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밤은 짧았다. 낮이 길었다. 플랑크톤이 썩어가는 비린내가 났다. 습도 높은 바람은 끈적하게 피부에 엉겨 붙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훈풍 속에선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흘렀다. 가끔은, 어찌됐든 안락했던 우리가 그립기도 했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쾌적하게 돌아가는 공조장치, 산뜻하게 샤워하고 마시는 차가운 얼음물, 뻣뻣하고 삭아버린 면이 아니라 부드럽고 도톰한 옷의 감촉.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본적인 생활 수준은 확실히 높았다.
아쉽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코우가미 신야는 그것들을 대가로 그 모든 것들보다 더 명확한 목표를 달성했다. 총성이 울릴 때, 격철이 당겨지고 탄환이 발사될 때의 반동, 격발에 몸이 제자리를 되찾기도 전에 쓰러지던 몸뚱아리, 퍼져나가던 진득한 핏물, 흰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흐트러지는 꼴에 쓴 입술을 핥으면서도 느꼈던 희열. 이래서야 잠재범이 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면서 도망쳤다. 끝없는 황금의 들판을 달렸다.
그래서 코우가미 신야는 후회하지 않는다.
폭우가 오는 날이면 천장 어딘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집 안에서, 담배 냄새 잔뜩 배인 소파보다 더 질 나쁜 침대에 몸을 누일 때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쇠 비린내와 단내가 올라오는 갈라진 목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무거운 방탄복과 그보다 더 무겁고 차가운 총기의 트리거에 손가락을 걸고, 온 몸의 근육과 신경을 빠릿하게 곤두세워야 하는 긴장 속에서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쨍쨍한 햇빛이 드리운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녹음이 짙은 울창한 숲 속에서 새 소리를 들을 때, 한 대의 담배와 함께하는 여유, 이젠 겨우 익숙해진 이국의 언어가 코우가미는 만족스러웠다.
"코우가미."
화들짝 놀라 코우가미가 고개를 들면 상대가 심각한 얼굴로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창으로 비추는 햇빛을 머금고 흰 셔츠가 쨍하게 빛났다.
"…기노."
코우가미는 인상을 찡그렸다. 얇은 프레임의 무테 안경 밑에서 눈동자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매끄러운 각막 밑은 새까만 동공이다. 희미하게 이채가 도는 눈동자가 코우가미는 빽빽한 밀림의 생동감과 비슷하다고 깨닫는다. 서늘하고 산뜻한 공기. 적당히 물기를 머금은 부드럽고 짙은 흙 같은. 그러고보니 기노자의 취미는 원예였던가. 닮았구나. 그것도 무심코 깨닫는다. 피로에 찌들고, 지치고, 날 서고, 눈물로 엉망이 된 애처로운 얼굴이 마지막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잊고 있었던 얼굴이 코우가미의 앞에 있었다. 기억과는 다른 조금은 앳되고 통통한 뺨, 짧은 머리카락. 햇빛 아래에서의 기노자는 분명히 살아있는 식물처럼 정적이지만 생기가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아, 아니."
코우가미는 어설프게 변명하며 손등을 꼬집었다. 아프지 않았다. 이건 꿈이구나. 놀라고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목까지 꽉 잠근 흰 반팔 셔츠는 고등학교 교복이었다. 언젠가 있었을 잊고 있던 과거가 꿈으로 상기된 모양이었다. 허탈함에 웃으면서도 코우가미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줏빛이 도는 광택 있는 커버의 푹신한 등받이는 자주 공부하러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즐겨 앉던 창가 자리의 쿠션이 꺼진 부분이 코우가미마저 잊고 있었던 기억인지라 헛웃음이 나왔다. 이토록 세세한 꿈까진 필요 없었는데.
무심코 내다 본 창 밖으론 사람들이 각자의 할 일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은 휴일인 모양인지 낮에도 사람이 많았다. 물방울 무늬 원피스, 스트라이프 셔츠, 첫 데이트를 하는지 수줍게 손을 맞잡고 가는 들뜬 얼굴의 커플, 울상인 아이,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 잘 정비된 도로에는 매끈한 자동차가 풍경을 반사하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맥이 탁 풀릴 정도의 평화였다.
"갑자기 몸이라도 안 좋아진 거냐?"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으면 기노자가 조심스럽게 코우가미를 불렀다. 앗차 싶어 고개를 돌리면 아까의 조금 곤두선 얼굴과는 달리 이번엔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의 안락함에 눈 앞의 상대를 깜박 잊고 있었다. 초조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코우가미는 손사래 쳤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기노. 잠깐… 졸았나 봐."
어차피 찰나의 꿈이라면 즐기는 쪽이 훨씬 나았다. 얼음이 반쯤 녹은 미지근한 아이스티를 마시면서 코우가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아니. 고개를 들었더니 네가 넋을 놓고 있길래… 뭔가……."
당황하며 말을 잇던 기노자가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더듬거리더니 시선을 아래로 돌리고는 말 끝을 흐렸다. 테이블 위의 손가락 끝에 무심코 힘이 들어가 꽉 누르는 게 유독 시야에 박힌다.
기노? 한참의 정적 끝에 코우가미가 물으면 기노자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답했다.
"어딘가… 없어질 것 같아서……."
그 말에 마시던 아이스티가, 문득 목에 콱 메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런 대화를 한 것도 같았다. 가끔은, 이상해 코우가미. 기노자가 툭 던지는 그 말엔 늘 맥락이 없었다. 나란히 하교 하다 팔꿈치가 부딪힐 때, 코우가미 취향의 영화를 보다가, 도서관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다, 점심 도시락을 깨작깨작 먹던 기노자가 고개를 들어 무심코 코우가미와 눈이 마주치면 기노자는 종종 생소한 표정을 지었다. 기묘한 것을 보듯 놀라다 일그러지는 표정에 코우가미가 의문을 품고 물으면 그렇게 답했다.
가끔은, 이상해 코우가미.
눈을 들면 내 앞에 누군가 있다는 게. 눈이 마주친다는 게, 팔이 부딪힌다는 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무런 위화감 없이, 그런 게 내 앞에 있다는 게. 지금까진 그럴 일이 없었거든.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기노자는 가볍게 그런 감상을 내뱉곤 했다.
