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비실엔 가지각색의 컵이 있다. 귀여운 곰돌이가 양각으로 그려진, 금색 펄이 들어간 하늘색 컵은 아와시마의 것이다. 가슴이 빵빵한 선정적인 미소녀가 그려진 텀블러는 고토, 찻물 자국 하나 없이 새하얀 컵은 에노모토, 15oz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아키야마, 반면 6oz 짜리 캠핑용 스테인리스 컵은 벤자이의 것이다. 히다카는 컵 따윈 들고 다니지 않았고, 카모는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다녔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의 컵은 누구의 것일까.
물을 필요도 없이 후시미 사루히코의 것이지만, 후시미 사루히코가 그것이 제 컵이라고 알아볼지는 의문이다. 그는 제 컵을 탕비실에 들고온 적이 없다. 그는 제 사유물엔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기억이야 하겠지만 잃어버린다 해도 미련을 두지 않을 사람이었다. 남의 것을 쓰지 않기 위해 제가 쓰던 컵의 모양을 기억할는지는 몰라도 없으면 없는대로 일회용 종이컵을 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비실엔 그의 컵이 있다. 그가 사다 둔 적 없는, 그만이 쓰는 컵이.
2.
특무대의 사무실로 쓰는 창가엔 커다란 산세베리아가 있다. 아와시마가 사다둔 것이다. 건조한 공기는 피부에 독이다. 가습기도 가져다 두었다. 그래도 난방기가 돌아가는 사무실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은 당겼고, 수위를 표시하는 정수기의 불빛은 긴 막대의 반만 들어왔다. 사람들은 일이 없어도 커피를 마셨고, 일이 있어도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습관이다. 심심하면 커피라도 마셔야 했고, 일이 많으면 커피를 마셔야만 했다.
후시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뻗었다. 후시미가 타온 적 없는 커피는 그가 사온 적 없는 컵 안에 담겨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뭉툭한 손 끝이 매끈한 컵의 표면에 닿아 더듬거리다 멈췄다. 후시미는 낯선 감각에 고개를 든다. 뜨거운 물에 적당히 미적지근해진 자기컵이 아니었다. 미끈하고 목이 긴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후시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피곤한 눈을 가늘게 뜨고 새 컵을 보던 후시미는 이윽고 의심없이 손을 뻗는다.
제 앞에 놓이면 제 것이었다.
"…―!"
침음을 삼킨다. 전열되지 않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서늘함 탓에 미처 내용물의 온도를 가늠하지 못한 탓이었다. 뱉을 수는 없어 간신히 뜨거운 물을 넘기고 나면 혀 끝과 입술이 얼얼했다. 깜짝 놀라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불어본다. 흰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오는 것은, 커피도 아니었다.
―.
습관적으로 혀를 차나 무엇에 대한 불만인지 알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뜨거웠던 온도에 대한 불만인지, 커피가 아닌 핫초코였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인지.
후시미는 얼얼한 혀로 입 안을 훑었다. 가지런한 치열 밑의 입술이 아팠다.
3.
후시미는 도통 제 것이 아닌, 그러나 제 것인 컵의 온도에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무심코 혀로 훑은 입안이 우둘투둘해 거울을 보면 아랫입술 안쪽이 하얗게 떠있었다. 가늘고 긴 실핏줄이 꿈틀대는 얇은 점막은 다 나을 때쯤이면 다시 뜨고, 뜨길 반복했다. 내용물은 매번 바뀌었다. 커피, 녹차, 홍차, 핫초코. 늘 예상을 빗나가는 온도와 맛에도 불구하고 후시미는 제 기호를 고집하진 않았다. 애초에 누가, 언제 타오는지도 몰랐다. 보나마나 아키야마나 벤자이나 카모일 수도 있고. 갈증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맛이나 온도 따위야 어찌되든 좋았지만.
덕분에 후시미는 그래도 마시기 전에 내용물과 온도를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다. 잠깐의 망설임, 눈으로 내용물을 확인한다. 오늘은 녹차였다. 두 번씩 불어본다. 조심스럽게 기울인다. 다행히도 미적지근했다. 잠깐 긴장했던 어깨가 스르르 내려간다. 그저께의 차는 너무 뜨거워서 후시미의 입술은 또 하얗게 부풀었었다. 혀 앞쪽의 돌기는 빨갛게 변해 미지근한 열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인상을 찡그리는 후시미를 보며 아키야마는 말했다.
"또 데셨어요?"
조금 바보같아 후시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늘한 방 안에서도 입 안 쪽은 모두 뜨거웠다. 서로의 셔츠를 벗기면서 후시미는 대답없이 다시 상대의 입을 틀어막았다. 타인의 혀는 어째서 이렇게나 뜨거울까.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후시미의 어깨를 꽉 붙잡아 누르고 아키야마는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후시미가 느끼는 아키야마의 입술은 매끈했다.
부푼 입술의 표면이 아키야마는 신경쓰이지 않는 걸까 생각해본다. 후시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홀짝홀짝 차를 마시며 후시미는 자꾸만 제 혀로 입술 안쪽을 훑어보았다. 어제 그 난리통에 부푼 것들은 어디론가 쓸려 사라져, 입술은 미끈하게 부드러웠다. 넘어가 버렸을까. 죽은 피부의 조각들이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호르륵, 적당한 온도의 찻물은 또 한꺼풀 벗겨진 아랫입술을 그리 자극하지도 않았다.
4.
벤자이는 탕비실에서 두 개의 스틱커피를 뜯어 넣었다. 작은 컵에 스틱커피 두 개는 적당히 진한 맛이 나온다. 정수기의 물을 따르고 있으면 아키야마가 들어와 두 개의 컵을 들었다. 15oz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아키야마의 것이지만 조금 작은 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후시미 씨 컵?"
"응. 요즘 날이 추워서 물이 빨리 식더라고. 후시미 씨는 그런 데는 전혀 신경쓰시지 않으니까 하나 사왔어."
작은 쪽에 스푼으로 핫초코를 왕창 털어넣고 아키야마는 뜨거운 물을 넣은 다음 휘휘 젓는다.
"그거, 너무 뜨겁지 않을까?"
보온성이 좋은 스테인리스 컵은 뚜껑을 열어놔도 웬만해선 식지 않는다. 그러기 위한 보온 텀블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야마는 찬 물은 한 방울도 섞지 않았다.
"후시미 씨는 눈 앞에 갖다 놔도 일할 땐 잘 모르거든. 한참이나 지나서 마시게 되니까, 그 쯤이면 이 정도가 딱 좋아."
"그런가?"
벤자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제 컵의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신다. 제 컵이야 입구가 넓지만, 저건 그런 것도 아니라 쉽게 식지도 않을텐데.
"잘못하면 입술 데겠다."
"응. 그런 거 같아."
두 개의 텀블러를 들고 아키야마는 탕비실을 나간다. 너무 농땡이 치지 마. 너 요즘 커피 마신단 핑계로 자꾸 탕비실에서 쉬고 있지? 아키야마의 희미한 웃음 섞인 말에 벤자이는 마시던 커피를 입 안에 머금은 채로 웃었다. 눈치도 빠르지. 빈 탕비실에서 혼자 마시는 커피 타임이 벤자이의 쉬는 시간이었다. 스테인레스 컵의 아쉬운 점은 보온성은 좋지만 따뜻한 차를 마실 때의 적당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안은 뜨겁지만, 겉은 차가운 스테인리스 컵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다 벤자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아키야마가 나간 문 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