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어느 노래의 제목처럼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죽이고야 말았던. 오랫동안 굶주려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오직 시야에는 한 마리의 먹이만을 담은 채 숨을 죽이고 죽여 조심스럽고 진중하게, 그리고 마침내 숨통을 쥐어뜯은 남자.
이름은 ――――――――――――.
유독 피곤했다. 이 지겨운 작업에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고 긴장을 풀 수 없는 작업이 힘이 들었다. 바로 내일이 마감인데도 일은 조금도 진척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하고 있는데 노력이 부족한걸까. 찐득한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드러누워 습관적으로 TV를 켠 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듯 빳빳하게 몸을 곧추세울 수 밖에 없었다.
명멸하는 TV 화면 너머로 당신이 보였다.
당신은 나보다 조금 작고 손은 나보다 조금 컸다. 가끔 쓰는 안경은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럭저럭 인기는 좋았고 고지식하거나 혹은 순진한 면이 있어 한 때가 영원인 것 마냥 행동했다. 내가 근 10년 동안 그의 얼굴은 커녕 그림자조차 본 적이 없는데도 순식간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무언가를 움켜쥔 듯 주먹을 꽉 쥔 그 손에 끼워진 반지 때문이었다.
그럴듯한 말을 준비했지만 잊어버렸다고 쑥스럽게 웃으며 건네주었던 상자 속의 물건 - 그 상자는 지금 가방 안에 있다 -. 책만 읽는 고루한 남자인지라 늘 곱상했던 손은 예전과는 달리 마디가 불거지고 살갗이 거칠게 일어나 있었고,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이 늘 그렇듯 그 얼굴의 피부색 조차 피치지 않았는데도 나는 당신의 얼굴 윤곽, 눈썹의 위치, 미간의 깊이나 입술의 희미한 선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 선명한 기억에 화들짝 놀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화면을 응시한다. 족히 몇 년은 보지 않은 얼굴이 왜 갑자기 화면 너머, 그것도 카메라의 시선조차 냉정한 뉴스에 나왔는지 도무지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다. 볼륨을 키우면 낭랑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역시 제3자의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기울일 수록 점점 현실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둘 곳 없는 시선이 배회하다 마지막 작업을 위해 밀어놨던 테이블 한 켠으로 아직 뜯지 않은 봉투들을 본다.
두툼한 서류봉투와 그 위에 얹힌 작은 아이보리색 봉투. 둘 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쓰여있지 않았지만 거스러미가 잔뜩 인 서류봉투와는 달리 한눈에도 재질이 좋아보이는 아이보리색 종이봉투 위엔 금박으로 부드러운 필기체의 영단어가 쓰여져 있었다.
Wedding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 봉투는 제 역할을 충실히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목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대는 심장을 밀어넣으며 다시 시선을 옮겨 달력의 날짜를 확인한다. 조심스럽게 초조한 마음으로 이 봉투를 건네받은 날로부터 숫자를 하나하나 헤아린다. 천천히. 눈으로 헤아리다, 입으로 세고, 그러고도 모자라 벽에 걸려있던 달력을 낚아챈 다음 손가락으로 꾹꾹 짚어도 분명히 내일이었다. 열어보지 않아도 확실한 당신의 결혼식은.
나와 그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어린 연인들이 그러하듯 우리의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세간에서 인정받기도 힘든 동성 커플이라면 더 그랬다. 누군가는 염원이라던 CC커플이라던가, 뭐 그런 류의 레이블이 붙긴 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손가락 하나 스치는 것 조차 조심스러웠고 그는 누구에게나 상냥했고 웃는 얼굴은 누구에게나 다정했다. 그에게선 숨쉬듯 사랑한다는 말이 흘러넘쳤는데 그것은 실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그 진중한 남자에게 농은 없다는 사실을 안다.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 무게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태어날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나는 선천적으로 땅에 발을 딛고 살아있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가 서있는 곳은 언제나 기묘한 자기장이 있어 항시 떠있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평한 중력은 어쩌면 나에겐 통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내 생은 언제나 부유했다.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아무도 나를 잡을 것이 없어 나는 술래잡기를 하면 끝까지 술래에게 잡히지 않았고 그리하여 잊혀졌다.
나를 잡기에 당신의 말은 항시 부족했다. 항시.
당신의 무게는 어쩌면 늘 무거워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으나 나는 그 가벼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실로 오랫동안 생각했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못할 짓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신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Diamonds are forever. 나란히 앉아 당신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로 영화를 보며 그러나 나는 결심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을.
영원토록 부유할 나를 잡아줄 당신이 필요했다.
그대로 뿌리박힌 나무처럼 부유하는 나를 얽어맬 수 있는 당신이.
신부가 신혼여행을 맞이해 새로 산 윤이 나는 붉은 에나멜 트렁크에 조각조각 난 채 몸을 뉘여졌다는 사실은 확실히 금요일 저녁 9시 뉴스의 메인을 장식할 만한 희대의 치정극이었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며 원망스런 표정으로 그와 제일 친했던 선배는 나에게 불퉁하게 청첩장을 던졌다. 내가 그와 연인관계였다는 사실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나와 완전히 연락을 끊었고 그도 마찬가지라 나는 처음 그에게 온 전화를 광고성 전화라고 생각했다. 줄곧 무시하던 전화를 받은 이유는 단지 일이 바빠 액정 위에 뜬 번호를 확인하지 못한 채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받아."
