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같아서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슬슬 눈보라가 거세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눈보라였다. 점심 즈음부터 내리던 눈이 꽤나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저녁 무렵에는 창 밖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휘날릴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거다. 얼핏 보는 창 밖에는 하얗게 눈발이 날리고 안개가 두껍게 껴 희미하게 분산되는 가로등 빛만 겨우 가늠이 되었고 뉴스에서는 연이어 계속 꽉 막힌 도로상황이 앞으로의 폭설 예측 등을 주구장창 읊어댔다. 단조로운 발신음만 울리던 수화기 너머는 언젠가부터 '전화가 꺼져 있어……' 라는 상냥한 안내양의 목소리로 변하고 시계의 짧은 바늘이 수직에 가까워지자 불안감이 잔뜩 증폭되어 머릿 속에 온갖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도터운 스웨터에 모자, 목도리, 장갑까지 중무장 하고 나는 결국 밖으로 나섰다.
말도 없이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가볍게 걸치고 나간 게 벌써 세 시간이나 전이다. 갑자기 야식이라도 먹고 싶어졌던건가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오산이었다. 추위나 더위는 오지게 타는 주제에 꽁꽁 싸매면 멋이 안난다나 뭐라나. 얼어죽을 것 같은 추위에도 가벼운 복장이라 금방 돌아올 줄 알고 가볍게 배웅한 것이 화근이었다. 밖에 나와보니 생각보다 훨씬 추워 절로 몸이 덜덜 떨렸다. 벌써부터 뺨이 얼어붙어 감각이 무뎌지는 가운데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던 길은 오로지 감에만 의존해서 걸어야했고 제설조차 포기한 도로는 발이 종아리까지 푹푹 빠졌다. 도대체 이런 날씨에 이 미친놈은 어디로 사라진거야?
"어~이~ 사루~."
휑휑한 바람소리만이 그득한 가운데 목청껏 이름을 불러도 그 단어 하나하나마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진짜 어디서 얼어죽어 있는 건 아닐지, 멀쩡한 집 놔두고 다음날 뉴스에 '폭설에 길을 잃고 얼어죽은 10대가 발견되어…'같은 게 나올 생각을 하면 이 겨울의 기온만큼이나 머릿속이 싸하게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으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애써 도리질을 치며 하염없이 이름을 부른다.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가물가물했다. 문 밖의 세계가 갑자기 다른 세계로 변한 것도 아닐텐데 모든 것이 낯설었고 이질적이었다. 이대로 나는 어딘가로 떠밀려 가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녀석이 눈 앞에 나타나줬으면 싶었다. 붙잡아 줄 사람이 한 명,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후시미 사루히코!!!!"
기분 나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목청껏 풀네임을 부르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그 순간 무언가 발목을 콱 잡았다.
"으아아아악악악악악!"
"야, 아파!"
깜짝 놀라 마구 발길질을 해서 털어내면 발 밑으로 무언가 걸렸다. 둔탁한 감촉과 함께 날카롭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멈추면 세상에 맙소사, 거기 녀석은 온통 눈범벅이 되어 누워 있었다.
"야이 미친놈아, 이 한 겨울에 뭐해!!"
"아? 아아. 그냥…."
"그냥? 그으냐앙? 진짜 얼어죽으려고 작정했냐!!!!"
아무리 희미하게 번진 가로등 밑이라고 해도 나는 사루 녀석만큼 시력이 나쁘진 않았다. 새하얗게 백지장처럼 얼어붙은 얼굴에 흐리멍텅하고 가늘게 눈만 치켜 뜨고 후시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누워있었던 건지 몸 위에도 어느 정도 눈이 쌓여있고 하얗지 않은 것은 여전히 발목을 붙잡고 있는 손 뿐이었다. 부르터서 새빨개진 손은 곧 피라도 날 것 같이 잔뜩 갈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장갑을 낀 손으로 몸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 있으려면 무미무취한 풍경에 슬쩍 씁쓰레하고 달큼한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너, 그 꼴로 나가서 술 마셨냐?"
"조금."
"너 나간 지 세 시간인데 여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몰라."
"아, 진짜!!!"
