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넵님 생일 리퀘로 3년 전에 받은 무나후시 데이트...인데 미완이고 도무지 끝낼 생각이 안 들어서
가을의 초입이었다. 여름의 끝자락이기도 했다. 습한 공기 속에서 찬 바람이 문득 어깨를 휘감았던 수요일 저녁, 무나카타 레이시는 후시미 사루히코에게 데이트를 제안했다.
"데이트… 말입니까?"
손에 쥐고 있던 쥬스팩이 구겨지며 주륵,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나카타는 뚝뚝 떨어지는 끈적한 것들을 티슈를 뽑아 닦으며 답했다.
"네, 데이트요."
저런, 후시미 군. 마시는 것보다 흘리는 게 많겠어요.그렇게 말하려던 무나카타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후시미는 쓸데없는 사족과 의미없는 발화를 싫어했고, 그의 의견에 따르면 무나카타와의 대화 중 80%는 그런 것에 속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는 상황 자체가 무나카타는 익숙하지 않았으나 무나카타가 내키는대로 말하고 나면 후시미는 아예 그와의 대화를 포기하기가 일쑤인지라, 확답을 받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나카타는 의사소통이 그런 식으로 방해 받는 것은 싫었고 - 본인이 하는 말엔 대답조차 필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 그러므로 하고 싶은 말을 아주 약간, 자제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나카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후시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손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쥬스를 한 번 핥아 먹고 끈적한 손가락을 보며 인상을 쓰고, 티슈를 뽑아 벅벅 문지르면서도 후시미는 무나카타를 마주 보지 않았다. 여전히 끈적한 손가락을 몇 번 오므렸다 펴고, 바닥에 떨어진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닦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탕비실에서 물티슈를 가져와 이번엔 바닥을 닦았다.
이제 슬슬 다시 물어도 좋겠다 싶을 즈음에 무나카타는 후시미를 불렀다.
"후시미 군?"
"…네?"
"대답은?"
한참을 망설이다 후시미는 제 뺨을 꼬집어 보고, 의자도 한 번 걷어차보고, 작업하던 컴퓨터의 전원을 그냥 날리려고도 해보다가 차마 거기까진 자신이 없었는지 모니터 전원만 매만지고는 만다.
"꿈 아닙니다."
"꿈 아니에요?"
"아니에요."
꿈이라고 믿고 싶으면, 전원 끄셔도 좋고. 무나카타의 제안에 후시미는 눈만 끔벅이다 고개를 저었다. 사흘 야근의 결과를 제 현실도피로 날려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나카타는 후시미 사루히코의 성실함을 몹시 사랑했고, 후시미는 그래서 단 한번도 무나카타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후시미 군, 대답은?"
*
진짜 데이트였나 보다.
"타세요, 후시미 군."
에에, 뭐. 어차피 같은 기숙사에 사는 마당에 약속 장소를 따로 잡고, 본인은 차를 끌고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조수석에 앉아 후시미는 하릴없이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렸다. 차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명목상 '실장'이니 월급은 꽤 많이 받겠거니 했지만 무나카타가 휴일에 무엇을 하는지 어딜 가는지는 일개 부하직원인 후시미가 알 도리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뭐, 지금은 '일개 부하직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후시미 군은 연애에 관심 있으십니까?
어느 날 실장님이 저를 실장실로 부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어서 후시미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보고 있노라면 무나카타는 검지로 가볍게 책상을 몇 번 두드리더니 말했다.
"아닌 모양이네요."
"당연히 아니죠."
"왜 '당연히' 아닙니까?"
정색하고 칼 같이 내뱉는 후시미의 답변에 무나카타는 의아하게 묻는다. 왜 '당연히' 아니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후시미는 딱히 누군가와 시간을 공유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타인과 교류하는 시간은 귀찮다. 피곤하고 품이 많이 든다. 관심사가 맞다고 해도 그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대화를 맞춰주는 것도 피곤했고 누군가와 단 둘이, 의식적으로 시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당연히'라는 말을 붙이기엔 확실히 어폐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후시미에게도 어찌됐든, 그런 사람이 있었던 사실은 확실하니까. 그게 '연애'의 종류에 들어가는지는 가늠이 어렵고 확답을 내릴 수도 없으며, 이미 지나간 얘기였지만.
"10대, 20대 초반이면 연애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왕성할 나이잖아요?"
"…그러는 실장도 제 나이 때 연애를 하진 않았잖습니까."
그래서 후시미가 택한 것은 역공이었다. 20대 초반, 25살을 기준으로 20대 중반이라 말한다면 무나카타도 아직 20대 초반이었다. 스물 넷. 후시미와의 나이 차이는 고작 다섯살이고 무나카타야 말로 후시미 주변에서 가장 연애와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무나카타 레이시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인다니, 상상하니 아와시마가 챙겨 주는 간식을 세 개쯤 주워먹은 듯 속이 무거워진다.
"했는데요."
그러나 무나카타에 관한 모든 추측이 단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후시미는 잊고 있었다.
"네?"
"해봤습니다, 연애."
"하?"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왜 헤어지셨어요?"
"어쩌다보니? 상대방한테서 연락이 안 오던데요. 흐지부지해지고, 삼개월쯤 지나서 한 번 보자고 연락이 와서 나갔더니 차였습니다."
"삼개월 동안 한 번도 연락을 안 하고?"
"네."
깔끔하게 떨어지는 대답에 후시미는 경멸 섞인 눈으로 무나카타를 바라보았다. 최소한의 교류도 할 줄 모르는 인간 같으니라고. 누군가 들으면 후시미를 그런 시선으로 보았겠지만 후시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차일만 하네. 그게 무슨 연애입니까. 보나마나 여자가 고백이라도 하고, 얼씨구 받아들이고 여자가 하는 말은 다 그러려니 끄덕끄덕했겠지."
눈에 훤히 보인다. 저 반반해 보이는 얼굴에 넘어간 여자가 소심하게 쪽지나 말을 건네고 무나카타 레이시는 쌈박하게 예스라고 했을 것이다. 받아들이는 쪽이 재밌어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미래의 풍경들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실현해가며 그런 정적인 광경만을 만드는 게 무나카타 레이시의 연애라고, 후시미는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후시미의 말에 한참을 숙고하던 무나카타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비슷하긴 하네요."
"거봐, 결국 실장도 관심 없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웬 연애입니까? 누구 소개 시켜주게? 그거 히다카 시켜요. 그 쪽은 연애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니 사진도 안 보고 좋다고 받아들일걸?"
"아뇨, 히다카 군은 안됩니다."
"왜요."
"제가 할 거거든요."
?
후시미는 그게 무나카타가 저에게 물은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애 조언을 구하고 싶은 거라면 카모에게… 아니, 이 쪽은 실패자니 안되나. 그럼 아키야마라든가 벤자이에게 물어보십쇼. 벤자이는 누나들이 잔뜩이라고 하니 여성 심리는 탁월하게 잘 알거든요."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연애를 하고 싶은건데요."
"그러니까 조언을 구하는 거면……."
"후시미 군과."
"네?"
"제가 하고 싶습니다 후시미 군과 연애를."
"아니, 그런 영문법 순서로 말하지 마시고."
"후시미 군과 사귀고 싶습니다."
…머리로 먹은 아와시마의 팥 한 스쿱 얹은 화과자가 기어이 탈을 낸 모양이었다. 뇌가 체하면 이런 느낌인건가. 꿈에서도 들을 것 같지 않은 헛소리도 들리고?
"별로 안 내켜할 거란 거 압니다. 상상도 못 했겠죠. 상사와의 사내연애라니 아무리 후시미 ㄱ…."
"에… 님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상상 못한 거 아닙니다."
이 미친 사람. 후시미는 진저리를 내며 손을 저었다. 자화자찬도 이 정도면 이 세상 수준이 아니다. 난 여기서 나가야 겠어.
"상사의 말을 끊고 나가는 태도는 그리 귀감이 못 됩니다, 후시미 군."
…안되잖아? 후시미는 언제 잠겼는지 덜걱대는 문 손잡이를 흔들어댔다. 분명 이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저고, 닫고 온 것도 저인데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시미의 직속상관은 언제나처럼 평이한 어조로 말을 걸고 있었지만 어쩐지 등이 타들어가도록 따가워 후시미는 애써 태연한 척 문고리를 쓰다듬은 채 다시 무나카타의 책상 앞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뭐 새삼. 애초에 절 귀감으로 삼을 사람도 없고."
"일단 얘기는 계속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후시미 군. 이건 일종의 제안이거든요."
"보통은 사랑 고백을 ‘제안’이라고 하진 않는데요."
"전 고백한 적 없는데요."
무나카타의 말은 점점 미로 같았다. 아까부터 자꾸 빼놔 이젠 들어온 적이 있었나 싶은 정신머리는 또 한 번 이야기의 흐름을 놓쳐, 후시미는 멍청히 무나카타를 바라보다 되는 대로 내뱉었다.
"뭐요 그럼…거 연애를 하자는데 고백은 아니면."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펴서 흔들다가
"그… 이게 아니고 이런, 거 하자구요?"
왼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원을 만들고 오른손 검지를 넣었다 빼는 후시미의 얼굴은 제가 말하면서도 끔찍한 걸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원합니까?"
"미쳤나."
대답은 반사적이었다.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후시미는 정말로, 진심을 담아, 식겁해서 혀를 찼다. 동성 연애에 편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실장과 하는 건 에…그……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섹스가 아니라 직장 이지메 같은 느낌이잖아? 차라리 굳이 한다면 아키야마랑……. 거기까지 생각하던 후시미는 애초에 이딴 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상을 깨끗이 발로 밟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것도 아니면 대체 뭡니까?" "후시미 군은 만만하니까요."
"네……?"
"눈치 좋고 일 잘하면서 적당히 내빼지만 그렇다고 제 등에 칼을 찌를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만만하다'고 요약합니까? 언어를 대체 뭘로 배우셨는지…? 조심스럽게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던 것을 후시미는 목 안으로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더 이상은 말해봤자 말꼬리잡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시겠습니까, 연애?"
"영문법은 됐습니다만……."
