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야마는 들뜬 목소리로 무언가 얘기를 했지만 후시미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바삭하게 깨물어지는 페스츄리의 소리가 옆에서 무어라 떠들어대는 목소리보다 더 컸다. 때로 감각은 비현실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끈적하게 입에 엉기는 젤 제형으로 굳은 딸기잼을 녹이고 부순다. 흐물흐물해지다 어느새 달큰하게 들러붙는, 점점 입 안의 내용물이 식도 뒤로 넘어가며 입 안의 소리도 조금씩, 조금씩 옅어진다. 후시미에게 모든 것은 단순한 행위에 불과하다. 딸기잼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싫은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정도.
"그래."
후시미 사루히코는 살면서 많은 방식들을 체득했다. 그는 적당히 맞장구 쳐주는 기술과 적당히 내용을 흘려듣는 기술도 배웠다. 페스츄리가 부서진다. 책상에 흩어진 얇고 바삭한 조각들을 보다가 후시미는 손바닥으로 쓸었다. 얇은 빵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낙하. 정적인 시간이었다. 나른한 오후였고 허기를 면하게 해줄 빵은 맛있었다. 끈적한 손가락을 혀로 핥는다. 후시미의 시선에는 제 손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키야마의 시선에도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2.
그는 피그말리온이다.
당신이 가진 모든 기술을 쏟아부어 이상의 상대를 만드는 꿈을 꾸는 남자. 그의 피사체는 언제나 미묘한 권태가 느껴졌다. 눈꼬리가 나비처럼 깜박인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매료되어 있었다.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부족했다. 아주 약간, 정이 닿아 깎아내거나 세련되게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부드러운 살갗, 기괴한 소리를 내며 푹, 하고 가슴이 꺼진다. 그는 잠깐 고민한다. 혹시 안도 다듬어야 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아주 신중하고 완벽한 성격이었다. 아직 소리를 갖지 못한 조각이 속삭였다. 그는 위치를 가늠하고 찔꺽거리는 정을 다시 빼내 올렸다. 망치를 들었다.
3.
발간 혀가 천천히 핥아내린다. 흥건해 뚝뚝 떨어지는 한 덩이의 타액을 보면서도 후시미는 무감했다. 키스는 녹아내린 딸기잼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엉겨붙는 끈적한 단맛. 단 한 번, 상대가 누구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후시미가 자진해서 물은 적 있다.
"사탕 먹어?"
동공이 확대된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홍채가 빛났다. 아니. 먹을까?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면서도 후시미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그의 손이 무의식 중에 주머니를 더듬는다. 네모나게 각져 튀어올라온 옷감을 보며 후시미는 그가 흡연자였음을 기억해냈다.
"아무것도 아냐."
그 날 저녁 후시미는 그의 주머니를 뒤져 한 대의 담배를 태웠다. 속이 회빛의 연기로 차올라 딱딱히 굳어버리는 와중에도 입술을 핥았다. 이 맛이 아닌데. 달작지근한 커피 맛을 느끼면서 후시미는 이대로 그에게 키스해서 제 안을 굳히고 있는 연기를 모두 그의 안으로 토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이 남자는 집요했고 잠이 깬다면 내일 출근조차 못하게 될 확률이 컸다.
후시미는 혀로 손가락을 핥았다. 담뱃진이 배인 손에서 쓴 맛이 난다.
4.
순결한 조각상은 숨을 죽이고 차갑게 굳어있다.
조각가의 키스 한 번으로 영혼이 불어넣어 질 것이다. 그는 그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면 아무리 피곤한 상태여도 갖은 희열에 들떠 며칠이고 밤을 새서 작업할 수 있었다.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손톱 밑에는 꼭 티끌만하게 거뭇한 무언가가 말라붙어 있었다.
5.
아키야마는 성실한 남자지만 성실하기 때문에 후시미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면서도 후시미는 가끔, 아주 가끔 제가 아키야마와 엮이는 꿈을 꿨다. 욕정은 아니다. 그 꿈은 몽정이 아니라 가위눌림을 가져다 주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 사회에 길들여져 있어도 때때로 생존본능에 대한 감은 정확하다. 후시미는 제가 언젠가 아키야마의 손에 죽으리라는 막연한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래. 지금같은.
"후시미 씨?"
소름이 오싹, 하고 돋았다. 돌아서던 어깨가 흠칫 굳는다. 그의 모습은 이제 푸른 제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에 몸 담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걸치고 있을 선연한 파랑을. 아키야마는 인상을 찡그려 보다 후시미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낙하.
6.
"생각해봐요, 후시미 씨. 멋지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있는 거요."
"저는 정말 아름다워서 숨이 막혀요."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꾸득꾸득한 소리를 내며 굳은 혈관들 사이로 새로운 피가 들어간다. 곧 있으면 다시 멈춘 심장이 뛰고 눈이 깜박거리겠지. 그 입술에 키스하면 흰 얼굴은 홍조로 물들고 그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후시미 씨가 그렇게 말해주셔서 저도 겨우 그럴 맘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시간을 오래 끌면 당신이 추잡해지니까."
"눈이 부셔요."
"예뻐요."
"아름다워요."
"더러운 건 다 빼고 깨끗하게 만들어요."
그는 혀로 굳은 손가락을 핥았다. 아주 천천히, 차가운 조각에 조금이라도 온기가 돌 수 있도록.
문득 한기가 돌아 아키야마는 뒤를 돌아본다. 새카만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 했으나 아키야마는 무시했다.