그러고 나면 꼭 덧붙였다. 그래서 꿈 같아. 언젠가 없어질 것 같아.
느슨하게 턱을 괴고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며 기노자는 가만히 눈을 감곤 했다. 꾹 다문 입매가 단순히 침묵인 줄 알았던 시기는 지났다.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그 옛날엔 기노자의 그런 말을 눈치채지 못했다. 긴 말꼬리 끝에 진득하게 붙어있을 고독, 텅 빈 깊은 동공, 까마득한 어둠. 그래서 네가 가끔 이름을 부르면 놀라. 느슨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기노자는 그렇게 말했다. 나른한 오후의 얘기였다.
별 실없는 생각을 하네, 기노. 그럴 리가 없잖아.
평소처럼 답하려고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낯선 타국에 홀로 남은 이국의 코우가미는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의 기노자 노부치카를 이해한다.
폭우가 오는 날이면 천장 어딘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집 안에서, 담배 냄새 잔뜩 배인 소파보다 더 질 나쁜 침대에 몸을 누일 때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쇠 비린내와 단내가 올라오는 갈라진 목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무거운 방탄복과 그보다 더 무겁고 차가운 총기의 트리거에 손가락을 걸고,온 몸의 근육과 신경을 빠릿하게 곤두세워야 하는 긴장 속에서, 무심코 깊은 곳으로 침잠하던 의식.
대체로 사람들은 코우가미 신야를 '코우'라고 칭하곤 했다. 일본에서도, 이곳에서도 변하지 않았지만 억양이 달랐다. 머리로는 저를 지칭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와닿진 않았다. 누군가 저를 부른다고 알면서도 어딘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몸이 빠르게 반응하질 못했다.
"코우가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통해 온 몸으로 흐른다. 오랜만에 누군가 저를 확실하게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류가 각자 다른 신호가 되어 퍼졌다. 아늑하고, 온화하고, 평화롭다. 때때로 부유하던 의식이 여기에 있다고 확실하게 고정된다. 이름을 부르면 가끔 놀란다고 말했던 기노자도, 혹시 이런 기분이었을까. 찰나의 전율은 영원같이 여운을 남긴다.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하게 뇌리에 번쩍이는 번개처럼, 한 순간 코우가미 신야라는 존재를 꿰뚫어 이 세계에 고정시키는 목소리.
"그럴…리가 없잖아, 기노…."
잊고 있던 무언가가 치받쳐 코우가미는 테이블 위에 있던 기노자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가끔은 이상해 코우가미. 이상해. 그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다, 이건. 명확하게 살아 있다고 느끼는 감각은. 한 겹 막을 씌우고 있었던 것처럼 어쩐지 둔감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트인다. 모든 감각이 생생해진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세계가 훅, 머릿 속으로 빨려 들었다.
"나는, 여기에 있어."
"응."
"여기에 있어."
"그래."
"너야말로."
너야말로, 사라지지 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빈 말로도 할 수 없는 건, 기노자 노부치카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코우가미 신야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기노자 노부치카의 경험으로 터득한 불안과 외로움은 결국 적중한 셈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이 스친다. 기노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게 놀라웠다. 늘 불안하다고 말했던 기노자는 결국 그의 말이 맞았다고 생각했을까. 혼자 남아서 불안했을까. 코우가미처럼 어딘가 둥둥 떠다니고, 때때로 침잠하고 질식하고 그리고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을까.
"나는 이 자리에 있어, 코우가미."
가만히 있는 코우가미의 손등에 이번엔 기노자의 손등이 포개졌다. 길쭉하게 뻗은 손마디와는 달리 손바닥은 슬쩍슬쩍 굳은 살이 잡혀 있었다. 검도를 하는 기노자에겐 당연했다. 손을 맞잡으면 그 굳은살의 감촉이 이상해 코우가미는 괜히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대곤 했다.
"코우가미."
눈을 뜨면 아직도 밤이었다. 새벽 세시? 네 시? 몇 시쯤일지 감은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코우가미 신야는 괜히 탁상을 더듬었다. 연락용으로 쓰이는 무전이다. 공안국에 입사한 뒤엔 휴대전화보다 단말기로 연락하는 게 더 빨랐다. 기노자는 아직도 휴대전화를 쓰고 있을까. 처음으로 마주치고, 세 달이나 뒤에 받을 수 있었던 전화번호를 코우가미는 기억하고 있었다. 신호음이 연결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코우가미는 버튼 하나하나를 꾹꾹 눌렀다. 수화기를 조용히 귀에 대보았다.
텐트, 보온병, 핫팩, 야외용 전등, 토치, 침낭, 모포, 레토르트 식량, 그리고 커다란 천체 망원경.
코우가미의 두 달치 아르바이트 비용이 고스란히 들어간 만큼 손에 넣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묵직한 무게감만큼 뿌듯함을 느끼며 코우가미는 트렁크를 닫았다.
자, 다음은――.
옛날엔 별 구경 하기가 쉬웠다고 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홀로그램으로 뒤덮인 도시는 퇴화해버린 외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밤에도 낮처럼 번쩍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스모그로 희뿌연 하늘은 그대로 빛을 머금고 반사해 하늘은 까맣다기 보단 탁한 자줏빛이거나 불그스름한 색이었다.
"진짜로 다른 데 가면 별이 보일까, 기노."
"글쎄."
무심한 표정으로 걷던 기노자가 코우가미를 따라 멈춰선다. 별이라니, 그런 존재가 있을 거라곤 교과서와 천체 관련 서적이 아니라면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하늘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엔 봤던 것 같기도 해."
"진짜?"
"어릴 땐 가끔 놀러 갔으니까. 새벽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차에서 내리니까 하늘이 반짝반짝 했거든."
"반짝반짝?"
평소에는 주어, 목적어, 동사만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기노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어린애 같은 형용사에 코우가미는 풉- 하고 튀어나오는 웃음을 틀어 막아야 했다. 어이, 웃지 마. 제 입에서 나온 말이 뭔가 좀 어색하긴 했는지 순식간에 턱 밑까지 홧홧해진 기노자의 얼굴에 코우가미는 끅끅대며 주저 앉아 버렸다. 야, 코우! 아, 하지만… 그게, 기, 기노가 반짝반... 푸흡…아, 배 아ㅍ…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나 혼자 갈 거야.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기노자가 발걸음을 옮기면 코우가미는 너무 웃어서 땡기는 배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같이 가, 기노.
