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시나 안나는 가끔 꿈을 꾸었다. 온 사방이 화려하게 빛나는 꿈이었다. 안나는 이 꿈 얘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색 밖에 볼 수 없는 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색으로 가득 찬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불길한 얘기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온 사방을 둘러보아도 전부 새빨갛게 타오르는데 개중에서도 창공에 있는 거대한 것이 가장 화려했다. 안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모클레스의 검, 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안나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남자의 것이었다. …미코토. 조용히 읊조리면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주변을 두리번대면 저 먼 곳에 미코토가 있었다. 안나. 하고 이름을 부른다. 그 목소리는 입 안에서 도르륵 구르는 사탕 같았다. 쿠사나기가 안나를 위해 바 구석에 둔 커다란 유리병 안엔 새빨간 체리맛 사탕이 언제나 가득 담겨 있었다.
이 썩으니까 하루에 하나씩만.
안나는 쿠사나기의 그 말을 꼭꼭 지켰지만 가끔은 두 개가 먹고 싶은 날이 있었다. 달콤한 빨간색이 녹아 입 안에 흥건히 고이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상황이었다. 그렇다. 이 꿈은 안나에겐 사탕이 잔뜩 담긴 유리병이다. 황홀하고 아름다운, 달콤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되는 거지."
"안되는 겁니다."
하나는 토마토 쥬스. 하나는 차다. 새빨갛지만 안나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히비스커스 티 하나요.
메뉴판을 보며 무심코 다른 이름을 말하려던 남자는 문득 안나를 보고 다시 한 번 메뉴판을 보더니 똑똑한 발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레드벨벳 케이크 하나.
이건 이 사람의 배려일까. 안나는 문득 생각해본다. 최근엔 이 남자를 꽤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청의 왕, 무나카타 레이시라고 한다. 먼 발치에서, 미코토의 뒤에 숨어서만 봤던 남자와 나란히 앉아 애기를 하는 이 상황이 가끔 낯설어 안나는 빨간 구두가 신겨진 발을 이리저리 까딱이곤 했다. 편하기로 치자면 당연히 쿠사나기나 미사키나 다른 호무라의 일원이 훨씬 편했지만 때로는 전혀 친하지 않고, 그러나 안나의 상황을 알고, 동시에 안나에게 들은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당신은 똑똑합니다."
무나카타는 얼음이 담긴 새빨간 유리잔을 들어 마시며 말했다.
"스오우 미코토가 당신만큼 똑똑했으면 좋았을텐데요."
"……."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멍청한 사람이었습니다."
"……."
"무모하고, 저돌적이고, 생각이란 건 조금도 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다가, 그대로 멍청한 결말을 맞이했죠."
"…미코토는, 멍청하지 않아."
"그럼 바보인 걸로."
"바보 같지도 않아."
"바보입니다."
"바보 아냐."
"ㅂ…그래요. 그냥 그렇다 칩시다."
안나의 단호함에 무나카타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차를 마신다. 안나는 포크로 새빨간 케이크를 잘라 먹는다. 다리는 정처 없이 흔들리고, 치맛단의 빨간 프릴은 박자에 맞춰 나풀거린다. 침묵은 길었다. 토마토 쥬스와 케이크는 그렇게 좋은 조합은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시키지 말아야지. 안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머리 위가 가벼운 건 이상한 느낌이에요."
탄식처럼 흘러나온 감상에 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도 때때로 어깨가 너무 가벼워 확인하려는 것처럼 머리 위를 올려다보곤 했다. 눈 앞의 남자는 안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 검을 머리 위에 이고 있었고 그 무게를 평생 짊어져야 할 업처럼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미코토처럼.
"스오우는 이걸 모르겠죠."
"…응."
일직선으로 빳빳하게 서있던 어깨가 조금 느슨해진다. 무나카타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유리창 밖을 바라본다. 반사된 오렌지빛 석양이 실내로 가득 들어와 남자의 실루엣도 옅은 빨강으로 물들어간다.
"나는, 미코토가 바보였어도 좋아."
"바보가 아니라면서요?"
"레이시도 좋아했지?"
무나카타의 시선이 안나에게로 돌아와 멈춘다. 긴 속눈썹이 투명한 안경 너머로 파르르 떨리며 깜박이는 것을 안나는 지켜보았다. 말없이 무나카타는 잔을 감싸쥐었다가 단번에 비운다. 새빨간 색이 사라졌다. 그것은 전부 무나카타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마침내 온 몸으로 퍼질 빨강을 안나는 상상해본다. 미코토가 남긴 색은 그의 몸 안에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당신이 꾸는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응."
"그 꿈은 그냥 스오우 미코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안나의 말에 못마땅한듯 무나카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일어나보겠습니다.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후시미 군이 잔소리를 할 거 같군요."
"…미코토는."
무나카타의 곧은 등을 보며 안나는 입을 열었다.
"미코토는, 레이시도, 분명 받았을 거야, 선물."
"글쎄요. 저희는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아닌지라."
그 말을 끝으로 무나카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탁 트인 유리창 밖으로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무나카타의 뒷모습이 보인다. 능력을 잃었어도 쿠시나 안나는 여전히 남을 읽어내는데 탁월하다. 우기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미코토는 바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미코토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마 그것 뿐이었겠지. 안나는 무나카타의 흰 오른손에 묻은 새빨간 핏자국을 본다.
화려한 꿈 속에서도 미코토는 저 먼 곳에 있었다. 안나의 이름을 부르지만, 결코 다리가 닿지 않는 먼 곳에. 한참을 달리고 달려도 닿지 않는다. 간신히 얼굴이라도 보이려는 순간이 되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한다. 미코토의 옆에 있는 건, 언제나 흰 손을 가진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