자, 이제.
작업은 막바지였다. 모든 것은 완벽해졌다. 숨을 불어넣으면-
7.
후시미는 키스가 딸기잼 같다고 생각했다. 엉겨붙는 끈적한 단 맛.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싫은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정도. 그런 걸로, 숨을 다시 쉴 리가 없잖아.
서른둘의 후시미가 얼마나 섹시할지 상상이 안돼서 플롯이 안 잡혔다. 쿠사나기는 철벽의 아가페를 가진 닝겐이라고 생각. 만인에게 손을 내미는 쿠사나기랑 끝내 그런 쿠사나기를 손에 넣을 수 없는 불쌍한 후시미의 헌신 같은 걸 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이것도 역시 프롤로그 정도.
"영업 끝났습니데……."
밖에 CLOSE란 문패를 걸어두는 걸 깜박했던가. 내일은 휴업이라는 문구를 분명 써붙이고 왔는데. 무심코 대꾸하다 돌아보면 보이는 얼굴에 쿠사나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본 얼굴에도, 설마 오늘 또 올 줄은 몰랐는지 혀가 입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배회하다 겨우 문장을 내뱉는다.
"…사루 아이가."
분명 방금 전까진 괜찮았던 거 같은데 밖에는 비가 오는 모양인지 제복 밑단으로 물이 뚝뚝 떨어져 고인다.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버리며 후시미는 무심하게 말한다.
"수건."
"아?"
"수건, 주세요."
하, 야야 니 맡겨놨나. 후시미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쿠사나기는 한 번 면박을 주면서도 찬장에서 수건 하나를 던져준다. 받아든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재킷 소매와 끝단을 쥐어짠 후시미는 제 자리라는 듯 쿠사나기의 앞에 앉는다.
쿠사나기가 외면할 수 없는 눈 앞에. 과시하는 것처럼.
남자가 으레 갖는 허세들을 쿠사나기도 알고 있다. 소위 17대1이라든가 하는 그런 류의 허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이는 언제나 자신이 어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정말로, 후시미는 지난 달, 막 성인이 되었다. 스무살. 날짜가 지나자마자 후시미는 기다렸다는 듯 호무라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된다고 들어서요.
11월 6일 오후 열한시 오십구분의 후시미 사루히코와 11월 7일 오전 열두시의 후시미 사루히코가 눈에 띌 정도로 차이 날 리는 없으나 지금 보면 아이는 확실하게 자랐다. 그 시절 늘 앉아있던, 조명도 그림자가 드리우는 저 구석이 아니라 처음으로 후시미는 쿠사나기의 앞에 앉았다. 눈이 마주치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쿠사나기의 시선을 피했던 그가 처음으로 쿠사나기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렇게 말했다. 한 손에 들어차게 잡히던 말랑거리던 얇은 볼살도 빠져 제법 날카로운 선이 보였고, 시선이 깊어졌다.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은 완연한 성인의 것이라 쿠사나기는 의외라 생각하면서도 선뜻 술을 내주었다.
그 뒤로 내내, 하루도 빼먹지 않고 후시미는 출근하듯 호무라에 들렀다. 이제 시선을 피하는 쪽은 쿠사나기가 되었다.
"밖에 비오나."
"조금."
근데 와 이까지 오나? 그 말을 참았다. 쿠사나기가 말하지 않아도 답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저토록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야멸차게 내칠 수도 없다. 쿠사나기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팬에 데우기 시작했다. 등 뒤로 내리꽂히는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후시미가 이토록 솔직한 인간이었나 쿠사나기는 새삼 놀란다. 아마 이 정도의 진심을 야타에게 표현했더라면 후시미는 지금의 푸른 제복이 아니라 헐렁한 후드티를 주워입고 쿠사나기의 앞에 있었겠지.
후시미는 제 안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을 몹시도 혐오했다. 자존심과 아집으로 만들어 낸 벽을 몇 겹이나 둘러싸고 저를 꽁꽁 묶어두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거 같아했다. 햇빛을 받으면 말라 바스라질 것처럼 음습한 곳에 웅크려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는 어린아이.
솔직해지는 게 어른이 되는 방법이라면, 후시미에겐 그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자. 오늘은 늦었으니께 이기만 먹고 후딱 돌아가라."
"늦었으니까 자고 가면 안돼요?"
쿠사나기 씨 집.
노골적인 욕망의 표현 또한 후시미 나름의 '성인'식 표현이라고 봐도 좋을까.
"저 내일 휴가에요."
"……."
"잔업하고 온 거에요 지금까지."
"……."
"기숙사에도 안 돌아간다고 얘기했고, 이거, 도망 못치면 진짜로 한 달 내내 일할 기세니까……."
안경을 벗고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다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퍽 피곤해 보이긴 했다. 그리고 아주 영악했다. 손 쓸 수 없이 교활하고 영악하다.
"니, 내가 여기서 된다카면 어카고 안된다 카면 어케 할 생각이었는데?"
"……."
"된다 카면, 된다 캐도, 사루야."
"……그랬으면 처음부터 내쫓았어야죠."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리고 지친 목소리로 후시미가 입을 연다. 도드라진 손마디가 이제는 제법 쿠사나기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어제도 느꼈다. 휘이 손을 내젓는 것만으로도 툭 떨어지던 가는 손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악력으로 쿠사나기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좋아해요.
