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끝으로 서류를 툭툭 찍으면서 후시미는 중얼거렸다. 신경 쓰여. 신경 쓰여. 신경 쓰인다. 아주, 많이. 내일까지 제출해야 될 보고서가 있어서 그냥 사무실에서 야근하고 돌아가겠다 했더니 집까지 끌고온 게 누군데 옆으로 꽂히는 시선에 통 집중이 되지 않는다. 방으로 들어가서 하겠다 했더니 그건 또 싫다며 억지로 침실에 끌려온 것도 모자라 누구는 집까지 끌고 와서 서류정리인데 누구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서 보고만 있다니 이건 좀, 그렇지 않나?
서류 끝을 만지작거리다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어떻게든 텍스트를 읽으며 머릿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해도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니 도통 들어오는 것이 없다. 하.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태연하게 입을 연다.
"후시미 군. 한숨 쉬면 복 날아간대요."
"이게 지금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인데요? 어디 막히는 부분이라도? 그 정도면 후시미 군의 능력으론 한 시간이면 족히 끝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확실히 오래 걸리긴 하네요."
그 말에 시계를 보면 어느 새 한 시간은 커녕, 두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거, 기한 좀 미뤄주시면 안됩니까."
"안되는데요."
"그럼 그냥 제 방에 들고 갈게요."
"그것도 안됩니다."
"아, 왜요!"
진짜 저 인간 알다가도 모르겠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일 시키고 있는 사람도, 방해하고 있는 사람도 저 사람이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되는 건지. 후시미가 버럭 볼펜을 던지면서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눈을 감으려면 무나카타는 짐짓 모르는 척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후시미 군이야말로 여기선 안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거야.
불퉁한 목소리로 거기까지 입을 열었던 후시미는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고야 말았다. 그걸,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당신 시선이 신경 쓰인다고. 노골적인 시선에 집중을 할래야 할 수조차 없다고. 머릿부터 발 끝까지 훑는 그 시선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 가끔 그런 상태의 무나카타와 눈을 마주치면 한 번 슬며시 웃어주는 그 얼굴이 너무 좋아서, 당신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때의 눈동자는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나도 넋을 놓아버리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도 그렇다. 최대한 시선은 피하고 있었지만 몇날며칠, 하루종일 붙어있으면서 눈에 새긴 그 얼굴은 숨결만으로도 표정을 상상하기가 용이했다. 입에 대는 것이라곤 씁쓸하고 엷은 말차인 주제에 따끈한 꿀차처럼 달큰하고 습윤한 표정으로 다정한 말만 해댄다. 진득하게 끝없이 흘러넘치는 그 애정이 가끔은 자신에게는 절대 오지 못할, 수취인을 잘못 찾은 택배처럼 어느 날 갑자기 원래의 주인이 빼앗아 갈 것만 같아서 후시미는 불안했다. 내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이미 익숙해졌는데 그렇게 되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
거리를 두려다가도 안되고, 마음을 다져보려고 해도 결국은 매달리게 된다. 셉터4의 실장이라든가 7명의 왕 중 하나라든가 하는 그 어떤 지위를 떠나서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그랬다.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고 시선을 둘 수 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당연히 온 세상의 모든 축복을 끌어안은 것처럼 완벽하고 높아 마주보면 눈이 아플 정도로 부시다. 그가 비록 왕이 아니더라도, 어느 뒷골목의 사창가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거지이거나 비렁뱅이이거나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든가 직장인이었다든가 하더라도 후시미는 그를 사랑했을 터였다. 그 무나카타 레이시가 후시미 사루히코에게, 후시미 사루히코가 무나카타 레이시에게 갖고 있는 그 마음의 성질과 무게를 그대로 혹은 더 많이 갖고 있다는 건 죽은 자가 소생하고 지구의 자전축이 거꾸로 돌며 시간과 공간을 역행하는 그런 기적에 가까운 것 아닐까.
당신을 내 온 힘을 다해 사랑한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흥미를 잃은 퍼즐처럼 훅 떨구고 갈까 불안하다.
후시미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얘기를 멈추면 무나카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후시미에게로 다가왔다.
"제가 자꾸 보고 있는 게 신경 쓰이나요, 후시미 군?"
"……."
"원래 일하는 남자는 더 멋있어 보인대요."
"그런 소녀같은 말은 실장에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요."
"레이시."
"실장."
"레이시."
"실… 후우. 좋아요, 레이시. 왜 나만 이름 불러야 돼요?"
"그럼 사루히코? 하지만 이름으로 부르는 건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그건…."
