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폰을 쓰고 가만히 있으면 세상이 고요하다. 플레이어에 전원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저 기계너머의 소리. 테이프가 돌아가고 시작되는 노래에 곧 묻혀버리고 잊혀지는 정적.
후시미는 그 정적을 좋아했다.
"뭘 듣고 있어, 사루?"
"아무것도."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가 빈 교실에서도 후시미는 느긋하게 홀로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흘긋 야타를 보고도 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는 후시미의 태도에 야타가 냉큼 한 쪽 귀의 이어폰을 뺏어 귀에 갖다 대었다.
"…고장났어?"
"아냐."
"신종 허세?"
야타의 말에 기분이 나쁜듯 인상을 찡그리고 다시 한 쪽을 낚아챈 후시미는 워크맨에서 이어폰을 분리하고 대충 말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후시미가 늘 들고 다니는 워크맨을 열어 보면 그 안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 듣고 있다고 얘기했잖아."
"그럼 이어폰은 왜 끼고 있어? 아무것도 안 들리잖아?"
"아무것도 안 들리는게 좋은거야."
무슨 개소리야? 야타가 인상을 찡그리면 후시미가 푸- 하고 바람빠지는 소릴 내며 설핏 웃었다. 긴 앞머리가 한 번 들썩이고 후시미는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기다리고 있는 거야."
"뭘."
"소리가 들리기를."
"무슨 소리."
"글쎄."
"사람이 얘기를 하면 좀 알아듣게 얘기해라!"
"네가 멍청해서 못 알아듣는 거겠지."
바- 보-
소리없이 움직이는 입술에 무슨 말인가 싶어 쳐다보다 뒤늦게 이해한 야타가 야!!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 후시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야타의 머리를 꽉 눌렀다.
"하지마!!"
"너랑 나랑 키 차이가 몇 이었더라?"
"야!!!"
"10cm?"
처음 만났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느 새 쑥 커버린 후시미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퍽 거슬려 야타는 후시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내리쳤다.
"야- 잠깐, 이건…."
생각보다 좀 세게 들어갔는지 어지간해선 반응도 없는 녀석이 반사적으로 옆구리를 부여잡고 반쯤 주저앉는다.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와서 사과하기도 뭣하니 야타는 대신 후시미의 손을 잡고 냉큼 일으켰다.
"그러니까 누가 남의 머리 함부로 잡으랬냐. 됐어. 매점이나 가자."
"싫어."
"샌드위치에서 야채는 다 내가 먹어줄 테니까."
"아 그건 좀 괜찮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퉁명스럽게 야타를 바라보다 뒷말에 사르르 녹는다. 하여튼, 녀석도 단순하지. 중학생이나 돼서 야채 편식이 뭐람. 골라먹기 싫어서 어쩔 땐 급식을 아예 먹지 않는 후시미는 그렇다고 본인이 따로 뭘 먹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야타는 매일 식단표를 확인하고 빈 교실에 남아있는 후시미를 챙겨야만 했다. 귀찮아 죽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뒤에서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그가 귀여워 야타는 후시미가 좋아할만한 빵이 매점에 아직 남았을까 헤아렸다.
기다리고 있는 거야.
소리가 들리기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의 바다에 잠긴다. 치이이이익- 하는 희미한 기계 너머의 소리. 호무라에 있을 때면 후시미는 늘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하루종일 끼고 있는 이어폰에 가끔 타타라나 쿠사나기가 뭐라 해도 후시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감고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후시미는 어떤 소리를 듣고있었을까. 락? 힙합? 클래식? 음악은 가리지 않았으니 아마 날마다 바꿔서 들었겠지. 혹은, 기다리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어떤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고는 말한 적이 없었기에 야타는 여전히 후시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덜컥- 하고 앨범이 다 돌아갔다는 신호와 함께 마침내 그 희미한 잡음도 사라진 세계에서 야타는 기다리고 있다. 책상에 누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헤드폰 속에서 무언가가 들리기를. 아. 혹시 너도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을까.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창 밖을 보던, 아니면 바 구석의 스툴에 앉아 숙이고 있던 등을 떠올려 본다. 이름을 부르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던 얼굴.
미사키.
아무리 싫다고 해도 고집스럽게 불러대던 이름을, 야타는 기다리고 있었다. 헤드폰 너머의 정적은 아직 깨지지 않는다.
