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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후시] Rainbow Trip
폴더 뒤지는데 업로드는 안 한 거 같길래...
앉아도 되나요?
그런 말을 얼핏 들은 거 같았다. 무나카타 레이시가 고개를 들면 그러나 상대방은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자리를 빼고 앉았다. 평일 오후의 카페는 한적하기 그지 없는데다 여기는 흡연실이라 더더욱 사람이 없어 빈자리가 하릴없이 널부러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굳이 무나카타의 앞에 자리 잡았다. …좋을대로. 한숨 섞인 대답을 들었는지 시선을 저 밖으로 향하고 있던 상대가 무나카타에게로 시선을 돌려 눈을 깜박인다. 창으로 비쳐드는 한낮의 햇빛에 묵직한 뿔테안경 너머, 잿빛 홍채의 테두리가 희미하게 푸른 색으로 빛난다.
예쁜 색이구나.
무심코 생각한다. 이제 갓 스물이나 넘겼을 법한 앳된 얼굴이었지만 생기가 있는 것은 오로지 눈동자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색조나 생기가 부족한 얼굴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인상이 너무 엷어 그 너머가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피부는 하얗지만 홍조조차 돌지 않았고 검은 색도 아니고 조금 바랜듯한 잿빛 머리는 누가 보기에도 푸석푸석했다. 자타공인 직감이 좋은 편인 무나카타 레이시는 첫인상만으로도 사람을 직감적으로 파악했고 대체로 그것은 모두 맞았으나 이번만큼은 그 나이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딘가의 제복같은 푸른 옷은 단정하게 다려져 주름이 잡혀있었으나 오래 입었는지 팔꿈치나 소매 끝이 살짝 닳아있었고 품이 맞지 않는지 약간 헐렁한데다 목덜미가 풀어헤쳐져 있어 튀어나온 쇄골이 제법 도드라져 보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가는 골격이라 미성년인가? 싶기도 하지만, 앞으로 넘어온 긴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은 상대는 당연하다는듯 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꺼내두고 다시 시선을 저 멀리로 돌린다.
이미 앉아 자리를 잡은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고 자신에겐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아 무나카타는 다시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책상 위에 고전적인 방식 - 양초로 봉해진 - 의 서류봉투가 놓여져 있어 열었더니 이 책이 들어있었다. 어떤 소인도, 수신인이나 발신인도 없었던 수상쩍기 짝이 없는 봉투와 마찬가지로 책 역시 하얀 양장본에 제목도 출판사도 저자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직접 쓴 것 같은 활자만큼은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읽는 책도 나름의 재미는 있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얼추 읽은 바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일곱명의 왕이 있는 세계에서 두 세력이 하나의 살인사건을 두고 각자 진범을 찾아 다니는 내용이었다. 소재의 특이성은 둘째 치더라도 문장이나 그 필체가 어딘지 무나카타에게도 친숙한지라 이 자리에 앉아 거진 백페이지를 몰두해서 보았다.
"계속 찾고 있었어."
이제 막 끊겼던 문장을 찾아 집중하려던 무나카타를 의식 밖으로 끌어낸 것은 나즈막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면 상대는 느슨하게 턱을 괴고 라이터를 톡, 토독 하고 테이블 위에 튕기고 있을 뿐, 무나카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잘못들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면 그러나 상대의 입술이 움직였다.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하고 무시하기엔 꼭 무나카타를 두고 하는 말 같아 무나카타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읊조리는 말은 무나카타도 본 적 있는 그림의 제목이었다. 캔버스 위의 푸른 배경이 인상 깊었으나 그 뿐이었던.
"내 이름은 알고 있었어. 명함에 적혀 있었거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냐.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고 일만 하지. 서비스직은 언제나 바쁘거든. 원하는 사람은 많아. 다들 아프거나 슬픈 건 싫으니까. 그래서 전화를 하면 우리는 가서 명함을 내밀고 친절한 설명과 함께 계약을 성사 시키지. 우리는 많은 걸 보고, 또 대가를 받아."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니까?"
"기억나요?"
줄곧 먼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이 물끄러미 무나카타에게로 향한다. 안경 너머로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어딘지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으나 도통 기억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기억나지 않는군요."
어쩐지 기대하는 눈빛에 조금 망설였지만 무나카타는 어디에서도 눈 앞의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잠시나마 반짝, 하고 빛났던 눈동자가 한 번 눈꺼풀 밑으로 숨어들더니 이내 먹혀 공동(空洞)이 되어버린다. 생기 없는 눈이 다시 저 먼 곳을 본다.
"기대하진 않았어. 매일 당신의 조각을 봤어."
"조각?"
"유리조각 같은 모양으로 나오거든. 모두 색이 다르지만 당신 건 유독 조각도 크고 선명한 파랑이라."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 대신 얼굴을 테이블 위에 얹은 상대는 손을 테이블을 더듬어 담배를 한 대 빼어물더니 익숙하게 불을 붙인다.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면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이 왜 이리도 선뜩한지. 하얀 손 끝에서 피어나는 연기는 공기 중을 푸르스름하게 유영하는 대신 무지개색으로 반짝인다. 신기하게 허공을 응시하면 피식, 바람빠지는 소리로 허하게 웃은 그가 훅- 하고 무나카타에게 연기를 내뱉는다. 습관적으로 켈룩거렸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 말인즉 전에 저와 당신이 만난 적 있다는 뜻이군요."
"당신이 전화했어. 기억을 지워달라고. 우린 그런 일을 해."
"제가…? 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리고 그 기억의 조각을 모아. 원하는 게 있어. 무얼 원하는 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원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계속 이런 일을 하면서 돌아다녀. 시간이나 공간도 관계없어. 누군가가 원하면 찾아가서 우리가 원하는 것도 찾는거지."
