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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기어스/스자루루] 생존 에튀드(Etude : Existence)
코드기어스 신극 국내 개봉 기념 몇 년 전 냈던 원고 공개합니다. 망국의 아키토 2부 기반.
모티브가 된 곡은 ㅅㅍ의 에튀드 곡 중 하나입니다.
숨을 죽이고 다가선다. 잠든 얼굴은 평온하다. 그는 생각한다. 자신도 잘 때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니. 본 적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어쩌면 그런 나날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날들. 까마득히 높은 계단을 올라 붉은 기둥의 문을 지나, 푸른 신록이 울창하고 햇볕이 따사롭던 나날. 하카마를 입고 다다미가 깔린 도장에서 목도를 휘둘렀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 정적인 것들은 젬병이었다. 대신 동체 시력은 어릴 적부터 좋았다. 활자를 읽는 것보다 몸으로 익히는 게 훨씬 편했다. 내일 배울 것들을 생각하며 잠드는 밤은 즐거웠다.
집에 불청객이 찾아온 다음엔 침묵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정적인 흐름. 익숙치않던 것이 익숙해졌다. 셋이 좁은 방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잤다. 즐거웠다. 내일 같이 뭘 하고 놀까 고민하며 잠들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바로 몇 달 전까진 평온히 잠들었으리라. 간혹 한숨 대신 내뱉던 죽고 싶다는 원초적 소망과 얕은 잠에서조차 까마득한 벼랑에서 추락하던 나날들이 멀었다.
흰 정복, 가냘픈 레이피어, 그의 손에서 떠나간 검이 심장을 가볍게 찌르던 순간 전신으로 퍼지던 열정들.
전선의 비참함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견뎌낼 수 있었다. 꽃향기가 흐드러지던 밤, 뭉근한 그 향만큼이나 이상은 달았다. 높고 아름다웠다. 내일의 할 일을 곱씹으며 잔다는 것. 그 얼마나 충만한 감각이었는지? 잃어버린 것만이 추억이 된다 - .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흩어져 사르락 거리는 소리를 낸다. 얇은 이불 밑으로 살짝 드러난 가늘고 흰 목. 영면에 빠진 그녀의 파리한 목을 상기한다. 그녀가 한 발의 총상으로 죽은 것에 가끔 감사할 때가 있다. 사지육신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시체를 무수히 많이 보았기에 감사하며 마지막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고, 그 가녀린 전신을 낙인처럼 지져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져진 흉터에 남자가 겹쳤다.
길고 바른 자태는 그들의 유전일까.
가지런히 놓여있는 오른손 중지 손가락에 거뭇한 잉크가 배어있다. 꼼꼼한 남자에게는 드문 일이다. 남자는 볼펜 대신 잉크를 찍어 쓰는 고전적인 방식의 만년필을 선호했다. 그런 점조차, 그녀를 닮아있었다. 그녀는 좀 더 클래식한 형태의 깃펜을 애용했다. 물론 외형만 그렇고 안에는 잉크를 넣을 수 있는 홈이 있고 만년필과 비슷한 형식으로 카트리지를 넣을 수 없다는 것만 빼면 훌륭하다.
지금 그 깃펜은 그의 왼쪽 가슴에 있다. 그녀의 기사였던 그에게 유품으로 남겨졌다. 황제의 열두 기사 중 한 명이 된 지금도 소중하게 품고 다닌다. 주머니 위로 드러나는 형태를 손끝으로 더듬을 때마다 그는 아득하게 멀어진 날들을 생각했다. 가느다란 검의 끝이 예리하게 그의 심장을 쿡 찔렀을 때 전신으로 퍼졌던 그 열정. 온기. 다정함. 행복. 사랑. 온갖 아름다운 가치들의 이름. 한순간에 무너질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손에 들어오는 것들은 모두 바람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그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토록 우악스럽게 뺏길 줄 누가 알았을까. 정원은 폐허가 됐고 꽃은 만개한 채로 짓뭉개졌으며 이상은 무너지고 모든 것들은 한 줌 재가 되었다. 폐허의 일부가 되었어도 생이 붙어있는 그만이 쓸쓸하다.
슬프냐고?
전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슬픔은 어느 순간 분노와 증오로 화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스자크, 나는 브리타니아를 부숴버리겠어.
어린 날 들었던 떨리는 목소리를 그는 상기해본다. 단백질 타는 역겨운 냄새가 짭짤한 바닷바람과 섞여 들척하게 달라붙던 여름.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꽉 쥔 주먹과 굳은 눈동자에도 무게감이 없는 말이었다. 망상이다. 그래서 잊고 있던 말이었다.
그 여름부터, 상대방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기이한 동질감과 표현할 수 없는 역설을 느끼며 몇 번이고 상상한다. 수백, 수천, 수만 번. 눈앞의 남자가 말할 때마다, 미소 지을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로 치환한다. 그에게 삶은 죄악이기에,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각할 때마다 그 남자를, 제로를 죽이면, 죽이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고.
