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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18 [코우기노] 러브레터와 키스의 날
- 2017.12.13 [코우기노] 우리가 사랑했던 겨울
- 2016.07.24 뜬금 기노기노
- 2015.08.15 [디페/Z26] 코우기노 신간 수량조사 안내(~8.18)
- 2015.05.22 [코우기노] 눈감기
글
[코우기노] 러브레터와 키스의 날
5월 14일.
2015년에 쓰다만 것을 발굴했습니다...
꽃 피는 계절이 지나면 기온은 한층 따사로워,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나날이 되곤 한다. 얼굴을 제외하고는 한 끗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 검은 트렌치코트의 목깃을 세우고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 기노자도 기온이 올라가면 별 수 없이 애용하는 코트를 벗어야만 했다. 그래봤자 그 안엔 또 검은 정장이지만 흰 목이 드러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한층 화사해지는 법이었다.
더불어 관공서란 엄격하게 실내온도를 준수해야만 한다. 이상기후에 일찌감치 한낮의 기온은 20도를 넘어섰지만 냉방기기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요즘 같은 때엔 재킷도 벗고 과감하게 흰 셔츠를 드러내니 잘난 얼굴은 더 잘나 보이고 음침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셔츠를 반사판 삼아 햇빛을 듬뿍 머금으니 기노자의 성격을 도통 알 리 없는 타 과의 신입 여직원들은 조그맣게 감탄사를 내지르는 5월.
코가미 신야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충직한 개라면 모름지기 주인이 보이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마주해야 되거늘, 영 꼬리를 흔들 기분이 들질 않는다.
"그거, 기노상, 설마……!"
카가리가 경악에 차 저 멀리로 사라지는 낯선 여자의 등과 기노자의 손에 들린 것을 번갈아 보는 사이, 코가미는 초조하게 담뱃갑을 쥐었다, 놓았다. 아니, 참아야지. 여기에서 담배를 물었다간 코가미가 원하는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할 게 뻔했다. 코가미가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정보는 카가리가 전부 얻어줄 테니 숨을 죽이고 귀만 쫑긋하는 게 상책이었다.
"뭐해요, 기노상! 빨리 뜯어보지 않고."
"…지금 봐야 되는 건가?"
"그럼 지금 보지 언제 봐요! 그거 러브레터잖아요? 러브레터라구요! 보나마나 몇 시 어디에서 보자고 쓰여 있을 텐데, 기노상은 지금 안 읽으면 잊어버릴 거고, 그 가엾은 아가씨는 밖에서 기약없는 기노상을 기다릴 테고, 그럼 다음날 기노상은 공안국 공공의 적이라구요?"
"비약이 지나치다만."
"아, 그냥 빨리 뜯어봐요."
카가리가 기어이 은은한 향수냄새까지 나는 분홍색 종이 봉투를 뺏으려고 하자 기노자는 날렵하게 손을 위로 뻗었다. 아, 기노상! 폴짝폴짝 뛰면서 카가리가 안간힘을 써봤자 기본적인 신장차가 있는데 기노자의 팔까지 손이 닿을 리 없었다.
"카가리."
카가리는 어찌됐든 이 중에서는 가장 어리고 가장 주인을 잘 따르는 개였다. 기노자의 냉정한 호명에 제 분수를 알고 부루퉁하게 이죽이며 구원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코가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 팔을 뻗어 낚아 채…려고 했다.
"네게 아냐, 코가미."
눈을 깜박이면서 먹이를 못 찾는 개를 교육시키듯, 다정하고 엄한 목소리다. 아, 뭐, 러브레터가 탐나는 건 아닌데……. 의외의 민첩성에 코가미가 당황하는 사이 재빠르게 봉투를 재킷 주머니 안으로 갈무리 한 기노자는 자연스럽게 제 자리로 피하면서 말했다.
"밀린 보고서, 오늘 다섯 시까지. 5분 늦을 때마다 손톱을 하나씩 펜치로 뽑아버릴 거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에 알아듣는 게 늦었던 카가리가 뒤늦게 소리 질렀지만 기노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시선을 모니터로만 향한다. 기노자가 받은 러브레터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영 글러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코가미는 기노자의 재킷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러브레터는 시대가 변해도 언제나 낭만적인 물건이었다. 오늘 학부생 중 누군가가 학부 공통 교양 직전에 러브레터를 받는 바람에 코가미 주변은 하루종일 러브레터 얘기로 들썩였다. 그도 그럴게 종이도 보기 드문 요즘 같은 시대엔 자필로 쓴 편지라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문 아이템이었다. 인문학부 누구라는 자기소개와 함께 건네, 떠넘기듯 쥐어주고 뛰쳐나간 남학생의 등 뒤로 환호성이 올랐다. 편지를 받은 여학생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이도저도 못하고 편지를 꽉 쥐고 있었다. 당사자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받는 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기노자는 영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오늘의 이슈를 전하는 코가미를 보고 있었다. 사람과의 교류가 서툰 기노자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낯선 것을 보는 표정을 짓곤 했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에 코가미도 이번엔 얼굴을 긁적여야 했다.
"글쎄. 누가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건 기쁜 일이잖아."
"너도?"
"뭐……, 그렇겠지. 편지를 쓴다는 건 굉장히 번거로운 행위니까 나쁜 소리나 이해타산적인 용건이 들어있을 리는 없고,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평가가 올라가지 않아?"
코가미도 몇 번 그런 류의 편지를 받았었다. 그 중 한 명과는 사귀기도 했었는데 매일매일 편지를 써 만날 때마다 한뭉치를 코가미에게 건네주곤 했다. 처음엔 나름 성실하게 답장을 써주곤 했지만 그게 귀찮아 그만두니 얼마 안돼서 헤어졌다. 편지 쓰기가 의외로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사실을 코가미는 그 때 처음 알았다.
"너한테 편지라도 써줄까 기노?"
"왜?"
"재밌을 거 같지 않아? 그런 걸 뭐라 그러던데…… 펜팔? 그냥 편지를 주고 받는 거야. 어때?"
"무슨 내용을 써야되는데?"
"그건 자유지. 할래? 하자, 기노. 내가 먼저 써올게."
기노자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다음날 코가미는 정말로 편지를 써 기노자에게 건넸다. 먼저 그만 둔 것도 코가미 쪽이었다. 몇 번 주고 받다가 시험기간인지 방학인지 흐지부지해져, 열 통 남짓, 3개월도 되지 않는 기간의 답신이었다.?
기노자가 퇴근할 때까지 기노자의 재킷 안 쪽만 바라보다가 근무가 끝나기 직전, 코가미는 10년도 더 된 과거를 간신히 상기해냈다. 필요한 것을 제외하곤 이사올 때 그대로, 풀지도 않고 박스 채 구석에 쌓아두었다. 먼지 쌓인 짐을 하나씩 풀어헤쳐 코가미는 간신히 기노자가 써 준 편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날짜와 내용을 보고 있자니 중간의 두 통 정도는 분실된 모양이었다. 한 통은 물에 젖어 우그러들었고, 짐에 깔려 접혀 있었는지 아예 접힌 것도 있었다.?
