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계절이 지나면 기온은 한층 따사로워,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나날이 되곤 한다. 얼굴을 제외하고는 한 끗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 검은 트렌치코트의 목깃을 세우고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 기노자도 기온이 올라가면 별 수 없이 애용하는 코트를 벗어야만 했다. 그래봤자 그 안엔 또 검은 정장이지만 흰 목이 드러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한층 화사해지는 법이었다.
더불어 관공서란 엄격하게 실내온도를 준수해야만 한다. 이상기후에 일찌감치 한낮의 기온은 20도를 넘어섰지만 냉방기기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요즘 같은 때엔 재킷도 벗고 과감하게 흰 셔츠를 드러내니 잘난 얼굴은 더 잘나 보이고 음침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셔츠를 반사판 삼아 햇빛을 듬뿍 머금으니 기노자의 성격을 도통 알 리 없는 타 과의 신입 여직원들은 조그맣게 감탄사를 내지르는 5월.
코가미 신야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충직한 개라면 모름지기 주인이 보이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마주해야 되거늘, 영 꼬리를 흔들 기분이 들질 않는다.
"그거, 기노상, 설마……!"
카가리가 경악에 차 저 멀리로 사라지는 낯선 여자의 등과 기노자의 손에 들린 것을 번갈아 보는 사이, 코가미는 초조하게 담뱃갑을 쥐었다, 놓았다. 아니, 참아야지. 여기에서 담배를 물었다간 코가미가 원하는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할 게 뻔했다. 코가미가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정보는 카가리가 전부 얻어줄 테니 숨을 죽이고 귀만 쫑긋하는 게 상책이었다.
"뭐해요, 기노상! 빨리 뜯어보지 않고."
"…지금 봐야 되는 건가?"
"그럼 지금 보지 언제 봐요! 그거 러브레터잖아요? 러브레터라구요! 보나마나 몇 시 어디에서 보자고 쓰여 있을 텐데, 기노상은 지금 안 읽으면 잊어버릴 거고, 그 가엾은 아가씨는 밖에서 기약없는 기노상을 기다릴 테고, 그럼 다음날 기노상은 공안국 공공의 적이라구요?"
"비약이 지나치다만."
"아, 그냥 빨리 뜯어봐요."
카가리가 기어이 은은한 향수냄새까지 나는 분홍색 종이 봉투를 뺏으려고 하자 기노자는 날렵하게 손을 위로 뻗었다. 아, 기노상! 폴짝폴짝 뛰면서 카가리가 안간힘을 써봤자 기본적인 신장차가 있는데 기노자의 팔까지 손이 닿을 리 없었다.
"카가리."
카가리는 어찌됐든 이 중에서는 가장 어리고 가장 주인을 잘 따르는 개였다. 기노자의 냉정한 호명에 제 분수를 알고 부루퉁하게 이죽이며 구원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코가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 팔을 뻗어 낚아 채…려고 했다.
"네게 아냐, 코가미."
눈을 깜박이면서 먹이를 못 찾는 개를 교육시키듯, 다정하고 엄한 목소리다. 아, 뭐, 러브레터가 탐나는 건 아닌데……. 의외의 민첩성에 코가미가 당황하는 사이 재빠르게 봉투를 재킷 주머니 안으로 갈무리 한 기노자는 자연스럽게 제 자리로 피하면서 말했다.
"밀린 보고서, 오늘 다섯 시까지. 5분 늦을 때마다 손톱을 하나씩 펜치로 뽑아버릴 거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에 알아듣는 게 늦었던 카가리가 뒤늦게 소리 질렀지만 기노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시선을 모니터로만 향한다. 기노자가 받은 러브레터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영 글러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코가미는 기노자의 재킷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러브레터는 시대가 변해도 언제나 낭만적인 물건이었다. 오늘 학부생 중 누군가가 학부 공통 교양 직전에 러브레터를 받는 바람에 코가미 주변은 하루종일 러브레터 얘기로 들썩였다. 그도 그럴게 종이도 보기 드문 요즘 같은 시대엔 자필로 쓴 편지라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문 아이템이었다. 인문학부 누구라는 자기소개와 함께 건네, 떠넘기듯 쥐어주고 뛰쳐나간 남학생의 등 뒤로 환호성이 올랐다. 편지를 받은 여학생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이도저도 못하고 편지를 꽉 쥐고 있었다. 당사자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받는 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기노자는 영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오늘의 이슈를 전하는 코가미를 보고 있었다. 사람과의 교류가 서툰 기노자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낯선 것을 보는 표정을 짓곤 했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에 코가미도 이번엔 얼굴을 긁적여야 했다.
"글쎄. 누가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건 기쁜 일이잖아."
"너도?"
"뭐……, 그렇겠지. 편지를 쓴다는 건 굉장히 번거로운 행위니까 나쁜 소리나 이해타산적인 용건이 들어있을 리는 없고,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평가가 올라가지 않아?"