몇 발자국 안 가 나란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둘은 내내 별에 관한 얘기를 했다. 그래서 예뻤어? 반짝반짝? 놀리는 거면 적당히 해, 코우가미. 아니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묻는 거야. 요즘도 볼 수 있으려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지면 가능하지 않을까.
방금 전 훅 달아올랐던 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코우가미가 놀리는 건가 싶으면서도 기노자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하늘이 반짝반짝.
그 낯설고 귀여운 어감에 코우가미는 그 날 귀가하자마자 검색을 시작했다. 별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 가장 밝은 별. 계절별 별자리. 천체 관련 서적을 결제하고, 천체망원경의 가격에 기함하면서도 코우가미는 겨울이 하늘이 가장 깨끗하다는 말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기 중에 나머지 준비를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멀리 나가려면 차도 필요하고 그러려면 운전 면허도 따야 한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는데도 코우가미는 밤을 새워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에 운전 면허 교습까지 포함하면 당연하지만 코우가미는 기노자랑 만날 시간이 줄어 버렸다. 여름 내내 손에 꼽을 정도로 만났다. 개학하고 난 뒤의 기노자는 그 전보다 키가 조금 더 커 있었고 더 마른 느낌이었다. 방학 전에 길었던 머리도 다시 짧게 쳐버렸다. 그 과정을 전부 보지 못한 게 아쉽기 짝이 없었지만 그간의 고통을 감내할 만한 순간이 드디어 코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기노!"
전화를 받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기노자가 깜짝 놀란 얼굴이다. 운동화에 면바지, 스웨터, 파카. 간편하지만 두터운 옷으로 골라 입으라던 코우가미의 의견을 얼추 반영하긴 한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탄 기노자가 묻는다.
"렌트?"
"학생이 차를 사는 건 상식적으로 무리잖아."
"그렇긴 해도… 면허 딴 게 여름이었지? 몰아본 적은 있어?"
"못 믿어?"
"솔직히 불안한데."
불신이 가득 섞인 눈초리가 농담이란 걸 안다. 눈이 마주치자 기노자와 코우가미는 결국 웃어버렸다. 내 불신을 잠식시키기 위해 노력해봐, 코우. 힘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어디 가는 거야? 그건 비-밀. 의아한 눈초리를 하면서도 기노자는 수긍했다. 렌트한 RV 차량은 시원스럽게 도심을 빠져나간다. 그 동안 라디오를 틀거나 노래도 들었다. 그저 조용하기도 했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편한 관계가 가장 좋다고 누가 그랬더라. 흘긋 리어뷰미러를 통해 본 기노자는 시트에 등을 기대고 자고 있었다. 차 안이 답답해 열어놓은 파카 밑, 회색 스웨터 사이에서 흰 목덜미가 두드러진다. 항상 목깃까지 잠그는 교복 셔츠보다 두툼한 스웨터의 라운드넥이 훨씬 개방적이었다. 도드라진 쇄골과 결후를 멍하니 보다 코우가미는 핸들을 잡은 손이 흔들려 앗차 싶어 코우가미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편한 수준이 아니지.
충동적으로 계획을 잡고 장소를 물색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운전 면허증을 땄을 때, 문득 코우가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서툰 성격 탓인지, 환경 탓인지 혹은 둘 다 인지 기노자는 코우가미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고 고백했다. 코우가미도 아마 비슷한 감상이었다. 친구야 많았지만 기노자만큼 오랫동안 시간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성이 있을까? 반짝반짝. 그 형용사를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이유로 준비하기엔 꽤 성대한 작업이었던 데다 코우가미 본인도 평소보다 기합이 들어갔거나 열심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아, 그렇구나.
성찰은 싱겁게 끝났다. 아니, 받아들이는 코우가미 쪽이 시원스러웠다고 해야 할지. 어느 쪽이든 코우가미는 제가 기노자를 친애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했다. 깨달았다고 해도 별로 그 이상의 진도를 나가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제가 소중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섣불리 고백이라도 했다간 그 성실한 친구는 몇날며칠을 고민하다 미안하다고 말한 뒤, 그래도 마음에 짐을 갖고 살 게 분명했다. 그것보단 지금처럼 편한 관계가 훨씬 나았다. 물론 코우가미는 가끔 너무 편하다 못해 저런 식으로 무방비하게 구는 기노자를 보며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지만.
도착했을 땐 짧은 겨울해가 벌써 슬슬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허겁지겁 텐트를 치는 와중에 익숙치 않은 작업에 기노자는 한 번 넘어질 뻔 했다. 레토르트 카레는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토치는 오랫동안 방치한 탓인지 화력이 약했고, 가장 중요한 건 기상예보를 배반하는 것처럼 날이 흐렸다. 야심차게 준비한 천체망원경으로도 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풀이 죽은 코우가미의 옆에서 기노자가 웃었다.
"괜찮아. 나는 오늘 너랑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그래도……."
"갑자기 웬 별 구경인가 싶지만, 일단 나 혼자였으면 이렇게 멀리까지 캠핑 오는 건 생각도 못했을 거고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기노자는 물끄러미 앞을 바라본다. 그렇게 높진 않아도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산 중턱이다. 빽빽한 침엽수림에 어둡게 잠긴 풍경 어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지 코우가미는 알 수 없었지만 기노자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집에선 밤이 너무 밝으니까."
"응?"
"희미하긴 해도 가끔 너무 밝게 느껴져서 암막 커튼을 치고 자거든. 그래서 그냥 이런 것도 좋아. …고마워, 코우가미."
모포를 둘둘 싸매고 잠깐 고개를 숙였던 기노자가 눈을 마주친다. 부끄러운지 표정이 미묘했지만 시선만은 피하지 않고 있었다.
"벼, 별 말씀을."
"나도 면허를 따놨으면 좋았을텐데. 돌아가는 길도 네가 운전해야 되잖아."
"그 정도는 괜찮아."
"그래도 일찌감치 자는 게 낫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코우가미를 뒤로 하고 기노자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코우가미는 애꿎은 모닥불만 불쏘시개로 푹푹 쑤시다 고개를 숙였다. 와, 키스할 뻔 했다.