시시콜콜한 얘기들이었다. 뭘 써야될 지 모르겠다며 어색하게 말문을 뗀 편지는 그래도 두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금은 전혀 볼 일 없는 기노자의 필체는 획이 생각보다 큼직큼직했다. 두 장은 세 장이 되고 어느 순간부턴 여백없이 꽉 찬 네 장으로 분량이 정해졌다. 그래봤자 별 내용은 없었다. 기노자가 코가미에게 보낸 편지는 하루 일과 보고 같기도 했다. 코가미가 기노자에게 보낸 것도 그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저는 두 장 채우기도 힘들었는데, 기노는 어떻게 네 장이나 채운 거지? 신기해하면서 날짜별로 훑어보지만 끝까지 별 내용은 아니었다. 다임의 건강상태, 공부의 방향, 휴일에 산책하다 본 노을이 예뻤다던가,?지난번에 갔던 어디의 뭐가 맛있어서 한 번 더 가고 싶다던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이젠 슬슬 편지 쓰는 방법을 알았다고, 러브레터를 쓰는 사람의 심정도, 받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는 말이 마지막줄에 쓰여져 있었다.
아, 젠장.
코가미는 그 구절에서 이번엔 참지 않고 담배를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기노자가 편지를 받고 좋았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코가미 며칠을 전전긍긍하거나 말거나 기노자의 러브레터 사건은 그대로 잊혀지는 듯 했다. 카가리는 보고서를 제 시간에 맞춰 쓰지 않았다간 펜치로 손톱이 빠진다는 공포 - 사실 믿지는 않았지만 손톱 대신 카가리의 게임기가 박살날 확률은 충분했다 - 에 쫓겨 아예 잊어버린 듯 했다. 그 외에 아는 사람은 코가미 뿐이었으니 누구도 그의 궁금증을 대신 해결해주진 않았다. 대놓고 그 사람한테 고백은 받았느냐 거절했느냐 물어볼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3일, 그래도 넌지시 물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했더니 시프트가 맞지 않은 게 3일이다. 도합 일주일 가량을 그냥 보낸 코가미가 어슬렁거리며 사무실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으려면 뜻밖에도 식당 근처 외부 휴게실에 기노자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맞은 편엔, ――그 아가씨다.
저도 모르게 기둥 뒤에 숨어 있노라면 간간히 코가미에게도 말소리가 들렸다. 기노자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거절의 말인 모양인지 여자의 "아……." 하는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겠지. 기노가 고백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묘한 안도감에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코가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영 성격 못되먹은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친구가 연애 좀 할 수도 있는거지, 고백 한 번 받았다고 뒤에서 난리라니. 다음부터는 진심으로 잘되라고 기원이라도 해줄까, 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코가미가 자리를 뜨려던 찰나 여자의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렸다. 방금 전까지 훌쩍대던 것도 그치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당차게도 물어봤다.
"편지는 감사히 간직할게요. 읽고 나서 답장 써도 되나요?"
"아…?"
"편지 쓰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답장은 처음 받아봤거든요. 부담스러우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음? 아, 뭐…… 편지 정도는."
편지? 어안이 벙벙해 깜짝 놀라 고개를 쭉 빼고 보면 확실히 여자의 손엔 연한 파스텔 그린의 편지봉투가 있었다. 코가미가 며칠 전에 보았던 편지묶음에 있는 봉투였다!
- 편지를 쓰면 어쩔 수 없이 답장을 기대하게 되어버려.?
검은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져 있던 문장을 코가미는 떠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노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좋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기노자에게 코가미로부터 일방적으로 시작돼서 일방적으로 끝난 펜팔은 기노자에겐 꽤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답장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우물쭈물 넘어가 버려 분명 기노자도 그대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게 기노자는 단 한 번도 답장을 조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실컷 자기 변명을 하고 있으면 동시에 다른쪽에서 멍청이란 생각도 들었다. 기노자 성격에 그런 걸 조를 리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백한 상대랑 다시 편지 주고 받을 생각이 드냐?
방금 전까지 관대하게 다음 연애를 응원해야지 하던 마음은 증발하듯 사라지고 여기엔 다시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코가미 신야만이 남았다. 기노자는 옛날부터 귀가 얇았다. 흐름에 떠밀려 가는 것도 쉬웠다. 여자는 반대로 꽤 추진력 있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어영부영 흘러가 어쩌면 그대로 결혼에 골인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상상이 꽤 그럴싸해서 코가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코가미가 불안을 부채질하는 것처럼 둘의 대화는 끝날 줄 몰랐다. 기노자가 말을 끊으려고 하면 여자는 능숙하게 다시 말꼬리를 부여잡아 답을 안할 수가 없는 방향으로 잡아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상상이 현실이 되게 생겼다. 어지간해서 도저히 기노자가 빠져나올 수 없는 모양새라 코가미는 결심하고 둘의 대화를 쳐부수기로 작정했다.
"여, 기노."
지나가다 마주친양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기노자의 곤란했던 얼굴에 슬쩍 화색이 도는 틈을 타 코우가미는 그대로 기노자의 목을 끌어당겼다. 깜박거리는 눈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코가미의 팔 밑에서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기노자가 코가미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뭐, 뭐, 뭐야, 코가미!"
간신히 코가미의 우악스러운 팔 밑을 벗어난 기노자가 숨을 못 쉬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대며 소리쳤다. 예고도 없이 눈 앞에 펼쳐진 남의 라이브 키스씬에 당황한 건 여자가 더했겠지만 그 와중에도 소리 지르고 도망간 게 아니라 코가미를 노려보는 꼴이 제대로였다. 저지른 다음엔 모든 게 척척 진행되기 마련이다. 기노자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으며 코가미는 천역덕스럽게도 거짓말을 내뱉었다.
"사실 저희 사귀는데요."
"기노자 씨는 그런 말은 안했는데요. 그렇죠?"
올려다보는 시선에 기노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래서는 택도 없었다.
"그 편지지."
"네?"
"당신이 들고 있는 거, 예전에 기노가 나랑 주고받다가 남은 편지지인데."
코가미가 턱짓으로 여자가 쥐고 있는 편지를 가리키면 여자는 또 말없이 기노자를 올려다본다. 이건 이견 없이 맞는 말이라 기노자가 고개를 주억이니 여자는 사납게 노려보고는 결국 멀어졌다.그 꼴을 보던 기노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든가 말든가 코가미는 제법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냐, 코가미." 넥타이를 바로 하던 기노자가 눈을 치켜뜨며 묻는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노가 곤란해 하는 걸 내가 도와준 것 뿐이잖아."
"혼자서도 할 수 있었어. 굳이 그런 거짓말을……."
"사귀었던 건 맞잖아?"
"…과거형이지."
"키스가 처음도 아니고."
"지금 너랑은 안 해."
쌀쌀맞게 대응하며 용건도 끝났겠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기노자의 팔을 코가미는 가볍게 붙잡았다.
"편지봉투 안 버렸네."
"…열 장 정도 사놨었거든. 그 뒤로 쓸 일이 없어서."
"러브레터 받는다고 답장해 주는 사람은 없어, 기노."
"내 기준에선 답장하는 쪽이 더 정중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답장 써 달라고 얘길 하지."
"넌 재미없는 건 금방 잊어버리잖아, 코가미."
코가미가 쥐고 있는 팔을 정중하게 뿌리치면서 기노자는 가볍게 재킷의 주름을 펴기 위해 툭툭 쳤다.
"쓰기 싫은 편지 쓰는 게 고역이라고 말했던 것도 너였고."
어……. 기노자의 날카로운 말이 코가미를 쿡 찌른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코가미를 남겨둔 채 기노자는 성큼성큼 걸었다. 차마 뒤따라갈 용기는 없어 코가미는 그냥 멍청하게 서있었다. 기억을 더듬으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에는 없지만 제가 할 만한 말이었다. 실제로 의무적인 편지는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 젠장."
과거의 자신이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코가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만 헝클었다. 입술에 남은 타인의 체온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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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기노] 우리가 사랑했던 겨울
지난 12월 9일 디페스타에서 배포했던 코우기노 글을 공개합니다. 배포본이므로 짤막합니다.