모처에서 잠깐 리퀘받고 조각글 느낌으로 썼던 거. 이상하게 후시미는 목이 추워보이고 겨울을 닮은 거 같아요.
야타 미사키가 후시미 사루히코를 첨 봤을 때 떠오른 것은 기린이었다. 목이 긴 기린. 아니면 사슴? 아니, 사슴은 너무 귀엽잖아. 기린도 귀엽긴 귀여운데 음… 기린, 기린은 기린인데 움직이지 않는 기린. 상을 반사하고 가만히만 있는 기린. 키가 유달리 크거나 하는 건 아니었는데도 목이나 팔다리가 가늘고 길쭉길쭉하고, 하얗고 그래서 곧 부서질 것 같았다.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서늘하고 가늘게 드러난 목이 허전해 자신의 목이 추운 것만 같았다. 겨울의 서늘함을 고스란히 담아넣은 듯한 사람을 야타는 그래서 멋대로 상상했다. 감정의 기복도 없고 그저 고요하기만 하지 않을까, 하고. 그 생각은 상대의 입이 열리는 순간 와장창 부서졌지만.
"뭐야. 꼬맹이네?"
너 이새끼 죽어라!!! 발끈해서 얼굴을 한 대 치면 그 서늘한 눈동자에 무언가 불이 팍 켜졌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죽고싶을 정도로 부끄럽게 왜곡된 이미지지만 후시미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후시미 사루히코란 녀석은 절대 성격이 좋지 못하며, 좋기는 커녕 인간사 세상만사를 한 320바퀴쯤 꼬아보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녀석이었다. 감정의 기복? 그래 없기는 없었다. 대신 자기 몫까지 남의 기분을 왕창 뒤집어 놓는데는 정말 일가견이 있어서 눈, 코, 입, 얼굴에 있다는 몇 백가지의 근육이 전부 상대를 비웃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다양한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재수 없을 수 있는지 야타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각설하고, 후시미 사루히코의 얼굴은 정말 입만 다물고 있으면 괜찮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문을 열고 나온 호무라의 앞에서 후시미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워 얼어죽을 것 같아도 목까지 올라오는 건 답답하다며 절대 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남들보다 더 긴 목은 추위에 늘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 서늘한 목을 쭉 뻗고 후시미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있으려면 문득문득,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야타의 머릿 속엔 처음의 후시미가 늘 생각났다. 가늘고 길쭉길쭉하고 하얗고 얼어서 손을 대면 부서질 것 같은. 그런 후시미는 늘 비현실적으로 생소하고 정적이고 아름다웠다. 지금 만약 이름을 부르고 손을 뻗으면 순간 부서져버리지 않을까. 긴 속눈썹을 드리우는 후시미의 눈꺼풀이 몇 번이나 느릿하게 깜박이는 동안 그렇게 생각하며 야타는 바라보고만 있었다. 허공으로 내뱉은 숨이 하얗게 피어오르며 사라진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얇은 코트 밑으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다. 그러다 문득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쳤다.
겨울 하늘을 닮은 회색의 연한 하늘빛의 눈동자가 야타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서늘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무언가 불이 켜지고, 천천히,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그 모든 것이 야타의 눈엔 순간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소리도 감각도 모든 것이 차단되고 오로지 그 모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가늘게 접히는 눈꼬리와 살짝 그늘을 남기는 속눈썹과 얼어붙어 핏기없는 입술이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며 움직였다. 이렇게, 평소에도 제대로 웃을 줄 알면, 훨씬 아름다울텐데―――
"여, 미사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면서 후시미는 얄밉게도 냉큼 야타의 이름부터 불렀다.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매서운 바람과 따스한 햇빛과 거리의 소음이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확 느껴지는 추위에 야타는 몸을 떨면서 소리 질렀다.
"너, 이름 부르지 말랬지!"
"이름 부르면 친해진대. 그렇지, 미사키?"
"닥쳐, 사루."
아주아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까지 쓰다듬는 후시미의 손을 아주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야타는 대신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어 후시미의 목에 걸쳤다. 손을 눈높이만큼 올려야 하는 것이 짜증나 정강이를 퍽- 차면 갑작스런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후시미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굽혔다.
