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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기노] Scarlet Stiletto
아쿠아님이 내 생일이라고 그려주신 그림(뿌듯) 보고 생각한 거.
코우기노는 여전히 캐해석이 들쑥날쑥해서 어렵다..
가끔 눈 앞에 희미한 잔상이 어른거렸다.
자정을 넘긴 심야, 말끔하게 닦인 유리벽 너머로도 새카맣고 희미한 스탠드, 모니터와 키패드의 조광만이 시야를 확보해주는 광원일 때, 적막한 사무실에 낮의 풍경을 덧씌워 볼 때면 먼지도 아닌 것이 기노자의 눈 앞에 윤곽을 그리며 어른거렸다. 의식하면 숨이 가빠왔다. 무심코 힘이 들어가는 손가락, 딱딱하게 굳어지는 어깨,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도리어 날카로워 지는 신경. 목적을 모르는 충동은 때때로 그런 식으로 기노자의 안에서 들썩였다. 그럴 때 제 범죄계수와 사이코패스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하며 기노자는 지친 눈꺼풀을 내리 깔고 천천히, 깊게 심호흡했다.
눈은 마음의 창.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기노자는 안경을 닦았다. 반복적으로 손가락 두 개를 움직일 뿐인 단순한 행위지만 몰입과 집중은 많은 것을 잊게 만든다. 목 언저리에서 먹먹해지도록 쿵쾅거리며 뛰었던 맥이 느리게 잠긴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유리알을 확인하고 익숙한 프레임을 쓰면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온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는 것을 무시하며 기노자는 늘상 그런 식으로 잊었다.
흔들리는 잔상의 이름을 알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욕망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잊혔다.
"언제… 이상한 거라도 본 건가?"
맨 발에 감겨 드는 느낌이 낯설다. 광이 잘 난 맨질맨질한 앞 코에 선명한 색상이 부각되어 빛난다. 뭐, 코우가미의 행동이 기노자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었던 건 한 두번도 아닌 지라 일단은 그러려니 하고 기노자는 순순히 다리를 맡겼다. 무신경에 가까운 기노자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코우가미는 흡족한 얼굴로 유지에 싸인 다른 한 짝을 박스에서 꺼냈다.
코우가미가 기노자의 종아리를 붙잡고 신기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여성용 구두였다. 아찔하고 유려한 곡선, 기노자의 체중을 다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가늘고 예리한 굽, 선정적이다 못해 눈이 시린 스칼렛. 여성용 구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기노자조차 조명 밑에 진열되어 있다면 한 번쯤 시선을 줄 정도로 화려한 구두였다.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가죽 표면은 에나멜처럼 매끈하고, 부드러운 내피가 살갗처럼 착 달라붙어 발을 감쌌다. 275mm라는 보통의 여성으로 상정할 수 없는 치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꼭 맞아 떨어진다.
어디서 구했을까. 이 정도면 가격도 꽤 나가겠지.
기노자는 지난 3개월간 코우가미의 물품 구매 신청 이력을 상기해본다. 기노자는 제 기억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쿠니즈카나 카가리, 마사오카의 이력에도 이런 의외의 물건은 없었으나 코우가미가 기노자의 눈을 피해 신발 한 켤레 못 구할 사람은 아니란 걸 안다. 카라노모리나 아오야나기라면 코우가미의 요청을 고가의 답례품과 함께 흔쾌히 받아들여 줬을 것이다. 그 답례의 가격까지 합친다면 이 구두의 가치는 더 올라가게 된다.
아깝다.
진심으로 기노자는 제 발에 신겨진 구두가 아까웠다. 보드랍고 매끈한 종아리와 완만한 곡선을 가진 여성의 발을 가진 이를 주인으로 삼았다면 12cm 스틸레토도 조금쯤은 더 행복했을 텐데.
하나 뿐인 동기생의 적당히 근육 잡힌, 분석관의 늘씬한,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다니는 집행관의 탄탄한 다리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올려다보는 시야에는 볼품없이 벌어진 마른 다리만이 있었다. 매끈하지도, 부드럽거나 탄력 있지도 않다.
무릎, 도드라진 정강이뼈, 발등 위로 툭 불거진 푸른 핏줄. 어디 하나 어울리는 구석이 없었다. 더군다나 다리 군데군데엔 옅은 흉터가 많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세포 재생 시 과민반응으로 인한 흉터가 생기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신경 써서 적절한 연고를 발랐을 때의 이야기다. 밖으로 보이는 타박상이나 찰과상 같은 건 그 때를 제외하곤 아프지 않아 기노자는 한 번 상처가 나고 딱지가 지면 잊어버렸다. 한 때는 온 몸에 상처가 떨어지지 않는 생활을 했으니 일일이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조심성이 없는 건지 지방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마른 다리는 지금도 종종 멍이 들었다. 무심코 다리를 옮겼다가 가구 모서리에 찍히는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뭘 어쩌겠는가.
필시 저 구두를 디자인하고 만든 사람은 이런 광경을 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양 발에 신겨진 맨들맨들하고 착화감 좋은 구두를 이리저리 발을 움직여보며 기노자는 남의 것처럼 바라본다.
"맘에 들어?"
"맘에 드는 건 네 쪽이겠지 코우가미."
코웃음치며 기노자는 굽 끝으로 그의 상체를 꾸욱 누른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 감각이었다. 아찔한 굽은 의외로 안정감이 있었다. 아찔한 굽이 단단한 가슴 근육을 파고들 때마다 묘하게 찡그려지는 코우가미의 표정이 재밌어 어느 새 반복적으로 뒷꿈치에 힘을 세게 싣고 있었다.
"그만해, 기노. 아파."
