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꿎은 종이에 볼펜만 뭉개다가 기어이 스오우는 펜을 놓았다. 아직 라운지에 갔다 온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새벽이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낮 기숙사 내에서 흡연이라면 당장 사감의 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벌점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기숙사 강제 퇴사라는 최악의 경우까진 가고 싶지 않았기에 스오우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과제 마감은 앞으로 삼일쯤 남았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가늘게 뜬 눈으로 옆을 바라본다. 깔끔하게 개켜진 이불을 보는 것도 벌써 나흘. 월요일에 평소대로 침대를 정리한 뒤 나간 룸메이트는 그 뒤로 쭉 부재중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왔을 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스오우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몇 개의 비평 발제와 레포트를 빼면 평소엔 널널한 스오우와는 달리 그 쪽은 시험기간이든 아니든 언제나 바빴다.
룸메이트가 없는 시간이 많으면 아무래도 편하다. 지난 4일 스오우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이왕이면 쭉 룸메이트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스오우와 동갑인 그는 잔소리가 심하고 생활 패턴도 맞지 않아 빈번하게 말싸움 하기 일쑤였다. 주말에도 번갈아가면서 하는 청소를 스오우가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한바탕 싸운 뒤였다. 그가 없는 사이 방은 난장판이었다. 일부러 보란 듯이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던져 놔 치우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
지겹군.
스오우는 그렇게 침대에서 미적대다가 일어났다. 시간강사인 교수의 시간표가 어떻게 꼬였는지 이번학기 중세국어는 여섯시부터 아홉시까지 풀강이었다. 슬슬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뭔가 허전해 휘적휘적 방 안을 둘러보다 스오우는 방문을 잠궜다.
기숙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미 룸메이트가 있었다. 정리를 하던 중이었는지 책장에 전공서를 꽂는 중이었다. 옷까지 포함해서 달랑 두 박스 정도인 스오우와는 달리 상대는 책만 두 박스 정도였다.
"무나카타 레이시, 기계공학 2학년입니다."
문을 열고 마주친 눈에 앞으로 스오우의 룸메이트가 될 그, 무나카타 레이시는 자기소개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안경 쓴 샌님이라니 벌써부터 피곤해질 게 뻔해 스오우는 마지못해 손을 붙잡고 인사했다.
"스오우 미코토, 국문과 2학년."
"국문과?"
"불만인가."
"아니…."
한참을 위아래로 훑던 시선이 스오우의 얼굴에서 다시 멈춘다.
"당연히 체대생일 줄."
"말이 짧아졌군."
"동갑이면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가 없잖아. 아니면 존댓말을 듣고 싶나요, 스오우?"
"징그러우니 사양하지."
"그럼 저녁에 약속은?"
"없는데."
"짐 정리 끝나면 잠깐 생활 규칙부터 정해봅시다."
진짜 제대로 잘못 걸렸군.
인사 뒤에 규칙 운운 하는 룸메이트라니 벌써부터 빡빡한 앞날이 그려져 스오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 치고는 꽤 잘 지냈다. 스오우의 실내 흡연을 몇 마디의 잔소리로 묵인해줬고, 가끔은 반 강제적으로 야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 귀찮은 스오우의 지갑에서 철저하게 반액을 가져간 뒤 치킨을 주문했다 -.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연어초밥이나 서로인 스테이크 같은 걸 우아하게 먹을 것 같은 녀석이 닭다리를 뜯고 있는 걸 보면 묘하게 웃겼다. 방에서 뭘 먹는 건 철저하게 싫어해 항상 휴게실에 들고 가서 먹는 무나카타가 방에서 삼각김밥이나 도너츠를 우겨 넣고 있을 때는 눈이 돌아갈 만큼 과제가 쏟아지는 때라는 것도 스오우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부과대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귀찮아 하는 것도 스오우는 알고 있었다. 총학생회 회의를 갔다 온 뒤에는 책상에 늘어져 "지겨워."라고 푸념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런 부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그린듯한 모범생이라 끼고 있던 이어폰도 벗고 뒤를 돌아봤던 기억이 있다. 11월은 선거철이라 무나카타는 과제와 더불어 이리저리 불려다녔고 스오우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기력을 다해 씻은 뒤 - 무나카타는 아무리 피곤해도 꼭 씻고 잤다 - 머리만 말리고 잠들기가 일쑤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을 손이 차갑고 입술이 버석해서 "개고생이군."이라고 말하면 무나카타는 "개고생이지." 험악하게 내뱉고는 다시 한 번 키스했다.
그 개고생을 무나카타는 올해 더 큰 스케일로 하고 있었다. 갈수록 학생회 지원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부과대가 과대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 같았다. 개고생을 사서 한다며 스오우가 비웃으면 무나카타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희미하게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게 마지막일 것 같았다. 폭설과 함께 학기는 끝을 맞이했다. 눈이 소복하다 못해 무지막지하게 쌓여 자동차 한 대도 움직이지 못하고 대부분의 학교가 휴교되거나 회사마저 휴일이 된 날부터 며칠을 얼어있던 눈이 오랜만의 영상 기온으로 다 녹을 때까지 스오우와 무나카타는 딱 붙어 지냈다. 말 그대로.
