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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후시]
해시태그 미코후시 2013. 03
후우- 하고 숨을 내뱉어도 자꾸만 몸이 움츠러 들었다. 기세 좋던 여름은 어디로 갔는지 쓸쓸한 바람이 흰 목덜미를 스친다. 사람들은 반팔 위에 얇은 긴팔 옷을 하나씩 껴입고 다니는 시기였다. 그래도 간혹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이 있었고, 오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모두 아직 춥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쌀쌀함은 후시미만의 몫이었다. 때 이른 교복 재킷까지 껴입고 있는데도 셔츠 밑에 살갗에까지 찬 바람이 닿았다. 더위를 제법 타던 야타는 호무라에 들어간 이후 아예 한겨울에도 반팔 차림이 너끈할 정도로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언제나 후끈거릴 정도로 따뜻한 손이었다. 후시미는 그 손 대신 차가운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닫혀 있어도 열려있을 문임을 후시미는 안다. 이 안에는 주인이 없어도 늘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쿠사나기 씨는, 없겠지?
여기 오기 전에도 대여섯번, 사실은 한참이나 생각하고 있었을 말을 일부러 더 꺼내어 되뇌어 본다.
그래서 더 부담이었다. 쿠사나기가 운영하는 이 가게엔 언제나 거주자가 있었다. 2층, 후시미가 몇 번쯤 쿠사나기나 타타라의 심부름에 따라 억지로 올라갔던 방. 거기엔 이 작은 영토를 왕국으로 삼는 - 틀린 말은 아니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바 호무라는 적왕인 스오우 미코토의 속령으로 기재되어 있다 - 왕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고 있엇다. 깨어나면 동물처럼 먹고 또 다시 동물처럼 잔다. 그런 스오우를 야타는 단순히 '멋지다!' 정도로 표현했고 호무라의 아무도 그를 후시미와 같은 의미로 대하지 않았으나, 후시미는 그가 누구보다 무서웠다. 경외나 압도적인 것에 대한 감동 같은 게 아니라, 철저한 공포였다. 언젠가 나는 저 사람에게 죽을 것이다, 저 사람 때문에 죽을 것이다, 턱 밑으로 칼이 들어오고 등 뒤로 창이 꽂히는 것에 대한 생의 본능적인 공포가 후시미의 다리를 붙잡고 무릎 꿇렸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면밀하게 관찰하고 어떻게든 그의 화마에 휩쓸리지 않도록 사각으로 숨어다니기 위해 애썼으나 후시미는 직접적인 생존의 문제를 겪기 전에 생활의 문제를 겪게 되었다.
마음이 서걱서걱 잘려나가다 이윽고 난도질 당하듯 분해되어 형체도 없이 흐트러졌다. 눈에 뵈는 게 없으면 무서울 게 없다고, 후시미는 꼭 그런 상태였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겁없이 홀몸으로 왕을 알현하길 청한 후시미를 무나카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미사키는 나중이다. 스오우, 스오우 미코토에게 얘기만 하면 되는데도 정작 후시미는 혈혈단신으로 셉터4의 건물로 들어가는 것보다 이 문, 문 하나를 여는 것이 더 무서웠다.
호무라의 멤버가 있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다. 후시미가 말하기 전에 미사키의 귀에 들어갈테니까. 토츠카 씨도 싫다.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후시미가 하는 말에 으레 그렇고 그런 만류를 양념처럼 버무리고 손을 놓거나 아니면 호들갑스럽게 '어떻게 할거야, 킹?' 같은 말을 할 지도 모른다. 토츠카 타타라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가벼웠고 그래서 안나를 제외하고는 스오우의 가장 안 쪽에 있는 사람이었다. 완벽하게 제 자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미련이 없는 사람에게 후시미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쿠사나기 씨라면, 쿠사나기 씨는 괜찮다. 후시미는 사실 가게 안에 쿠사나기가 있길 간절히 바랐다. 쿠사나기는 스오우의 시선을 차단해줄테고, 그의 시선도 늘상 쓰는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 않을테니 후시미는 그들의 시선 따윈 생각하지 않고 나올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없다.
문을 열지 않아도 후시미는 안다. 호무라의 멤버들은 오늘 다른 구역의 패거리를 손봐준다며 우르르 나갔다. 토츠카는 요즘 크로키에 재미를 붙였다. 싸움 같은 걸 하면 움직임이 역동적이니까- 같은 태평한 소리나 하면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챙겨들고 따라갔을 거고 쿠사나기는 안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일교차가 커져 여름감기에 걸렸다. 심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호무라의 공주님이니까. 귀하고,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가슴이 꽉 메여서 후시미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뭐든지 제일 윗선에 얘기하면 이야기가 빠르다. 호무라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것은 쿠사나기였지만 스오우 미코토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쿠사나기가 없어도 괜찮다. 스오우에게만 얘기하면, 문을 열고, 그에게 호무라를 나오겠다고, 그만두겠다고 그 얘기만 하면 되는데.
"적당히 하고 들어오지."
후시미가 막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은 때였다. 밖으로 밀리면서 들린 목소리에 후시미는 화들짝 놀랐다. 우스울 정도로 크게 어깨가 뛰어올랐다. "신경에 거슬린다." 스오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활짝 문을 열었다. 이제 와서 도망갈 곳도 없어 후시미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시, 실례 하겠습니다."