"코우가미, 일어나. 일어나, 코우."
한참을 밖에서 모닥불만 뒤적거리다 코우가미가 텐트 안에 들어갔을 때 기노자는 이미 반쯤 꿈나라였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어서 자라고 얘기하는 기노자에겐 알았다고 말하면서도 코우가미는 한참을 뒤척였다. 아쉬움과 속상함이 반, 그래도 설렘이 반이었다. 고백할 맘도 없고, 그 뒤는 욕심내지도 않는 말은 취소한다. 그래도 좋아하는 상대랑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둘이라는 생각은 혈기왕성한 10대의 밤을 불꽃처럼 치열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뒤르켐의 이론을 생각하다가 겨우 잠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깨를 흔드는 감촉에 코우가미는 간신히 눈을 떴다.
"아직 어두운데……."
"일단 일어나 봐."
잠에 취한 코우가미의 손을 막무가내로 잡아 끌고 기노자는 텐트 밖으로 나섰다. 침낭에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한기에 눈이 확 뜨여진 코우가미의 앞에.
"…굉장하다."
"그렇지?"
기노자의 목소리도 들떠 있었다. 저녁의 구름은 어디론가 싹 걷히고 하늘에 흰 점이 쏟아질 것처럼 가깝게 박혀 있었다. 황급히 차 트렁크를 열어 책을 꺼내고 코우가미는 망원경 앞에 앉았다. 쉽게 찾을 수 있다던 오리온자리의 세 별은 정말 한눈에 보였다. 서쪽, 올라가서, 팔 부근의 베델기우스. 그 옆에, 저 쪽으로 밝은 게 프로시온. 시리우스는 더듬어 찾을 필요도 없었다. 망원경으로 보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밝았다. 겨울의 대삼각형. 물고기자리, 카시오페아, 페가수스.
"기노, 봐봐, 저렇게 보면……."
흥분한 코우가미가 고개를 돌리면 바로 옆에 기노자가 상기된 얼굴로 딱 붙어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기노자도 정신이 없었는지 꼬박꼬박 쓰던 안경도 없다. 무심코 마주친 시선에 숨만 하얗게 올랐다가.
놀라 감지도 못한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아까의 풍경이 보이는 듯 했다. 오리온, 오리온의 사냥개라는 큰개와 작은개, 베델기우스, 프로시온, 가장 밝은 시리우스. 불꽃이 튀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폭죽처럼 하얗게 빛난다. 볼록렌즈로 보는 것처럼 왜곡되는 시야.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한 번 깜박일 때마다 별이 쏟아졌다. 책에서 보던 우주가 그 안에 있었다.
"좋아해."
입술을 떼고, 서로의 숨길이 고스란히 닿는 거리에서 결국 코우가미는 그렇게 뱉고 말았다. 차갑게 식은 기노자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 깍지 끼고 손등을 더듬으면서 코우가미는 말했다. 기노자가 밭은 숨을 내쉴 때마다 코 끝에 내뱉은 숨의 온기가 닿았다. 흰 숨이 오른다.
"좋아해, 기노."
찬 바람 속에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알파, 1등성, 별자리, 신화, 은하수, 뭔가 할 말은 많았던 것 같은데 코우가미의 머릿 속엔 그 말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좋아해, 기노. 너도, 그러면, 안돼?
"반짝반짝해."
그러고보니 발단은 전부 기노자의 이 말 때문이었다. 하늘이 반짝반짝 했어.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 백열등 밑에서 여전히 상기된 얼굴 그대로, 얼이 빠져있던 기노자가 겨우 입을 연다.
"……하늘이?"
"아니, 네가."
그리고는 처음 반짝반짝하다고 말했던 그 때보다 더 새빨갛게, 화르륵 달아오른다. 그 때는 목깃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목 끝까지, 라운드넥 밑에서 보이던 하얀 쇄골이 연분홍빛으로 얼룩덜룩하다. 그, 그러니까, 그런, 여자한테 할 법한 표현은……! 버벅거리는 소리가 끝내 말이 되지 못한다. 혀를 씹은 건지 아, 하는 소리를 끝으로 기노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잠깐의 정적.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웃음을 코우가미는 참지 못했다. 시끄러워! 웃지 마! 네가 쓸데없는 말을 하니까 그, 그러는 거 아냐! 놀라 갈라진 목소리도 웃겼다. 너무 웃겨서 눈꼬리에 찔끔 눈물까지 배였다. 헉헉대면서 손가락으로 눈을 쓸어내리는 코우가미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지 이제 기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 기노 삐진 거 아니지?"
"…아니야."
"하늘은 반짝반짝해?"
"너 결국 그것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냐!"
"기노가 별이 아니더라도 고맙다고 했지만, 난 이게 목적이었다고."
"언제 했던 건지 기억도 안 나는데."
"여름 방학 전에. 그래서 집에 가서 검색하고, 계획 짜고, 여름방학 내내 아르바이트 하고, 면허 땄는데."
"그 때부터?"
"응, 그 때 부터."
놀란 얼굴의 기노자가 입을 뻐끔거린다. 왜? 소리는 안 나도 입 모양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야 너를 좋아하니까."
"ㄴ, 농담은 한 번만……."
"농담 아냐. 진짜로 너를 좋아해. 그게 아니면 너한테서 하늘이 반짝반짝하단 얘기를 듣고, 그 말을 다시 하고 싶은 널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걸. 나도 '반짝반짝한 하늘'을 한 번쯤 보고 싶긴 했지만."
"……."
"그리고 실제로 보니 죽기 전에 이런 풍경을 못 봤으면 정말 후회했을 지도 모를 정도로 예쁘고 아름다워. 너한테 감사해, 기노. 네가 아니면 나는 이런 풍경이 있는 줄도 몰랐을 테니까. 그래도. 그래도 말야, 기노."
깊게 숨을 들이쉬면 청량한 새벽 공기가 폐 안에 가득 들어찬다. 여전히 얽혀있는 손가락들을, 벗어나려는 듯 꼼지락거리는 기노자의 손을 다시 한 번 꽉 잡고 코우가미는 말을 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잊어버렸던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이제야 전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충동적인 키스, 입술에 닿았던 온기, 망원경을 보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보였던 눈동자. 코우가미는 덩달아 얼굴이 벌개질 것 같았다.
