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동네온리페스타/배신주의에서 나오는 12'~14' 후시미 오른쪽 소설본 재록에 대한 선입금예약과 신간에 대한 수량조사를 진행합니다. 수량조사 기간은 1월 27일까지이며 재록은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그 이후에는 추가 출력이 불가능함을 알려드립니다.
예약 분량만큼만 뽑아 현장 판매분은 1권 또는 없을 예정이오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신중히 생각하시고 입금 뒤 성명과 입금자명(동일한 경우 한번만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예약 부수를 써주세요. 반드시 입금 뒤 수량 조사 폼을 작성해주셔야 하며 기간 마감 뒤 입금이 되어있지 않으면 제가 무척 곤란합니다(...)
재록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입금(우편비 +3000)->예약폼 작성시 주소와 우편번호, 연락처와 받으실 분 이름을 쓰시면 월요일에 배송해드리겠습니다.
신간의 경우 기타란에 '통판 요청/(메일주소)'를 써주세요. 행사 전후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 페이지수 증가 및 인쇄 단가 문제로 인해 재록본 가격이 인상되었습니다. 인상분은 현장에서 받거나 추가 입금을 받을 예정입니다. 가격 문제로 인해 환불을 원하시는 분은 댓글로 입금자명 및 입금 계좌를 알려주세요. 죄송합니다.
1. Let it Shine/12'~14' 후시미 오른쪽 소설 재록/B6/300페이지 내외/제본/14000
▽입금정보
2012년 12월 동네페스타부터 2014년 3월까지 트윈지를 제외한 후시미 오른쪽 소설 전부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나후시, 미사루, 아키후시, 쿠사후시 등 커플링이 중구난방이므로 신중하게 생각해주세요!
추가 수록분은 무나후시 'Let it Shine'으로 샘플은 추가분 발췌입니다.
▽Sample
1.
눈을 뜬다. 빛과 어둠, 채도와 명도 말고는 구분하지 못하는 눈에 비치는 시야가 하얗다. 날씨는 맑은 듯. 대자로 뻗은 사지의 신경을 모두 곤두세운다. 오른손을 한 번 쥐었다 왼손을 한번 쥐었다, 펴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린다. 위 아래 오른쪽 왼쪽.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내쉬고, 괜히 한 번 발가락도 꼼질꼼질 움직여 본다.
아, 씨발.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온다. 진짜 인생 좆같네.
징그러울 정도로, 아직 살아있었다.
2.
“사루, 넌 뭐가 되고 싶어?”
마시멜로우가 말랑하다 못해 끈적하게 녹아내린 것을 스트로우로 휘휘 젓고 있던 후시미는 미사키의 말을,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식어버린 핫초코는 기분 나쁠 정도로 찐득한 단 맛이었다. 쿠사나기는 뭘 만드는 데는 재료를 아끼지 않았으니 정말로 초콜릿을 잔뜩 녹였을 것이다. 얼떨떨한 기분에 입가심마저 실패한 후시미는 혀 뒤로 엉겨드는 불쾌함을 애써 무시하며 화제를 돌렸다.
“너는?”
조금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다만 후시미는 그게 뭔지 몰랐고 그 이상의 관심도 없었다. 학기 초에 내는 장래희망, 진로조사서 같은 것들을 후시미는 늘 빈 칸으로 냈다. 따분하게 학교 같은 걸 계속 다니고 싶진 않았지만 그만두고 뭔가를 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사키는, 미사키도 그랬고 그래서 우리는 같이 다녔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뭐가 되고 싶냐’고? 직업을 얘기하는 거라면 너무 빠르지 않나? 우린 이제 열다섯이잖아. 장래희망을 얘기하는 거라면, 너무 늦지 않아? 그런 건 대여섯살 짜리가 유치원 학예회 때나 귀엽게 할 말이지.
머릿속에 두 가지 의견이 둥둥 떠다녔지만 미사키가 하는 말이기에 후시미는 어느 쪽의 말도 하지 않았다. 미사키가 뭐가 되고 싶다고 하면, 후시미도 그거나 하면 됐다. 우주인이 되고 싶다고 하면 나는 우주선을 만들고, 국무총리가 되고 싶다고 하면 나는 정치인이 되면 된다. 미사키의 소원이라고 해봤자 허무맹랑하고 실현 가능성 없는 것들 뿐 이겠지만 미사키가 원한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면 된다.
“나는 미코토 씨의 오른팔이 될 거다!”
그러나 여기서 후시미는 또 다시 다 식은 핫초코를 마셨고, 이게 지독하게 달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자신을 쥐어 패고
싶었다. 아까보다 기분이 더 나빴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질척했다.
“미코토 씨의 오른팔이 된다니, 진짜 멋지지 않냐 사루? 키도 크고, 이렇게 쿠사나기 씨처럼….”
“아니라고! 클 거거든! 아직 다 클 때까지 몇 년이나 남았어! 그리고 키랑 오른팔은 무슨 상관이야!”
“요컨대 쿠사나기 씨를 꺾겠다는 거군. 쿠사나기 씨는 엄청나게 세고 엄청나게 머리도 좋은데, 네가 그걸 할 수 있을 것 같냐.”
방금 전까지 했던 생각을 모두 뒤엎고 후시미는 되는대로 미사키를 포기시키기 위해 애썼다. 유치한 비방과 공격에도 미사키는 결국 기어이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머리는 네가 맡으면 되지! 우리 둘이 미코토 씨의 오른팔이 되는 거야!”
단 걸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후시미는 속이 울렁거렸다. 명치끝에 눅진한 핫초코 덩어리가 엉겨서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입을 열면 속에서 먹었던 게 전부 치받쳐 올라올 것 같아 후시미는 미사키를 무시하고 숨부터 크게 쉬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미사키가 되고 싶은 게 미코토 씨의 오른팔만 아니었다면 후시미는 정말로 그 어떤 것이든 미사키를 도울 용의가 있었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되고 싶은 게 없었다.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원하는 것도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이지. 미사키. 나는, 둘이서 그냥 같이 살고, 같이 밥 먹고, 그냥, 그런…….
“기껏 마실 거 맹들어주니 내 목을 치겠단 얘기라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마, 야타는.”
2층에서 내려온 쿠사나기 씨가 다 마신 머그컵으로 야타의 머리를 한 번 가볍게 찍었다. 으악! 미코토의 오른팔이 되겠단 녀석이 이걸로 아프면 쓰것냐. 야타가 머리를 감싸쥐고 끙끙대고 있자니 왁자한 소리와 함께 호무라의 문이 열렸다. 찬바람이 훅 끼쳐 들어온다.