강박적인 되뇌임은 뇌 안의 시냅스를 멋대로 굴린다.
그는 열두 살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 죽어도 묘비조차 세워지지 못하는 일련번호의 총알받이. 어제 키스하고 사랑을 나눈 온기조차 내일이면 고깃덩어리가 되어 소각되는 무자비한 살육전. 총기는 가질 수 없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알고 있다. 무언가 푹 하고 터지는 소리, 부드러운 거죽을 파고들어 근육 깊숙하게 나이프를 박는 감각. 나이프를 감싸면 손가락 한 마디도 남지 않았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머리를 돌로 찍어 내렸다. 식사용 나이프로 남자의 목을 갈랐다. 달리는 기차에서 남자의 얼굴을 바닥에 눌렀다. 귀청을 찢는 비명이 이내 너덜거리며 튀어 오른 핏덩이로 사라졌다. 갈비뼈가 부러진 걸까. 구멍 난 폐로 남자가 가쁘게 호흡하면서 자신을 보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발로 짓이긴다. 펑하고 터진 끈적한 피와 회백질의 뇌수가 흰 제복에 점점이 튀었다.
환상만은 황홀하다. 몇 번이고 그의 손으로 죽었던 남자는 지금은 단지 평안한 잠을 누리고 있다. 진절머리 나는 꿈은 이제 그만 꾸고 싶다. 그는 요즘 까마득한 벼랑으로 떨어지는 대신 제 심장이 도려내지는 꿈만 꾸었다. 매끈한 원으로 구멍 난 가슴으로는 그녀가 찌르던 레이피어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 유리병으로 옮겨 간 그의 심장이 쿵쾅거릴 때마다 고인 핏물이 경쾌하게 찰랑거린다. 텅 빈 왼쪽 가슴에 팔을 집어넣으며 깔깔대던 남자가 그의 가슴위로 올라타 유리처럼 찬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싼다. 그와 남자는 시선이 마주친다. 남자는 그의 이름을 부른다. 스자크, 하고 언제나와 변함없는 어조로.
그는 거울처럼 반대로 해본다. 를르슈, 하고 이름을 부르다가 어느 새 낯설어진 발음에 그는 깜짝 놀라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되돌려준다는 의미만을 담은 겉치레다. 중요한 것은 이 다음에 이어지는 행위다. 장갑 밑으로도 가벼운 맥박이 느껴진다. 천천히 짓누른다. 두 손바닥 안에 꽉 잡히는 가느다란 목덜미. 어느 새 잠에서 깬 눈동자가 그를 응시한다.
“―스자크.”
불현듯 불린 이름에 스자크는 눈을 깜박인다. 번져가는 붉은 노을에 눈이 부시다. 태양을 가르며 북서쪽으로 향하는 열차는 9시간 동안 달려간다. 출발한 지 세 시간 쯤. 선 채로 잠이 든 걸까. 지루할 법 하기도 했지만 근무 시간에 졸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기왕이면 유페미아의 꿈을 꾸는 쪽이 훨씬 좋았다. 꿈에서까지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질색이었다.
“스…자크!”
봐.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남자는 현실에서도 스자크의 눈앞에 있다. 절박하게 스자크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면 창가 쪽 테이블에 앉은 남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
지금 달리는 8량의 기차는 눈앞의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준비된 것이다. 겉으로는 수수해 보이지만 방탄은 기본, 편의에도 부족함 없이 따로 있고 바닥에는 천연 양모 카펫, 천장의 등은 섬세한 유리 세공으로 장식되어 있다. 오직 황제와 황족들만을 위해 움직이며 황족 다음의 권위를 지닌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도 탈 수 없다. 이 열차의 주인은 쿠루루기가 아닌 이 남자다.
남자가 황족이냐 하면, 지금은, 아니다. 쥴리어스 킹슬레이. 지지부진하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유로피아 작전의 서부 전선을 전담할 군사(軍師). 브리타니아 남부 해안 마을에서 태어났다. 으레 모든 브리타니아 군인들이 졸업하는 사관학교는 다니지 않았다. 군에는 자원입대한 직후 줄곧 황제 직속으로 전략 총괄을 맡았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작전 참여는 처음이다. 스자크가 보기에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기록에도 남자는 제 삶을 의심하지 않는다.
스자크가 그의 호위를 겸해 유럽 전선에의 출전을 명 받은 것은 일주일 전. 온통 검은색이지만 안대와 목깃, 망토에 새겨진 문양만은 황금색이다. 그것은 제국의 상징, 꽃이자 검이다. 신성 브리타니아의 영광 아래에서 남자는 그럴듯한 충신처럼 보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고압적인 전형적인 브리타니아 귀족의 모습이다. 이전의 그는 이런 사람을 몹시 싫어했는데, 아이러니한 일이다.
