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야마 히모리의 방은 제 주인의 이름과는 달리 온유하다. 다 똑같은 기숙사 방의 구조가 뭐 그리 다르겠냐만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해가 잠깐 들었다가 사라지곤 하는 후시미의 방과는 달리 오랫동안 태양이 꽉 들어차는 아키야마의 방이 후시미는 좋았다.
"고양이같네요, 후시미 씨."
방의 보일러가 고장났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를 딱딱 부딪히다 찾아갔던 다음 날, 일어나서도 바닥에서 깜박깜박 졸고 있는 후시미를 보며 아키야마는 그렇게 말했다. 아, 글쎄. 평소 같았으면 질색하며 부인했겠지만 아키야마의 방에는 가 있으면 정말로 양지를 찾아 배를 깔고 누운 고양이 마냥 졸게 되니 할 말이 없어 나른하게 내려오는 눈을 감고 다시 웅크렸던 거 같다.
오늘도 그랬다. 아니, 정확히는 어제부터. 방이 춥다는 핑계로 아키야마의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노곤노곤하게 졸음만 쏟아진다. 2층 침대가 시야를 가로막는 게 싫어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정적. 나른하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애써 깜박거리며 미동조차 없이 두꺼운 책의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기는 옆모습을 바라본다.
- 재밌는 걸까, 저 책.
아키야마는 후시미 보고 늘 찡그린 표정이라며 가끔 잔소리를 하곤 했지만 후시미보다도 아키야마의 표정이 변화가 더 적다고 생각한다. 일견 온유해보이면서도 냉정하고 어느 때라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침착한 얼굴은 무나카타와는 또 다르다. 바뀐 햇빛의 방향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분명 또 깜박 잠이 들기 전보다 오랜 시간이 지났을 것이 분명한데 긴 앞머리에 가려진 눈동자는 흔들림도 없이 오로지 책장을 향해서만. 어느 날 가볍게 떨리는 손 끝을 주먹을 꽉 쥐며 고백했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심하다.
혼자가 좋아서 2인실이 기본인 기숙사 규칙까지 멋대로 바꿔가며 널찍한 방을 혼자 쓰는 후시미가 일부러 남의 룸메이트까지 내쫓고 쫓아오는 데에도 이유가 있거늘 그 이후로 아무것도 없다.
추워.
그렇게 얘기하면 아키야마는 곤란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후시미를 바라보다 살짝 한숨을 쉬고 룸메이트인 도묘지에게 사정을 설명한다. 제 세안도구 몇 가지를 들고 나온 도묘지가 후시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는 것도 지겹다. 네네, 기대에 부응하고는 싶지만 아무 일도 없네요 멍청한 인간아.
그러니까 이게 문제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
아키야마와 후시미가 사귄다는 소식은 그 날의 핫뉴스로 반나절도 채 지나기 전에 온 특무부 대원들에게 퍼졌는데 정작 아키야마와 후시미 사이에 별 다른 진전은 없다. 손이 텄다면서 핸드크림이나 발라준다고 닿았던 것이 몇 번 정도. 의외로 단단하게 박힌 손바닥의 굳은살이 인상에 남는다. 그 또한 아키야마의 성실함의 증거일 테지만 모처럼 둘이라면 그런 성실함은 버려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시시콜콜 캐물을테니 혼자 투덜거리고 있으려면 잠이 확 달아난다. 단말기로 볼 뉴스도 다 떨어졌고 후시미는 책도 없다. 아키야마의 책장에 책은 많지만 후시미와는 취향이 맞지 않는 것들 뿐. 일부러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데도 이불의 끝자락에 다리를 넣고 있는 아키야마는 미동조차 없다. 결국 후시미는 무언의 반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아키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아키야마."
작게 부른 소리에도 흐르는 것은 째깍째깍 돌아가는 벽시계의 초침소리뿐.
"아키야마."
더 크게 소리를 내보지만 무색할 정도로 태연한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이어진다.
"아키야마."
"…후시미 씨?"
결국 아키야마가 들고 있던 책을 휙 쳐내고서야 아키야마의 시선이 와닿는다. 여전히 펴놓고 있던 페이지를 꽉 쥐고 있는 꼴이 맘에 들지 않아 냉큼 뺏어 거칠게 덮어버리면 아키야마가 아… 하는 탄식을 내뱉지만 거기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다. 가볍게 벌어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후시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책 말고 날 봐."
아. 아아, 어… 아까와는 달리 당혹으로 물든 얼굴이 그제야 맘에 든다. 샐쭉하니 웃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는 후시미의 손을 아키야마가 낚아챈다. 왜. 말없이 묻는 후시미의 눈동자에 단어를 고르던 아키야마가 쓰게 웃는다.
"후시미 씨는 역시 고양이 같네요."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키스해도 돼요?"
굳은살 박힌 손바닥이 양 뺨을 감싼다. 대답따윈 필요 없잖아. 이미 가까워지는 얼굴에 후시미는 그냥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