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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후시] Throat Cutting
15.01.31 동페온 [배신주의]에 나오는 못님과의 트윈지 모티브 원안.
원고는 현실적인 한계상 여러 부분이 쳐지고 전혀 다른 설정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1.
아이는 어렵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후시미는 도무지 아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중학생만 되어도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초등학생, 미취학 아동까지 가다보면 후시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변까지 지리며 엉엉 우는 아이를 두고 후시미가 내내 서성이다 겨우 생각한 방식은 윽박지르는 것뿐이었다.
“시끄러워.”
후시미는 버럭 소리쳤지만 위협은 전혀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다른 데에는 나름대로 경험이 쌓여 프로라고 자부할 수 있는데 도저히 아이만은 안됐다. 아. 내가 대체 왜 이 녀석을 선택한걸까. 이제와서 막심한 후회가 몰려들지만 어쩌겠는가.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조용!”
유치원 선생님들이 수수깡 하나 손에 들고 탁탁 치면서 이렇게 얘기하면 애들은 다 쳐다보는 거 같던데. 후시미는 기억을 더듬어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독하다는 유치원 선생님 흉내를 내보려고 했으나 택도 없는 소리였다.
- 수수깡이 아니라 몽키스패너라 문제인걸까.
근본적으로 틀려먹은 사고방식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게 후시미의 죄라면 죄였다. 싫어요! 싫어! 싫다고! 저 집에 갈 거란 말이에요! 퉁퉁 부은 얼굴로 쩍쩍 갈라진 목이 쇳소리를 낸다. 못해도 뼈 하나는 부러졌을 텐데 빽뺵 소리를 지르는 게 크면 장군감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감탄이야 애 엄마들이나 하는 거고 그저 타인인 후시미에게는 기어이 짜증이 한계를 넘어갈 만한 소음이었다.
“조용히……"
…하라니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세계는 안온해진다.
아. 좀 살 것 같네.
긴 한숨과 함께 홀가분한 마음도 잠시. 무심코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스패너를 손바닥에 툭툭 치는 순간, 묻어나는 찐득함에 후시미는 동작을 멈췄다.
“…야.”
발로 슬쩍 쳐보는데 쓰러진 아이는 미동도 없다. 매끈한 뱀처럼 스멀스멀 핏줄기가 기어나가는 꼴이 영 좋지 않다. 어쩐지 오늘따라 스패너가 손에 착착 감기더라니. 힘 조절을 잘못한 건지 애가 너무 어렸던 건지 묵직한 스패너는 아이의 여린 두개골을 단번에 부서뜨리고 기어이 뇌를 뭉개버린 모양이었다.
“밑작업, 다 못했는데…….”
후시미는 망연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 보았다. 작업은 늘 섬세하고 신중해야 했다. 나름대로의 절차가 있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다져진 숙련된 노하우도 있다. 무엇보다 후시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목적을 두는 사람이었다. 공포에 질린 눈, 모세혈관을 따라 점점이 피어나는 울혈, 뼈가 부서지는 소리, 짜릿한 비명, 경련을 일으키는 손, 부어오른 피부, 보통은 되지 않는 각도로 비틀어진 사지를 천천히 눈으로 감상하는 게 후시미의 취향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괴상한 심미안을 아무데나 갖다 대는 이웃집 남자의 경우 예쁜 게 제일이라면서 항상 가장 아름답게 코디한 뒤에 그대로 얼려 박살내는 취향이었다. 후시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취향은 존중해야 하는 법이다.
어쩔 수 없지.
후시미는 다시 한 번 피와 회백색의 점액질이 묻은 스패너를 치켜들었다. 방수포는 미리 깔아놔서 참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힘껏 내리치려는 순간―
쾅쾅쾅
“후시미 씨, 후시미 씨 안에 있죠?”
거칠게 문이 두들겨지는 소리와 함께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린다. 이럴 거면 애초에 노크는 왜 하나. 후시미는 떨떠름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괴상한 취향의 이웃집 남자다. 평소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예의 바른 얼굴인데 오늘은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왜요, 아키야마 씨.”