최종학력은 중졸이어도 도쿄 법무부 호적과 제4분실 근무 4년차의 짬밥이다. 후시미는 제 업무능력과 사회성을 믿었고 또 너무 믿었다. 어떤 일이든 훌륭히 해치울 수 있다는 안일함은 막힘없이 승진했던 전적이 있는 직장인에게선 흔히 나타나는 무모함이었다.
"일단은 해보죠."
"승낙입니까."
"쯔…….위에서 하라면 해야죠."
마음 먹고 나니 생각보다 머리는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김이 빠지는 것처럼 푸슈슉 평소의 귀찮고 느긋한 텐션으로 돌아온 후시미를 보며 무나카타는 그저 평소처럼 웃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만만하다' 소리를 들은 건가? 싶은 생각이 얼핏 스쳤으나 그 날의 후시미는 분명 자신감 과잉이었다.
*
"어떱니까?"
"뭐가요?"
눈 앞의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는 후시미에게 무나카타가 묻는다.
"보통은 운전하는 남자를 세 배쯤 멋있게 느낀다던데."
"그래서요?"
"운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CD삽입구, 이젝트 버튼, 내비게이션, 후면카메라는 자동인건가. 히터, 쿨러……. 아랑곳하지 않고 버튼의 용도를 추측해보던 후시미가 무나카타의 말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정면으로 유지하면서도 흘긋흘긋 후시미를 쳐다보는 게, 아, 그러니까, 설마.
"…멋있다고 듣고 싶은 겁니까."
"저는 평소에도 어디서 빠지진 않습니다만."
아……. 짜증난다……. 어디 가서 빠지지야 않겠지만 본인 입으로 저러고 있으면 원래 영 반대로들 하고 싶은 법이다. 애초에 남자친구인지 상사인지에 대해 칭찬할 건덕지도 없었다만 뭔가 기대하는 눈을 보니 엄청나게 기분 나쁜데다 후시미는 당근과 채찍 중에선 당근은 야채라 싫으니 채찍만 휘두르는 편이었다.
"쿠사나기 씨가요."
느릿하게 웃으면서 후시미는 입을 열었다.
"쿠사나기 씨가 운전을 잘해요. 처음으로 성인 남자가 운전하는 걸 구경하기도 했고."
"그렇습니까."
대답을 하는 무나카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은 것 같다. 후시미는 갑자기 데이트에 대한 의욕이 샘솟기 시작했다.
"쿠사나기 씨 차는 스틱이거든요. 스틱에 손 얹어두고 담배 피울 때가 좀."
"동행자가 있는 상태에서 실내 흡연은 좋은 습관은 아니네요."
사실 쿠사나기의 차를 간혹 얻어 탈 일이 있을때마다 후시미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담배냄새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려 노력했지만 아무리 왕이라도 그런 것까지 알지는 못할테고. 쿠사나기가 멋있었다는 말도 아예 거짓말은 아니다. 가끔 그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초조하고 몸서리 쳐지도록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실장도 내키면 아무데서나 피우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키야마 씨가."
"아키야마 히모리 군, 말이죠."
"호송용 트럭은 차체도 높고 옆에 타고 있으면 전망도 끝내주거든요."
아키야마도 흡연자였다. 공용인 호송 트럭에 재떨이가 있을 리 없고 아키야마는 흡연장소가 아닌 이상 담배를 무는 일이 거의 없지만 가끔 차가 막힐 땐 핸들에서 손을 떼고 손가락으로 입을 더듬곤 했다. 그리고 아마 속도 내는 걸 즐거워한다. 평균적으로는 규정 속도를 준수하지만 출동할 때는 위급상황이니 어느 정도의 과속은 용인되는 편이었다. 그럴 때 아키야마가 변속하는 템포와 악셀을 밟는 표정은 경쾌하기까지 해서 가끔 후시미는 일하러 가는데 저런 표정이 나올 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네가 특별히 멋있진 않고 닥치고 운전이나 하라는 후시미의 말을 무나카타가 잘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무나카타는 그 뒤로 말이 없었다.
설마, 이거 질투인가.
그러라고 한 말이긴 했지만, 정말로 질투일리가?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시험삼아 가장 만만한 부하에게 말도 안되는 제안을 건네는 남자였다. 성실성은 없어도 완벽함을 추구했고, 책임감만은 충분한 남자였으니 아마 제 제안에 걸맞은 연기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심지어 연기는 정말 얼마나 잘하는지, 지난 번 정글 잠입작전 때는 연기인 걸 알면서도 솔직히 상처 받았다. 그렇게까지 할 예정은 아니었는데 열 받는 바람에 재킷까지 집어던지고. 셔츠 한 장 차림으로 12월의 도쿄를 돌아다니는 건 제아무리 신체능력이 강화된 클랜즈맨이라도 무리라는 사실을 후시미는 그 날 새삼 깨달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잡소리고, 그래, 무나카타 레이시가 메소드연기왕이라고 해도 후시미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살면서 무나카타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얼마나 존재하겠냔 말이다.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무나카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묘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 같은 게, 차를 마시려고 했더니 아와시마 부장이 노크했을 때와 흡사한 표정이었다.
음, 이건 내가 살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굉장한 한 방이네.
그렇게 생각하니 후시미는 이제 절로 콧노래가 나올 정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꽉꽉 막히는 도로도 상관없다. 어차피 운전 남이 하는 거고, 오늘 하루종일 이렇게 주도권을 잡고 있는다면 데이트란 것도 꽤 쓸 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무나후시로 무나카타가 후시미 패는 얘기. 리퀘스트에 비해서는 폭력 수위는 낮습니다.
본편 이전, 셉터4 입단 직후. 사이드 블루에 등장하는 쿠스하라 타케루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만 저도 케이를 본 지 까마득해서 네타가 이것저것 섞여 있어요.
"실장."
아와시마 세리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서류를 보던 무나카타가 고개를 들어 말없이 묻는데도 아와시마는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나카타 레이시의 시각은 아주 광대하다. 그것이 왕의 이능인지 무나카타 레이시의 자질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취미가 오래 전부터 광막한 2000피스의 백지 퍼즐 맞추기임을 고려한다면 후자일 것 같았다. 그에겐 아마 아와시마가 이토록 오랜 시간 뜸을 들이는 이유도, 이 긴 망설임 끝에 나올 말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와시마가 굳이 말을 꺼낼 필요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와시마는 입에 박힌 껄끄러운 가시 같은 부하를 생각했다.
후시미는 오늘도 뺨에 흰 가제를 붙이고 왔다. 후시미 본인은 한사코 거절하고 있지만 - 정확히는 까고 있지만 - 언젠가 히다카는 가능하다면, 후시미를 붙잡고 옷을 전부 벗긴 다음 에어 파스를 뿌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역력해 보였다. 생활체육을 전공한 히다카는 후시미의 움직임만으로도 어깨와 등, 복부 어딘가에 타박상이 있을 거라고 100%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와시마는 그 모든 상처의 원인이 눈 앞의 남자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를 모른다. 물증도 없다. 왕의 변덕스러운 비위를 맞추는 건 본디 신하들의 도리였으나 그들의 왕이 가진 시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아와시마 세리는 그게 변덕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아와시마 군."
왕의 아량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아와시마의 기나긴 침묵과 그 이후에 나올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시미 군이 원하는 일입니다."
아와시마는 가볍게 목례하고 물러났다.
"아, 진짜 좀―, ……!"
후시미의 볼멘소리는 미처 문장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대신 커흡-, 신음과 함께 혀를 깨물었다. 날카로운 통증, 발작적으로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가 욱씬거렸지만 밭은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연일 얻어 터지는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사지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일어나세요, 후시미 군."
"아……, 후―, 후, 좋아…, 좋아요, 좋아요 실장."
혀가 찌릿했다. 침과 섞인 피를 바닥에 뱉어나면서 후시미는 검을 짚고 일어났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그를 부를 때 '실장'이라고 부르는 게 좋았다. 미코토 씨나 왕이나 뭐 그런 거창하고 친근감 있는 그런 거 말고 비즈니스적으로, 실장. 깔끔하고 좋잖아. 무딘 손 끝에서 차가운 샤벨의 감촉이 느껴진다. 두껍고 뜨거운 손이 아니다.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단단한 형태의 쇠로 된 검이다.
한 왕이 말했다. 이 손을 잡으라고. 다른 왕이 말했다. 이 검을 잡으라고.
죽기 전에 보일 주마등의 순서를 후시미는 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높은 천장과 샹들리에, 코가 간질간질해 재채기가 끊이지 않고, 일찌감치 나빠진 시력 탓에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흐린 원경으로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선 양친의 얼굴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파티장의 정경을 지나면 후시미가 한 때 매료되었던 부지런하고 평범한 일상의 움직임이 있었다.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것들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뭐, 불타는 세계, 미사키, 관자놀이에서 터지던 폭약의 희끗한 불꽃과, 미사키, 뜨거운 충격, 맞잡은 손에서부터 한 번 전신을 훑었던 열기, 미사키, 우리는 둘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고 나면 분명 그 장면일 것이다.
첫 인스톨레이션의 날. 검을 잡았을 때 놀랄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시미는 그게 좋았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상호 합의만 있다면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후시미에겐 안도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건 동시에 대체재가 생기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라―…….
후시미는 뽑지도 않은 검 끝이 턱 밑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을 간신히 피해 거리를 벌렸다. 모르긴 몰라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몇 개의 무술에선 유단자쯤 될 것이다. 그는 검이 없어도 유연하고 강했다. 후시미보다 팔다리가 길어 근거리로 간다면 유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먹은 손속을 봐주지 않았다. 귀한 왕이 내주는 시간이니 아껴 쓰라는 말에, 후시미도 포기할 수가 없다. 후시미가 단 한 번이라도 무나카타의 얼굴에 칼을 들이밀 수 있다면 그걸로 이 지긋지긋한 훈련은 끝난다.
"한 가지만 물, 흡, 어, 봅시다, 실장."
"뭔가요, 후시미 군?"
