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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기노]C A L L M E
최애그룹이.......컴백해서....노래가.....좋다.........가사.....차용.......
검색.....안 걸렸으면.............
이국의 밤은 짧았다. 낮이 길었다. 플랑크톤이 썩어가는 비린내가 났다. 습도 높은 바람은 끈적하게 피부에 엉겨 붙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훈풍 속에선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흘렀다. 가끔은, 어찌됐든 안락했던 우리가 그립기도 했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쾌적하게 돌아가는 공조장치, 산뜻하게 샤워하고 마시는 차가운 얼음물, 뻣뻣하고 삭아버린 면이 아니라 부드럽고 도톰한 옷의 감촉.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본적인 생활 수준은 확실히 높았다.
아쉽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코우가미 신야는 그것들을 대가로 그 모든 것들보다 더 명확한 목표를 달성했다. 총성이 울릴 때, 격철이 당겨지고 탄환이 발사될 때의 반동, 격발에 몸이 제자리를 되찾기도 전에 쓰러지던 몸뚱아리, 퍼져나가던 진득한 핏물, 흰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흐트러지는 꼴에 쓴 입술을 핥으면서도 느꼈던 희열. 이래서야 잠재범이 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면서 도망쳤다. 끝없는 황금의 들판을 달렸다.
그래서 코우가미 신야는 후회하지 않는다.
폭우가 오는 날이면 천장 어딘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집 안에서, 담배 냄새 잔뜩 배인 소파보다 더 질 나쁜 침대에 몸을 누일 때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쇠 비린내와 단내가 올라오는 갈라진 목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무거운 방탄복과 그보다 더 무겁고 차가운 총기의 트리거에 손가락을 걸고, 온 몸의 근육과 신경을 빠릿하게 곤두세워야 하는 긴장 속에서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쨍쨍한 햇빛이 드리운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녹음이 짙은 울창한 숲 속에서 새 소리를 들을 때, 한 대의 담배와 함께하는 여유, 이젠 겨우 익숙해진 이국의 언어가 코우가미는 만족스러웠다.
"코우가미."
화들짝 놀라 코우가미가 고개를 들면 상대가 심각한 얼굴로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창으로 비추는 햇빛을 머금고 흰 셔츠가 쨍하게 빛났다.
"…기노."
코우가미는 인상을 찡그렸다. 얇은 프레임의 무테 안경 밑에서 눈동자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매끄러운 각막 밑은 새까만 동공이다. 희미하게 이채가 도는 눈동자가 코우가미는 빽빽한 밀림의 생동감과 비슷하다고 깨닫는다. 서늘하고 산뜻한 공기. 적당히 물기를 머금은 부드럽고 짙은 흙 같은. 그러고보니 기노자의 취미는 원예였던가. 닮았구나. 그것도 무심코 깨닫는다. 피로에 찌들고, 지치고, 날 서고, 눈물로 엉망이 된 애처로운 얼굴이 마지막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잊고 있었던 얼굴이 코우가미의 앞에 있었다. 기억과는 다른 조금은 앳되고 통통한 뺨, 짧은 머리카락. 햇빛 아래에서의 기노자는 분명히 살아있는 식물처럼 정적이지만 생기가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아, 아니."
코우가미는 어설프게 변명하며 손등을 꼬집었다. 아프지 않았다. 이건 꿈이구나. 놀라고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목까지 꽉 잠근 흰 반팔 셔츠는 고등학교 교복이었다. 언젠가 있었을 잊고 있던 과거가 꿈으로 상기된 모양이었다. 허탈함에 웃으면서도 코우가미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줏빛이 도는 광택 있는 커버의 푹신한 등받이는 자주 공부하러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즐겨 앉던 창가 자리의 쿠션이 꺼진 부분이 코우가미마저 잊고 있었던 기억인지라 헛웃음이 나왔다. 이토록 세세한 꿈까진 필요 없었는데.
무심코 내다 본 창 밖으론 사람들이 각자의 할 일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은 휴일인 모양인지 낮에도 사람이 많았다. 물방울 무늬 원피스, 스트라이프 셔츠, 첫 데이트를 하는지 수줍게 손을 맞잡고 가는 들뜬 얼굴의 커플, 울상인 아이,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 잘 정비된 도로에는 매끈한 자동차가 풍경을 반사하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맥이 탁 풀릴 정도의 평화였다.
"갑자기 몸이라도 안 좋아진 거냐?"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으면 기노자가 조심스럽게 코우가미를 불렀다. 앗차 싶어 고개를 돌리면 아까의 조금 곤두선 얼굴과는 달리 이번엔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의 안락함에 눈 앞의 상대를 깜박 잊고 있었다. 초조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코우가미는 손사래 쳤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기노. 잠깐… 졸았나 봐."
어차피 찰나의 꿈이라면 즐기는 쪽이 훨씬 나았다. 얼음이 반쯤 녹은 미지근한 아이스티를 마시면서 코우가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아니. 고개를 들었더니 네가 넋을 놓고 있길래… 뭔가……."
당황하며 말을 잇던 기노자가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더듬거리더니 시선을 아래로 돌리고는 말 끝을 흐렸다. 테이블 위의 손가락 끝에 무심코 힘이 들어가 꽉 누르는 게 유독 시야에 박힌다.
기노? 한참의 정적 끝에 코우가미가 물으면 기노자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답했다.
"어딘가… 없어질 것 같아서……."