이웃집 남자의 이름은 아키야마 히모리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일곱. 직업은 고등학교 화학 교사. 선생님이라니, 꽤나 번듯한 직함이지만 저 변태 같은 남자가 고등학교 교사가 된 이유는 안 보고도 뻔하다. 여고생 때문이지. 학교에서는 꽤나 인기좋은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그 선생님이 밤새도록 저를 붙잡고 여고생 찬가를 불렀다고 하면 믿으련지 모르겠다. 더불어서 아키야마는 미적 기준은 보통의 기준에서 한껏 어긋나 있는 게 분명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잔뜩 튀어있는 몰골을 보고 예쁘네 어쩌네 지껄이는 입을 뭘로 후려쳐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지 후시미는 한동안 고민했었다. 설마 작업실을 같이 쓰게 될 줄이야 그 당시엔 꿈에도 몰랐지만.
"후시미 씨, 제발 그 애새끼 아가리 좀 닥……. 어, 오늘은 일찍 끝났네요?"
쿵쿵거리면서 막 대거리를 하려던 아키야마가 후시미 뒤에 널부러진 것을 보더니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인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후시미가 슬쩍 시선을 외면하면 아키야마가 흐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생글생글 웃는다.
"실수구나."
"……."
"후시미 씨도 실수 하시네요."
"…시끄러워요. 그 전에 용건은 뭔데요."
"집중 안돼서 내려왔는데 어차피 끝난거면 잘됐네요. 제 거 빌려드릴까요?"
보기드문 후시미의 '실수'에 아키야마는 퍽 만족스러운 모양인지 몇 번이고 후시미의 옆에서 실수, 실수 하는 소리를 연발한다. 스패너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가는 걸 참으면서 후시미는 고민했다.
남자가 빌려주겠다고 하는 건 액화질소다. 아키야마는 2-30대의 여자들만 골라서 피를 쭉 빼고 예쁘게 코디한 다음 질소로 바짝 얼려 깨부수는 걸 좋아했다. 처리가 간편해서 후시미도 한 번 빌려 쓴 이후에는 솔직히 감탄했다. 톱으로 자르고 믹서기에 가는 건 통으로 하루를 써야 하는 일이다. 힘도 많이 들고 시끄럽기도 하고 비위가 약한 후시미에겐 늘 고역이었다. 흐물흐물한 고깃덩어리들이 썩어가는게 얼마나 구역질 나는 일인지 도축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알까. 반면에 얼려서 깨부수면 힘도 덜 드는 데가 뒷처리도 편했다. 잘게 부순 다음 욕조에서 그대로 떠내려보내든가 큰 것들은 따로 모아 버리면 된다. 화학교사라는 타이틀은 질소를 사기에도 학교의 소각장을 쓰기에도 편리한 직함이었다.
"같이 저녁 먹고 해요, 후시미 씨."
네? 조르는 것처럼 남자는 사근거리며 후시미의 팔을 끌고 나간다. 뭐에 홀린듯이 끌려가면서도 후시미는 단순히 편하기 때문이라고, 애써 누군가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쾅- 문이 닫히면 버려진 소각장은 적막하다. 두 구의 시체가 말없이 울부짖는 암흑이었다.
2.
팔이 후들후들거려서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쳤다. 애초에 뭘 쥐고 있는 지도 몰랐다. 무거운 공구가 죽은 살덩이에 척하고 감겨드는 느낌이 괴상했다. 철벅-하는 소리가 났을 지도 모른다. 은빛의 몽키스패너에 끈적하게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아, 그랬지. 공구함 제일 위에 있는 게 스패너였다. 차를 좋아하던 남자는 수리공 누구도 믿지 않아 집에서 직접 차를 수리했다. 공구는 종류별로 한 세트씩은 있었는데 구경이 다르고 모양이 다른 스패너 한 세트는 공구함 제일 위에 있었다.
