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미코후시] 어떤 기억
K/SS
2012. 10. 30. 02:03
모처리퀘.
귀찮은 게 붙었다. 후시미 사루히코의 첫인상은 그것 뿐이었다.
"야타 쨩? 귀엽잖아."
스오우가 불을 붙이기 위해 마셨던 숨을 뱉으며 한 말에 잔을 닦던 쿠사나기가 힐긋 돌아보고는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바 호무라는 오늘 개점휴업이다. 슬프지만 원래부터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니 하루 정도 닫아도 매상엔 별 지장이 없고 대신 거나한 파티가 벌어졌다. 신입환영이라는 명목 하의 회식일 뿐이지만 당사자인 두 사람이 실컷 즐기다 뻗어버렸으니 어느 정도의 보람은 있는 셈이었다. 그 중 한 명인 야타 미사키의 술버릇은 아무래도 취하면 끊임없이 말을 하는 타입이었는지 스오우를 붙잡고 말 끝마다 '미코토 씨 굉장해요! 좋아해요!' 를 외쳐댔으니 스오우 입장에선 아무래도 귀찮을 법 했다. 간신히 골아떨어져 바닥에 널부러져 자는 야타에게 담요를 끌어와 덮어주면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동안 말이 없던 스오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쪽이 아냐, 쿠사나기."
"어?"
"귀찮은 쪽."
"야타가 아니면 누구? 후시미?"
"그 쪽이 몇 배는 귀찮을 거야."
그 말에 쿠사나기는 제멋대로 엎어져 자는 미사키와는 달리 얌전히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 다른 한 명의 신입을 바라보았다. 소란스럽고 과격한 활동파인 야타와는 달리 또 다른 신입, 후시미 사루히코는 아주 얌전한 편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야타와는 달리 행동이 적다는 뜻일 뿐이었고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희미한 적대감을 감추며 아무 포장없이 내뱉어지는 날카로운 말은 모두를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서늘했다. 무표정으로 누워 자고 있는 후시미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기면 후시미는 잠깐 뒤척이더니 다시 미동도 없었다.
"설마."
안경을 벗고 자는 모습은 뼛 속까지 독을 품은 것 같은 말들과는 달리 순해서 쿠사나기는 웃었지만 스오우는 여전히 무언가 거슬리는 게 있는 듯한 얼굴로 후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얼굴은 젖살이 남아있었지만 그 사고방식은 결코 어린 녀석이 아니다. 길들여지지도 않고 길들여지고 싶은 마음도 없는 어린 맹수를 바라보며 스오우는 얼음이 달그락거리던 온더락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정말로, 귀찮은 게 붙었다.
날카로운 시선을 간파한다. 숨길 생각도 없이 시선을 돌리면 오히려 가볍게 웃으며 맞받아치는 녀석을 스오우는 한 번도 만만하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피보다 더 진한 인연으로 묶인 클랜. 후시미의 페어인 야타는 늘 그렇게 외쳤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했지만 후시미는 아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머리를 굴리며 사람과의 거리를 계산한다. 그럴거면 좀 더 완벽하게 녹아들어 연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덩어리에서 튀어나온 눈에 빤히 보이는 그 뾰족뾰족함은 어디에 있든 스오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여전하구만."
"일어나 계실 줄 몰랐는데요. 계속 자고 있단 보고를 들어서."
"네 왕이 나를 깨우기 전엔 그랬지. 네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기 전까지도 그랬고."
같은 제복인데도 무나카타가 각잡힌 태도에 부드러운 낯인 대신 후시미는 느슨한 폼에서도 사나운 시선을 감출 줄 몰랐다. 쳐진 눈매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스오우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후시미 사루히코가 여기 올 일은 없었다. 낮에 이미 무나카타가 한 번 왔다갔고 스오우는 계속 잠을 잤다. 쿠사나기가 있는 한 호무라가 따로 움직일 일도 없었고 스오우에 대한 별다른 보고가 들어갈 리도 만무했다. 세상만사 숨쉬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녀석이 여기까지 심심해서 걸음을 옮길 리는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무엇을 묻느냐는 듯 잠시 격자 너머의 얼굴이 한 쪽 눈을 치켜올라갔지만 이내 느슨하고 서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별로. 그냥… 이 쪽도 골치거든요."