"네가 훨씬 예뻐."
무심코 고백 해버릴 정도로 기노자의 들뜬 표정이 예뻤다. 한숨쉬거나, 짜증내거나, 공부에 골몰하거나, 고민하거나, 찡그리거나. 그런 얼굴도 좋았지만 들뜨고 상기된 얼굴이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코우가미도 참을 수 없었다.
"손, 안 뿌리칠 거면 키스 한 번 더 해도 돼?"
크게 뜨인 눈이 깜박거린다. 물론 코우가미는 대답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코우가미의 입술이 다시 닿기 1mm 전, 기노자가 툭 내뱉었다.
"…맘대로 해."
응, 기노.
살짝 벌어진 입술을 핥았다. 맞잡은 기노자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이번엔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코우가미는 또 웃고 말았다. 이번엔 속으로.
자정을 넘긴 심야, 말끔하게 닦인 유리벽 너머로도 새카맣고 희미한 스탠드, 모니터와 키패드의 조광만이 시야를 확보해주는 광원일 때, 적막한 사무실에 낮의 풍경을 덧씌워 볼 때면 먼지도 아닌 것이 기노자의 눈 앞에 윤곽을 그리며 어른거렸다. 의식하면 숨이 가빠왔다. 무심코 힘이 들어가는 손가락, 딱딱하게 굳어지는 어깨,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도리어 날카로워 지는 신경. 목적을 모르는 충동은 때때로 그런 식으로 기노자의 안에서 들썩였다. 그럴 때 제 범죄계수와 사이코패스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하며 기노자는 지친 눈꺼풀을 내리 깔고 천천히, 깊게 심호흡했다.
눈은 마음의 창.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기노자는 안경을 닦았다. 반복적으로 손가락 두 개를 움직일 뿐인 단순한 행위지만 몰입과 집중은 많은 것을 잊게 만든다. 목 언저리에서 먹먹해지도록 쿵쾅거리며 뛰었던 맥이 느리게 잠긴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유리알을 확인하고 익숙한 프레임을 쓰면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온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는 것을 무시하며 기노자는 늘상 그런 식으로 잊었다.
흔들리는 잔상의 이름을 알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욕망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잊혔다.
"언제… 이상한 거라도 본 건가?"
맨 발에 감겨 드는 느낌이 낯설다. 광이 잘 난 맨질맨질한 앞 코에 선명한 색상이 부각되어 빛난다. 뭐, 코우가미의 행동이 기노자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었던 건 한 두번도 아닌 지라 일단은 그러려니 하고 기노자는 순순히 다리를 맡겼다. 무신경에 가까운 기노자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코우가미는 흡족한 얼굴로 유지에 싸인 다른 한 짝을 박스에서 꺼냈다.
코우가미가 기노자의 종아리를 붙잡고 신기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여성용 구두였다. 아찔하고 유려한 곡선, 기노자의 체중을 다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가늘고 예리한 굽, 선정적이다 못해 눈이 시린 스칼렛. 여성용 구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기노자조차 조명 밑에 진열되어 있다면 한 번쯤 시선을 줄 정도로 화려한 구두였다.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가죽 표면은 에나멜처럼 매끈하고, 부드러운 내피가 살갗처럼 착 달라붙어 발을 감쌌다. 275mm라는 보통의 여성으로 상정할 수 없는 치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꼭 맞아 떨어진다.
어디서 구했을까. 이 정도면 가격도 꽤 나가겠지.
기노자는 지난 3개월간 코우가미의 물품 구매 신청 이력을 상기해본다. 기노자는 제 기억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쿠니즈카나 카가리, 마사오카의 이력에도 이런 의외의 물건은 없었으나 코우가미가 기노자의 눈을 피해 신발 한 켤레 못 구할 사람은 아니란 걸 안다. 카라노모리나 아오야나기라면 코우가미의 요청을 고가의 답례품과 함께 흔쾌히 받아들여 줬을 것이다. 그 답례의 가격까지 합친다면 이 구두의 가치는 더 올라가게 된다.
아깝다.
진심으로 기노자는 제 발에 신겨진 구두가 아까웠다. 보드랍고 매끈한 종아리와 완만한 곡선을 가진 여성의 발을 가진 이를 주인으로 삼았다면 12cm 스틸레토도 조금쯤은 더 행복했을 텐데.
하나 뿐인 동기생의 적당히 근육 잡힌, 분석관의 늘씬한,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다니는 집행관의 탄탄한 다리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올려다보는 시야에는 볼품없이 벌어진 마른 다리만이 있었다. 매끈하지도, 부드럽거나 탄력 있지도 않다.
무릎, 도드라진 정강이뼈, 발등 위로 툭 불거진 푸른 핏줄. 어디 하나 어울리는 구석이 없었다. 더군다나 다리 군데군데엔 옅은 흉터가 많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세포 재생 시 과민반응으로 인한 흉터가 생기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신경 써서 적절한 연고를 발랐을 때의 이야기다. 밖으로 보이는 타박상이나 찰과상 같은 건 그 때를 제외하곤 아프지 않아 기노자는 한 번 상처가 나고 딱지가 지면 잊어버렸다. 한 때는 온 몸에 상처가 떨어지지 않는 생활을 했으니 일일이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조심성이 없는 건지 지방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마른 다리는 지금도 종종 멍이 들었다. 무심코 다리를 옮겼다가 가구 모서리에 찍히는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뭘 어쩌겠는가.
필시 저 구두를 디자인하고 만든 사람은 이런 광경을 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양 발에 신겨진 맨들맨들하고 착화감 좋은 구두를 이리저리 발을 움직여보며 기노자는 남의 것처럼 바라본다.
"맘에 들어?"
"맘에 드는 건 네 쪽이겠지 코우가미."
코웃음치며 기노자는 굽 끝으로 그의 상체를 꾸욱 누른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 감각이었다. 아찔한 굽은 의외로 안정감이 있었다. 아찔한 굽이 단단한 가슴 근육을 파고들 때마다 묘하게 찡그려지는 코우가미의 표정이 재밌어 어느 새 반복적으로 뒷꿈치에 힘을 세게 싣고 있었다.