시안은 동남아시아에 위치해 열대 온순 기후의 특성을 띠고 있다. 한마디로, 덥다. 8월의 일본보다는 시원한 것 같기도 하지만 1년 중 6개월이 여름 날씨라니. 이제는 제법 이 곳의 지리도, 억양도, 식습관 같은 것도 익었지만 겨울이 없는 계절이 코가미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우기에 오는 비는 무섭도록 습하고 끈적끈적하고 건기가 되면 그나마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그건 그냥 가을이지 겨울이 아니다. 습한 빗줄기에 묵직한 스피넬의 향이 엉겨 붙는 밤이면 나는 어울리지 않게 향수병에 시달리곤 했다.
따뜻한 실내에 있다가 밖에 나왔을 때 그 차가운 대기, 들이쉬는 숨이 얼음처럼 서걱거려 깨끗하게 폐부를 한 바퀴 돌리고 나왔을 때의 상쾌함이 그리웠다. 시린 코끝을 애용하는 겨울 점퍼에 묻어버리고 잔뜩 움츠린 채로 종종걸음 치던 도시의 아스팔트, ‘그렇게 걷지 마, 코가미. 목이 굽어질 거야.’, 사실 그렇게 걷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잔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그렇게 걸었다. 아니면 그 차가운 손을 낚아 채 같이 커다란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걷기도 했다. 완강히 저항하던 손은 결국 체념하고 얌전히 코가미의 주머니 안에 들어간 채로 같이 따뜻해졌었다.
원래 사람은 없는 것만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이 기후에선 이불로도 쓰지 못하는 겨울 점퍼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건 그 향수 때문이다. ‘돌아가려면 하나쯤은 있어도 되잖아?’ 돌아갈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자기합리화하고 배낭에 처박아놓은 게 벌써 3년이다. 일본에선 세 번의 겨울이 지났고 이젠 네 번의 겨울을 맞이할 즈음이었다. 겨울옷이란 게 다 그렇듯 부피는 크고 무게는 무거워 가방에 넣으면 커다란 군용배낭의 절반 이상도 차지한다. 날이 좀 선선해졌으니 모처럼 대청소를 하자며 집안을 뒤집어놓다 발견한 이 커다란 짐덩어리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어쩐지 피곤해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슬슬 버려도 좋지 않을까.
상황은 전보단 안정되었다. 정의롭고 자비로운 시빌라의 은총은 기껏 밤바다를 타고 도망친 이국에까지 미쳐 세상을 악랄한 이분법으로 갈라놓더니 기어이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안락한 둥지 틀기에 성공했다. 표면상의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저항군은 사람들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열망을 잃은 게릴라전에선 인적 물적 자원이 전보다 몇 배로 소모되었다. 재정 부족으로 이 벽지에까지 시스템이 시행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이 나라도 내가 알던 곳과 비슷해질 것이다. 거리마다 일정간격으로 위치한 컬러 스캐너, 시빌라 시스템이 위치한 초고층 건물, 온통 흰색인 교정시설, 그 익숙한 풍경 사이에서 자신의 범죄계수는 몇일까. 아마 이전보다 훨씬 높아, 어쩌면 엘리미네이터가 작동될 정도일지도 모른다. 기노한테 한 번은 물어 볼걸 그랬지. 만났을 때 한 번은, 만났을 때…….
다시 만났을 때 기노자는 덥지도 않은지 보기만 해도 답답한 검은 정장이었다. 기노자는 원래 그랬다. 그의 고지식함은 계절을 가리지 않아서 여름이면 반팔 위에 몰래 홀로그램을 씌워 출근하던 나와는 달리 그만은 분명히 긴 셔츠에 재킷이었다. 여름은 더위 때문에 범죄가 일어나기 쉽고 사이코패스 관리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계절이다. 적정 온도의 냉방은 어느 정도의 의무였고 드래그스토어에선 색상보조제가 불티나게 팔렸다. 만인이 주의를 기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계수의 상승은 빈번해서 여름, 기노자는 셔츠를 하루에 두 번은 갈아입어야 했다. 더위에 지쳐 냉방장치 밑에 녹아내린 기노자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내리다 이윽고 벗겨내는 것은 으레 내 몫이었다.
“기노도 그냥 홀로그램을 쓰지 그래.”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넌지시 권고하면 기노자는 습관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예의가 아니잖아.”
그래서 기노자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은 겨울이었다. 겨울엔 긴 셔츠와 재킷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기노자는 여름보단 겨울이 더 잘 어울렸다. 연말을 맞이하는 희고 푸른 채도의 일루미네이션 아래에선 기노자가 좋아하는 검은 트렌치코트가 길고 늘씬한 실루엣을 유독 강조했고 높은 깃보다도 더 길고 흰 목이 도드라져 보였다. 따라서 나도 여름보단 겨울이 좋았다. 더운 것보다 추운 게 훨씬 낫기도 하고, 여름엔 나란히 앉는 것도 질색하는 기노자가 자연스럽게 거리감을 줄이는 계절이었으니까.
“그렇게 걷지 마, 코가미.”
나란히 걷던 길에서 고개를 돌리면 기노자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왜? 소리없이 그렇게 물으면 기노자는 내게 잡혀 주머니 속에 들어간 손 대신 반대편 손으로 내 등을 힘껏 내리쳤다.
“보기 흉하니까.”
코트 안으로 움츠러 들어간 목이 반동으로 쑥 위로 올라온다. 낄낄대면서 나란히 귀가하는 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바뀐 적이 없었다. 기노자의 한 손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 재킷 주머니에 들어있었고 맞잡은 손은 같이 따뜻해지곤 했다. 길게 마디진 그 손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으면 기노자가 간지러운 듯 움찔거렸지만 역시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 매끈하게 긴 손가락에 액세서리가 있으면 꽤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 건 언제였던가.
강도 높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모두를 수반하는 공안국의 월급은 일반적인 샐러리맨과 비슷했지만 야간 근무를 낮처럼 했고 휴일 근무는 평일처럼 했으니 추가 수당을 합치면 훨씬 넉넉했다. 유별나게 아름다운 반지도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도 흐렸다. 그만큼 오래된 얘기였다. 그게 언제였지. 스물의 겨울엔 간신히 익숙해진 일에 매진하는 것만도 벅찼다. 스물 하나의 겨울도 아니지. 그 땐 아직 그 정도의 잔고가 남아있지 않았다. 스물 둘, 셋, 넷…. 아마 그 즈음이었을까. 간신히 어린 티가 남은 기노자의 둥근 뺨이 케이크에 꽂힌 초의 열기에 발갛게 달아올랐을 때 반지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정교한 홀로그램 카탈로그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휴일을 쪼개 기노자 몰래 도쿄의 백화점을 모두 돌고, 기진맥진해서 돌아오는 날이 족히 여덟 번은 넘었다. 단순 계산으론 여덟 번이지만 기노자와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었고 휴일 출근도 일상다반사였으며, 그토록 무언가에 매진하고 흥분했던 적은 살면서 몇 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고백하건대 가끔은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 마디진 손이 여전히 외롭고 그래서 무엇을 채워줘야겠다고 새삼스럽게 깨닫는 건 한 주머니에 손을 맞잡고 넣을 때뿐이었다.
프러포즈라는 거창한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충동적이었다. 그 날이 너무 지쳤어서, 기노자의 얼굴에서 유난히 턱선이 도드라져 보여서. 마지막 집행이 힘들었어서 그런 사소한 이유들이 충동을 부추겼다. 사는 데 몇 개월, 갖고 다니기가 몇 주였던 박스를 꺼내게 한 건 그런 것들이었다.