"그토록 너희들이 잡으려고 난리를 치던 나를 잡아서?"
모순적인 말에 웃음이 나오는 건 저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픽 웃고는 후시미는 문을 열었다. 투박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들어온 기억보다 소년은 좀 더 커져 있었다. 긴 검을 한 쪽에 차고 각잡힌 제복을 제멋대로 풀어헤친 것이 그답다고 생각했다.
"모순적이지만 그렇습니다. 우리 왕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지만 저는 궁금해 죽겠어요."
"헤에."
그건 순수한 감탄이었다.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잡담할 때도 후시미는 외따로 앉아 책을 읽거나 지켜보고만 있었다. 쿠사나기처럼 순수하게 모두 통달하여 방관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끼기 싫다는 명백한 거부의 의지. 도대체 저 녀석은 왜 이 쪽에 들어온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고 있으면 무심한 잿빛과 눈이 마주쳤다. 그 어느 것에도 흥미가 없다는 듯한 회색은 짙게 가라앉아 같이 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스오우를 향해 한 번 이죽이고는 아예 눈을 감았었다. 그런 후시미 사루히코에게 궁금한 것도 있을 줄이야.
"옛 정을 생각해서 얘기해주시죠, 미코토 씨."
감방 구석에 있던 투박한 나무의자를 주욱 끌고 와 털썩 앉아 얼굴을 들이대는 후시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하늘빛으로 반짝인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기는. 쿠사나기가 옆에 있었으면 등짝을 한 대 갈기고도 남았으리라. 끝은 쉽게 찾아왔다. 오히려 그 때까지 후시미가 계속 호무라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쿠사나기가 바를 지키고 타타라가 그 앞에 앉아있고, 야타가 카마모토와 테이블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거나 안나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면 후시미가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은 고양이처럼 소파에 늘어져 따분한 표정으로 낮잠을 자는 풍경이 꽤나 익숙해질 즈음, 후시미는 사라졌다.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생각보다 썩 잘 어울리는 푸른 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걸 보고 야타는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고 카마모토는 그걸 말리고 안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타타라는 허탈하게 웃고 그 쿠사나기마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할 때도 스오우는 그저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다만, 예상 밖이었던 것은 후시미가 그 셉터4에 들어갔다는 사실. 후시미는 정으로 움직이는 호무라에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규율과 기강이 딱 잡힌 셉터4에도 어울리진 않았다. 개성이 강한 호무라에서도 겉돌았던 후시미가 순탄한 조직생활에 아귀가 맞을 것 같지도 않았다.그리고, 문득 안나가 앉아 짧은 다리를 흔들고 있는 소파를 볼 때마다 드는 기묘한 이질감이 생각보다 오래 갔다는 것 정도일까.
"맘에도 없는 소리.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녀석에게 그런 식으로 놀림당할 정도로 호무라는 만만하지 않다, 꼬마야."
나긋하게, 대신 뼈가 담긴 말로 충고하면 후시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전부 거짓말은 아닌데요."
"그걸 믿으라고?"
"믿든 말든 자유입니다. 거기, 소파는 좋았거든요. 여기선 낮잠을 못자서 피곤해요."
등받이에 늘어져 하품을 하는 꼴이 진담이긴 한 모양이었다. 조명 아래 드리워진 눈 밑의 거뭇한 그림자가 이상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상체는 전보다 좀 더 말랐을 지도 모른다. 나른하게 눈을 감고 한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면 조명 아래 흰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우둘투둘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야타가 그걸 보면 진짜 죽어라 달려들겠군."