"그만해, 기노. 아파."
코우가미는 가볍게 기노자의 발목을 잡고 살짝 떼어낸다. 부드럽지만 강한 악력이다. 필시 기노자가 저항한다면 여전히 부드럽게, 그대로 찍어누르고 짐승 같은 섹스를 반복할 것이다.
"아프라고 누른건데."
"그러라고 신긴 건 아닌데."
"어차피 어디서 이상한 거나 보고 한 번 시험해보고 싶었겠지. 아닌가?"
"글쎄. 그냥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기노자의 무심하지만 날 선 어조에 코우가미가 드물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노자는 진절머리 났다. 달작지근하거나 말랑말랑한 연애는 애저녁에 끝났다. 그런 건 언제쯤 있었을까. 있긴 했었나. 손 끝만 스쳐도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키스를 할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과거가 어느 날엔 있었던 것 같은데. 연애는 몰라도 섹스는 타성이다. 이제는 집착인지 아쉬움인지도 모르는 감정의 덩어리를 무시하면서도 발기하고 사정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끔 기노자는 놀라웠다. 코우가미가 부르면 부르는 대로 결국 오고 마는 저도 웃기지만 코우가미는 무슨 생각으로 부르는 지 알 수 없었다. 한 때는 화를 냈던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아쉬워 한숨을 내쉬었다가도 키스하고 말았던 것 같기도 하다. 선명하지 못한 건 기노자나 코우가미의 심리 색상 뿐이 아니다. 불순물이 섞여 복잡하게 흐린 관계가 둘의 현재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으려면 기노자의 눈 앞에 희미한 잔상이 어른거렸다. 당연하게 안경을 벗으려다 손가락이 그대로 얼굴에 닿는다. 아. 안경은 코우가미가 어딘가로 내팽개쳤었다. 어디에도 신경을 돌리지 못한 채로 기노자는 잔상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지는 걸 보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그림자를 따라 내린 시선 끝에 코우가미가 들어왔을 때 기노자는 무심코 탄성을 뱉었다.
"기노?"
기노자의 시선이 엉뚱한 곳을 배회하고 있어도 코우가미는 여전히 기노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손엔 여전히 강렬한 색의 새빨간 구두를 신은 제 발이 쥐어져 있었다. 흰 셔츠, 검은 넥타이, 흰 손, 흰 다리, 검은 바지,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또렷한 색.
"코우."
이름을 불러본다. 지금은 그다지 부르지 않는 방식에 코우가미의 고개가 조금 기울어진다. 한 때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 손 끝만 스쳐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키스라도 하려고 하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잠들기 전엔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 휴대전화 액정을 한참이나 들여다 봤을 정도로. 지금은 어중간하게 내팽개쳐져 이름 붙이지 못한 관계에 타성에 젖은 섹스만을 반복하지만, 그래도, 때때로 사랑한다. 사랑했다는 기억 속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건지, 다른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텅 빈 사무실에 남아 잔업을 하고 있으면 1년이 넘도록 공석인 옆자리가 사무쳤다. 그리웠다는 게 아니다.
"너야 어떨지 모르지만."
코우가미는 저를 사랑했을까?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직하거나 우직한 성격이라 그러는 게 아니다. 거기까지의 과정이 번거로워서 안 할 뿐이다. 쓸데없이 거짓으로 제게 애정을 속삭일 필요는 없었으니 아마 어느 순간까지는 코우가미도 기노자를 사랑하긴 했을 것이다. 지금은, 사랑할까?
"나는 너를 여전히 좋아하는 것 같아."
좋아한다. 그 말이 이토록 가볍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 기노자는 꿈에도 몰랐다. 얕은 숨결 한 번에도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무게감이다. 제 감정을 확신하긴 어려웠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발로 더듬듯이 코우가미의 상체를 타고 올라가 가볍게 누른다. 맨질맨질한 앞코와 아찔한 굽이 파고든다.
"그거 말고는 내 욕망이 설명이 안돼."
"…어떤?"
코우가미가 묻는다. 어떤? 그야 당연히. 기노자는 웃었다. 숨이 가빠온다. 무심코 힘이 들어가는 손, 경직되는 어깨, 날카로운 신경. 그건 분노다. 업무에 대한 부담이라든가 거기까진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혼자 일이라도 하고 있으면 처절하게 깨달아버린다.
"널 죽이고 싶어."
천천히 발뒷꿈치에 힘을 준다. 파고드는 게 꽤나 아픈 모양인지 코우가미는 조금 인상을 쓴다. 기노자는 이대로 푹, 하고 피부와 근육을 찢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생각을 할 때의 제 범죄계수와 색상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버림받은 남자들이 여자를 죽이는 케이스의 사건은 꽤 많았다. 복잡한 치정극에 혀를 내두른 적도 한 두번은 아니나 지금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네가 죽어줬으면 좋겠어."
"감시관이 그런 생각을 하면 사이코패스가 흐려질걸."
"그래서 못 죽이는 거겠지.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너랑 이러고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이 관계는 끝이 나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애매하게 남아 빙글빙글 돈다. 기노자의 욕망은 그저 어른거리다 사라질 것이다. 분노와 증오가 애정에 기반하는 복잡한 감정은 정상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겨 보면 어울리나?"
기노자는 생각을 포기하고 코우가미에게 물었다. 코우가미는 셔츠 사이를 파고들던 기노자의 한 쪽 발을 받쳐 들고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물론.
"그럼 키스 해."
잊어버리는 게 좋은 욕망이다. 기노자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뒤에서 여전히 새빨간 12cm 스틸레토가 보이는 듯 했다. 무장한 갑옷 사이를 뚫고 들어가는 예리한 단검.
그냥 사관생도, 코가미가 황태자인 그런 걸로 연애물이 보고 싶었으나 가이드를 잡다 보니 너무 어려워서 이건 도저히 안될 것 같다... 뭔가.... 그냥 이러고 있는데 유학생인 마키시마가 온다든가 절친자리 뺏기고 서먹한 기노자라든가 코가미가 안에 앉아 있는 동안 총알받이로 개처럼 구르는 기노자라든가, 정치감각은 제로라 암투에 휩싸이는 기노자라든가 보고 싶었지만...또르륵...ㅠ
밀덕이신 분들의 설명 바랍니다...제겐...너무 어려웠던ㅠㅠㅠㅠ
"뭐… 너무 그러지 마, 기노."