코가미도 몇 번 그런 류의 편지를 받았었다. 그 중 한 명과는 사귀기도 했었는데 매일매일 편지를 써 만날 때마다 한뭉치를 코가미에게 건네주곤 했다. 처음엔 나름 성실하게 답장을 써주곤 했지만 그게 귀찮아 그만두니 얼마 안돼서 헤어졌다. 편지 쓰기가 의외로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사실을 코가미는 그 때 처음 알았다.
"너한테 편지라도 써줄까 기노?"
"왜?"
"재밌을 거 같지 않아? 그런 걸 뭐라 그러던데…… 펜팔? 그냥 편지를 주고 받는 거야. 어때?"
"무슨 내용을 써야되는데?"
"그건 자유지. 할래? 하자, 기노. 내가 먼저 써올게."
기노자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다음날 코가미는 정말로 편지를 써 기노자에게 건넸다. 먼저 그만 둔 것도 코가미 쪽이었다. 몇 번 주고 받다가 시험기간인지 방학인지 흐지부지해져, 열 통 남짓, 3개월도 되지 않는 기간의 답신이었다.?
기노자가 퇴근할 때까지 기노자의 재킷 안 쪽만 바라보다가 근무가 끝나기 직전, 코가미는 10년도 더 된 과거를 간신히 상기해냈다. 필요한 것을 제외하곤 이사올 때 그대로, 풀지도 않고 박스 채 구석에 쌓아두었다. 먼지 쌓인 짐을 하나씩 풀어헤쳐 코가미는 간신히 기노자가 써 준 편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날짜와 내용을 보고 있자니 중간의 두 통 정도는 분실된 모양이었다. 한 통은 물에 젖어 우그러들었고, 짐에 깔려 접혀 있었는지 아예 접힌 것도 있었다.?
시시콜콜한 얘기들이었다. 뭘 써야될 지 모르겠다며 어색하게 말문을 뗀 편지는 그래도 두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금은 전혀 볼 일 없는 기노자의 필체는 획이 생각보다 큼직큼직했다. 두 장은 세 장이 되고 어느 순간부턴 여백없이 꽉 찬 네 장으로 분량이 정해졌다. 그래봤자 별 내용은 없었다. 기노자가 코가미에게 보낸 편지는 하루 일과 보고 같기도 했다. 코가미가 기노자에게 보낸 것도 그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저는 두 장 채우기도 힘들었는데, 기노는 어떻게 네 장이나 채운 거지? 신기해하면서 날짜별로 훑어보지만 끝까지 별 내용은 아니었다. 다임의 건강상태, 공부의 방향, 휴일에 산책하다 본 노을이 예뻤다던가,?지난번에 갔던 어디의 뭐가 맛있어서 한 번 더 가고 싶다던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이젠 슬슬 편지 쓰는 방법을 알았다고, 러브레터를 쓰는 사람의 심정도, 받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는 말이 마지막줄에 쓰여져 있었다.
아, 젠장.
코가미는 그 구절에서 이번엔 참지 않고 담배를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기노자가 편지를 받고 좋았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코가미 며칠을 전전긍긍하거나 말거나 기노자의 러브레터 사건은 그대로 잊혀지는 듯 했다. 카가리는 보고서를 제 시간에 맞춰 쓰지 않았다간 펜치로 손톱이 빠진다는 공포 - 사실 믿지는 않았지만 손톱 대신 카가리의 게임기가 박살날 확률은 충분했다 - 에 쫓겨 아예 잊어버린 듯 했다. 그 외에 아는 사람은 코가미 뿐이었으니 누구도 그의 궁금증을 대신 해결해주진 않았다. 대놓고 그 사람한테 고백은 받았느냐 거절했느냐 물어볼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3일, 그래도 넌지시 물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했더니 시프트가 맞지 않은 게 3일이다. 도합 일주일 가량을 그냥 보낸 코가미가 어슬렁거리며 사무실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으려면 뜻밖에도 식당 근처 외부 휴게실에 기노자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맞은 편엔, ――그 아가씨다.
저도 모르게 기둥 뒤에 숨어 있노라면 간간히 코가미에게도 말소리가 들렸다. 기노자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거절의 말인 모양인지 여자의 "아……." 하는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겠지. 기노가 고백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묘한 안도감에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코가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영 성격 못되먹은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친구가 연애 좀 할 수도 있는거지, 고백 한 번 받았다고 뒤에서 난리라니. 다음부터는 진심으로 잘되라고 기원이라도 해줄까, 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코가미가 자리를 뜨려던 찰나 여자의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렸다. 방금 전까지 훌쩍대던 것도 그치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당차게도 물어봤다.
"편지는 감사히 간직할게요. 읽고 나서 답장 써도 되나요?"
"아…?"
"편지 쓰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답장은 처음 받아봤거든요. 부담스러우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음? 아, 뭐…… 편지 정도는."
편지? 어안이 벙벙해 깜짝 놀라 고개를 쭉 빼고 보면 확실히 여자의 손엔 연한 파스텔 그린의 편지봉투가 있었다. 코가미가 며칠 전에 보았던 편지묶음에 있는 봉투였다!
- 편지를 쓰면 어쩔 수 없이 답장을 기대하게 되어버려.?
