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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페온/DOMINATOR TARGET:ON] 신간 및 구간 위탁 수량조사 안내
1월 31일 동네온리페스타/DOMINATOR TARGET:ON 에 지난 케이크스퀘어 구간 및 코우기노 신간을 위탁하게 되었습니다. 부스 위치는 A1입니다.
수량조사 기간은 1월 30일까지. 수량조사 폼은 이 쪽 ☞ http://durl.me/853bza
더불어 같은 부스에서 기노시온 4p 단편을 배포할 예정입니다. 기노자랑 시온이 그렇고 그런 짓을 하지만 결코 바람은 아닌... 그런...관심 있으신 분은 한 부씩 가져가주세요ㅠ
1. 너를 사랑하지 않을 권리/코우기노/A5/중철/32p/3000원
현재 절찬 원고 중입니다
역행 소재 포함, 고등학교 시절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역행 소재로 인하여 캐릭터 설정 및 상황이 공식과는 약간 다를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Sample
1.
“…미안하군.”
전면이 유리로 된 카페테리아에는 햇살이 그득하다. 눈이 부셔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게도 너를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줘.”
푸념처럼 한숨 섞인 말을 내뱉은 상대는 무심하게 다 마신 유리잔의 얼음을 씹어 먹는다. 잔을 쥔 손가락의 마디가 오늘따라 두드러져 하얗게 빛난다. 와작, 하고 얼음 깨지는 소리도 유달리 크다. 차가운 얼음에 발갛게 젖은 혀가 한 번 입술을 훑는다. 시각과 청각이 유독 한 부분만을 기이하게 확대시켜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모든 건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워졌음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뭣하나.
“오늘은 이만 일어나보지. 오후엔 일이 있거든.”
상대의 오후 일과는 애완견과의 산책이다. 그 정도는 코가미도 기억하고 있다. 너무 배려 없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면서도 코가미는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한 채 얼빠진 상태로 손까지 흔들며 배웅하고 말았다.
혼자가 되고 나니 그제야 목이 탔다. 물론, 어울리지 않게 잔뜩 긴장한 나머지 음료는 진즉 다 마신 상태다. 하릴없이 스트로만 빨아대다 상대처럼 얼음을 입에 털어넣고 씹는다. 와작와작 소리와 함께 입에서 부서져 갔다. 두어 개를 연거푸 씹어 넘기고 나서야 겨우 자각이 든다.
“나… 차인 거지?”
상대 없는 말에 대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대답 대신 달그락 하고 녹아가는 얼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반짝반짝 빛나며 미끄러진다.
코가미 신야, 17. 연애경험 다수. 한 번도 원하는 것을 놓쳐본 적 없는 남자는 일생일대의, 심지어 기념비적인 첫 고백에서 깨끗하게 차여버렸다.
2.
코가미도 귀가 있으니 들은 바는 있다.
올해 신입생 중 잠재범의 아들이 있다고 한다. 학기 초의 서먹한 분위기를 날리려면 원래 적당한 화젯거리가 필요한 법이었다. 연예인이나 음담패설, 혹은 험담할 거리 같은 거 말이다. 서로 어색하게 이름이나 주고받고 메일주소나 찍다가 누가 그런 얘기를 꺼냈던 건지, 삼삼오오 둘러 하던 대화가 점점 커져 어느 새 교실에선 큰 소리가 나고 있었다.
진짜? 진짜라니까. 도쿄에선 소문나지 않았냐. 아, 2중에 있단 소리는 들어봤지. 나 잠재범 가족은 처음 보는데 그거 괜찮은 거냐? 여기까지 왔는데 밥맛 떨어지게. 적당히 꺼져주면 안되나. 눈치가 있음 진즉 그랬겠지. …….
사립 닛토 학원은 두 세기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고교다. 단순 성적으로 도입되던 시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직업적성고사가 도입된 이후에는 사이코패스나 인성 같은 변수가 생겼는데도 닛토 학원의 졸업생들은 중앙 13성청 6공사에 적합 판정이 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의원이나 고위 관료의 약력을 훑으면 80%의 확률로 닛토 학원이 이름이 있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도쿄, 가나가와 등의 간토지방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미래의 엘리트 후보생들이 하기엔 수준 낮은 잡담이었지만.