쑥스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는 얼굴은 여전했으나 확실히, 지금까지 몰랐던 게 이상할 정도로 매일 보는 얼굴과 닮았다. 몇 백년을 이어 온 왕가의 얼굴은 본관 1층 현관 옆에 걸려 있어 기노자도 수천 번은 봤을 텐데 왜 한 번도 깨닫지 못했을까. 그의 얼굴은 역대 가장 강경하고 공격적인 통치를 펼치고 있는 여왕과 똑 닮아 있었다.
"공개석상에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코가미의 말대로 나라에 하나 뿐인 왕태자는 한 번도 공개석상에 드러난 적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혼인한 적 없는 여왕이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왕태자에 대한 얘기는 처음 그 존재가 드러난 이후로도 여전히 존재하기만 할 뿐, 정체는 밝혀지지 않아 여전히 언론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기노자는 수도 가운데 있는 근엄한 궁을 상상한다. 대륙의 끄트머리에 있는 이 약소국은 천 년이 넘는 역사가 모두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는 치열한 나라였다. 서쪽의 제국은 무역으로 언제나 부유한 나라를 차지하고 싶어했고 바다 건너 동쪽에선 제국을 치기 위한 교두보로 노렸다. 중세 어느 즈음에 종교 논란으로 이주한 과학자들을 모두 받아들여 주변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진보한 기술과 셀 수 없는 전쟁의 경험으로 다져진 국방력과 전술이 이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생각해보면 왕태자가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은 휴전 중이지만 전쟁은 언제 발발할 지 모른다. 그럴 바엔 단순히 방어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제국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여론이 팽배했다.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왕위를 계승해 군 통수권자가 된다. 만 명의 군인이 있어도 필요한 건 유능한 지도자다. 그 근엄한 궁 한가운데에 앉은 코가미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기노자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노자가 절대 나란히 올라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뜩이나 변변한 가문도 아닌, 심지어 이전 전쟁에서 누명을 뒤집어쓰고 좌천 당한 자의 아들인 기노자라면 더 그렇다.
"그래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줄 거지?"
친구?
그 말에 열이 끝까지 뻗쳤다가도 기노자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치닫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금까지도 따라잡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유연한 사고방식과 끊임없는 호기심, 철학적이기까지 한 고찰과 명민한 두뇌, 코가미가 한 번씩 입을 열 때마다 기노자는 때때로 그와의 아득한 거리를 실감하곤 했다. 단순히 내일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기노자에게 그가 그리는 것들은 너무 멀었다.
처음부터 그는 기노자에게 너무 먼 사람이었던 것이다. 희망을 가진 적은 없었으나 그 일말의 희망조차도 완전히 부인 당한 순간, 체념은 오히려 그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그래."
왕태자의 친구라니. 우연인 주제에, 그조차 과분한 타이틀이 아닌가.
"…ㅇ이, …노…, 어이, 기노자 중위!"
퍼뜩 정신을 차리면 옆에서 카가리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기노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 잠이 와?"
카가리의 말대로, 잠이 와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 면목 없어 그의 하극상 같은 말투를 지적할 새도 없이 얼굴이 홧홧해진다. 카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통신기를 매만진다. 지원요청을 넣은 지는 한참 됐지만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고립된 중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키는 것 뿐이었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는 삼일밤낮이 넘게 지속되었다. 이전에도 한 차례 큰 패배를 겪었던 지형이니 만큼 당연히 이 쪽으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예측은 완벽히 빗나갔다. 제국군의 주축은 전부 이 쪽에 몰려 있는 듯 했다.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다. 전차는 자비가 없었고 포탄은 정확히 관사를 향했다. 지휘 체계를 수습하는 사이 대대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휘말렸다. 다른 쪽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군분투 하다 보니 겨우 사십 여명 남짓 남은 중대에서 자동적으로 기노자가 지휘관이 되었다.
숨을 죽인 새벽 공기가 날카롭다. 모두가 예리한 살의를 지니고 상대를 노리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다시 전투는 시작될 것이다.
침착하자.
파리한 새벽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불안한 팔십여 개의 눈동자는 오로지 기노자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마저 죽는다면 다음 부담은 카가리에게 넘어가지만 그는 고작 지난달에 임관한 소위였다. 실전 경험이 없는 건 기노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새파란 햇병아리에게 마지막 책임을 지우는 건 너무 가혹했다.
코가미.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오래된 얘기였다. 잠깐 조는 사이 학창시절의 꿈을 꿨다. 당시엔 룸메이트였던 그는 지금은 저 근엄한 궁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사관생도의 보급 제복 대신 목깃 하나까지 예단된 옷을 입고 옥좌에 앉아 전쟁 발발 보고를 듣고 있을까. 턱을 괴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도를 보는 얼굴이 훤했다. 생각이 막히면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게 코가미의 버릇이라 병과 과제를 할 때면 시끄럽게 책상을 두들기는 손가락을 경고조로 건드리는 게 기노자의 일상이기도 했다. 보고를 받으면서, 한번쯤 나를 생각해줄까.
궁지에 몰려서 정신이 맑아지는 건 그 때와도 비슷하다.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지만 여하튼 한 번 나락 끝까지 떨어졌다는 점에선 다를 바 없었다.
기노자 노부치카는 생각보다 애국심 투철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지켜야 할 가치는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었으나 하나 뿐인 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의 정체를 우연찮게 알아버린 이후엔 어쩔 수 없이 나라 전체로 확대 되어 버렸다. 정체가 들통난 이후 코가미는 기노자에게 이런저런 소망을 털어놓았다. 좀 더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 모두가 행복한, 부조리 없는, 정의로운, 평화로운, 이상적인 나라. 그가 꿈꾸는 것을, 그가 지키고 싶은 것들은 곧 어쩔 수 없이 기노자가 지켜야 하는 것들이 되었다. 사랑이 다 그랬다.
여기서 진지를 지키는 것이 그 모든 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눈을 감으면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습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변덕스러운 해양성 기후는 늘 예측불허의 강수량을 자랑한다.