“결혼할래, 기노?”
그토록 가벼운 말. 차라리 농담처럼 말하고 싶었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의 기노자는 모든 걸 조심스러워했다. 박빙薄氷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클리어 컬러를 보여주면서도 언제 그것이 아주 깊은 바다의 색이나 계곡의 이끼나 붉은 핏빛이 될까 두려워했다. 그 선연한 색의 변화가 가져올 모든 사회적인 변화들을, 그것이 종내 내게 가져다 줄 불이익을. 고백하고 첫 달은 그것을 핑계로 거부했고, 두 달은 그래도 괜찮겠냐고 꾸준히 확인했으며, 반 년은 그런 미래를 자꾸만 상상해보라고 했었다. 짧은 생의 절반이 넘게 그를 괴롭히고 남은 평생을 괴롭힐 그의 불안의 기저를 나는 잘 알고 있었고, 반복되는 확인들을 인내할 여력도 있었으니 대답을 독촉할 생각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 눈을 크게 뜨다가도 찬바람에 마른 얇은 입술을 꽉 깨문 기노자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코가미, 나는.”
…앉아 있다가 지쳐 벌렁 누워버렸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꾼 기분이었다. 이전 세대의 낡은 기억장치에서 기적적으로 선명한 기록들을 꺼내면 이런 상황일까. 기억하는 공기는 입김이 희게 나오는 차가운 날씨인데 숨을 들이쉬면 미지근한 온기가 들어왔다. 아득하면서도 생생한 기억들을 헤집고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혀온다.
기노자는 실로 현명했다. 예상처럼, 기노자는 거절했다. 거절이라기보다는 그의 습관 같은 신중함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모르겠어, 코가미.
몰랐던 건 기노가 아니라 나일 것이다. 형사의 육감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은밀하게 발생한 범죄현장에서 문득 뒤가 아려올 때, 다른 무언가가 숨어있을 것이라 짐작한다든가 모든 알리바이가 완벽한 상황에서도 중요 참고인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 그것을 ‘형사의 육감’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경험인가, 선험인가. 육감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수사에 대한 육감은 없어도 – 일반인인 기노자에게 그것은 없어도 좋았다 – 기노자에겐 다른 종류의 육감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머나먼 미래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의 그림자를 누구보다 기민하게 눈치 챌 수 있는 그런 육감이. 나는 결코 바닥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의 장벽을 넘어, 아주 바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의 기질을.
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서른이 될 때까지 변하지 않으면.
얇게 마른 입술을 질겅대며 기노자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그 때가 되면 다시 말해줄래.
망설이는 눈빛엔 분명 다른 종류의 불안이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요동치는 대지 위에 간신히 한 겹의 단단한 껍질을 올려 최대한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그건 알 거야, 코가미.
거절하면서도 기노자는 매달리듯 말했다.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던 일인데 고작 신중한 거절 한 번에 기노자는 내일이면 당장 내가 어딘가로 가버릴 것처럼 과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너는 말이야, 너는…….
끝내 문장을 마치지 못한 채로 기노자는 입을 다물었다. 나를 위해서였는지, 그를 위해서였는지 기억나진 않아도 우리는 반지를 서로 나눠 가졌다. 나는 기노자의 것을, 기노자는 나의 것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때에 주기로 했다.
그리고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의도하여 넣어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던 물건이었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밀입국하는 배 안에서 손가락 끝에 걸려 올라온 그것을 보고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케이스에 넣어둔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혼자 돌아다니게 되었나. 사사야마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마키시마 쇼고의 존재를 확인하고 부술 때까지 겨울마나 애용하던 점퍼였다. 내 주머니엔 반지나 누군가의 손 대신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가 있는 게 당연해졌고 아무리 구부정하게 걸어 다녀도 내 등을 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애꿎은 주머니만 만지작대다가 실이 닳아 구멍이 났고 정말 우연히도 그 사이로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만이 가능했다.
“잘 지내?”
“지내.”
무뚝뚝한 대답은 완고했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단단함은 그가 지난 세월 동안 갈고 닦은 그의 특기였다. 그래서 아무도 그가 얼마나 다정한지 몰랐다.
“나는 별로야. 여긴 겨울이 없거든.”
“잘됐네. 넌 여름을 더 좋아하잖아. 여름이 잘 어울리기도 하지.”
기노자의 곧은 등, 꼿꼿한 목은 여전했지만 안 본 사이에 그는 훨씬 더 도드라진 광대와 턱선을 갖게 되었고 머리카락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상태로 길었다. 늘 눈가를 가리던 안경이 없어져 깊은 눈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은 정갈한 앞머리 사이에서 얼핏 처연한 듯한 느낌도 들었다. 예전엔 곧죽어도 웃을 줄을 모르더니 기노자는 이제 꽤나 어른처럼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어른처럼 웃는다는 건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비웃거나 냉소할 수 있게 되었단 얘기였다.
“난 겨울이 더 좋은데, 기노. 우리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좋아하는 계절에 대한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던가?”
나는 겨울을 좋아했다. 기노자에게 잘 어울리는 그 계절을. 나는 진심으로, 어떤 방향에선 좀 억울하기까지 해서 기노자에게 항변했다. 우리의 끝이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숱하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서로의 기호는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기노자는 그것을 정말 그렇게 온전히 잊어버렸나. 내 시선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기노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귀찮다는 얼굴로 말한다.
“너는 가끔 네가 좋아하는 걸 착각하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기노.”
“네가 말한 대로 그 오랜 시간 동안 붙어있었기 때문이지.”
너는 겨울에만 나를 사랑하는 척 했잖아.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감하게 낮았다. 기노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웃고는 왼쪽 손의 장갑을 잡아당긴다. 내가 주머니에 넣고 같이 따뜻해지던 손이었다. 길게 마디진 손가락의 윤곽을 더듬는 걸 좋아했다. 우리의 거리감이 조금씩 녹아드는 겨울을, 네가 입은 검은 재킷이 잘 어울리는 계절을.
“너는 좋아하는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편이니까. 호오가 분명하다고는 해도 의외로 사소한 건 잘 모르잖아.”
일정한 규칙들. 빵을 먹을 때는 끝부터 순서대로 먹는 걸 좋아한다든가, 붕어빵은 머리부터, 만두는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걸, 카레우동은 한 번 크게 휘저은 다음 밑에서부터 먹는 걸, 늦봄과 늦여름을 좋아하고 겨울은 싫어해. 추운 게 싫으니까 달라붙는 거잖아.
…—원래 사람은 없는 것만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겨울이 그리운 건 이 나라엔 겨울이 없어서였을까. 기노가 지금 눈앞에 없어서 기노를 그리워하는 걸까? 익숙해지고, 또 익숙한 모양으로 변모할 도시에 내게 가장 익숙한 기노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기노를 그리워하는 걸까. 이제는 그 왼손 약지를, 마르고 곧은 등을, 그 옆모습을.
아마 겨울 점퍼는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곳엔 겨울이 없고 주머니 깊은 곳에 들어 간 반지는 주인을 잃었어도 그랬다. 단순한 향수병이나 변덕이라고 해도 좋았다. 십수 년 동안 익숙한 모습이었다. 계절만큼이나 당연하게 붙어 있었다. 그립지 않은 게 이상하잖아. 나는 눈앞에 없는 기노자에게 변명한다. 사랑하는 척이라면 외롭지 않았어야 했다.
“네 말은 틀렸어, 기노.”
나는 몹시 외로웠고 지금은 없는 계절이 몹시도 그리웠다. 우리가 사랑했던 겨울이, 우리가 사랑을 했던 겨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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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 기노기노
집행관 기노자 + 감시관 기노자.