“다녀왔습니다-!”
잠깐 심부름 갔던 카마모토와 안나였다. 문이 열린 김에 밖으로 나가야 한다. 후시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미안, 미사키, 나…… 급하게 스툴에서 내려 뒤를 돌면 후시미는 무언가와 부딪혔다. 후시미의 허리께밖에 오지 않는 안나였다. 새빨간 구슬 너머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후시미를 응시한다.
사루히코.
자그마한 입술이 후시미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쭈삣 소름이 돋은 후시미는 미사키에게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한 채 호무라를 뛰쳐나왔다.
되고 싶은 건 없었지만 되고 싶지 않은 건 있었다.
미코토 씨의 오른팔이 되는 건, 나는, 싫은데.
미사키. 나는, 호무라는―
(중략)
왕의 클랜즈맨이 되면 부가적으로 신체도 강화된다고 한다.
이게 무슨 게임 특수 아이템도 아니고.
인벤토리 창을 열어 방금 획득한 갑옷의 성능을 확인하며 후시미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호무라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미사키는 후시미의 멱살을 잡았다. 야, 내가 잡았는데 왜 네가 그걸 먹어! 그러게요. 확률이 랜덤이라서요. 말도 안된다고 코웃음치며 다 마신 콜라 캔을 한 쪽으로 밀어두고 후시미는 다시 게임에 몰두했다.
새로운 타이틀의 성능을 확인한 건 그 해 겨울이었다. 정말로 후시미는 추위를 덜 타게 됐고 미사키는 반바지를 입고도 돌아다니게 됐다.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나중에는 잊어버리기 마련이라 후시미는 결제까지 하고 나서야 제가 왜 이불을 사야했는지 알아챘다.
후시미가 그 때까지 덮던 이불은 한겨울에도 얇은 홑청이었다.
4월부터 5월 사이 후시미는 단말기를 세 번이나 교체했다. 어쩐지 상쾌하게 일어났다 싶으면 단말기 화면은 먹통,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질 않나. 아슬아슬한 지각 끝에 에노모토에게 단말기를 던졌다. “이상하네요.” 지금도 후시미의 귀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말이었다. 멀쩡해요. 후시미 씨가 쓰던 단말기 전부.
“왜 후시미 씨가 쓰면 고장이 날까요?”
8월엔 셉터4 부지 전체의 통신망을 점검했다. 일시적이지만 빈번한 전파 장애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원인은 불명이었다.
9월엔 안경렌즈를 갈았다. 청소년기엔 어떨지 몰라도 성인이 된 이후엔 시력이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면서 안과의사는 후시미의 시력검사 결과를 보며 의아해했다. 압축한 렌즈는 이전보다 두꺼웠고 비싸 후시미의 통장은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10월엔 소화벨이 울렸다. 인근의 바이스만편차가 갑자기 폭증하여 분석하던 정보반은 창밖을 보았다. 바이스만 편차가 폭증하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검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보반 대원들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실장인 무나카타와 정보 통합 담당인 후시미에게 보고를 올렸다.
한편, 지하의 대련장에선 소화기로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치솟았다. 대원들은 멀찍이 피하면서도 화재 진압 이전에 소방서에 별 일 아니라는 전화를 먼저 해야 했다.
현장에 있던 후시미는 보고를 받기 전에도 이미 충분히 당황하고 있었는데 첫째로는 그 불길이 지금은 세상에 없는 스오우 미코토의 것과 맞먹는 왕의 힘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불길의 시작점이 저였으며, 셋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시미가 의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시미 군.”
우왕좌왕하는 대원들을 구제한 것은, 그들의 왕이었다. 반쯤 얼이 빠진 후시미가 뒤돌아보면 붉은 불길 너머로 무나카타가 보였다.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자욱해진다. 일렁이는 푸른색이 붉은 불꽃을 잡아먹으며 후시미 쪽으로 향했다.
“침착하세요.”
그게 무나카타가 입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후시미는 꽤 나중에 알았다. 무나카타는 그저 후시미를 한 번 부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무언의 공방전만이 가득하던 둘 사이에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가 성립된 날이었다.
둘의 시선이 오가는 동안 불길은 서서히 사그라들었으나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세 발자국 거리에서 무나카타는 걸음을 멈췄다. 밖으로 새어나가던 힘은 다른 의미로 침착해진 후시미의 머리 밑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정밀 진단을 받아봅시다.”
“사표 써야 되나요?”
“아직, 그럴 때는 아닙니다.”
세 발 자국. 1초도 안되는 시간에 따라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그 거리는 가깝고도 멀다. 무나카타는 뒤를 돌았다. 후시미는 따라가지 않았다.
은왕은 행방불명, 금왕은 자리를 비웠고, 녹왕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며, 청왕이 모든 걸 관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에서 모든 일은 원인불명의 미스터리였다.
현대 AU. 평범한 초등학생 야타 미사키와 금단의 골목(...)에서 살고 있는 후시미 사루히코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창가, 여장 등의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ample
비가 후득후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결에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몸이 무거워 움직여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지, 잠결이라 모호했으나 아까보다 더 거세진 빗소리 사이에서 이불이 한 번 훌렁 움직이고 눅눅한 비내음 섞인 찬바람이 종아리께를 스쳤을 때 야타는 간신히 눈을 떴다.
“봐, 미사키.”
야타가 눈을 부비며 일어났을 때 후시미는 창 앞에 서 있었다. 가는 빗방울들이 툭툭 튀어 후시미의 얼굴에서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눈썹에 맺힌 것을 후시미가 손등으로 한번 쓱 훔쳐내다가 멈칫했다. 흰 손등에 묻은 물방울이 시커메서 간간이 아주 작은 검은 알갱이들이 그 안을 맴돌았다.
“야, 가서 얼굴 씻고 와.”
“네 얼굴이나 보고 말하지 그래, 미사키.”
후시미의 얼굴이 그 꼴이니 야타도 그리 깨끗한 몰골은 아닐 게 분명했다. 꽤나 깔끔 떠는 후시미가 곧 씻으러 갈 거라고 야타는 생각했지만, 후시미는 비 맞은 그대로 줄줄 흐르는 검댕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하염없이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봐봐, 미사키. 후시미는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야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씻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와서 엎어졌으니 어둠이 겨우 가신 회색 하늘 밑에서도 바닥은 엉망이었다.