"내가, 재밌는 소리를 들었는, 데"
딱 소리와 함께 무나카타의 검 손잡이가 관자놀이를 아슬아슬하게 치고 간다. 이건 위협이다. 말도 안 꺼냈는데 성질머리 더럽지, 진짜. 후시미는 이를 악물었다. 익숙한 단검은 금지 당했다. 그걸 안 들고 올 후시미가 아니지만 매번 허리와 소매, 종아리로 숨겨왔지만 무나카타는 기가 막히게 찾아내 탈탈 털어냈다. 후시미의 단검은 저 벽 구석에 처박혀있고 무기는 이름이 입에 붙지 않은 길고 아름다운 검 뿐이었다.
"당신, 이전에,도, 이렇게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며?"
깜박이는 눈꺼풀에 땀이 맺혀 후드득 떨어졌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집으로 등을 세게 얻어 맞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무릎이 무너진다. 무나카타도 예상치 못한 휘청임에 아슬아슬하게 상단으로 들어온 찌르기를 피했다. 바닥으로 처박힐 뻔한 후시미는 간신히 미끄러져 다음 공격을 피했다. 후시미도 그 이름을 잘 알았다. 쿠스하라 타케루의 얼굴은 보지 못해도 장례식은 보았다. 인사과 파일을 정리한 것도 후시미였다. 클랜즈맨은 인스톨레이션 된 순간 모든 감각이 배 이상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날아오는 총알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예민함은 오로지 왕에게만 주어진다. 쿠스하라 타케루는 검술이 발군이고 반사신경이 뛰어났으며 한 순간의 살기를, 총탄의 궤도를 알아챌 정도로 기척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무나카타가 키우고 있던 소중한 조커였을 것이다.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 인재난에서 그만한 사람은 없겠지. 특무과에 들어와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탑이 될 지도 몰랐다. 특무과는 2인 1조라는 사실을 예전부터 지시해놓고 있었으면서 폐기된 조직개편안 속 쿠스하라 타케루는 혼자였다. 무나카타 레이시의 자만, 불운한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쿠스하라 타케루는 분명, 히다카의 말대로.
"내가 그 자식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장?"
눈이 마주쳤다. 안경은 예전에 집어던진 지 오래였지만 분명히 알았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이 쪽을 내려다보았다. 후시미는 막무가내로 샤벨을 집어던지고는 단검을 잡았다. 짧은 검은 익숙하게 후시미의 손에 잡혔다. 건방지게 옷도 갈아입지 않은 그의 왕의 코트, 목깃, 머리, 눈, 심장을 향해 던졌다. 스바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샤벨이 스바루라면, 저건 아틀라스, 알키오네, 엘렉트라, 마이아 쯤 되나 보지?
재수없게도 무나카타는 전부 막았지만 뺨을 스치고 간 단 하나만큼은 막지 못한 거 같았다. 후시미의 흐린 눈 대신, 떨어지는 소리가 이상한 금속음이 하나 들렸다.
"나한테 누구를 대신하라고 하지 마요, 실장.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밖에 못하니까."
쿠스하라 타케루, 어렸지. 스물 하나? 스물? 후시미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타인의 죽음은 후시미에게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나 남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히다카는 지금도 종종 그의 이름을 꺼낸다. 쿠스하라 타케루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그의 자리는 후시미의 자리일 것이다. 특무부의 분위기는 꽤 좋을지도 모른다. 도묘지의 리포트는 고쳐질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부처가 와도 안 되지. 히다카의 집중력은? 오히려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얼이 빠져서는 고토랑 순찰 나가면 두 시간쯤 늦게 들어올 수도 있고, 후세랑 있으면 만사에 진지해질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그것대로의 모양이 있겠지. 후시미는 오래됐지만 세련된 바를 생각했다. 따뜻한 곳이었다. 숨이 막히도록. 후시미는 도저히 그런 것들과는 궤를 같이 할 수 없었다. 그와 만나지 않은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독하게 안 맞을 테니까.
"…훈련은 이만 종료해도 되겠군요."
무나카타의 냉정한 패배선언이었다. 후시미는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애써 멀쩡한 척 서 있었다.
"안 내려갑니까?"
"잠깐, 진정 좀 하고, 요…."
무나카타는 후시미가 어떤 꼴인지, 왜 거기 서있는지 알면서도 비웃기라도 하듯 한참을 구경하더니 가버렸다. 긴장이 풀리니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사지 말단에 뼈가 붙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입에서는 쇠맛과 단맛이 함께 올라왔고, 목구멍은 뻑뻑했으며 등과 배가 욱신욱신 쑤셨다. 어디가 어떻게 된 건지 아까 얻어 맞은 등이 제일 통증이 심했다. 형광등이 눈부셔서 무심코 눈을 감았더니 의식이 저 너머로 까무룩하게 멀어질 것 같았다. 와, 미치겠네. 지금은 안되는데? 후시미는 어떻게든 멀어져가는 의식을 부여잡았지만 순간이었다. 저 형광등도 인생의 주마등에 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컴컴한 의식 너머로, 눈꺼풀 밑에 형광등의 잔상만을 남긴 채 모든 형체가 사라져갔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이 아는 사람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이왕이면 평생을 살면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그런 얘기는 어느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 혹은 실제로도 꽤 빈번하지만 어디까지고 남의 얘기라고 무나카타는 생각하고 있었다.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이미 부딪혀 굳어버린 시선을 회피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눈동자가 어디를 봐야 될지 몰라 애매하게 구른다. 아는 척을 해야 된다면 도대체 어디까지 친한 척을 해야 할까. 그 전에 자신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는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우연에 경탄할 만도 하지만 그런 감상도 나중이었으면 한다.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아 부러 모르는 척, 스쳐 지나가려고 하면 목소리는 사슬이 되어 걸음을 묶었다.
“무나카타.”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놀랍도록 생소하고 동시에 어제도 들었던 것 마냥 기억에 꼭 들어맞는다. 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으면 새삼스럽게 공백의 시간이 그만큼이나 되었구나 싶어 놀라게 된다. 학창시절의 추억에 잠길 일 같은 건 별로 없었기에 그 때의 기억들은 되새겨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른 단어는 이토록 선명하다.
“스오우.”
의도치 않았는데도 혀는 매끄럽고 유연하게 굴러 제 위치를 찾아 발음을 만든다. 약간의 오차라면 갑작스런 발성에 놀라 메여버린 목소리일까. 그 작은 흠결을 지워내기 위해 무나카타는 재빠르게 문장을 덧붙였다.
“기억력도 좋지 않은 당신이 제 이름을 기억할 줄이야.”
“…네 이름을 까먹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시비냐.”
“시비는 아닙니다. 산뜻한 재회 소감이죠. 예. 오랜만입니다.”
재회. 오랜만이라는 인사. 어쩐지 생소하기만 한 것들을 곱씹어 본다. 표면적인 관계에서 무나카타 레이시와 스오우 미코토의 관계는 고등학교 동창, 살갑게 인사할 만한 사이도 아니다. 한 명은 그림으로 그린 듯 자기주장 확고한 모범생이었고 한 명은 머리는 나쁘지 않았지만 수업을 자주 빼먹어 성적은 간신히 유급만을 피하고, 한낮에도 학교 밖을 싸돌아다니거나 밖에서는 이상한 폭력사건에 휘말렸다느니 어쩐지 뒷소문이 무성한 불량학생이었다. 극과 극. 무나카타도 아마 그 정도였다면 상대조차 하지 않고 이름이나 얼굴을 정확히 외울 일도 없었겠지만.
“재회.”
무나카타가 속으로 곱씹고 있던 단어에 위화감을 느꼈는지 스오우도 한 번 중얼거린다. 저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스오우가 다시 무나카타와 시선을 맞춘다.
“그래. 재회지.”
“단어의 사용이 잘못 되었습니까?”
“아니.”
상대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오우와 무나카타는 그저 그런 동창이었다. 지나가다 만난다면 그저 스쳐지나가거나 아니면 잠깐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정도의. 이 우연한 만남을 어떻게 끝맺어야 될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적당히 마무리 지을 대사를 생각하고 있으려면 상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온다.
“모처럼인데 바쁘지만 않으면 잠깐 대화나 하지 그래?”
“대화…?”
눈을 깜박이고, 되묻는다. 기이한 단어였다. 대화라니. 무나카타가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던 수많은 상황들 중에서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선택지였다.
“바쁜가? 그럼 전화번호라든가….”
“아니. 아닙니다. 지금은 외근 이후에 바로 퇴근해도 된다는 상사의 허가도 있었으니까요.”
“허가? 상사? …네가?”
“또 단어의 용례가 잘못된 겁니까?”
“…아니.”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문지르던 스오우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말도 없이 앞으로 걷기 시작한다. 따라오라는 뜻이겠지. 왠지 끌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만 그런 부분 하나하나까지 시비를 걸기엔 사실 무나카타에겐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대화도 모자라 시간이 없으면 전화번호라니. 지나가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거기까지 간다면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 한 번 더 불러낸다는 뜻이었다. 외근 이후 바로 퇴근해도 된다는 상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가급적이면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재회에 따르는 향수는 그럭저럭 추억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었지만 반추할 기억은 그토록 길었고 그 긴 시간 동안 감내해야 했던 것들에 대해선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스오우를 따라 들어간 카페는 회사 근처라 무나카타도 몇 번 들렀던 곳이다. 평일 오후라 한산한 실내에서 익숙한 곳인지 망설임도 없이 창가자리의, 햇살이 부드럽게 머물어 아늑한 곳으로 찾아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커피 마셨던가? 선명한 기억 속에서도 술 이외에는 음료의 취향을 가늠할 만한 것이 잡히지 않는다.
“빚진 것도 있고 내가 붙잡았으니 계산은 이쪽에서 하지. 뭘 마실 거냐?”
“잉글리쉬 블랙퍼스트.”
“그건 뭐…?”
“홍차입니다. 보통의 카페에선 말차나 하다못해 녹차도 거의 팔지 않으니까.”
여전히 늙은이 입맛이구만.
중얼거려야 될 게 무에 그리 많은지 혼잣말이 잦다. 스오우가 느긋하게 걸어 카운터로 향하면 무나카타는 할 일이 없었다. 대화. 서로 주고받을 말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약간, 초조할 지도 모른다. 거북하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면 자신의 꼴이 몹시 우습다고 문득 깨닫는다. 딱히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 무나카타가 거북해 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약간 남은 긴장이 사라지지 않아 무나카타는 직물로 짜인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로수의 가지가 물이 올라 윤기를 머금고 그 끝마다 작게 봉우리가 옹기종기 붙어있다.