"싫은데요."
"오란 소리 아냐."
"그럼요?"
그는 당시에도 나를 그리 탐탁찮게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내가 그와 헤어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곱상한 얼굴에 맞지 않게 얼굴을 후려쳤던 그의 친구이기도 했다. 제법 무서운 주먹에 비틀거리며 주저 앉을 정도였다.
"겨우 맘 잡았어. 너 때문에 근 10년 방황하다가 겨우."
글쎄. 내가 보기엔 그 매끄러운 봉투는 허울좋은 가식 같았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노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내 손 안에서 끝이 구깃해진 봉투를 보며 그는 묘한 쾌감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악의는 당신과 헤어진 이후부터 응당 각오한 것들 중 하나였으나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은 의외였다.
"그래요……."
시선을 회피하며 나는 대답했다. 그런 나를 무어라 생각했는지 그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시야 끝으로 변하지 않은 그의 가지런한 단발머리를 보며 나는 날짜를 헤아렸다.
당신은 나에게 말했다.
- 후시미 씨는 의외로 섬세하네요.
다정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섬세해? 눈을 껌벅거리며 되물으면 네, 하고 몇 번을 들어도 쑥스러운 존댓말로 답했다. 예의 바른 태도를 평생 잊지 않았던 남자가 거칠게 말했던 것은 이별을 고한 그 날 뿐일 것이다.
- 그리고 의외로 끈기도 있어요.
그건 나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당신의 눈은 예리했다. 내가 하는 일에는 무엇보다도 섬세함과 끈기가 필요했으니까. 풉, 하고 어느 순간 터진 웃음은 멈추질 않아 킥킥대는 소리에서 이윽고 폭소로 바뀌었다. 당신이 그토록 펴지 않으려 했던 주먹 안에서 나온 이미 검갈색으로 말라붙은 피투성이의 반지가 클로즈업 되고 화면이 넘어간다. 아나운서는 다음 뉴스를 읊는다.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헉헉대며 배를 움켜쥐었다. 배가 바짝 땡기고 눈물이 고일 정도로 정신 없이 웃음이 튀어나와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뱃가죽이 찢길 정도로 아파와 흐읍 숨을 깊게 들이쉬며 어떻게든 진정해 보려고 노력했다.
끄윽, 하고 우는 소리인지 웃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가 미처 억누르지 못한 잇새로 흘러나온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아 파들거리는 팔로 나는 손을 뻗어 청첩장 밑의 서류 봉투를 집어들었다.
미리 말해두건데, 나는 결코 나르시스트, 자의식 과잉도 아니다. 백 보 양보해서 비록 오랜 시간이 만들어 낸 나의 착각이라 해도 길 지나가는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열이면 열, 사진 속의 그녀와 내가 닮았다고 말할 것이었다.
당연하지.
고르고 고른 사람인데.
의뢰한 심부름센터에서 보내준 인물 중에서도 다시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골랐다. 나는 그녀에게 꽤나 거금을 쥐어줘야 했고 며칠이나 걸쳐 내 습관이나 성격을 설명해야 했다. 연기자 지망이라던 그녀는 이내 곧잘 나를 따라할 수 있었다. 당신을 그토록 아꼈던 그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던 것은 그녀가 나를 닮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당신은 나를 사랑하니까, 당연히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았지만 사실은 몹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근 10년이나 걸린 일이 겨우 끝이 났다. 당신이 나를 잊지 않았음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이제 명백하게 증명된 사실이었다.
Diamonds are forever.
당신과 영원히 있고 싶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실로 오랫동안 생각했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못할 짓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을.
영원토록 부유할 나를 잡아줄 당신이 필요했다.
그대로 뿌리박힌 나무처럼 부유하는 나를 얽어맬 수 있는 당신이. 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 대신 나는 내 흔적을 무수히 흩뿌려 놓았다. 지속적으로 내 사진을 익명으로 당신에게 보냈고 우리가 그렇고 그랬다는 사실을 모르는 동기들을 통해 내 소식이 전해지도록 만들었다.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나에게 연락하지는 않았다. 나를 닮은 여자를 당신의 눈 앞에 밀어넣은 것은 최후의 도박이었다.
"죽일 줄은 몰랐지만."
끄윽, 끅, 끄으으윽, 하고 내 안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무엇일까.
그녀는 나를 닮았으나 나는 아니었다. 어떤 사고방식을 거쳤을 지는 모르나 내가 오늘 그녀에게 상자 속의 물건을 건네준 것이 틀림없이 방아쇠 역할을 했으리라. 나는 당신의 얼굴을 그리며 눈을 감는다. 그르렁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울림이 더욱 더 크게 들린다. 이제 전부 끝났다. 당신의 무게가 겨우 알맞게 무거워졌다. 부유하는 나를 얽매기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살인은 출소하는데 몇 년이나 걸릴까. 당신은 성실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니 가석방으로 금방 나올 것이다. 검찰에 기소되면 재판 일자부터 찾아보자. 당신은 내가 사랑한다 말하면 쑥스러워 고개를 돌리곤 했다. 날 보면 당신은 고개를 돌리겠지. 사랑한다고 읊조릴 터였다. 매일매일. 당신을 찾아가 사랑한다고.