"카가리."
이름을 부르면 카가리가 입을 샐쭉 내밀며 왜요, 라고 묻는다. 묘하게 붙임성이 좋아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한 번 거하게 윗사람 심기 거스르고 영창 갈 말투였다. 하긴 그는 기노자처럼 위를 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워낙 말썽쟁이인 터라 부모님이 반 강제로 집어넣은 거라 했다. 그 부모님도 지금쯤 하나뿐인 아들이 사지를 헤맨다고 하면 전전긍긍할 것이다. 기노자와는 달랐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야만 했다.
"지금부터 이동한다."
"엑? 어디로?"
"낙엽이 썩을 때가 됐어."
기노자의 말에 눈을 깜박이던 카가리가 아하, 하고 작게 감탄한다.
울창한 나무들이 잎을 다 떨구고 나면 얼핏 보면 평지로 보일 정도의 낙엽이 쌓인다. 부엽토로 물렁한 땅은 비가 내리면 지반이 쉽게 무너졌다. 적어도 발을 묶을 정도의 타격은 줄 것이다.
"가자."
조용히 수신호를 보낸다. 살아남는 건 바라지 않았다.
나라에 모든 영광.
아마 지금쯤 코가미의 얼굴이 새로 추가되어 걸려 있을 그 1층 로비엔 저런 문구가 먼지 쌓인 채로 쓰여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 문구가 떠올라 기노자는 속으로 한 단어만 바꿔보았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밤새 정신없이 싸질러 놓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쯤이면 늘 이 생각을 한다. 그리고 최근엔 이 생각을 하는 나조차도 지겹다.
탁자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재떨이를 끌어당기며 무심하게 방을 둘러본다. 쓰레기통에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아, 또 깼군.
이 생각까지 도달하는 것조차 언젠가 봤던 영화나 드라마 같다. 모든 게 데자뷰다. 기노는 신경질적인데다 욱하는 버릇이 있었다. 최근에는 아주 질 나쁜 쪽으로 발전한 모양인지 언젠가부터는 물건을 집어던지는 모양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포토스탠드였던 것 같다. 단단한 강화 아크릴로 된 홀로그램 스탠드는 어지간한 낙하 충격은 전부 버틸 수 있을 텐데, 아예 손으로 부러뜨린 것 같았다. 간밤에야 눈치 챈 손가락의 밴드를 생각했다. 그 다음엔 머그컵이었다. 그 다음에 왔을 땐 유리창. 어쩐지 내내 암막커튼이 쳐져 있길래 뭔가 했더니.
기노는 3일 철야했다. 별 수 없었다. 개는 네 마리인데 주인은 한 명이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안한 마음도 한두번이고, 보고서 쓰라고 들들 볶을 때는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 미루고 미루다 개판으로 써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기노는 성질을 부렸다. 알 게 뭐냐.
수리할 시간도 없었는지 대충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 놓은 꼴이 우스웠다. 그러고 돌아서다 제대로 치워지지 않은 유리가루에 발이 베였던 것도 기억났다. 따끔하게 베이던 감촉. 고작 5mm도 안되게 베였을 뿐인데 그 날은 하루종일 발이 신경 쓰였다. 덕분에 기분이 나빠 기노의 명령은 몽땅 무시했고 기노는 기노대로 기분이 상했으니 더 신경질 내고.
악순환이다.
그러고는 짐승처럼 들러붙는 것도 우스웠다. 달작지근한 전희나 후희도 없고, 밀담도 없고, 키스도 없고, 그저 욕망에만 충실하게. 쾌감을 느끼는 것조차 신기했다. 우리의 관계는 예전에 끝났을 것이다. 누구 한 명 이별의 말을 고하진 않았지만 그걸 지금 하는 것도 이상한, 습관적인 관계. 신청하지 않은 외출 허가를 받아 와 차에 타고, 기노의 집까지 이동하는 시간은 버티기 힘들다.
귀찮게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내 방에서 하는 건 어때?
그렇게 물어봤자, 기노의 대답은 뻔했다. 집행관의 방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사이코패스가 흐려질 것 같은데. 그러면 하질 말든가. 소파는 싫어.
냉랭한 눈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기노.
나는 여전히 잠든 너에게 묻는다. 집행관은 개다. 잠재범과는 선을 그어라.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무시하면서도 너는 나의 외출 허가를 받아낸다. 차에 태우고 너의 집까지 데려와 결국 같은 침대에서 잠든다. 집에서는 담배 피지 말라고 그렇게 고깝게 굴면서 결국 너는 재떨이를 치우지 않는다. 몇 개의 접시와 컵이 깨져 나가는 동안에도 네가 쓰지 않는 유리 재떨이는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나도.
나는 결국 너에게 한 번도 싫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싫다고 말하면 너는 미련 없이 떠나갈 텐데 매번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네가 잠들어 있는 아침을 홀로 맞는다. 내 것 같은 재떨이에 재를 털고, 쓰레기통에 처박힌 유리 파편들을 보다가, 또 유리 책상에 눈을 돌리지.
눈물은 생각보다 투명하지 않다는 건 예전에 알았다. 당연한 얘기였다. 눈물은 정수된 물이 아니다. 지방, 단백질, 무기질, 그 외 노폐물이 섞인 것은 생각보다 훨씬 짜고 생각보다 진한 얼룩을 남긴다. 촛농이 굳어 떨어진 것 마냥 튀어 원으로 번진 자국을 나는 맞춰본다. 살인사건의 현장 검증을 하는 기분이다. 죽은 건 누구고 죽인 건 누구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 너를 본다. 메마른 얼굴엔 피로만이 가득하지 눈물은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너는 왜 나를 자꾸 부르는 걸까. 무언가를 집어 던지며 화를 내다 의미없는 섹스를 하고, 결국 재떨이를 앞에 두고 울 거면서. 그리고 나는 왜 거절하지 못하는 걸까. 네가 홀로 버틴 시간들을 보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주제에. 다정함도, 애정도, 위로도 줄 수 없으면서 못 이기는 척 너를 따라 오는 걸까.
"기노."
잠든 너는 대답이 없다. 나는 이 시간이 지루하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나를 긁어 내리는 데도, 돌파구가 없어 몇 번이나 반복하고 마는 악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