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의 후시미가 얼마나 섹시할지 상상이 안돼서 플롯이 안 잡혔다. 쿠사나기는 철벽의 아가페를 가진 닝겐이라고 생각. 만인에게 손을 내미는 쿠사나기랑 끝내 그런 쿠사나기를 손에 넣을 수 없는 불쌍한 후시미의 헌신 같은 걸 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이것도 역시 프롤로그 정도.
"영업 끝났습니데……."
밖에 CLOSE란 문패를 걸어두는 걸 깜박했던가. 내일은 휴업이라는 문구를 분명 써붙이고 왔는데. 무심코 대꾸하다 돌아보면 보이는 얼굴에 쿠사나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본 얼굴에도, 설마 오늘 또 올 줄은 몰랐는지 혀가 입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배회하다 겨우 문장을 내뱉는다.
"…사루 아이가."
분명 방금 전까진 괜찮았던 거 같은데 밖에는 비가 오는 모양인지 제복 밑단으로 물이 뚝뚝 떨어져 고인다.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버리며 후시미는 무심하게 말한다.
"수건."
"아?"
"수건, 주세요."
하, 야야 니 맡겨놨나. 후시미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쿠사나기는 한 번 면박을 주면서도 찬장에서 수건 하나를 던져준다. 받아든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재킷 소매와 끝단을 쥐어짠 후시미는 제 자리라는 듯 쿠사나기의 앞에 앉는다.
쿠사나기가 외면할 수 없는 눈 앞에. 과시하는 것처럼.
남자가 으레 갖는 허세들을 쿠사나기도 알고 있다. 소위 17대1이라든가 하는 그런 류의 허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이는 언제나 자신이 어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정말로, 후시미는 지난 달, 막 성인이 되었다. 스무살. 날짜가 지나자마자 후시미는 기다렸다는 듯 호무라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된다고 들어서요.
11월 6일 오후 열한시 오십구분의 후시미 사루히코와 11월 7일 오전 열두시의 후시미 사루히코가 눈에 띌 정도로 차이 날 리는 없으나 지금 보면 아이는 확실하게 자랐다. 그 시절 늘 앉아있던, 조명도 그림자가 드리우는 저 구석이 아니라 처음으로 후시미는 쿠사나기의 앞에 앉았다. 눈이 마주치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쿠사나기의 시선을 피했던 그가 처음으로 쿠사나기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렇게 말했다. 한 손에 들어차게 잡히던 말랑거리던 얇은 볼살도 빠져 제법 날카로운 선이 보였고, 시선이 깊어졌다.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은 완연한 성인의 것이라 쿠사나기는 의외라 생각하면서도 선뜻 술을 내주었다.
그 뒤로 내내, 하루도 빼먹지 않고 후시미는 출근하듯 호무라에 들렀다. 이제 시선을 피하는 쪽은 쿠사나기가 되었다.
"밖에 비오나."
"조금."
근데 와 이까지 오나? 그 말을 참았다. 쿠사나기가 말하지 않아도 답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저토록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야멸차게 내칠 수도 없다. 쿠사나기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팬에 데우기 시작했다. 등 뒤로 내리꽂히는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후시미가 이토록 솔직한 인간이었나 쿠사나기는 새삼 놀란다. 아마 이 정도의 진심을 야타에게 표현했더라면 후시미는 지금의 푸른 제복이 아니라 헐렁한 후드티를 주워입고 쿠사나기의 앞에 있었겠지.
후시미는 제 안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을 몹시도 혐오했다. 자존심과 아집으로 만들어 낸 벽을 몇 겹이나 둘러싸고 저를 꽁꽁 묶어두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거 같아했다. 햇빛을 받으면 말라 바스라질 것처럼 음습한 곳에 웅크려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는 어린아이.
솔직해지는 게 어른이 되는 방법이라면, 후시미에겐 그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자. 오늘은 늦었으니께 이기만 먹고 후딱 돌아가라."
"늦었으니까 자고 가면 안돼요?"
쿠사나기 씨 집.
노골적인 욕망의 표현 또한 후시미 나름의 '성인'식 표현이라고 봐도 좋을까.
"저 내일 휴가에요."
"……."
"잔업하고 온 거에요 지금까지."
"……."
"기숙사에도 안 돌아간다고 얘기했고, 이거, 도망 못치면 진짜로 한 달 내내 일할 기세니까……."
안경을 벗고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다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퍽 피곤해 보이긴 했다. 그리고 아주 영악했다. 손 쓸 수 없이 교활하고 영악하다.
"니, 내가 여기서 된다카면 어카고 안된다 카면 어케 할 생각이었는데?"
"……."
"된다 카면, 된다 캐도, 사루야."
"……그랬으면 처음부터 내쫓았어야죠."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리고 지친 목소리로 후시미가 입을 연다. 도드라진 손마디가 이제는 제법 쿠사나기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어제도 느꼈다. 휘이 손을 내젓는 것만으로도 툭 떨어지던 가는 손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악력으로 쿠사나기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좋아해요.
당돌한 고백이었다. 쿠사나기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후시미는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취한 거 아니에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루야. 쿠사나기가 작게 부르면 후시미는 조금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알아요. 알아. 알아……. 내내 꽂히는 노골적인 시선을 쿠사나기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미리 내치지 못한 것은 쿠사나기의 연민이었다. 그것을 내심 눈치채고 있었는지 후시미는 긴 침묵 후에 한참이나 잡고 있던 손을 내려두고는 돌아갔다.
"오늘 내내 생각해봤어요."
"당신은 왜 알면서도 날 받아줬을까."
