.”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한 거야, 맥길리스?”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맥길리스가 돌아보면 인상을 잔뜩 쓰고 문 앞에 선 가엘리오는 바닥이 울리도록 맥길리스의 앞으로 와 들고 있던 종이를 탁, 소리가 내려놨다.
청소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안도한 맥길리스의 눈이 종이 위의 글자를 훑는다. 카드 명세서였다.
맥길리스가 생각하기에 전자 명세서를 보내주면서 굳이 종이로 된 명세서를 보내주는 카드사는 회계 감사를 해보면 분명 다른 쪽으로 돈이 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장부엔 카드명세서 발행에 필요한 원가로 기재하고 다른 데 비자금을 챙기는 거다. 흔한 수법이지. 맥길리스는 이 부정한 카드회사의 내부감사가 꼭 이뤄지길 바라면서, 그러나 지금 당장 고발을 할 수는 없기에 가엘리오 앞에서 “아…….”하고 침음을 흘렀다.
대문짝만하게 쓰인 이번 달 카드 결제액은 평소 맥길리스의 사용 금액을 두 배 정도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대체 이 ‘반다미남쿠’라는 건 뭐길래 카드값이, 얼마야 이게, 하나둘셋……. 120만 걀라나 썼잖아?”
가엘리오의 표정은 심각했다. 내가 네 사생활에 간섭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혹시 사행성 도박이라도 하는 거야, 맥길리스? 도박 중독은 고칠 수 있대. 지금이라도……. 심각한 표정으로 상담센터의 전화번호를 검색해보는 가엘리오가 당장이라도 맥길리스의 이름으로 상담 예약을 잡을 것 같아 맥길리스는 부랴부랴 이실직고했다. 아니. 이 경우엔 이실직시인가?
맥길리스가 휴대전화를 꺼내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면 ‘슈퍼걀라르호른대전X’라는 묵직한 성우의 음성과 함께 ‘오르펜즈~’,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너 설마 그 끔찍한…!”
가엘리오의 기겁한 얼굴이 마치 당장이라도 짐을 싸 프랑스로 날아갈 듯했다.
“아니야, 가엘리오. 내 말을 들어봐.”
『감사부 소속 무관으로서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할 거야.』 맥길리스가 가엘리오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사이 로딩을 마친 게임의 메인화면에선 메인 캐릭터로 설정해 둔 가엘리오의 고정 대사도 흘러나왔다. 더욱 더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가엘리오의 시선을 마주하며 맥길리스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설명하게 위해 노력했다. 스러진 역사는 어느 순간, 어느 시점에서 신화가 되곤 한다. 걀라르호른은 그 시점을 지나치게 빨리 맞이하여 상상력을 가미, 보편적인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빌어 나타나게 되었음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노라고. 맥길리스의 일장연설을 주욱 들으며 간신히 납득하는 듯했던 가엘리오는 가장 중요하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어디가 120만 걀라나 쏟을 부분인데?”
맥길리스의 격납고에는 SSR 키마리스도, SSR 키마리스 트루퍼도, 녹색의 그레이즈 리터와 맨로디, 푸른색의 슈발베 그레이즈와 검고 커다란 그레이즈도 있었으나 흰 색의 기체는 없었다. 가엘리오가 그걸 보면서도 그 어떤 이상함도, 혹은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 맥길리스는 답답해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 준 얘기는 모두 이해했지, 가엘리오?”
“응.”
“보상을 받으려면 내가 게임 속 전투에서 이겨야 해.”
“응.”
“이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카드가 필요해. 더 높은 공격력의 카드가.”
“그래.”
“그래서 새로운 카드를 뽑기 위해 롤아웃을 하는 거야.”
“그 전투에서 이기면 뭐가 좋은 건데?”
“보상을 얻을 수 있어.”
“보상이 뭔데?”
“새로운 카드.”
가엘리오는 열심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혀, 이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카드를 얻기 위해서 카드를 얻어야 한다는 논리의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가엘리오 앞에서 맥길리스는 롤아웃 창을 열었다.