아키야마.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여전히 기이한 끅끅거림이었다.
오늘 밤 내가 얘기한 것은 어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 유명한 어느 노래의 제목처럼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죽이고야 말았던. 오랫동안 굶주려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오직 시야에는 한 마리의 먹이만을 담은 채 숨을 죽이고 죽여 조심스럽고 진중하게, 그리고 마침내 숨통을 쥐어뜯은 남자.
확실히,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상관이야 없지만서도 이 자세는 불편하다. 마무리 된 일을 보고하러 왔더니 무나카타가 이리 오라는 식으로 손짓해 아무 생각없이 다가간 게 화근이었다. 그대로 꽉 끌어안겨서 강제로 제 무릎 위에 앉히더니 끌어안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남의 무릎 위에 앉는다는 게 편하지만은 않은 데다 꽉 끌어안고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편하게 등을 기댈 수도 없고 몸에서 힘을 뺄 수도 없다. 기절한 사람이 평소보다 더 무거운 것처럼 편하게 앉아버렸다간 무나카타는 후시미의 무게를 온 몸으로 느낄 터였다.
고개를 목덜미에 파묻어 목에 닿는 머리카락과 말을 할 때마다 내뱉는 숨이 간지러워 자꾸만 뒤척이면 팔에 들어간 힘이 강해져 결국 아까보다 더 깊이 품으로 파묻히고 만다. 강하게 끌어안은 품의 단단함을 느끼며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포기한 후시미는 다른 방법으로 무나카타를 회유해 보기로 했다.
"계속 그 상태로 있으면 다리 저릴 텐데."
"후시미 군이 다리가 저릴 정도로 무거워지면 좋겠다는 게 제 소망입니다만."
"지금도 충분히 무거운데요."
"아니. 너무 가볍습니다. 어깨가 딱딱해요. 전혀 푹신푹신하진 않네요."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말한 무나카타가 이마로 꾹꾹 후시미의 어깨를 눌러댄다.
"목베개라도 사다드릴까요."
"아뇨."
"그럼 쿠션?"
"필요없습니다. 후시미 군이 따뜻해요."
"담요라든가."
"제가 안고 싶은 건 후시미 군이에요. 자꾸 뒤척이지 말고 그냥 보고하세요, 후시미 군. 계속 시간 끌었다간 후시미 군이 안겨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보고를 한다고 해도 사람이 경청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거지.
속으로 투덜거려 보지만 무나카타에겐 통할 리가 없다. 손에 든 패드와 서류를 번갈아 들면서 후시미는 나즈막히 보고를 시작했다.
"먼저 정보반에서의 보고입니다. 지난주 도내 범죄 리스트 중 스트레인의 행각으로 의심되는 것이 3건, 동일인물로 추정, 현재 추적 중이며 신상 확보는 내일까지 될 것 같습니다. 절도 수준입니다만 상대의 능력은 시각을 비틀어 보여주는 것 같고……."
"……."
"특무부에의 권한까진 필요 없을 것 같으며……."
"……."
"…듣고 계십니까?"
"듣고…있어요…."
"그럼 다음으로 지난주 특무부 활동내역에 대해서…."
월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양은 제법 많았다. 무미건조하게 보고를 읊어대던 후시미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입을 열었다.
"이상입니다. 이제 놔주시죠 실장."
"……."
"실장?"
칼 같이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거늘 집무실 안에 떠도는 것은 후시미의 공허한 메아리 뿐이다. 최대한 흔들림 없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비틀면 무나카타는 여전히 후시미의 어깨에 이마를 얹은 채다.
"실장?"
"……."
"주무십니까?"
"……."
"…레이시?"
"……."
침묵.
정말로 자는 모양이다. 그 무나카타 레이시가 낮잠이라니. 이 남자에게도 월요병 같은 게 있는 걸까. 일어나자니 무나카타의 팔은 여전히 후시미를 끌어안은 채고 깨우자니 미안함이 몰려온다. 그러고보니 평소라면 탁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보고를 듣고 있을 무나카타가 후시미에게 응석 - 별로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 맞는 단어는 그것 뿐이었다 - 을 부린 것부터가 피곤하다는 반증일 지도 모른다.