검은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져 있던 문장을 코가미는 떠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노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좋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기노자에게 코가미로부터 일방적으로 시작돼서 일방적으로 끝난 펜팔은 기노자에겐 꽤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답장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우물쭈물 넘어가 버려 분명 기노자도 그대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게 기노자는 단 한 번도 답장을 조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실컷 자기 변명을 하고 있으면 동시에 다른쪽에서 멍청이란 생각도 들었다. 기노자 성격에 그런 걸 조를 리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백한 상대랑 다시 편지 주고 받을 생각이 드냐?
방금 전까지 관대하게 다음 연애를 응원해야지 하던 마음은 증발하듯 사라지고 여기엔 다시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코가미 신야만이 남았다. 기노자는 옛날부터 귀가 얇았다. 흐름에 떠밀려 가는 것도 쉬웠다. 여자는 반대로 꽤 추진력 있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어영부영 흘러가 어쩌면 그대로 결혼에 골인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상상이 꽤 그럴싸해서 코가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코가미가 불안을 부채질하는 것처럼 둘의 대화는 끝날 줄 몰랐다. 기노자가 말을 끊으려고 하면 여자는 능숙하게 다시 말꼬리를 부여잡아 답을 안할 수가 없는 방향으로 잡아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상상이 현실이 되게 생겼다. 어지간해서 도저히 기노자가 빠져나올 수 없는 모양새라 코가미는 결심하고 둘의 대화를 쳐부수기로 작정했다.
"여, 기노."
지나가다 마주친양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기노자의 곤란했던 얼굴에 슬쩍 화색이 도는 틈을 타 코우가미는 그대로 기노자의 목을 끌어당겼다. 깜박거리는 눈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코가미의 팔 밑에서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기노자가 코가미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뭐, 뭐, 뭐야, 코가미!"
간신히 코가미의 우악스러운 팔 밑을 벗어난 기노자가 숨을 못 쉬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대며 소리쳤다. 예고도 없이 눈 앞에 펼쳐진 남의 라이브 키스씬에 당황한 건 여자가 더했겠지만 그 와중에도 소리 지르고 도망간 게 아니라 코가미를 노려보는 꼴이 제대로였다. 저지른 다음엔 모든 게 척척 진행되기 마련이다. 기노자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으며 코가미는 천역덕스럽게도 거짓말을 내뱉었다.
"사실 저희 사귀는데요."
"기노자 씨는 그런 말은 안했는데요. 그렇죠?"
올려다보는 시선에 기노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래서는 택도 없었다.
"그 편지지."
"네?"
"당신이 들고 있는 거, 예전에 기노가 나랑 주고받다가 남은 편지지인데."
코가미가 턱짓으로 여자가 쥐고 있는 편지를 가리키면 여자는 또 말없이 기노자를 올려다본다. 이건 이견 없이 맞는 말이라 기노자가 고개를 주억이니 여자는 사납게 노려보고는 결국 멀어졌다.그 꼴을 보던 기노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든가 말든가 코가미는 제법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냐, 코가미." 넥타이를 바로 하던 기노자가 눈을 치켜뜨며 묻는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노가 곤란해 하는 걸 내가 도와준 것 뿐이잖아."
"혼자서도 할 수 있었어. 굳이 그런 거짓말을……."
"사귀었던 건 맞잖아?"
"…과거형이지."
"키스가 처음도 아니고."
"지금 너랑은 안 해."
쌀쌀맞게 대응하며 용건도 끝났겠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기노자의 팔을 코가미는 가볍게 붙잡았다.
"편지봉투 안 버렸네."
"…열 장 정도 사놨었거든. 그 뒤로 쓸 일이 없어서."
"러브레터 받는다고 답장해 주는 사람은 없어, 기노."
"내 기준에선 답장하는 쪽이 더 정중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답장 써 달라고 얘길 하지."
"넌 재미없는 건 금방 잊어버리잖아, 코가미."
코가미가 쥐고 있는 팔을 정중하게 뿌리치면서 기노자는 가볍게 재킷의 주름을 펴기 위해 툭툭 쳤다.
"쓰기 싫은 편지 쓰는 게 고역이라고 말했던 것도 너였고."
어……. 기노자의 날카로운 말이 코가미를 쿡 찌른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코가미를 남겨둔 채 기노자는 성큼성큼 걸었다. 차마 뒤따라갈 용기는 없어 코가미는 그냥 멍청하게 서있었다. 기억을 더듬으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에는 없지만 제가 할 만한 말이었다. 실제로 의무적인 편지는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 젠장."
과거의 자신이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코가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만 헝클었다. 입술에 남은 타인의 체온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었다.
아쿠아님 생일 리퀘. 단둘이서 공부하는 두 사람, 이었던 거 같...은.... 15.04.01
적당한 냉방이 돌아가는 방 안에선 시야를 일그러뜨릴 지경인 외부의 뙤약볕 같은 건 금세 잊어버릴 것 같았다. 다시 노트를 보려고 하니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쉬는 셈 치고 주변을 둘러본다. 아까는 묘하게 들떠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친구의 방을 좀 더 찬찬히 둘러본다. 제 방과는 달리 화분이 가득 찬 방은 푸르렀지만 그 외에는 사유물이 별로 없었다. 책상엔 컴퓨터가 한 대, 필기용 노트 몇 권, 자질구레한 생필품. 인테리어 홀로그램조차 심플했다. 아이보리색 벽지와 초록색 커튼, 그 외엔 홀로그램이 작동할 무언가도 보이지 않았다.