“코가미, 너는 본 적 있냐?”
멀찍이 떨어져 책이나 읽고 있던 코가미의 어깨를 누군가 툭 친다. 방금 전 메일 주소 정도는 교환했던 것 같은데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글쎄. 잠재범의 아들이라고 해도 뭐가 다르진 않을 테니까.”
“하긴. 사이코패스는 깨끗하다던데.”
“이름이 뭔데?”
이름? 어이, 걔 이름이 뭐라고? 이름도 엄청 특이해. 읽기도 어렵잖아. 뭐라더라, 기노, 기노자…….
책을 덮고 막 이름을 들으려는 찰나에 교실에 벨이 울리고 이윽고 입학식을 진행한다는 방송이 들리기 시작한다. 우르르 일어나는 사람들을 따라 코가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어색한 교복을 입은 무리들에게선 묘한 설렘과 기대감, 긴장이 묻어난다. 방금 전까지 왁자하게 떠들던 소리 대신 복도에는 몇백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는 발소리만이 요란하다. 강당으로 이동하는 인파에 휩쓸려 코가미도 ‘잠재범의 아들’이라는 존재를 곧 잊어버리고 말았었다.
그 뒤로도 이야기는 종종 들었으나 코가미가 얼굴 볼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게 닛토 학원은 한 학년이 500명 이상, 부지도 인근 고등학교보다 훨씬 큰 데다 같은 학과라도 전공 수업이나 과모임 외에는 마주칠 일이 없다. 학과가 다르면 주요 강의실 건물도 다른 법이니 마주칠 확률은 더욱 희박. 다만 ‘잠재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소년이 코가미는 가끔 불쌍했다. 잠재범의 가족이라고 해도 그 자신의 사이코패스가 깨끗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만약 그 아들이 어느 날 잠재범이 된다고 하면 그건 수군대는 학생들 탓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 뿐이었다. 코가미 신야는 한가하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할 정도로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렇게 마주치기 전까지는.
전자서적이 당연시 여겨지는 현대 사회에서 종이책은 무겁고 관리도 불편한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책을 읽는다고 하면 보통은 늙은 교수나 학자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코가미는 어릴 때부터 종이책에 익숙했다. 어머니는 학생시절에 모아 둔 서적들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다락방에 보관하고 있었다. 취향은 사회과학서와 소설, 평론, 시집 등 장르를 막론하지 않았다. 오래 된 책에서 나는 먼지 냄새와 누렇게 빛바랜 낡은 종이를 넘기며 텍스트를 읽어 내리는 감각은 그 자체로도 리듬이 된다. 가만히 액정 화면을 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보다 반복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편이 훨씬 집중하기도 쉬웠다. 첫 중간고사에서도 전 학부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적이 좋은 코가미였지만 이 학원에 지원한 이유는 명문 고교라는 타이틀 때문이 아니다. 오래된 연혁을 가진 학교답게 진짜 ‘책’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 맘에 들어서였다.
그런 구舊 도서관은 학교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출석도장이라도 찍듯 매일 드나들어도 코가미 외의 타인을 본 적은 손에 꼽았다.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느 순간부터는 적막해져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코가미의 발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목소리로는 하나, 둘, 셋, 그 이상. 단순한 말싸움만은 아닌 것 같아 걸음을 옮기면, 생각 외의 난투극이었다. 5대 1.
엄청 비겁하잖아. 그런 생각이 들어 코가미가 가방을 내려놓는 찰나, 한 명의 주먹이 정확하게 상대의 턱 아래에 꽂힌다. 무방비 상태로 턱을 얻어맞은 상대는 그대로 K.O.. 안되겠다 싶었는지 가슴 밑으로 달려드는 한 명을 그대로 차버린다. 정확하게 옆구리에 꽂히는 니킥. 나설 새도 없이 코가미는 깔끔한 동작 하나하나에 넋을 놓았다. 근력이 떨어지는지 들어가는 힘은 약했지만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옆에서 달려드는 상대의 목깃을 잡고 그대로 힘의 반동을 이용해 엎어치기하는 부분에선 감탄할 지경이었다. 저건 아마 유도다. 다섯 명 중 셋이나 그대로 나가떨어지니 남은 둘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뭐야, 잠재범의 자식이라더니 역시 이런 녀석이었잖아.”