집행관 기노자가 감시관 기노자를 꼬셔서 다 때려치고 도망가는 게 보고 싶었기 때문에 자세한 설정이나 설명은 없음.
물론 두서도 없음.
기노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괴한 농담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지상 최대의 악몽이다. 꿈에서 깨려면 신체적인 충격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노자는 손을 들었다. 있는 힘껏 제 뺨을 후려치려는 찰나 억센 손아귀가 그의 팔목을 붙든다.
"그만 두는 게 좋아."
그 낮은 목소리가 익숙하고, 동시에 낯설어 기노자는 온 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심문 과정은 모두 녹화되며, 조사를 위해 몇 번이고 녹화된 화면을 보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녹음된 제 목소리를 들으면 낯설다고 하지만, 그것도 8년이다. 기노자는 객관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이 목소리는 제 것과 동일했다. 평생을 낸 적 없는 부드러운 말씨라는 걸 제외하면.
물론 목소리만 같은 게 아니다. 얼굴도, 말하긴 싫지만 비슷했다. 나이를 먹는다면 이런 느낌이 되겠지. 남자는 본인이 서른 여섯이라고 말했다. 그래 보이는 얼굴이다. 앞머리는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대신 우스꽝스럽게 머리를 길러 하나로 묶고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세월의 흔적 사이에서 그토록 싫어하던 살짝 들린 눈매는 어떤 장애물도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니까, 안경이 없었다.
기노자의 갈곳 없는 시선은 팔목을 붙잡을 손으로 넘어간다. 가죽장갑을 끼고 있으나 그 단단한 감촉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경도를 느낀다. 안경 렌즈 너머의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러나 결코 손의 힘을 빼지 않고 말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니까."
퍽이나 로맨틱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그의 말은 어떤 비유가 아니었다. 물론 통각을 공유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이 남자는.
"미래의, 나라고?"
하. 하하. 진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삼킬 침조차 없이 껄끄럽게 마른 목 끝까지 그런 말이 차올랐다. 있는 힘껏 부정하고 싶었다. 당장 이 정신병자, 제가 기노자의 미래라고 우기는 남자를 체포해서 교정시설에 처넣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셔츠 소매와 장갑의 틈새로 보이는 강철의 팔과 그 팔목에 얹혀진 족쇄, 개목걸이, 집행관 디바이스를 발견한 순간 어렴풋이 기노자는 깨닫고 만 것이다.
작금의 발버둥도, 고집도 아무 소용 없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운명이 제게 도래했다는 사실을.
(중략)
"잠깐, 기노. 잠깐만."
엘레베이터로 들이닥친 코가미와 마사오카를 떨쳐낼 틈도 없이 무정한 기계는 문을 닫아버렸다. 휴가를 신청한 기노자가 갑자기 사무실에 들이닥쳐 짐을 싸들고 나설 때부터 위화감을 느껴 쫓아오기는 했으나 코가미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침묵한 채로 기노자를 쳐다보고 있으면 기노자는 제게 닿는 두 쌍의 시선을 뻔히 알면서도 피하고 있었다.
기노자는 제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쇼핑백은 그리 크지도 않은데 그조차도 여유로웠다. 찻잎, 머그컵, 작은 선인장 화분.
단지 그 뿐이었다. '잠재범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이후 제 안의 모든 것을 짓누르고, 인내하고, 노력했는데 그 흔적은 작은 쇼핑백 하나도 다 채우지 못했다. 새삼스럽게 얼마나 부질없는 인생을 살았는지 적나라한 회의가 밀려왔다.
공안국에 자리를 잡고, 후생성의 간부가 되어 증명하고 싶었다. 보아라. 너희가 그토록 멸시하던 잠재범의 자식도 이 사회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남부럽지 않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아버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가치관을 지켰을 뿐인데 어째서 '잠재범'이 되었는가. 모두 잘못 되었다고, 완전무결한 신탁의 무녀가 내린 운명을 비틀어 부수고 싶었다.
그건 헛된 꿈이었지.
"노부치카."
지친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 기노자의 귀에 마사오카의 목소리가 박혔다. 사실은 싫어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부르는 제 이름은 언제나 행복했던 나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다. 공안국에 처음으로 등청하기 전, 기노자는 꼬박 열흘 밤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에 있을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될지 하루에 스물여덟가지 방식을 생각하곤 했다. 무시할까. 그럴 수는 없겠지. 무심한 타인처럼 인사할까. 아버지는 어떤 표정일까. 나를 보고 놀라려나. 놀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은 대견해 했으면 좋겠다. 적성검사를 통과해 무사히 여기까지 당도한 나를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가볍게 인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몸은 피로했으나 정신만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여전히 답을 정하지 못한 채로 기노자의 시선은 누군가의 낯선 얼굴 위를 헤매고 있었다. 시야의 끝머리에서 서성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그러나 계속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러다 기어이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리고 마사오카는 외면했다.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의 어느 한 구석이 무너져내리던 날이었다. 신입 감시관이 집행관의 아들이라는 건 분명 좋지 않은 사실이다. 그도 그래서 피했겠지. 머리로는 납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러웠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저와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하는 자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노부치카, 라고 부르는 소리에 애정의 편린을 느끼다가도 코가미나 사사야마와 훨씬 허물없이 지내는 그를 보면 부유하던 납덩이들이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하운드 1 - 미래의 기노자는 저를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다 - , 서른 여섯의 자신은 기노자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구하려다 죽었어. 내 팔은 그 때의 흔적이야. 그렇게 말하는 기노자 노부치카는 침착했다. 그 목소리에서 미래의 저는 증오와 애정 중 후자를 택했다고 눈치챘다.
미래가 그렇다면 현재의 자신도 그래야 하겠지.
기노자는 긴긴 한숨을 내쉬고 굳게 마음 먹었다. 이별과 결단마저 운명이라는 타의에 휘말려 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래를 아는 자신에겐 선택권이 있다. 이제는 자의로 이별의 말을 내뱉을 시간이 온 것이다.
"어. 기노… 상…?"
엘레베이터는 여전히 무정하다. 기껏 말을 하려는 찰나, 목적지에 도착한 기계덩이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카가리가 있었다. 카가리와 쿠니즈카 야요이와 츠네모리 아카네와, 하운드 1이.
데스크를 정리하고 내려올 동안 차에 처박혀 있으라고 했더니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던 이들과 마주친 모양이었다.
진짜 끝까지 되는 게 없네.
기노자는 짜증이 치밀어 눈을 흘겼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하운드 1은 기노자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이해하지 않고 있었다. 잠재범이란 자식들은 하나같이…!
미래의 저조차도 정말 훌륭하게 잠재범이었다.
"하운드1."
기노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운드 1? 코가미는 반사적으로 마사오카를 바라보았고 마사오카는…… 기노자가 하운드 1이라 부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초췌하고 지치고 피곤한 기노자보단 훨씬 혈색이 좋았다. 그러니까 기노자보다. 아니, 구분이 안되잖아. 코가미가 아는 기노자보다.
코가미는 황급히 정정했다. 기노자의 차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는 기노자를 닮아 있었다. 기노자가 걸음을 옮겨 그의 옆으로 가면 키는 동일했으나 체격이 달랐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껴입은 기노자는 훨씬 가냘퍼 보였다. 기노자가 부른 하운드 1은 안경을 쓰지 않았고 앞머리가 짧아졌고 머리를 묶었으며 닳은 셔츠나 밑단 구두창 같은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코가미의 예리한 시선이 그의 전신을 훑었다. 약간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한 자세, 한 쪽만 끼고 있는 장갑, 둔중한 빛을 발하는 집행관 디바이스. 의수다. 기노자, 기노자를 닮은 하운드 1은 의수를 장착한 집행관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야?"
