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옆자리를 한 번 쓸어내리다 누워있던 자욱마저 말끔히 사라지고 체온조차 남지 않은 것에 화가 뻗쳐 후시미는 아예 시트를 세탁기에 쳐넣고 아침을 시작했다. 누군가 남긴 자국만을 보는 것도 싫지만 남지 않는 것도 싫다. 변덕쟁이네요 후시미군은. 무나카타가 들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하겠지만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을 부리기 전에 그냥 얌전히 아침에 같이 일어나면 안됩니까. 모처럼 솔직하게 얘기해보려고 해도 무나카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게 벌써 삼일째였다. 얼굴조차 보기 힘들고 대화조차 하지 못하면 이 모든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람. 먼저 퇴근해서 기다리고 있어도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 기어이 꾸벅꾸벅 잠들었다. 잠결에 끌어안았던 기억은 있는데 일어나니 또 혼자라니. 아주 귀신같으시네요. 소박맞은 여편네도 아니고 허참. 원래 후시미가 살던 곳보다 훨씬 넓은 무나카타의 집은 두 사람이 살기엔 딱 좋았지만 혼자 남았다면 다르다. 어제보다 날이 풀려 온화한데다 햇살까지 반짝거리는 상쾌한 아침과 반비례해 덩그러니 떨궈진 기분이 아주 바닥을 뚫고 내려간다. 혹시나 해서 단말기를 확인해도 문자나 전화도 없음. 도저히 이 집에 있을 자신이 없어 후시미는 어디든 나가기로 결심했다.
셉터4에 흐르는 정적을 몽땅 무시하고 후시미는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 아와시마조차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쏠린 것이 거추장스러워 후시미는 소리쳤다.
"뭘 봐. 사람 출근하는 거 처음 보나. 일 안해?"
"하지만 후시미 씨 오늘 비번이잖아요."
머뭇거리며 입을 연 것은 아키야마였다. 후시미 사루히코, 19살의 소년은 불행히도 친구도 없고 취미도 없고 갈 곳도 없어 결국 비번날 직장을 와버리는 아무도 하지 않을 괴이한 짓을 해버린 것이었다. 일이 산더미처럼 밀렸어도 누구를 도와주는 것도 없이 제 일만 후딱 해치우고 낼름 내빼버리는 얄미운 상사가 별 일도 없는데 출근했다면 그것은 셉터의 누구나가 품을 의문이었으나 후시미 본인도 그 사실이 짜증나는 판에 제대로 말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잊어버린 게 있어서. 한가하냐? 일 안해!"
평소보다 배는 날카로운 소리에 펑- 시간을 멈추던 마법이 풀리고 사무실엔 갑자기 오히려 평소보다 더 번잡한 소리들이 가득 찬다. 습관적으로 컴퓨터는 켰지만 딱히 할만한 건 없다. 인상을 찡그리고 무의미하게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치는 후시미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거 실장님께 보고하고 올게요."
"야, 잠깐."
살얼음장 같던 사무실이 또 경직. 막 문을 열고 나서려던 히다카의 얼굴은 눈을 굴리며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 사색이 되어 고심하는 눈치였지만 후시미는 난폭하게 히다카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질질 끌어내고 서류를 낚아챘다. 쯧, 쓸데없이 키만 커서는.
"내가 간다. 뭐야 이거 어제 들어간 거 아니었어?"
"어제 실장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무슨 잔소리가 쏟아질 지 몰라 얼어 대답하는 히다카를 내팽개치고 후시미는 사무실을 나왔다. 상태가 좋지 않다니 이건 또 무슨. 후시미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똑똑. 평소보다 빠르고 강하게 문을 두들겨도 안에서 답이 없어 후시미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장, 후시미입니다."
데스크를 향해있는 얼굴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진짜 왜 이래.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한건가.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코 앞까지 다가가도 내려간 무나카타의 고개가 들어올려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실장?"
그제야 이상한 낌새에 후시미가 입을 열면 무나카타의 고개가 느릿하게 들어 올려진다. 뉸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지 몇 번이나 눈꺼풀이 깜박거린다. 고개를 들이대고 안경 렌즈가 맞닿을 정도로 바라보고 있으면 확실히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후시미 군…?"
