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정신없이 싸질러 놓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쯤이면 늘 이 생각을 한다. 그리고 최근엔 이 생각을 하는 나조차도 지겹다.
탁자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재떨이를 끌어당기며 무심하게 방을 둘러본다. 쓰레기통에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아, 또 깼군.
이 생각까지 도달하는 것조차 언젠가 봤던 영화나 드라마 같다. 모든 게 데자뷰다. 기노는 신경질적인데다 욱하는 버릇이 있었다. 최근에는 아주 질 나쁜 쪽으로 발전한 모양인지 언젠가부터는 물건을 집어던지는 모양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포토스탠드였던 것 같다. 단단한 강화 아크릴로 된 홀로그램 스탠드는 어지간한 낙하 충격은 전부 버틸 수 있을 텐데, 아예 손으로 부러뜨린 것 같았다. 간밤에야 눈치 챈 손가락의 밴드를 생각했다. 그 다음엔 머그컵이었다. 그 다음에 왔을 땐 유리창. 어쩐지 내내 암막커튼이 쳐져 있길래 뭔가 했더니.
기노는 3일 철야했다. 별 수 없었다. 개는 네 마리인데 주인은 한 명이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안한 마음도 한두번이고, 보고서 쓰라고 들들 볶을 때는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 미루고 미루다 개판으로 써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기노는 성질을 부렸다. 알 게 뭐냐.
수리할 시간도 없었는지 대충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 놓은 꼴이 우스웠다. 그러고 돌아서다 제대로 치워지지 않은 유리가루에 발이 베였던 것도 기억났다. 따끔하게 베이던 감촉. 고작 5mm도 안되게 베였을 뿐인데 그 날은 하루종일 발이 신경 쓰였다. 덕분에 기분이 나빠 기노의 명령은 몽땅 무시했고 기노는 기노대로 기분이 상했으니 더 신경질 내고.
악순환이다.
그러고는 짐승처럼 들러붙는 것도 우스웠다. 달작지근한 전희나 후희도 없고, 밀담도 없고, 키스도 없고, 그저 욕망에만 충실하게. 쾌감을 느끼는 것조차 신기했다. 우리의 관계는 예전에 끝났을 것이다. 누구 한 명 이별의 말을 고하진 않았지만 그걸 지금 하는 것도 이상한, 습관적인 관계. 신청하지 않은 외출 허가를 받아 와 차에 타고, 기노의 집까지 이동하는 시간은 버티기 힘들다.
귀찮게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내 방에서 하는 건 어때?
그렇게 물어봤자, 기노의 대답은 뻔했다. 집행관의 방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사이코패스가 흐려질 것 같은데. 그러면 하질 말든가. 소파는 싫어.
냉랭한 눈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기노.
나는 여전히 잠든 너에게 묻는다. 집행관은 개다. 잠재범과는 선을 그어라.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무시하면서도 너는 나의 외출 허가를 받아낸다. 차에 태우고 너의 집까지 데려와 결국 같은 침대에서 잠든다. 집에서는 담배 피지 말라고 그렇게 고깝게 굴면서 결국 너는 재떨이를 치우지 않는다. 몇 개의 접시와 컵이 깨져 나가는 동안에도 네가 쓰지 않는 유리 재떨이는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나도.
나는 결국 너에게 한 번도 싫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싫다고 말하면 너는 미련 없이 떠나갈 텐데 매번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네가 잠들어 있는 아침을 홀로 맞는다. 내 것 같은 재떨이에 재를 털고, 쓰레기통에 처박힌 유리 파편들을 보다가, 또 유리 책상에 눈을 돌리지.
눈물은 생각보다 투명하지 않다는 건 예전에 알았다. 당연한 얘기였다. 눈물은 정수된 물이 아니다. 지방, 단백질, 무기질, 그 외 노폐물이 섞인 것은 생각보다 훨씬 짜고 생각보다 진한 얼룩을 남긴다. 촛농이 굳어 떨어진 것 마냥 튀어 원으로 번진 자국을 나는 맞춰본다. 살인사건의 현장 검증을 하는 기분이다. 죽은 건 누구고 죽인 건 누구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 너를 본다. 메마른 얼굴엔 피로만이 가득하지 눈물은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너는 왜 나를 자꾸 부르는 걸까. 무언가를 집어 던지며 화를 내다 의미없는 섹스를 하고, 결국 재떨이를 앞에 두고 울 거면서. 그리고 나는 왜 거절하지 못하는 걸까. 네가 홀로 버틴 시간들을 보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주제에. 다정함도, 애정도, 위로도 줄 수 없으면서 못 이기는 척 너를 따라 오는 걸까.
"기노."
잠든 너는 대답이 없다. 나는 이 시간이 지루하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나를 긁어 내리는 데도, 돌파구가 없어 몇 번이나 반복하고 마는 악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