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너무 안해서 비축분이란 게 생긴다면 연재하는 느낌으로 중간까지는 샘플 겸 원고하고 충분히 퇴고하고 다듬을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뒤로 나올 무나후시랑 시리즈인듯 아닌듯한 느낌이 될 거 같습니다. 원고 예정은 지난번에 펑크난 무나후시까지 포함해서 세 권+재록에 시간이 남는다면 플러스 알파? 재록에는 지금까지 후시미 오른쪽 책 전부+무나후시 혹은 아키후시 단편 한 두개 정도를 추가할 예정인데 어떻게 될 지.... 마지막이니까 다 쏟아부을 수 있음 좋겠다 :Q.....
비가 후득후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결에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몸이 무거워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지, 잠결에 모호했으나 아까보다 더 거세진 빗소리 사이에서 이불이 한 번 훌렁 움직이고 눅눅한 비내음 섞인 찬바람이 종아리께를 스쳤을 때에야 야타는 간신히 눈을 떴다.
“봐, 미사키.”
야타가 눈을 부비며 일어났을 때 후시미는 창 앞에 서 있었다. 가는 빗방울들이 툭툭 튀어 얼굴에서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눈썹에 맺힌 것을 후시미가 손등으로 한번 쓱 훔쳐내다가 멈칫했다. 흰 손등에 묻은 물방울이 시커메서 간간이 아주 작은 검은 알갱이들이 그 안을 맴돌았다.
야, 가서 얼굴 씻고 와.
네 얼굴이나 보고 말하지 그래, 미사키.
후시미의 얼굴이 그 꼴이니 야타도 그리 깨끗한 몰골은 아닐 게 분명했다. 꽤나 깔끔 떠는 후시미가 곧 씻으러 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후시미는 비 맞은 그대로 줄줄 흐르는 검댕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하염없이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봐봐, 미사키. 후시미는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야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씻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와서 엎어졌으니 어둠이 겨우 가신 회색 하늘 밑에서도 바닥은 엉망이었다.
알게 뭐냐. 이 집의 주인은 이미 그저께 이사 갔다. 철거가 한창인 동네엔 주인 잃은 빈집이 많았고 이내 길 잃은 아이들의 안식처가 되곤 했다. 빈 맥주캔, 아무데나 비벼 꺼 눌어붙은 자국이 얼룩덜룩한 벽지와 널부러져 한 움큼 쌓여있는 담배꽁초들, 찢겨진 비닐봉지, 심심찮게 말라붙은 핏자국과 간혹 바람에 담뱃재와 흰 가루들이 흩날리기도 했다. 이런 날씨엔 저 멀리서 이 동네를 보면 동네가 있는 줄도 모르지 않을까. 온통 똑같은 잿빛으로 동화돼서 어디로 스러질지 모르는 곳.
훅 들이친 바람 속에 은근슬쩍 매캐한 탄내가 섞여갔다. 야타는 거뭇거뭇한 제 얼굴을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가 수도가 끊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젠장. 사루! 여기 수도 끊겼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도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후시미가 움직였다. 모르는 집을 두리번거리다가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야타의 손목을 낚아챘다.
“나가자.”
야타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후시미는 야타를 질질 끌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후시미의 손바닥이 어느 새 제 팔목을 쥐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아귀가 억세졌다고 감탄할 새도 없었다. 아까보다 더 거세진 빗줄기에 순식간에 머리부터 흠뻑 젖어들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뭐 어때, 미사키. 끝인데!”
“뭐가?”
쏴아아아- 하면서 쏟아지는 비에 번쩍이는 하늘에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천둥소리까지 후시미의 소리가 너무 작았다. 흠뻑 젖은 얼굴로 마주보고 있노라면 후시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끝이라고! 끝! 끝이야!
뭐가 끝인지도 모르겠는데 자꾸만 후시미는 끝이라고 말한다. 줄줄 흐르는 빗물을 아무리 닦아도 눈이 흐렸다. 후시미는 고개를 치켜들고 세수하듯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야타도 허공에 대고 어푸어푸 세수를 했다. 박박 검댕이 묻어나오지 않을 때까지 손으로 문질렀다. 흰 티에도 검댕이 묻어 있어 내친김에 야타는 티도 벗었다. 어차피 빨아야 했다. 속옷은 어쩌지. 야타는 허공에 대고 낄낄대는 후시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야! 좀 있다 비 그치면 우리 집 가자!
후시미가 눈을 꿈벅거리다가 좋아! 하고 크게 대답한다. 좋아! 좋아, 미사키. 좋아! 후시미가 방방 뛰는 걸 뭐가 그리 즐거워서 저러나 하고 생각하다 야타는 후시미가 한 번도 제 집에 온 적이 없음을 상기한다. 뿐만 아니라 후시미는 어디에도 가 본 적 없었다. ‘낯선 장소에’ ‘둘만이’ ‘존재해서’ ‘큰 소리로’ 대화해 본 것조차 처음이었다. 후시미가 벗어나지 못했던 거리는 낮에는 침묵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공간에 속한 모든 물질이 소리를 빼앗긴 것 같은 동네였다. 밤새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사람들은 하루치의 말소리를 소진한 것 마냥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후시미는 지난 새벽 막 빠져나왔다.
거기까지 상기하고 나니 야타는 후시미가 말하는 ‘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좀 굵게 여물면 유년의 종말, 인생의 전환점, 영겁 같은 굴레로부터의 해방 등 그럴듯한 수식어로 치장된 이름 하나쯤 붙일 수 있겠으나 당시엔 그냥 끝이었다. 그냥, 후시미는 이제 나랑 같이 계속 놀 수 있겠구나 하는 순진무구한 생각만이 그 뒤로 희미하게 떠올랐다.
매캐한 탄내와 검댕을 빼고 소실은 완벽했다. 잿더미가 되지 않은 건 후시미 뿐이었다. 온 동네를 붉게 물들였던 화염은 이젠 한 가닥도 남지 않았다.
사루.
야타는 멍하니 아까 후시미가 창 너머로 보던 곳을 바라보았다. 후시미를 못살게 굴었던 흰 싸구려 샌들의 아가씨도, 야타를 보면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면서 ‘어린 애는 이런 데 오면 안되지’ 하고 사탕이나 내밀던 아줌마도,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늘상 주눅 들어 있었던 그 누나도 전부 재가――.
욱―.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신물을 야타는 웩웩거리며 그대로 뱉어냈다. 깜짝 놀란 후시미가 숙인 야타의 등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묻는다. 야, 왜 그래? 아까 연기 마셨어? 속 이상해? 머리 아파? 미사키, 괜찮아?
번쩍, 천둥이 비친 그 순간에 숙인 채로 마주 본 후시미의 얼굴은 태연했다. 괜찮아? 그건 야타가 후시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야타는 후시미가 무서운 건지 불쌍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해가 떴을 시각인데도 주변은 여전히 구름 때문에 흐렸다. 그 사이에서도 후시미의 얼굴은 하얗기만 하다. 핏기가 쑥 빠진 얼굴로 후시미는 야타의 손을 꽉 잡았다.
비가 그치면 가자.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후시미가 눈을 한 번 깜박 하니 눈가에 맺힌 물방울이 데굴데굴 흘러 뺨 사이에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게 눈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야타는 후시미의 손을 맞잡았다. 울지 않으면 그건 후시미가 이상한 거였다. 그리고 야타는. 선량한 야타 미사키는 자신의 친구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