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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코/J19] K 후시미 오른쪽 소설본 홍보합니다
12월 29일 일요일 서울 코믹월드 [J19/KRRR!!] 에 K, 미사루 신간과 무나후시 구간을 위탁합니다.
1. 사막에 내리는 눈/미사루/A5 카피본, 36p/3000원
본편 13화 이후 미사키가 후시미를 감금하는 책입니다. 사망 소재가 있으니 어느 쪽 팬 분이든 주의해주세요.
소이와 메이비레의 트윈지입니다.
↓ Sample
정적은 언제나 야타 미사키를 움츠리게 했다. 헤드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그것만으로도 구원의 가치를 지닌다. 후시미는 그런 야타를 보고 쓸데없는 데 집착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야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리지는 않았다.
호무라는 정적을 두려워하는 야타에겐 최적의 장소였다. 언제나 소란스러웠고 활기찼다. 가장 동경하는 남자는 침묵을 지켰지만 그는 존재만으로도 야타를 꽉 차게 만들었다. 그 긍지가 제 안에도 있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댔다. 이제 두려울 것은 없었다. 야타 미사키에겐 언제나 동료가 있고, 소리가 있으며, 언제 어디서라도 기백을 느낄 수 있는 그의 왕이 있으니, 있었는데——.
“쿠사나기 씨!”
쾅쾅쾅, 아무리 흔들어도 저 너머에 달린 종이 아래위로 정처 없이 짤랑대는 소리만 들릴 뿐 문은 열리지 않는다.
몇 달 째 호무라의 본거지였던 바(Bar) 호무라는 휴업 중이었다. 모든 게 일단락 된 그 겨울 이후 호무라는 순식간에 분해되었다. 그 예전의 청의 클랜처럼 힘이라도 남아있으면 모를까 힘조차 없는 팀은 순식간에 목적을 잃고 의미 없이 둘러 앉았다. 쿠사나기는 처음부터 해산을 제안했지만 강하게 반발했던 건 야타였다.
“미코토 씨가 있던 자리를 지키는 것도 일이라구요!”
“하지만 야타…….”
무언가 말하려던 쿠사나기의 소리는 야타의 의견에 동조한 무리들의 시끌벅적한 반발에 묻혔으나 곧 쿠사나기의 뜻대로 되었다. 호무라에서 유일하게 참모 역할을 맡고 있던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뒷골목에서 한 위치하고 있던 호무라도 석판이 부여한 왕의 힘이 없으면 사실은 경험 부족하고 패기만 넘치는 오합지졸의 무리라 이내 지금까지 마찰이 있었던 모든 패거리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잠깐 누군가 안 보이면 어디 끌려가서 맞고 오기 일쑤인데다 살상능력을 가진 총까지 나타나면 대안이 없었다. 싸움은 늘 끊이지 않았고 해결은 언제나 어려웠다.
간혹 청의 클랜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의 왕이 엄선해 만든 최정예 부대도 아닌, 일반 소대원들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소란에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휘휘 검이나 저으면 그토록 난항을 겪고 수세에 몰려 있던 싸움도 금세 해결되었다.
“언제까지 왕도 없는 클랜을 우리가 뒤처리해야 되는 거야?”
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그렇게 툭 내뱉었다.
“이 자식이!”
야타는 머리보단 언제나 행동이 앞서던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자존심도 상하는 마당에 순간적으로 머리에 열이 올라 야타는 녀석의 멱살을 쥐고 세게 후려쳤다. 처음에는 공무 중인데다 이제는 일반인을 상대라는 제약에 머뭇거리며 일방적으로 맡기만 하던 셉터4의 대원들도 야유와 비난에는 별 수 없었나보다. 말리려던 누군가가 또 얻어맞고 밀치고 때리고 그러다가 전부 뒤섞여 호무라와 다른 무리들이 싸우던 공터는 이제는 또 다른 이들과의 싸움터가 되었다.
“이게 뭐야?”
싸움이 일단락 된 것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였다. 명백하게 비꼬는 읊조림, 깔아보는 눈에는 경멸이 그득한.
“후시미 사루히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한 호무라의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막 무릎으로 복부를 걷어차인 참이라 숨쉬기가 버거운 와중에도 그 이름은 똑똑히 들려 야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서로 치고 박는데 여념이 없던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고요가 깔린 공터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재미 좀 있으신가? 어쩐지 후딱 해치우고 와야 될 게 아직까지 안 왔다는 해서 순찰 나온 김에 봤더니. 응?”