알게 뭐냐. 이 집의 주인은 이미 그저께 이사 갔다. 철거가 한창인 동네엔 주인 잃은 빈집이 많았고 이내 길 잃은 아이들의 안식처가 되곤 했다. 빈 맥주캔, 아무데나 비벼 꺼 눌어붙은 자국이 얼룩덜룩한 벽지와 널부러져 한 움큼 쌓여있는 담배꽁초들, 찢겨진 비닐봉지, 심심찮게 말라붙은 핏자국과 간혹 바람에 담뱃재와 흰 가루들이 흩날리기도 했다. 이런 날씨엔 저 멀리서 이 동네를 보면 동네가 있는 줄도 모르지 않을까. 온통 똑같은 잿빛으로 동화돼서 어디로 스러질지 모르는 곳.
훅 들이친 바람 속에 은근슬쩍 매캐한 탄내가 섞여갔다. 야타는 거뭇거뭇한 제 얼굴을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가 수도가 끊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젠장. 사루! 여기 수도 끊겼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도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후시미가 움직였다. 모르는 집을 두리번거리다가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야타의 손목을 낚아챘다.
“나가자.”
야타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후시미는 야타를 질질 끌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후시미의 손바닥이 어느 새 제 팔목을 쥐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아귀가 억세졌다고 감탄할 새도 없었다. 아까보다 더 거세진 빗줄기에 순식간에 머리부터 흠뻑 젖어들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뭐 어때, 미사키. 끝인데!”
“뭐가? 뭐가 끝인데?”
쏴아아아- 하면서 쏟아지는 비에 번쩍이는 하늘에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천둥소리까지 후시미의 소리가 너무 작았다. 흠뻑 젖은 얼굴로 마주보고 있노라면 후시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끝이라고! 끝! 끝이야!
뭐가 끝인지도 모르겠는데 자꾸만 후시미는 끝이라고 말한다. 줄줄 흐르는 빗물을 아무리 닦아도 눈이 흐렸다. 후시미는 고개를 치켜들고 세수하듯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야타도 허공에 대고 어푸어푸 세수를 했다. 박박 검댕이 묻어나오지 않을 때까지 손으로 문질렀다. 흰 티에도 검댕이 묻어 있어 내친김에 야타는 티도 벗었다. 어차피 빨아야 했다. 속옷은 어쩌지. 야타는 허공에 대고 낄낄대는 후시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야! 좀 있다 비 그치면 우리 집 가자!
후시미가 눈을 꿈벅거리다가 좋아! 하고 크게 대답한다. 좋아! 좋아, 미사키. 좋아! 후시미가 방방 뛰는 걸 뭐가 그리 즐거워서 저러나 하고 생각하다 야타는 후시미가 한 번도 제 집에 온 적이 없음을 상기한다. 뿐만 아니라 후시미는 어디에도 가 본 적 없었다. ‘낯선 장소에’ ‘둘만이’ ‘존재해서’ ‘큰 소리로’ 대화해 본 것조차 처음이었다. 후시미가 벗어나지 못했던 거리는 낮에는 침묵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공간에 속한 모든 물질이 소리를 빼앗긴 것 같은 동네였다. 밤새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사람들은 하루치의 말소리를 소진한 것 마냥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후시미는 지난 새벽 막 빠져나왔다.
거기까지 상기하고 나니 야타는 후시미가 말하는 ‘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좀 굵게 여물면 유년의 종말, 인생의 전환점, 영겁 같은 굴레로부터의 해방 등 그럴듯한 수식어로 치장된 이름 하나쯤 붙일 수 있겠으나 당시엔 그냥 끝이었다. 그냥, 후시미는 이제 나랑 같이 계속 놀 수 있겠구나 하는 순진무구한 생각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매캐한 탄내와 검댕을 빼고 소실은 완벽했다. 잿더미가 되지 않은 건 후시미 뿐이었다. 온 거리를 붉게 물들였던 화염은 이젠 한 가닥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루.
야타는 멍하니 아까 후시미가 창 너머로 보던 곳을 바라보았다. 후시미를 못살게 굴었던 흰 싸구려 샌들의 아가씨도, 야타를 보면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면서 ‘어린 애는 이런 데 오면 안되지’ 하고 사탕이나 내밀던 아줌마도,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늘상 주눅 들어 있었던 그 누나도 전부 재가――.
욱―.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신물을 야타는 웩웩거리며 그대로 뱉어냈다. 깜짝 놀란 후시미가 숙인 야타의 등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묻는다. 야, 왜 그래? 아까 연기 마셨어? 속 이상해? 머리 아파? 미사키, 괜찮아?
번쩍, 천둥이 비친 그 순간에 숙인 채로 마주 본 후시미의 얼굴은 태연했다. 괜찮아? 그건 야타가 후시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야타는 후시미가 무서운 건지 불쌍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해가 떴을 시각인데도 주변은 여전히 구름 때문에 흐렸다. 그 사이에서도 후시미의 얼굴은 하얗기만 하다. 핏기가 쑥 빠진 얼굴로 후시미는 야타의 손을 꽉 잡았다.
“비가 그치면 가자.”
야타는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후시미가 눈을 한 번 깜박 하니 눈가에 맺힌 물방울이 데굴데굴 흘러 뺨 사이에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게 눈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야타는 후시미의 손을 맞잡았다. 울지 않으면 그건 후시미가 이상한 거였다. 그리고 야타는. 선량한 야타 미사키는 세상에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1.
아스팔트의 뜨거운 복사열에 아지랑이가 어지러울 정도로 피어난다.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닐 정도로 몸에 열이 많은데 그것조차 내뿜을 길이 없는 여름이 야타는 싫었다. 땀이 비처럼 쏟아져 뚝뚝 떨어지는 마당에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맘이 그득해 야타는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두껍고 낡은 천막이 찢어져 가려진 부분을 조금씩 드러내는 길은 이 낡고 낮은 동네에서도 가장 낮고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낮이면 죽어있다 밤이 되면 일제히 남사스러울 정도의 분홍색으로 변하는 거리의 용도는 야타가 어림하기엔 너무 멀었으나 부정과 금기의 장소임은 확실했다. 칼을 들고 설치는 깡패들을 빗자루 하나로 쫓아버릴 수 있는 옆집 아줌마도 옆에서 찬물 한 대야를 뿌리는 엄마도 절대 가면 안되는 곳이라며 신신당부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는 너무 멀었고 야타의 집은 그 거리의 뒤였다. 매번 돌아가야 하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거리의 금기는 강했으나 오늘은 정말, 미친 듯이 더웠다. 아주 죽을 것 같이. 정말 너무!
저도 모르게 강조하는 것은 오늘의 더위가 터부를 깰 만큼 적합하고 타당한 변명이 되는지 되새기기 위한 어린아이 특유의 영악함과 두려움이다. 거리를 가로지르려 하는 이유의 반쯤이 호기심과 호승심이라는 사실을 야타는 인정하기 싫었다.