당돌한 고백이었다. 쿠사나기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후시미는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취한 거 아니에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루야. 쿠사나기가 작게 부르면 후시미는 조금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알아요. 알아. 알아……. 내내 꽂히는 노골적인 시선을 쿠사나기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미리 내치지 못한 것은 쿠사나기의 연민이었다. 그것을 내심 눈치채고 있었는지 후시미는 긴 침묵 후에 한참이나 잡고 있던 손을 내려두고는 돌아갔다.
"오늘 내내 생각해봤어요."
"당신은 왜 알면서도 날 받아줬을까."
"내심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당신은, 당신은 이제 아무데도 기댈 곳이 없고."
"사실은 당신이 기대고 있었잖아요, 쿠사나기 씨. 당신이 없으면 굶어죽을 거 같은 미코토 씨를, 힘이 있어도 제멋대로 날뛰다가 죽었을 애새끼들, 어딘가로 끌려갈 지 모르는 안나. 사실은 당신이 기대고 있던거잖아요."
솔직해지는 것이, 후시미의 어른이 되는 방식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취소다. 그냥 아픈 부분을 찌르고 있을 뿐이었다. 제멋대로 화풀이하면서 날뛰는 여전히 애였다. 쿠사나기의 안쪽에 잘 갈무리해두었던 것들을 후시미는 가감없이 짓밟고 있었다.
"당신의 왕국은 이제 폐허밖에 없어요. 어디에도 안 남았어. 이 빈 시체같은 가게를……."
"후시미."
쿠사나기가 후시미의 말을 자르면 후시미가 흑, 하고 숨을 내뱉었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는 기이한 소리였다.
"거봐. 당신, 내가 오니까 즐거웠죠?"
당신은 누구라도 돌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데, 당신이 필요한 내가 와서. 그렇지? 그렇죠? 그래놓고도 내가 불쌍했겠지. 그랬겠지. 당신이 제일 불쌍한 주제에.
답을 묻는 물음이 아니었다. 이미 확신이었고 실로 그러했다. 손을 내린 얼굴에서 후시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쿠사나기는 갑자기 몹시 지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잊고있던 왕국의 잔해가 쿠사나기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알았다. 그렇다카자. 그니까 고만하고 가라 사루야."
"근데요, 쿠사나기 씨."
마. 작작 좀 하지. 이제는 조금, 성질이 날 지경이었다. 이제 겨우 성인이 돼서, 어른 흉내나 내고 있는 새파란 애새끼한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도 크나큰 상처였다. 내쫓을 요량으로 손을 휘휘 저어도 후시미는 마지막까지 온전하게 그를 깔아눕힐 심산인지 말을 잇는다.
최후의 일격. 턱 밑으로 들어온 카운터 펀치였다. 쿠사나기가 화를 참지 못하고 앉아있는 후시미의 멱살을 잡으면 후시미가 웃고 있었다. 고개를 내리 깔고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바 안에 경쾌하게 울렸다. 거봐. 거봐요. 내가 뭐랬어.
"오늘은 제 호의에요, 쿠사나기 씨. 당신이 아니라 내가. 내가 당신을 위로하는 거야."
천천히, 힘이 빠진 쿠사나기의 손을 후시미가 찬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펼친다.
"누구라도 필요하잖아요, 쿠사나기 씨. 최후의 기념일인데. 그죠?"
다 펼쳐 떨어져내린 쿠사나기의 손을 후시미는 꽉 쥐었다. 어른이 되어도 흔들리는 건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배였다.
스오우 미코토가 죽은 밤, 새벽 네시.
"당신은 가끔… 쿠사나기 씨……."
사람은 누구나 선함이 있다고 믿으며 선량하여 악의가 없다고 믿으며 당신의 선함이 나를 구원하였다가도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도.
"사루……."
당신의 선(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나는.
남자는 지친 얼굴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말라 고목처럼 굽어있던 아이가 그 이상 자랄 줄 몰랐는데 또 컸다. 키는 미코토와 비슷하려나. 미코토보다는 말랐지만 지금보다 살도 좀 붙었다. 선이 굵어진 얼굴이 주황색 전등 밑에서 깊게 음영을 드리웠다. 한숨조차 꾸역꾸역 집어삼키는 남자를 보며 쿠사나기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사루야……."
그 눈동자가 그토록 깊은지 미처 몰랐다. 언제나 한 곳만을 불퉁하게 쳐다보던 아이의 눈이 언제부터 이토록 깊었었나. 제가 알던 후시미 사루히코라고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얘기였다. 앞으로 손가락을 전부 펴고 다시 두 개나 더한 시간이 지난 후의 후시미는 이런 어른이 된다. 더 무겁고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가장 완벽한 방어는 침묵이라는 걸 알아낸 것처럼 모든 것을 차단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꽉 메였다. 깃털처럼 가벼워 어디에도 자력으로는 제자리에 있지 못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쿠사나기는 한사코 타인의 자리에 있었다. 지나간 시간만큼 무거워졌는데도 여전히 어딘가 엷은 맛이 있는 후시미가 쿠사나기는 그 어느 때보다 불편했다. 죄의 증거를 들이미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마세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는 달리 달그락- 하고 내려놓은 잔에선 얼음이 경쾌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진득하게 피로가 묻어난 얼굴이 쿠사나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차라리 아예 알아보지 못해서, 너무 많이 달라져서 아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면 나으련만 달라진 외형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후시미의 편린이 문득문득 보였다.
"얘기했죠, 쿠사나기 씨는 너무 착하다고."
