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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후시로 황제기사?
그런 설정도 써보고 싶었던....것 같다
제국 내에서 어떤 무지랭이를 붙잡고라도 황제를 아느냐 묻는다면 누구냐 그렇다 답하고는 몇 마디를 덧불일 것이다.
그 미려한 걸 좋아하시는 황제 폐하 말이지요?
세상에 불멸은 없다 하는데도 이상하게 제국은 태평천하였다. 물론 국경 근처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질 않았지만 그것도 황제가 태자이던 시절, 국경 수비대에 자원하여 몇 번의 커다란 전투 - 이사나카 협곡에서의 이사나카 전투가 대표적인 예이다 - 를 치룬 뒤로는 그 빈도도, 크기도 줄어 국경의 아들들도 두 달에 한 번씩은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황제에 대한 치성은 날로 높아갔다.
나라가 안정되고 풍족해지면 발달하는 것은 미의식인지라 제국에선 평민들도 각자의 취미를 즐길 줄 알았고 보통 이상의 세련된 안목을 갖게 되었으니 공예품이나 의복에선 따라올 나라가 없었는데 그것은 황제에게서 기인한 바가 컸다.
황제가 황위에 올라 제일 처음 한 일은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디자이너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군제복은 역대 최고로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뀌어 자라나는 어린 애들은 군을 동경했고 제복을 입기 위해 군인을 지망하기도 했다. 그 중 제일은 왕의 최측근에 자리잡은 근위대의 복장으로 목깃이 높은 빳빳한 셔츠에 깊은 바다와 같은 짙푸른 정복, 금실로 여미는 새하얀 망토, 허리에는 녹이 슬지 않는 금속으로 양각된 푸른 검이 특징이었다. 황제가 미려한 걸 좋아한다는 소리는 여기에 덧붙여 그 근위대가 하나같이 수려한 용모를 갖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각 잡힌,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제복은 근위대의 상징과 같았으나 글쎄. 여기 있는 후시미 사루히코에게 만큼은 '각 잡힌, 한 치의 흐트러짐'이란 수식어는 빼야만 할 듯 했다. 셔츠의 빳빳한 목깃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고 망토는 조금 비뚤어져 있다. 장갑은 흘러내려 있던걸 중간에 다시 벗어 제대로 팔꿈치까지 잡아당겨 놨고 재킷의 단추라도 제대로 채워져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오늘은 웬일로 단정하다며 한 마디씩 농을 던졌겠지만 그럴만한 시간도 되지 못하는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황제는 미려한 것을 좋아한다.
거기에 덧붙여 황궁 내에서는 암암리에 황제는 남색을 하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그 이사나카 전투가 끝나고 태자가 직접 데려온 소년이었다. 먼 길을 왔다하더라도 흙을 폭삭 뒤집어 쓴 꾀죄죄한 몰골에 푸석푸석하기 짝이 없는 인상, 처진 눈꼬리에 두터운 안경 너머로 형형한 안광을 쏘아대던 소년은 제일 중요하지만 옆나라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 묻기도 전에 태자의 일갈에 욕실로 처넣어 졌다. 몇 주가 지나자 소년은 태자의 옆에서 시종을 들게 되었고, 태자가 황위에 오르자 황제의 가장 최측근이 되어 가장 먼저 바뀐 근위대의 제복을 입게 되었다. 황제는 어느 행사에 가든 그를 옆에 데리고 다녔고 모든 규칙에 엄했지만 그에게만은 항시 예외를 두었다. 근위대의 총괄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왕의 사실에 유독 출입이 잦았으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은 아니다.
"실례."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대답은 아직 안했습니다만."
"그래도 상관 없는 거 아닙니까, 폐하?"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후시미는 불퉁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잠이 든 것은 고작 두 시간 전이었다. 오늘 있을 모든 행사 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검토하라며 서류를 던져준 게 오후 열 시. 네 시간동안 눈이 빠지도록 서류를 검토하다 잠이 든 게 새벽 두 시 였는데 다짜고짜 이 새벽에 사람을 보내 급히 궁으로 들어오라니. 직권 남용도 이런 남용이 없다. 급한 일이라 해서 입는 법이 복잡한 예복이나 제대로 챙겨 입은 것이 용하거늘 노크에 답하는 소리까지 기다리란 말인가.
후시미는 화가 뻗쳐 그대로 쏘아붙였다.
"대체 뭡니까, 이 새벽에."
"검토는 잘 했는지 궁금해서요."
"다 했거든요?"
"보고는?"
"책임자는 저인데요."
"그래도 알려주셔야지요."
고작 5살. 5살 차이인데도 후시미는 처음부터 저 남자의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다.
"완벽합니다, 완벽. 아침에 황궁 밖에서 손 한 번 흔들어주고 퍼레이드 하고, 오찬도 갖고, 저녁에는 파티도 열 거고. 성대하십니다, 그려? 아무렴, 황제 폐하의 탄신일인데 어련하실까."
건국기념일 다음으로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는 황제의 탄신일이었다. 이 날에는 모두가 쉬고 도시마다 축제가 열린다. 제국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고 국민들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황제는 필수적으로 가두행진을 해야 한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황제, 무나카타 레이시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지만.
태평성대의 왕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고 잘생겼다면 더더욱 금상첨화다. 제국의 온 여식들은 하나같이 기념품점에서 팔리는 황제의 초상화를 침대 맡에 붙여두었고 - 애초에 기념품점에서 황제의 초상화가 팔리는 것도 이상하다 - 귀족이라면 사교계에 데뷔하여 왕의 눈에 드는 것이 소망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스물넷, 아니 오늘부로 스물다섯이라면 이르면 벌써 혼인을 했고 못해도 약혼녀 쯤은 있기 마련인데 약혼녀 하나 없으니 왕이 참여하는 무도회라도 열리는 날이면 사교계가 전부 들썩였다.