코우가미 신야는 시선을 마주 앉은 상대에게로 향한다. 작은 앉은뱅이 탁자는 키가 180cm나 되는 청소년들에겐 너무 낮았다. 정작 집중하고 있을 땐 몰랐지만 무심코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고 있자면 꽤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늘 곧은 어깨가 낮게 옹송그려져, 목은 아플 정도로 바닥으로 향해있다. 살짝 고개를 꺾어 옆을 보면 한여름에도 목깃까지 꼭꼭 잠그는 셔츠 대신 둥근 라운드 티는 뒷머리 밑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 긴 앞머리를 귀찮은 듯 뒤로 넘기거나 손 끝으로 빙글빙글 말곤 한다. 예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코우가미와 얘기하고 있을 때도 괜히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마는 버릇이 있었다. 그 외엔 휴대전화를 만지거나 손톱을 건드리거나. 여하튼 손을 가만히 두질 않는 타입이라 몹시 산만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나쁘지 않다.
코우가미 신야가 기노자 노부치카의 집에 오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심심했다.
방학이 시작되고 열흘.
도쿄의 여름은 뜨거웠다. 진열대 밑의 반짝이는 보석들이 그러하듯 여름의 도시는 거대한 유리벽 안에 갇힌 보석과도 같았다. 끊임없이 가동되는 홀로그램, 밤에도 멈추지 않는 조명들, 바다의 습기를 듬뿍 머금은 열을 인공 조성된 녹지가 전부 흡수해 다시 발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타이밍 좋게 방학이 시작 되자마자 아침마다 일사병 및 열사병 주의보가 단말기 상단에 고지되던 열흘째의 아침, 코우가미 신야는 결국 읽고 있던 책을 집어던졌다.
아무 할 일 없이 독서와 사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좋았으나 열흘째 집구석에서 굴러다니고 있자니 몸이 찌뿌둥했다. 코우가미는 어디든 나가고 싶었다. 누구와 대화도 하고 싶었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이런 식으로 하루 24시간, 240시간을 지내고 있으면 문득 심심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늘어져 코우가미는 휴대전화의 통화 내역을 눌렀다.
기노, 기노, 기노, 기노…….
쭉쭉 내려 세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중간중간에 섞인 어머니나 학교의 공지 안내 텍스트를 빼곤 전부 기노자 뿐이었다. 그조차 방학식 날이 마지막이었다. 하나하나 확인해본다. 대체로 코우가미가 먼저 보내는 내용들 뿐이었다. 오늘 점심은 어디서 먹자든가,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않을래, 새로 생긴 어느 가게가 맛있다더라 하는 일상적인 내용. 매일 하루에 두 세통씩은 오가던 문자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뚝 끊겼다.
새삼스럽게 이번 학기는 기노자와만 붙어다녔구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한 달의 반이 지나도록 기노자가 한 번도 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게 괘씸해진 코우가미는 주르륵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기노는 뭘 하고 있으려나.
성실하지만 동시에 놀 줄도 모르는 기노자가 방학이라고 어딘가 놀러간다든가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공부 하고 밥 먹고 공부하고 다임과 산책하고 다시 공부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지만 그 와중에 연락 하나 하지 않는 상대를 생각해보니 왠지 묘한 기분이었다. 심심하지도 않나. 삼십분을 바닥에 뒹굴다 코우가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기노자는 흔쾌히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내 집에 오지 않겠냐고.
친구가 친구의 집에 놀러가는 게 특별한 이벤트가 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문을 열자마자 숨이 턱턱 들이막힐 정도의 열기에도 코우가미는 쉼없이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로 15분. 거리는 제법 됐다. 일찍 왔네, 라고 말하면서 기노자는 어제 만난 것처럼 문을 열어주었다. 오랜만이네, 같은 말도 없었다. 괜한 섭섭함을 안고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면 말로만 듣던 기노자의 개가 컹- 하고 짖었다. 쉬이, 착하지. 조용히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코 끝을 맞대는 기노자는 학교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당연한 얘기인가.
다 마신 쥬스잔의 녹은 얼음물을 마시면서 코우가미는 생각한다. 제 바운더리에 있는 기노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코우가미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노트에다만 시선을 주고 있지만 평소만큼의 치열함은 없다. 사각사각 작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펜을 움직이는 오른손 대신 가볍게 주먹을 쥔 왼손을 본다. 손가락을 뻗어 새끼손가락부터 천천히 더듬어 나간다.
"코우가미?"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기노자와 눈이 마주친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동자가 코우가미의 얼굴을 한 번 보다 왼손을 보다, 다시 코우가미에게로 향한다. 말없이 눈동자가 묻는다. 왜? 그 시선을 무시하면서 여전히 코우가미는 기노자의 왼손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서늘하게 식은 손등 위로 손바닥을 포개본다. 차가운 살갗 밑으로 미적지근한 열이 전해졌다.