가늘게 눈을 뜨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얼굴에 쿠사나기는 눈을 깜박,했다. 뇌리를 선명하게 스치는 기억은 바로 그저께의 것이었다.
'쿠사나기 씨는 쓸모없을 정도로 착해요.'
"봐요, 지금도."
서늘하고 비참한 미소 역시 어제와 같았다. 다만 눈만이 울 것 처럼 이지러지지 않았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쿠사나기는 정말로 후시미가 컸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될 지, 아니면 이토록 클 때까지 아직도 자신에게 연연하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직 믿지도 못하면서 동정하고 있잖아요."
역시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후시미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아이는 한숨마저 꾸역꾸역 갈무리하는 어른이 되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쌩양아치 집단 - 후시미가 보기에 호무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의 간부치고 쿠사나기는 제법 고급스런 취향의 소유자였다. 해외에서 공수해 온 바의 테이블이나 인테리어부터 어디 장인이 만들었다는 글라스, 몇 년산 와인, 어느 바를 가도 보기 드물다는 제법 비싼 술들까지. 그 중에서도 후시미에게 가장 쓸모 있는 건 원두였다. 술도 커피도 담배랑 잘 어울리니 그만이라며 쿠사나기는 가게에 커피메이커와 괜찮은 수준으로 로스팅 된 원두를 항시 구비해뒀다. 호무라의 멤버들 중 커피나 차 같은 것에 관심을 둘 사람은 토츠카 말고는 없었으니 그 원두의 1/3은 후시미의 차지였다. 부모는 후시미에겐 관심도 없었고 후시미도 그들을 가족이라 칭할 때 애틋한 마음이라곤 1g도 없는 콩가루 집안이었으나 돈만은 썩어나게 많았다. 덕분에 어영부영 제법 고급스런 안목과 입맛을 갖추게 된 후시미는 오늘도 쿠사나기의 원두를 알뜰하게 소비하는 중이었다.
먹을만큼의 원두를 핸드밀로 갈고 필터를 깐 뒤에 커피메이커로 내리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한 시간 동안 바 호무라는 완전히 후시미의 차지였다. 타타라와 안나는 놀러갔고 쿠사나기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또 누군가와 싸우러 우르르 몰려나갔기 때문이었다.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이게 뭐냐 싶으면서도 후시미는 나름 이 고독이 만족스러웠다. 꺼림칙한 장소인 것 치고 바 호무라 자체는 아늑했으니 겉으로 보기엔 별 특색도 없는 가게에 단골이 많은 것도 이해가 간다.
머그컵 하나에 막 커피를 붓고있는 찰나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쁜 짓 하다 걸린 애처럼 후시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후시미가 아는 한 이 바의 2층에서 내려올 사람은 안나 아니면 스오우 미코토 뿐이었다. 안나가 아까 토츠카와 나가는 걸 확인했으니 남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 설마――.
호무라 멤버들 전원이 어색했지만 그 중에서도 스오우 미코토는 다른 이와 비교할 바가 못됐다. 스오우와 단 둘이 있는 상황 따위 후시미는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여전히 커피의 고소한 냄새가 감도는 평화로운 가게였으나 스오우가 내려온 것만으로 후시미는 갑자기 북극의 빙하 한가운데 던져진 것만 같았다. 관짝 안에 누워 흙더미 밑에 파묻혀 있어도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터였다.
"미코토 씨도… 드릴까요."
"커피?"
"네."
마주친 시선을 회피하기 위하여 후시미는 재빨리 커피포트를 들었으나 후시미는 뭐든지 혼자인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여분의 커피 따위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포트를 둔 후시미의 손으로 가만히 스오우의 시선이 닿는다. 막 잠에서 깬 스오우의 얼굴은 평소보다 백 배는 더 험악했다. 뒤 쪽의 풍경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포트를 후시미는 그제야 깨달았다.
"새로 할게요."
"어린 녀석이 커피 마셔봤자 좋을 게 없을텐데."
"안 어린데요."
"어려."
"안 어립니다."
"키 안큰다."
"그런 말은 미사키한테 해주시죠."
어리다는 말에 괜시리 날 선 후시미가 발끈하며 일어서는 것을 스오우는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대로 바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주전자에 물을 받고 가스렌지에 올리는 걸 보니 알아서 뭐라도 마실 생각인 모양이었다. 낯선 침묵이 감돈다. 후시미는 괜시리 커피를 홀짝이면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오늘의 기사, 시덥잖은 커뮤니티, 미사키와 자주 보는 만화의 오늘자 업데이트 분량……. 미국의 컨퍼런스에서 뜬 새로운 개발자 툴은 관심 가질만한 대상이었다. 체크. 오늘자 만화도 미사키가 오면 보여줘야 되니 체크. 새로 살 만화책이랑 다른 책도 체크. 스크롤을 죽죽 내리면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후시미는 손을 뻗었다. 여전히 따뜻한 머그잔의 손잡이를 들고 호르륵 입 안에 넣으면 커피와는 명백히 다른 단 맛이 입 안을 가득채웠다.
삼키지도 못한 채 잔의 내용물을 바라보면 부드러운 크림갈색이 김을 뿜고 있었다.
"뭐…에요…?"
고개를 들고 스오우를 바라보면 스오우는 말없이 통을 들어 보인다. COCOA 100%. 핫초코다. 스오우는 후시미가 마시던 커피를 마신다.
"이리 주세요."
"어린애는 핫초코나 마셔라."