여름이 한 두 번은 아니었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3번, 기억하는 6번, 도합 9번. 이 길을 따라 학교를 오가는 게 6년째였으니 10번째 여름이라고 지름길이 반드시 필요한 법은 아니었으나 하필이면 그 날 학교에서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는 녀석이 그랬던 것이다.
“야, 나 거기 지나왔다!”
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거기’가 어디인지 금세 알아챘다. 남자애들은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들었고 여자애들은 지들끼리 얘기하면서도 계속 흘긋흘긋 뒤를 쳐다 보았다.
어른들은 ‘거기’를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했다. 가끔 아이들이 그 곳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가르쳐주려던 남자들도 있었으나 동네 어느 여자든 그런 꼴을 보면 가만두지 않았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남자보다 여자가, 그 거리에 대한 멸시는 실로 대단했고 이 동네의 엄마들은 모두가 억척스러웠으므로 그 어떤 남자도 누군가의 엄마는 이기지 못했다. 제 아무리 흥미로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겠지만 불행히도 공간은 고정된 물체였다. 사람들이 쉬쉬하고 억누를수록 아이들의 호기심은 증폭되었고 그 거리는 따라서 모든 아이들이 갖고 있는 궁금증이기도 했다.
“어땠어? 뭔데?”
“거기 가면 안 되지 않아?”
“얘기하지 마!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별 거 없었거든!”
책상을 에워싼 남자아이들의 질문이 은밀하게 들뜨자 교실 앞에서 누군가 악다구니를 쓰고, 오늘의 주인공은 크게 소리쳤다.
“별 거 없더라니까. 진짜야.”
거짓말! 누군가 외친 그 말은 반 아이들 모두의 심경을 대변한 말이었으리라. 그 거리에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었다. 정말? 정말이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지만 맥 빠진 얼굴로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짜.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더라.”
“사람 없어?”
“한 명도 못 봤어. 근데 좀 이상해.”
“뭐가?”
대낮에 사람이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동네의 아이들은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찌개를 데우고 찬밥을 퍼먹는 게 익숙했다. 간혹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아이들은 그네들이 밥을 차려줬다. 아빠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아빠를 어색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른 지역의 공사장까지 가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빠가 없는 대신 그 애들의 저녁반찬이 조금 더 많다는 사실도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집이 전부 이상했어.”
“어떻게?”
“다들 슈퍼같이 생겼는데 벽이 전부 유리야.”
“유리? 그럼 안이 보여?”
“아니. 커튼 쳐놨던데. 엄청 두꺼운 커튼.”
“뭐야, 진짜 시시하네.”
“저녁에는 되게 밝던데.”
“저녁에만 사람이 사는 거 아냐?”
“그런 게 어딨어?”
“혹시 귀신이라든가?”
에이, 귀신이 불 켜고 살아? 아냐, 거기 사람 사는 거 맞아. 그 앞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 거기로 들어가던데? 맞아, 나도 봤어. 나오는 건 못 봤지만.
옆자리 짝이 야타의 팔을 툭 쳤다.
“넌 거기 누가 사는지 아냐?”
궁금하지만 야타가 움직이지 않아 차마 미동도 못한 모양이었다.
“…관심 없어.”
놀란 표정을 수습하며 그렇게 답했지만 야타의 귀는 내내 한 무리의 아이들이 떠드는 곳으로 향해있었다. 수업 시간의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고, 화제는 금방 다른 곳으로 넘어갔지만 하교할 때까지도 야타의 머리는 미지와의 조우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후덥지근하기 짝이 없는 바람에 펄럭펄럭, 낡고 묵직한 천막이 두터운 소리를 내며 살풋 안을 드러냈다. 고작 그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움찔 어깨가 튀었으면서도 야타는 찰나로 스쳐간 거리를 보았다. 심호흡을 하고, 그래도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어 천막이 슬쩍 올라가는 순간, 야타는 냉큼 눈을 감고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떴다.
(후략)
3. Beautiful Stranger/쿠사후시/A5/20페이지/2000원/R19
2와 설정을 같이 하지만 단독으로 보셔도 전혀 문제 없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평범하게 둘이 수위에 걸맞는 짓(...)만 합니다.
▽Sample
1.
쿠사나기는 흡연가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따진다면, 끽연가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클래식과 아날로그에 절대적인 신념을 가진 독특한 취미의 남자는 그래서 삼촌의 바를 물려받을 때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털어 가게 인테리어에 썼다. 한 세기의 손때가 묻은 원목 테이블과 스툴을 통으로 들여왔다. 세관을 통과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등도 갈았고 글래스도 발품을 팔았다. 술에 관해서는 삼촌의 안목도 만만찮아 쿠사나기는 별로 건드릴 게 없었다.
한 동안 쉬고 있던 가게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새로 오픈 했을 때 옛 주인을 알던 사람들은 감탄을 내뱉기도 했다. 어머, 예전하고 많이 달라졌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묘한 탐색전이 흘렀다. 길가 어디에 있는 큰 술집이라면 모를까 열다섯 평 남짓한 구석의 칵테일 바는 외지인을 상대하는 장사가 아니었다. 한 없이 열린 것 같은 화려한 유흥가라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낯선 자를 철저하게 배척하는 거리였다. 쿠사나기는 그럼에도 생각보다 금방 자리를 잡았다. 장사수완은 꽝이었어도 나름대로 접객에는 소질이 있던 삼촌의 휘황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건 쿠사나기의 성정이었다.
주 고객이 되는 여자들은 개처럼 깔아뭉개고 박아 대며 제가 주도권을 가졌다며 만족하는 수캐들과는 다른 쿠사나기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가장 은밀하고 섬세하게 의중을 파고드는 예리한 칼날을 시간을 들여 연마한 그녀들은 누구보다 상대에게 기민하다. 겉으로는 사탕처럼 달게 굴어도 속으로는 냉정하게 잇속을 따질 줄 아는 남자는 결코 그녀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고로 쿠사나기의 바는 늘 휴일을 즐기러 온 여자들이 가득했다. 저들이 상대를 다루는 만큼 정중하게 저들을 다뤄줄 남자는 흔치 않았다. 스물여섯이라니, 겉보기엔 꽤 어린데도 잘만 논다면서 어디 가서는 빠지지 않는 쿠사나기를 막내 취급하곤 했다. 때때로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머물러 있는 손님도 있었다. 그녀의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대가로 한 대를 얻어 피면, 거래는 성립이다.
