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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리는 거울
후시미랑 후시미 아버지 얘기. 어쩐지 설명역은 항상 아키야마가 하게 되고....
제 아무리 총탄과 화약, 전자기기와 현대 과학기술을 모두 동원한 살상도구가 있다 하더라도 원초적인 날붙이를 무시할 순 없다. 셉터 4의 무장이 어째서 긴 샤벨인지는 모른다. 단순히 전통적인 고아함을 좋아하는 무나카타 레이시의 취향이라기엔 그 이전부터도 셉터4의 상징은 언제나 긴 샤벨이었다. 푸른 검집에 양각으로 새겨진 금빛 무늬, 두터운 손잡이와 대비되는 예리한 칼날,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왕의 신하들만이 발할 수 있는 푸른 빛이다. 시대에 뒤떨어 졌다고 평할 수도 있으나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무기다. 적과의 적당한 거리, 직접적인 타격, 효율적인 방어, 시가전에서는 오히려 총이 더 불리하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들의 무기가 검인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다만 셉터 4의 모든 인원들은 모두 특수한 분야에서 왕이 직접 선별해 데려오고, 출신이 제각각인 이들 중엔 칼은 다뤄보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왕의 힘과 검술을 적당히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어렵다고 흔히들 얘기한다.
반대로 칼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온 사람도 있는데, 자위대 출신인 아키야마 히모리와 벤자이 유지로는 검도와 유도가 훈련에 있었고 카모 류호는 전직 요리사 출신으로 검은 아니더라도 칼을 다루는 데는 분명하게 자질이 있다.
그렇다면 후시미 사루히코는 뭘까.
중등교육만을 겨우 마치고 제복을 입은 그, 그 소년은 길고 푸른 샤벨을 받기 전에도 예리한 칼날을 다룰 줄 알았다. 칼잡이 후시미. 호무라의 성가신 꼬맹이 2인조 중 한 명. 촌스러운 네이밍에 후시미는 듣고 코웃음 한 번 치고 말았으나 그가 검을 제 수족처럼 잘 다루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긴 샤벨을 왼쪽에 차고서도 또한 양 손과 허리에 길이 25cm의 단검을 일곱개. 소맷단과 허리 뒤 쪽에 숨기고 다니는 그는 아마 왕의 병사들 중 가장 날붙이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굳이 검이 아니라 날붙이라 칭하는 이유는 명명백백하게 검술에선 아와시마의 실력이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검이라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는 모든 종류의 날붙이를 잘 다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셉터 4의 전투 대원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이 방침이다. 사무실이 있는 본관에서 200m 거리. 2인 1실이 기본, 이층침대와 두 개의 책상, 의자, 책장, 옷장이 구비되어 있으나 아쉽게도 욕실은 없다. 공용 세면장과 목욕탕을 사용해야 하므로 때때로 훈련이 끝난 직후에는 어떻게든 자리를 확보해 무사히 씻고 싶은 이들의 각축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침에는 소대별로 시간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수라장은 찾아볼 수 없으나 다들 막 자다 일어난 얼굴임은 분명하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에 번듯한 제복, 왁스로 세우거나 웨이브를 살리거나 차분하게 빗질을 해둔 낮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모두 초췌한 모습으로 양치질을 하는 아침의 세면장은 전투대원들의 푸른 제복을 보며 꺅꺅거리는 서무과 젊은 아가씨들의 환상을 깨기 적합하다.
"아…… 어제 너무 마신 거 같은데."
"괜찮아?"
"토할 것 같습니다 아키야마 씨."
"히다카는 어제 먼저 들어갔잖아?"
"그 전까지 달렸잖아요. 해장…해장을 하고 싶어요…. 카모 씨 오늘 간식은 느글거리지 않는 걸로 부탁해요….¨
"왜 내가 당연하게 간식을 만들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앗, 나는 도너츠! 설탕시럽이 녹아 내린 도너츠가 먹고 싶어!"
"말만 들어도 느글거려."
"기름 둥둥 뜬 돈코츠 라멘! 돈까스! 생크림이 잔뜩 올라 간 케이크!"
"그만둬! 올라올 것 같다고!"
"개구리 눈알! 원숭이 뇌! 산 채로 왁스 밑에서 뻐끔거리는 시체! 질척질척! 끈적끈적! 지난주에 본 호러영화! 토미에! 소용돌이!"
"으욱…!"
말은 안해도 모두가 조금씩 숙취에 시달리는 동안 히다카를 맘껏 조롱할 수 있는 건 미성년자 방어권으로 오렌지 쥬스만 마신 도묘지 뿐이다. 기어이 한계에 달했는지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을 팽개치고 뛰어 간 히다카가 그 난리통 속에서 누군가의 어깨를 스친 것이 문제였다.
"아."
히다카의 욱욱거림을 빼고 세면장 내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낄낄대느라 정신없던 도묘지마저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미묘하게 비껴난 뒷편으로 못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뒤도는 순간, 기어이 이 아침의 세면장에는 초췌한 우울 대신 싸늘한 공포만이 감돌게 되었다.
"아프잖아…요."