그것도 당신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낯간지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네네. 결국 다 제 잘못이었다. 무나카타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는 멍청한 자신이 문제다.
무나카타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에 담긴 애정의 무게가 너무 생소해서 낯설다. 당신이 그렇게 소중하게 부를 이름이 아닌데. 양 손으로 얇은 유리처럼, 작은 새처럼,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작고 연약하고 사랑스럽게 아껴가면서 부를만한 가치가 나에게는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불현듯 서럽고 무서워 후시미가 입술을 질근 깨물면 돌연 따뜻한 긴 손가락이 슬쩍 아랫입술을 누르고 바깥으로 밀어낸다.
"자꾸 입술 씹지 말아요.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합니다 사루히코. 그래도 조금은 이해해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뭘요."
당신은 변함이 없는데 나는 그 목소리가 너무 달아서 꿈일까 꿈이 아닐까를 상상하다 지레 겁먹고 도망쳤다가 다시 매달리고 이상한 꼴을 반복한다. 좀 더 솔직해지면 좋을텐데 당신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이 꿈의 끝에 어떤 냉혹함이 있을런지, 혹시 모를 것들을 가정하며 후시미는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는다.
"당신이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예쁘거든요. 셉터에서도 보고 있긴 하지만, 집에서 있으면 또 다르니까."
"……."
"누구한테 자랑하고 싶다가도 사무실에서 줄곧 이 모습을 지켜 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그럼 일을 시키지 마세요."
"그건 또 다른 얘기죠. 당신은 유능하고 필요한 인재니까.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도 좋지만 제 책상에서, 제 펜을 가지고 제 앞에서 집중하는 사루히코는 평소보다도 훨씬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또…."
"팔불출이네요."
"애인자랑이니까 별 수 없잖습니까."
짐짓 근엄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간질거린다.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법한 별사탕 같은 말을 이 남자는 우주에 있는 별보다도 더 많이 흩뿌려 가끔 후시미는 제 얼굴이 태양처럼 달아오르진 않았는지 걱정해야만 했다.
"이렇게, 숙이고 있으면 긴 머리카락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목덜미라든가."
고개를 숙여 드러난 목덜미를 슬쩍 훑고 지나간 감각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면 코 앞에서 무나카타가 웃고 있어 또 한 번 흠칫, 후시미는 얼어붙었다. 어느 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지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제대로 밀어올려 준다.
"안경이 흘러내리는 지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놀란 후시미의 눈동자가 커져 자신을 응시하는 게 겨우 만족스러웠는지 한 번 씨익 웃고는 무나카타는 말을 잇는다.
"앞머리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귀엽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매만져주면 넓어진 시야에 무나카타의 얼굴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맞닿은 얼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지만 의자의 등반이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이목구비가 또렷이 눈에 박혀 어른거린다. 나의 우주. 빛을 머금으면 진하고 선명한 보라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당신의 눈. 이 망막에 비치는 것은 나로도 괜찮은 걸까.
"모니터를 보다가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든가, 서류를 넘기는 손가락이라든가,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눈이라든가, 전부, 너무 예쁘니까요. 그런 점에선 좀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후시미의 한 손을 붙잡아 올려 그 손가락 끝에 보란듯이 입 맞추는 무나카타의 태도에 후시미의 얼굴이 기어이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술만 뻐끔거리며 숨만 내뱉는 후시미의 얼굴을 재미지게 보고 있던 무나카타는 잡고 있던 손으론 깍지를 끼고 다른 손으로는 후시미의 안경을 벗겨 얌전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절 볼 때의 당신이지만요, 사루히코."
매개체를 잃어 초점을 잡지 못한 망막에 세상이 온통 뿌옇게 흐려지지만 그럼에도 후시미는 그 눈만은 찾을 수 있었다. 내 우주. 그 광활함에 길을 잃어도 결국은 당신의 손바닥 안인 것을. 이 아름다운 어둠엔 실은 공기도 없고, 설령 있다한들 숨을 내쉬기도 전에 얼어붙을 혹한이란 것을 알아도 후시미 사루히코는 무나카타 레이시를 사랑한다.
- …….
소리가 되지 않는 말로 속삭이면 다가오던 얼굴이 얼핏 함뿍 미소를 띠는 것을 느꼈다. 닿는 것은 영하 270도의 가늠할 수 없는 혹한의 세계 대신 36.8도의 내, 사랑.
탐라의 무나후시봇이 너무 꽁냥꽁냥하고 좋아서 제가 죽었슴다.
아아 봇주님들 사랑해요 진짜ㅠㅠㅠㅠㅠ 그 발치에도 못 따라가지만 12월인지 11월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