팔은 쭉 늘어졌는데 무릎으로 버티고 서있던 다리는 허벅지가 뻣뻣하게 굳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바지도 척척했다. 부드럽고 탄력있는 피부와 질긴 근섬유가 타격으로 '찢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후시미는 그 날 처음 알았다. 찢어진 사이로 뭐가 있나 싶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매끈하고 탄력있는 얇은 그게 내장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후시미는 전부 게워냈다. 시큼한 위액 냄새가 역겨워 몇 번의 헛구역질을 했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위액이 코로 넘어왔는데도 손으로 닦을 수가 없었다. 무심코 가져다 댄 손에서 비릿한 피비린내가 훅 끼쳐 손도 피투성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시선을 들었을 때 부릅 뜬 눈과 마주쳤다.
"으아아악―"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뒤로 주저앉아 버렸다. 올라탄 다리가 딱딱했다. 흰 피부는 유전이었다. 바닥을 짚은 제 손등과 으깨져 어딘가가 움푹움푹 패여 있는 손등을 비교해본다. 평소보다 하얗게 질려버린 제 손등과 달리 으깨진 손등은 희미하게 푸른 빛이 맴도는 것 같았다.
"아… 아빠…?"
그럴 리 없는데도 입 안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아빠, 라니. 아버지? 아빠? 어느 쪽이든 후시미가 그를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후시미는 피해다니기 일쑤였고 그는 후시미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다. 그의 장난에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지한 어린애들의 장난이 그렇듯 선천적인 잔혹함은 언제나 바늘로 망막을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새하얀 눈에 햇빛이 반사되는 풍경을 보면 눈이 멀어버린다던데 딱 그 꼴이었다. 조롱과 멸시, 절망과 불안을 후시미에게 선물처럼 가득 안겨줘야 흡족한 남자였다.
"죽었…주, 죽었어…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방의 보일러가 꺼져있는 건지 아니면 창문이 열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착각이었는지 온 몸에 스산한 바람이 한 겹 씌워졌다. 소름이 쭉 돋았다.
"나, 나…나 이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굳어가는 시체의 멱살을 잡고 뭐라 악다구니를 썼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한참을 소리 지르다가 웃었는지 울었는지 정신을 차리면 속이 뒤틀리는 허기와 함께 목이 쉬어있었다. 밥을 먹고 창문을 열고 차고에 있는 모든 공구함을 끄집어 냈다. 고된 이틀이었다.
복도 저 멀리로 남자의 경쾌한 발걸음이 멀어진다. 멍하니 있다가 보나마나 시덥잖은 아키야마의 아침인사에 깼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씨발……"
게다가 꿈까지 꾼 건, 틀림없이 그 남자의 탓이었다.
오랫동안 독신생활을 한데다 예쁜 걸 좋아하는 아키야마는 요리실력이 수준급이었다. 후시미가 야채를 죽어라 싫어하는 걸 알면서, 비위가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날 저녁은 레어 스테이크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에 후시미는 질색을 했지만 아키야마는 "원래 작업하려면 체력 많이 필요해요."라며 천연덕스럽게 응시했다. 이 날을 위해 사치했다고 하는 소고기는, 집안은 콩가루였던 주제에 돈은 썩어나게 많아 입맛은 고급인 후시미에게도 충분히 맛있었다. 거기에 더해진 생간만 아니었다면 아마 오늘 꿈 같은 건 꾸지 않았을 거다.
여전히 '홧김에' 사람을 죽이는 후시미와는 달리 아키야마는 치밀하게 공들이는 타입이었다. 대상으로 잡은 여자를 관찰하고 인간관계가 어떤지, 직장생활은 어떤지, 성격까지 못해도 한 달에서 두 달은 살펴본다고 했다. 꼬박꼬박 출퇴근 하는 직장인 주제에 언제 그런 걸 다 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키야마는 정말로 용의주도했다. 아키야마가 대상으로 삼는 건 주로 혼자 살고 소심한 성격에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그리고 꾸미는 데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
"아무도 모르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제가 발견하고 개화시키는 거잖아요."