"내심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당신은, 당신은 이제 아무데도 기댈 곳이 없고."
"사실은 당신이 기대고 있었잖아요, 쿠사나기 씨. 당신이 없으면 굶어죽을 거 같은 미코토 씨를, 힘이 있어도 제멋대로 날뛰다가 죽었을 애새끼들, 어딘가로 끌려갈 지 모르는 안나. 사실은 당신이 기대고 있던거잖아요."
솔직해지는 것이, 후시미의 어른이 되는 방식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취소다. 그냥 아픈 부분을 찌르고 있을 뿐이었다. 제멋대로 화풀이하면서 날뛰는 여전히 애였다. 쿠사나기의 안쪽에 잘 갈무리해두었던 것들을 후시미는 가감없이 짓밟고 있었다.
"당신의 왕국은 이제 폐허밖에 없어요. 어디에도 안 남았어. 이 빈 시체같은 가게를……."
"후시미."
쿠사나기가 후시미의 말을 자르면 후시미가 흑, 하고 숨을 내뱉었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는 기이한 소리였다.
"거봐. 당신, 내가 오니까 즐거웠죠?"
당신은 누구라도 돌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데, 당신이 필요한 내가 와서. 그렇지? 그렇죠? 그래놓고도 내가 불쌍했겠지. 그랬겠지. 당신이 제일 불쌍한 주제에.
답을 묻는 물음이 아니었다. 이미 확신이었고 실로 그러했다. 손을 내린 얼굴에서 후시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쿠사나기는 갑자기 몹시 지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잊고있던 왕국의 잔해가 쿠사나기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알았다. 그렇다카자. 그니까 고만하고 가라 사루야."
"근데요, 쿠사나기 씨."
마. 작작 좀 하지. 이제는 조금, 성질이 날 지경이었다. 이제 겨우 성인이 돼서, 어른 흉내나 내고 있는 새파란 애새끼한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도 크나큰 상처였다. 내쫓을 요량으로 손을 휘휘 저어도 후시미는 마지막까지 온전하게 그를 깔아눕힐 심산인지 말을 잇는다.
최후의 일격. 턱 밑으로 들어온 카운터 펀치였다. 쿠사나기가 화를 참지 못하고 앉아있는 후시미의 멱살을 잡으면 후시미가 웃고 있었다. 고개를 내리 깔고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바 안에 경쾌하게 울렸다. 거봐. 거봐요. 내가 뭐랬어.
"오늘은 제 호의에요, 쿠사나기 씨. 당신이 아니라 내가. 내가 당신을 위로하는 거야."
천천히, 힘이 빠진 쿠사나기의 손을 후시미가 찬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펼친다.
"누구라도 필요하잖아요, 쿠사나기 씨. 최후의 기념일인데. 그죠?"
다 펼쳐 떨어져내린 쿠사나기의 손을 후시미는 꽉 쥐었다. 어른이 되어도 흔들리는 건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배였다.
스오우 미코토가 죽은 밤, 새벽 네시.
"당신은 가끔… 쿠사나기 씨……."
사람은 누구나 선함이 있다고 믿으며 선량하여 악의가 없다고 믿으며 당신의 선함이 나를 구원하였다가도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도.
"사루……."
당신의 선(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나는.
남자는 지친 얼굴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말라 고목처럼 굽어있던 아이가 그 이상 자랄 줄 몰랐는데 또 컸다. 키는 미코토와 비슷하려나. 미코토보다는 말랐지만 지금보다 살도 좀 붙었다. 선이 굵어진 얼굴이 주황색 전등 밑에서 깊게 음영을 드리웠다. 한숨조차 꾸역꾸역 집어삼키는 남자를 보며 쿠사나기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사루야……."
그 눈동자가 그토록 깊은지 미처 몰랐다. 언제나 한 곳만을 불퉁하게 쳐다보던 아이의 눈이 언제부터 이토록 깊었었나. 제가 알던 후시미 사루히코라고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얘기였다. 앞으로 손가락을 전부 펴고 다시 두 개나 더한 시간이 지난 후의 후시미는 이런 어른이 된다. 더 무겁고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가장 완벽한 방어는 침묵이라는 걸 알아낸 것처럼 모든 것을 차단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꽉 메였다. 깃털처럼 가벼워 어디에도 자력으로는 제자리에 있지 못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쿠사나기는 한사코 타인의 자리에 있었다. 지나간 시간만큼 무거워졌는데도 여전히 어딘가 엷은 맛이 있는 후시미가 쿠사나기는 그 어느 때보다 불편했다. 죄의 증거를 들이미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마세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는 달리 달그락- 하고 내려놓은 잔에선 얼음이 경쾌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진득하게 피로가 묻어난 얼굴이 쿠사나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차라리 아예 알아보지 못해서, 너무 많이 달라져서 아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면 나으련만 달라진 외형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후시미의 편린이 문득문득 보였다.
"얘기했죠, 쿠사나기 씨는 너무 착하다고."
가늘게 눈을 뜨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얼굴에 쿠사나기는 눈을 깜박,했다. 뇌리를 선명하게 스치는 기억은 바로 그저께의 것이었다.
'쿠사나기 씨는 쓸모없을 정도로 착해요.'
"봐요, 지금도."
서늘하고 비참한 미소 역시 어제와 같았다. 다만 눈만이 울 것 처럼 이지러지지 않았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쿠사나기는 정말로 후시미가 컸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될 지, 아니면 이토록 클 때까지 아직도 자신에게 연연하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직 믿지도 못하면서 동정하고 있잖아요."
역시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후시미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아이는 한숨마저 꾸역꾸역 갈무리하는 어른이 되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