모든 일의 반점과 온점이 되는 한숨의 시간을 쿠사나기는 사랑했다. 묵직하고, 부드럽게. 그런 종류를 쿠사나기는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종류만 오래 고집하진 않았다. 쿠사나기 이즈모는 모든 애호가가 그러하듯 수집과 탐색의 열정도 지니고 있었다. 수천 가지의 술, 수천 가지의 담배. 인간의 가장 은밀한 부분과 함께 해 온 도구를 그는 결코 천대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피는 담배는 모두 달랐다. 편의점에 걸린 수십 종을 쿠사나기는 아마 모두 펴봤으리라. 잘 정리된 네일과 잘 어울리는 길고 슬림한 형태, 흰색, 갈색, 검은색, 혹은 빛을 오로라처럼 반사하는 펄지로 포장된 것, 코르크 필터, 입술이 달작지근한 초콜릿과 체리, 부드러운 코코아와 바닐라, 싸한 민트, 첨가제의 들큰한 냄새와 그렇지 않은 것들의 쓰고 무거운 향, 구깃한 소프트팩과 세련된 슬라이드 형태까지. 그 중 맘에 드는 게 있으면 한동안은 그것만 즐겼다.
최근에 쿠사나기가 꽂힌 것은 납작한 케이스의 러시아 담배였다. 부드러운 바닐라 향과 계피의 뒷맛이 느긋하게 감겨드는 맛이 독특한 이 담배를 추천해 준 건 지난달에 같이 잤던 여자였다. 서른이 갓 넘은 여자는 나이답지 않게 어려보이는 얼굴에 그 이상의 관록과 원숙미를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엄마나 누나처럼 굴다가도 갑자기 여동생처럼 꺄륵대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은 산전수전의 베테랑만 모여 있는 거리에서도 톱을 달릴 만했다.
"자기는 맨날 있어 보이는 남자처럼 굴지만 이런 것도 귀엽잖아."
그렇게 말하며 내민 게 어린애 장난감 마냥 색색깔로 포장되어 필터까지 가면 삐까한 금색으로 덮인 이거다. 순수한 원색이 퇴폐의 상징을 요란스럽게 감고 있는 게 부조리의 극을 달렸으나 의외로 가볍지 않은 맛인 게 맘에 들었다. 그 뒤로 두어 번 가게에 더 온 그녀는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같은 걸 입에 물고 있는 쿠사나기를 볼 때마다 깔깔댔다. 추억에 젖고 싶은 맘은 없었으나 그런 걸 빨고 있으면 풍선막대라도 불고 있는 기분이라 쿠사나기도 재밌었다.
이 만화경 같은 담배의 단점은 물량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정발 되었어도 극소수의 수량에 매장도 한정, 가격은 두 배 정도라는 것이었다.
(중략)
완벽한 거절이 후시미의 안에 있었다. 열린 틈 한 곳 없이 닫힌 건물을 쿠사나기는 상상해 보았다. 녹슬고 휘어 잡아 당기면 끼익끼익하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창문, 칠이 벗겨지고 금이 간 외벽, 묵직한 자물쇠 걸린 자욱 그대로 먼지 쌓인 셔터. 철거 직전의 방치된, 버려진 폐허.
“왜 아직도 있어요?”
앞에서 서성이는 쿠사나기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교대자가 올 때까지 족히 세 시간은 흘렀을 것이다. 그 사이 쿠사나기는 새로 산 스무개피의 담배 중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을 차례대로 돌아가며 피웠다. 이 원색의 담배가 갖는 부조리는 가장 끝까지 명징했다. 전부 새까맣게 태워 마지막에 버려지는 반짝이는 금색. 평소였다면 안주머니에 휴대용 재떨이가 있었을텐데 자기 전에 아무 옷이나 걸치고 나온다는게 이랬다. 구겨진 금빛에 오늘따라 죄책감이 들 지경이었다. 바닥에 비벼 끈 담배꽁초에서 시선을 돌려 쿠사나기는 후시미를 바라보았다. 불그죽죽했던 얼굴은 이제는 시퍼렇게 멍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픈 데도, 한 번의 조소와 경멸로 후시미는 그 갑작스러운 기습을 그대로 흘러 넘겼다. 열일곱 혹은 열여덟. 이 거리의 열일곱은 누구도 그렇게 숙련되지 못했다.
“이름이 뭐에요, 손님?”
뭐였지. 한 번 얘기는 한 것 같은데. 하지 않았어요?
쿠사나기가 버린 담배꽁초를 발끝으로 재보며 후시미는 묻는다. 어이구, 많이도 피셨네. 후시미는 금색의 꽁초들을 꾹꾹 짓밟다가 아무렇게나 발로 멀찍이 밀어놓는다. 후시미의 바지 밑단이 짤뚱했다. 얼핏 보면 8부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냥 키가 커 바지가 짧아진 것뿐이었다. 쿠사나기는 수그리고 있는 정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쿠사나기 이즈모. 그렇게 말하면 후시미가 고개를 든다. 회색의 눈동자가 여명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쿠사나기 오빠 오른쪽도 좋아합니다 미코쿠사 굿맨 그러나 오피셜은 미코타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인하고 만나서 그냥 종이에 끼적였던 걸 텍스트로 옮겨 놓은 파일(...)을 발견했다
이 폴더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엄청 많다. 살짝 성인요소 있음
바 호무라의 2층은 스오우의 공간이다. 스오우의 공간이라 해도 처음부터 그의 방이었던 것은 아니다. 쿠사나기가 초반에 생활하다가 그에게 넘겨준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방의 가구는 전부 쿠사나기의 눈에 익은 것이었고 배치도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삐걱거리지만 아직 쓸만한 낡은 침대, 작은 옷장, 삼단 간이서랍과 커다란 거울이 딸린 화장대가 침대 옆에 있었다. 작은 방에 옹기종기 밀어넣는다고 넣었지만 그닥 안정감 있는 배치는 아니었는데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스오우는 원래 모든 것에 무관심한 남자였고 불편하다 해도 손 한 번만 까딱하면 될 것을 그저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을 택하는 남자였으니 그리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물론 그 스오우 미코토가 청소를 할 리도 없으니 방의 청소 역시 쿠사나기의 몫이었다. 내가 니 보모인가? 성질을 내며 걸레를 던져고 스오우는 미안한 기색만 잠깐 내비칠 뿐, 쿠사나기가 닦달을 할 때가 되어서야 미적미적 움직였다. 이쯤되면 정말 엄마인지 애인인지. 전에야 그래도 스오우보다는 말 잘 듣는 토츠카가 있어 열에 한 번은 토츠카가 했지만 그 이후로는 쿠사나기를 제하면 2층엔 청소를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간 2층에 두텁지는 않아도 먼지가 쌓여있단 생각이 퍼뜩 들어 오늘 오후에 싹 한 번 말끔하게 닦아놨더랬다.