보고를 할 때까지만 해도 인지하지 못했으나 의식한 이상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 부자유스러워 후시미는 눈만 꿈벅거리며 하릴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에는 햇살이 눈부시고 중후한 느낌의 나무로 된 벽이 손때를 타 부드러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책상에는 이번주의 최신 잡지. 아마 낱말퍼즐 때문이겠지. 몇 개의 서류와 자주 쓰는 검푸른 색의 만년필. 후시미는 그 만년필을 잡고 글을 쓸 때의 무나카타를 좋아했다. 대부분은 전자기기로 처리하지만 아주 드물게 무나카타가 펜을 잡을 때가 있었다. 유려한 손놀림과 그 끝에서 나오는 조금은 각진, 제 주인을 닮았다 싶은 딱딱하지만 획의 끝이 올라간 글자의 잉크가 가만히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모든 것이 중후하고 묵직한 공간에서 책상 위에 있는 척 봐도 조잡한 플라스틱 인형은 후시미가 길을 가다 산 것이었다. 하늘빛의 고양이 인형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게 무나카타를 닮았다 생각해서 산 것이었으나 이 사무적이고 모든 것이 주인을 닮아 우아한 공간에 있는 것이 이질적이어서 부끄러웠다. 저런 건 그냥 치워버리지. 바둥거리며 손을 뻗어보지만 도저히 닿지 않아 후시미는 포기하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책상의 서랍은 세 개. 그 안에 뭐가 들었는 지는 모르지만 가끔 두 번째 칸에선 사탕이나 화과자 같은 게 나오곤 했다. 세 번째 서랍에는 퍼즐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후시미가 보면 전혀 답이 없는, 질리도록 새파란 색만 가득한 퍼즐을 무나카타는 망설임 없이 맞추곤 했다. 첫 번째 서랍엔 후시미가 그렇듯이 몇 가지 사무용품이 있지 않을까.
천장 구석의 먼지라도 잡아낼 것처럼 주변을 둘러봐도 무나카타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시계바늘이 섬세하고 촘촘하게 음각된 시계를 본다. 11시 42분. 들어온 지 족히 30분은 된 듯 하다. 후시미의 빈 자리를 땡땡이로 오해한 아와시마의 따가운 눈초리와 무미건조한 잔소리가 눈에 보이듯 훤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후시미는 결국 조심스럽게 다른 쪽 팔을 들어 무나카타를 흔들어 깨웠다.
"실장."
"……."
"실장."
"……."
"레이시 씨."
다른 쪽 손으로 끌어안은 무나카타의 손을 포개쥐면 그제서야 조금 잠에 잠긴 노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후시…미 군?"
꽤 깊이 잠들었던 모양인지 잠에 눌러붙은 눈꺼풀을 뻑뻑하게 떼어내며 흐린 초점을 잡는 모습이 신선할 지경이다. 흘러내린 안경을 올려주며 후시미는 입을 열었다.
"점심 먹으러 가죠."
"보고는?"
"끝낸 지 15분은 된 것 같은데요. 설마 안 들으셨습니까."
"아……."
후시미가 흘끗 시계를 곁눈질하면 무나카타가 낭패한 얼굴로 자그마하게 탄식한다. 제가 이 상태로 잠들었다는 것 조차 맘에 들지 않는지 보기 드물게 인상을 찡그려 후시미는 속으로 웃으며 다시 한 번 제의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다른 일을 하기에도 뭣하고 일찌감치 점심이라도 먹고 남는 점심 시간에 쉬는 편이 무나카타에게도 좋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점심이나 먹으러 가죠."
"아직 점심시간은 아닙니다만."
"15분 먼저 간다고 누가 뭐라 하진 않아요."
"구내식당이 문을 안 열었습니다."
"밖으로 먹으러 가요."
"그건… 드문 제의네요."
"실장이 그만큼 드문 걸 보게 해줘서 말이죠. 그 전에 보고 끝나면 이거 풀어주신다더니."
쿡쿡 포개쥔 손가락으로 무나카타의 손등을 찌르면 제가 후시미를 그토록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눈을 깜박거리다 살짝 풀어진 팔에 힘을 넣는다.
"실장? 풀어주셔야죠?"
"레이시."
"아니, 그건…."
"아까는 불러줬잖아요 사루히코."
"…레이시."
"그래도 안 풀어줄 겁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이러고 있죠. 그리고 후시미 군 말대로 밖에 나가서 점심 먹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아니, 그건 제가 싫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부 점심 먹겠다고 일어나는 시간에 실장과 단 둘이 외출이라니. 등 뒤로 느껴진 따가운 눈초리들이 빤해 후시미는 무나카타를 보챘다.
"지금 먹으러 가요. 배고픈데."
"거짓말."
"진짜인데."
"남들한테 보이기 싫은 거잖아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하면 소심하게 꽁해져 며칠은 후시미를 달달 볶아댈테니 - 보통 무나카타는 이럴 때 평균 3일의 야근을 후시미에게 강권했다 - 후시미는 한숨을 푹 내쉬고 한 가지 제안을 내밀었다.
"지금 점심 먹으러 가면 디저트 줄게요."
"사탕은 6살짜리한테나 통하는 수법인데?"
"그런 거 말고."
"그럼? 점심 먹고 차라도 한 잔 드실겁니까?"
"아, 그건 절대 싫고. 그것보다 더 좋은 거."
정좌에 약한 후시미가 질색을 하는 얼굴을 보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무나카타가 어린 연인을 내려다보면 가볍게, 햇살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뺨에 내려앉는다.
