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에서 잠깐 리퀘받고 조각글 느낌으로 썼던 거. 이상하게 후시미는 목이 추워보이고 겨울을 닮은 거 같아요.
야타 미사키가 후시미 사루히코를 첨 봤을 때 떠오른 것은 기린이었다. 목이 긴 기린. 아니면 사슴? 아니, 사슴은 너무 귀엽잖아. 기린도 귀엽긴 귀여운데 음… 기린, 기린은 기린인데 움직이지 않는 기린. 상을 반사하고 가만히만 있는 기린. 키가 유달리 크거나 하는 건 아니었는데도 목이나 팔다리가 가늘고 길쭉길쭉하고, 하얗고 그래서 곧 부서질 것 같았다.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서늘하고 가늘게 드러난 목이 허전해 자신의 목이 추운 것만 같았다. 겨울의 서늘함을 고스란히 담아넣은 듯한 사람을 야타는 그래서 멋대로 상상했다. 감정의 기복도 없고 그저 고요하기만 하지 않을까, 하고. 그 생각은 상대의 입이 열리는 순간 와장창 부서졌지만.
"뭐야. 꼬맹이네?"
너 이새끼 죽어라!!! 발끈해서 얼굴을 한 대 치면 그 서늘한 눈동자에 무언가 불이 팍 켜졌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죽고싶을 정도로 부끄럽게 왜곡된 이미지지만 후시미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후시미 사루히코란 녀석은 절대 성격이 좋지 못하며, 좋기는 커녕 인간사 세상만사를 한 320바퀴쯤 꼬아보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녀석이었다. 감정의 기복? 그래 없기는 없었다. 대신 자기 몫까지 남의 기분을 왕창 뒤집어 놓는데는 정말 일가견이 있어서 눈, 코, 입, 얼굴에 있다는 몇 백가지의 근육이 전부 상대를 비웃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다양한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재수 없을 수 있는지 야타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각설하고, 후시미 사루히코의 얼굴은 정말 입만 다물고 있으면 괜찮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문을 열고 나온 호무라의 앞에서 후시미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워 얼어죽을 것 같아도 목까지 올라오는 건 답답하다며 절대 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남들보다 더 긴 목은 추위에 늘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 서늘한 목을 쭉 뻗고 후시미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있으려면 문득문득,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야타의 머릿 속엔 처음의 후시미가 늘 생각났다. 가늘고 길쭉길쭉하고 하얗고 얼어서 손을 대면 부서질 것 같은. 그런 후시미는 늘 비현실적으로 생소하고 정적이고 아름다웠다. 지금 만약 이름을 부르고 손을 뻗으면 순간 부서져버리지 않을까. 긴 속눈썹을 드리우는 후시미의 눈꺼풀이 몇 번이나 느릿하게 깜박이는 동안 그렇게 생각하며 야타는 바라보고만 있었다. 허공으로 내뱉은 숨이 하얗게 피어오르며 사라진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얇은 코트 밑으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다. 그러다 문득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눈이 마주쳤다.
겨울 하늘을 닮은 회색의 연한 하늘빛의 눈동자가 야타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서늘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무언가 불이 켜지고, 천천히,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그 모든 것이 야타의 눈엔 순간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소리도 감각도 모든 것이 차단되고 오로지 그 모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가늘게 접히는 눈꼬리와 살짝 그늘을 남기는 속눈썹과 얼어붙어 핏기없는 입술이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며 움직였다. 이렇게, 평소에도 제대로 웃을 줄 알면, 훨씬 아름다울텐데―――
"여, 미사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면서 후시미는 얄밉게도 냉큼 야타의 이름부터 불렀다.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매서운 바람과 따스한 햇빛과 거리의 소음이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확 느껴지는 추위에 야타는 몸을 떨면서 소리 질렀다.
"너, 이름 부르지 말랬지!"
"이름 부르면 친해진대. 그렇지, 미사키?"
"닥쳐, 사루."
아주아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까지 쓰다듬는 후시미의 손을 아주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야타는 대신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어 후시미의 목에 걸쳤다. 손을 눈높이만큼 올려야 하는 것이 짜증나 정강이를 퍽- 차면 갑작스런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며 후시미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굽혔다.
"그래그래. 그래야지, 사루."
"너임마."
확 낮아진 높이에 만족스러워하며 야타는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무채색의 옷을 입은 후시미에게 빨간 목도리는 유독 튀었지만 끝부분까지 꽉꽉 졸라매어 마무리하면 겨우 따뜻해 보였다.
"뭔데, 이거."
"한겨울에 그렇게 다니면 얼어죽어요."
발걸음을 떼며 야타는 입을 열었다. 나란히 걷고 있으면 그제서야 겨우 현실감이 든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부서지지 않는다. 꽁꽁 묶어놨으니 절대로 부서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얄미운 말만 해대면서도 야타의 옆에 있을 거라고, 야타 미사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도, 그 빨간 목도리의 잔상이 눈에 남아있는데, 여전히 후시미의 목은 희고 길고 가느다랗고.
"이름으로 부르는 거 싫어하든가?"
미- 사- 키-?
재수없는 목소리도 표정도 여전한데 주인을 잃은 목도리와 감싸줄 것 없이 드러난 그 목이 참을 수 없이 허전해서 야타는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