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빨아 섬유유연제 냄새가 배인 얇고 적당히 젖어 부드러운 새하얀 시트, 몇 개의 옷가지를 들고 옥상으로 향한다. 가을 하늘은 천고마비랬던가. 드높게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솜사탕처럼 흩어져 있는 화창한 오후. 햇살이 눈부셔 그 하늘을 바로 쳐다보기도 어려운데 이제는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흩날려 말라붙는 낙엽들이 거리를 스쳐지나가고 학교가 일찍 파한 저학년 아이들이 무어라 외치며 떠들고 가볍기만한 타닥거리는 발걸음이 해맑은 웃음과 긴 여운을 남기며 달려간다. 말랑하고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젖냄새가 나는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그 어리디 어린 아이들. 그 아이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메마른 가을의 낙엽과 얼어붙은 겨울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아이. 가리는 것도 많고, 가리는 사람도 많고, 머리는 좋지만 그 머리를 사람을 대하는 데는 영 쓸 줄 모르고 솔직하지도 못해서 뒤쫓아오지도 못했던, 머리는 이만큼 컸는데 그토록 어리던 아이는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고풍스럽기 짝이 없는 건물의 사무실 한 켠에서 습관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서류를 보고 있을까. 밥은 잘 먹을까. 입이 짧아 불퉁한 표정으로 볶음밥을 해줘도 깨작거리면서 야채를 골라 옆에 산처럼 쌓아두고서야 식사를 시작했어도 남들과 비슷하게 끝났던 이유는 위도 작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키가 크고 기아처럼 말라 비틀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먹는 것은 작았다. 대신 밥 먹기 귀찮다는 이유로 달달한 초콜릿 과자를 잔뜩 쌓아두고 햄스터처럼 야금야금 까먹어댔다. 사람이 없을 때 억지로 불러내 책이라도 읽으라고 던져주면, 오후의 고양이마냥 나른하게 누워 있던 소파 옆 테이블엔 늘 과자봉지가 뒹굴었다. 간식을 많이 먹으니까 밥을 그렇게 안 먹게 되는 거라고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에선 늘 작은 초콜릿이 몇 개씩 나오고 안나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어색하게 건네던 동그란 사탕들.
너는 지금도 그러고 있을까. 그 때보단 좀 낫겠지. 너에게 억지로 주어지는 일들, 상사와 부하같은 제대로 이름 붙여진 확실한 관계. 오히려 그것들이 이 곳에 있을 때보다 훨씬 너의 자리를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지탱해주겠지. 너는 그렇게라도 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아이니까. 하릴없이 바닥만을 보고 걷던 그 왜소한 등을 기억한다. 나는 여기서 그 등을 보고만 있었다. 부를 용기도 그 다음엔 어떻게 대해야 될 지도 몰라서. 너를 억지로 끌어들여도 너는 어떻게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가버릴 테니까.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의 벽을 끌어안아 부수고, 어느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멋지게 공주를 구해올 수는 없을 테니까.
"마, 그타고 니가 공주님이란 것도 아니지만."
머릿 속에서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너를 생각하니 우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소매 끝과 밑자락으로 드러나고 가슴 부분은 헐렁하겠지. 그리고 너는 아주 죽일 지경으로 쳐다보고 나는 배가 찢어지도록 웃다가 어쩌면 담배불에 머리카락을 그슬리거나 그러면 너는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입가를 이죽이며 비웃겠지. 아 그 얄미운 조동아리.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에 보습제라도 발라야 찢어지지 않을텐데. 억지로 찢어진 입을 벌려 피가 꽃처럼 피어나던 그 얇은 입술. 겨울이 되면 손도 입술도 전부 터버릴 텐데 크림같은 건 잘 챙겨바르려나.
무엇을 해도 너의 걱정 뿐이지만 지금은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네가 네 자리를 찾아 겨우 발을 붙이고 정을 주기 시작해도 너는 내 안에선 영원히 그런 어린 아이겠지. 만약, 네가 자리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렴. 가을의 끝자락, 겨울, 봄, 여름, 다시 가을 또 새로운 겨울. 따스한 봄, 여리고 부드러운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여름 더위에 모든 것이 녹아버려도, 가을이 바스라져 흩날려도, 겨울에 얼어붙었다가 녹아도, 이듬해, 그 이듬해가 되어도. 수많은 계절이 그렇게 반복되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점심엔 뭘 먹을까. 야채 따윈 골라낼 수도 없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린 따뜻한 스프, 매콤한 토마토 스파게티에 달달한 쇼트케이크. 커피를 내리고 거기에 시럽 세 스푼. 이 정도면 넌 맘에 들어할까. 어떤 것이라도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만들어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 많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렴. 돌아올 자리는 내 옆으로 만들어둘 테니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한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러면 내가 너무 서글퍼지니 가끔 생각나서 들른다면 좋겠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맞을거란다. 그리고 얘기해줘야지.
어서와.
사랑해.
그 때는 없었던 너의 자리를 너무 늦게 만든 나를 원망해도 좋지만 지금이라도 만들어놨으니 때리는 건 좀 살살했으면 좋겠다. 너도 그 때쯤이면 훌쩍 커버렸을 테고 더 이상 어리지도 않을테지만 오랜 헤매임 끝에 돌아올 곳이 부디 내가 만든 네 자리였으면 좋겠다.
올려다 본 하늘이 눈부셔 쿠사나기는 한 번 인상을 찡그렸다가 빈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바람결에 흰 시트가 파란 하늘 아래서 구름처럼 넘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