"어린애 아니라구요. 이리 주시라니까요."
"어른이 되고 싶어?"
"전 어른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럼 마셔."
"개인의 기호와는 아무 상관 없는데요."
"다 마셨다."
제법 식긴 했어도 한 번에 마시긴 뜨거웠을텐데 스오우는 용케 꿀꺽꿀꺽 마시더니 빈 컵을 뒤집어보였다. 아. 저렇게 마실 바엔 커피가 아깝다. 정말 맘에 안드네. 후시미가 암만 인상을 찌푸리고 노려봐봤자 껄끄러운 건 후시미 쪽이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 나른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스오우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후시미는 쯧, 혀를 차고는 다시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후시미."
"왜요."
"피터팬이라도 되고 싶은거냐."
"아뇨."
"어린애도 싫고 어른도 별로 안 좋아하면서?"
"그냥…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겁니다."
"책임?"
"책임도 못지면서 어른이라고 버팅기는 사람들 따윈 질색이에요."
"재밌는 얘길 하는군."
후시미 딴에는 대단한 결심이었으나 스오우는 한껏 얕잡아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안되는데, 순간의 이성이 후시미를 붙잡았으나 질풍노도의 시기란 그런 거다. 갈무리되지 않은 날것이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나오는 시기.
"미코토 씨도 그렇잖아요."
스오우의 얼굴이 호오? 이것봐라? 같은 표정으로 변했을 때는 이미 말은 밖으로 나간 뒤였다. 하얗게 질려 그대로 얼어버린 후시미를 보고서 스오우는 사납게 웃었다.
"계속해보지?"
"아니 그……."
"요컨대 내가 책임감 없는 어른이라 이건가?"
너무 놀라 딸꾹질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 애꿎은 핫초코만 꿀꺽꿀꺽 삼키면 너무 뜨거워서 입천장을 홀랑 데고 말았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모르던 후시미가 간신히 목 뒤로 핫초코를 넘긴다. 앞이 캄캄할 정도로 한심한 몰골이었다.
"말해 봐, 후시미. 내가 한심하다고?"
"그… 그러니까……."
"궁금하잖아."
"……."
이유는, 설령 야타가 눈 앞에 있어도 후시미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스오우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며, 나머지 호무라 멤버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깐 채 버티는 후시미의 뒷통수에 따뜻한 손이 닿는다. 힘껏 부벼대는 손길에 머리카락에서 정전기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어린애는 핫초코나 마셔라."
"……."
"커피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면 마시고."
그렇게 말하고 스오우는 걸음을 옮긴다.
"어, 어디 가요 미코토 씨."
현관의 종이 울리는 소리에 후시미가 고개를 들어 물으면 스오우는 가볍게 담배갑을 흔들더니 닫히는 문 뒤로 사라진다. 커피랑 핫초코가 어른이랑 애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툴툴거리면서도 후시미는 차마 버릴 순 없어 핫초코를 마셨다. 호무라는 이제 텅 비어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어딘가로 쏙 빠져나간 것처럼 공허한 공기였다. 항상 사람으로 복작거리던 호무라에 쓸쓸함이 감돈다는 건 이상하다. 아까는 분명히 편안했는데. 갑자기 스미는 한기에 후시미는 머그잔을 꽉 쥐었다. 낯설지만 예언같은 감각이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당신은 언젠가 호무라를 이처럼 폐허로 만들 사람이라고. 당신 하나만 믿고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내팽개칠 텐데.
다모클레스의 검이 떨어지면 대지의 모든 것이 절멸한다고 한다. 위성으로 봐도 푹 들어가 있는 저 카구츠 크레이터처럼. 스오우의 다모클레스의 검은 눈이 멀 정도로 화려했으나 한계가 없는 것처럼 타들어가고 있었다. 추락하는 검이 아찔할 정도로 선명하다. 스오우의 검은 언젠가 떨어질 것이다. 당신 하나만 믿고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스오우는 그 검이 머리 위에 떨어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원고를 너무 안해서 비축분이란 게 생긴다면 연재하는 느낌으로 중간까지는 샘플 겸 원고하고 충분히 퇴고하고 다듬을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뒤로 나올 무나후시랑 시리즈인듯 아닌듯한 느낌이 될 거 같습니다. 원고 예정은 지난번에 펑크난 무나후시까지 포함해서 세 권+재록에 시간이 남는다면 플러스 알파? 재록에는 지금까지 후시미 오른쪽 책 전부+무나후시 혹은 아키후시 단편 한 두개 정도를 추가할 예정인데 어떻게 될 지.... 마지막이니까 다 쏟아부을 수 있음 좋겠다 :Q.....
비가 후득후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결에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몸이 무거워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지, 잠결에 모호했으나 아까보다 더 거세진 빗소리 사이에서 이불이 한 번 훌렁 움직이고 눅눅한 비내음 섞인 찬바람이 종아리께를 스쳤을 때에야 야타는 간신히 눈을 떴다.
“봐, 미사키.”
야타가 눈을 부비며 일어났을 때 후시미는 창 앞에 서 있었다. 가는 빗방울들이 툭툭 튀어 얼굴에서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눈썹에 맺힌 것을 후시미가 손등으로 한번 쓱 훔쳐내다가 멈칫했다. 흰 손등에 묻은 물방울이 시커메서 간간이 아주 작은 검은 알갱이들이 그 안을 맴돌았다.
야, 가서 얼굴 씻고 와.