차갑고 검은 우주에서 창백하고 푸르게 빛나는 바알 카드가 이번 이벤트 대상 카드였다. 성능적으로는 이번 목성 해적소탕 이벤트가 끝나는 동안 공격력이 두 배, 스킬발동확률이 17% 올라가고, 미적으로는 우주를 배경으로 고독하게 떠있는 바알의 비장한 모습이 고아하고 세련된 미를 내보이는 카드다. 120만 걀라, 580연을 돌리고도 아직도 맥길리스가 손에 넣지 못한, 바알.
“그으렇단 말이지.”
“너도 한번 해볼래?”
맥길리스는 휴대전화를 가엘리오 쪽으로 밀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훨씬 빠르다. 가엘리오가 여전히 미심쩍고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롤아웃 버튼을 누르면, 열 기의 기체들이 주르륵 뜬다. 황금색의 베일이 세 개. 설마설마 하면서도 맥길리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액정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네가 말한 게 이거야, 맥길리스?”
곰곰이 액정을 보던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게 휴대전화를 넘겼다. 눈을 비비고, 허벅지를 꼬집고, 혀를 깨물어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희고 푸른 날개, 금빛의 우아한 쌍검, 언밸런스하게 귀여운 이마의 뿔까지.
틀림없는, 바알이다.
120만하고도, 방금 전에 5만 걀라를 더 결제해 얻은 아그니카 카이엘의 무장기. 걀라르호른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 기체.
“가엘리오.”
“응?”
“너는 역시, 내 하나뿐인…….”
맥길리스는 감격에 겨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푸른 눈에 스펙트럼이 넓은 보라색 머리카락, 어느 옷이나 잘 어울리고 어느 것이나 될 수 있는 가엘리오가 있어야만 맥길리스는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그걸 나는 운명이라고 부르지, 가엘리오.
그러나 말은 아껴둬야 했다. 섣불리 무언가를 입 밖에 냈다가 일을 망치는 일은 신화에도, 민담에도, 속설로도 존재했다. 맥길리스는 말없이 가엘리오를 끌어안고 두 뺨에 키스한 다음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가엘리오가 돌아온 뒤로도 청소와 잔소리에 시달려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간지러워, 맥길리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면 아직도 햇볕 냄새가 났다. 바깥의, 아니 어쩌면 아주 약간, 프랑스의 태양일지도 모른다. 맥길리스는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처럼 갸릉댔다.
그 뒤로 맥길리스는 종종 가엘리오보다 일찍 일어났다. 가엘리오가 일어나기 전, 잠이 든 긴 손가락으로 롤아웃 버튼을 누르면 한정 이벤트 카드가 나오는 확률이 유난히 높았다. 반다미남쿠의 이름으로 나오는 카드 명세서의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으므로 가엘리오의 잔소리는 더 심해졌지만 맥길리스는 게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불행히도 아직 바알을 타야 할 아그니카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맥길리스 본인의 카드도 나오지 않아 바알은 제 짝을 찾지 못한 채 얌전히 격납고에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맥길리스는 일단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카드값이 궁해지니 막혀있던 원고도 어떻게든 써지기 시작했고, 하늘같은 이해심의 가엘리오는 마침내 ‘슈퍼걀라르호른대전X’를 깔았다.
“맥길리스 이거 좋은 건가?”
단지, 무료 다이아로만 카드를 뽑는 가엘리오가 과금 랭커인 맥길리스보다 좋은 카드를 갖고 있는 것만이 고통이었다. 맥길리스는 무과금으로 한 방에 이벤트 배수 카드를 뽑은 가엘리오의 계정과 방금 전 결제버튼을 누른 제 계정을 비교해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친우, 동료, 사랑, 운명, 그 무엇이 됐든 가엘리오의 SSR은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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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오미사쿄] 노을의 끝
선생님X학생 오미사쿄. 만우절 사쿄쨩 감사합니다!!!