"그래그래. 그래야지, 사루."
"너임마."
확 낮아진 높이에 만족스러워하며 야타는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무채색의 옷을 입은 후시미에게 빨간 목도리는 유독 튀었지만 끝부분까지 꽉꽉 졸라매어 마무리하면 겨우 따뜻해 보였다.
"뭔데, 이거."
"한겨울에 그렇게 다니면 얼어죽어요."
발걸음을 떼며 야타는 입을 열었다. 나란히 걷고 있으면 그제서야 겨우 현실감이 든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부서지지 않는다. 꽁꽁 묶어놨으니 절대로 부서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얄미운 말만 해대면서도 야타의 옆에 있을 거라고, 야타 미사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도, 그 빨간 목도리의 잔상이 눈에 남아있는데, 여전히 후시미의 목은 희고 길고 가느다랗고.
"이름으로 부르는 거 싫어하든가?"
미- 사- 키-?
재수없는 목소리도 표정도 여전한데 주인을 잃은 목도리와 감싸줄 것 없이 드러난 그 목이 참을 수 없이 허전해서 야타는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바다가, 바다가 거기에 있어서, 떠내려가서, 가라앉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다. 무나카타는 꿈을 꾼다. 그 새파란 바다에 잠겨 아아.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파멸의 끝을 보노라고. 둔중한 굉음, 무거운 물 속에서도 속도를 잃지 않고 중력보다 더한 힘에 끌려 낙하하는 날 선 은색의 검. 머리 위에서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자신을 잡아먹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그 검이 자신을 찢는 꿈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짓눌려서 온 몸이 터질 것 같은 압력, 쥐어짜내는 고통 속에서 결국은 한심하게 몸부림치는 자신이 무나카타는 싫었다. 자꾸만 엇나가는 생각을 억지로 끼워맞춰 차라리 끝이 빨리 왔으면 하는 그 조급하고 하찮고 한심한 소망 속에서 숨을 토해낸다. 멍한 귓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잡을 수 없고 눈이 아파 제대로 뜰 수 없는 시야의 끝엔 공기방울만이 모든 것에 역행하여 위로, 위로 올라가는 와중에 어디선가 아득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이, 무나카타―――
왕이란 자리가 무겁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니면 그 무게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럴 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자신은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힘이 생기고, 선택받고, '왕'이라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단어가 자신의 이름이 되었을 때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언젠가 와야 할 자신의 것이 온 것처럼 받아들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파란 빛깔. 한없이 산뜻하면서도 차갑게, 깊게 깊게 가라앉는 그 색이 무나카타는 맘에 들었다. 그렇지만, 글쎄. 색을 원판에 풀어놓으면 빨간색의 보색은 초록색이라던데 왜 사람들의 상식에선 빨간색과 파란색이 대비되는 것일까?
상식과 편견을 뛰어넘어 어디까지나 논리에만 기초하여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무나카타 레이시가 그 붉은 왕, 스오우 미코토에게 막연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배겨진 일반적인 인식 때문이었을까. 간결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보다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본능적으로 스오우 미코토를 꺼렸다. 깔끔하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죠.'라는 말 한 마디로 나눌 수 없는 그런 진득거리는 무언가가 분명히 스오우에겐 있었다. '호무라'의 난폭함, 예의 없음, 무질서, 불규칙, 깔끔하게 나눌 수 없는 애매한 감정에 기반한 그 클랜의 구성. 전부 다 무나카타의 맘에 들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는 건 치워버려야 할텐데, 스오우 미코토와 그의 클랜은 무나카타에게는 참으로 전례없는 무언가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적으로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고 사적으로도 좋은 기회라는 걸 무나카타는 부정하고 싶은 맘이 없었다.
후득거리는 굉음과 뒤틀림이 사방을 뒤흔든다. 공기마저 달아올라 제멋대로 휘몰아쳐 옥죄인다. 태양이 녹아내리면 이런 기분일까. 거대한 검이 그 힘을 잃고 바스라지는 소리를 듣는다.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었던 차가운 손이 따뜻하다. 온 몸의 감각이 제멋대로 날뒨다. 뜨겁고 예민하고 동시에 둔하다. 불쾌하게 들러붙는 열기가 주는 감각이 모두 낯설고 짜증나는데 스오우 미코토만큼은 제 세계에 있는 듯, 몇 번이라도 봤던 풍경인 것 마냥 익숙한 표정이다.