"오른손잡이나 왼손잡이나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거구나."
"응?"
"기노는 왜 왼손잡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소리야 코우가미."
맥락 없는 말에 기노자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진다. 기본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인지라 조금만 인상을 써도 무시무시하게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빠보이지만, 대체로 이런 표정의 기노자는 화가 난 게 아니라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코우가미는 안다. 조금 긴장해 아까보다 힘이 들어가 구부러진 손가락을 하나하나 부드럽게 펴면서 코우가미는 말을 이었다.
"서로 다른 손을 쓰면 나란히 앉아서 공부하면서도 손을 잡을 수 있을텐데, 하고 생각했는데 마주 앉으니까 오히려 지금이 더 나은 거 같아."
길고 마디진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얽는다.
"공부하자."
그렇게 말하고 코우가미는 다시 펜을 들어 시선을 상으로 돌렸다. 기노자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숨을 들이쉬거나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지만 결코 손가락을 빼지는 않았다. 방 안에 사각사각하는 펜 소리와 노트 넘기는 소리가 난다. 밖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더웠지만 안은 쾌적했다. 얽혀있는 손가락의 체온이 딱 좋았다.
월요일엔 무엇 때문인지 생전 안 자던 늦잠을 잤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해,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고 사무실에 들어서면 미묘한 시선이 기노자에게 머물렀다. 다들 입을 달싹이다 한숨을 내뱉고, 애써 시선을 외면하고, 그러다가 쳐다보고. 이유를 깨달은 건 그 직후 잠시 들렀던 아오야나기 때문이었다.
"어라, 기노자 오늘 늦잠 잤어?"
뺨에 눌린 자국이 있는데. 머리도 삐쳤잖아?
깔깔대면서 폭소하던 아오야나기는 휴대폰을 들이댔다. 이런 건 남겨둬야지! 그, 그만 둬!! 안 봐도 얼굴이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 건 확실해서 기노자는 화장실로 피신했다. 거울을 보니 뺨에 눌린 자국이 선명해 기노자는 괜히 벅벅 문질러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화요일은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를 찧었다. 순간적인 아픔에 윽 소리가 나는 걸 어떻게든 참았는데 그 직후에 쿠니즈카와 눈이 마주쳤다. 기묘한 걸 봤다는 표정의 쿠니즈카는 고민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선 괜찮으신가요, 감시관? 같은 소리를 들으면 더 죽고 싶을 것 같았다.
수요일은 비가 왔다. 일기예보에 있긴 했으나 그게 하필이면 막 출동한 직후일 줄은 아무도 몰랐음이라. 비는 이 계절엔 보기 드문 폭우라 나가자마자 속옷까지 푹 젖을 지경이었다. 오래 신은 구두의 밑창이 미끄러워 범인을 잡으러 뛰다가 물웅덩이를 잘못 밟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괜찮아, 노부치카?"
이 사소한 불운들은 어째서 꼭 남이 보는 앞에서만 일어난단 말인가. 엉덩방아를 찧은 아픔보다도 앞에 있던 사람이 하필이면 마사오카라는 점이 놀랍도록 수치스러웠다. 하긴, 넌 옛날부터 묘하게 조심성이 없어 자주 넘어졌지. …입 다물어라, 집행관. 입술을 꽉 깨물고 지끈거리는 엉덩이를 문지르지도 못한 채 일어났다. 그 뒤로 하루종일 욱신거리더만 집에 가서 보니 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목요일은 아침부터 손목이 욱신거렸다. 타이핑을 하려고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뻐근해서 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카라노모리는 "염좌 아냐?" 하고 물었지만 그 정도로 아프지 않아 기노자는 그냥 상비용 파스를 하나 받아오는 걸로 무시했다. 이런 건 병원을 가라고. 오늘도 가늘고 긴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귀찮은 듯 말하는 카라노모리에게 기노자는 귀찮아…라고 드물게 솔직하고 나태한 답변을 내뱉었다. 무릎에도 멍, 엉덩이에도 멍, 손목에는 파스를 붙이고 여전히 찌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어기적거리면서 기노자는 일을 계속했다.
그 외에도 아끼던 개 모양의 키홀더를 잃어 버린다던가, 커피를 엎는다던가, 셔츠 단추가 하나 떨어져 하루 종일 재킷을 껴입고 다녀야 했다던가. 수요일의 주범이었던 구두는 결국 버렸고 어디서 걸렸던 건지 집에서 입는 아끼는 가디건은 올이 늘어나 있었다. 내내 우중충하게 비가 오던 날씨 때문인지 정신 차리니 히아신스는 구근이 썩어 있었고, 바뀐 자재과 과장은 대하기 까다로운 상대라 코가미의 스파링 드론 파손에 대해 몹시 깐깐한 태도를 보였다. 협력수사를 나간 3계의 감시관과는 사사건건 부딪혔고 출동을 나갔다가 돌아오려니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아 또 멍청히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지쳤어, 다임……."