“지금까진 꼼짝 않고 맞고만 있더니 그냥 포기한 거냐? 이대로 의료시설에 끌려가 버리면…….”
잠재범의 자식. 그 한 마디가 코가미를 사로잡는다. 그 소문의 동급생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시끄럽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번엔 명치를 가격. 고통에 상체를 구부린 상대를 끌어안고 무릎으로 확인사살. 처음엔 분명 저 쪽을 도우려고 했던 거 같은데, 외려 이번엔 말려야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어이, 어차피 안 될 것 같은데 계속 할 거야?”
(후략)
2. (un)do/기노자 중심소설/A5/중철/32p/3000원
▽Sample
언어의 섬세한 용례와 다양한 범주는 빈도에 기인한다. 당신은 말없는 생활에 익숙했다. 아홉 살 이후로 발화의 대상이 지극히 한정되어 버린 당신의 어휘는 빈곤해진다. 타이핑되는 형식적인 보고서와 윗사람에 대한 예의바른 존댓말, 동료에게 건네는 사무적인 대화와 사냥개를 다루는 엄한 주인으로서의 지시. 그 외에는 별다른 관계 속에서 말해 본 적 없는 당신은 그래서 새로운 위치에서의 언어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연습했다.
잠긴 방 안에서 당신은 소리와 어둠을 삼킨다. 오랜만이라며 인사한다. 썩 오랜만은 아니었다. 밤은 매일 있었다.
불야성의 도시를 암막으로 덮고 밤이 평온했던 날에는 침대에 누워 당신은 잠드는 대신 귀를 기울였다. 먹어치웠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 냉장고가 웅웅대는 소리, 누군가 복도를 걸어간다. 문이 열렸다, 닫힌다. 친구에게 말을 건다. 전화를 한다. 그녀는 지금 애인과 싸우고 있다.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먹어치우면 어둠이 낮게 낮게 내려온다.
당신의 색상은 지금 어떤가요?
언젠가 보았던 바다를 기억해보려 한다. 반짝반짝 빛나던 파우더 블루. 그러나 기억나는 건 오로지 석양으로 물든 수평뿐이다.
오늘도 색상 유지에 힘씁시다.
어딘가 기계음이 남는 소리는 매일 아침 듣는 것의 잔상이다. 마침내 눈앞에 어른거리던 다크 오렌지도 사라진다. 어둠과 고요와 적막이 내려앉는다. 무의식중에 들이쉬는 숨마저 크고 당신의 심장이 미약하게 목 밑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난다.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이미 괴물은 있었다. 그는 언젠가 당신을 잡아먹는다. 당신은 직감했다. 당신의 심장마저 먹어치울 것이다.
점점 희미하게 멀어지는 심장소리에 당신은 목깃을 움켜쥐었다.
“싫어―!!!!!”
한여름, 그것은 열네 살의 당신이 열흘 만에 처음으로 내뱉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소리가 살아났다. 빵빵대는 차소리. 그녀는 애인과 화해했다. 팬이 맹렬하게 돌아간다. 냉장고 안의 물은 내일도 섭씨 삼도를 유지할 수 있다. 당신, 열넷, 무릎이 부서질 것 같은 성장통에 시달리는, 노부치카, 한 때는 마사오카라는 성을 가졌던, 이제는 아득히 먼 섬 같은 활자의 이름을 가진, 나.
쥐어짜듯이 소리쳤다. 나는 살 거야! 살 거야! 살아서, 어른이 돼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나, 당신. 너무 어렸던, 아직도 어린,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는 이제 어른이 된 걸까.
컹- 잠에서 깬 개가 한번 짖는다. 식은땀이 흐르는 축축한 손으로 만진 개의 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당신은 그것이 환상임을 안다. 당신에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을 써보는 건 어떻습니까.”
악화된 범죄계수에 당신은 이제 별 관심이 없다. 근육과 뼈째로 짓뭉갠 팔은 아무리 거창한 현대기술이라 해도 온전히 되살리기 힘들었다. 어정쩡한 것으로 빈 칸을 채우기가 구차하여 당신은 일부러 누가 봐도 티가 나는 의수를 골랐다. 다시 갖고 싶은 맘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었기에 헛된 희망을 갖지 않기 위함이었다.