한 번에 끝낸다.
아무리 모든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어도 감이란 게 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팔을 밀어넣어야 되는지, 흔들림없이 날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인 근섬유들을 치명적인 수준까지 찢어발기는 감은 지금까지의 경험이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스오우는 무방비하게 눈 앞에 서있었다. 얇은 셔츠 한 장은 보호구조차 되지 못하고 아무리 단단한 근육이라도 날카롭게 벼린 칼날 앞에선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이 무나카타."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고 바짝 긴장해 호흡을 가다듬던 무나카타의 귀에 여전히 나른한 스오우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꽂혔다.
"…뭡니까 스오우. 최후의 유언이라도 하실 계획입니까?"
겨우 적응했던 아찔한 열기가 깨져 삐끗해버린 무나카타가 있는 힘껏 평상심을 유지하며 입을 열면 스오우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메마른 대지를 밟는 소리가 천축을 뒤흔드는 것 같이 크게 들렸다. 아지랑이에 일그러져 울렁거릴 정도인데 스오우는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손바닥의 땀 때문에 미끄러지는 검을 다시 고쳐쥐며 자세를 바로 잡으면 가볍게 현기증이 인다. 끈적이고 진득하고 훅훅거리는 게 눈 앞의 징그러울 정도로 익숙한 남자와 똑같았다. 이 남자를 죽이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련의 동작들을 끝내면 이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그러들 터였다. 그러니까.
"유언?"
그의 클랜에서 스오우 미코토의 오른팔 같은 남자는 그를 사바나의 사자라고 칭한 바 있었다. 퍽 잘 어울리는 얘기였다. 마르고 건조하고 뜨거운 대지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모든 것을 그저 내려다보기만 하는 남자. 가끔 오수를 즐기며 하품을 하고 늘어져 움직이다가 제 적이 나타나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딱 그 짝이었다. 언제나 느긋하던 남자에게서 그르렁대는 목울림 소리와 함께 경멸어리고 적대심 가득한 말들이 흘러나온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안 죽어. 여기서. 네 손에는 더더욱."
"그런 승산없는 얘기는 마지막 남은 허세인가요."
"허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조금 남은 기력조차 힘에 지배당하는 당신을 제가 꺾지 못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평소보다 더 시시하군요."
"내가 분명히 얘기하지 않았나? 나는 너를 두려워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선연한 비웃음이 붉은 불꽃과 함께 열기만큼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백 번, 천 번, 네 그 겉만 번드르르한 검으로 찔러봐라 무나카타.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착각하고 있는 건, 네 쪽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에 숨이 막힌다. 상황은 분명히 다른데, 밑도 끝도 없는 무겁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 대신 분명히 땅을 디디고 뜨거울 정도의 열기를 버티고 있는데도 무나카타는 익숙한 꿈의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들고 있는 검신의 길이를 가늠한다. 당장, 당장이라도 힘있게 손목을 휘두르기만 하면 그의 몸에 분명히 상처를 낼 수 있는데, 그 전에, 숨이 막혔다. 짓눌려서 온 몸이 터질 것 같은 압력, 쥐어짜내는 고통, 조각조각 찢어져 엇나가는 생각들. 붕괴하는 다모클레스의 검이 완전히 부서져 내리기 전에, 그 전에, 죽여야 하는데.
"날 네가 꺾지 못할 리가 없다고?"
부글부글, 내쉬는 숨이 모두 공기방울 되어 위로, 위로 올라가는데 음습한 공포가 무나카타를 감싸,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기 전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맞춰 파멸만을 기다리고 있으려면 늘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고통스런 감각 이외에는 모든 것이 제 구실을 하지 않는 그 꿈에서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어느 순간 훅- 가까워진 얼굴이 맹수의 눈으로 비웃는다. 자신의 것보다 약간 큰 손이 제 손등을 움켜쥐었을 때야 무나카타는 자신이 검을 떨어뜨리기 직전이었단 걸 깨달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하려 해도 언젠가 찢겨졌는지 모를 사고와 함께 모든 감각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끓어오르는 대기 속에서 무나카타는 숨을 내뱉었다. 쥐어짜인다. 짓눌린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일까. 파멸을 맞이하는 건 이 쪽이었나?