얼굴은 멀쩡했거늘 말하는 건 영 맛이 갔다.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머릿속으로 아무리 주사위를 굴려봐도 나는 도대체 녀석이 이러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후시미는 나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하늘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 하늘에 뭐가 있나 싶어 고개를 들어도 희뿌옇고 새까맣고 그런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지금은 눈보라가 치고 있으니까.
"너 그러다 진짜 얼어죽어. 일어나. 돌아가자."
"돌아가? 어디로?"
"당연히 집이지. 일단 가게에 가서 몸 좀 녹이고…."
"아, 그 호무라."
픽- 냉소적으로 내뱉고는 후시미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술, 가게 안에 널린 게 술인데 왜 이 녀석은 밖에까지 나가서 술을 마셔야 했고 지금 왜 이러고 누워있으며 왜 여기 엎어져 꼼짝도 하지 않는걸까.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었다. '야타 씨, 후시미 씨는 뭔가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 말을 나는 앙? 하는 반문으로 넘겼다. 녀석이 멀쩡한 생김새에 비해 가끔 미친놈 같은 짓을 할 때가 있긴 했지만 한 번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녀석의 머리는 언제나 인과관계를 직시하고 있었고 이치나 논리는 언제나 명확했다. 오히려 냉정할 정도로 명백하게 보이는 객관적인 사고과정에 가끔 질린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알 수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미궁이었다. 정말로 문을 열었더니 바깥의 세계가 순식간에 뒤집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여기서 미아처럼 헤매고 있는걸까. 녀석도, 사실은 태평하게 어느 새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자고 있고 이건 환상 같은 걸까?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순간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앉아있던 몸의 균형이 앞으로 쏠렸다. 어. 어어어어? 야! 갑작스런 불균형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면 녀석의 위였다. 가늘고 작은 그런데도 귓가에 틀어박히는 긴 여운을 가진 녀석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천하 따윈 관심없어."
잽싸게 일어나려 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난건지 양 손으로 후시미는 나를 꽉 붙들고 있었다. 엎어져 일어날 지지대를 잃고 버둥거리다 포기했다. 벌써 감기라도 걸린 건지 매끄럽지 못한 바람소리가 나는 그 소리를 나는 가만히 들었다.
"왕 녀석들은 다 똑같아. 누구라도 위에 있지. 그 사람들은 전부 내려올 수 없는 사람들이야. 알아, 미사키?"
"스오우 씨를 말하는 거라면 달라."
"나는 너같은 멍청이가 아니라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아."
"아니라니까! 스오우 씨라면 분명…!"
"근데 호무라에는 죄다 그런 멍청이들 밖에 없어. 어디에 있어도 물과 기름이야. 불편해. 섞일 수 없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이질이야, 미사키."
후시미 씨는 뭔가 이해하기 어려워요.
언젠가 무심히 넘겼던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였다. 팀 호무라는 어디까지나 맹목적으로 스오우 씨를 믿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그를 믿기에 전부 바칠 수 있다. 이 길에 올바른 답이, 확실한 정답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렇기에 당연히 너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러면 너 왜 여기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릴 줄은 몰랐어."
갑자기 깨달은 어색한 사실에 비적비적 고개를 들어 후시미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녀석은 무지막지하게 다시 내 머리를 눌러내렸다. 후시미의 가슴팍 위에 쌓인 눈이 혀에 닿아 물이 됐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런 눈보라는 처음 봤는데 밖에 나오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캄캄하고 사람도 없고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지. 술도 마셨으니 춥진 않은데 감각이 둔하니까 걸어도 걷는 기분이 안들어. 땅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전부 제대로 땅에 붙어 있는데 나 혼자만 허공에 떠있는 것 같아. 우주, 우주에 가면 이런 느낌일까. 하염없이, 하릴없이 부유하게 되는걸까.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져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게 되는걸까. 이게 전부 꿈인 거 아닐까. 나는 사실 어딘가 저 멀리에서 그저 부유하면서 바라보고 있고 너희는 땅에 붙어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언젠가는 떠올라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후시미는 감상적인 단어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평소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자꾸만 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는 그제서야 아까부터 느꼈던 녀석에게의 이상한 괴리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웃었다. 녀석도 나랑 같은 걸 느낀 게 분명했다. 아무도 없는 거리는 우리를 외톨이로, 미아로 만들었다. 나는 녀석을 찾아 겨우 현실로 돌아왔지만 후시미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게 분명했다.