“제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압니다, 선생님.”
의무적으로 할당되는 2주의 교정 면담을 당신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해야 한다면, 조금 더 편하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래요. 한 번 악화된 범죄계수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도 힘듭니다. 이것도 다음 한 번이 마지막이고, 당신은 재활이 끝나면 곧바로 교정 시설에 입소하게 될 겁니다.”
“솔직하시네요.”
“기노자 씨는 원래 감시관이었으니 잠재범에 대해선 저희만큼 잘 아시겠죠. 다만, 아무리 잠재범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갖는 건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다면 글로라도 써보세요. 생각을 정리하면서 토해내는 겁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안 하시겠다는 말이군요.”
“무의미한 일에 낭비할 시간은…….”
거기까지 말하던 당신은 깨닫는다. 시간은, 이제 차고 넘쳤다. 당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대신하는 것처럼 당신에겐 당신 혼자 보내야 할 시간만이 즐비했다.
“아뇨. 시간만은 많네요.”
“예.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상담 시간 종료를 알리는 부저가 울린다. 짐을 싸고 나가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한 것을 마지막으로 당신에겐 또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온다.
결국 당신은 교정시설로 입소하고 다시 공안국에 돌아갈 때까지 단 한 번도 펜을 잡지 않았고, 필요하지 않다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삼키는 법은 알아도 뱉는 법은 몰랐다. 어둠만이 안녕, 하고 윙윙 사이렌을 돌리며 인사했다.
(중략)
현대문명이 고도화 될수록 인간은 동물의 감각을 잃어갔다. 동물의 본성, 결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도 구체화 되지 않는 추상의 본질은 야만이라는 단어로 퇴색되었고 냉정한 이지만이 추앙받았다.
그러한 이유로 문명의 발전은 생물학적 종의 진화가 될 수 없었다. 문명으로부터 기인한 의학의 발달이 아무리 놀랍다고 해도 동물적 감각만큼은 구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끊임없이 도태되어 갔다. 씹어야 할 것들이 부드러워져 가며 턱관절 뼈는 이전보다 훨씬 짧아졌고 근육은 약해졌다. 하이퍼오츠 단 한가지로 통일된 식생활은 소화기능의 저하를 불러일으켰고 관절의 연골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얇아졌다.
도태된 생체는 전부 기계가 대체했다.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은 기계가 인류를 압도하는 디스토피아를 끊임없이 상상했었다. 환경오염, 국가의 전복, 체제 붕괴 같은 거시적 관점은 차치하고, 미시적인 관점에서도 현대는 편의성이 극대화 된 고도 문명의 유토피아가 아닐 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라.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이성, 합리적인 판단과 사고는 철저하게 중립적인 ‘프로그램’으로 넘어갔다. 단순히 수식을 계산해주는 수준이 아니다. 처음엔 그저 ‘추천’이라는 미명 하에 에둘렀다. 그 날 입을 옷과 점심 메뉴, 그럴듯한 화제의 방향과 연애의 상대마저도 반쯤은 농담처럼, 반쯤은 진심으로 사람들은 컴퓨터에게 선택을 떠넘겼다. 합리성과 편리성을 빌미로 인간의 내면을 수치화하고 진로를 결정했다. 선택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 행위의 주도권을 서서히 침탈해 간 기계들은 이제 온전한 사회를 구성하는 완벽한 체제가 되었다.
시빌라 시스템. ‘신탁의 무녀’는 별칭에 맞게 진리를 결정하고 인간의 미래를 점지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전부 잠재범이란 죄수의 레이블이 붙여져 시빌라가 구성한 낙원에서 추방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에선 최소한의 자기 의지를 남기고 모든 인간의 의지가 배제 되었다. 한 때, 세계가 ‘세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때, 어느 독재국가에선 주체사상이라는 것도 있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 한다’. 정말로, 아득한 얘기다…….
“…라는 글을 읽었는데 어떻게 생각해, 기노?”
“대체 그런 건 어디서 읽은 거야.”