말만 들으면 성인군자요, 투철한 봉사정신에 입각한 선의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그녀들이 평생을 살면서 가장 아름다울 때가 죽고 난 이후라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아키야마는 또 덧붙였다. 의욕없는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면서 빌 때가 가장 생동감 넘치거든요.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구운 파프리카나 양파 같은 건 멀찌감치 밀어놓고 칼질을 하면서 후시미는 속으로 스무번쯤 그 생각을 했다. 어디서 걸린 건 시끄러운 애새끼에 힘조절 못해서 한 방에 보내, 하필이면 날도 날이라 아키야마랑 날짜까지 겹쳤다니. 못해도 아키야마는 열흘 전부터 이 날을 예정일로 잡았을 텐데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 이 날을 잡은 제가 병신이었다.
우적우적 스테이크를 다 먹은 후시미에게 아키야마는 후식이 필요하겠다며 토마토를 갈아주었다.
후시미 씨는 너무 고기만 먹으니까요.
말이야 번지르르하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고의가 분명했다. 후시미는 토마토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이 이상한 관계는 토막난 팔목을 갈고 있던 후시미를 아키야마가 발견하면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영부영 우연히 발견한 폐공장을 작업실로 같이 쓰는 사이까지 됐지만 후시미는 아키야마가 영 불편했다. 겉으로야 예의바르고 헤프게 웃고 붙임성도 좋지만 괴랄한 미적 감각의 연쇄살인범인 데다 - 후시미는 저도 그렇다는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 도무지 아키야마가 후시미에게 친근하게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몇 번이고 죽일까 살릴까 하는 고민을 했을 터다. 후시미는 아키야마가 20kg짜리 액화질소 다섯통을 옮기는 것과 이상한 색으로 녹이 슨 문간의 실톱을 보았고, 마찬가지로 아키야마도 신발장을 가득 메운 종류별 공구 세트를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사소한 것들은 필요없다. 아마 본능일 것이다. 저건 동류 혹은 적이라는 예민한 육감이 서로를 알아보게 만들었으니 계기는 그저 투명한 베일을 걷은 것 이상은 되지 못하리라.
아키야마가 후시미의 뒤를 밟아 커다란 공업용 믹서기에 시체를 갈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후시미는 재빨리 공구통을 더듬었다. 아키야마도 뒤에 잘 벼려진 날붙이 하나쯤은 갖고 있었으리라. 지금까지 웃는 낯과 귀찮음으로 포장하고 있던 신경전이 본격적인 무대 위로 올라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아키야마는 흔쾌히 비무장의 의미로 양 손을 들고는 후시미의 앞으로 성큼 걸어와 말했던 것이다.
"예쁘네요, 후시미 씨."
진짜 개소리지.
웅얼거리던 후시미는 따끔한 통증에 손으로 입가를 더듬었다. 입 옆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아, 진짜 가지가지. 이것도 그 남자 탓이었다. 밀폐된 공간에 액화질소를 가득 채워두고 아키야마와 후시미는 얌전히 기다렸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시체는 사람이었던 흔적도 없이 꽝꽝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적당히 큰 조각들 - 예를 들어 뼛조각 - 은 주워모으고 나머지는 물을 뿌려 하수구로 흘려보내는 작업까지 세시간쯤 걸렸다. 아키야마와는 달리 후시미가 죽였던 여섯살짜리 어린 애는 그런 큰 조각도 찾기가 드물었다.
"이건 제가 버릴게요."
학교 소각장 얘기였다. 고기로 든든하게 저녁을 먹은 보람도 없이 탈진해서 그대로 주저앉은 후시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열 손가락을 써야 할 만큼 한 작업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다 끝내고 나면 묘한 무력감이 후시미의 발목을 붙잡았다. 잡히면 죽겠지. 변명의 여지도 없이 교수형 감이다. 후시미가 죽인 아홉명 중에 성인 남자는 네 명, 어린 애가 다섯명이었다. 나이는 모르지만 어림잡아 대여섯살짜리 미취학 아동이 많았다.