노을지는 창 밖에는 야구부의 연습소리만 울렸다. 플레~이~!! 플레이~!! 깡- 하는 경쾌한 소리와 짧은 환호성, 그 틈새로 운동장을 박차고 뛰는 모래소리와 발소리가 울렸다. 오미는 그런 창가의 소란에서 의식을 돌려 적막하기만 한 교실 안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냉정한 시선은 무엇을 보는지 모르겠다. 고등학생들의 시선은 으레 그렇듯 복잡스러웠고 후루이치 사쿄는 통상보다 깊고 복잡한 눈을 가졌을 뿐이다. ―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글쎄.
오미는 교탁의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를 내려다보았다. 후루이치 사쿄는 제법 단정하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 안경을 쓴 사람에 대한 선입관이 그를 조금이나마 단정하고 지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적도 나쁘진 않은 편이었다. 출석률도 우수. 지각도 결석도 드물고 일단 기록만 본다면 학교에선 문제잡힐 게 없는 학생이다. 생활기록부를 상세하게 보기 전까지는.
고전 : 성적은 우수하나 수업시간에 항상 졸고 있음
수리 : 이해력이 뛰어나고 암산에 능하나 수업시간에 늘 잠
체육 : 협동심이 부족함
영어 : 수업에 대한 열의가 없으며 언제나 자고 있음.
그 외 기타등등. 오미의 경제시간에도 제대로 눈을 뜨고 있었던 적이 없어서 언제나 밝은 금발의 뒤통수만 보았었다. 엎어진 등을 툭툭 치면 질리지도 않는다는 듯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일어난 사쿄는 마지못해 교과서를 보는 척하다가도 이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게다가 후루이치 사쿄는 옆 학교에서도 싸움을 걸어올 정도로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얘기를 듣고 몇 차례 교무실로 끌려와 크게 혼난 적도 있지만 영광의 상처인듯 퍼렇게 부은 한 쪽 뺨을 갖고 그저 불퉁하고 불성실한 얼굴로 묵묵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다.
"요즘 수업은 재미있니?"
"안 들어서 모르겠는데요."
최대한 친근하게 걸어 본 말은 당연하지만 단단한 벽 앞에서 맥없이 흩어진다. 단추를 두 개 풀어낸 셔츠 틈새론 움푹 파인 쇄골이 보인다. 겉보기에도 늘씬한 느낌이지만 생각보다 더 말랐을지도. 오미는 면밀히 상대를 관찰하며 다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수업은 열심히 나오잖아."
"고등학교까진 나와야 쓸만하거든요."
"대신 수업시간엔 졸고. 역전의 편의점에서 야간 일을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르바이트 금지는 아니잖아요."
"선생님들이 걱정하고 있어."
"계약서는 확실히 썼고 대학은 안 갈 거니 괜찮습니다."
"사쿄 군."
내내 불만스러운 얼굴로 답하던 사쿄가 책상 앞으로 성큼 다가온 오미를 보며 놀란듯 눈을 깜박인다. 평균 이상의 신장을 가진 오미가 아무 의미없이 걷기만 해도 놀라는 사람도 왕왕 있을 정도인데, 앉아 있는 사쿄 앞에 서면 그 위압감은 실로 압도적이다. 이내 미간을 깊게 구기는 사쿄를 보며 오미는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낮췄다. 그에 맞춰 내려오는 시선이 장난감을 보는 길고양이 같아 웃으면 사쿄는 더욱 깊게 인상을 찌푸린다.
"사쿄 군이라는 말은 너무 딱딱한가. 사쿄 쨩?"
"절대 싫어요."
"초등학교 때는 이렇게 부르는 친구들 있었지, 사쿄 쨩?"
"초등학교 때도 없었던 거 같은데."
"선생님은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사쿄 쨩."
"…하지 마세요."