"좋은 일이란 건 뭡니까? 그게 보수인가요? 아니, 그 전에, 제가 기억을 지워달라고 말했단 겁니까? 어떤 류의?"
"원래대로면 일은 거기서 끝나야했는데……."
남자는 무나카타의 말은 넘겨버리고 제 말만을 잇는다. 공기 중을 떠도는 반짝반짝한 무지개빛 연기 속에서 무나카타는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록 눈 앞의 사람은 어쩐지 익숙한 형태로 변화해가고 있었다. 아니, 사람은 그대로였으나 그 위로 어떠한 상이 고스란히 겹쳐보였다. 쳐진 눈꼬리, 불퉁한 표정,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이를 가늠하기 쉽고 생기있는 얼굴.
"이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상대가 버리고 싶어하는 기억을 갖고 와. 그걸 모아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보이기 마련이거든.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거야."
내가 어디서 왔고,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입꼬리는 슬쩍 올라갔으나 어딘지 체념의 기색이 강했다. 모든 걸 내려놓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무나카타의 머리 속에서 홀연히 재생된다.
"나조차 잊어버린 걸 당신이 갖고 있었다는게 우스워서……."
그래서요, 실장.
허공으로 흩어지는 부름에 무나카타는 아까 전에 느꼈던 선뜩함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깨달았다. 분명히 본 적 있었다. 저 먼 기억 속에서 창백한 얼굴이 미소지었다. 실장. 그가 지금 입고 있는 푸른 옷 어딘가에서 진득한 얼룩이 번져나간다. 담배연기에 섞여 역한 쇠냄새가 코를 찌른다. 손 끝에 닿는 뜨듯미지근한 액체에 퍼뜩 시선을 내리깔면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하얀 표지 위에도 스물스물 붉은 얼룩이 스며들고 있었다. 얼룩에 번져가는 잉크의 색을 알고 있었다.제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의 잉크색이었다. 익숙한 필체가 제것이라는 사실을 무나카타는 이제야 알았으나 왜 기억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아. 혹시 이게 자신이 요청했다는 기억의 일부일까.
깨달음은 빨랐으나 상황의 변이는 그것보다 더 빨랐다. 두꺼운 책이 굴곡이 있는 쇳덩이로 변해 손에 착 감긴다. 예리한 칼날, 장막을 가르고 무나카타의 안에서 또 다른 기억을 꺼낸다.
"당신이 수거를 요청한 건 스오우 미코토의 기억 뿐이었지만."
군데군데 하얗게 비어버린 그림들은 그가 말한 낯선 이의 이름일까. 그건 관계없었다. 눈 앞의 광경은 여전히 평온한 오후의 카페였으나 동시에 아예 다른 곳으로 변한 것 같았다. 눈발이 휘날리는 삭막한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뼈 사이의 견고한 근육을 비집고 들어가는 감각은 손에 선명했으나 동시에 숨도 못 쉴 정도의 고통이 무나카타의 안을 파고들었었다.
"당신이 내 걸 갖고 있어서 가지러 왔어."
얼룩덜룩하게 물든 그의 푸른 제복에 뻥 뚫린 구멍이 보인다. 가는 손가락이 담배갑을 열어 날렵하게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생소한 모습이었다. 기억 속의 그는 아직 미성년자라, 담배 따위는…….
그 순간 무나카타 레이시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유리조각.
기억.
선명한
파랑.
사람을 이루는 건 무엇일까. 영혼에 색을 붙일 수 있을까. 한 사람을 만드는 기억은, 기억의 조각은 동시에 영혼의 조각이라고 봐도 좋은걸까. 순식간에 무언가 몰아쳤으나 동시에 손 쓸 수 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지개빛의 연기가 공기 중에 가득 들어찬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겨우 찾았어."
"분명히 당신에게 주었던 내 마음이겠지."
"정말 오랜 시간을 헤맨 거 같아."
"가져가도 돼?"
대답을 요하는 물음은 아니었다. 무나카타가 거절한다 해도 그는 제 것을 찾아갈 터였다.
후시미, 사루히코……!
겨우 내뱉은 이름은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그 가슴에 뻥 뚫렸던 구멍이 메워진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아 넣듯 꼭 들어맞아 구멍은 흔적도 없이 온전하게 채워졌다. 무나카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그것 뿐이었다. 휘황찬란한 빛의 입자들 사이에서 그의, 후시미 사루히코의 그림자가 조금씩…….
제법 재밌는 책이라 꽤 인상깊게 남았는지 꿈을 꾸었다.
한 명의 왕을 죽이면서 끝이 났던 책의 뒷얘기였다. 똑같이 무너진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그의 부하가 그를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하얀 눈이 날리는 설원에서, 그렇지만 남자의 생존본능은 몹시도 질겨 동시에 그 부하의 심장도 관통했다. 이상하게 먼저 숨이 끊어진 건 나중에 찔린 부하 쪽으로 활자로 읽었음에도 그 얼굴이 제법 또렷하게 그려졌다. 윤기 없는 검은 머리, 평소에도 하지만 핏기가 빠져 창백하게 질린 얼굴, 테두리가 겨울 하늘처럼 빛나는 회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다 곧 눈꺼풀에 가려 사라지고 말았다. 어울리지 않게 천진한 얼굴이었다. 마침내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는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고, 꿈에서는 똑똑히 들었으나 무나카타가 꿈을 상기하는 사이 이내 꿈을 꿨다는 사실만 남고 모든 것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입 안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다 자각한 순간, 무나카타 레이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 지도 잊어버렸다.
방 안의 먼지가 햇빛을 받아 무지개색으로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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