손을 뻗어 셔츠 깃을 제낀 것은 반은 충동에 가까웠다. 지워지지 않는 인장을 이 녀석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스오우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갑자기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지만 스오우 본인도 모르게 제법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뭘 어떻게 했는지 길게 찢어져 그을음까지 남긴 얼룩덜룩한 흉터가 호무라의 인장을 뒤덮어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있자니 미묘한 기분이 들어 무의식적으로 포켓을 뒤적거려 보지만 담배와 라이터는 전부 압수당한 뒤. 텅 빈 주머니에서 갈색의 말라붙은 담뱃잎 몇 개만이 손 끝에 걸려나와 스오우는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 저야 더할 나위 없을텐데."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후시미는 여전히 셔츠깃을 잡고 있는 스오우의 손 끝을 툭 쳐내고는 대신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스오우에게 보였다.
"여전히 이거 피시나요? 우리 왕은 조금 엄격해서 전부 압수당했겠지만."
작은 상자곽을 열어 스오우의 입에 한 대 물리고 불까지 붙여주는 게 퍽이나 상냥하다. 후시미가 담배를 폈던가? 필터를 질근 씹으며 숨을 들이쉬면 몸이 나른해진다. 얼마나 됐다고 금단증상이라고 겪고 있었나 싶어 웃으면 후시미는 다시 익숙한 손놀림으로 라이터와 담뱃갑을 잘 갈무리하고는 주머니 속으로 밀어넣었다. 언뜻 본 담뱃갑의 안 쪽은 빈 구석이 보였고 오랫동안 들고 다녔는지 모서리는 종이가 해져 부드럽게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
"특별 선물이에요, 미코토 씨. 여기 오래오래 계시라고."
"악담이군."
"얌전히만 계시면 가끔 찾아오죠."
"담배 안 피잖아."
"비행청소년이라서요. 가끔."
"혼자 피면 심심한데."
"그렇다고 여기서 피는 건 사양할래요. 걸리면 혼나거든요. 아직 근무 시간 중이라 이제 슬슬 가봐야 되고."
그렇게 말하며 후시미는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의자를 다시 제자리로 옮겼다.
"내가 왜 순순히 잡혔는지는 안 듣는거냐."
"말해줄 것도 아니잖아요."
뱉어낸 희미한 연기 속에서 소년은 웃었다. 궁금한 건 핑계고 처음부터 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망설임없이 돌아서는 모습이 몇 시간 전에 왔던 무나카타와 겹쳐보여 스오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왜 온 거지?"
"…반은 정말 이유가 궁금해서고."
덜그덕거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후시미가 다리를 옮겨 그 문을 넘어가면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반은 옛 정이라고 해두죠."
잘 있어요, 미코토 씨. 뚜벅뚜벅 휑한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옅어진다. 누구와도 쉽게 말을 섞지 않는 주제에 제 지정석인 것 마냥 느슨하게 소파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소년을 생각해 본다. 붕 떠 있다고 생각했어도 결국은 그런 흔적을 남긴 소년. 가슴 왼편에 자리잡은 스오우의 흔적을 망가뜨리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제복이 키가 큰 지금은 그럭저럭 어울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착실하게 자기 일을 하러 가고, 무나카타를 '우리 왕'이라고 부르는 후시미 사루히코를.
"귀찮은 게 붙었어."
야금야금 타들어가 끝을 보이는 담배가 아쉬워 필터 끝까지 깊숙하게 빨아들였다 내뱉는다. 희뿌연 연기가 고인 공기 중으로 스오우는 중얼거렸다. 무심하게 창 밖을 쳐다보다 스오우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감던 소년은 이제 없다. 소파는 영원히 공석이고 일그러진 인장이 다시 제 모양을 되찾을 일도 없겠지. 이 남은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내지 못해 계속 안고가는 것도 썩 귀찮은 일이었다.
'K > 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나후시] Love is Psychedelic (0) | 2012.11.06 |
---|---|
[무나후시] 어떤 회개에 대하여 (0) | 2012.10.30 |
[무나후시] Paranoid (0) | 2012.10.24 |
[미사후시] Leonids (0) | 2012.10.24 |
무나후시로 뱀파이어 AU (0) | 2012.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