네 얼굴이나 보고 말하지 그래, 미사키.
후시미의 얼굴이 그 꼴이니 야타도 그리 깨끗한 몰골은 아닐 게 분명했다. 꽤나 깔끔 떠는 후시미가 곧 씻으러 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후시미는 비 맞은 그대로 줄줄 흐르는 검댕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하염없이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봐봐, 미사키. 후시미는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야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씻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와서 엎어졌으니 어둠이 겨우 가신 회색 하늘 밑에서도 바닥은 엉망이었다.
알게 뭐냐. 이 집의 주인은 이미 그저께 이사 갔다. 철거가 한창인 동네엔 주인 잃은 빈집이 많았고 이내 길 잃은 아이들의 안식처가 되곤 했다. 빈 맥주캔, 아무데나 비벼 꺼 눌어붙은 자국이 얼룩덜룩한 벽지와 널부러져 한 움큼 쌓여있는 담배꽁초들, 찢겨진 비닐봉지, 심심찮게 말라붙은 핏자국과 간혹 바람에 담뱃재와 흰 가루들이 흩날리기도 했다. 이런 날씨엔 저 멀리서 이 동네를 보면 동네가 있는 줄도 모르지 않을까. 온통 똑같은 잿빛으로 동화돼서 어디로 스러질지 모르는 곳.
훅 들이친 바람 속에 은근슬쩍 매캐한 탄내가 섞여갔다. 야타는 거뭇거뭇한 제 얼굴을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가 수도가 끊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젠장. 사루! 여기 수도 끊겼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도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후시미가 움직였다. 모르는 집을 두리번거리다가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야타의 손목을 낚아챘다.
“나가자.”
야타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후시미는 야타를 질질 끌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후시미의 손바닥이 어느 새 제 팔목을 쥐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아귀가 억세졌다고 감탄할 새도 없었다. 아까보다 더 거세진 빗줄기에 순식간에 머리부터 흠뻑 젖어들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뭐 어때, 미사키. 끝인데!”
“뭐가?”
쏴아아아- 하면서 쏟아지는 비에 번쩍이는 하늘에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천둥소리까지 후시미의 소리가 너무 작았다. 흠뻑 젖은 얼굴로 마주보고 있노라면 후시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끝이라고! 끝! 끝이야!
뭐가 끝인지도 모르겠는데 자꾸만 후시미는 끝이라고 말한다. 줄줄 흐르는 빗물을 아무리 닦아도 눈이 흐렸다. 후시미는 고개를 치켜들고 세수하듯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야타도 허공에 대고 어푸어푸 세수를 했다. 박박 검댕이 묻어나오지 않을 때까지 손으로 문질렀다. 흰 티에도 검댕이 묻어 있어 내친김에 야타는 티도 벗었다. 어차피 빨아야 했다. 속옷은 어쩌지. 야타는 허공에 대고 낄낄대는 후시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야! 좀 있다 비 그치면 우리 집 가자!
후시미가 눈을 꿈벅거리다가 좋아! 하고 크게 대답한다. 좋아! 좋아, 미사키. 좋아! 후시미가 방방 뛰는 걸 뭐가 그리 즐거워서 저러나 하고 생각하다 야타는 후시미가 한 번도 제 집에 온 적이 없음을 상기한다. 뿐만 아니라 후시미는 어디에도 가 본 적 없었다. ‘낯선 장소에’ ‘둘만이’ ‘존재해서’ ‘큰 소리로’ 대화해 본 것조차 처음이었다. 후시미가 벗어나지 못했던 거리는 낮에는 침묵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공간에 속한 모든 물질이 소리를 빼앗긴 것 같은 동네였다. 밤새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사람들은 하루치의 말소리를 소진한 것 마냥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후시미는 지난 새벽 막 빠져나왔다.
거기까지 상기하고 나니 야타는 후시미가 말하는 ‘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좀 굵게 여물면 유년의 종말, 인생의 전환점, 영겁 같은 굴레로부터의 해방 등 그럴듯한 수식어로 치장된 이름 하나쯤 붙일 수 있겠으나 당시엔 그냥 끝이었다. 그냥, 후시미는 이제 나랑 같이 계속 놀 수 있겠구나 하는 순진무구한 생각만이 그 뒤로 희미하게 떠올랐다.
매캐한 탄내와 검댕을 빼고 소실은 완벽했다. 잿더미가 되지 않은 건 후시미 뿐이었다. 온 동네를 붉게 물들였던 화염은 이젠 한 가닥도 남지 않았다.
사루.
야타는 멍하니 아까 후시미가 창 너머로 보던 곳을 바라보았다. 후시미를 못살게 굴었던 흰 싸구려 샌들의 아가씨도, 야타를 보면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면서 ‘어린 애는 이런 데 오면 안되지’ 하고 사탕이나 내밀던 아줌마도,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늘상 주눅 들어 있었던 그 누나도 전부 재가――.
욱―.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신물을 야타는 웩웩거리며 그대로 뱉어냈다. 깜짝 놀란 후시미가 숙인 야타의 등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묻는다. 야, 왜 그래? 아까 연기 마셨어? 속 이상해? 머리 아파? 미사키, 괜찮아?
번쩍, 천둥이 비친 그 순간에 숙인 채로 마주 본 후시미의 얼굴은 태연했다. 괜찮아? 그건 야타가 후시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야타는 후시미가 무서운 건지 불쌍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해가 떴을 시각인데도 주변은 여전히 구름 때문에 흐렸다. 그 사이에서도 후시미의 얼굴은 하얗기만 하다. 핏기가 쑥 빠진 얼굴로 후시미는 야타의 손을 꽉 잡았다.