흙투성이의 제복을 툭툭 털어내며 순식간에 정비를 갖춘 대원들이 허겁지겁 사열하고는 침묵한다.
“이 일은 실장에게 보고하도록 하지. 따라와.”
그리고 정말로, 모든 것은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후시미가 무리들을 끌고 사라진 뒤 온전히 적막해진 공터. 그것이 호무라의 마지막이었다. 반발에도 상관없이 쿠사나기는 호무라를 해산시키고 본거지가 되었던 그의 가게 문도 걸어 잠갔다. 사실 쿠시나 안나의 문제도 있었다. 스트레인 중에서도 강력한 그녀의 힘을 탐내지 않는 스트레인 조직이 없을 리 만무했다. 다른 클랜들마저 그녀를 노리는 판에 단순한 일반인이 되어버린 호무라만으로는 턱없이 힘이 부족했다. 셉터에 그녀를 맡기자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언제 그녀를 되찾아 올 수 있을 지도 알 수 없었기에 어딘가에 그녀를 숨기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지시한 것은 역시 쿠사나기로 야타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비밀이라고 했다.
이제, 야타 미사키에겐 다시 침묵만이 남았다.
(중략)
지하창고는 당연하지만, 창고다.
1층이지만 창고까지 있으니 사실 수납공간은 굉장히 넓죠.
부동산 중개업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야타의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옷가지 두 박스, 살림살이 두 박스 정도가 전부였으니 창고에 들어올 일도 없었고 정리한 적도 없어 며칠 전 처음으로 들어와 본 지하실은 엉망이었다.
마감이라곤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창고에 끈기 없는 누군가 타일을 붙이는 장대한 작업을 시작했던 모양인지 한 쪽 벽에는 붉은 타일이 발라져 있었다. ‘끈기 없는’ 이라고 야타가 사족을 덧붙인 것은 딱 한 쪽 벽만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치우기도 귀찮았는지 타일본드 통과 남은 타일이 덩그러니 먼지 쌓인 채로 그 밑에 처박혀 있었다. 그 외에도 한 쪽 바퀴가 부서진 여행가방,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삽, 부서진 각목, 녹슨 못이 잔뜩 들어있는 작은 통, 흙이 잔뜩 묻은 작업복, 개중에 그나마 새것인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목장갑 – 야타는 주인이 사놓고 잊어버린 것이라 추측했다. 작업복에 덮여 보이지 않았으니 - 같은 것들이 한 쪽에 그득 몰려 있었다. 누군가는 공사장에서 일하던 사람일 지도 몰랐다. 몇 번 들척거리다 말았지만 그 밑에 깔린 잡다한 것들도 죄다 그런류의 것이리라.
이런 찰나의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공간에 야타는 후시미를 던져 놓았었다.
그 때는 청소를 할 의리도 기력도 없었고 이곳이 사람이 생을 연명하기엔 매우 부적절한 장소라는 걸 깨달은 것도 이틀 정도가 지나서였다. 피부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것을 보고서야 야타는 안 쓰던 두꺼운 담요를 꺼내 후시미에게 덮어주었다. 보온의 효과는 있는지 새파란 얼굴은 다시 하얗게 변했지만 이번에는 팔이 부러져 벌겋게 열이 오르기도 했다. 파랗고 하얗고 발개지기도 하고, 어느 쪽이 더 나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야타는 더 이상 후시미의 안색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무어라 말하는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바싹 말라 거스러미가 올라온 입술이 힘겹게 뻐끔거린다.
“뭐라고?”
“…병…신.”
갈라진 목소리로도 바람 빠지는 큭, 하는 비웃음이 선명하게 들린다.
“……네 입에서 쓸 만한 소리가 나오길 기대한 내가, 그래, 바보지.”
야타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가져다 대었던 고개를 들고 쟁반에서 제 몫의 접시를 들어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먹으려면 먹든가.”