노을이 하얀 뺨에 반사되고 있는 건지 그 얼굴이 약간은 붉어진 건지 오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좋은 신호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조금이나마 눈에 보이지 않던 거대한 유리벽이 조금이나마 두께가 얇아진 것 같았다.
"선생님도 예전엔 학교 오기 싫었거든. 친구나 만나러 오는 거였지. 쉬는 시간엔 시끄럽게 떠들었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이크 타고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5개쯤 뛰어서 배기량이 끝내주는 바이크를 사서 보란듯이 학교에 끌고 다녔지. 그 땐 그게 재밌었거든."
"그…래서요?"
관심을 갖는다. 오미는 깜박이는 사쿄의 속눈썹이 제법 길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업할 때도 눈에 띄는 학생이었지만 - 항상 자고 있으니까 - 이렇게 보면 단정하게 생겼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했다. 그 반항적인 눈매만 유순하게 내려뜨린다면 오히려 곱상하게 생긴 편이리라. 코에 걸치고 있는 안경을 벗기면 정말 앳되보이는 얼굴이 될지도 몰랐다.
"그랬더니 시비거는 애들도 생기고 선생님들한테도 혼나고, 부끄럽지만 패싸움…같은 것도 한 적 있지."
"이겼나요."
"거의."
흐응. 색소가 옅은 얇은 입술이 잠깐이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사쿄가 제게 흥미를 보인다는 건 좋은 뜻이다. 그만큼 방벽이 낮아진다는 의미니까. 그러나 오미의 머리는 슬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미가 학기를 시작하고 출석을 부를 때부터 후루이치 사쿄는 눈에 걸렸다. 밝은 금발도 그랬거니와 깊고 무거운 시선들, 머리에 열은 빠르게 올라 욱하는 기질이 있는데도 어딘지 냉정한 느낌. 단정해보이는데 학교 밖에만 나갔다 하면 쌈박질에 맨날 엎어져 자면서 성적만큼은 나쁘지 않은 이상한 고등학생. 사춘기의 학생들은 늘 어렵고 현란하며 복잡하지만 후루이치 사쿄는 이상하게 오미의 눈길을 끌었었다.
"그래서, 개과천선하고 선생님이 된 계기는 뭔가요 후시미 선생님."
"오미라고 불러도 되는데. 나도 사쿄 쨩이라고 부르잖아."
"그건 선생님이 멋대로 부르는 건데요."
"그래도. 다른 애들도 그렇게 부르잖아. 오미미나 오미군이라고 부르는 못되먹은 애들도 있지."
하지만 오미는 그런 친밀감이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는 졸업하는 아이들이더라도 그런 호칭에서 묻어나는 쾌활함은 그 나잇대만이 가질 수 있는 특색이었다. 빨리 어른이 되는 아이들은 일부러 그런 것들을 어딘가에 묻어두곤 했지만 계기만 있다면 금세 꺼낼 수도 있었다. 10대의 빠른 회복력은 신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이 음울한 얼굴에 빛이 드리우면 분명 반짝반짝 빛날 수 있으리라.
"오미…선생님?"
망설이던 입술이 음미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오미의 이름을 부른다. 처음으로 흥미로운 듯한 표정이 오미에게로 향했을 때 오미는 또한 사쿄의 눈이 생각보다 훨씬 투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쿄의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만으로도 그의 얼굴은 훨씬 눈부셨다. 오미는 충동적으로 그의 안경을 벗겼다. 한 겹의 투명한 유리로도 아쉬운 빛이었다. 놀라 크게 뜨인 눈에 힘이 빠지니 오미의 생각보다 더 유하고 얌전한 얼굴이 나타났다. 붉은 노을은 이젠 바닥으로 조금씩 사라져가는데 흰 뺨에는 여전히 미미한 홍조가 돌고 있었다.
"사쿄 쨩."
"네?"