카가리가 혼란한 얼굴로 양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마른세수를 하는 기노자와 그런 기노자를 가리듯 옆에 서 있는 기노자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둘 다야. 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한껏 지친 동일한 목소리가 겹쳐 기괴한 울림이 되었다. 카가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 옆에 있던 츠네모리도, 코가미나 마사오카도 마찬가지였다.
"인사는 했어?"
기이한 침묵 속에서 하운드1은 기노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며 그렇게 물었다. 그 다정한 울림에 코가미는 선뜩함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할까. 눈 앞에서 꺼림칙한 범죄가 일어나고 그것을 놓치고 있을 때, 어느 한 쪽으로 날서던 감각과 비슷했다. 코가미를 비롯한 집행관들은 형사의 감이라고 말하고, 기노자는 사냥개의 후각이라며 멸시하던 그것이었다.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본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나쁜 것인지 코가미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내 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기노자가 고래를 똑바로 들어 츠네모리를 쳐다보았다.
"츠네모리 아카네 감시관."
"ㄴ, 네!"
"나는 오늘부로 일신상의 이유로 감시관을 사임한다."
"네?"
아, 아니 잠깐 기노 상? 너무 놀라 새된 소리를 내는 카가리와 조용히 숨을 죽이는 쿠니즈카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츠네모리가 코가미의 눈에 보였다. 옆에 있는 마사오카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코가미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다.
이게 나쁜 일인가? 코가미는 날세워 상황을 관찰했다. 기노자의 갑작스러운 퇴직은 분명 나쁜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좀 더 끈적한 무언가가 이 지하주차장에 감돌고 있었다.
"혼자 일하려면 힘든 것도 많겠지만 남은 집행관들이 잘 도와주겠지. '잔소리 안경'보다는 훨씬 나을테니."
악의 없는 빈정거림이 카가리의 명치 끝을 찔렀다. 아, 아니 그건 농담… 농담이죠, 기노 상. 지금까지, 잘, 받아줬으면서 왜, 왜 그래요. 불쌍한 카가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모두가 말을 잊은 사이에 간신히 마사오카가 입을 열었다.
"노부치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그것조차 단호한 기노자의 말투에 막혔지만. 소리 없는 비명이 일순 스쳐 지나갔다. 둘의 관계를 모르던 츠네모리가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누구도 친절하게 부가설명을 해 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노력했어요."
"……."
"하지만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누가…?"
마사오카는 반사적으로 물었으나 그의 시선은 이미 기노자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저를 꼭 닮은 눈매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운드 1은 가볍게 왼팔을 들어 흔들었다. 강철의 팔과 집행관 디바이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더 이상 휘둘리는 것도 지쳤어."
아버지도, 코가미도, 마키시마도 시빌라도. 노력해도 안되는 건 안돼요. 미래를 들었어. 그 미래에서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고, 애꿎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내 육신을 잃어버리지. 그건 너무…….
"나는 이게 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츠네모리."
지쳐 질질 끌리는 기노자의 목소리 위에 또 다른 기노자의 목소리가 덮였다. 평소의 기노자에게서 들을 수 없던 평온한 목소리가 도리어 불길했다.
"어째서 미래의 내가 여기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운명이 내게 내민 마지막 자비가 아닐까 생각해. 마지막 타협인 거야. 기노자는 달래듯 말하고 있었다. 누구를 달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츠네모리? 여기 있는 모두? 자기 자신?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불현듯 한 가지 사실만이 명징하게 코가미를 강타했다.
"도망치는 거냐, 기노? 나를, 톳상을, 모두를 버리고? 후생성의 중심이 되겠다던 네 꿈도 의지도 모두?"
생각으로 정리하기도 전에 코가미의 입에서 날것의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그래."
그러나 코가미가 기대한 반응은 아니었다. 한순간 날카롭게 번뜩이던 두 명의 기노자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이대로 가면 어차피 잠재범 확정이다."
"아직 기회는 있어!"
"너에게도 기회가 있었지, 코가미."
그 말에는 코가미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기노자의 문장이 3년 전의 어느 날을 더듬고 있음을 코가미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전에 선택하는 거다. 이게 내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니까."
"사랑했어. 너도, 아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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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Z26] 코우기노 신간 수량조사 안내(~8.18)
8월 23일(일) D.FESTA(동네페스타) Z26 '선셋팸'에서 판매하는 PSYCHO-PASS 코우기노 소설 'YURI YURI YURI'의 수량조사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수량조사 기간은 8월 18일까지이며 상세 안내는 다음과 같습니다.
YURI YURI YURI /코가미 신야X기노자 노부치카/B6 떡제본/60페이지 내외(미확정)/5~6000원(미확정)
본편 1기 센구지 토요히사 에피소드 이후로 진행되는 IF 설정으로 하나하키(짝사랑을 하면 꽃을 토하는 병) 소재를 차용합니다. 연애와는 거리가 먼 전개, 본편과는 별개의 에피소드(백합요소 포함) 등장, 사망 소재를 포함하므로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신중히 생각해 주시고, 구매 의사가 있으신 분들은 해당 폼을 작성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량조사 폼은 이 쪽! ☞ http://durl.me/9k3k5n
▼Sample
“기노 상. 그거 시끄럽거든요. 차라리 얼른 진찰이라도 받고 오든가.”
잔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아 카가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 소리 뱉었다. 말이 좀 거칠긴 해도 정말로 시끄러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안다. 평소 같으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일갈할 기노자도 얌전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도 그 쪽엔 동의합니다. 너무 오래됐어요, 감시관.”
“조만간……가, 긴 할 거니까. 일단…은 상황.”
자꾸만 잔기침이 나와 기노자의 말이 끊겼다. 참으려다가 되려 더 심해져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계속 기침을 해대는 기노자의 태도에 카가리와 쿠니즈카는 한 번 눈을 맞추고는 고개를 젓고는 재현 홀로그램을 켰다.
“뭐, 보시다시피.”
“보고서와 크게 다를 바는 없네요. 현장도 이게 다고.”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유리 온실 바닥에 감색 교복을 입고 쓰러진 소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기숙사제 여학교에서 의문사한 열 여섯 살의 사체였다.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카락, 입술에 말라붙은 피가 묘하게 생생한 색이라 잘 만들어진 밀랍 인형 같아 보였다.
실제로는 아예 틀린 말도 아니려나.
카가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고서를 훑었다. 사체가 발견된 것은 그저께 오후. 사망자와 같은 원예부였던 동급생이 2주간의 동계 방학을 마치고 이틀 뒤, 화분 상태를 보러 왔다가 발견하고 즉시 선생님을 불렀다. 사인은 심정지, 특이할 만한 외상없음. 장내 출혈 다수. 입가에 토혈한 흔적이 있었고 폐 안에도 피가 고여 있었다. 사망 시각 추정 불가.
교내의 화상 기록을 확인한 결과 마지막으로 찍힌 건 방학 셋째 날. 밀랍 인형이란 카가리의 비유가 틀린 말도 아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2주가 지난 사체는 딱딱하게 굳어 부패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플라스티네이션.