- 어이, 무나카타.
그 목소리는 구원이었을까 아니면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의 소리였을까. 모른다. 무나카타는 모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그러쥐어 억지로 검 끝을 바로 세운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팔을 밀어넣어야 되는지, 흔들림없이 날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인 근섬유들을 치명적인 수준까지 찢어발기는 감은 지금까지의 경험이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스오우는 무방비하게 눈 앞에 서있었다. 얇은 셔츠 한 장은 보호구조차 되지 못하고 아무리 단단한 근육이라도 날카롭게 벼린 칼날 앞에선 무의미하다. 무방비한 표정, 이글거리는 태양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검의 표면이 반짝거린다. 소리도 없이 공기를 가로지르는 화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무나카타의 눈에 잡힌다. 속도를 결코 떨어뜨리는 일 없이 떨어지는 은색의 검.
"스오우."
어둡고 푸른 바다가 가득 차올라 모두가 가라앉는 가운데 내뱉는 숨만이 위로, 위로 올라간다.
적청은 어려웠습니다. 선님에게 좋은 리퀘를 받고 제가 망쳤습니다. 분량이 안되는 것 같아서 이 쪽 카테고리.
적청은 좀 더 캐릭터가 잡히면 쓸게요. 두 왕님들은 일단 출연부터 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적왕님은 탈옥부터 하든가.
손에 가득한 하얀 수국과 국화, 연보랏빛 장미와 겹겹이 쌓인 꽃잎이 풍성한 리시안서스, 그 희고 보랏빛을 띄는, 부드럽게 피어난 색채의 사이에 싱그러움을 더해주는 연두색의 자그마한 소국.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아름다운 꽃다발을 후시미는 어떻게 처리해야될 지 난처했다. 냉정과 이성으로 빚어만든 것 같은,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던 그녀에겐 그 매끄러운 새틴과 얇고 하늘거리는 풍성한 웨딩드레스도, 이 단아하지만 화려한 부케도 빛이 바랐지만 후시미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들어와도 괜찮은데."
"…신부 대기실에 남자가 들어가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선배?"
"어머. 후시미 군이 그런 예의를 지키는 남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시비거는 신랑을 두들겨 패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요."
결점 하나 없이 언제나 완벽한 얼굴이 웃는다면 분명 예쁠 거라고 생각했었다.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다가 움츠리고, 망설이고, 다른 사람에게 웃는 얼굴을 보며 그저 어쩔 수 없다고 되새김질해야 했다. 부드럽고 아름답게 웃는 그녀는 실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몇 년 전에 봤던 게 마지막이었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아니 어쩌면 그 때보다 더. 미소짓는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워 이미 희미하게 변색된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그녀는 후시미를 설레게 만들었다.
"여전하네. 후시미는."
"사람 어디 가는 건 아니죠."
"그래도 전보다 더 둥글어 진 것 같아. 전에는 조금… 비죽하니 날 서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녀, 아와시마 세리는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아. 둥글어 진 건 오히려 선배 쪽이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짓은 하지도 않았을텐데. 장난기는 제로.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냉정해서 동기들이 그녀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는 이유로 괜히 트집을 잡던 것을 기억했다. 과 행사나 세미나를 진행하는데 있어 차질을 빚는 것을 싫어했던 그녀는 학생회를 착실하게 독촉했고 처음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들어왔던 생각없는 신입생들이 하나둘씩 질려하며 떠나는 동안 후시미는 오래동안 남았다. 원래대로라면 선배, 동기, 후배, 과 행사 따위 관심도 없이 강의 시간마다 불리는 '후시미 사루히코'라는 출석에 다른 사람 역시 눈길도 주지 않는 그런 죽은 듯한 생활을 보냈어야 했는데.
"결혼… 축하해요 선배."
누굴 한심하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후시미 역시 그녀를 사랑했고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고 그네들과 같은 꼴은 되기 싫어 발버둥치고 대신 오래오래 숨을 죽이고 곁에 남아있는 것을 택했다. 단 한 번도, '세리'라고 그 발음조차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굴리고 생각을 말로 토해낼 수 없어 허공에 숨만을 뱉어내야 했던 그 날들은 이제는 추억이었다.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후시미는 몇 번을 고민해야만 했다. 하얗고 도타운, 부드러운 종이에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을 손 끝으로 훑으면서 그 표정을 보고 누군가도 그랬다.
