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주말비였다. 이제 막 피려던 벚꽃의 몽우리가 다시 들어갈 정도로 쌀쌀한 바람이 비와 함께 스쳐 밖은 온통 회색이었다. 커튼을 치지 않아도 충분히 빛이 들지 않는 녹재색의 방 안에서 후시미 오미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유별난 목적은 없었고 그 영화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단지 그것이 눈에 띄었고 "아. 그럼 이걸로 할까."하는 말에 오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작은 노트북의 모니터로 보는 영화는 아, 역시. 화면의 사이즈가 너무 작아 몰입감이 없었다.
현저하게 떨어진 집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건 나란히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평소엔 늘 목까지 오는 셔츠나 폴라를 선호하고 한여름이 되지 않으면 라운드티를 입는 경우가 드문 상대는 웬일로 한 장의 티셔츠 차림이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남자의 안경엔 화면에 펼쳐지는 소박한 햇빛의 초원이 반사되고 있었다.
몰입하고 있겠지.
후루이치 사쿄의 집중력은 실로 대단해서 한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뭐라 해도 눈치를 채는 일이 꽤나 늦었다. 언젠가는 오미가 차를 가져왔는데도 "잠깐 기다려." 한 마디 하고는 1시간을 방치한 적도 있었다. 그 사이에 오미는 빈 방을 배회했고 쓸데없이 사쿄의 옷장도 열어봤으며 검은색 혹은 회색 일색인 옷장 속에서 생일선물로 짠 두툼한 3게이지 짜리의 아이보리색 목도리가 정중하게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도 보았다. 다음엔 니트도 짜봐야지. 사쿄의 치수는 빨래를 하며 몰래 기존의 옷으로 가늠하거나 직접 줄자로 재보는 수도 있었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얼굴에 반해 직업상의 문제라고는 해도 늘 우중충한 색만을 입는 게 오미는 늘 아쉬웠다. 유키한테 부탁하면 괜찮은 색을 추천해 줄 것이다. 오미가 니트의 색과 무늬, 견적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꼼짝 않고 계산기와 씨름하던 사쿄가 책상 옆에 두었던 다 식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나서야 오미를 발견했던 것은 꽤 가슴 아픈 추억이다. 그 집중력이 후루이치 사쿄라는 사람의 장점이고 오미는 그런 부분에 반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서 오미는 낡고 소박하며 날것으로 내비치는 미국 서부의 마르고 넓은 초원 대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감상하기로 했다. 양반다리로 앉은 무릎 위에 얌전히 얹은 두 손. 열 손가락이 가지런하지만 키나 생김새에 비하면 제법 통통하고 작다 싶은 손이다. 오미의 손은 키에 걸맞게 남들보다 큰 편이라 처음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이 아주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으로 얕게 그러쥐어도 조금 남는 작은 손. 무심코 "사쿄 씨, 손이 되게 작네요."라고 말했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손을 뺐던 기억이 난다. 그에게 그게 콤플렉스일 거라는 생각은 아주 나중에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그러쥔 손의 헐렁한 공간이 처음 오미가 사쿄를 의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작은 어깨와 가슴. 근육이 골고루 잡혀 있어 왜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저는 차치하고 쥬자나 반리와 비교해도 부피감이 작은 상체였다. 몰래 입어 본 긴지의 의상이 아무리 생각해도 오미에겐 꽉 낄 거 같은 건 비밀이었다. 오랜만에 훤하게 드러난 쇄골은 움푹파여 목울대와 같이 도드라져 있었다. 길고 가는 흰 목과 작은 귀. 그리고―…
사귄 지 제법 지났는데도 오미는 아직 그 입술의 감촉을 모른다. 얇은 입술은 어떤 때는 심하게 각질이 일어나 있었고 감독이 향신료를 잔뜩 넣은 매운 카레를 먹으면 평소보다 훨씬 진한 색으로 부풀어 오르곤 했다. 오늘은 그저 평소 같았다. 그저 평소같다고 해도 오미는 여전히 그 입술의 감촉을 모른다. 부드러운지 거친지, 탄력이 있을지, 아즈마가 때때로 얼굴이 푸석하다며 팩을 권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아즈마가 갖고 있는 다양한 팩 중엔 입술팩도 있어서 여름조 다섯명이 나란히 공연 전에 입술에 분홍색 실리콘 같은 걸 붙이고 다닌 것도 보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에 실리콘 팩을 얹고 있을 사쿄를 생각하면 오미는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동시에 오미는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살다 보면 별게 다 부러워질 때가 있다. 지금이 하필이면 그런 순간이었다. 부엌에 있는 스무 개의 컵도 사쿄의 입술이 닿았을 것이고 쓰레기통에 버려져 이미 소각됐을 팩도 그 입술 위에 얹혀 있을 터였는데 정작 연인인 오미만이 그를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 정말 시끄럽네."
그 때였다. 내내 모니터의 화면을 반사하던 안경의 상이 투명해져 그 너머의 눈동자가 오미와 마주한다.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간 사쿄의 얼굴이 험상궂어 오미는 반사적으로 긴장해버렸다.
"후시미. 네 녀석 영화 하나도 안 보고 있지."
"아뇨. 아니 그…… 보고 있, 있었는데요……."
"그럼 지금 영화 내용을 설명해보실까."
사쿄가 코웃음치며 흘끗 모니터를 가리키면 주인공의 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새, 무슨 맥락으로 방금 전까지 지하실에서 개축공사를 하겠다는둥 하던 집이 불타고 있었는지 당연히 오미가 알 리는 없었다. 하하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회피하려고 해도 사쿄의 시선을 똑바로 오미를 향해 있었고 이 커다란 덩치는 지나치리만큼 심플한 사쿄의 106호실에선 숨을 구석도 없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건가."
"아뇨 전혀…."
"똑바로 말해."
"그, 그게,"
"시간 5초."
"사쿄 씨랑 키스하고 싶습니다!"
오미는 눈 딱 감고 외쳤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영화는 작은 배경음만을 남기고 흐릿한 빗소리를 제외하면 적막이 감도는 방 안이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사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던 오미가 희미하게 눈을 뜰 무렵,
"――!"
제가 쓰지 않는 안경이 콧대에 슬쩍 마주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드럽거나 혹은 말랐거나, 적당한 탄력이라든가 버석하거나 그런 오미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감촉이 오미의 입술에 닿아,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잇새를 훑고, 입천장을 작게 간질이면서 키득댄다. 입에 고인 타액을 반사적으로 삼키면 멀어진 사쿄의 얼굴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만족했나?"
"자, 잠깐 사쿄 씨."
"머리 좀 식히게 마실 거나 갖다주지. 커피?"
"커피로 부탁드립니다."
사쿄가 일어나서 방문을 닫을 때까지도 오미는 멍청하게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부드럽고, 뜨거운, 습윤하고, ……. 후끈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오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쿄 씨가 보면 한심 그 자체였겠지! 꼴사납고, 멍청하고, 그런데도 지나치게 좋아서 오미는 입술을 꽉 깨물고 환호했다.
"어린애냐 저 녀석은……."
사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부엌을 향해 느릿하게 걸었다. 어찌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시선이 소란스러워 영화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가 했는데 겨우 키스하고 싶다는 이유였다니. 스무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까지 생각하던 사쿄를 걸음을 멈추었다.
미치겠군.
후시미 오미는 정말로 스무살짜리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껏해야 스물 하나. 사쿄에게는 기억하기도 까마득한 예전이었다. 아…….사쿄는 훅 달아오른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잰걸음으로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