코우가미는 가볍게 기노자의 발목을 잡고 살짝 떼어낸다. 부드럽지만 강한 악력이다. 필시 기노자가 저항한다면 여전히 부드럽게, 그대로 찍어누르고 짐승 같은 섹스를 반복할 것이다.
"아프라고 누른건데."
"그러라고 신긴 건 아닌데."
"어차피 어디서 이상한 거나 보고 한 번 시험해보고 싶었겠지. 아닌가?"
"글쎄. 그냥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기노자의 무심하지만 날 선 어조에 코우가미가 드물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노자는 진절머리 났다. 달작지근하거나 말랑말랑한 연애는 애저녁에 끝났다. 그런 건 언제쯤 있었을까. 있긴 했었나. 손 끝만 스쳐도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키스를 할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과거가 어느 날엔 있었던 것 같은데. 연애는 몰라도 섹스는 타성이다. 이제는 집착인지 아쉬움인지도 모르는 감정의 덩어리를 무시하면서도 발기하고 사정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끔 기노자는 놀라웠다. 코우가미가 부르면 부르는 대로 결국 오고 마는 저도 웃기지만 코우가미는 무슨 생각으로 부르는 지 알 수 없었다. 한 때는 화를 냈던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아쉬워 한숨을 내쉬었다가도 키스하고 말았던 것 같기도 하다. 선명하지 못한 건 기노자나 코우가미의 심리 색상 뿐이 아니다. 불순물이 섞여 복잡하게 흐린 관계가 둘의 현재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으려면 기노자의 눈 앞에 희미한 잔상이 어른거렸다. 당연하게 안경을 벗으려다 손가락이 그대로 얼굴에 닿는다. 아. 안경은 코우가미가 어딘가로 내팽개쳤었다. 어디에도 신경을 돌리지 못한 채로 기노자는 잔상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지는 걸 보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그림자를 따라 내린 시선 끝에 코우가미가 들어왔을 때 기노자는 무심코 탄성을 뱉었다.
"기노?"
기노자의 시선이 엉뚱한 곳을 배회하고 있어도 코우가미는 여전히 기노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손엔 여전히 강렬한 색의 새빨간 구두를 신은 제 발이 쥐어져 있었다. 흰 셔츠, 검은 넥타이, 흰 손, 흰 다리, 검은 바지,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또렷한 색.
"코우."
이름을 불러본다. 지금은 그다지 부르지 않는 방식에 코우가미의 고개가 조금 기울어진다. 한 때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 손 끝만 스쳐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키스라도 하려고 하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잠들기 전엔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 휴대전화 액정을 한참이나 들여다 봤을 정도로. 지금은 어중간하게 내팽개쳐져 이름 붙이지 못한 관계에 타성에 젖은 섹스만을 반복하지만, 그래도, 때때로 사랑한다. 사랑했다는 기억 속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건지, 다른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텅 빈 사무실에 남아 잔업을 하고 있으면 1년이 넘도록 공석인 옆자리가 사무쳤다. 그리웠다는 게 아니다.
"너야 어떨지 모르지만."
코우가미는 저를 사랑했을까?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직하거나 우직한 성격이라 그러는 게 아니다. 거기까지의 과정이 번거로워서 안 할 뿐이다. 쓸데없이 거짓으로 제게 애정을 속삭일 필요는 없었으니 아마 어느 순간까지는 코우가미도 기노자를 사랑하긴 했을 것이다. 지금은, 사랑할까?
"나는 너를 여전히 좋아하는 것 같아."
좋아한다. 그 말이 이토록 가볍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 기노자는 꿈에도 몰랐다. 얕은 숨결 한 번에도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무게감이다. 제 감정을 확신하긴 어려웠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발로 더듬듯이 코우가미의 상체를 타고 올라가 가볍게 누른다. 맨질맨질한 앞코와 아찔한 굽이 파고든다.
"그거 말고는 내 욕망이 설명이 안돼."
"…어떤?"
코우가미가 묻는다. 어떤? 그야 당연히. 기노자는 웃었다. 숨이 가빠온다. 무심코 힘이 들어가는 손, 경직되는 어깨, 날카로운 신경. 그건 분노다. 업무에 대한 부담이라든가 거기까진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혼자 일이라도 하고 있으면 처절하게 깨달아버린다.
"널 죽이고 싶어."
천천히 발뒷꿈치에 힘을 준다. 파고드는 게 꽤나 아픈 모양인지 코우가미는 조금 인상을 쓴다. 기노자는 이대로 푹, 하고 피부와 근육을 찢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생각을 할 때의 제 범죄계수와 색상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버림받은 남자들이 여자를 죽이는 케이스의 사건은 꽤 많았다. 복잡한 치정극에 혀를 내두른 적도 한 두번은 아니나 지금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네가 죽어줬으면 좋겠어."
"감시관이 그런 생각을 하면 사이코패스가 흐려질걸."
"그래서 못 죽이는 거겠지.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너랑 이러고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이 관계는 끝이 나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애매하게 남아 빙글빙글 돈다. 기노자의 욕망은 그저 어른거리다 사라질 것이다. 분노와 증오가 애정에 기반하는 복잡한 감정은 정상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겨 보면 어울리나?"
기노자는 생각을 포기하고 코우가미에게 물었다. 코우가미는 셔츠 사이를 파고들던 기노자의 한 쪽 발을 받쳐 들고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물론.
"그럼 키스 해."
잊어버리는 게 좋은 욕망이다. 기노자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뒤에서 여전히 새빨간 12cm 스틸레토가 보이는 듯 했다. 무장한 갑옷 사이를 뚫고 들어가는 예리한 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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