그렇게 해두지 말 걸 그랬다.
"으…야, ㅇ,임마, 미코…토…!"
날개뼈가 으스러지도록 손 끝에 힘을 줘 뭉친 근육이 아프다. 니 어리다고 유세하나? 목소리를 쥐어짜내 태연한 척 물어도 스오우에게서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대답 대신 치고 올라오는 허릿짓에 쿠사나기는 헛숨을 들이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끔하게 청소하고 환기까지 싹 해 겨울의 청아한 바람이 들어찬 방 안이 어느 새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버겁고 뜨거운 공기고 가득차 안으로 들어왔다가 단숨에 흩어져 나간다. 뻐끔거리며 간신히 들이쉬는 숨에 기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이 뜨겁다. 온 몸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목이 뻐근하고 모든 게 버겁지만 가장 아픈 쪽은 역시 스오우의 손가락이 꽈악 누르고 있는 등이다. 이제는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리는 등의 통증을 애써 잊으려 하며 - 사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곧장 미코토가 치고 왔으니 - 쿠사나기는 몸에서 힘을 뺐다. 근육이 굳어 있을수록 손해를 보는 건 이 쪽이다. 어린 애들 놀음에 놀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적당히 자기 보전은 해야되지 않겠는가.엉망진창으로 갈 곳을 잃고 흔들리는 얼굴을 스오우의 목 아래에 묻으면 미적지근한 땀에 꽉 잡은 손이 자꾸만 흔들리며 미끄러진다. 말 한 마디 오가지 않는 관계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쿠사나기가 스오우의 시선을 눈치챈 것은 처음이었다. 올려다 본 얼굴은 명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 얼굴이 비치지 않는 밝은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아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쿠사나기는 머릿 속으로 익숙한 방의 구조를 생각했다. 스오우의 열에 달아오른 공기에 이제는 독이 스며들었나 혀 뒤 쪽이 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정이라든가 그런 관계는 아니다. 스오우는 어느 쪽으로든 분노를 뿜어낼 곳이 필요했고 그를 받아주는 건 예전부터 쿠사나기의 몫이었다. 모든 게 쿠사나기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제 스오우는 강요하고 있었다. 그를 받아주는 유일한 사람에게 타타라의 빈자리를, 누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말라붙어 아플 정도인 목구멍을 간신히 벌려 쿠사나기는 말을 뱉었다.
"고마해라, 니."
"…뭐가?"
그제야 한 번, 쿠사나기에게로 향한 눈에 쿠사나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다, 암것도. 그래 니같은 멍청이가 무슨 생각이 있을라꼬. 모든 건 본능이었다. 무의식이다. 으스러지게 눌리는 날개뼈의 둔통을 아득하게 느끼며 쿠사나기는 눈을 감았다. 사실 아픈 곳은 그 밖에도 많았으니 눈을 감으면 그리 의식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눈꺼풀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스오우의 시선은 어슴푸레한 방 안에서 정면을 향해있었다. 쿠사나기의 등 뒤, 말갛게 닦인 거울로. 그렇게 해두지 말 걸 그랬지. 반대로 반사되어 비치는 불꽃은 타타라의 것과 같을까. 쿠사나기는 생각했다. 비져나오는 신음과 그에 섞인 헛웃음이 기묘하게 꺽꺽거렸다.
대체 언제 저장한 거지? 그런데 보고 있으면 얼추 뭣 때문인지는 기억 나는 걸 보니 트윗 게재는 한 모양
하필이면 이 파일은 지인이 나한테 써준 글을 뒤에 붙여두는 바람에 남의 거인줄;;;
그는 혀를 차는 것만큼 습관처럼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 왜요? 처음에는 이유를 물었으나 그는 내가 묻기 전까지는 제가 길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지도 모르는 듯 했다. 한숨 쉬지 마세요. …응. 내가 그리 말하면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 답했다. 내가 말한 뒤로 그의 한숨을 확실히 줄어들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러하듯 호흡하고, 남보다 조금 무거운 숨을 내쉬는 것을. 단지 그것 뿐인데도, 그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까진 아니었건만 그는 그 숨을 내쉬다가도 딱. 멈추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힐끔 내 눈치를 살피다 일부러 모른척 하고 있으면 다시 짧게 숨을 내뱉는다. 나는 그런 후시미 씨가 낯설었다. 실장의 말조차 듣지 않는 남자가 내가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을 신경 쓴다. 나는 시험 삼아 한 번 더 얘기해 보았다. 후시미 씨, 그 옷 잘 어울려요. 어느 오프날의 얘기였다. 우리는 나란히 밖에 나가 쇼핑을 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취향은 캐쥬얼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후드티도 나쁘지 않았다.
"귀여워요, 후시미 씨."
"귀엽다는 게 칭찬일 나이는 지났는데요, 아키야마 씨."
그는 인상을 찡그리고는 거울 앞에 부루퉁하게 섰다. 모자를 뒤집어 쓴 얼굴이 그제야 조금 앳되어 보였다. 후시미 씨, 그 옷 잘 어울려요. 한 마디 더 첨언하면 그는 칫, 하고 혀를 차더니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안 살 줄 알았던 옷은 쇼핑백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들어올 때까지 후시미 씨의 한 쪽 손에 들려있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뻗어 잡은 빈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처음으로 닿은 긴 손가락의 마디가 실로 어색하여 내게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 믿었다.
그의 한숨소리도, 혀 차는 소리도 좋았다. 그가 나를 보고 아키야마, 하고 부를 때, 간혹 아키야마 씨, 하고 부를 때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다른 울림을 보았다. 그는 평소와 같이 무심하고 사적인 일로 타인과 말 섞는 것을 어색해했으나 그가 나를 부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잿빛의 홍채에 섞인 푸르스름한 테두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인상을 찡그리며 모니터를 바라보다 키보드 소리가 멈췄을 때 그는 평소보다 단 것을 좋아했고 나는 그걸 기민하게 알아차려 그의 커피에 약간의 시럽과 우유를 섞었다. 형식적인 감사인사 뒤에 컵의 내용물이 목 뒤로 넘어갔을 때 부드럽게 유영하는 얼굴이 좋았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그의 시선이 어느 먼 곳을 향할 때면 그가 무엇을 보는지 궁금했고 그 시선이 나에게 향하길 바랐다.