벚꽃나무다.
카운터로 간 스오우가 주문을 하고 몇 분 그 앞을 서성이다 엷은 갈색으로 우러나는 투명한 유리의 티팟 세트와 머그잔을 쟁반에 받쳐 가져올 때까지 무나카타는 그 가지 끝 작은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창가로 바람이 스며든다. 다정하고 온유했지만 아직 그 끝에는 서늘한 내음을 담은 바람이었다. 쭉 뻗은 벚꽃 나무에는 여린 몽우리 밑에서 엷은 붉은 빛이 보인다. 곧 있으면 그 얇고 부드러운 다섯 장의 꽃잎이 만개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눈처럼 휘날리리라. 이미 피어나고 있는 수명이 짧은 목련의 가련한 흰색과 동시에 볼 수 있을까?
무나카타 레이시는 눈부신 해그림자 아래서 그런 감상적인 생각들을 곱게 개켜 안으로 밀어두고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프린트를 꽉 눌러 쥐었다. 이렇게 바람이 불어서야 프린트를 돌리는 건 수업시간 직전이 나을 지도 모른다. 5교시의 수업자료를 막 교무실에서 받아 온 무나카타는 이를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 앉아 책을 폈다. 교실의 대부분은 텅텅 비어있어 주인 잃은 프린트가 부는 바람에 교실 안에 꽃잎처럼 휘날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한창의 고등학생이 유일한 자유를 헛되이 교실 안에서 보낼 리가 없었다. 가방 안에서 꺼낸 게임기를 돌려보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기 바빴다. 야, 거기 공 - 패스패스!! 우렁찬 목소리가 창밖에서 울려 무심코 고개를 창가로 돌리면 눈이, 마주친다.
매점이나 어슬렁어슬렁 다녀와서 바로 자는 줄 알았더니 그 눈에 잠기운은 하나도 없다. 처음부터 생생한, 지금까지의 묵직한 나른함은 모두 가짜였던 것처럼 그르렁거리는 맹수의 날카로움이 보인다. 섣불리 움직이면 당장이라도 이를 드러내고 목줄기를 뜯어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자. 제가 위축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무나카타는 인상을 찡그리며 마주 보았다. 스오우의 입꼬리가 살짝 들렸다 떨어지고 꾸물꾸물 얼굴을 다시 엎드린 팔 사이에 밀어 넣으면 불꽃이 꺼진다.
스오우 미코토는 그랬다. 무슨 운인지, 아니면 지극히 당연한 인력 - 그러니까 폭력, 이라든가 - 이 작용한 것인지 그의 자리는 2주에 한 번인 제비뽑기를 두 번이나 한 이후에도 늘 창가의 맨 뒷자리였다. 자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수업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말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키는 무나카타와 비슷하지만 체격은 그가 더 좋았다. 사교성은 없어 보이지만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교실 뒷문을 뻥뻥 차며 들어오는 이상한 사투리 억양의 선배도 있고 은근히 주변에 사람은 많았다.
사자. 사자 같다고 자신은 그렇게 말했던가.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어울린다. 습도도 낮은 건조한 뙤약볕의 사파리에 드러누워 꼼짝도 않는 주어지는 먹이나 받아먹는 숫사자. 가끔 오수에서 깨어나 어슬렁어슬렁 움직이지만 그걸 보고 사자를 만만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명실상부 그 야생의 공간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포식자고 정점에 있는 숫사자는 그만큼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다닌다. 누군가 던져주는 먹이를 느릿하게 받아먹고 뒤에 무리를 줄줄 끌고 다니는 게 어디에서 본 듯 위화감이 없어 무나카타는 슬쩍 웃으며 흘끔 다시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또, 눈이, 마주쳤다.
큼큼거리면서 다시 재빨리 책상 위로 시선을 돌리지만 그 입이 비죽이는 것이 망막의 끄트머리에 맺혀 사라지지 않는다. 읽고 있던 책의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뜻― 뜻밖의 일이 불쑥 끼어들어. 아, 여기다. 『뜻밖의 일이 불쑥 끼어들어 삶의 중요한 부분을 결정하곤 한다. 끼어든 것들이 삶을 이룬다. 아니, 애초에 삶이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다만. 다만. 이제 겨우 봄인데 강렬한 여름의 태양 아래 가장 가까운 지점에 서있는 기분이다. 등 뒤가 따끔따끔하다. 저런 에너지가 남았다면 쉬는 시간마다 잠이나 잘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움직이고나 오지? 무어라 한 마디 할까 싶다가도 아까 무심코 웃어버린 게 맘에 걸린다. 눈이 마주쳤으니 만약 무나카타가 먼저 말을 꺼내면 저 쪽에서 먼저 아까의 일을 꺼내겠지.
그것은 무나카타에게 썩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당신의 게으름이 사자를 닮은 것 같아 웃었다고? 20살이 넘으면 불량배 무리를 이끌고 그네들이 주는 것을 덥썩덥썩 받으며 살 것 같았는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상상돼서 웃어버렸다고?
남의 태도에 관하여 무나카타가 왈가왈부 할 자격은 없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저 침묵하고 무시하는 수밖에.
그러나 스오우의 집요한 시선은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수업 예비종이 칠 때까지 계속 되어 무나카타는 결국 마지막으로부터 이어진 한 문장만을 간신히 읽고는 운동장에서 귀환, 체육복을 갈아입거나 화장실을 갔다 오고 수업준비를 하느라 분주해진 교실에서 프린트 배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앞에 나가 분단별로 숫자를 세어 두다 힐끔 바라 보면 스오우는 무심하게 다시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
『다만 일찍 끼어드느냐 늦게 끼어드느냐 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끼어드는 것이 없으면 삶도 없다.』[각주:1]
* * *
저 남자가 언제부터 이 삶에 끼어들었는가 생각해본다. 사실은 잘못된 명제이기도 하다. 스오우 미코토는 무나카타 레이시의 삶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그저 그 오래되고 기이한 돌덩이가 강요한 선 위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 순으로 따지자면 외려 무나카타가 스오우의 생에 끼어들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빨강과 파랑, 그 대척점에서 지독히도 맞지 않는 주제에 일곱 명의 왕 중에서도 가장 가까이에 자리 잡아 비등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붉은 클랜은 무나카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아름다움도 반듯함도 날카로움도 없다. 그저 거칠고 제멋대로지만 신기하게도 어떻게든 굴러갔다. 깔끔하게 정리되지도 않고 획일화 된 방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체가 가질 수 있는 통일의 미려함은 그들에겐 결코 없었지만 모닥불이 눈앞에서 타고 있으면 무심코 그 불규칙한 불꽃의 너울을 보게 되는 것처럼 상대를 사로잡기도 했다.
“취향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가는 곳마다 겹치는 걸까요, 스오우.”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무나카타.”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 깔끔한 칵테일과 독한 양주의 스트레이트는 맞지 않을 텐데도 스오우와는 종종 동선이 겹치곤 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본거지는,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술의 종류에 대해선 해박하고 조주 능력도 나쁘지 않은 박식한 바텐더가 운영하는 바(Bar)다. 어째서 돈을 낭비하면서 밖에서 먹는 걸까. 이유는 물론 알고 있다.
가끔은 기분전환으로.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다. 무나카타가 처음 이곳을 찾았던 건 별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뒷골목에 위치해 작고 조용하고 그리고, 스오우 미코토가 찾는 곳이기 때문에. 사실 이 곳에 한해서는 우연이 아니다. 무나카타는 그가 이 가게에 종종 들른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왜 자신이 여기에 오는지는 몰랐다. 그저 흥미가 동했고 한 번 왔더니 괜찮은 것 같아서. 그 다음은 이미 습관이었다. 모든 일이 습관이 되는 것은 어려운 절차가 아니다. 어떤 이유든 두어 번 이상 반복되면 그 다음은 관성으로 몸에 배인다.
“오늘도, 반복입니까.”
“글쎄. 네가 원한다면 말이지 무나카타.”
치졸한 대답이다. 능글맞게 웃어 보이면서 스오우는 무나카타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지긋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타닥거리며 불씨를 흩날리는 밤의 모닥불처럼 선명하다. 무나카타는 전혀 취향이 아닌 중후한 향의 와일드 터키를 단번에 들이켰다. 입에 남는 묵직한 향과 씁쓸한 맛 사이의 은근한 단 맛이 쉬이 가시질 않지만 확실히 스오우에게 어울리는 술이었고 여전히 무나카타의 입맛엔 맞지 않는 술이기도 했다.
“그럼 가죠.”
“…의외군.”
탁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으면 스오우가 무나카타의 말에 놀란 듯 눈을 깜박이다 희미하게 웃으며 말한다.
“뭐가 말입니까?”
“솔직하게 얘기했다는 점이?”
“언제나의 순서였으니까요.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걸 인정했다는 게 말이지.”
“몹쓸 습관이군요. 습관이 제일 무섭다고는 하지만.”
지갑에서 지폐를 내밀어 계산한다. 내친 김에 스오우의 것까지 계산해버리면 그것도 의외였나 막 입을 열려는 것을 무나카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오늘은 그럴 기분이었습니다.”
“더블이 너무 독했나? 자존심 세우지 말고 온더락으로 마시지 그랬어, 무나카타. 아니면 귀엽게 우유 같은 것도 좋겠지.”
“그 정도에 취하진 않습니다. 사람의 호의는 비꼴 게 아니라 감사히 받아두고 다음에 한 잔 사면 되는 거 아닙니까, 스오우.”
“뭐. 좋아.”
“그럼 다른 얘긴 없겠군요. 가시죠.”