비가 그치면 가자.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후시미가 눈을 한 번 깜박 하니 눈가에 맺힌 물방울이 데굴데굴 흘러 뺨 사이에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게 눈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야타는 후시미의 손을 맞잡았다. 울지 않으면 그건 후시미가 이상한 거였다. 그리고 야타는. 선량한 야타 미사키는 자신의 친구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길 바랐다.
제 아무리 총탄과 화약, 전자기기와 현대 과학기술을 모두 동원한 살상도구가 있다 하더라도 원초적인 날붙이를 무시할 순 없다. 셉터 4의 무장이 어째서 긴 샤벨인지는 모른다. 단순히 전통적인 고아함을 좋아하는 무나카타 레이시의 취향이라기엔 그 이전부터도 셉터4의 상징은 언제나 긴 샤벨이었다. 푸른 검집에 양각으로 새겨진 금빛 무늬, 두터운 손잡이와 대비되는 예리한 칼날,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왕의 신하들만이 발할 수 있는 푸른 빛이다. 시대에 뒤떨어 졌다고 평할 수도 있으나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무기다. 적과의 적당한 거리, 직접적인 타격, 효율적인 방어, 시가전에서는 오히려 총이 더 불리하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들의 무기가 검인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다만 셉터 4의 모든 인원들은 모두 특수한 분야에서 왕이 직접 선별해 데려오고, 출신이 제각각인 이들 중엔 칼은 다뤄보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왕의 힘과 검술을 적당히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어렵다고 흔히들 얘기한다.
반대로 칼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온 사람도 있는데, 자위대 출신인 아키야마 히모리와 벤자이 유지로는 검도와 유도가 훈련에 있었고 카모 류호는 전직 요리사 출신으로 검은 아니더라도 칼을 다루는 데는 분명하게 자질이 있다.
그렇다면 후시미 사루히코는 뭘까.
중등교육만을 겨우 마치고 제복을 입은 그, 그 소년은 길고 푸른 샤벨을 받기 전에도 예리한 칼날을 다룰 줄 알았다. 칼잡이 후시미. 호무라의 성가신 꼬맹이 2인조 중 한 명. 촌스러운 네이밍에 후시미는 듣고 코웃음 한 번 치고 말았으나 그가 검을 제 수족처럼 잘 다루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긴 샤벨을 왼쪽에 차고서도 또한 양 손과 허리에 길이 25cm의 단검을 일곱개. 소맷단과 허리 뒤 쪽에 숨기고 다니는 그는 아마 왕의 병사들 중 가장 날붙이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굳이 검이 아니라 날붙이라 칭하는 이유는 명명백백하게 검술에선 아와시마의 실력이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검이라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는 모든 종류의 날붙이를 잘 다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셉터 4의 전투 대원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이 방침이다. 사무실이 있는 본관에서 200m 거리. 2인 1실이 기본, 이층침대와 두 개의 책상, 의자, 책장, 옷장이 구비되어 있으나 아쉽게도 욕실은 없다. 공용 세면장과 목욕탕을 사용해야 하므로 때때로 훈련이 끝난 직후에는 어떻게든 자리를 확보해 무사히 씻고 싶은 이들의 각축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침에는 소대별로 시간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수라장은 찾아볼 수 없으나 다들 막 자다 일어난 얼굴임은 분명하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에 번듯한 제복, 왁스로 세우거나 웨이브를 살리거나 차분하게 빗질을 해둔 낮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모두 초췌한 모습으로 양치질을 하는 아침의 세면장은 전투대원들의 푸른 제복을 보며 꺅꺅거리는 서무과 젊은 아가씨들의 환상을 깨기 적합하다.
"아…… 어제 너무 마신 거 같은데."
"괜찮아?"
"토할 것 같습니다 아키야마 씨."
"히다카는 어제 먼저 들어갔잖아?"
"그 전까지 달렸잖아요. 해장…해장을 하고 싶어요…. 카모 씨 오늘 간식은 느글거리지 않는 걸로 부탁해요….¨
"왜 내가 당연하게 간식을 만들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앗, 나는 도너츠! 설탕시럽이 녹아 내린 도너츠가 먹고 싶어!"
"말만 들어도 느글거려."
"기름 둥둥 뜬 돈코츠 라멘! 돈까스! 생크림이 잔뜩 올라 간 케이크!"
"그만둬! 올라올 것 같다고!"
"개구리 눈알! 원숭이 뇌! 산 채로 왁스 밑에서 뻐끔거리는 시체! 질척질척! 끈적끈적! 지난주에 본 호러영화! 토미에! 소용돌이!"
"으욱…!"
말은 안해도 모두가 조금씩 숙취에 시달리는 동안 히다카를 맘껏 조롱할 수 있는 건 미성년자 방어권으로 오렌지 쥬스만 마신 도묘지 뿐이다. 기어이 한계에 달했는지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을 팽개치고 뛰어 간 히다카가 그 난리통 속에서 누군가의 어깨를 스친 것이 문제였다.
"아."
히다카의 욱욱거림을 빼고 세면장 내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낄낄대느라 정신없던 도묘지마저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미묘하게 비껴난 뒷편으로 못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뒤도는 순간, 기어이 이 아침의 세면장에는 초췌한 우울 대신 싸늘한 공포만이 감돌게 되었다.
