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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루] 시퍼런 봄
못님의 리퀘. 동명의 곡을 모티브로 주셨습니다. 2014.08.
"야 잘 좀 찾아봐."
"쯧, 시끄러워."
"아씨 난 못하겠어!"
끈기라곤 태어날 때부터 팔아먹은 것 같은 야타는 짐을 내려놓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그대로 그 옆에 드러눕는다. 정돈되지 않은 긴 풀들이 눌리며 풀썩거리는 소리를 낸다. 파리한 겨울로부터 조금은 햇빛을 머금은 듯한 하늘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후시미는 해가 따갑지도 않느냐라든가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암만 봄이라도 아직 목덜미를 파고드는 바람이 서늘한 계절이다. 해가 뜨거워지려면 아직 한 달은 더 지나야 하니 하얀 태양은 그저 시릴 뿐. 백색의 조광등 마냥 발광하는 구체 아래서 야타는 마냥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예 가방을 베개 삼아 교복 재킷을 이불 삼아 옆으로 돌아누웠다. 적당히 따뜻하고 막 편의점에서 컵라면도 먹고 와 적당히 배부르니 어련하겠냐만은.
"야. 너 진짜 잘거야?"
후시미가 황망하게 서서 되물어도 야타는 답이 없다. 야. 야? 야타의 대답 대신 재킷을 벗은 목덜미를 바람이 훑는다. 얇은 셔츠 밑으로 오싹하게 파고드는 바람에도 후시미는 마냥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후시미도 당장 때려치고 싶었다. 차라리 쿠사나기의 진두지휘 하에 하루종일 해야 되는 호무라 대청소를 하고 말지 누가 답도 없이 하천 근처 풀밭에서 되도 않는 물건 찾기나 하고 싶을까.
그러나 한참을 서 있던 후시미는 흙투성이인 양 손에 꽉 쥐고 있던 잡초를 한 켠으로 던지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하겠다고 나섰으니 후시미의 목적은 둘째치더라도 할 일은 해야했다.
쿠사나기는 종종 호무라와는 관계없이 bar HOMRA의 바텐더로 몇 개의 소일거리 의뢰를 받곤 했다. 쿠사나기가 받는 의뢰의 폭은 넓어서 쿠사나기 혼자 하는 일도 있지만 일손이 부족하면 시험하듯 후시미에게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건 주로 정보조작이나 은폐, 혹은 빼돌리기 이 셋 중 하나였다- 시간과 노력이 전부인, 요컨대 노가다성 의뢰는 호무라에서 벌칙게임처럼 이뤄지곤 했다.
야타는 이 벌칙을 엄청나게 싫어했는데 대개의 이유는 재미없어서였다. 그 다음은 단연 일의 강도 때문이고 그 다음은 자신이 이런 식으로 호무라를 나와있는 동안 바 호무라에서는 엄청나게 재밌는 일이 생기고 미코토 씨가 활약할 거라는 근거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야타 미사키는 작년 겨울 콜라병을 단숨에 녹이는 초능력을 가진 스오우 미코토에게 홀딱 반했다. 물론 그런 시시한 일 -후시미는 저도 그 장면에선 깜짝 놀라 야타가 어깨를 흔들 때까지 정신 못차리고 있었단 사실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에 쓰라고 있는 능력이 아닌 만큼 대체로 호무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에 없이 엄청나고 대단한 일들이라고, 후시미는 인정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최근 야타의 태도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스오우에게만 매몰되어 있었다.
매몰.
틀림없이,
다른 단어도 아니고,
그는 스오우 미코토에게 매몰되어 있다.
길게 자란 풀들을 헤치고 직경 1cm도 되지 않는 금속쪼가리 같은 걸 찾으려니 후시미도 허리가 아팠다. 영상 13도 근처에나 갔으려나 싶은 날씨였지만 아까부터 바람도 불지 않아 슬슬 더워진다. 후시미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미 끝단에 풀물이 들어 얼룩덜룩한 게 세탁하려면 퍽 힘들 것 같다. 후시미는 심호흡을 하며 몰아치는 짜증을 삼키려 애썼다. 이 놈의 반지는 보이지도 않아, 허리는 아프지, 옷은 더러워졌지, 반지는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야타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데는 성공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애초에 뭘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하나도 정리되지 않는다. 되는 게 없다.
인생의 운을 전부 이 시기에 몰빵하는 것처럼 요 세 달 동안 야타는 단 한 번도 이 벌칙에 걸린 적이 없었다. 그런 야타가 하천 근처 풀밭에다 홧김에 던져진 남의 커플링을 찾아야 하는 시시한 일에 불만을 가질 거란 사실은 눈 감고도 그려지는 얘기였으니 이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래, 내 잘못이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일부러 붙잡고 넘어진거니, 진정해라 후시미 사루히코. 지금 필요한 건 화를 내는 것보다 말할 타이밍을 잡는 거다. 너무 소심하거나 쩨쩨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야타는 고집이 세서 열중하는 게 생기면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니 잘 구슬러서, 돌려가면서……. 기계적으로 바닥을 손으로 훑다가 후시미는 괜히 땅을 퍽퍽 찼다.