앞머리를 쓸어올려 손바닥을 갖다대면 확실히 뜨겁다. 나른하게 풀어진 눈동자가 멍하니 후시미를 올려다본다. 이 남자가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진 적이 있었던가. 낯선 얼굴이 귀엽긴 하지만 아픈 게 이유라면 별로다.
"후시미 군 어떻게…? 오늘 비번이잖아요?"
달뜬 소리가 간지러울 정도로 귓바퀴에 감겨들어 쌓였던 화가 어디론가 훅 사라진다. 무어라 퍼부으려던 것들이 사라져 후시미는 입술을 질근 씹다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감기기운 있던 건 나흘 전부터? 약은?"
"약은 아와시마 군이……. 그 때까진 그냥 목이 좀 아픈 정도라…."
"그런데 피해다녔어요?"
"후시미 군에게 옮기고 싶진 않으니까."
"그래서 삼일 밤을 푹 쉬지도 못하고 일부러 늦게 들어오고 일찍 나가고?"
"나머지 잠은 의무실에서 잤습니다.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나머지는 다 알고 부장한테는 약도 받아 먹으면서 나한테만? 집에 돌아와서 푹 쉬지도 모사고 오히려 숨기고 다녀야 하는 게 나 때문이라면 차라리 그냥 다시 나가는 게 좋겠네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옮으면 고생이고 신경 쓰일테니까…"
"그리고 나는 멍청하게 맘 편하게 있지도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고 말이죠. 도대체 이럴거면 뭣때문에 사귀고 뭣때문에 같이 사는 거에요?"
기분 나빠. 평소같으면 웃으면서 가볍게 후시미의 말을 받아쳤을 무나카타가 시선을 헤매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푹 가라앉은 목소리도, 느릿한 손놀림도 기분 나쁘다. 전부 후시미는 처음 보는 모습인데 다른 이들은 이걸 전부 보고 있었던데다 오히려 자신은 아픈데 쓸데없는 짐덩이만 된 셈이었다.
"이건 다음에 다시 보고드리죠.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당장 짐 뺄테니까."
어쩐지 분해서 속이 쉐이크처럼 휘저어지는 것 같다. 들고 왔던 서류를 내려놓고 뒤돌아 나가려는 후시미의 손목을 무나카타가 낚아챈다. 뜨겁다. 멍청하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말도 안하고, 아니 눈치를 못 챈 자신이 잘못이었지.
"많이 아프시면 의무반이라도 불러드릴까요, 실장."
"잘못…했습니다, 후시미 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뭘요. 실장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요. 눈치없이 남의 집에 제 집마냥 얹혀있었던 제가 문제죠."
"아니. 아닙니다. 그건, 후시미 군…의 집이고 우리 집이에요. 제가 경솔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인데 당신은 내 가족인데, 내가 오히려 후시미 군을 손님처럼 대하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후시미 군. 그러니까 가지 말아요."
말을 잇기가 버거운지 중간중간 작게 억누르는 기침 소리마저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하며 말없이 서 있으려면 뜨거운 손에 힘이 들어가 아플 지경이라 후시미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다음부턴 이러지 말아요. 남한테 짐 되고 싶진 않으니까."
"후시미 군이 짐이었던 적은 제게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 당장 퇴근해요. 나만 몰랐으면 나머지한텐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일이."
"다 낫고 퍼즐 맞출 시간에 하면 되잖아요. 죽이라도 끓여 줄테니까. 부장이 챙긴다면 팥앙금 같은 이상한 게 들어가 있을테니."
"아 그거……"
"설마 진짜 나왔습니까."
"빈 속에 약 먹으면 안 좋다고."
"멍청이."
"후시미 군?"
"빨리 가죠.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데. 자."
냉큼 팔짱 끼고 무나카타를 일으켜 세우면 머뭇거리다가도 희미하게 웃는다. 제법 낯부끄러운 짓이긴 했지만 병자를 부축하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걷고 있으면 무나카타가 달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키스하고 싶어서 죽을 거 같은데 감기 옮기면 안되겠죠?"
"나으면 실컷 해줄테니 지금은 닥치고 집에나 가요."
그러나 후시미의 이 겁없는 발언은 꽤 위험한 것이었다. 앞으로 시도때도 없이 키스를 강요받을 거란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후시미는 그저 머릿 속에서 어렴풋이 죽 만드는 법을 되새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