마른 입술을 축이는 혀는 유난히도 붉었다. 오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뜨끈한 볼의 열기가 정말로 아이 같았다. 가까워지는 얼굴에선 이젠 오로지 그 눈만 보였다. 파르라니 떨리는 속눈썹이 내려앉는다. 얇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이로 물어 벌리면 손에 닿은 뺨이 더 뜨거워졌다. 부드럽고 매끈한 점막과 고른 치열을 혀로 느끼는 동안 사쿄의 숨이 가빠지는 게 그의 목 안쪽에서 새는 바람으로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으앗!"
"되바라진 선생님이군."
"아픈데요 사쿄 씨."
"아프라고 때린 거니까 당연하지. 어떻게 해야 이런 전개가 되는 거냐. 불량학생을 선도하는 선생님이라며?"
"하하…에튀드 주제는 흐름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바뀐 주제는?"
"…선생과 학생의 금단의 사랑?"
"네가 선생이 된다면 반드시 학교에 전화를 넣어주마, 후시미."
저리 비켜. 사쿄가 가볍게 걷어차면 내내 쭈그리고 앉아있던 오미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정말로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쓴웃음을 짓고 있으면 사쿄는 얼른 재킷을 벗어버렸다. 반리에게서 빌려 온 교복은 사쿄에게는 품이 조금 커서 헐렁한 셔츠가 붕 떠 있었다. 흐릿하게 드러나는 가는 실루엣이 평소보다 매혹적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교복을 입은 사쿄는 오미에겐 생경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었다.
사쿄에게도 분명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가 있었다. 교복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블레이저? 가쿠란? 블레이저라면 방금 입은 반리의 교복과 비슷한 느낌일 거고 가쿠란이라면 쥬자에게 빌려와야 겠지. 고등학교에 어떤 친구와 무엇을 하고 지냈을지 오미는 궁금했다. 그 때도 극장에 연극을 보러 왔다고 했는데 그 땐 어떤 표정이었는지, 집에 돌아가는 길엔 어땠을지, 얼마나 앳되고 어렸는지 오미는 궁금했다. 지금도 충분히 어려보이는걸, 사쿄는 가끔 지나치게 나이에 연연할 때가 있다.
"애초에 학원물이라면 당연히 이 나이엔 학부형이다."
바로 지금처럼. 투덜대는 사쿄의 말에 오미는 능숙하게 맞받아쳤다.
"진정한 배우라면 나이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사쿄 쨩'? 배짱이 좋은데."
"역할 몰입…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미 선생님은 학생에게 성추행?"
"그건 그… 상대가 사쿄 씨니까?"
오미는 사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오미의 키 탓인지 사쿄가 마른 탓인지 딱 맞게 들어오는 몸이다. 오미가 고개를 사쿄의 목덜미에 파묻으면 아까 느꼈던 뺨의 열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처럼 여전히 높은 온도가 느껴졌다.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앨범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사쿄 씨. 셔츠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 키스하면 목도 뺨만큼 붉게 달아오른다. 그런 거 없어. 안 찍었어요 졸업사진? 안 찍고 안 샀어. 그런 쓸데없는 데 쓸 돈은 없었으니까. 아 그렇구나. 오미는 입꼬리를 흐리며 사쿄의 등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사진이 취미라서 다행이었다. 지나간 시절은 어쩔 수 없어도 지금부터 남기면 되니까.
"그럼 대신 앞으로 사진 더 많이 찍어둘게요. 10년 뒤에 보고 즐거워할 수 있게."
"10년?"
사쿄가 비웃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문다. 후루이치 사쿄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그 시간이 과연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수 계산에 능숙한 머리가 몇 번이고 그 단어를 뇌까린다.
"…맘대로 해."
그토록 먼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는 사쿄에겐 없었다. 다만 시간은 늘 흐르고 오늘과 내일이 쌓여서 일주일, 열흘, 보름, 한 달, 그렇게 1년이 되고 잘하면 10년까지 갈 확률도 아주 낮지만은 않으니.
"감사합니다, 사쿄 쨩."
"너……!"
"아하하. 아직 에튀드의 여흥이 안 빠졌나봐요."