"아프잖아…요."
정중함이 가끔 더 무섭다는 사실을 안다. 제복을 입고서는 온갖 비난을 서슴지 아니하는 후시미는 사석에서는 존댓말을 쓰곤 했다.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예의를 귀엽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 차마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이 날아올까 무서워 아무도 입조차 열지 않는 사이 칫, 하는 습관적인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손등이 목덜미를 훑는다. 하얀 거품 밑, 물기에 엷게 번져가는 것. 모두 입에 문 치약 거품만큼 하얗게 질려 고색창연한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누군가 중얼거렸다.
"피……."
그것이 칫솔을 떨어뜨린 후세였는가 조용히 고개를 돌린 고토였나 안경을 벗어 상황도 모르는 채로 같이 굳어버린 에노모토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자로 빨간 실선이 그어진 목에서 조용히 흘러내리는 것이 중요했다.
자라나는 성장기의 청소년에게 면도란 필시 어려운 일이다. 하룻밤만 지새도 턱 밑이 까슬해지는 카모조차 안전장치가 부착된 5중 면도날을 사용하건만 일주일에 겨우 한 번이나 할까말까한 후시미 사루히코가 애용하는 것은 구식 면도칼이다. 이제는 풍물시장에서나 팔 법한 구시대의 유물. 나무손잡이에 접이식, 예리한 칼날이 고스란히 드러난 면도칼은 다루기도 까다로워 다치기 일쑤건만 후시미는 그 또한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희고 긴 목을 거울에 드러내고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칼날로 상처가 나지 않게 긁어낸다. 단순히 손에 칼을 쥐고 위아래로 표면을 훑어내는 것 뿐인데도 묘하게 엄숙해지는 행위를 히다카는 최악의 형태로 방해해버렸다.
"어쩐지."
후시미도 손등에 묻은 피를 확인했는지 거울을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조용히 내뱉는 말이 꽤 아프긴 했던 모양이다.
"구경났어요?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여전히 굳어 후시미를 쳐다보는 일동에게 후시미는 눈짓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르켰다.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화들짝 놀라 떨어뜨린 칫솔을 다시 입에 무는 분주함이 다시 공동세면장을 소란스럽게 하는 사이 아키야마는 후시미에게 물었다.
"왜 그걸로 면도하세요?"
"왜요?"
"그냥…. 요즘은 아무도 그런 거 안 쓰잖아요. 위험하기도 하고."
무심코 아키야마의 손이 목덜미로 향하는 것을 쳐내고 후시미는 왼쪽 뺨을 훑었다. 슥-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면도날이 왼뺨에 묻어있던 거품들을 덜어낸다. 거울로 맨질맨질한 표면을 확인한 후시미가 물에 칼을 씻는다.
"…그 녀석."
울리는 물소리에 후시미의 목소리가 묻혔다. 아키야마가 멀뚱하게 쳐다보면 후시미는 거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니키."
"니키?"
"아침에 면도할 때마다 툭 쳐서 어떻게 안될까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내 목에다 들이대더라고…요."
젖어서 내려 온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요모조모 뜯어보던 후시미가 히죽 웃는다. "칼잡이 후시미." 후시미가 거울로 눈동자만 굴려 아키야마를 바라본다.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후시미의 얼굴은 경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촌스러운 것까지 딱이네. 칼잡이 후시미."
아키야마의 어리둥절한 표정은 뒤로 한채, 씹어뱉듯이 말한 후시미는 딱소리가 나게 칼을 접고는 세면도구들을 챙겨 나갔다.
파리한 표정으로 칸막이에서 나온 히다카 아키라가 영문 모르는 채로, 그 날 오후 극심한 격무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차치하도록 한다. 방에 돌아가서도 피가 멎지 않았는지 당일에는 거즈를 덧대고, 이후 약 3일간은 무심하게 목을 매만지다가도 따끔거림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던 후시미의 모습에 특무부는 지레 겁을 먹고 안전장치가 부착된 면도칼을 선물했다.
그럼에도 후시미 사루히코는 면도할 때마다 오래된 면도칼을 사용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후시미 사루히코의 과시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위협적인 모습이긴 했다. 길고 예리한 칼로 얇은 살갗 위를 도려내는 것은. 후시미는 그 말도 얼추 맞는다고 생각한다. 보여줄 대상은 정해져 있다. 거울 속에서 제 목에 칼날을 들이대는 얼굴을 본다. 히죽거리면서 '사루히코―'라고 친근한 척 이름을 속삭이던 얼굴에게.
그리고 아키야마 히모리는 그 경멸스런 표정과 짓씹던 목소리를 잊지 못해서 간혹 면도하는 후시미를 바라보곤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 뺨과 아직은 선이 무딘 턱, 가느다란 목을 칼날로 훑어내는 후시미는 사람을 침묵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분히 내리깔고 거울을 응시하는 눈은 때때로 흔들렸으나 멸시와 증오보다는 오히려…….
이런 저런 일이 있다 해도 후시미 사루히코가 셉터4에서 가장 날붙이를 잘 다루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칼잡이 후시미'라는 촌스러운 변명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그러나 최근 아키야마 히모리는 그 별명을 들을 때마다 다른 이름을 생각한다.
후시미, 니키.
이를 악물고 꾹꾹 짓이긴 그 이름을 아키야마는 후시미의 눈동자에서 보고, 그의 목에 들이댄 칼을 쥐고 있는 것은 다른 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