고개를 들기도 힘든지 바닥에 한참을 누워있던 후시미가 겨우겨우 상체를 컵에 물부터 따른다. 오른쪽 팔이 박살났으니 쓸 수 있는 건 왼쪽 뿐. 척 보기에도 부어오른 오른팔 대신 왼팔을 내밀면 들춰진 소매 끝 사이로 보이는 손목에는 딱 하루뿐이었는데도 쓸린 듯한 생채기와 얇은 선 모양의 울혈자국이 생겨있었다. 쓸데없는 저항의 흔적이라 야타는 꼴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왼손도 성하지 않아 손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회색의 시멘트 바닥에 진한 물 얼룩이 번진다. 손가락 사이사이, 손목을 타고 제각기 흐르는 물방울을 시선으로 쫓는다. 그토록 허기가 졌었는데도 야타는 식사보다는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며 후시미에게 집중했다. 반복해서 두 컵까지 마신 후시미의 메마른 입술에 겨우 물기가 반사된다. 거기까지가 벌써 야타가 제 접시의 반 정도를 먹었을 때였다. 한 쪽 눈은 부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안경도 없고, 입 안은 모르긴 몰라도 다 터졌을 것이다. 흙투성이 얼굴에 갈색으로 말라붙은 핏자국이 점점이 보였다. 부러진 팔은 열이 바짝 올라 시큰거리고 정신도 혼미할 테고, 다리도 금은 가지 않았을까. 제가 행한 것들의 빈도와 세기로 어림잡아 추측한 것만도 그러하고 실제 후시미의 몰골을 보면 그것보다 더 심한 부상일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시미 사루히코의 입은 열리기만 하면 야타의 속을 득득 긁는 말만 해대니 야타 또한 행동이 고와질 리는 없었다.
컵을 내려놓은 후시미가 이번에는 숟가락을 잡는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조차 아주 느릿해서 프로그래밍 된 로봇과 비슷했다. 부자연스럽게 뻣뻣한 팔이 접시로 향하다 멈추고는 기이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야타를 올려다본다.
“뭐야.”
“…….”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편식 하냐? 그냥 먹어.”
후시미의 편식을 야타가 모를 리는 없었으나 알면서도 일부러 넣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편식하는 후시미가 야타는 우스웠다. 키는 야타보다 컸지만 여전히 그는 열다섯이었다. 야타와 밥그릇을 몇 번 힐끔이며 번갈아보던 후시미가 기어이 숟가락을 내려놓자 야타는 미묘한 우월감을 느끼며 웃었다.
야타는 최근에 와서 ‘화가 나면 머리가 차가워진다’라는 문장을 체감하게 되었다. 머리는 전에 없이 이성적이었고 차분했으며 야타 미사키는 여느 때와는 달리 제가 어떻게 상황을 인지하고 행동했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게 어른이 되는 걸까? 거기까진 모르지만 적어도 여전히 정체되어 있는 후시미에 비하면 백 배 낫다고 생각한 제 안 어딘가의 변화를 가장 빨리 감지한 것은 누구보다도 본인이었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성장이라기 보단 상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야타는 몰랐다.
야타 미사키의 미덕 중 하나는 집중이었다. ‘야타 미사키’와 ‘집중’은 때로는 행성과 행성의 거리만큼 멀어보였으나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는 그의 성질을 생각한다면 쉬이 납득할 것이다. 집중하는 사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 가끔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맹목적인 야타 미사키가 그 어느 때보다 객관적이라니. 그것이 정상일 리 없었다. 오히려 정상이 아닌 축에 가까웠지. 그 일례로 야타는 현 상황을 명료하게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원인도, 결과도, 도덕적 판단의 기준도 모두 잃어버린 채로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이 벌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후략)
2. 기계장치의 신/ 무나후시/ A5 떡제본 48p/ 4500원
지난 5월 케이크스퀘어에서 판매했던 구간입니다. 후시미가 적왕이 된다는 가정 하에, 별 거 되지 않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6월 26일 해당 포스트(http://nitrogenal.tistory.com/48)로 어나더 엔딩을 배포하였습니다.
본 책을 구매하실 분들은 이후 위 주소에서 어나더 엔딩을 감상해주시면 됩니다.
↓Sample
비닐을 벗긴다. 뚜껑을 위로 올리고 앞부분을 덮고 있는 종이포장을 가볍게 잡아당겨 찢는다. 한 갑엔 스무 개. 가짓과에 속한 한해살이풀을 건조해서 종이에 말아 불을 붙여 그 연기를 흡입한다. 담배의 주요 화학 성분은 니코틴과 타르. 니코틴은 조금으로도 중추 신경계나 말초 신경계 등을 자극해 정신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만 많은 양을 흡입하면 신경 조직을 마비시키며 타르 속에는 약 20여 종의 발암물질이 함유되어 있다. 담배는 호흡기계 질환과 심혈관계 질환, 폐암과 후두암 구강암 등을 유발하고…….
아니. 그만두자.