죽는 건 무서웠다. 목이 졸리면 온 몸의 근육이 이완되면서 안에 있던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뇌의 명령을 받아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신체가 순식간에 덜렁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되는 과정을 후시미는 줄곧 지켜보았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끔찍했다. 차라리 죽는다면 시체조차 못 찾게 바다에서 죽고 싶었다. 육지에서 죽는건, 이렇게나 뒷처리가 힘들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남을 꾸준히 죽인다는 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인지 후시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떡해. 나는 죽이고 싶지 않았어. 그냥, 그냥…….
"후시미 씨."
망연하게 앉아있던 후시미를 아키야마가 부른다. 멍하니 고개를 돌린 후시미에게 아키야마는 같이 마주앉아 웃었다.
"후시미 씨는 이 때가 제일 예뻐요."
"진짜 참신한 개소리네요."
"아뇨, 정말로."
가끔은……
후시미의 공구함에서 꺼낸 게 분명한 드라이버의 손잡이를 후시미의 입안에 넣고 휘저었다. 이물감에 반사적으로 목젖이 손잡이를 밀어내지만 아키야마는 우악스럽게 후시미의 턱을 붙잡고 강제로 입을 벌렸다. 이 남자의 가장 무서운 점이 이거였다. 평소에는 퍽 친근하게 구는 주제에 가끔 긴 작업을 끝내고 나면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 다정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예쁘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칭찬을 하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예뻐요.
타액이 묻은 드라이버를 빼내고 고백이라도 하듯 아키야마는 속삭인다. 얼마나 물고 있었던 건지 입 안이 얼얼했다. 손등으로 입을 훔치고 째려보는 후시미의 어깨를 먼저 일어난 아키야마가 가볍게 두드린다.
"이제 가요. 내일은 저도 출근해야 돼서."
그렇게 말하며 내밀어진 손을 후시미는 외면하고 일어났다.
"진짜 미친놈이지, 그 새끼는."
얼마나 우악스럽게 헤집은 건지 입이 찢어질 정도라니. 게다가 미끄럼방지를 위한 고무패킹 덕택인지 아직도 입 안이 텁텁했다. 일어나서 물 한 잔을 마신 뒤에 후시미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키야마는 아키야마고, 꿈은 꿈이고, 잠은 잠이었다. 실종신고는 시간의 경과로 사망으로 전환됐다. 후시미의 아버지는 일가친척이 없었고 어머니는 후시미를 맡고 싶어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타인으로 치부하는 가족이었다. 양육비 대신 넘어온 유산은 후시미가 평생을 이렇게 놀고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여고생들과 함께 즐거운 월요일 출근 만끽하세요, 아키야마 씨. 저는 당신이 퇴근할 때까지도 잘 수 있답니다.
출근 때문에 징징거리는 아키야마의 얼굴을 생각하면 조금쯤은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가물거리는 눈을 감으면 눈꺼풀의 뒤로 희미하게 죽은 사람의 시선과 마주친다. 당신은 개새끼였어. 죽어야 마땅했고. 잠들기 전에 후시미는 킬킬댔다. 목이 메였다.
3.
역 앞에 가만히 앉아 사람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누구랑 통화하는지 얼굴에 미소를 함뿍 띄고 있는 사람, 휴대전화의 액정화면을 보면서 키들대는 사람, 땅바닥만 보며 걷는 사람, 앞만 보면서 걷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무력함을 어깨에 얹고 기어가는 사람. 색이 없는 사람의 뒤를 쫓아간다. 밤에도 색은 있다. 이토록 세상이 찬란하게 흔들리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색맹처럼 구는 걸까?
아키야마는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목이 졸리고 시야가 흐려지던 그 날 이후로 아키야마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기로 마음 먹었다.
"선생님……."