스오우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들은 것은 나즈막한, 탄식이라곤 눈꼽만큼도 섞여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무나카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탄내 나."
"본인이 태우셨으니 이 정도는 감당하셔야죠."
방 안에 감도는 매캐한 탄내는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눈에 익은 광경이기도 했다. 제어를 모르고 멋대로 날뛰는 불꽃에 처음엔 눈살을 찌푸렸던 무나카타도 익숙해졌는지 까맣게 탄 부스러기들을 발로 쭉 밀어내고는 어느 새 다시 가지런히 챙겨입은 제복을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청구서는 호무라 앞으로 달아놓고 가죠."
"그럴 돈 없는데."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싸구려 여관이니 보상비도 얼마 안 나올겁니다."
"어이, 무나카타. 이런 데일수록 더 악독하게 뜯어먹어."
"제 알 바 아닙니다."
"얘가 이유없이 이러진 않았겠지."
스오우는, 그러니까 깨어있을 때도 주변이라곤 요만큼도 신경쓰지 않으니 잠들어 있을 때라고 잠귀가 좋을 리도 없었다. 길거리 한복판이라도 피곤한 상태라면 엎어져 잘 수 있는 무신경한 사람이고 거기에 대해 불만을 가져 본 적도 없었지만 그를 선택한 불꽃은 그게 퍽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간간히 스오우가 잠자고 있을 때 과민한 반응으로 이런 사고를 치곤 했다.
손 끝으로 불꽃을 피워 무나카타의 앞에 슬몃 들이대면 무나카타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더니 반문한다.
"아무거나 신경질적으로 태워대는 불꽃을 가진 게 자랑이십니까?"
"세기 조절은 잘 안돼도 방향은 제대로 잡는 애라."
머리맡에 올려뒀던 담배를 꺼내 물고 한 대 권유하면 무나카타는 고개를 저어 거절한다. 시시한 이유다. 출근하기 전이니 담배냄새가 배는 건 싫다는 그런. 무나카타는 제 몸에 다른 사람의 어떤 흔적이 남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안경에 지문, 제복에 달라붙은 싸구려 시트의 실먼지, 진득한 담배냄새, 그 어떤 정사의 흔적도. 서로를 완벽하게 거절하는 정사가 어떻게 성사되는 지는 스오우 미코토에게도 의문이었으나 어떻게든 굴러가긴 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적당히 스케쥴을 맞춰서 장소를 바꿔가면서 만나는. 이상한 술래잡기 같기도 하고 둘만의 밀회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극과 극으로 갈려있다고 생각해도 확실히 맞는 부분은 있었다.
담뱃재를 털며 뻐근한 어깨에 손을 올려 주무르면 따끔한 통증이 목덜미에서 느껴진다. 손으로 더듬어 보면 거친 피부에 쓸려 욱씬거리는 화끈함이 훅 하고 몰려온다. 손가락에 묻어나는 찐득함은 엷게 흘러나온 뭉그러진 핏줄기의 흔적이었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무나카타를 응시하면 무나카타가 제법 맘에 든다는 얼굴로 웃으며 스오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글쎄요. 당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어서 숨통을 끊어줄까 하는 생각은 했지."
"…하?"
"그래서 물어뜯었습니다. 포유류긴 하나 육식동물은 아니라 맛은 없어서 그만뒀지만. 무방비하더군요. 제대로 드러난 약점 중 하나인데."
"너답지 않군."
"어느 쪽이?"
"너라면 좀 더 깔끔한 방법일 줄 알았는데."
"때 되면 그렇게 하겠죠. 어차피 제가 사자나 호랑이도 아니고 진짜로 목덜미를 물어뜯는다고 죽을 리가 없잖습니까. 다만 그 쯤 되면 정신차릴까, 하고."
"방향은 잘못되지 않았어."
"압니다. 세기를 조절하지 못할 뿐이지. 그 조절을 왜 제가 해야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겠죠."
"안해도 돼."
다모클레스의 검이 내려앉으면 일어나는 폭발,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이변을 막겠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관계가 이어질 리는 없었다. 허리에 단정하게 걸려있는 푸른 검이 언젠가 때가 되면 어련히 자신을 관통하지 않을까, 스오우는 무나카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검을 닮은 남자는, 아니 검이 남자를 닮은 건지 모르겠지만 무나카타 레이시는 잘 벼려진 그의 샤벨과 꼭 닮았다. 그렇다면 어련히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자신을 끝장내 버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지지부진한, 의미없는 관계는 어째서 지속되는 걸까.
"스오우. 불행히도, 저는 당신이 죽기를 원하진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제외하면 그저 당신도 평범한 사람이죠. 저는 아무 원한도 없는 사람이 죽는 것을 염원하는, 악의에 가득 차서 세상을 비뚤게 쳐다보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런 것 말고."
"……?"
"너에게서도 모든 것을 제외해 봐."
"그 쪽은 상상력이 떨어져서 못하겠는데. 이만 가보겠습니다. 슬슬 해도 뜰 것 같고 출근하기 전에 집에 들러야 되거든요."