그 말에 마시던 아이스티가, 문득 목에 콱 메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런 대화를 한 것도 같았다. 가끔은, 이상해 코우가미. 기노자가 툭 던지는 그 말엔 늘 맥락이 없었다. 나란히 하교 하다 팔꿈치가 부딪힐 때, 코우가미 취향의 영화를 보다가, 도서관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다, 점심 도시락을 깨작깨작 먹던 기노자가 고개를 들어 무심코 코우가미와 눈이 마주치면 기노자는 종종 생소한 표정을 지었다. 기묘한 것을 보듯 놀라다 일그러지는 표정에 코우가미가 의문을 품고 물으면 그렇게 답했다.
가끔은, 이상해 코우가미.
눈을 들면 내 앞에 누군가 있다는 게. 눈이 마주친다는 게, 팔이 부딪힌다는 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무런 위화감 없이, 그런 게 내 앞에 있다는 게. 지금까진 그럴 일이 없었거든.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기노자는 가볍게 그런 감상을 내뱉곤 했다.
그러고 나면 꼭 덧붙였다. 그래서 꿈 같아. 언젠가 없어질 것 같아.
느슨하게 턱을 괴고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며 기노자는 가만히 눈을 감곤 했다. 꾹 다문 입매가 단순히 침묵인 줄 알았던 시기는 지났다.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그 옛날엔 기노자의 그런 말을 눈치채지 못했다. 긴 말꼬리 끝에 진득하게 붙어있을 고독, 텅 빈 깊은 동공, 까마득한 어둠. 그래서 네가 가끔 이름을 부르면 놀라. 느슨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기노자는 그렇게 말했다. 나른한 오후의 얘기였다.
별 실없는 생각을 하네, 기노. 그럴 리가 없잖아.
평소처럼 답하려고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낯선 타국에 홀로 남은 이국의 코우가미는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의 기노자 노부치카를 이해한다.
폭우가 오는 날이면 천장 어딘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집 안에서, 담배 냄새 잔뜩 배인 소파보다 더 질 나쁜 침대에 몸을 누일 때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쇠 비린내와 단내가 올라오는 갈라진 목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무거운 방탄복과 그보다 더 무겁고 차가운 총기의 트리거에 손가락을 걸고, 온 몸의 근육과 신경을 빠릿하게 곤두세워야 하는 긴장 속에서, 무심코 깊은 곳으로 침잠하던 의식.
대체로 사람들은 코우가미 신야를 '코우'라고 칭하곤 했다. 일본에서도, 이곳에서도 변하지 않았지만 억양이 달랐다. 머리로는 저를 지칭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와닿진 않았다. 누군가 저를 부른다고 알면서도 어딘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몸이 빠르게 반응하질 못했다.
"코우가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통해 온 몸으로 흐른다. 오랜만에 누군가 저를 확실하게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류가 각자 다른 신호가 되어 퍼졌다. 아늑하고, 온화하고, 평화롭다. 때때로 부유하던 의식이 여기에 있다고 확실하게 고정된다. 이름을 부르면 가끔 놀란다고 말했던 기노자도, 혹시 이런 기분이었을까. 찰나의 전율은 영원같이 여운을 남긴다.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하게 뇌리에 번쩍이는 번개처럼, 한 순간 코우가미 신야라는 존재를 꿰뚫어 이 세계에 고정시키는 목소리.
"그럴…리가 없잖아, 기노…."
잊고 있던 무언가가 치받쳐 코우가미는 테이블 위에 있던 기노자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가끔은 이상해 코우가미. 이상해. 그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다, 이건. 명확하게 살아 있다고 느끼는 감각은. 한 겹 막을 씌우고 있었던 것처럼 어쩐지 둔감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트인다. 모든 감각이 생생해진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세계가 훅, 머릿 속으로 빨려 들었다.
"나는, 여기에 있어."
"응."
"여기에 있어."
"그래."
"너야말로."
너야말로, 사라지지 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빈 말로도 할 수 없는 건, 기노자 노부치카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코우가미 신야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기노자 노부치카의 경험으로 터득한 불안과 외로움은 결국 적중한 셈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이 스친다. 기노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게 놀라웠다. 늘 불안하다고 말했던 기노자는 결국 그의 말이 맞았다고 생각했을까. 혼자 남아서 불안했을까. 코우가미처럼 어딘가 둥둥 떠다니고, 때때로 침잠하고 질식하고 그리고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을까.
"나는 이 자리에 있어, 코우가미."
가만히 있는 코우가미의 손등에 이번엔 기노자의 손등이 포개졌다. 길쭉하게 뻗은 손마디와는 달리 손바닥은 슬쩍슬쩍 굳은 살이 잡혀 있었다. 검도를 하는 기노자에겐 당연했다. 손을 맞잡으면 그 굳은살의 감촉이 이상해 코우가미는 괜히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대곤 했다.
"코우가미."
눈을 뜨면 아직도 밤이었다. 새벽 세시? 네 시? 몇 시쯤일지 감은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코우가미 신야는 괜히 탁상을 더듬었다. 연락용으로 쓰이는 무전이다. 공안국에 입사한 뒤엔 휴대전화보다 단말기로 연락하는 게 더 빨랐다. 기노자는 아직도 휴대전화를 쓰고 있을까. 처음으로 마주치고, 세 달이나 뒤에 받을 수 있었던 전화번호를 코우가미는 기억하고 있었다. 신호음이 연결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코우가미는 버튼 하나하나를 꾹꾹 눌렀다. 수화기를 조용히 귀에 대보았다.
그 수화기 너머에서 네가 코우가미, 라고 부르면 나도 기노, 하고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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