"생각보다 무겁네."
"뭐?"
"하지만 이 정도가 딱 좋아."
술 마신 주정뱅이의 넋두리는 갑자기 영문 모를 곳으로 튀어버린다. 겨우 이해했다 싶으면 후시미는 또 딴 소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붙잡고 있던 손의 힘이 느슨해져 팔로 딛고 상반신을 일으키면 녀석은 손을 뻗어,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내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 손가락이 차가웠는지 뜨거웠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찬 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전신에 소름이 돋고 바짝 예민해져 다만 그 손의 움직임과 궤적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가로등 밑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이 아득하게 웃었다.
"호무라는 네가 돌아갈 곳이지?"
"…당연하지."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바짝 말라붙어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얽어붙은 손이 얼굴을 감싸쥐고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에 내 얼굴이 가득 담기는 걸 나조차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끌어당기고, 그래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직시하는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 우주 대신 나를 보고 있었다.
"날 눌러줘.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내가 혼자 부유하지 않게 눌러. 끌어당겨. 중력? 인력? 뭐, 어느 거라도 좋아. 그냥 붙잡아. 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견고하게 땅에 붙어있을 수 있는 녀석이니까. 네가 돌아갈 곳이라면, 나도 돌아갈게."
나는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고 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편이었다. 호무라의 행동대장이라는 타이틀은 멋으로 달린 게 아니었다. 그래서 움직였을 뿐이다. 중력이나 인력이나 그런 개념은 모른다. 붙잡으라고 했으니까 붙잡았다. 주변은 온통 희뿌옇고 눈이 내리고 새까맣고 거리엔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누군가 우리 둘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고 해도 녀석에게 키스했을 거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새파란 입술은 차갑고 거칠었지만 안은 뜨거웠다. 미아가 된 녀석을 다시 집으로 데려 올 시간이었다.
흠집이 잔뜩 난 렌즈 너머로 일그러져 바라보는 눈동자와 이죽이는 입꼬리를 확 때려버리고 싶다고, 야타는 생각했다. 얼마나 거하게 뒹굴었는지 깨끗했을 셔츠와 바지는 온통 흙투성이에 먼지투성이, 시퍼렇게 멍이 올라 부은 입가를 마디마다 찢겨나가 똑같이 부어오르고 피가 거무죽죽하게 말라붙은 손으로 문지르는 게 퍽 가관이었다. 그 꼴로도 싸울 힘이 남아있는지 시비조로 쏘아붙이는 끝이 갈라진 목소리는 늘어졌으면서도 나즈막하고, 그러면서도 불퉁하고 뾰족하게 날이 서 있다. 누가봐도 빈정대는 꼬라지에 열이 뻗쳐 이걸 진짜 한 대 패 말아 고민하는 사이 바라보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녀석은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볼 일 없으면 꺼져."
그 때 그냥 한 번 걷어차고 갈 길을 갔다면 야타 미사키는 후시미 사루히코를 그저 어느 날의 성격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며 잊었겠지만 무슨 심정이었는지 그렇게 말했다.
"일단 좀 씻자. 더러워."
그 말에 끈 떨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후시미가 벌떡 일어나 야타의 다리를 걷어찼고 순식간에 땅바닥에 쳐박힌 야타는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나 후시미가 문지르던 부어오른 볼을 한 대 또 날려버렸다. 누군가 와 뜯어말릴 때까지 개처럼 싸워대고 둘 다 양 팔을 붙잡혀서도 어떻게든 한 대라도 더 치려고 바둥거렸다. 이 녀석하고는 죽어도 친해질 수 없을 거라고,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이, 야타. 저거 셉터4 녀석들이지?"