"아직도 그녀를 사랑해요, 후시미 군?"
우편함에서 가져와 한 번 훑고 탁상 위에 던져놓은 청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는 후시미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글쎄요. 무어라 답해야 될 지 몰라 머뭇거리면 대신 생각보다 다정한 키스가 돌아왔다. 당신도, 그녀를 사랑했잖아요? 아니었을까? 그 말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키스 뒤에 이어진 손길에 또 이끌려 정신을 놓아버렸던 것 같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답을 듣기가 두려웠던 것도 같다. 늘 세상에 다시 없을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그는 또한 난폭했다. 그 정중한 얼굴에 숨겨진 날카로운 말은 매끄럽게 후시미의 빈틈을 발견하고 찔러넣어져 관통당한다. 시작은 후시미였을텐데 어째서 꼬챙이에 꿰여진 숨만 붙어있는 먹이가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그만두려고 했는데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도 이상하고 지리하게 이어진 관계는 처음부터 변할 바가 없고 두려울 정도로 익숙해져 사실 지금 이 자리에 후시미 혼자 서 있는 것도 어색할 지경이었다.
"축하받게 될 줄 몰랐는데, 고마워."
"제가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축하의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못된 사람은 아닌데요."
"음… 아니, 후시미는 여기에 오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왜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와시마가 그렇게 추측할 근거가 하나도 없어 후시미가 한 쪽 눈을 치켜뜨고 물어보면 아와시마는 조금 곤란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독점욕 강한 애인이 있잖아. 매일같이 자국 남기던, 볼 때마다 자랑하는 건가 싶어서 낯 뜨거울 정도였는데. 아직도 사귀지 않아?"
그런 애인, 있을 리가 없는데. 하려던 말이 무언가에 턱 막힌듯 목에 걸려 나오지가 않는다. 혼란한 머리에서 사고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얼버무리면 아와시마 세리는 후시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너 되게 사랑하나봐."
그 뒤로는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뭐라고 마무리를 짓고 대기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아 식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뿌려지는 꽃잎들, 신랑신부의 입장, 어지러울 정도로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조명, 엄숙한 주례사, 축가, 신랑은 신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까? 신부는 신랑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까? 영원한 사랑,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애초에 사랑이 있는 지도 모르겠는데. 사랑. 그 단어만을 후시미는 계속 곱씹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날 사랑할 리가 없잖아. 마음보다 몸이 먼저였고 그 몸이 닿은 의도조차 불순했다. 그녀의 옆에 당연하게 자리잡은 그 여유로운 얼굴이 짜증나서, 도발했다.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고 생각보다 지독했다. 순간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끔찍한 격통, 몸이 꿰뚫리는, 산 채로 잡아먹히는 그 공포, 보이지도 않고 감각조차 없어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어떤 상태로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공황. 핀으로 팔다리가 모두 고정되어 산 채로 해부당하고 있는 개구리처럼 공포에 짓눌려서도 그녀에게서 그를 떼어냈다는 안도감, 내가 갖지 못한 그녀를 가진 남자에 대한 그 치졸하기 짝이 없는 열등감을 만족시켰다. 아마 알고 있었겠지. 후시미의 속셈, 애써 익숙한 척 하던 허세, 여유, 거짓말. 전부 간파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응했다.
아와시마 세리는 무나카타 레이시와 1년을 사귀다 결국 헤어졌다. 그 둘의 관계는 사귀기 전에도, 후에 헤어져서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후시미 사루히코와 무나카타 레이시의 관계는 달랐다. 학생회 멤버와 학생회장의 관계에서 몸을 섞고 거짓을 속삭이는 관계. 아와시마 세리가 원인이었다면 후시미와 무나카타의 관계도 진즉 끝나야 했지만 모두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몇 년이 흘러 심지어 아와시마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도 후시미와 무나카타는 이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관계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줄곧 이어갔다.
이 관계에 도대체 사랑이 어딨다고?
그리고 정신 차리고 보니 후시미는 부케를 들고 서 있었다.