“아, 가끔 들어가는 격투기 동호회 커뮤니티.”
“헛소리면 제목 보고 읽지 마.”
“제목이 재밌어서 들어간 건데. ‘진화와 문명, 현대 일본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신고감이군.”
“내가 다 읽으니 벌써 삭제되어 있더라.”
그래도 재밌는 얘기 아냐? 코가미는 재차 기노자에게 동의를 구했으나 기노자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고 빵을 씹었다. 코가미의 일장 연설 속에 딱딱해진 빵은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굴렀다. 뚝 떨어진 입맛에 동하지도 않아 기노자는 기어이 반도 먹지 못한 빵을 내려놓았다. 일찌감치 카레우동 한 그릇을 흡입한 코가미는 기노자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 야 안 먹어?”
“차라리 새로 사줄 테니 그런 거 먹지 마.”
“아니, 버리긴 아깝잖아.”
그리고선 코가미는 냉큼 기노자의 빵을 뺏어간다. 이미 180cm라는 장신에 더 클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코가미의 식욕은 정말 쇠도 씹어 먹는다는 성장기의 비유 그대로였다. 가끔 기노자가 감탄하며 혀를 내두르면 코가미는 능청스럽게 기노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만큼은 커야지.
눈대중으론 비슷한데 지난 신체검사 때 기노자가 183cm를 찍은 걸 코가미는 묘하게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코가미가 기노자의 점심을 먹어치우는 사이 할 일이 없어진 기노자는 쥬스팩의 스트로를 빨아대며 멍하니 코가미를 바라보았다. 우적우적 먹는 꼴을 보아하니 본인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얘기였나 보다. 저질러 둔 본인은 마냥 태평한데 심란해지는 건 외려 기노자 쪽이다.
코가미는 종종 그랬다. 기노자가 절대로 하지 못하는 행동을 대담하게 했고 차마 생각하지 않는 부분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폐기구획의 고서점에서 금지된 서적을 사고 과거의 사회학적 이론들을 읽는다. 알려지지 않은 딥웹에서 자료들을 찾는다. 딱히 어떤 의지와 방향을 갖고 저지르는 일은 아니었다. 코가미는 그저 모든 것들에 관심이 있었고 모든 것들의 해답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맹렬한 호기심의 탐구는 인간에겐 당연한 행위이기에 코가미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시빌라는 이를 묵인했으며, 그래서 코가미의 사이코 패스는 언제나 깨끗했다.
하지만 듣는 기노자 입장에선 아무리 생각해도 조마조마한 얘기들뿐이었다. 신빙성 없는 자료들에 근거한 사회 비판론들은 흘려듣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만약 코가미가 저런 낭설을 진실이라고 믿고 잘못된 길을 걷게 된다면 제아무리 청명한 사이코패스를 유지하는 코가미라도 어떻게 될지…….
문득 심장이 누가 쥐어 잡는 것처럼 조여 안으로 꾹 말려 쪼그라든다. 저릿하게 말려왔다. 말단부터 싸해지는 감각이 아득하고 아찔하여 기노자는 순간 현기증이 핑 돌았다. 시야의 구석부터 스물스물 기어온 어둠 속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스쳐가는 빨간 빛이 보였다. 보이지 않아도 기노자는 그게 차량의 경광등임을 알았다.
“어이, 기노?”
기노자의 것보다 현저하게 뜨거운 코가미의 손이 기노자의 팔을 왈칵 붙잡는다. 잡은 손 모양새 그대로 피부가 맞닿은 부분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극명한 통증에 기노자는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 새 쥬스팩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고 기노자가 앉아있던 의자는 아까보다 살짝 뒤로 밀려 있었다. 찰나라고 생각했는데 그새 상체가 휘청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아니…….”
기노자는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아까보다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제가 먹은 게 기노자의 점심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자각한 코가미가 미약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이 기노자는 황급히 코가미의 손을 털어냈다. 언제 그랬었냐는 듯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욱신거리던 열감과는 달리 피부는 멀쩡했다. 다만 날카로운 고통이 아직도 기노자에게 메아리처럼 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보건실 가야 되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냐.”
“점심 안 먹어서 그런 거 아닐까. 다시 사줄까, 빵?”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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