먼저 앞서 나가는 남자의 등 뒤를 따라 걷는다. 밖에 나오니 어느 새 만개한 벚꽃이 살짝 이는 바람에 밤하늘에 하얗게 눈처럼 나린다. 엷고 부드러운 꽃잎이 내려앉은 그 등은 무너질 것 같지 않게 든든하고 앞서나가는 걸음은 느릿하지만 머뭇거리진 않는다. 그의 클랜은 이 등을 믿고 있겠지만 불행히도 무나카타는 그런 것에 현혹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화려하게 타오르다 해가 밝으면 어느 새 재만 남아 열기만을 흔적으로 품고 사라진다. 결코 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종막은 언젠가는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이 등은 쉬이, 흩날리는 꽃잎에도 부스러질 것이다. 실로 평등한 위치에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축복인지 저주일지 모를 혜안이었다.
오늘의 술값은 저 생에 함부로 난입한 것에 대한 값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나카타와 스오우는 어느 한 쪽이 끝장날 때까지 부딪힐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는 지도 모른 채 습관처럼 저 가게에서 스오우를 만나고, 어둠이 내린 시간을 같이하는 것처럼. 죄책감을 덜어내려 억지로 시간을 공유하고 그를 이해하려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을 들이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끝은 제 손으로 낼 것이기에.
스오우의 흰 셔츠 위에 내려앉은 엷은 꽃잎을 눌러 쥐면 덧없이 손 안에서 뭉그러진다. 어깨를 스치는 느낌에 스오우가 뒤를 돌아본다.
“꽃잎이 붙었기에.”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하는 꼴이 이상하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떼어내면 가만히 지켜보던 스오우의 손이 머리를 가볍게 훑고 지나간다.
“너도, 붙었군.”
냉큼 손을 뻗었던 것과는 달리 한참의 정적 후에 스오우는 입을 열었다. 미묘한 정적이 기이할 정도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지만 무나카타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앞을 향해 걷는 스오우의 등 뒤를 좇았다.
언젠가 술이나, 하다못해 차 한 잔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상대도 그런 것을 느꼈던 걸까? 눅진하게 들러붙은 방금 전의 침묵을 생각한다. 그 한 잔을 얻어먹을 시간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감이, 흰 꽃잎처럼 선명하게 깃들어 있는 밤이었다.
* * *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스오우.”
“차는 내가 샀으니 말 정도는 네가 먼저 꺼내지 그래 무나카타.”
“절 붙잡은 건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이것도 그에 대한 값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차는 감사히 마시겠지만 이쪽에서 먼저 할 얘기는 없으니 할 말이 없다면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죠.”
생각해보면, 그 오래 전에 얻어 마셔야 될 것이 있었다. 그 밤의 예감은 훌륭하게 들어맞아 계절이 세 번이나 지나도록 스오우는 빚을 갚지 못했고 무나카타의 명징한 혜안이 현실이 되며 영영 끝났다. 우연치고는 제법 잘 들어맞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무나카타가 적당히 우러난 차를 잔에 곱게 따르면 스오우는 그것을 보고만 있는다. 새까만 커피는 아직 식지 않아 입에 대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모양이었다.
“그냥 회포를 푸는 정도, 라고 하면 안되나?”
“우리 사이에 풀어야 할 회포 같은 게 있었습니까?”
“나름대로?”
“고등학교 시절, 딱 1년이 말입니까?”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지 스오우는 눈살을 찡그리며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긴다. 또. 그건 기분이 나쁠 때 나타나는 스오우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전혀 고치질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고등학교 1년.”
“딱히 접점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있었어.”
“가령?”
“한 번, 옆자리였지.”
“아. 제비뽑기해서 2주 동안 같이 앉는 그거 말입니까? 1년 55주에서 방학을 제외한 40주, 그 사이에 2주?”
“그런 식으로 계산하지 말지 그래?”
“아니. 전체의 5%밖에 차지하지 않는 시간이 ‘회포’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수 있을 정도인가 싶어서.”
그 2주는 확실히 서로에겐 의외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 다음의 발전이라면 글쎄. 적어도 어느 정도의 사담은 나눌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얘기가 목까지 차오르고 있었지만 무나카타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거기까지 했다간 스오우의 찡그린 미간이 아주 굳어버릴 것 같아 대신 무나카타는 손을 뻗어 스오우의 미간을 눌러 폈다.
“아직도 습관을 못 고치셨군요.”
“무슨 습관?”
“뭔가 맘에 안들 때마다 인상 찡그리는 습관 말입니다. 미간에 주름 생긴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가뜩이나 당신은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니까.”
그 말에 스오우가 눈을 깜박이다 희미하게 웃는다. 불꽃의 열기에 이지러지는 아지랑이 마냥 주변이 일렁거리는 웃음은 반추하던 몇 년 전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까마득한 시절의, 꿈인지 실제인지 구분도 하지 못하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스오우는 빳빳하기만 한 싸구려 시트와 때 탄 벽지, 파르스름한 담배 연기 사이에서 밤이 시작과 혹은 끝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습관처럼 반쯤 긴장하고 있으려면 스오우의 입에서 뜻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너. 기억하고 있군.”
* * *
손에 들린 제비뽑기 종이를 들고 무나카타는 칠판 앞에 쓰여 진 책상의 위치와 자리를 맞춰 보았다. 반장이라는 명목으로 본인이 노트를 찢어 쓴 숫자였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단정한 숫자가 가리키는 대로 가방을 들고 자리를 옮긴다. 청소시간이라 복도도 요란하고 교실은 모두가 제자리를 찾느라 분주하다. 책상 서랍의 교과서와 노트들을 꺼내기 싫다는 이유로 책상 째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해 시끌벅적한데 딱 사람 하나 있는 그 자리만이 조용하다. 빈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두는 인기척이 들려도 옆자리의 스오우는 그저 엎드려만 있다.
입학하고 나서 두 달이 넘도록 숙제를 걷는다든가, 유인물을 나눠주는 것 이외에 스오우와 무나카타의 대화는 전무했다. 같은 교실에서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 말고는 접점이 없었다. 무나카타는 묘하게 스오우가 껄끄러웠다. 껄끄럽다기 보단 어려운 걸까? 말도 없이 과묵하기만 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을 다루는 법은 아직 몰랐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을 터였다. 스오우 미코토는 중학교 때 같이 올라온 친구들이나 몇몇 애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조용했다. 무언가 트러블이 생길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보단 마음이 편했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머지 책들을 꺼내 와 내일 시간표대로 가지런히 정리해 둔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 얼추 자리를 잡은 듯 하면 교탁 앞의 담임선생님이 의례적인 몇 마디를 한 뒤 무나카타에게 눈짓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나카타는 일상이 되어버린 동작을 취한다.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하루를 마무리 짓는 인사소리가 경쾌하다. 고요했던 교실이 그 말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는다. 어느 새 가방을 들쳐메고 뛰쳐나간 무리가 있는가하면 다 같이 모여 어디를 갈지 정하는 무리도 있고 질리지도 않는 지 방과후에도 축구 한 판 더 하자는 소리를 하는 애들도 있다. 인사를 마친 무나카타가 자리에 앉으면 스오우가 눈을 껌벅거리며 무나카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오우.”
제비뽑기 따윈 아랑곳없이 스오우의 자리는 이번에도 창가 옆 맨 끝자리다. 제 짝이 무나카타일 줄은 몰랐던 듯 껌벅이던 눈이 무나카타를 한 번, 이제는 깨끗하게 지워진 칠판을 한 번 바라보다 다시 무나카타에게로 돌아온다.
“너일 줄은 몰랐는데.”
“불만이십니까?”
“아니. 그렇다기 보단….”
너는 모범생이잖아.
툭 튀어나온 말이 뜬금없어 무나카타는 순간 실소했다. 저만 상대가 부담스러웠던 게 아니었나 보다. 스오우의 눈에 순간 스쳐 지나간 곤혹의 기색이 무나카타의 생각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약간 남아있는 긴장마저 우습도록 사라진다.
“제비뽑기니까. 운이지. 매번 자리가 바뀌지 않는 누구와는 달리 말야.”
“나는 그냥 이 자리가 좋은 거야.”
“나도 선호하는 자리 정도는 있어.”
“앞자리?”
“중간이 좋은데.”
딱 잘라 말한 무나카타의 대답에 스오우의 눈이 다시 깜박인다. 무언가 유쾌해진 기분이었다. 단박에 꼭짓점까지 상승해 가는 기분의 곡선이 무서울 정도다.
“모범생이라면 앞자리만을 선호해야 된다는 이유는 없으니.”
무나카타가 스오우의 기저를 박살내는 문장을 덧붙이면 스오우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툭 한 마디 뱉는다.
“…의외네.”
어느 새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교실에서 스오우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넌 집에 안 가냐.”
“갈 거야.”
“그래. 잘 가라.”
무나카타를 뒤에 남겨두고 가방을 어깨 뒤로 든 채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가려던 스오우가 갑자기 멈춰서서는 무나카타를 돌아본다.
“내일 보지, 무나카타.”
멋쩍게 내뱉고는 재빨리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다 무나카타는 결국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의외라니. 그건 이쪽이 할 말이었다. 어느 날엔가 등 뒤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스오우 미코토의 시선에 부담스러워 숨이 죽을 것 같았던 날을 떠올려 본다. 제가 불편해서 그렇게 느꼈었던 것뿐이었다. 외모나 분위기에 섣불리 휘둘리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도 어느 새 그런 거에 깜박 속아 넘어갔을 지도 모르지.
무나카타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 뒤편, 사물함 맨 끝에 있는 작은 화분받침에서 열쇠를 꺼내들던 무나카타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빈 책걸상이 주욱 열을 지어 맞춰져 있다. 지금은 주인이 떠나간 자리에서 무나카타는 가벼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내일. 스오우.”
스오우의 입에서 지난 3일 동안 의외라는 말은 총 13번 나왔다. 가끔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며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벌컥 열어 재낄 때, 귀찮은 상대를 대하고 조용히 그에 대한 비난을 씹어 넘길 때 혹은 수업시간에 간간히 풀어져 의자에 주욱 늘어져 버릴 때. 무나카타는 스오우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자신이 그렇게도 정도正道를 벗어난 건지 때 아닌 자아성찰을 해야만 했다.