『선물이야.』
색조차 잃은 군데군데 구멍난 흑백의 필름이 드르르르륵 굴러간다. 불안정하게 지직거리며 텅 빈 화면에 아득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피로연은 참석하지 못하고 가겠다는 말을, 최대한 태연한 척 하며 했던 것 같다. 말, 더듬었던가? 모르겠다. 온전한 소리로 냈는지 아니면 뭉쳐지지 않아 허망하게 흩어지는 형태로 간신히 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던져봤자 받을 사람도 없고, 후시미는 사랑한다고 얘기해주지 않았을 게 뻔하니까 이거라도 가져다 주면서 고백해 보는 게 어때?
『좋아할거야.』
후시미와는 다른 차분하고 조금은 들뜬 목소리가 아득하게 저 멀리서 웅웅 울린다.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억지로 떠넘겨진 어울리지 않는 부케를 받아서, 손에 쥐고, 버스를 타고, 집이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게 부유하고 날아가고 사라지고 순간순간 뭘하고 있는지 잊어버린다. 눈을 깜박이면 여전히 싱그럽고 소복한 한무더기의 꽃이 후시미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폐부가 차오른다.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형체없는 무언가가 가슴 안에 가득 차올라서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다. 숨 쉬기가 힘들다. 뻐끔거리면서 숨을 갈구한다. 입술이 메말라간다. 얼굴에 닿는 시트의 감촉. 그저께 새로 갈았다. 왜냐면, 그 전날 밤엔 늘 그렇듯 당신과 있었으니까. 온갖 체액으로 눅눅해진 시트의 감촉이 싫어 아무리 피곤해도 시트를 갈고 잤다. 피곤한 성격이라고 당신이 질책했다. 흔적을 남기는 게 두려웠다. 그게 두려우면 다음 날 시트를 갈면 됐을텐데. 푹 패인 흔적, 미지근하게 식은 온기를 손으로 훑었다. 애초에 다른 곳을 가면 되잖아? 모텔이라든가 러브호텔이라든가 돈만 낸다면 주어진 장소는 많은데. 처음이, 집이었으니까. 희미하게 허덕이는 소리로 변명해 본다. 누구에게 변명하는지는 모른다. 그만 둘 기회는 언제나 있었잖아. 아냐. 그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상하좌우, 시작과 끝도 보이지 않는 형체조차 파악할 수 없는 곳에 서 있으면 그는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어감으로 후시미의 이름을 불렀다. 사루히코 군. 괜찮은 겁니까? 처음이죠? 거짓말은 안해도 되는데.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모른다. 그 공황으로 밀어넣는 것도 건져내는 것도 모두 그였다. 열등감, 우월함, 허세, 거짓말 모든 장막을 찢어내고 손을 내민다. 손을 내민 것은 당신 뿐이었다. 사랑하는 걸까? 사, 라-, ㅅ ㅏ ㄹ ㅏ ㅇ, 사―랑. 어깨가 움찔 떨리는 따끔한 통증과 함께 입 안에서 짭짤한 타액이 고였다. 혀를 씹었다.
그제서야 겨우 후시미는 정신을 차렸다.
그 어색한 낱말, 발음조차 입에 붙지 않아 혀를 씹어버릴 정도의 단어. 그 낯설음 자체가 그와 후시미의 거리였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아와시마 세리를 사랑했다. 닿는 것조차 아깝고 닳아버릴 것 같이 소중하고 보기만 해도 아련해서 울어버릴 정도로. 손 안에 넣으면 부서져 흩어질까, 그것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바라만 봤다. 그 아득한 기억. 빛바랜 감정. 무나카타에게선 그 정도의 애절함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냥, 그냥 어느 샌가 익숙해졌고 끝낼 방법을 몰랐고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다시 혼란해져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정신이 다급한듯 반복적으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꿰뚫려 낚아채진다. 대롱대롱 그 소리 끄트머리에 걸려 문을 열면 거기엔, 그래 당신이 있었다.
"아와시마 군에게 혼났습니다."