목요일 퇴근, 기노자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애완견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다임은 오늘따라 낑낑대며 위로도 안해주고 싫은 듯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더니 결국 손목을 한 번 툭 치고는 쌩하니 러그 깔린 방 구석으로 가버렸다.
아, 파스…… 손목의 파스 냄새가 너무 독해서 그런 게 분명했다. 사랑하는, 유일하다시피 한 가족에게도 거부 당하니 이젠 눈물이라도 날 것 같다. 손목의 파스를 떼고 신경질적으로 쓰레기통에 처박은 기노자는 간신히 세수를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온 몸이 늘어진다. 무겁고 피곤했다. 이대로 한 24시간쯤 깨지 않고 자고 싶었다. 직업적성고사 직전의 일주일도 이렇게 피곤하진 않았다. 아니 신체적으로는 그렇게 힘들진 않은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 매우 지쳤다. 카가리는 또 보고서를 밀렸고, 쿠니즈카는 쉰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분석실로 가 안 돌아오기 일쑤였으며, 마사오카는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1계의 집행관은 넷. 카가리, 쿠니즈카, 마사오카, 코가미. 그래 코가미는…….
기노자가 온갖 불운을 겪는 일주일 동안 코가미와 기노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별 트러블이 없는데다 코가미는 뻑하면 어딘가로 가버렸으니 - 그래봤자 서고라든가 자료실이라든가 겠지만 - 다른 사람들이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눈치채지 못했다기 보단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걸지도.
기노자와 코가미가 어린애 같은 싸움을 계속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용케 10년이나 친구였구나 싶을 정도로 코가미와 기노자는 성격이 맞지 않았다. 코가미는 이제 사무실에서도 담배를 뻑뻑 펴대는 헤비스모커였고 기노자는 여전히 기관지가 약해 코가미가 사무실에 있는 날이면 환기팬을 아무리 돌려도 목이 조금 부어있었다. 둘의 관계는 대체로 기노자의 고집을 코가미가 굽히고 받아주는 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코가미가 거부하기 시작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지난주의 어느 날, 마키시마 건으로 또 한바탕 해버린 게 코가미의 심기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집행관 주제에 감시관의 명령을 거부하겠다고?"
"쉬는 시간에 뭘 하든 그건 내 자유지."
"환상 속의 망령을 쫓느라 업무를 소홀히 하는 건 맞지 않아, 코가미 집행관."
"환상?"
"그래. 환상이다."
그러고는 또 뭐, 온갖 얘기가 오갔겠지. 너는 옛날부터 그렇게 꽉 막혔다느니, 그러는 너는 확증도 없는 사람을 쫓는다느니, 넌 형사의 자질이 없다, 너라고 제대로 된 형사일 것 같느냐…….
"넌 매정해, 기노."
"안되니까 인신공격이라는 건가?"
"자기 안위만 생각하느라 부하의 억울한 죽음은 신경도 쓰지 않는 너한테는…."
아니, 말을 말자.
코가미는 제 할 말만 하고 돌아가버렸지만 기노자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턱 밑에 카운터 펀치라도 먹은 기분이었다. 매정? 실망? 내 안위만 생각했다고? 그럼, 내가 당장 국장을 이겨먹고 독단으로 사사야마의 수사를 계속하기라도 해야만 했단 말야? 너처럼 잠재범이라도 되어야 했다고?
사사야마를 마지막으로 토마 코자부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건은 그대로 종결이라고 국장이 지시를 내렸다. 그것 말고도 기노자에겐 할 게 너무 많았다. 한 명이 사라진 감시관의 공석은 도저히 메워지지 않아 기노자의 일은 두 배가 됐다. 네 명의 집행관 중 제대로 맘에 드는 건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매정하면, 너는 인정이 넘쳐 흐른다 이거야?
그 점에 대해선 기노자도 할 말이 많았다. 애써 잊고 있었던 것들이 물밀듯이 흘러넘친다. 그 끔찍한 시체를 본 건 코가미 혼자만이 아니었다. 기노자도 봤다. 가끔은 꿈도 꿨다. 집중 테라피를 3개월이나 받았다. 범죄계수는 느긋하게 올라 20대를 유지하던 게 벌써 아슬아슬하게 40을 오갔다. 색은 늘 비 오는 하늘처럼 우중충했다. 조금이나마 상승한 범죄계수를 보고 국장은 오늘도 '잠재범의 유전요소에 대해서 아직 알려진 바는 없지만……' 같은 소리를 운운했다.
생각하면 기분은 끝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아니, 잊자. 잊어버려라, 기노자 노부치카.
지금까지 안 좋은 일은 많았다. 이런 피로는 일상이었다. 속이 쓰리고 머리도 아프고 목도 칼칼했다. 차마 색상을 체크할 엄두는 나지 않아 기노자는 제산제와 색상보조제를 먹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지. 나아지겠지. 뒤척일 때마다 엉치뼈와 고관절이 뻐근하고 손목은 욱신거렸다. 모르고 누른 허벅지의 멍든 부분도 아팠다. 이번 주의 불행이 차례대로 생각나 기노자는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길. 내일만 지나면 주말이었다. 이번주는 내내 비번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기노자는 까무룩히 잠에 들었다.