오미는 그렇게 말하고도 한동안 사쿄의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몇 번 빠져나오려고 애쓰던 사쿄가 이내 포기해 얌전해질 때까지. 온몸에 닿는 뜨끈뜨끈한 열이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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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오미사쿄] 첫키스
갑작스러운 주말비였다. 이제 막 피려던 벚꽃의 몽우리가 다시 들어갈 정도로 쌀쌀한 바람이 비와 함께 스쳐 밖은 온통 회색이었다. 커튼을 치지 않아도 충분히 빛이 들지 않는 녹재색의 방 안에서 후시미 오미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유별난 목적은 없었고 그 영화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단지 그것이 눈에 띄었고 "아. 그럼 이걸로 할까."하는 말에 오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작은 노트북의 모니터로 보는 영화는 아, 역시. 화면의 사이즈가 너무 작아 몰입감이 없었다.
현저하게 떨어진 집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건 나란히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평소엔 늘 목까지 오는 셔츠나 폴라를 선호하고 한여름이 되지 않으면 라운드티를 입는 경우가 드문 상대는 웬일로 한 장의 티셔츠 차림이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남자의 안경엔 화면에 펼쳐지는 소박한 햇빛의 초원이 반사되고 있었다.
몰입하고 있겠지.
후루이치 사쿄의 집중력은 실로 대단해서 한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뭐라 해도 눈치를 채는 일이 꽤나 늦었다. 언젠가는 오미가 차를 가져왔는데도 "잠깐 기다려." 한 마디 하고는 1시간을 방치한 적도 있었다. 그 사이에 오미는 빈 방을 배회했고 쓸데없이 사쿄의 옷장도 열어봤으며 검은색 혹은 회색 일색인 옷장 속에서 생일선물로 짠 두툼한 3게이지 짜리의 아이보리색 목도리가 정중하게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도 보았다. 다음엔 니트도 짜봐야지. 사쿄의 치수는 빨래를 하며 몰래 기존의 옷으로 가늠하거나 직접 줄자로 재보는 수도 있었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얼굴에 반해 직업상의 문제라고는 해도 늘 우중충한 색만을 입는 게 오미는 늘 아쉬웠다. 유키한테 부탁하면 괜찮은 색을 추천해 줄 것이다. 오미가 니트의 색과 무늬, 견적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꼼짝 않고 계산기와 씨름하던 사쿄가 책상 옆에 두었던 다 식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나서야 오미를 발견했던 것은 꽤 가슴 아픈 추억이다. 그 집중력이 후루이치 사쿄라는 사람의 장점이고 오미는 그런 부분에 반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서 오미는 낡고 소박하며 날것으로 내비치는 미국 서부의 마르고 넓은 초원 대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감상하기로 했다. 양반다리로 앉은 무릎 위에 얌전히 얹은 두 손. 열 손가락이 가지런하지만 키나 생김새에 비하면 제법 통통하고 작다 싶은 손이다. 오미의 손은 키에 걸맞게 남들보다 큰 편이라 처음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이 아주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으로 얕게 그러쥐어도 조금 남는 작은 손. 무심코 "사쿄 씨, 손이 되게 작네요."라고 말했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손을 뺐던 기억이 난다. 그에게 그게 콤플렉스일 거라는 생각은 아주 나중에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그러쥔 손의 헐렁한 공간이 처음 오미가 사쿄를 의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작은 어깨와 가슴. 근육이 골고루 잡혀 있어 왜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저는 차치하고 쥬자나 반리와 비교해도 부피감이 작은 상체였다. 몰래 입어 본 긴지의 의상이 아무리 생각해도 오미에겐 꽉 낄 거 같은 건 비밀이었다. 오랜만에 훤하게 드러난 쇄골은 움푹파여 목울대와 같이 도드라져 있었다. 길고 가는 흰 목과 작은 귀. 그리고―…