처음 보고서를 받은 1계의 머릿속에 스쳐간 것은 모두 같았다. 아마 신고한 학교 측도 다른 생각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이제야 형사과로 넘어온 데에는 간신히 엊그제 보고서를 넘긴 오소 학원 연쇄 살인 사건 탓이 클 것이다. 오브제로 장식 된 소녀들과 비슷한 형태의 사망이라면 한 번쯤은 동일범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플라스티네이션…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담배를 지져 끄며 카라노모리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수치들과 몇 장의 사진들이 연달아 커다란 모니터를 가득 메웠지만 카가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일단 피부 조직에 약품이 하나도 묻지 않았거든. 실제로 신체 조직 어디에서도 특기할 만한 화학 성분 같은 건 검출되지 않았고.”
제 아무리 기적적으로 플라스티네이션 처리 시간을 앞당기는 마키시마 쇼고의 약품이라도 사체를 담그지 않고서는 말끔하게 사체를 경직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자세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부위 별로 경화된 시기도 제각각에… 보통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말단조직부터 경화되기 마련인데 이번은 내장부터 시작한 것 같단 말이지.”
봐봐. 그렇게 말하며 카라노모리가 휠을 돌리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굳은 폐 사진이 확대되었다. 카가리는 얌전히 그 날 먹으려던 스테이크를 포기했다.
“이것도 오료 리카코의 짓일까요.”
예의 약품이 검출되지 않은데다 사체들이 기묘한 오브제가 되어 전시된 것도 아니니 동일범의 소행일 확률은 낮았지만 그렇다고 쿠니즈카의 머릿속에 다른 대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오료 리카코는 행방불명 상태로 오소 학원의 지하도를 따라 도망쳤다. 그 길로 폐기구획으로 들어갔거나 혹은 가두 스캐너를 피해 돌아다닐 길을 확보했다면 도쿄 언저리에 있는 이 학교까지 오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아니.”
나노드론이 온실 내의 모든 샘플을 수집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의외의 단호한 대답이 돌아와 쿠니즈카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감시관은 유리 온실 한쪽에 기대서서 한 구석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기침은 간신히 멎은 모양이었다.
“감시관?”
기노자는 말이 없었다. 쿠니즈카도 그의 시선을 좇았다. 정리되지 않은 도구들, 시든 나무, 먼지 쌓인 화분, 말라 부스러지는 흙바닥, 아무리 겨울이라 해도 이제 막 두 시를 넘긴 참인데도 내부는 어둑하게 그늘져 자세한 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입구 근처 듬성듬성 놓인 화분들만이 아직까지도 사람이 드나들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기노자는 골몰해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노자 감시관?”
쿠니즈카가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흔들 때까지 기노자는 쿠니즈카의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화들짝 놀라 "어. 아." 같은 의미없고 반사적인 소리를 뱉는 기노자에게 쿠니즈카는 아까의 화두를 다시 한 번 끄집어냈다.
"역시 피곤하시면 병원을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근무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면 차라리 지금……. 제 안위보다도 일이 더 중요한 기노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부러 냉정하게 말하면 기노자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쿠니즈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경 프레임 너머의 눈동자가 혼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 보이지?"
"뭐가 말인가요."
쿠니즈카가 반문하면 기노자는 또 저 쪽을 넌지시 쳐다보다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는 일어났다. 설명조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기노자를 쿠니즈카는 쫓아갔다. 버려진 온실의 끝. 무성한 잡초들과 끈질기게 생을 연명하는 낮은 나무들을 헤치고 나아가던 기노자는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여학생들은 원래 이런 데를 좋아하나?"
"사람은 원래 적당히 좁은 곳을 선호하는 법이니까요."
다른 곳과는 달리 성인 남성이라면 둘이 겨우 몸을 누일 만한 공간이었다. 읽다 만 책, 곰인형, 초콜릿 포장지, 10대의 여학생들이 아지트를 만든다고 하면 이런 모양인 듯 했다. 기노자가 쭈그리고 앉아 얼핏 바닥에 깔린 이불을 들추어보면 땅은 평평하게 골라져 있었고 위로 올라올 습기와 냉기를 막아줄 비닐로 한 번 덮여 있었다. 제법 철두철미했다.
“원예부는 이거 말고 주로 쓰는 온실이 따로 있겠지?”
“학교가 오래 돼서, 이미 10년 전에 신축한 온실이 따로 있습니다. 여긴 아예 버려져서 출입 통제 같은 것도 없었고 교내에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라는 모양이에요.”
“알지도 못하니 다른 사람이 올 리도 없고, 동아리라는 형태의 조직이 있는 이상 대대로 ‘비밀장소’로 공유될 확률은 높군. 원예부와 피해자의 교우 관계를 조사해 보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여학생 심문은 자신이 없는데.”
나노드론이 새롭게 추가된 현장을 스캔한다. 초콜릿 포장지나 책에 묻은 지문을 분석한다면 이 아지트를 공유한 사람들이 누군지는 금세 밝혀진다. 라텍스 장갑을 끼고 증거물들을 조심스럽게 잡아 비닐봉투에 넣는 기노자의 얼굴엔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진심으로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딱딱하고 차가운 인상인지라 상대방이 여성일 경우엔 단순 참고인이라도 심하게 위축되어 기노자는 결국 2계의 아오야나기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츠네모리 감시관에게 맡기면 되잖아요?”
예전에야 1계에 감시관이라곤 기노자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명백하게 다른 감시관이 존재하는 데다 아직도 햇병아리인 스물이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갖고 있다. 아오야나기 감시관과 비교한다 해도 – 그녀에겐 좀 실례되는 표현일 수 있으나 – 온 몸으로 딱딱한 직책에 있는 무서운 언니라고 말하는 그녀보다야 저와 비슷한 또래에 둥글둥글한 인상의 츠네모리라면 상대방도 마음을 터놓을 확률이 컸다.
“아니, 그건 안돼.”
“왜죠?”
“그녀는 일단 병가 중이고.”
“곧 돌아올 텐데요.”
츠네모리의 일주일 짜리 병가 중 남은 기간은 앞으로 사흘이었다. 일련의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이후 기노자는 그녀에게 휴가를 권했다. 의외로 강경하게 버틸 줄 알았던 츠네모리는 애써 산뜻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미리 써둔 휴가계를 올리고 순식간에 사무실을 나서는 츠네모리의 뒷모습에 카가리는 혀를 내둘렀고 쿠니카도 감탄했으나 기노자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경험으로 비롯된 경우의 수는 기노자의 안에 불안의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고 있었다.
참고로 말하면 기노자의 아픈 경험이 되었던 그 사람도 웬일로 병실에서 얌전히 독서나 하고 있었다. 쿠니즈카와 카가리, 마사오카가 나란히 병문안을 갔을 때는 조금 하얗게 질린 얼굴이긴 했어도 지극히 태평했다. 드디어 내내 쫓던 ‘마키시마 쇼고’의 증거를 잡았다는 흥분감 탓인지 코가미는 묘하게 들떠 보이기도 했다. 그런 코가미에게 질려 쿠니즈카는 그 뒤로 다시는 가지 않았지만, 의무국으로의 병문안을 핑계로 자주 사무실을 이탈하는 카가리가 건네주는 소식으로는 아주 평화롭고 지루한 회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고 해도 안돼.”
“이번 건이 마키시마 쇼고와 관련이 있을까봐 그런 건가요. 그렇다면 오히려 츠네모리 감시관과 코가미 집행관의 도움을 받는 게…….”
“그 때문이다. 이 사건이 마키시마 쇼고나 오료 리카코와 연관되어 있을 거란 확률은 극히 드물어. 오히려 쓸데없는 선입관으로 수사에 혼선을 줄 가능성도 있어.”
“반대입니다, 감시관. 아까도 그랬지만, 아직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감시관은 오히려 이 사건이 그들과 관련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혹시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아까?”
“제가 오료 리카코의 짓일까, 하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답했잖아요.”