짐을 싸야되는데 더러워진 시트 그대로 들고 갈 수는 없다면서 무나카타는 새벽 두 시에 세탁기를 돌렸다. 그 층에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은 둘이 마지막이었다. 건조기에서 시트를 꺼내 온 무나카타가 박스 안에 잘 개어 넣는 걸 보면서 스오우는 담배를 물었다.
"불 좀."
"방에서는 안 핀다더니."
"밖에 나가면 얼어죽을 거 같아서."
밤샘이 많은 과 혹은 그럴듯한 직책에 있는 자들의 필연인지 우연인지 무나카타도 흡연자였다. 처음엔 내색을 안했지만 몇 번 밤을 새고 오면 옷에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묻어 났다. 아무리 휴대용 탈취제를 들고 다녀도 학부생의 7할이 흡연자인 상황에선 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얇은 입술에 흰 담배를 물고 무나카타는 스오우의 얼굴을 살짝 제 쪽으로 돌렸다. 들이쉬는 숨을 따라 맞닿은 곳에서 부터 빨간 불씨가 야금야금 옮겨갔다.
"감사."
"별 말씀을."
흰 연기가 내뿜어져 찬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는 찰나 한 번 더 키스했다. 입에서 쓴 맛이 나, 둘 다 인상을 찡그리고 웃었다.
열쇠가 헛돌았다. 어둠 속에서 이불만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던 침대에 둥근 형체가 있음을 스오우는 눈치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사람이 있든 말든 켰을 테지만 방을 비운 나흘 내내 제대로 된 잠은 자지 못했을 테니 스오우는 약간의 자비를 발휘하기로 했다. 스탠드를 켜고, 옷을 갈아입고 가만히 드러누워 있으면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과제는 여즉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고 십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나온 여류 시인의 날카롭게 찢겨진 스테인레스 같은 시를 비평하기엔 무언가 진부한 단어들만 떠올랐다.
낡은 기숙사의 문은 나무였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가볍기까지 해서 바람 한 번 잘못 불었다간 온 복도에 울려퍼지도록 꽝-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에 신경쓰기가 싫어 스오우는 창문을 열고 불을 붙였다.
"시……"
"C? 국문과에선 C언어도 배웁니까? 아, 그것도 언어구나."
"잠이 덜 깼으면 다시 가서 침대에 누워라, 무나카타."
"불이나 좀."
멋대로 창틀에 올려둔 스오우의 담뱃갑에서 한 대를 꺼내 무나카타는 입에 문다. 머리도 말리지 않고 잤는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얼굴이 평소보다 퀭했다. 스오우의 담배로부터 불을 얻고 있는 무나카타의 속눈썹만큼은 여전히 길었다.
"안 본 사이에 10년은 늙은 것 같은데."
"괜찮아. 네 옆에 있으면 원래 고등학생 같아 보여."
"미쳤군. 언제 들어왔지?"
"여섯시."
"나흘 내내 밤 샜나?"
"라꾸라꾸에서 여덟시간 정도. 과대는 라꾸라꾸 특권이 있어."
창틀에 턱을 얹고 무기력하게 담배를 물고 있는 무나카타의 입술에서 담배를 뺏어 들고 스오우는 키스했다. 마지막일 줄 알았던 키스의 쓴 맛도 올해는 익숙해졌다.
"놀랐나?"
다음 학기 새로 배정 받은 방에도 무나카타는 있었다. 작년보다 더 늘어난 전공서적들을 꽂아넣으며 무나카타는 말했다.
"룸메이트 신청서를 넣어도 실제로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서."
"네가 딱히 편한 룸메이트는 아닌데."
"이 쪽도 물론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은데. 밑에 내려가서 룸메이트를 바꾸겠어?"
"…잘 부탁하지, 무나카타."
"물론, 스오우."
까다로운 줄 알았던 룸메이트는 생각보단 나쁘지 않았다. 스오우의 실내 흡연을 몇 마디의 잔소리로 묵인해줬고, 연어초밥이나 서로인 스테이크를 먹을 것 같은 입술로 키스를 잘했다. 방에서 뭘 먹는 건 철저하게 싫어해 항상 휴게실에 들고 가서 먹는 무나카타가 방에서 삼각김밥이나 도너츠를 우겨 넣고 있을 때는 눈이 돌아갈 만큼 과제가 쏟아지는 때라는 것도 스오우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고, 과대의 직책을 몹시 귀찮아하지만 사실 그걸 한 이유는 과방의 안락한 라꾸라꾸 침대 때문이란 것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