새삼. 이라는 소리 대신 스오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시미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대신 결심을 확고하게 굳혔다. 교복에 담배 냄새가 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곳의 흔적을 집까지 끌고가고 싶지 않다. 잠깐 한숨을 내뱉고 후시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태연한 척 하려고 했지만 본인이 잠시 눈을 꽉 감았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저 호무라를 나가고 싶은데."
"그 말 하려고 밖에 그렇게 오래 있었나."
네? 하고 후시미는 되묻는 얼굴이었다. 후시미의 체감상 그렇게 오래 밖에 서있지는 않았으나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손끝이 저릿하게 차가웠다. 스오우에게는 가만히 서있어도 진득하게 땀이 배어나올 정도의 날씨가 후시미에게는 한겨울 마냥 추웠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시끄러워서 잠이 안 오던데."
"죄…송합니다."
상식적으로 문 밖에서 꼼짝도 않고 한숨 몇 번, 손잡이를 잡았다 놓길 몇 번 했다고 시끄러울 리는 없었으나 후시미는 빳빳하게 얼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면 스오우도 곧 잊어버릴 정도의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한 번 눈치를 채고 나면 잠이 오던 눈도 말똥말똥해져 덩달아 신경이 쓰였다.
"할 말은 그것 뿐?"
"네."
"…그래."
재가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쿠사나기가 아끼는 소파 위로 떨어지면 화를 낼 게 분명한데도 스오우는 좀처럼 담뱃재를 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인데 무슨 상관이람. 이미 떠나기로 했으면서 쓸데없이 소파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니 후시미는 속으로 기가 찼다. 툭, 기어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재가 흩날리고 만다. 푸른 연기가 꼬리를 천장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하늘거리다, 스오우가 내뱉는 숨에 하얗게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 대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는 모두가 침묵이었다. 연기를 빨아들일 때마다 발갛게 타오르던 붉은 빛이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다 이윽고 지져 꺼지는 것을 후시미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부연 연기가 가게 안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이미 글러 먹었다. 새로 빨아 입은 교복도 무색하게 섬유의 짜임 깊숙히 눈에 보이지 않는 연기의 입자들이 파고들어 있을 것이다.
무언가 더 말할 줄 알았던 스오우는 담배를 끄고 나서도 말이 없었다.
이게 끝인가?
후시미는 천장을 올려다 보는 스오우의 턱 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걸까.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밖에 그토록 오랫동안 서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이 바에 어떻게든 눌러 앉아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긴장했던 몸에서 맥이 탁 풀리고 만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이 갑자기 새삼스럽게 실내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체감한듯 눅진하게 녹아간다.
이 곳은 후시미에겐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모두 놓기로 마음먹으니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 유영하는 온기, 여유, 느긋함,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감각에 처음으로 호무라가 제법 괜찮은 바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끝인가요."
"…그래."
"어디로 가는지는 안 물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푸른 쪽이라도 가는 모양이군."
의외의 통찰력에 후시미는 잠깐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후시미의 긍정에도 스오우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였다.
"이건?"
후시미가 제 교복 셔츠를 슬쩍 젖힌다. 야타와 같은 자리에 있는 선명한 불꽃의 문양. 야타는 그것을 긍지라 말했으나 후시미에겐 낙인이었다.
"상관 안해."
스오우의 귀찮은 듯한 대답에 후시미는 눈을 껌벅이다 셔츠를 놓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짓뭉갤 수 있는 권한은 후시미에게 주어졌으나 스오우가 직접 회수해갈 정도의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 할 대화도 없었다. 이젠 전부 끝이었다.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도 어쩐지 기나긴 전투에 참가했다 돌아오는 패잔병처럼 해묵은 피로가 후시미의 어깨를 짓누른다. 빨리 집에 가자. 빨리,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정신을 놓을 거 같다.
"안녕히 계세요, 미코토 씨."
한껏 갈라진 목소리로 후시미가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후시미."
나즈막한 울림이 후시미를 낚아챈다. 무방비하게 돌아선 얼굴이 우악스럽게 붙들려 끌려갔다. 한 번도 맞닿은 적 없는 남자의 피부가 견고하고 뜨거웠다. 한겨울의 손난로처럼 직접적인 열. 혀에 닿는 씁쓸하고 텁텁한 맛에도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숨 한 번 내뱉지도 못하고 후시미는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입 안 쪽까지 고여 꼴사납게 흘러넘칠 타액에 겨우 목울대만 한 번 꿀꺽 넘기자 스오우가 그르렁거리며 웃는 것이 제 가슴 안에서 울렸다.
"추울 테니까."
간신히 그럭저럭 얼굴 윤곽을 볼 정도의 거리를 확보하자 스오우는 툭, 후시미의 가슴께를 치고 느릿하게 소파에서 일어나 2층으로 걸음을 옮긴다.
무어라 대꾸할 말도 찾지 못한 채, 후시미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가게 밖이었다. 흰 목덜미로 쓸쓸한 바람이 스쳤으나 그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몸 안 쪽이 불덩이를 먹은 것처럼 홧홧했다.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후시미는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무슨 짓을 한거야……."
집에 가고 싶다. 빨리 여길 벗어나서.
웅크리고 고개를 파묻은 교복에선 희미하게 담배냄새가 났다. 입 안에서도. 초가을의 바람에는 빠지지 않는 열도, 고스란히 집에 가져가야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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