아까부터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온통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떻게 될 지 감도 오지 않는다. 후시미가 들고 온 것보다 몇 배는 풍성한, 향도 색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 촌스러운 장미꽃 다발을 들고 무나카타 레이시는 서 있었다. 여유가 넘치던 표정, 숨소리도 모두 조금식 흐트러지고 무너져서 당신은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조금은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하니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무나카타는 잠시 침묵을 이었다. 그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긴 했다. 곤란한 표정이라니,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처음 봤던 순간부터 무나카타 레이시는 결점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얼굴이었다. 말은 늘 잘 쓰여진 책의 한 구절을 읽는 것처럼 불필요한 조사도, 앞뒤 맞지 않는 부분도 없었고 생각과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언어들로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뜸들이고, 당황하고, 헛기침을 내뱉거나 의미없이 시선을 돌리는 게 신기해서 후시미는 그저 쳐다보다만 보다 입을 열었다.
"결혼식, 안 왔잖아요?"
그것은 후시미 본인도 놀랄 정도로 현실적인 말이었고 말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이 남자는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그 말에 다시 무나카타는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다 입을 연다.
"후시미 군이, 흔들리는 얼굴을 보기 싫어서 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
"아와시마 군 때문에 접근한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반쯤 노린 것도 있고 적절한 타이밍에 아와시마 군에게서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었고."
"사귄다거나, 상대를 좋아한다든가 하는 말을 '제의'라고 표현하는 게 이제야 겨우 당신답네요, 무나카타 씨."
"네. 덕분에 그 때도 혼났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과시용으로 이용당하는 건 질색이라든가. 식은, 다 끝난 뒤에 갔는데 아와시마 군은 보자마자 분명 진심을 말하지 않았을 거라고 혼냈습니다. 여자의 눈은 생각보다 날카롭더군요."
아. 그 말은 분명히 들은 기억이 있는 말이었다. 여전히 침대 한 켠에 놓여있는 소담한 부케와 같이 묻어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더군요. 후시미 군에게 부케를 안겨줬더니 퍽 잘 어울리더라고. 후시미 군은 차라리 꽃을 주며 고백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뼈 아픈 충고도 해줬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정말이네요. 결국 생각나는 게 없어서 장미만 한 다발이지만 확실히 잘 어울려요."
억지로 떠넘겨진 제 품보다 커다란 장미다발에서 달큰한 꽃내음이 훅 풍겼다. 그렇지만 이 꽃 역시 후시미 본인과 어울리는 지는 알 수 없다. 무나카타는 꽤 흡족한 얼굴로 후시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원래부터 그의 사고방식은 후시미가 가늠하긴 조금 힘든 먼 곳까지 바라보곤 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이건 또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한다. 애초에 왜 이 꽃이 후시미 본인에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무나카타의 말은 하나같이 연결고리 없이 듬성듬성 빠진 것들이었다.
"저는 후시미 군을 좋아합니다. 아주 예전부터, 지금까지. 물론 앞으로도."
"……."
"물론 이제 와서 믿지 않으리란 것도 압니다. 확실히 처음부터 잘못 꿰여져 있었죠. 그래도 그 점은 후시미 군이 감안해줘야 합니다. 저는 의외로 독점욕이 강한 남자였고 후시미 군은 늘 아와시마 군만 바라봤으니까요. 이용은, 제 쪽에서 한 겁니다. 당신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죠. 화를 내도 좋고, 때려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끝을 맺더라도 저는 확실하게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너무 오래 끌었어요. 솔직하게 처음부터 얘기하면 좋았을텐데 그 때라면 후시미 군은 아주 가차없이 절 차버렸을 테니까요. 그건 아무리 저라도 겁나더군요."
사, 라-, ㅅ ㅏ ㄹ ㅏ ㅇ, 사―랑. 아무리 읊조려도 뭉쳐지지 못하고 흩어지는 단어들을 후시미는 생각한다. 좋아한다. 사랑. 좋아합니다. 사랑. 좋아해. 사랑. 혀를 씹을 정도로 생경한 단어.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그 머나먼 거리.
"좋아해요, 후시미 군."
숨이 차오른다. 머리가 어지럽다. 꽃향기가 너무 독해서 기절해 버릴 것 같다. 사랑. 나는, 당신을, 무나카타. 그저 익숙해서, 어떻게 밀어내야 될 지 몰라서, 이름을 불러줘서, 손을 내밀어줘서 그래서―――
"저는……."
목이 메인다. 이 기분, 감정을 마땅히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입술을 열었다 닫고 마른 목을 축인다. 내밀어진 손은, 잡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