후시미는 생각을 멈추고 막 새로 뜯은 담배갑에서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후시미의 안에서 없었다. 어디 들킬까 싶어 휴일에 일부러 셉터 4의 둔영하고도, 호무라의 활동구역하고도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나왔다. 도시 전역의 모든 CCTV는 셉터의 관할 내였으니 편의점은 당연히 제쳐두고, 도로의 불법주차단속카메라까지 피해가면서 일부러 허름한 가판대에서 샀다. 남들 구른 만큼 굴렀으니 그럭저럭 사회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미성년자’라는 수식어는 후시미의 안에서 제법 강력했었나 보다. 담배 한 갑을 주문할 때, 묘하게 빨라진 심장박동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말없이 유리 밑의 작은 구멍으로 내밀어진 담배를 쥐어들고 허겁지겁 뛰었다. 대놓고 필 수는 없으니 인적 드문 공터나 주차장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꼴이 영락없이 비행청소년이었다. 젠장. 내가 왜 이래야 돼. 투덜거리긴 했지만 한 번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여기까지 와서 그만두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들인 수고가 아까워서라도 그저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익숙할 리가 없지만, 딸깍 소리를 내며 뚜껑을 누르면 불이 올라오는 자동 대신 톱니바퀴를 돌려야만 되는 값싼 라이터를 산 것은 퍼뜩 무나카타가 생각나서였다. 셉터 4의 수장인 무나카타 레이시가 담배를 핀다는 사실은 아마 셉터 4의 누구도 모를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우연히 마주친 무나카타의 옷에서 희미하게 나는 담배냄새와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다 툭 떨궈진 담배갑이 아니었다면 후시미도 모를 뻔한 사실이었다. 담배갑의 상표는 익숙했다. 살짝 우그러지거나 너덜너덜한 모서리를 보면 사람 손은 오래 탄 것 같은데 막상 열어보니 안에는 내용물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그마저도 빈자리엔 편의점 싸구려 라이터 하나만이 딱 맞게 들어가 있었다. 주세요, 후시미 군. 무심코 주워들어 내용물을 열어보았던 후시미에게 무나카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비밀을 들켰다던가 하는 그런 멋쩍음도 없이 표정 없는 얼굴에 질려 후시미는 담배를 건네주었었다. 그 때문인지 묘하게 후시미에겐 그가 담배를 핀다는 것보다도 그 라이터의 존재가 더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뻑뻑한 톱니바퀴를 돌려 불꽃을 피워본다. 생각만큼 불이 잘 붙지는 않았다. 겨우 불을 붙여 첫 모금을 빨아본다.
“큽… 케헥, ㅆ……!”
누구에게 향해야 될지 모를 욕설이 튀어나오려다 들어간다. 누가 부추긴 적 없는데도 결국 분에 못 이겨 치밀하게 카메라가 없는 동선까지 짜가며 흡연을 결행한 건 후시미 본인이었다. 입 안이 엄청나게 쓰다. 목 안으로 매캐한 연기가 넘어가는 느낌이 역겨워 자꾸만 위로 치받쳤지만 후시미는 꾸역꾸역 담배 한 대를 다 태웠다.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한 발자국 내딛으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후시미는 그대로 공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탄식도, 단말마도, 비명이나 깨달음의 외침도 아니었다. 후시미는 내친 김에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어 편하게 앉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새파란 창공이 거기에 있었다. 차가운 대기로 벼린 듯한 날카로운 검은 그 새파란 창공을 쏙 빼닮았었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벽에 가볍게 쿵쿵 박았다. 묘하게 붕 떠있는 느낌이 이상하다. 아 맨날 이러고 살아서 그렇게 고개가 뻣뻣하신가?
의미 없이 라이터를 틱틱거리다 후시미는 문득 손가락 끝에 감각을 집중해 보았다. 일렁이는 붉은 불꽃이 아름답다. 셉터 4에는 아예 흡연자용 휴게실이 따로 있지만 호무라에는 딱히 분별이 없었다. 그 쪽에서 담배를 피는 사람들은 늘 이런 식으로 불을 붙였다. 그 사람들도 갑자기 라이터 사야 돼서 곤란해졌겠네. 참 하찮으면서도 유용한 사용법이었다. 당장 그 힘의 주인인 스오우 미코토부터가 이런 식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무나카타의 라이터가 머릿속에 제법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래서일 지도 모른다. 같은 왕인데도 한 쪽은 폼나게 불꽃을 피워 올리는데 한 쪽은 편의점 라이터라니. 너무 차이가 크잖아. 괜시리 낄낄대며 웃었지만 속이 허했다. 무나카타의 라이터는, 글쎄. 얼마나 쓰였을까. 그 남자도 혼자 담배를 피기야 하겠지만 스오우가 불을 붙여주는 쪽이 상상하기가 더 용이했다. 처음 본 담배가 익숙했던 것은 그야 예전에는 매번 보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쿠사나기는 독하다며 꺼렸고 호무라에서도 그 담배를 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무나카타의 침실 서랍장 안에 고이 간직된 담배는 아마 그가 스오우를 만날 때만 들고 나갈 게 뻔했다.