발간 뺨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 시기의 여자들이란 참으로 민감하다. 자존심 강하고 오만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쓸쓸한 그림자를 갖고 있다. 어떻게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바짝 깨물었으나 북받치는듯 오히려 끅끅대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들썩인다. 고개를 숙인 아이의 셔츠 목깃 아래로 흰 목덜미가 노을을 머금고 반짝였다. 거봐. 이 아이에겐 아직도 색이 있다. 아키야마는 이 시기의 여자들을 참 강하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한덩이씩 끌어안고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10대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너무 울지 말고, 잘될거야. 일단 부모님이 널 위해 노력하신다면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성적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선생님도 도울 일 있으면 도울게. 응?"
"…네."
그런데 왜 다들 자라고 나면 빛을 잃어버리는 걸까. 아키야마는 어머니가 기르던 텃밭의 꽃들을 생각했다. 눈이 쨍하게 부실 정도로 예뻤다. 노란색, 자주색, 주황색, 흰색. 그 화려한 색의 꽃들을 기르면서도 그녀는 어둠을 이고 다녔다. 발끝에서부터 야금야금 까맣게 어둠에 먹혀가던 그녀의 억센 손아귀가 목을 졸랐을 때 열린 문으로 아키야마는 여름의 채송화를 보았다. 온통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린 시야에서도 빛나던 꽃. 당신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나중에 집을 처분하면서 정리하던 짐 중엔 앨범이 있었다. 앨범은 한번도 손을 타지 않은 것처럼 새 것이었으나 사진은 어딘가 그을리고 혹은 부분부분이 탔거나 물을 먹어 울어 있었다. 그 집이 불에 탄 것은 아키야마가 일곱살 때였다. 가스폭발이라고 했었나. 어린 아키야마는 그저 엄마와 같이 시장에 다녀왔을 뿐인데 집이 사라져있어 당황했었다. 휴일이라 아버지도 조부모님도 집에 계셨었다. 시체는 세 구가 나왔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타 치아기록으로 신원을 조회했다고 했다. 어려운 말이었다.
엄마, 새까매.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팔을 들었다. 구두주걱, 빗자루, 프라이팬, 가죽벨트.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로 맞아봤지만 어디선가 쇠파이프가 튀어나왔을 땐 아키야마도 도망쳤다. 10년은 참 긴 시간이었고 태양에도 새까맣게 그을린 사람이 완전히 타버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반만 붙어있던 목이 덜렁덜렁 늘어지던 풍경이 사진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위로 비쳤다. 어둠을 어깨에 이고 먼 곳을 응시하던 그녀는 완력으로는 아키야마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야 얼굴에 빛이 돌았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어질어질한 머릿 속에서도 그건 참 꽃처럼 아름다웠다. 제게 들이밀어진 칼을 든 손을 잡아꺾은 아키야마는 그대로 힘을 주어 밀었다. 칼은 예리하게 목근육을 반으로 갈랐다. 홉뜬 눈 안의 동공이 우주처럼 반짝였다.
죽은 엄마와 기절한 아들을 발견한 건 옆집 개였다. 하도 시끄럽게 짖어대길래 문을 열었더니 글쎄 그 꼴이지 뭐에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옆집 아줌마가 그렇게 증언했다고 했다.
병실에서 깨어난 다음날 아키야마는 처음으로 단 맛을 본 아이처럼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색을 잃었다면 다시 색을 찾아주면 된다. 죽어갈 때마다 그녀들의 동공은 우주처럼 반짝였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울 때 빛이 날까?
아키야마는 진실로 10대의 모든 소년 소녀들은 빛난다, 라는 의외로 순진하고 건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교사였다. 적어도 후시미 사루히코를 보기 전까지는. 우연히 마주친 옆집 남자는 이제 막 20대가 됐을까 싶었다. 시력이 반으로 떨어진 이후 세상을 더욱 잘 보게 된 아키야마는 그러나 그에게서 그 어떤 빛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한 번도 빛나지 않았던 어둠이 그 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키야마는 그 사람이 싫었다. 후시미 사루히코라는 남자. 단물이 쭉 빠진 허깨비같은 모양새로 용케 살아있다 싶었다. 남자는 취향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며 아키야마는 그를 관찰했다.