무나카타 레이시의 머리는 참 좋은데 단점은 그 머리를 백퍼 활용해서 아주 빙빙 돌려 말한다는 뜻이었다. 다 핀 담뱃재를 재떨이에 지져누르고 욱씬거리는 목덜미를 붙잡으며 스오우는 돌아서는 무나카타의 손목을 낚아채 들어올렸다. 제아무리 꽁꽁 싸맸어도 자연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긴 팔의 끝, 희게 드러난 손목엔 푸르고 보랏빛인 핏줄이 가지처럼 뻗어 맥을 잇고 있었다. 뼈의 모양이 슬쩍 드러난 손목의 모양이 새삼스레 신기한 것을 보는 듯 하여 잠시 멈칫했지만 스오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콰득, 송곳니로 힘껏 찍어 누르면 살갗이 찢겨 붉은 피가 고여 들어온다. 슬쩍 시선을 올려다보면 통증 이전에 황당함이 뒤섞인 눈동자가 스오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은 표정이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무나카타 레이시의 철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은 언제나 괜찮은 낙이었다.
"…뭐하는 짓입니까?
"손목도 무방비한 약점 중 하나니까."
"압니다. 그래서?"
"너도 죽지 말라고, 무나카타."
간단히 말하며 입에 고인 피를 뱉을까 어쩔까 고민하다 삼켜버리면 남자는 질색하는 눈으로 쳐다보고는 쾅- 문을 닫고 나간다.
쓸데없는 짓이란 걸 안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스오우 미코토의 생각만큼 약하지 않고, 스오우 미코토는 무나카타 레이시의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 약점이 보이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시야 안에서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 머리 좋은 무나카타가 그걸 모를 리 없는데.
"거친 배려구만."
잠시 잊고 있던 화끈거림에 손바닥을 갖다대며 스오우도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다. 통증은 금새 사라지겠지만 빨리 아물기를 원치는 않았다. 그 목덜미를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무나카타 레이시의 앞에서만 이었고, 무나카타 레이시의 손목이 드러나는 것도 오로지 스오우 미코토의 앞에서만 이었다.
창밖의 날씨는 그리 좋지는 않다. 파도가 아우성치고 빗줄기가 거세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나가지만 않는다면야 밖의 날씨가 무슨 영향을 미칠까. 비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혹은 옆에서 옆으로 내린다. 이미 중력의 영향이 소실된 지 오래인 그 비에게 과연 ‘내린다’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은 옳은가?
사소한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나 그는 무시하기로 한다. 세상의 상식은 늘 그래왔듯 아무 의미가 없다. 대신 그는 조금 더 집중해서 눈앞의 갇혀진 정경을 본다. 가로 72cm, 세로 49cm. 책상을 가득 메운 크기는 아무리 그라고 해도 부담스러웠지만 그 정도다. 닳지 않은 2000개의 조각은 끼워 넣기가 조금 뻑뻑하다. 손때라도 묻을까 조심스럽게 그는 또 다시 한 조각을 맞춰 넣는다. 꼭 맞아 떨어지는 조각들 사이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점점 그 세력을 넓혀가는 순백의 파도에 책상 위의 것들이 조금씩 밀려난다.
누군가에게 혼나기 딱 좋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면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지러진 문이 갑자기 사방 귀퉁이를 확 잡아당긴 것처럼 펴지고는 열린다.
“…실장, 일 좀 하시죠.”
아닌 게 아니라 제법 험상궂은 인상이다.
인상일 것이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그렇게 추측한다. 가정인 이유는 사실 표정까지 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그림일기 마냥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그려진 얼굴은 무나카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굵은 선으로 그려진 얼굴에서 표정까지 읽으라니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판단을 대신 해주는 것은 언제나 경험이다.
무나카타는 그를 이질적인 촉감의 사포 같다고 생각한다. 척 봐도 거칠어 보이는 겉면이지만 만져보면 상상 이상으로 부드럽다. 그렇지만 역시 사포이기 때문에 세게 문지르면 살갗이 전부 찢어질 것이다. 몇 겹으로 뒤덮인 피부의 몇 층이 벗겨진다. 아프겠지. 그럴 것이다. 제멋대로 일어난 얇은 살껍질과 벌겋게 드러난 여린 속살과 보이지 않는 모세혈관들에서 동그랗게 올라올 핏방울의 모양도 무나카타는 또렷이 그릴 수 있다. 아프겠지만 아마 별 거 아닌 그것.
결국 위협은 되지 못하는 그런 것.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 무나카타 레이시는 혼자 웃는다. 탕- 인지 쾅- 인지, 종이뭉치들이 마찰되는 소리가 뒤섞여 내리쳐진다. 소리들은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쌓여있지만 그 층은 전부 분리되어 있다. 그가 얼굴을 들이밀면 그제야 사람의 형상이 된다. 아아. 얼마나 그리운 감각인지. 언제부터 세상은 이렇게 낯설고 낯선 게 되어버린 걸까.
“이번엔 몇 조각입니까?”
“2000개요.”
“지난번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신 겁니까?”