모두가 축 쳐져 조는 늙은 역사 선생의 느릿한 말투는 무나카타도 싫었다. 복잡한 수식을 딱딱한 말투로 설명하는 수학 시간은 지루했고 젊고 의욕 넘치는 사회 선생은 그 의욕을 주체하지 못해 재미없는 농담을 치기도 했다. 적당히 요령을 부려가며 조는 것은 남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긴 죽어도 싫은 무나카타의 자존심과 10여년의 의무교육 기간이 부여한 특기였다. 어쩐지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오전부터 저 세 과목이 주르륵 연속으로 들어 적당히 시선을 피해가며 졸고 있으려면 어느 새 스오우가 일어나 그를 관찰하고 있다.
“의외….”
“지겹지도 않냐, 그만 둬.”
피곤이 겹쳐 짜증 섞인 말투로 말끝을 잘라내면 스오우의 입이 달싹이다 닫힌다. 자신의 지금 태도가 의외, 라는 것이겠지. 타인과의 선을 긋는 존댓말은 동급생이라 해도 예외는 없었으나 스오우의 앞에서는 가다듬을 틈이 없었다. 단어 하나, 태도 하나에도 상대의 반응은 민감하게 변하지만 스오우는 ‘의외’라는 지긋지긋한 감상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오후수업을 기어이 빼먹은 스오우의 자리는 마지막 시간이 되도록 비어있다. 스오우 미코토가 수업을 빠지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거기에 대하여 신경 써 본 적 없었는데 빈자리는 불현듯 무나카타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방은 그대로니 학교 밖으로 나간 것 같지는 않은데. 수업 시간 내내 샤프로 교과서를 툭툭 찍으며 통 집중하지 못하던 무나카타는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렬로 늘어진 복도의 화장실을 전부 뒤지고 교정, 운동장을 샅샅이 뒤져도 그림자 하나 보이질 않는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면 10분의 쉬는 시간은 너무 짧아 얼마 안 가 수업종이 칠 터였다. 지금 교실에 들어가면 늦진 않을 텐데. 냉정한 사고가 그렇게 판단했으나 무엇 때문인지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교실은 4층이고 교사는 총 5층이다. 옥상까지 갔다 오는 데는 빠르면 1분도 채 걸리지 않겠지. 마지막으로 옥상에 한 번 가보자. 그렇게 생각한 무나카타는 재게 걸음을 놀려 계단 끝까지 올라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은 사람이 오가지 않아 을씨년스럽다.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올라 차갑고 뻑뻑한 손잡이를 돌리면 그 끝에 스오우가 있었다.
“스오우.”
부르는 이름에 나른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그의 한 손에는 자연스레 담배 한 개피가 들려있다. 그가 흡연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남고에는 언제나 일찍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철부지가 많았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옥상에서 이렇게 대놓고 당당하게 흡연이라니.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에 기가 차 허,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교내 흡연은 금지입니다.”
“보통은 미성년자 얘기부터 나오지 않나?”
“어차피 학교에 흡연자는 널렸으니까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는 무나카타에 스오우도 기가 막힌지 그저 웃고 만다.
“그래서 용건은?”
“옆자리가 계속 비어있어서 자꾸 눈치 보입니다.”
“흐응?”
“수업시작 종이 치기 전에 들어가죠, 스오우. 수업 중간에 들어가는 건 질색이고 전 수업 땡땡이 쳐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무나카타가 초조하게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순간, 낭랑한 시작종이 덩그러니 옥상에 울려 퍼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나카타는 성실한 학교생활을 즐겨왔던 지라 수업 종이 울린 직후에 교실로 돌아가는 법을 몰랐다.
“이미 늦었는데.”
처음으로 일그러지는 무나카타의 표정이 내심 즐거워 스오우는 씨익 웃고는 얄밉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땡땡이 한 번도 쳐 본 적 없는 모범생이라니 이건 좀 상식적이군.”
“남의 곤란을 즐기지 마.”
“이왕 이렇게 된 거 일탈 좀 즐겨보지 그래, 무나카타? 너도 한 번 펴 볼 거냐?”
찌푸린 미간으로 퉁명스레 쏘아붙이면 외려 그게 더 재밌는지 스오우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는 무나카타에게 건네준다.
“적당히 남고생이라면 말이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라며?”
“교내는 흡연금지라니까요.”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연기에 눈이 맵다. 가늘게 치켜 뜬 눈으로 스오우를 보면 여전히 그 손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의외란 말이 지겨우면 해보시지, 무나카타.”
깔짝깔짝 신경을 건드리는 말이 도발이란 걸 알면서도 욱하는 치기가 올라와 무나카타는 스오우의 손가락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이미 반쯤 타 재가 바닥에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무나카타는 낯선 필터의 촉감을 느끼며 입에 물었다. 멋모르고 확 빨아들이면 뜨거운 연기가 목에 꽉 메이며 머리가 순간 핑 돈다. 역겨운 쓴 맛에 뱉어내려는 것을 억지로 들이마시면 잔뜩 인상 쓴 무나카타의 얼굴에 기어이 스오우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지는 건 끔찍하게 싫어하네, 정말.”
“이…것도, 의,외입니까?”
목이 메어오며 눈물까지 찔끔 배어 나온다. 숨을 내쉬며 겨우 연기를 내뱉으면 흰 연기가 살짝 입에서 빠져나온다.
“아니. 너다워.”
무의미하게 연소되어 필터 끝까지 다가온 불꽃을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밟는다. 신경 쓰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울컥, 밀려오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시계를 확인 하면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45분. 앞으로 뭘 하지? 수업 무단결석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어 이런 때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냥 돌아다니다 선생님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그건 무나카타 레이시의 이미지엔 치명적이다. 결국 꼼짝 없이 남은 시간을 스오우와 보내야 된다. 갑작스레 밀려온 황망함에 짜증 섞인 푸념을 무나카타는 뱉었다.
“전부 네 탓이다, 스오우.”
“여유를 가지라고 무나카타.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잖아?”
벌레 씹은 표정으로 말을 뱉어 놓고 무나카타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스오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고는 다시 한 대를 빼문다. 익숙하게 라이터의 톱니바퀴를 돌리면 탁,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불꽃들이 허공에서 점멸하고, 이윽고 어른거리는 불 그림자를 만들어내고는 곧 담배 끝으로 옮겨 붙는다. 종이가 조용한 불꽃에 천천히 타들어가고 흰 연기가 스오우의 숨과 함께 길게 빠져나와 흩뿌려진다.
그 모습을 무나카타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스오우의 모습은 희미한 위화감이 있긴 하지만 어딘지 전에 본 듯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아직도 울렁거리는 속과 어지러운 머리, 입에 남은 타들어가는 쓴 맛. 그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겹쳐오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불쾌함도, 이 낯선 짜증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나머지 45분의 시간이 어딘가 익숙해 무나카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 * *
담배는, 무나카타 레이시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기호품은 아니다. 처음 입에 물었을 때의 불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나 태연을 가장하며 스오우의 담배를 뺏었으니 도로 뱉을 수도 없었다. 속으로 그 역겨움을 꾹꾹 눌러 삼키는 무나카타를 보며 스오우는 무리하지 말라 했으나 그 말끝에 남은 비웃음은 무나카타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럭저럭 푸르스름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희뿌연 연기를 관찰할 정도의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주로 관찰하는 것은 스오우의 것이었지만.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종이와 잎에 옮겨 붙고 빨간 점이 되어 모든 것을 재로 환원하는 것을 지켜보다 무나카타는 창문을 열었다.
“창문 정도는 열어놓지, 스오우.”
“아. 일어났나.”
“진즉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거 기분 나쁩니다.”
“그건 네 쪽의 특기 아냐?”
“…환기 정도는 해주는 배려심은 갖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말고 한 대 물지.”
“당신 건 너무 독해서 아침부터 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제 거 주세요. 제복 안주머니에. 라이터는 맞은 편.”
“라이터는 필요 없잖아.”
여유를 갖게 되었다 해도 한 달에 한 갑이나 새로 살까말까. 비닐 포장된 부분을 제외하면 구겨진 곳은 없지만 모서리가 닳아 종이가 부드럽게 일어난 케이스의 뚜껑을 연다. 안경이 없어 찡그린 눈으로 담배를 빼물면 스오우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갖다 댄다. 끝을 맞대고 빨아들이면 조금씩 옮겨 붙는 열.
밀려오는 바람에 하늘 위로 곧게 피어오르던 연기의 모양이 하늘하늘 흩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직까지 정상궤도로 진입하지 못한 컨디션에 한 모금 빨아 뱉으려면 속이 울렁거린다. 연기가 눈으로 들어와 따끔거려 무나카타는 고개를 숙이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주변을 더듬었다. 잔뜩 더러워져 찝찝함에 그나마 두께가 있는 부드러운 시트를 걷어 던져 놓은 지라 빳빳하고 거친 싸구려 린넨 커버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한참을 더듬어도 일관된 시트의 감촉과 침대헤드의 윤곽뿐, 무나카타의 안경은 어디에도 없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면 제 물건은 영 엉뚱한 사람의 얼굴에 가서 얹어져 있었다.
“주세요, 스오우.”
“…생각보다 어지럽군.”
“그러니까 주시죠. 인상까지 쓰면서 굳이 남의 안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봐봐, 또.”
무나카타는 손을 뻗어 스오우의 스오우의 찡그린 미간을 눌러 폈다. 스오우 미코토의 의중을 표정으로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즉각적으로 판단이 가능한 게 저 버릇이다. 무언가 맘에 들지 않을 때 스오우는 인상을 찡그렸는데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 오른쪽 눈썹의 끝이 왼쪽보다 아주 미세하게 높이 올라간다.
갑자기 얼굴에 닿은 손에 안경을 쓴 채로 스오우가 무나카타를 돌아본다.
“당신, 뭔가 맘에 안 들 때 바로 인상 쓰는 거 모르지.”
“…….”
“가뜩이나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인데 자꾸 인상 쓰면 미간에 주름 생깁니다. 고치도록 하세요, 스오우. 안경도 이리 주시고.”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냉큼 안경을 낚아채면 스오우는 그저 픽 웃고 만다.
“그래, 경험은 충분했으니까.”
“무슨 경험 말입니까?”
“너 같은 놈이 보는 시야가 궁금했거든.”