사귄 지 제법 지났는데도 오미는 아직 그 입술의 감촉을 모른다. 얇은 입술은 어떤 때는 심하게 각질이 일어나 있었고 감독이 향신료를 잔뜩 넣은 매운 카레를 먹으면 평소보다 훨씬 진한 색으로 부풀어 오르곤 했다. 오늘은 그저 평소 같았다. 그저 평소같다고 해도 오미는 여전히 그 입술의 감촉을 모른다. 부드러운지 거친지, 탄력이 있을지, 아즈마가 때때로 얼굴이 푸석하다며 팩을 권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아즈마가 갖고 있는 다양한 팩 중엔 입술팩도 있어서 여름조 다섯명이 나란히 공연 전에 입술에 분홍색 실리콘 같은 걸 붙이고 다닌 것도 보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에 실리콘 팩을 얹고 있을 사쿄를 생각하면 오미는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동시에 오미는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살다 보면 별게 다 부러워질 때가 있다. 지금이 하필이면 그런 순간이었다. 부엌에 있는 스무 개의 컵도 사쿄의 입술이 닿았을 것이고 쓰레기통에 버려져 이미 소각됐을 팩도 그 입술 위에 얹혀 있을 터였는데 정작 연인인 오미만이 그를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 정말 시끄럽네."
그 때였다. 내내 모니터의 화면을 반사하던 안경의 상이 투명해져 그 너머의 눈동자가 오미와 마주한다.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간 사쿄의 얼굴이 험상궂어 오미는 반사적으로 긴장해버렸다.
"후시미. 네 녀석 영화 하나도 안 보고 있지."
"아뇨. 아니 그…… 보고 있, 있었는데요……."
"그럼 지금 영화 내용을 설명해보실까."
사쿄가 코웃음치며 흘끗 모니터를 가리키면 주인공의 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새, 무슨 맥락으로 방금 전까지 지하실에서 개축공사를 하겠다는둥 하던 집이 불타고 있었는지 당연히 오미가 알 리는 없었다. 하하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회피하려고 해도 사쿄의 시선을 똑바로 오미를 향해 있었고 이 커다란 덩치는 지나치리만큼 심플한 사쿄의 106호실에선 숨을 구석도 없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건가."
"아뇨 전혀…."
"똑바로 말해."
"그, 그게,"
"시간 5초."
"사쿄 씨랑 키스하고 싶습니다!"
오미는 눈 딱 감고 외쳤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영화는 작은 배경음만을 남기고 흐릿한 빗소리를 제외하면 적막이 감도는 방 안이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사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던 오미가 희미하게 눈을 뜰 무렵,
"――!"
제가 쓰지 않는 안경이 콧대에 슬쩍 마주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드럽거나 혹은 말랐거나, 적당한 탄력이라든가 버석하거나 그런 오미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감촉이 오미의 입술에 닿아,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잇새를 훑고, 입천장을 작게 간질이면서 키득댄다. 입에 고인 타액을 반사적으로 삼키면 멀어진 사쿄의 얼굴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만족했나?"
"자, 잠깐 사쿄 씨."
"머리 좀 식히게 마실 거나 갖다주지. 커피?"
"커피로 부탁드립니다."
사쿄가 일어나서 방문을 닫을 때까지도 오미는 멍청하게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부드럽고, 뜨거운, 습윤하고, ……. 후끈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오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쿄 씨가 보면 한심 그 자체였겠지! 꼴사납고, 멍청하고, 그런데도 지나치게 좋아서 오미는 입술을 꽉 깨물고 환호했다.
"어린애냐 저 녀석은……."
사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부엌을 향해 느릿하게 걸었다. 어찌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시선이 소란스러워 영화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가 했는데 겨우 키스하고 싶다는 이유였다니. 스무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까지 생각하던 사쿄를 걸음을 멈추었다.
미치겠군.
후시미 오미는 정말로 스무살짜리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껏해야 스물 하나. 사쿄에게는 기억하기도 까마득한 예전이었다. 아…….사쿄는 훅 달아오른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잰걸음으로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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