후시미 사루히코는 분명 지난주에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 질릴 정도로 새하얀 작은 조각들이 책상 위에 서류 대신 널부러져 있는 걸 쓸어버릴까 말까 고민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거늘 그새 다 맞추고 이번엔 2000개란다. A4용지 한 장도 올릴 공간이 없는 책상을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보다 그냥 그 퍼즐 위에 얹어놓는다.
“제 할 일은 다 했으니 이번엔 실장 차례에요. 결재.”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당장, 하세요.”
동작을 재촉하는 부사에 강한 악센트가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하며 무나카타는 쓴웃음 짓지만 후시미는 그가 기어이 그 퍼즐을 다 맞추고 나서야 종이 위의 활자들을 훑어볼 것을 안다. 무의미한 입씨름은 저만 골치 아플 뿐이라 후시미는 성의 없는 목례 뒤 집무실을 나갔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 그는 다시 크레파스의 추상화가 된다. 오그라들어 있던 문이 다시 활짝 펴지고 다시 입을 꽉 다문다.
*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똑, 또옥, 똑, 투둑. 한밤중,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씩 힘겹게 새어나오는 울림소리.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하얀 마감재의 천장의 이음매 사이로 조금씩 고인 물이 이윽고 떨어진다. 툭, 하고 얼굴에 튄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쓸어 혀에 찍어본다.
짜디 짠 소금맛이 났다.
*
“바다?”
“안 보입니까?”
“……. …미쳤군.”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대답조차 의외라고 생각하며 무나카타는 새파란 연기가 너울져 올라가는 것을 본다. 아름답다. 인어를 닮아있다고 늘 생각한다. 폐 안을 한 바퀴 휘감아 다시 밖으로 빠져나오는 무형(無形)의 인어는 재처럼 새하얗게 변해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무나카타는 물고기를 삼킨 것처럼 제 가슴에서 심장 대신 팔딱팔딱 뛰는 인어를 느낀다. 단순히 혈관이 좁아져 심장이 더 빨리 뛴다고는 알고 있지만 가끔은 감상적인 생각도 좋지 않은가.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는 무나카타에게서 시선을 떼고 스오우 미코토는 느릿하게 재떨이에 담뱃재를 비벼 끈다. 충분히 적셔진 티슈에 치익하는 단말마와 함께 인어는 생을 다한다. 아쉬운 탄식이 소리 없이 흘러나온다. 가끔 스오우는 무나카타 레이시란 존재는 정말 미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오늘도 그렇다.
“네 집무실에서 바다가 보일 리가 있나.”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건물에서 일하는 주제에 바다가 보인다니. 그럴 리가 있나. 그럼에도, 그렇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스오우는 한 번 밖을 바라본다. 폐점시각이 가까워 오는 새벽 두 시의 바(Bar)에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한 두 팀 정도. 캄캄한 밤에 광원이라곤 나트륨의 가로등 뿐이다.
바다. 그런 게 보일 리 없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일 지도 모른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별로 낙담한 기색은 아니다.
“하긴.”
다들 제정신은 아니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스오우가 보는 폐허 대신 무나카타는 바다를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스오우는 어디까지나 꿈에서라는 게 무나카타가 보기보다 미쳐있다는 증거라고 스오우는 판단한다.
스오우가 시선을 무나카타에게로 돌리면 그의 입에도 어느 새 한 대 물려 있다. 새파란 연기가 너울져 올라가는 것을 본다. 후우, 하는 깊은 날숨에 방향 없이 분사되는 하얀 연막과 함께 푸르스름한 연기의 형체가 사라진다.
“스오우 저는.”
재를 툭툭 내리치면서 무나카타는 입을 연다.
“바다가 내리는 걸 봅니다.”
다시 입에 물고 필터를 깊게 빨아들인다. 인어가 춤을 춘다. 팔딱팔딱 대면서 온 몸을 휘젓는다. 꺄륵거리면서 인어는 천장 위의 뒤집어진 바다로 풍덩 빠져든다. 물방울이 튀었다. 입에 대지 않아도 짜디 짠 소금물일 것을 안다. 바다는 늘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검은 겨울 같은데 어째서 제 머리 위에는 바다가 있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물론, 무나카타 레이시의 세계는 언젠가부터 늘상 추상과 초월의 화상(畵像)이었으므로 이제 와 무언가에 의문을 가질 여력은 없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머리 위의 바다가 세상의 섭리에 따라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생각한다. 크레파스는 밀랍 같은 걸로 만들어지니 번지지는 않을테지. 스오우 미코토는, 흘긋, 무나카타는 곁눈질하여 자신과는 다른 성질을 가진 남자를 본다. 그는 언제나 탄화된 어떤 것이었다. 검게 탄 굵은 입자는 4절지의 거친 표면을 온전히 메우지 못한다. 목탄화는 번지던가? 미술은 그의 취미가 아니다. 온갖 재료의 질감이 몽땅 뒤섞였지만 결국 현실은 되지 못하는 풍경은 대체 어떤 사조에 들어간단 말인가.
탄식.