"……시끄러워, 사루."
"야!"
그러나 아직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후시미 사루히코의 참을성은 거미줄보다 가늘었다. 졸음 그득한 목소리로 태평하게 웅얼거리는 야타에게 기어이 폭발하고 만 후시미가 씩씩거리며 손에 걸리는 흙 한 줌을 집어 던진다.
"뭐하는 거야!"
얼굴에 고스란히 젖은 흙을 뒤집어 쓴 야타가 입에 들어간 걸 퉤퉤 뱉으며 일어난다. 사납게 인상 쓰는 야타의 얼굴은 몹시 화나 있고, 제가 잘못한 줄은 알았지만 후시미도 뿔이 난 지라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뭐!"
"뭐긴 뭐야! 사람 얼굴에 흙 뿌렸음 사과를 해야지!"
"네가 먼저 농땡이 피운 거잖아!"
"네가 하겠다고 그래서 나까지 따라온 거잖아!"
"그럼 오질 말든가! 거절했으면 됐잖아!"
"그래서 좀 쉬고 하겠다는 거 아냐! 내가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너, 요즘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지!"
머리에 열이 올라 목청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삿대질까지 해가며 싸우던 하천 공터에 갑자기 쑥, 모든 게 어딘가로 집어삼켜진 듯하다. 후시미의 놀란 눈은 커져서 입만 다물고 깜박이고 있고, 야타는 야타대로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진짜야?"
야타는 반쯤 찍어 내뱉은게 정말로 맞자 띵하게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후시미가 왜 나한테 화가 나지? 야타와 후시미는 지금까지 서로 한 번도 진심으로 화나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후시미가 한 두번 짜증나게 굴 때야 많았지만 후시미가 원래 그런 놈이니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런 것보다 야타에겐 후시미의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후시미에게 자신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고 최근까진 사실이었을 것이다. 후시미는 화가 나면 한 번 버럭해서 말하고 끝내버리는 성격이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 말도 안하고, 밍기적거리면서 뭐라 말하려다 입 다물고, 한숨 쉬고, 그러다 쏘아보는 눈초리가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야타의 그 둔한 눈치로도 후시미가 화가 났나? 싶을 정도였지만 도통 얘길 안하는 데다 최근에는 책 잡힐 것도 없어 야타는 줄곧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화가 났다고? 왜?
"야, 진짜야? 사루 말해봐. 응? 사루히코 왜 화난건데?"
그렇게 하고 나니 초조해지는 건 야타다. 후시미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을 안다. 그 다음에는 아예 잊어버리고 그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하니 어느 새 저와 소원해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화를 냈다가 당황했다가 이윽고 쩔쩔매는 야타의 얼굴을 보면서, 반면에 후시미는 후시미대로 당황하고 있었다. 딱히, 화, 화가 난 건 아닌데……. 곰곰이 생각해보자면 화는 아니지만 후시미는 분명 지금까지 야타의 태도가 몹시 불만이었다. 그렇지만 이 불만을 뭐라고 해야할까. 네가 너무 미코토 씨한테 목매는 건 좋지 않다고? 왜냐고 물으면 논리적으로 댈 이유가 없다. 멍청한 미사키야 홀랑 속아넘어 갈 수도 있지만 후시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 왜 싫은거지. 그렇다고 서서 내내 그 생각이나 하고 있자니 야타가 초조해하는 게 느껴진다. 야타는 기본적으로 버림받거나 소외된다는 사실에 있어서 몹시 약했다.
"사루히코."
"화…난 건 아냐."
"그럼 왜?"
"글쎄……."
야타의 불안을 잠식시키기 위해 일단 말은 했지만 여기서는 결국 후시미도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 흘러간다. 후시미의 드물게 끝을 흐리는 답에 그가 정말 화난 게 아니란 걸 확인한 야타는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고 그건 후시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인 의문이었다.
생각하길 먼저 멈춘 건, 당연하지만 야타였다. 머리 쓰는 건 후시미가 전문이고 저는 감탄하면서 맞장구나 치면 된다. 야타는 툭툭 발로 바닥을 고르게 한 다음 벌렁 드러누웠다.
"너도 그냥 누워라 사루."
"아직 반지……."
"이제 한 시 반인데 좀 자고 일어나도 찾을 수 있어."
야타의 확신 어린 말에도 후시미는 영 확신이 없다. 쓸데없이 책임감 좋긴. 야타는 망설이는 후시미의 손목을 훽 낚아챘다. 균형을 잃은 몸이 벌렁 바닥에 엎어진다. 미사키! 항의조로 부르는 이름을 야타는 무시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흰 태양에 눈이 시리다. 감아도 새하얀 눈꺼풀 밑에서 야타는 후시미가 무어라 궁시렁대다가 옆에 눕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분다. 조용해서 풀잎 스치는 소리만이 전부였다. 이런 식으로 가만히 두면 후시미는 알아서 정리하고 말한다. 머리는 좋은데 가끔 열이 오르면 앞이 안 보이는구나, 하고 다혈질의 야타는 남 얘기처럼 생각한다.
"너, 미코토 씨한테 너무 목 매."