의외의 대답에 입 안에서 혀가 움직여야 할 모양을 잃고 헛돈다. 숨 쉬는 방법도 잊어버려 모든 기능이 정지한다. 녹 슨 뻑뻑한 톱니바퀴를 다시 돌리는 것처럼 힘겹게, 천천히, 삐걱거리는 사고를 움직여 무나카타는 간신히 통상적인 한 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고작 안경 하나로 그게 됩니까?”
“안경 벗고도 멀쩡하길래 시력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닌 줄 알았는데 꽝이군.”
“안경을 벗는다고 장님이 되는 건 아닙니다.”
무나카타가 렌즈에 남은 지문을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스오우의 티셔츠로 닦아내고 쓰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스오우는 다시 그의 안경을 벗겨냈다.
“뭡니까.”
“너도 그렇지?”
“……?”
“담배.”
그렇게 말하며 스오우가 가르키는 것은 무나카타의 담배다.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면 스오우는 씨익 웃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나 때문에 피우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런 건, 계속 모르는 척 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은데.”
3분짜리 기호품이 가져다주는 상대적인 유대감 혹은 박탈감은 생각보다 강렬하다.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허공으로 돌려 흰 연기를 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 시간까지 이어 올 대화가 둘 사이에 있을 리가 없었다.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 3분, 180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을 견딜 수가 없어 오기로 손에 그 가벼운 한 개비를 물었을 때.
“멍청한 선택이었죠.”
울렁거리고, 기분 나쁘고, 이상한 부유감에 머리도 어지럽고 입은 텁텁하고 쓰고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스오우 미코토의 세계를 조금, 엿 본 기분이 들었다.
“거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스오우가 웃는다. 그 얼굴에 무나카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입 안은 쓰지만 시야 대신에 숨을 나누었기에, 그걸로 만족했다.
* * *
2주는 짧았다. 약간의 일탈, 생각했던 것보단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접점은 끝이었다. 스오우의 자리는 언제나 그곳이었으나 무나카타의 자리는 한 번도 뒤편이 나온 적 없었다. 1년은 빨랐고 남은 2년 동안 복도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것조차 드물었다. 졸업. 숫자는 무심히 변했으나 계절은 아직 바뀌지 않은 시기였다. 아직 3월조차 되지 못한 것 같은 하늘은 그저 흐렸다. 잿빛 하늘 밑 저 쪽에서 강렬한 색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고 가볍게 목례했다. 햇살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호박같이 투명한 것만이, 그 날의 감상이었다.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졸업앨범 뒤 쪽에 전화번호나 집주소가 적히지 않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집도, 진학을 어디로 했는지도 모른다. 구하려면 스오우 미코토의 연락처쯤이야 쉬이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만한 인연까진 아니라 그만두었다.
그렇게 넘겼는데, 그렇게 아득한데, 떫을 정도로 덜 여물었던 10대의 마지막의 겨울이 어째서 상금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종이가 물을 천천히 흡수하여 이윽고 완전히 젖어버리듯이 기억은 머릿속을 잠식하더니 어느 순간 숨통을 틀어 막았다. 제 것인, 또한 제 것이 아닌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매일 같이 돌아갔다.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것들에 대하여 놀라기 전에 무나카타는 질식할 것 같은 기나긴 여운을 허덕이며 버텨야 했다.
붉은 왕의 자리는 아주 오랫동안 공백이었다. 몇 번의 고통스런 겨울을 반복하여 보내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제 검이 빛으로 화하는 장면이었다. 퍼져나가는 빛무리를 보며 무나카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겨우 마지막이라도 같은 것을 볼 수 있었구나. 겨우, 그 눈 쌓인 겨울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고통스런 생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저주였다. 조금만 더 빨리 기억했더라면 실보다 가늘다 하더라도 그 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같은 시야를, 같은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숨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의 관계도 그걸로 끝이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둘을 엮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왕이라는 굴레도, 아슬아슬하게 폭주하는 검도 없었다. 자유로워진 그는 뜻대로 모든 걸 할 수 있겠지.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이끄는 것만은 여전하여 어느 봄날, 그의 뒤를 따르는 한 무리를 상상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무나카타는 다시 굴레에서 허덕이는데도 스오우는 자유였다. 그것이 못내 분하고 화가 나 울분을 토해낸 밤도 있었다.
모든 것이 과거형인 이유는 무나카타는 또 이를 갈무리 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숨을 공유했던 시간을 한 번 더 살며 그를 보냈던 겨울이 되어 그를 보냈는데. 왜, 어째서.
어긋났던 시간들이 맞물려 돌아간다.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어.”
“무…슨.”
“어렴풋하게 어디서 봤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 워낙 잘나신 무나카타 레이시라 그런가보다 했지만.”
“그만두세요, 스오우.”
“이제야 전부 기억했거든. 외로웠나?”
“그만 둬.”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왕이면 얼굴이라도 자주 볼 때 생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저는 싫습니다.”
“계속 담배는 폈나? 그 다음은 어땠지?”
“끊었어. 그리고 괜찮았지.”
거짓말이다. 기억력은 좋았다. 그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스오우의 담배 상표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래 전이랑은 다른 브랜드였지만 별 다를 바는 없었다. 아시나카학원에서의 겨울 이후엔 흡연량이 조금 늘었었다.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냄새를 소대원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꼭 그만큼 폈다.
“나보고 인상 쓰지 말라더니 네가 더 쓰는군, 무나카타.”
스오우의 손가락이 미간에 닿는다. 낯선 감촉에 움찔, 머리를 뒤로 빼면 날렵한 손이 안경을 뺏어 쓴다.
“안경은 그 때만큼 어지러운 거 같고.”
“추억을 곱씹고 싶으시다면 혼자 하세요, 스오우. 저는 사양합니다.”
“아니.”
어색하게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면서 유리 너머를 바라보다 스오우는 입을 연다.
“그 말도 기억하나?”
“뭘 말입니까.”
“내가 사자라면 네가 조련사를 하겠다고. 불행히도 다시 사람이지만.”
“…….”
“이 나이가 되고서는 볼 수도 없었지. 기억은 필요 없어. 사자 비슷한 건 되어줄 테니, 어때?”
무어라 대답해야 될지 몰라 숨을 죽이면 줄곧 경직되어 있던 어깨에 손이 닿는다. 공백의 끝에 맞닿은 숨이 공유되는 3월이었다.
* * *
“당신은 당신 친구 말대로 사자로 태어나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스오우.”
“지금은 사람이니 별 수 없잖아. 맘에 안 드나 무나카타?”
“글쎄요. 확실히 그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내가 사자면 너는 뭐지? 조련사?”
“그건 좀 재밌을 것 같네요. 먹이를 주면서 재롱이라도 부리게 시켜볼까.”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기대하고 있지.”
둘 다 하염없이 낄낄거렸다. 우스갯소리지만 상상은 꽤나 즐거웠었다. 그런 건 좀 진즉 기억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스오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찾아보지 뭐. 무나카타 레이시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망령은 잊을 만하면 쫓아왔다. 바이러스였고, 치료했지만 나는 대체 무엇 때문인지 간혹 시부야의 횡단보도 - 그 광활한 공간의 한 구석을 스쳐 지나가는 후시미 니키를 보곤 했다. 그를 볼 때 어떤 공포도, 죄책감도, 애정도 느끼지 않았으나 나는 가끔 그를 보았다. 그럴 때면 의아했다. 이 남자는 어째서 내 주변에 있는 걸까.
후시미 니키에 대한 평을 나는 모른다. 나는 그 남자에 대해서 단 한 줄이라도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애써 잊어버리는 것도 어쩐지 도망치는 것 같아서, 나는 갑작스럽게 과거가 밀려올 때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처음으로 아름다운 나의 세계가 불탔던 날을 기억한다. 작은 어항 속에 만들었던 완벽한 세계는 단 한 순간의 변덕만으로도 새까만 재가 되었다. 그 뒤로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나서 깜짝 놀라는 일도 있었다. 내가 그를 너무 닮아서. 내가 아주 낯선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는 이게 나의 공포였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지금은 그런 위협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는 세계를 보는 시각이 조금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내게 아름다웠던 것들이 그에겐 추악했고, 원형이 남지 않은, 뒤틀린, 기괴한, 망쳐진 것들이 그에게 완벽했을 수도 있겠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몇 되지 않는 정보 중 하나는 후시미 니키가 천재였다는 점이다. 그는 스오우 미코토나 무나카타 레이시나, 다른 왕권자처럼 똑같이 왕이었다. 사용빈도가 낮은 부엌과 나무 식탁과 그 여자의 취향으로 고급스러운 소품이 니키의 취향으로 전부 괴괴하게 배치된 황량한 거실, 그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 보이는 첫번째 방이 내가 잠을 자는 방이었던, 그 집의 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왕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왕도 범인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은 그에게 당연했고, 잘못 걸린 내가 된통 당했을 뿐이고…….
그만두자. 아무리 그래도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다.
"여, 사루. 오래 기다렸냐."
"쓸데없이 늦게 불러내지마 미사키. 나는 내일 오전 근무란 말이다."
열두시가 다 되어가는 어두운 저녁엔 가로등만이 유일한 세계의 증거였다. 호무라가 있는 쪽은 그래도 술집이 몇 군데 있으니 이것보다 사람은 많겠다 싶지만, 정체 모를 관공서 건물 앞은 아홉시만 지나도 무섭도록 적막했다. 미사키는 비니를 벗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자랑하듯 치켜 올렸다.
"이게 뭐게."
"편의점 봉투."
"아 그런 거 말고!"
"콜라? 양치하고 나와서 싫은데."
"아니거든! 이 형이! 너를 위해서 술을 사왔다 이거야!"
"형 같은 소리 하네. 반 년도 차이 안 나면서."
미사키는 제 생일이 지나고 나니 제가 형이라며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이 나이 먹고도 이 상태면 평생 일년 사분지 일 정도는 미사키가 나보다 형이라며 젠 체 하는 걸 봐야 한다는 걸까. 아 인생.
"근데 웬 술?"
"어… 생일 축하?"
"아하."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달력을 찾아보고, 미사키를 보았다. 아아. 그런 거구나. 서프라이즈라고 갑자기 사람을 열두시에 불러내서, 음, 술, 알량한 캔맥주 하나를 생일 선물로 주는 거구나. 응. …….