반경 30cm 내에서만 입체감을 갖는 기이한 세계. 점멸하던 뜨거운 덩어리가 꺼진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인어를 죽였다.
*
다듬어지지 않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그는 빈자리를 끊임없이 채워간다. 아무런 때도 타지 않은 새하얀 풍경이 하나씩 완성된다. 그 위에 무엇이 그려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만지지 않으면 어떤 질감일 지도 알 수 없다. 시각에 의존하는 일은 오래 전에 포기한 일이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시각적 정보를 최우선 순위로 받아들인다. 희디 흰 하얀 직사각형의 물체는 부드럽고 매끈한 펄프지일 수도 있고 거친 재생지일 수도 있고 주름이 있을 수도 있고 구겨진 자국이 있을 수도 있으나 눈에 보이는 것만큼은 오로지 새하얀 광경을 그는 동경처럼 바란다.
그러나 그리운 풍경은 새파란 윤곽의 매끄러운 검날이 주저 없이 찢어낸다. 찢어내면 거기엔, 바다가 있다. 어째서 바다인지 모른다. 짭짤한 비린내, 포말이 부서지는 소리,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시커멓게 변하는 그 광대한 위협의 단편은 늘 그의 머리 위에 있다.
그래, 그 검이.
단도보다 길고 샤벨보단 짧은 그 검.
한 때 있었던 무나카타 레이시의 평온한 시각을 갈기갈기 찢어, 산산조각내고, 짓눌러 부숴, 으깨어, 마침내 온갖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검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은 젤리로 만들어진 하늘을 본 적 있을까? 노래 구절처럼 마멀레이드나 그 비슷한 머랭, 크림치즈, 생크림 뭐 어떤 것이라도 괜찮다. 민트색 나무줄기 고양이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꽃, 솜사탕을 파는 솜사탕 같은 사람, 정사면체의 탄력 있고 매끄러운 고무공이 자동차 위로 떨어진다. 통통 굴러다닌다. 튀어 다닌다. 걷는다는 감각은 원래 이랬을까? 트램펄린 위에서 오랫동안 놀다가 단단한 지상에 땅을 내딛었을 때의 그 부조화.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에 적응하지 못해 울렁거리는 속을 뒤집어 박박 지워버리고 싶다.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박살난 매쉬드 포테이토를 그는 사실 몹시도 혐오한다.
유리는 상을 반사하지 않는다. 거울 속의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는 모른다. 그래서 그는 저에 대해 생각하기를 잊었다. 세상은 반경 30cm 내에서만 입체감을 갖고 뒤죽박죽이 된 세계는 카레이도스코프처럼 시시각각 그 모습을 변화시키며 바닥은 울렁거리고 문은 입을 다물고 인어는 팔딱대고 바다는 떨어지며 크레파스로 그려진 부하가 갑자기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라지거나 목탄화의 남자가 그림 한 편을 태우고 그슬린 자취를 남긴다.
별 대신 아몬드나 파슬리가 뿌려진 하늘에서 변하지 않는 모양인 것은 그 검 뿐이다. 미스릴이나 오리하르콘, 그 밖의 영원을 약속하는 전설 속의 광물로 이루어진 것 마냥 어느 것에도 굴하지 않고 그의 머리 위에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토록!
빌어먹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조각이 맞는다. 내뱉었던 비명을 끝으로 인어가 죽는다. 새하얀 풍경 속에서 그는 제발 자신이 아는 세계가 다시 나타나길 간절히 원한다. 떨어지는 바다의 물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쓰다가 그는 문득 거울에 비치지 않는 자신은 혹시 수채화로 그려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인펜이라든가, 수용성의 무언가. 이 방에 바다가 가득 내리면 형체가 번져 사라지는.
무나카타 레이시라는 사람은 무엇으로 그려져 있을까.
수성이라면 지워질 테고 유성이라면 지워지지 않을 테지만, 석회라면 소금물에 녹을 테고 꽃이라면 수분을 모두 빼앗겨 바짝 마를 것이며 종이라면 분해될 것이고 나무판자라면 둥둥 뜨고……. 그러나 그 결과는 바다가 전부 떨어져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제 이름을 읊조린다.
무나카타 레이시는 새하얀 풍경 속에서 잠이 들었다. 어렴풋이 마침내 이 방에 바다가 전부 내리는 꿈을 꾸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만 위안이 되었던 것은 그 곳에서 푸른 검은 한 줌 새하얀 모래로 파도에 부서졌다는 사실이었다.
마감에 치이다보니 완결성이 떨어진 원고가 나오게 되어 어나더 엔딩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만 행사 끝나고도 한 달 이상이나 걸렸는데 여전히 전보다 완성된 수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안과 달리 이런저런 부분이 수정되기도 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게 되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만회해 보려고 하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게....
여러모로 미숙한 원고를 사주신 여러분들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정말정말 죄송합니다....ㅠㅠㅠㅠ
어나더 엔딩은 책의 마지막장만 새로 썼으며 4장까지는 기존의 책을 봐주시면 됩니다.
파일은 pdf로 첨부되어 있고 비밀번호는 책 마지막 장의 성경구절의 숫자를 순서대로 써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