온 몸이 나른하다. 조도를 낮춘 실내의 천장은 낯설었다. 눈이 뻑뻑해 무심코 손을 들어 비비려다 손등에 꽂힌 주사바늘에 기노자는 당황했다. 시선을 쫓아가면 중간에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팩들이 나무에 열린 열매 같았다.
"일어났어, 기노?"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코가미였다. 일주일만에 제게로 향한 코가미의 목소리가 낯설어 기노자는 그를 부르다가
"코…가미?"
잔뜩 메마르고 쉰 제 목소리에 더 당황하고 말았다. 몸을 일으키려다 순간 머리가 띵해 기노자는 도로 누워버렸다. 직전까진 몰랐는데 뇌가 느릿한 진자추가 되어 끊임없이 두개골을 건드리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리하지 마. 가벼운 뇌진탕이래."
천천히 침대를 세운 코가미가 차가운 물을 따라 기노자에게 건넨다. 얼떨결에 받아 마시고 보니, 꽤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기노자는 물 한 컵을 다 마셨다. 후끈후끈하게 열이 올라 건조했던 목과 혀에 조금 물기가 돌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기억 나?"
"아마……."
기노자 노부치카의 불행한 일주일은 기어이 입원으로 마무리를 지은 모양이었다. 금요일 아침의 몸상태는 최악이었다. 가벼운 미열. 수요일에 비를 쫄딱 맞고 목요일엔 차가 고장 나 그대로 지원팀을 기다릴 때까지 밖에 있었던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손목이나 엉치뼈가 아니라 이젠 온 몸이 욱신거렸다. 손의 감각도 묘하게 둔했고 한숨이 끊임없이 나올 정도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카가리가 네 번째 보고서를 보낸 순간 기노자는 정말 책상 위에 있는 화분을 집어던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에어리어 스트레스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면 아마 기노자는 정말 집어던졌을 것이다. 이미 손은 화분을 쥐고 있었다.
출동했더니 원인은 시시하게도 - 이런 말은 하면 안되지만 - 웬 남자 둘의 싸움이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언성을 드높이며 치고 박고……. 치정싸움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중간에 일행인 듯 끼어있는 여자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이었다. 도미네이터를 쓸 건수도 못되는 구만. 마사오카는 그렇게 탄식했고 코가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쿠니즈카는 비번, 카가리는 보고서 기한이 임박해 데려올 수 있는 게 둘 뿐이었다. 둘이 제 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명치 끝이 욱씬거렸다. 돌아가자마자 약부터 먹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기노자가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기노자의 의식은 거기서 블랙아웃.
작정하고 나온 모양인지 한 쪽이 휘두른 벽돌이 그대로, 정말 불행의 끝을 달리던 기노자의 머리를 빗겨 나가고 말았다.
"천만다행이야. 관자놀이가 찢어져 피가 줄줄 나는데, 아저씨는 완전 사색으로 달려가고 남자들도 놀라서 싸움을 그치고, 거기 있던 사람들 전부 놀라서 에어리어 스트레스는 더 올랐지, 일단 구급 드론은 불렀지만 감시관이 쓰러졌으니 우린 꼼짝도 못하고…… 정말 난장판이었다고."
"그 다음은…?"
"아오야나기가 와서 이 쪽으로 옮기고 일단 사건은 해결. 알고 보니 치정 싸움이 아니라 3계에서 쫓던 사기사건 용의자인 모양이야. 덕분에 3계에선 또 난리더군."
기막힌 우연의 일치에 기쁘기보단 한숨부터 나온다. 3계의 감시관은 사사건건 기노자에게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었다. 돌아가면 얍삽하게 공적을 가로채갔네 뭐네, 집행관 관리도 못하고 꼴사납게 현장에서 나자빠진 감시관이란 소리를 족히 세 달은 들을 터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머리를 맞은 탓인지, 감기 때문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기노자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이쯤 어딘가에 너스콜이 있을 터였다. 오늘 출동으로 일이 세 배는 되었으니 밤이라도 새지 않으면 주말은 쉬지도 못할 게 뻔했다. 어질어질한 머리에 눈을 감고 벽을 더듬는데 손 끝에 걸린 건 벨이 아니라 따뜻한 체온이다. 기노자의 손과는 다른 두텁고 거친 손가락에 조금, 아니 많이, 어깨가 튀어오를 정도로 놀랐다. 다른 사람의 체온에 이렇게 놀라게 될 줄은 기노자도 생각하지 못했다.
"퇴원하게?"
"일이 산더미인데… 나보고 여기 처박혀 있으라고?"
"그러지 마, 기노. 뇌진탕은 하루는 더 상황을 봐야 되고, 손목도 아프대며. 밥은 제대로 먹고 있어? 들쳐 업었는데 주머니에서 약이 우수수 떨어져서 더 놀랐잖아. 열도 있고. 걱정되니까."
"걱정?"
걱정이라고?