(중략)
“생각보다 시시하네요, 왕이란 건.”
“그렇습니까?”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대단하지 않나요? 크기 가늠조차 안 되는 거대한 검이 내 머리를 그 끝으로 노리고 있는데.”
“그게 무서워요?”
전 아닌데. 흘끔 무나카타의 표정을 살펴보지만 그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다. 평소와는 달리 이 집무실의 공기가 그저 안락하고 느긋하지만은 않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답답한 게 싫어 열고 다니는 셔츠깃을 계속 만지작거리다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은 특무대를 포함한 모든 소대의 훈련 시간이었기에 연병장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모두 훈련에 집중하는 척 하면서도 흘끔흘끔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통솔하는 아와시마만이 고생이었다.
아침에 출근했더니 사무실 위에 새로운 모양의 다모클레스의 검이 떠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히 셉터 전체를 몰아치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게다가 그 검의 주인이 과거 호무라에 있다 그들을 배신하고 셉터 4로 넘어왔다는 화려한 전적을 사람이라면 남에게 흥미가 없는 후시미라도 썩 구미가 당길만한 내용이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주제에 퇴장은 허무했다. 귀찮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검은 붉은 빛무리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대로 가던 길을 계속해 사무실에 출근하면 오전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고 후시미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당사자가 빤히 있는 특무대 사무실마저 긴장감이 감돌았는데 다른 쪽은 오죽했을까. 얼마나 화두에 오르내렸을 지는 감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되나요?”
한참이나 밖을 쳐다보고 손톱의 거스러미를 매만지고 다리를 꼬았다가 다시 내려놓고, 반대편 다리를 떨 정도의 산만한 시간이 지나도 무나카타는 말이 없었다. 그 이후로 반나절이다. 바이스만 편차라던가 갑자기 나타난 다모클레스의 검을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도 가장 기민하게 그 존재를 느꼈을 무나카타가 반나절이나 지난 후에야 후시미를 불렀다면 무나카타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 아닐까. 후시미가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지만 그 속이 보이지 않는다면 한 번쯤 운을 띄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나카타가 속으로 말을 고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이후로 한껏 고양되어 쿵쾅거리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긴장해서 뛰고 있었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눈을 빛냈지만 무나카타는 곤란한 표정으로 오히려 후시미에게 되물었다.
“글쎄요. 전례 없는 일이니까요. 후시미 군은 어떻게 하고 싶나요. 호무라의 남은 무리들을 이끌 겁니까?”
“미쳤어요, 제가? 거기 가면 맞아 죽을걸요.”
그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후시미는 킥킥거리며 쓸데없이 등받이가 넓은 의자 뒤로 어깨를 걸쳤다. 스오우 미코토가 죽은 이후 호무라는 반쯤 와해된 상태였다. 이전에는 요주의 리스트로 들어가 있던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셉터 4의 리스트 최상단에 올라가 있었다.
셉터 4가 표면적인 법의 질서를 수호한다면 호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뒷골목을 누르는 질서였다. 훈련되지도 않은 일개 조무래기들이 그런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왕의 클랜즈맨으로서 받은 이능 때문이다. 스오우 미코토가 죽으며 그 힘까지 거둬갔으니 그들은 단숨에 짓눌려 있던 무리들의 표적이 되었다. 이런 일까지 염두에 두긴 했지만 셉터 4가 관여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다. 연속으로 세 명이 보복성 폭행을 당한 후 쿠사나기는 해산을 권유했다. 지금 그들의 본거지인 바 호무라에 남은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갈 곳 없는 쿠시나 안나와 호무라의 2인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쿠사나기 이즈모, 그 외 카마모토 리키오, 야타 미사키―. 미사키. 누구보다도 스오우를 따랐던 야타에게 제가 새로운 주인이 되겠노라며 찾아간다면 야타는 아마 정말 후시미를 다시는 보지 않을 터였다. 스오우 미코토는 왕이 아니더라도 야타를 사로잡았을 게 분명한 인간이었고 동시에 후시미 사루히코는 왕이 된다 하더라도 야타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없을 터였다.
(후략)
잘 부탁드립니다! 잔돈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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