나이를 보면 학교를 다닐만도 한데 그는 학교도 다니지 않고 일도 하지 않는지 규칙적으로 나가는 때가 없었다. 친구도 없는건지 주말에도 나가는 걸 본 게 극히 드물었다. 가끔 외출을 한다 싶으면 인스턴트 식품을 가득 채운 편의점 봉투를 털레털레 들고 돌아오곤 했다. 지금까지 줄곧 대상으로 삼았던 여자들과 비슷했으나 그럼에도 실행에 옮길 맘이 들지 않았던 것은 과연 그의 눈 앞에 칼을 들이민다고 해서 그가 빛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빛나던 시절이 없었던 사람이 과연 그 때라고 빛날 수 있을까.
그 비오는 밤은 어떤 충동이었는지 모른다. 본능이었을 수도 있고 짜증이었을 수도 있다. 옆집에 살면서 줄곧 신경을 건드리는 그를, 어떤 방식이든 없애버려야 겠다고 결심했던 날이었다. 답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는 소리가 아키야마의 신경줄을 긁었던 것 같기도 했다. 가장 예리한 단도를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아키야마는 그를 쫓았다. 새까만 옷에 새까만 우산을 쓴 그가 한참이나 어둠 속을 걸어 있는 줄도 몰랐던 공장 안에 들어섰을 때,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아키야마는 보았다.
"후시미 씨는 이 때가 제일 예뻐요."
후시미는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사람을 잡아다가 팼고 죽였다. 아무거나 공구함에서 잡히는 대로 들고서 두들겼다.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온 몸이 울긋불긋해진 후에야 후시미는 최후의 일격처럼 머리를 내려쳤다. 가쁜 숨을 내리쉬면서 헐떡이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게 후시미가 갖고 있는 유일한 색이었다. 아키야마는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저렇게 고통스러운 얼굴로 사람을 죽여야 할까. 아키야마는 오로지 기쁨을 위해서만 죽였다. 갖은 인상을 쓰면서 울 것 같은 얼굴로 후시미는 사람을 죽였다. 부서진 살덩이들을 믹서기에 긁어모으는 얼굴에선 땀과 눈물이 같이 흘렀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고 후시미는 최후의 최후까지 작업에 열중했다. 그러고 나면 지친듯이 주저앉아 망연한 얼굴로 어딘가 먼 곳을 응시했다. 그 칠흑같은 동공 속에 숨겨진 우주가 빛나는 때였다.
밭은 숨을 내쉬는 입 안에 드라이버를 밀어넣어 헤집는다. 우악스럽게 턱을 붙잡고 시선을 마주친다. 반짝거리는 우주가 황홀하고 발간 얼굴로 내쉬는 숨조차 화려했다. 후시미가 빛나는 때는 오로지 그 때 뿐이었다. 이대로 죽일까. 그러나 그녀들과는 다르게 후시미는 죽을 때는 결코 빛나지 않을 것이다. 숨이 멎으면 멎는 대로 소멸해버릴 우주를 아키야마는 포기할 수 없었다.
진득한 타액이 묻어나온 입술이 그새 퉁퉁 불어있었다. 채송화보다 더 빨간 색이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예뻐요."
정말이에요. 그 벌어진 입에 드라이버 대신 내 걸 쳐넣고 싶을 정도로.
건드리면 툭, 하고 터져서.
뜨끈하고 찐득하게 묻어나온 것을 흐르는 물에 닦아낸다. 아키야마는 늘 그녀들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건 자신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후시미는 아니었다. 후시미를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아키야마가 아닌 그의 동공 너머에 맺힌 무언가의 상이다. 한 번도 빛난 적 없는 그림자를 꽃으로 개화시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키야마의 몫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후시미를 빛나게 하고 싶었다. 발갛고, 화려하고, 예쁘고,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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