"미코토 씨는 최고야!"
"닥치고 들어."
한참을 있다 후시미가 겨우 한 말에 야타는 상체를 번쩍 들어 대꾸했지만 후시미는 야멸차게 야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쳐냈다. 아따따따. 은근히 손이 매워 야타가 벌써 벌개진 이마를 문지르는 동안 후시미는 말을 잇는다.
"물론 나쁜 건 아냐."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
"미코토 씨는 어쨌든 강하고, 멋있지. 쿠사나기 씨도, 토츠카 씨도 좋은 사람이지만."
띄엄띄엄 말하던 후시미가 한동안 또 숨을 고른다. 마땅히 댈 만한 이유가 없었다.
"나는 네가 항상 내 뒤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안 보여."
"미코토 씨랑 있는 너는 다른 사람 같아."
"네가 파묻혀 있는 것 같아, 미사키. 파묻혀서 죽을 것 같아. 사라질 것 같아."
"난 그게 무서워."
솔직하게, 그런 기분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늘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심장 철렁 내려앉는 느낌. 내게로 시선이 향하면서도 내 뒤를 보고, 키가 작은 미사키가 호무라 멤버들의 안 쪽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때면 야타는 후시미가 아는 미사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후시미 사루히코가 알던 야타 미사키는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말을 다하고 나니 후시미는 속에서 턱턱 막히던 것을 간신히 토해낸 기분이다. 길게 숨을 내쉬고 시선을 돌리면 옆에서 저를 보고 있던 야타와 눈이 마주친다. 갈색의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안쪽에서 깜박거린다.
"왜 무서워 하는건데?"
"……."
"미코토 씨는 굉징하고 멋있지만 모두를 좋아하니까, 나도 미코토 씨한테 죽을 일은 없을거고!"
"그런 뜻이 아냐 멍청아."
"나는 파묻혀 있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거지만, 그치만 사루 너는 한 번도 틀린 말은 한 적 없고 나는 널 믿어. 네가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는거겠지. 만약 정말 내가 그렇게 되면 네가 꺼내주면 그만이잖아?"
설마 내가 그 꼴인데 날 버리고 갈거야?
반문하는 야타의 말에는 조그만한 미동이 묻어있다. 후시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대신 물었다.
"만약, 못 구하면 어떻게 해?"
"사루히코가 노력하기만 하면 괜찮아. 사루는 계속 옆에 있을 거지?"
그건 후시미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미사키 너는 계속 내 옆에 있을 거야? 차마 거기까진 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설핏 불안해하던 얼굴이 환하게 펴서는 그럼 됐어! 하고 눈을 감는다. 그럼 됐잖아, 뭐가 문제야?
쾌활한 야타의 말은 가끔 후시미에겐 마법의 주문이었다. 쓸데없이 긍정적이고 저돌적이고 생각할 줄도 몰라 근거없는 자신감에서 배어나온 그 말이 정말로 그럴듯하게 들리던 때가 있었다.
그대로 풀밭에 누워 뒹굴거리던 둘이 일어났을 때는 어느 새 낮이 다 지나 푸르스름한 밤의 목깃이었다. 허겁지겁 일어나서 등짝이며 옷을 탈탈 터는 동안 진짜로 야타는 반지를 찾아냈다. 바닥 깊숙하게 쳐박혀 매몰되어 있던 것이 우연히 야타의 손가락에 건져올려진 것이다.
거봐! 내가 찾을 수 있댔잖아!
환호하는 야타의 말에 결국 후시미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밤길을 걸어 호무라로 돌아왔을 때 쿠사나기는 입을 떡 벌렸는데 그건 그들이 찾은 반지 때문이 아니라 둘의 몰골 때문이었다. 쭈욱 어두컴컴한 데만 지나와서 몰랐지만 후시미와 야타의 옷은 온통 푸르죽죽했다. 풋내나는 봄의 여린 새순들 위에 누워 그대로 뭉개며 잤으니 바지고 흰 셔츠고 전부 시퍼런 풀물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쿠사나기의 지적에 얼떨떨해져 서로를 보면 꼴이 우스워 후시미와 야타는 집에 돌아가서 씻고 빨래하는 내내 웃었다. 저녁 나절 내내 웃기만 해서 잠자리에 들 즈음에는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서 후시미와 야타는 그 날 했던 얘기들을 모두 잊어버렸다. 시린 흰색 태양, 녹아가는 젖은 흙, 온갖 잡초들의 비릿한 풋내, 이제 겨우 시작하던 시퍼런 봄을. 그 계절은 그들이 솔직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후시미 씨!"
저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후시미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연한 베이지색의 교복과는 달리 지금은 새파란 제복이다. 새파란 제복에 겨우 풀물이 들 리도 없고 야타의 말은 이제는 더 이상 후시미에겐 마법이 아니며 야타는 후시미가 저를 구할 거라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도 아니고, 너와 나는 이토록 아득하게 멀어졌으며 계절은 다시 봄으로 넘어간다. 계절만 다시 봄으로 넘어갔다.
"후시미 사루히코, 발도."
후시미는 인상을 찡그렸다. 왼쪽 쇄골이 몹시도 쓰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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