쿠니즈카는 똑바로 기노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쿠니즈카와 몇 초 동안 마주쳤던 시선이 이내 버티지 못하고 눈꺼풀 밑으로 숨는다. 눈은 마음의 창. 기노자는 의외로 알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표정이나 행동에 감정이 그 때 그 때 드러난다. 그것도 안되면 눈을 보면 된다. 기노자는 직선적이라 시선을 마주치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게 전부 보였다. 본인도 분명 잘 아는 사실이다. 기노자는 그래서 숨겨야 할 일이 있다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리깐 눈동자, 아니, 이번엔 보고 있어도 쿠니즈카에겐 그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 않던 사람이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스레 묘한 불안감이 쿠니즈카의 목덜미를 스쳤다.
“…기억 안 나.”
시선을 피한 기노자가 택한 것은 결국 별 당위성도 없는 단순한 회피였다. 기노자가 무언가를 숨긴다고 해봤자 프라이버시와 관련되어 있거나 윗선에서 묵인하는 것들이다. 그건 쿠니즈카 개인이든 감시관의 개인 집행관의 위치에서든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는 분야다. 쿠니즈카는 더 이상 기노자에게 캐묻기를 그만두고 화제의 방향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감시관. 그럼 참고인들과의 대질심문은 직접?”
“혹시 모르는 때엔 부탁하지, 쿠니즈카.”
그렇게 강경하게 츠네모리는 안된다고 말해도 역시 여학생은 불편한 모양이었다. 저보다 한 뼘이나 큰 키가 작게 수그러드는 것을 보면서 쿠니즈카는 속으로 웃었다.
모든 증거품을 드론에 챙겨 넣고 기노자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약간의 흙먼지에 잊고 있던 기노자의 기침이 다시 쿨럭쿨럭 튀어 나왔다.
“그리고 병원은 꼭 가세요.”
“알고 있어.”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기침을 멈추지 못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기노자를 모른 척 하고 쿠니즈카는 먼저 온실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한 쪽에서 나노드론들이 꼬물꼬물 움직여 회수되는 걸 지켜보던 카가리가 안에서 나오는 쿠니즈카를 보고 손을 흔든다.
“오, 거기 있었어? 난 어디 갔나 했네.”
“저 안 쪽에서 뭔가 발견돼서.”
“뭐?”
“귀여운 러브 하우스.”
그게 뭐야? 뭔 뜻인데? 농 섞인 말을 카가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묻는 것을 쿠니즈카는 가볍게 무시했다. 자세한 건 보고서 봐. 엑? 그게 뭐야, 지금 알려줘. 나도 볼래. 쿠니즈카를 조르다 안될 것 같은지 카가리는 안으로 직접 들어가려 했지만 그 순간 기노자가 나왔다.
(중략)
처음엔 치자꽃이었다.
제 손바닥에 놓인 새하얀 치자꽃을 얼마나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집에 갈 즈음엔 벌써 길고 긴 여름 해가 다 저물어 어둑해지는 시점이었다. 시기야 맞았지만 기노자의 뒤에 있던 것은 단풍나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꽃은 제 입에서 나온 게 맞았지만 반대로 입에서 꽃이 나온다는 것도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다. 환각인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볼을 꼬집어 봤다. 잊고 있던 턱의 욱신거림이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아팠다. 눈꼬리에 눈물이 찔끔 맺혀 흐릿한 상에서도 백색의 꽃은 또렷하게 빛났다. 부드럽고 여린 꽃잎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기노자는 일단 그 꽃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기노.”
손바닥을 간질이는 꽃잎이 신경쓰여 내내 시선을 아래로 숙이고 곁눈질하며 걷던 기노자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코가미?”
기노자는 화들짝 놀라 안경을 치켜 썼다. 오늘따라 자꾸 이상한 것만 보인다. 양 손으로 두 눈을 비벼 봐도 기노자의 맨션 문 앞에 험악한 인상으로 서 있는 코가미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어쩐 일이야?”
코가미가 기노자의 맨션에 놀러온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지만 그 때는 늘 기노자가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기노자는 이 상황 자체가 낯설어 어쩔 줄을 몰랐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 같은 상투적인 대사도 코가미가 문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데다 노려보는 코가미의 시선이 사나워 눈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표정만 보면 분명 기노자에게 화가 난 것 같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게 없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오늘 점심.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슬슬 기말 고사가 다가와 수업 얘기를 잠깐 하고 노트를 교환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잊어버리고 있던 세미나 일정 때문에 메일을 보낸 게 오늘 코가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설마 이게 코가미에겐 상처였을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별 다른 일이 없다면 기노자와 코가미는 같이 하교했으나 둘 다 학회 활동은 하고 있었다. 학회 활동이 졸업 필수 요건이라 억지로 참여하고 있는 기노자와는 달리 코가미는 공식적으로는 하나만 이름을 올리고 있어도 여기저기 불리는 곳이 많았다. 덕분에 바람 맞은 횟수로 치자면 기노자가 훨씬 더 많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자 기노자는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제가 무얼 잘못했다고 코가미에게 이런 이유 없는 분노에 찬 시선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바로 들고 기노자는 완강한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뭐야, 코가미.”
기노자의 이를 악문 대꾸에 코가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의 시선을 몹시도 신경 쓰는 기노자가 용케 여기까지 걸어왔다 싶은 몰골이었다.
“안 아파?”
코가미는 살짝 기노자의 뺨에 손을 올렸다. 한 쪽 턱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일 정도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어있고, 입술엔 희미하지만 말라붙은 핏자국도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마른 입술의 핏자국을 살살 지우면서 코가미는 입을 연다.
“메일 확인 안했지?”
기껏 마음먹고 받아치니 급작스레 누그러진 분위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기노자가 “어?”하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단말기를 꺼낸다. 어차피 알고 물어본 거니 대답은 듣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시험기간이고 해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답장이 없더라. 잠깐 조는 바람에 시간이 훅 지나서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세미나는 이미 끝났다고 하고, 전화도 안 받고. 잘 돌아갔다면 좋겠지만 혹시 싶어 집에 왔더니 집도 비어서,”
부드러운 코가미의 목소리엔 걱정이 잔뜩 배어있어 기노자는 당황스러웠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화가 난 건가 아니면 걱정 하는 건가?
“걱정했어, 기노.”
“방금 전까진, 화, 내고 있었잖…아?”
말을 하면서도 확신이 없어 말끝이 흔들린다. 초조한 마음에 대한 보상처럼 가끔 걱정이 상대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가 되는 경우를 기노자도 안고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걱정 같은 것보다 분노밖에 안 남는다는 사실도. 그걸 감안하더라도 방금 전의 코가미는 무서울 정도였다. 괜스레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자락에 문지르며 기노자는 아리송한 얼굴로 코가미를 쳐다보았다.
“화가 난 건 너한테가 아니고, 나한테.”
말로 하지 않았는데도 코가미는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답한다. 기노자는 간혹 코가미의 이런 점이 신기했다. 기노자는 보고 있는 것만으론, 말을 해도, 코가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정할 수 없는데.
“도서관에서 졸지 않았으면,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잖아.”
“아니 이건 네 잘못도 아니고 내가—”
“네 잘못도 아니지.”
코가미는 기노자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낸다. 느슨해졌던 공기가 다시 팽팽해졌다. 오늘따라 기노자에겐 코가미의 분위기를 읽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굴리는 기노자를 보며 코가미는 일부러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모처럼 여기 온 김에 너희 집에서 저녁 좀 얻어먹어도 되냐?”
“어? 아 물론.”
“그럼 문 좀 열어줘.”
코가미가 씨익 웃으며 장난스럽게 문을 가리킨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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