"누가 누구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일주일치의 불행으로 쌓였던 분노가 기노자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비단 일주일치만이 아니다. 이건 코가미의 나쁜 버릇이다. 상대는 신경 쓰지도 않고 제멋대로 호의를 베푼다. 그래놓고 가늠할 새 없이 멀어졌다가 또 가까워지고. 이전에도 몇 번씩 그런 식으로 휘말렸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코가미가 치료센터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코가미의 책상을 정리한 건 기노자였다. 사사야마의 방을 정리하고 코가미의 짐을 가져다 놓은 것도 기노자였다. 집행관 적성 통보를 하러 갔을 때도 코가미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기노자의 옆이 아니라 앞에 앉았다. 코가미에게 집행관 적성 검사 제안서를 올린 건 기노자였다. 코가미는 기노자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실내흡연은 금지라고 누누이 얘기해도 재떨이는 치워지는 법이 없었다. 자재과와 경비과에 들러 코가미가 파손한 것들에 대해 사과하고 협상을 벌이는 것도 질렸다. 일이 밀려 하루 종일 일하고 밤을 새다 보면 절로 옆자리에 눈이 갔다.
"내일은 지구가 자전 방향을 바꿀 모양이지?"
"기노."
"내 걱정을 해준다니 고마워서 눈물 날 것 같아, 코가미."
냉막한 목소리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충분히 빈정대고 있었다. 배배 꼬인 심사는 가만히 누워 있다간 온 몸을 뒤틀어버릴 것 같았다. 기노자는 기어이 코가미의 손을 뿌리치고 벨을 눌렀다. 무슨 일이세요? 환자분 깨어나셨나요? 간호사의 낭랑한 목소리에 기노자는 짧게 퇴원 의사를 내비쳤다. 의사가 곧 갈 거라며 대화가 끝나자마자 기노자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땅에 다리를 딛는 순간 머리가 아찔하게 돌아 휘청였다.
"거봐. 아직 무리…."
"손 떼."
숨이 가빠왔다. 코가미에게 그렇게 말은 했지만 받쳐주고 있는 코가미가 없다면 솔직히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몸은 늘어지는데도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소리 없이 열린 자동문에 인기척이 더해져 기노자는 굳건히 마음을 먹고 돌아섰다. 그 순간 또――.
말썽쟁이, 고집불통, 독선적이고 쓸데없이 깐깐하다.
파리한 얼굴은 죽은듯이 고요했다. 피곤하면 입술을 쥐어 뜯는 버릇을 여즉 고치질 못했는지 마른 입술은 군데군데 예민하게 붉어 도드라져 보였다. 막무가내로 퇴원하겠다는 걸 억지로 눕혀 놓고 의사에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주말 내내 진정해야 되니까요. 의사의 말이 그토록 고마울 데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 기노자의 불운에 대해선 코가미도 익히 들었다. 지각하고, 넘어지고, 찧고, 손목에 무리가 가고, 감기기운도 있고, 기노 씨 점심 먹는 것도 못 봤어. 카가리는 넌지시 코가미에게 그렇게 말했다. 매번 기노자와 투닥대는 카가리지만 그래도 걱정은 됐던 모양이었다. 입도 짧은 데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대로 위로 오니 어련할까 싶었다.
손 떼.
무서울 정도로 서늘한 눈초리는 동시에 격정적이었다. 분노로 타들어가는 눈동자는 누구도 아닌 기노자 자신을 태우고, 좀먹고 있었다. 기노자는 놀랄 정도로 강하다. 책임감과 의무감, 코가미가 모르는 그의 생이 빚어낸 어떤 것들이 늘 기노자를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그 어떤 외압과 불운, 부조리에도 똑바로 그를 지탱했고 그래서 가끔은, 얽어 매는 것 같아 보였다. 지금도 그랬다. 지금 그를 붙잡아 맨 건 무엇일까.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도 기노자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것. 코가미도 알고는 있었다. 코가미의 책상을 정리하고, 새로운 자리에 가져다 두고, 사사야마의 방을 정리하고 코가미를 위해 남겨두고, 또 많은 걸 하고 있겠지. 감시관이 한 명 밖에 없으니 단독 수사는 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코가미와 분담하던 걸 혼자서 해내야 되는 기노자가 노골적으로 코가미를 원망하고 비난하더라도 할 말은 없었지만, 기노자는 끝끝내 말로는 하지 않았다.
"너는 강해."
코가미는 기노자의 거칠고 마른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예전엔 이렇게 만지면 부끄러운 듯 손을 꼼지락대다 겨우 맞잡아 주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빼버린다.
"그렇지만 과신하지는 말아줘."
무너지는 등을 보며 코가미는 순간 시공간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아득하게 멀었고 동시에 느릿했다. 기어이 손이 닿지 않아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고만 기노자의 머리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흘렀을 때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저릿했다. 들쳐업은 기노자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더 무서웠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신체는 원래 평소보다 더 무거운 법이라 영영 기노자가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둔중한 무게로 다가왔다.
작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께만이 위안이었다. 입술은 코가미가 기억하는 것보다 거칠었다. 퇴원하면 입술보호제라도 하나 넌지시 건네볼까, 밤새 코가미 신야는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