창가에 앉아 다 마신 커피의 얼음만 와그작와그작 씹어먹고 있으려면 옆에 있던 녀석이 야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반사적으로 바짝 날이 서 퉁겨오르듯 늘어져 있던 허리를 피고 일어나 어디? 어디? 하고 두리번거리면 저기, 하고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가면 확실히, 있었다. 거무칙칙하고 보기만 해도 숨 막히게 갑갑한 딱 달라붙는 푸른 제복, 구시대의 유물같은 긴 검을 찬,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한낮의 태양에 인상을 찡그리는 후시미 사루히코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건지 가로변 건물 틈새의 그늘에 숨어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에 녹아내릴 것 같다는 듯 축 늘어져 있으면서도 세상만사 다 맘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잊지 않는 듯 온 몸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표정은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바가 없었다.
다만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어딘가로 향하다가 불현듯 슬쩍 둥글게 누그러지는 순간, 미사키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 싫어. 여름 따위 왜 존재하는 거지."
나름대로 냉동고 제일 안 쪽에서 꽝꽝 얼어있는 걸 골랐거늘 벌써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후시미는 중얼거렸다.
"너, 겨울에도 그 얘기 했어."
"겨울도 싫어."
툭 내뱉은 말은 아스팔트에 들러붙은 껌딱지 같이 주욱 늘어져 있어 야타는 그냥 웃어버렸다. 처음 만났을 땐 이 목소리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드물게 풀어진 목소리라는 걸 야타는 금방 눈치챘다. 평소에 말할 땐 자기 주장이 강한 말투를 구사했고 필요하다면 언성을 높이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래도 어딘가 귀찮은 듯한 구석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느슨해져 있는 건 오직 자신 앞에서일 뿐이라고 깨달았을 때 야타는 묘하게 기뻤다.
"그만 웃어. 뭐가 그렇게 웃기냐."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서 우물거린 채 후시미는 툭 쏘아붙였지만 그 끝에 여전히 남아있는 늘어짐에 야타는 웃었다.
"너, 나 많이 좋아하는 구나."
"뭔 소리야."
"아니. 좋았어, 오늘은 이 형님이 가서 볶음밥이라도 해줄게, 사루!"
아스팔트가 이글이글하게 익어가도록 더운 날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수직상승, 하이텐션으로 후시미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소리치면 후시미가 미간을 팍 찡그리고 미사키를 쏘아보더니 이내 또 능글맞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자세 불편하지 않아, 미사키?"
미사키, 라는 이름에 꼬박꼬박 악센트를 주어가며 어깨라도 낮춰줄까? 하고 덧붙이는 얼굴은 여전히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재수 없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야타는 알고 있다.
"입 닥치고, 파인애플 괜찮지? 오늘은 햄 말고 특별히 돼지고기도 넣어주마."
"아. 그거 나쁘지 않지."
풀어져서 희미하게 올라가는, 햇볕에 하얗게 반사되는 부드러운 미소를 야타는 정말로 좋아했다. 비밀기지에서 발견한 보물과도 같은 미소는 자신에게밖에 보이지 않고 그래서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랬는데.
후시미는 건물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걸어갔다.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보면 거기엔 또 충분히 익숙한 얼굴, 청의 왕이 있었다. 둘 다 썩 맘에 들진 않는다는 표정으로 무어라 대화를 하다 걸었지만 그 어깨는 나란했고 여름의 환한 태양 밑에서 걸음마다 자국을 남기는 희미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해, 야타?"
"…냅둬. 멍청이냐, 너는. 옆에 있는거 왕이라고. 우리따윈 상대도 안돼."
목이 메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 대답하고 미사키는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었다. 고개를 저어 애써 지워보려 해도 그 희미한 미소가 확실한 궤적을 띠고 야타의 눈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 전부 과거다.
야타는 눈을 꾹 감고 되뇌었다.
야타의 옆에서라면 절대로 입지않았을 꽉 죄는 제복을 입고 키는 전보다 더 커있었다. 머리는 좀 더 길고 전에는 잡아본 적도 없는 긴 검을 우아하게 다루는 녀석따위 모른다. 풀어지고 느슨한 목소리로 아무리 난리를 쳐도 꿋꿋하게 '미사키'라고 불러주거나 뭐가 그리 아까워서 열 번의 비웃음 다음에 한 번이나 겨우 제대로 웃어주던 그 녀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가 너무 좋아서 지리하고 유치한 말싸움에 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자신도 전부 과거였다. 그 녀석은 과거에 진즉 사라졌고,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저렇게 웃는 후시미 사루히코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