각설하고, 오늘은 그리도 중요한 날이니 분명 궁내청장이 푹 수면을 취하라고 일렀을 텐데 어째서 이 남자는 새벽부터 깨어나 자신을 오라가라 하는 것인가.
후시미는 인상을 확 찡그리고 무나카타를 쳐다보면 턱을 괴고 책상에 앉아 지그시 후시미를 쳐다보던 무나카타가 입을 연다.
"보고는 그걸로 끝입니까?"
"네, 끝인데요."
"더 할 말은?"
"……더 할 말도 필요합니까?"
방에 흐르는 기이한 침묵을 눈치채고 후시미는 망설이다 반문했다.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는 쉽게 넘겼을 텐데? 아직 잠옷 차림이지만 흐트러졌다는 느낌은 어디에도 없는 무나카타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니 후시미는 내심 기가 죽는다. 신경을 박박 긁는 말투는 언제나 후시미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무나카타는 늘 그것을 어린애 투정으로 취급하며 묵살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영 아니다. 뭐가 잘못됐는지 경험과 사고에 비추어 상황을 반추하던 후시미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면 무나카타가 한심한 학생에게 답을 알려주는 관대한 표정으로 말한다.
"군은 군에게 떠도는 소문을 알고 있을 겁니다."
열다섯에 무나카타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와 어영부영 궁에서 보낸 지가 4년이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19살이 되어서 더 기민해졌고 15살때에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적국의 스파이라든가 황제 폐하에게 뒷구멍으로 귀여움 받고 있다는 그런 말요?"
"네."
일부러 노골적인 말을 쓰는데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얼굴에 후시미는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소문이, 지금 무나카타가 말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후시미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군에 관련된 소문이 허황된 것이란 건 알지만 다들 진위 여부는 확인해달라고 안달복달하는데다, 저도 사람인지라."
"그래서 그 말을 믿는다구요?"
"믿는다는 건 아닙니다만,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저에게 믿음은 보여주셔야지요."
"어떻게?"
영 맥락없는 말에 후시미는 벙벙하게 눈을 뜨고 묻는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버림받는 것이라면 아주 질색을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아직 감추는 게 익숙치는 않은지라 이럴 때면 미세하게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보는 게 무나카타 레이시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후시미를 관찰하며 킥킥대면 맘에 들지 않는 듯 후시미가 째려본다.
"힌트 하나쯤 주시죠."
"꼭 오늘, 그 오해를 풀어야만 합니다 후시미 군."
그 말에 더 인상을 찡그리던 후시미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몇 번 눈꺼풀을 깜박이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묻는다.
"설마…?"
"군은 똑똑해서 힌트를 주면 쉽사리 답을 맞추곤 했죠."
"그래서 절 이 새벽에 불러내신 겁니까?"
"오늘 군에게 목숨을 맡겼는데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 말이죠."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 하지만, 후시미는 온유하게 미소짓는 무나카타의 얼굴에 욕설을 쏟아내고 싶었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무나카타를 내려다보면 무나카타가 조금 엄한 표정으로 후시미 군, 하고 부른다. 무나카타가 몇 번이나 경고를 주어도 고쳐지지 않는 후시미의 버릇이었다. 제 입술을 짓이기고 있는 줄도 모르던 후시미가 무나카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는 무나카타의 앞에 한 쪽 다리를 세우고는 무릎을 꿇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안 어울리는 군요."
"시키신 일인데요?"
"좀 더 군다운 말투로 해주세요."
"생일 축하."
"좀 더 충성스럽게."
"둘 중 하나만 해주시면 안됩니까."
"진심을 담아서 해주세요."
소문이라든가 하는 말은 전부 핑계다. 그저 제 생일에 축하인사 안 했다고 후시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뿐이었다. 뭐가 위대하신 황제폐하란 말이냐. 어린애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화를 낼 것을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엿먹이고 있으니 후시미는 골이 아플 지경이었으나 어쩌겠는가. 이래도 저래도 그는 후시미의 왕이었다. 후시미 사루히코가 한 평생 섬기고 모셔야 할 제국의 유일한 주인.
후시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무나카타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약속 드리죠."
"뭘 말입니까?"
"평생을 살아도 당신이 제 마지막 주인일 것입니다. 당신만 섬기고, 당신만 보겠노라고."
"……."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저는 아마 비참하게 죽었을테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내 왕이시여."
이마가 땋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 후시미는 무나카타의 발 끝에 키스했다. 잠옷 차림의 그는 맨발이었다. 입술에 닿는 맨 살의 감촉이 차가웠다. 도드라진 발등의 굴곡과 발목의 오목한 곳을 천천히 따라 올라가며 키스하면 무나카타가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도 부족합니까?"
"아니, 설마. 예상 외로 충직하네요, 후시미 군은. 군이 스파이라든가 하는 소문은 말도 안되는 얘기군요."
"그렇겠죠. 그나저나 소문이라든가 하는 핑계는 좀 집어치시죠. 생일 축하 안 했다고 삐진 거 아닙니까."
"꼭 그래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
"진위여부를 확인한다고 했잖습니까."
"그랬…죠…?"
"나머지 하나에 대한 것도 확인하고 싶어서."
하?
미처 반문하기도 전에 무나카타가 후시미의 팔을 붙잡고 들어올리며 끌어당긴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몸이 기이한 자세로 무나카타에게 기대지지만 거기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맞닿아진 것은 방금 전과는 달리 좀 더 높은 체온의 것이었다.
후시미는 아까와는 또 다른 벙벙함에 눈을 깜박였다.
후자는 진짜라고 해둘까요.
무나카타가 작게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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