그러나 막상 나는 그렇게 되니 아주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에게 수없이 사랑한다고 되뇌었으나 그가 처음으로 그렇게 말했을 때, 아주 혼란스러웠다. 네. 아. 네. 그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으나 이내 다시 나에게 어깨를 맞대었다. 내게 닿는 살갗의 감촉이, 그 온기가 혼란스러웠다. 손 끝의 감촉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때가 좋았을까? 그러나 나는 무엇으로 내가 만족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가 내게 사랑을 속삭이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반사될 때마다, 그 안의 내가 어색하게 웃는 것 역시 보았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가 나를 사랑하는 걸 바라는게 아니었을까? 당혹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조금씩 깊어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행복했고 그가 다른 곳을 보면 화가 났다. 가끔은, 당연하게도 깜박이는 눈꺼풀마저 핀을 꽂아넣어 그대로 박제시켜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남긴 게 아닌 흉터자국을 볼 때마다 나는 그걸 아예 지져버리거나 잡아뜯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후시미 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후시미 씨도, 어느 쪽이든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혼란스러웠던 감각이 차분해진다. 감기지 못한 눈동자에 내가 들어있었다. 색색거리며 힘겹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아,키야마… 하고 내 이름을 불렀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만족했다. 새하얗게 질린 피부에 핏기가 하나도 없다. 그렇겠지. 전부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는걸. 굳어버린 손마디는 예전의 기억과 같았으나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그는 이제 꼭 내가 원하는 후시미 씨가 되었다. 빠져나간 것들은 쓸데없는 것들 뿐이다. 왕의 힘을 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예리한 샤벨을 빼면 울컥거리며 흘렀으나, 고여있던 게 흘렀을 뿐. 처음처럼 힘있게 퍼져나가지는 못한 채로 곧 섞여 사라졌다. 그의 뒤로 둥그렇게 고여 왕관처럼 튀어올라 퍼져나간 모양이 꼭 거대한 날개 같다고 생각했다. 후시미 씨는, 그렇구나. 나비일 지도 모른다. 덥썩 잡아버리면 일그러진 날개와 손에 남는 찐득한 분진 뿐. 그 기괴함에 털어내버리고야 마는. 다행히 망가지지는 않았으니, 표본, 을 만들면 되는걸까.
제국 내에서 어떤 무지랭이를 붙잡고라도 황제를 아느냐 묻는다면 누구냐 그렇다 답하고는 몇 마디를 덧불일 것이다.
그 미려한 걸 좋아하시는 황제 폐하 말이지요?
세상에 불멸은 없다 하는데도 이상하게 제국은 태평천하였다. 물론 국경 근처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질 않았지만 그것도 황제가 태자이던 시절, 국경 수비대에 자원하여 몇 번의 커다란 전투 - 이사나카 협곡에서의 이사나카 전투가 대표적인 예이다 - 를 치룬 뒤로는 그 빈도도, 크기도 줄어 국경의 아들들도 두 달에 한 번씩은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황제에 대한 치성은 날로 높아갔다.
나라가 안정되고 풍족해지면 발달하는 것은 미의식인지라 제국에선 평민들도 각자의 취미를 즐길 줄 알았고 보통 이상의 세련된 안목을 갖게 되었으니 공예품이나 의복에선 따라올 나라가 없었는데 그것은 황제에게서 기인한 바가 컸다.
황제가 황위에 올라 제일 처음 한 일은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디자이너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군제복은 역대 최고로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뀌어 자라나는 어린 애들은 군을 동경했고 제복을 입기 위해 군인을 지망하기도 했다. 그 중 제일은 왕의 최측근에 자리잡은 근위대의 복장으로 목깃이 높은 빳빳한 셔츠에 깊은 바다와 같은 짙푸른 정복, 금실로 여미는 새하얀 망토, 허리에는 녹이 슬지 않는 금속으로 양각된 푸른 검이 특징이었다. 황제가 미려한 걸 좋아한다는 소리는 여기에 덧붙여 그 근위대가 하나같이 수려한 용모를 갖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각 잡힌,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제복은 근위대의 상징과 같았으나 글쎄. 여기 있는 후시미 사루히코에게 만큼은 '각 잡힌, 한 치의 흐트러짐'이란 수식어는 빼야만 할 듯 했다. 셔츠의 빳빳한 목깃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고 망토는 조금 비뚤어져 있다. 장갑은 흘러내려 있던걸 중간에 다시 벗어 제대로 팔꿈치까지 잡아당겨 놨고 재킷의 단추라도 제대로 채워져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오늘은 웬일로 단정하다며 한 마디씩 농을 던졌겠지만 그럴만한 시간도 되지 못하는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황제는 미려한 것을 좋아한다.
거기에 덧붙여 황궁 내에서는 암암리에 황제는 남색을 하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그 이사나카 전투가 끝나고 태자가 직접 데려온 소년이었다. 먼 길을 왔다하더라도 흙을 폭삭 뒤집어 쓴 꾀죄죄한 몰골에 푸석푸석하기 짝이 없는 인상, 처진 눈꼬리에 두터운 안경 너머로 형형한 안광을 쏘아대던 소년은 제일 중요하지만 옆나라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 묻기도 전에 태자의 일갈에 욕실로 처넣어 졌다. 몇 주가 지나자 소년은 태자의 옆에서 시종을 들게 되었고, 태자가 황위에 오르자 황제의 가장 최측근이 되어 가장 먼저 바뀐 근위대의 제복을 입게 되었다. 황제는 어느 행사에 가든 그를 옆에 데리고 다녔고 모든 규칙에 엄했지만 그에게만은 항시 예외를 두었다. 근위대의 총괄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왕의 사실에 유독 출입이 잦았으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은 아니다.
"실례."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대답은 아직 안했습니다만."
"그래도 상관 없는 거 아닙니까, 폐하?"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후시미는 불퉁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잠이 든 것은 고작 두 시간 전이었다. 오늘 있을 모든 행사 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검토하라며 서류를 던져준 게 오후 열 시. 네 시간동안 눈이 빠지도록 서류를 검토하다 잠이 든 게 새벽 두 시 였는데 다짜고짜 이 새벽에 사람을 보내 급히 궁으로 들어오라니. 직권 남용도 이런 남용이 없다. 급한 일이라 해서 입는 법이 복잡한 예복이나 제대로 챙겨 입은 것이 용하거늘 노크에 답하는 소리까지 기다리란 말인가.
후시미는 화가 뻗쳐 그대로 쏘아붙였다.
"대체 뭡니까, 이 새벽에."
"검토는 잘 했는지 궁금해서요."
"다 했거든요?"
"보고는?"
"책임자는 저인데요."
"그래도 알려주셔야지요."
고작 5살. 5살 차이인데도 후시미는 처음부터 저 남자의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다.