정중함이 가끔 더 무섭다는 사실을 안다. 제복을 입고서는 온갖 비난을 서슴지 아니하는 후시미는 사석에서는 존댓말을 쓰곤 했다.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예의를 귀엽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 차마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이 날아올까 무서워 아무도 입조차 열지 않는 사이 칫, 하는 습관적인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손등이 목덜미를 훑는다. 하얀 거품 밑, 물기에 엷게 번져가는 것. 모두 입에 문 치약 거품만큼 하얗게 질려 고색창연한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누군가 중얼거렸다.
"피……."
그것이 칫솔을 떨어뜨린 후세였는가 조용히 고개를 돌린 고토였나 안경을 벗어 상황도 모르는 채로 같이 굳어버린 에노모토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자로 빨간 실선이 그어진 목에서 조용히 흘러내리는 것이 중요했다.
자라나는 성장기의 청소년에게 면도란 필시 어려운 일이다. 하룻밤만 지새도 턱 밑이 까슬해지는 카모조차 안전장치가 부착된 5중 면도날을 사용하건만 일주일에 겨우 한 번이나 할까말까한 후시미 사루히코가 애용하는 것은 구식 면도칼이다. 이제는 풍물시장에서나 팔 법한 구시대의 유물. 나무손잡이에 접이식, 예리한 칼날이 고스란히 드러난 면도칼은 다루기도 까다로워 다치기 일쑤건만 후시미는 그 또한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희고 긴 목을 거울에 드러내고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칼날로 상처가 나지 않게 긁어낸다. 단순히 손에 칼을 쥐고 위아래로 표면을 훑어내는 것 뿐인데도 묘하게 엄숙해지는 행위를 히다카는 최악의 형태로 방해해버렸다.
"어쩐지."
후시미도 손등에 묻은 피를 확인했는지 거울을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조용히 내뱉는 말이 꽤 아프긴 했던 모양이다.
"구경났어요?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여전히 굳어 후시미를 쳐다보는 일동에게 후시미는 눈짓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르켰다.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화들짝 놀라 떨어뜨린 칫솔을 다시 입에 무는 분주함이 다시 공동세면장을 소란스럽게 하는 사이 아키야마는 후시미에게 물었다.
"왜 그걸로 면도하세요?"
"왜요?"
"그냥…. 요즘은 아무도 그런 거 안 쓰잖아요. 위험하기도 하고."
무심코 아키야마의 손이 목덜미로 향하는 것을 쳐내고 후시미는 왼쪽 뺨을 훑었다. 슥-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면도날이 왼뺨에 묻어있던 거품들을 덜어낸다. 거울로 맨질맨질한 표면을 확인한 후시미가 물에 칼을 씻는다.
"…그 녀석."
울리는 물소리에 후시미의 목소리가 묻혔다. 아키야마가 멀뚱하게 쳐다보면 후시미는 거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니키."
"니키?"
"아침에 면도할 때마다 툭 쳐서 어떻게 안될까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내 목에다 들이대더라고…요."
젖어서 내려 온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요모조모 뜯어보던 후시미가 히죽 웃는다. "칼잡이 후시미." 후시미가 거울로 눈동자만 굴려 아키야마를 바라본다.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후시미의 얼굴은 경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촌스러운 것까지 딱이네. 칼잡이 후시미."
아키야마의 어리둥절한 표정은 뒤로 한채, 씹어뱉듯이 말한 후시미는 딱소리가 나게 칼을 접고는 세면도구들을 챙겨 나갔다.
파리한 표정으로 칸막이에서 나온 히다카 아키라가 영문 모르는 채로, 그 날 오후 극심한 격무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차치하도록 한다. 방에 돌아가서도 피가 멎지 않았는지 당일에는 거즈를 덧대고, 이후 약 3일간은 무심하게 목을 매만지다가도 따끔거림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던 후시미의 모습에 특무부는 지레 겁을 먹고 안전장치가 부착된 면도칼을 선물했다.
그럼에도 후시미 사루히코는 면도할 때마다 오래된 면도칼을 사용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후시미 사루히코의 과시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위협적인 모습이긴 했다. 길고 예리한 칼로 얇은 살갗 위를 도려내는 것은. 후시미는 그 말도 얼추 맞는다고 생각한다. 보여줄 대상은 정해져 있다. 거울 속에서 제 목에 칼날을 들이대는 얼굴을 본다. 히죽거리면서 '사루히코―'라고 친근한 척 이름을 속삭이던 얼굴에게.
그리고 아키야마 히모리는 그 경멸스런 표정과 짓씹던 목소리를 잊지 못해서 간혹 면도하는 후시미를 바라보곤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 뺨과 아직은 선이 무딘 턱, 가느다란 목을 칼날로 훑어내는 후시미는 사람을 침묵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분히 내리깔고 거울을 응시하는 눈은 때때로 흔들렸으나 멸시와 증오보다는 오히려…….
이런 저런 일이 있다 해도 후시미 사루히코가 셉터4에서 가장 날붙이를 잘 다루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칼잡이 후시미'라는 촌스러운 변명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그러나 최근 아키야마 히모리는 그 별명을 들을 때마다 다른 이름을 생각한다.
후시미, 니키.
이를 악물고 꾹꾹 짓이긴 그 이름을 아키야마는 후시미의 눈동자에서 보고, 그의 목에 들이댄 칼을 쥐고 있는 것은 다른 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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