"뭐, 뭐야 그렇게 보지 말라고! 넌 어차피 오늘 거기서 생일파티 할 거잖냐!"
"…아. 어쩐지 오늘 회식하자고 그러더라."
"거봐! 그러니까 미리 왔다 이거지! 네 생일을 제일 먼저 챙겨주는 내 노력이 기특하고 가상하지 않냐!"
"그으으으렇다고 해줄게."
"아 좀!"
미사키는 버럭 성질을 내더니 내 옆에 공간을 두고 앉아, 비닐봉투에서 조각케익 하나를 꺼내 놓고는 친히 맥주를 까주었다. 콜라맛 맥주. …이게 대체 콜라와 다른 건 뭘까 생각했지만 음료를 손에 쥔 순간, 미사키에게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 성질에 잘못 건드렸다가 전부 뒤집어쓰는 건 내가 될 게 뻔했다.
"자, 후시미 사루히코!"
"너 이런 데서 그런 갱단 흉내 내면 비행청소년이라고 경찰이 잡아간다."
"청소년 아니거든?"
"키만 보면 열넷인데."
나는 거기까지 말했다가 와작, 하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미사키의 손에 들린 캔이 아주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 역시 음료를 뒤집어쓰는 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니까.
내가 샐쭉하게 입을 다물면 미사키는 한 번 눈을 흘기고는 씨익 웃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쪼끄만 머리통에 들어있는 게 뭔지 눈치챘어야 했다.
"후시미 사루히코! 스물 한 살 생일 축하한다!!!"
"야!!!!"
작정하고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나는 미사키의 입을 황급히 틀어 막았다. 기숙사 들어가면 다 물어볼 거라고! 나는 보지 않아도 부장의 어쩐지 흐뭇한 미소와 실장의 뿌듯한 얼굴과 아키야마의 어색한 미소…까지 생각하다가 말았다. 어쨌든 이걸 들은 누군가가 있다면, 분명 내일 아침이 시끄러울 터였다.
"크흠, 그러니까 까불지 말란 말야. 빨리 먹고 들어가자."
미사키는 나한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었다. 좋냐…, 아……. …….
한 대 쥐어팰까 고민하는 사이 찬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가로등이 바람에 떨리듯 흔들려 보였다. 그래. 빨리 먹고 들어가야지.
"건배!"
"…건배."
나는 저 먼 가로등 구석에 있는 그림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차가운 탄산이, 예전과는 다른 단맛과 희미한 쓴맛이 섞여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나는 적당히 어른이 되었다. 당신이 어땠었는지, 나를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당신을 닮았어도, 당신이 준 이름으로 살아가도, 당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삶을 살 것이다.
탕비실엔 가지각색의 컵이 있다. 귀여운 곰돌이가 양각으로 그려진, 금색 펄이 들어간 하늘색 컵은 아와시마의 것이다. 가슴이 빵빵한 선정적인 미소녀가 그려진 텀블러는 고토, 찻물 자국 하나 없이 새하얀 컵은 에노모토, 15oz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아키야마, 반면 6oz 짜리 캠핑용 스테인리스 컵은 벤자이의 것이다. 히다카는 컵 따윈 들고 다니지 않았고, 카모는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다녔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의 컵은 누구의 것일까.
물을 필요도 없이 후시미 사루히코의 것이지만, 후시미 사루히코가 그것이 제 컵이라고 알아볼지는 의문이다. 그는 제 컵을 탕비실에 들고온 적이 없다. 그는 제 사유물엔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기억이야 하겠지만 잃어버린다 해도 미련을 두지 않을 사람이었다. 남의 것을 쓰지 않기 위해 제가 쓰던 컵의 모양을 기억할는지는 몰라도 없으면 없는대로 일회용 종이컵을 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비실엔 그의 컵이 있다. 그가 사다 둔 적 없는, 그만이 쓰는 컵이.
2.
특무대의 사무실로 쓰는 창가엔 커다란 산세베리아가 있다. 아와시마가 사다둔 것이다. 건조한 공기는 피부에 독이다. 가습기도 가져다 두었다. 그래도 난방기가 돌아가는 사무실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은 당겼고, 수위를 표시하는 정수기의 불빛은 긴 막대의 반만 들어왔다. 사람들은 일이 없어도 커피를 마셨고, 일이 있어도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습관이다. 심심하면 커피라도 마셔야 했고, 일이 많으면 커피를 마셔야만 했다.
후시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뻗었다. 후시미가 타온 적 없는 커피는 그가 사온 적 없는 컵 안에 담겨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뭉툭한 손 끝이 매끈한 컵의 표면에 닿아 더듬거리다 멈췄다. 후시미는 낯선 감각에 고개를 든다. 뜨거운 물에 적당히 미적지근해진 자기컵이 아니었다. 미끈하고 목이 긴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후시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피곤한 눈을 가늘게 뜨고 새 컵을 보던 후시미는 이윽고 의심없이 손을 뻗는다.
제 앞에 놓이면 제 것이었다.
"…―!"
침음을 삼킨다. 전열되지 않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서늘함 탓에 미처 내용물의 온도를 가늠하지 못한 탓이었다. 뱉을 수는 없어 간신히 뜨거운 물을 넘기고 나면 혀 끝과 입술이 얼얼했다. 깜짝 놀라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불어본다. 흰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오는 것은, 커피도 아니었다.
―.
습관적으로 혀를 차나 무엇에 대한 불만인지 알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뜨거웠던 온도에 대한 불만인지, 커피가 아닌 핫초코였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인지.
후시미는 얼얼한 혀로 입 안을 훑었다. 가지런한 치열 밑의 입술이 아팠다.
3.
후시미는 도통 제 것이 아닌, 그러나 제 것인 컵의 온도에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무심코 혀로 훑은 입안이 우둘투둘해 거울을 보면 아랫입술 안쪽이 하얗게 떠있었다. 가늘고 긴 실핏줄이 꿈틀대는 얇은 점막은 다 나을 때쯤이면 다시 뜨고, 뜨길 반복했다. 내용물은 매번 바뀌었다. 커피, 녹차, 홍차, 핫초코. 늘 예상을 빗나가는 온도와 맛에도 불구하고 후시미는 제 기호를 고집하진 않았다. 애초에 누가, 언제 타오는지도 몰랐다. 보나마나 아키야마나 벤자이나 카모일 수도 있고. 갈증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맛이나 온도 따위야 어찌되든 좋았지만.
덕분에 후시미는 그래도 마시기 전에 내용물과 온도를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다. 잠깐의 망설임, 눈으로 내용물을 확인한다. 오늘은 녹차였다. 두 번씩 불어본다. 조심스럽게 기울인다. 다행히도 미적지근했다. 잠깐 긴장했던 어깨가 스르르 내려간다. 그저께의 차는 너무 뜨거워서 후시미의 입술은 또 하얗게 부풀었었다. 혀 앞쪽의 돌기는 빨갛게 변해 미지근한 열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인상을 찡그리는 후시미를 보며 아키야마는 말했다.
"또 데셨어요?"
조금 바보같아 후시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늘한 방 안에서도 입 안 쪽은 모두 뜨거웠다. 서로의 셔츠를 벗기면서 후시미는 대답없이 다시 상대의 입을 틀어막았다. 타인의 혀는 어째서 이렇게나 뜨거울까.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후시미의 어깨를 꽉 붙잡아 누르고 아키야마는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후시미가 느끼는 아키야마의 입술은 매끈했다.
부푼 입술의 표면이 아키야마는 신경쓰이지 않는 걸까 생각해본다. 후시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홀짝홀짝 차를 마시며 후시미는 자꾸만 제 혀로 입술 안쪽을 훑어보았다. 어제 그 난리통에 부푼 것들은 어디론가 쓸려 사라져, 입술은 미끈하게 부드러웠다. 넘어가 버렸을까. 죽은 피부의 조각들이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호르륵, 적당한 온도의 찻물은 또 한꺼풀 벗겨진 아랫입술을 그리 자극하지도 않았다.
4.
벤자이는 탕비실에서 두 개의 스틱커피를 뜯어 넣었다. 작은 컵에 스틱커피 두 개는 적당히 진한 맛이 나온다. 정수기의 물을 따르고 있으면 아키야마가 들어와 두 개의 컵을 들었다. 15oz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아키야마의 것이지만 조금 작은 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후시미 씨 컵?"
"응. 요즘 날이 추워서 물이 빨리 식더라고. 후시미 씨는 그런 데는 전혀 신경쓰시지 않으니까 하나 사왔어."
작은 쪽에 스푼으로 핫초코를 왕창 털어넣고 아키야마는 뜨거운 물을 넣은 다음 휘휘 젓는다.
"그거, 너무 뜨겁지 않을까?"
보온성이 좋은 스테인리스 컵은 뚜껑을 열어놔도 웬만해선 식지 않는다. 그러기 위한 보온 텀블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야마는 찬 물은 한 방울도 섞지 않았다.
"후시미 씨는 눈 앞에 갖다 놔도 일할 땐 잘 모르거든. 한참이나 지나서 마시게 되니까, 그 쯤이면 이 정도가 딱 좋아."
"그런가?"
벤자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제 컵의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신다. 제 컵이야 입구가 넓지만, 저건 그런 것도 아니라 쉽게 식지도 않을텐데.
"잘못하면 입술 데겠다."
"응. 그런 거 같아."
두 개의 텀블러를 들고 아키야마는 탕비실을 나간다. 너무 농땡이 치지 마. 너 요즘 커피 마신단 핑계로 자꾸 탕비실에서 쉬고 있지? 아키야마의 희미한 웃음 섞인 말에 벤자이는 마시던 커피를 입 안에 머금은 채로 웃었다. 눈치도 빠르지. 빈 탕비실에서 혼자 마시는 커피 타임이 벤자이의 쉬는 시간이었다. 스테인레스 컵의 아쉬운 점은 보온성은 좋지만 따뜻한 차를 마실 때의 적당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안은 뜨겁지만, 겉은 차가운 스테인리스 컵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다 벤자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아키야마가 나간 문 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