"완벽합니다, 완벽. 아침에 황궁 밖에서 손 한 번 흔들어주고 퍼레이드 하고, 오찬도 갖고, 저녁에는 파티도 열 거고. 성대하십니다, 그려? 아무렴, 황제 폐하의 탄신일인데 어련하실까."
건국기념일 다음으로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는 황제의 탄신일이었다. 이 날에는 모두가 쉬고 도시마다 축제가 열린다. 제국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고 국민들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황제는 필수적으로 가두행진을 해야 한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황제, 무나카타 레이시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지만.
태평성대의 왕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고 잘생겼다면 더더욱 금상첨화다. 제국의 온 여식들은 하나같이 기념품점에서 팔리는 황제의 초상화를 침대 맡에 붙여두었고 - 애초에 기념품점에서 황제의 초상화가 팔리는 것도 이상하다 - 귀족이라면 사교계에 데뷔하여 왕의 눈에 드는 것이 소망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스물넷, 아니 오늘부로 스물다섯이라면 이르면 벌써 혼인을 했고 못해도 약혼녀 쯤은 있기 마련인데 약혼녀 하나 없으니 왕이 참여하는 무도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사교계가 전부 들썩였다.
각설하고, 오늘은 그리도 중요한 날이니 분명 궁내청장이 푹 수면을 취하라고 일렀을 텐데 어째서 이 남자는 새벽부터 깨어나 자신을 오라가라 하는 것인가.
후시미는 인상을 확 찡그리고 무나카타를 쳐다보면 턱을 괴고 책상에 앉아 지그시 후시미를 쳐다보던 무나카타가 입을 연다.
"보고는 그걸로 끝입니까?"
"네, 끝인데요."
"더 할 말은?"
"……더 할 말도 필요합니까?"
방에 흐르는 기이한 침묵을 눈치채고 후시미는 망설이다 반문했다.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는 쉽게 넘겼을 텐데? 아직 잠옷 차림이지만 흐트러졌다는 느낌은 어디에도 없는 무나카타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니 후시미는 내심 기가 죽는다. 신경을 박박 긁는 말투는 언제나 후시미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무나카타는 늘 그것을 어린애 투정으로 취급하며 묵살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영 아니다. 뭐가 잘못됐는지 경험과 사고에 비추어 상황을 반추하던 후시미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면 무나카타가 한심한 학생에게 답을 알려주는 관대한 표정으로 말한다.
"군은 군에게 떠도는 소문을 알고 있을 겁니다."
열다섯에 무나카타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와 어영부영 궁에서 보낸 지가 4년이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19살이 되어서 더 기민해졌고 15살때에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적국의 스파이라든가 황제 폐하에게 뒷구멍으로 귀여움 받고 있다는 그런 말요?"
"네."
일부러 노골적인 말을 쓰는데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얼굴에 후시미는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소문이, 지금 무나카타가 말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후시미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군에 관련된 소문이 허황된 것이란 건 알지만 다들 진위 여부는 확인해달라고 안달복달하는데다, 저도 사람인지라."
"그래서 그 말을 믿는다구요?"
"믿는다는 건 아닙니다만,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저에게 믿음은 보여주셔야지요."
"어떻게?"
영 맥락없는 말에 후시미는 벙벙하게 눈을 뜨고 묻는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버림받는 것이라면 아주 질색을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아직 감추는 게 익숙치는 않은지라 이럴 때면 미세하게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보는 게 무나카타 레이시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후시미를 관찰하며 킥킥대면 맘에 들지 않는 듯 후시미가 째려본다.
"힌트 하나쯤 주시죠."
"꼭 오늘, 그 오해를 풀어야만 합니다 후시미 군."
그 말에 더 인상을 찡그리던 후시미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몇 번 눈꺼풀을 깜박이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묻는다.
"설마…?"
"군은 똑똑해서 힌트를 주면 쉽사리 답을 맞추곤 했죠."
"그래서 절 이 새벽에 불러내신 겁니까?"
"오늘 군에게 목숨을 맡겼는데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 말이죠."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 하지만, 후시미는 온유하게 미소짓는 무나카타의 얼굴에 욕설을 쏟아내고 싶었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무나카타를 내려다보면 무나카타가 조금 엄한 표정으로 후시미 군, 하고 부른다. 무나카타가 몇 번이나 경고를 주어도 고쳐지지 않는 후시미의 버릇이었다. 제 입술을 짓이기고 있는 줄도 모르던 후시미가 무나카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는 무나카타의 앞에 한 쪽 다리를 세우고는 무릎을 꿇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안 어울리는 군요."
"시키신 일인데요?"
"좀 더 군다운 말투로 해주세요."
"생일 축하."
"좀 더 충성스럽게."
"둘 중 하나만 해주시면 안됩니까."
"진심을 담아서 해주세요."
소문이라든가 하는 말은 전부 핑계다. 그저 제 생일에 축하인사 안 했다고 후시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뿐이었다. 뭐가 위대하신 황제폐하란 말이냐. 어린애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화를 낼 것을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엿먹이고 있으니 후시미는 골이 아플 지경이었으나 어쩌겠는가. 이래도 저래도 그는 후시미의 왕이었다. 후시미 사루히코가 한 평생 섬기고 모셔야 할 제국의 유일한 주인.
후시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무나카타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약속 드리죠."
"뭘 말입니까?"
"평생을 살아도 당신이 제 마지막 주인일 것입니다. 당신만 섬기고, 당신만 보겠노라고."
"……."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저는 아마 비참하게 죽었을테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내 왕이시여."
이마가 땋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 후시미는 무나카타의 발 끝에 키스했다. 잠옷 차림의 그는 맨발이었다. 입술에 닿는 맨 살의 감촉이 차가웠다. 도드라진 발등의 굴곡과 발목의 오목한 곳을 천천히 따라 올라가며 키스하면 무나카타가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도 부족합니까?"
"아니, 설마. 예상 외로 충직하네요, 후시미 군은. 군이 스파이라든가 하는 소문은 말도 안되는 얘기군요."
"그렇겠죠. 그나저나 소문이라든가 하는 핑계는 좀 집어치시죠. 생일 축하 안 했다고 삐진 거 아닙니까."
"꼭 그래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
"진위여부를 확인한다고 했잖습니까."
"그랬…죠…?"
"나머지 하나에 대한 것도 확인하고 싶어서."
하?
미처 반문하기도 전에 무나카타가 후시미의 팔을 붙잡고 들어올리며 끌어당긴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몸이 기이한 자세로 무나카타에게 기대지지만 거기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맞닿아진 것은 방금 전과는 달리 좀 더 높은 체온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