스자크는 그가 싫었다. 단순히 꺼리는 게 아니라 혐오했다.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다. 그가 온유하고 예의바르며 겸손한 사람이었더라도 스자크는 그를 싫어했을 게 분명하다. 저에게는 까닭 모를 혐오감을 비치는 스자크를 보면서도 남자는 웃을 정도로 대담했고 무심했다. 오히려 스자크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즐기는 기색마저 보였다. “스자크”. 부를 때마다 그가 불쾌해하자 쥴리어스는 기꺼이 그에게 하대하며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도 스자크의 이름을 멋대로 지껄이는 것이 그 남자의 본질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셈이다.
“뭔가 문제라도, 킹슬레이 경?”
긴 머리카락과 얼굴의 반을 가린 안대에 남자의 고개 숙인 얼굴은 스자크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상당히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입술을 꽉 깨물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신음하듯 스자크를 부르는 게 고작일 정도로.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약을 챙겨먹지 않으면 발작 수준까지 가는 극심한 편두통이 만성이다. 그의 말로는 열두 살 때부터 그랬다고 했으니 습관이 될 법 한데도 그는 약 먹는 것을 종종 잊어버렸다. 근 일주일간의 경험상, 곧 있으면 바닥에 뻗어 사지를 가누지 못한 채 바르작거릴 것을 알면서도 스자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물었다.
“물을……, 스자…크!”
무엇 하나 굽힐 줄 모르는 남자가 이 때만은 스자크에게 고개를 숙이고 애원한다. 끔찍한 호위생활에서 유일한 낙이었다. 스자크는 약 올리듯 천천히 움직였다. 컵에 물을 따르고 걸어가며 이 물을 머리 위에 쏟아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지니. 스자크의 발소리만을 듣고 성급하게 뻗어진 쥴리어스의 팔이 스자크가 들고 있던 물컵을 쳐버렸다.
“저런.”
일말의 동정심조차 없는 무의미한 말이 스자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졸지에 얼음물을 흠뻑 뒤집어 쓴 쥴리어스는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을 닦을 기력도 없는 건지 중얼거리며 욕을 짓씹을 뿐이었다.
“참을성이 부족하시군요.”
“…닥쳐.”
“약 정도는 혼자 드실 수 없으신 겁니까.”
“너……!”
스자크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의 극심한 두통은 눈을 후벼 파는 쑤심과 뇌를 쉐이커에 갈아버리는 울렁거림, 어지러움, 목이 찢어질 것 같은 갈증을 동반한다. 얼굴을 타고 떨어져 입술로 스미는 한 방울조차 기꺼이 혀를 내밀어 축일 정도로 메마른 그의 앞에 컵을 내려놓는다.
“부디.”
약통을 여는 손이 바들바들 떨려 알약들을 테이블 위에 흩뿌린다. 두 알을 집어 입 안에 털어놓고 컵을 집어 들면 이번에는 얼굴 대신 테이블 위에 또 반을 쏟는다. 머리에서, 테이블에서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노을을 버금도 반짝인다. 먹먹하게 젖어드는 바닥의 카펫을 스자크는 바라본다. 겨우 ‘먹는다’라는 행위를 완수한 몸이 소파 뒤로 늘어진다. 밭은 숨, 두터운 색으로 점점이 번진 원들이 피처럼 보인다. 스자크는 그의 머리를 휘어잡았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선연한 것들. 쿠루루기 스자크는 보았다. 힘을 잃어가는 가쁜 숨소리도 들었다. 다만 생생한 눈동자가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안대가 젖었네요.”
물을 잔뜩 머금은 두터운 천이 스자크의 장갑을 적신다. 반항하지 못하는 얼굴에서 우악스럽게 안대를 벗겼다. 줄곧 어둠 속에 있던 동공이 갑작스러운 노출에 수축한다.
“눈은, 괜찮으신지?”
점막은 민감해서 혀의 돌기조차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눈을 크게 벌리고 스자크는 혀로 반들반들한 눈알을 핥는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눈꺼풀을 손으로 벌린다. 아파하면 좋겠다. 뭉그러질 때까지 입 안에 넣고 굴리고 싶다. 걸쭉하고 기분 나쁜 액체가 식도를 타고 스멀스멀 넘어가서, 그러면 나는 위산으로 그 날개 달린 새를 산화시키는 거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지니.
상상 속에서 툭-,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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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하진 않을게.”
스자크의 생각보다 흔쾌히 를르슈는 인정했다.
“너와 나는 사실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지. 샤리가 예전에 그랬어. 우리는 정 반대라고.”
이제는 그것도 추억이네.
덧붙인 한 마디가 스자크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잃어버린 것만이 추억이 된다. 잃어버린 무수히 많은 것들을 되새김질 하는 얼굴은 파리하지만 사금처럼 반짝였다. 스자크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때때로 그에게서 그런 종류의 반짝임을 발견하곤 했다. 자신에게는 도저히 없을 법한 그것이 최근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나나리도, 미레이도, 샤리도, 카렌도, 리발도, 그 외의 많은 사람들도 어느 순간 때때로 그렇게 강렬한 빛을 낸다.
“나는 살고 싶어.”
이제 와서, 얼마나 무의미한 말일까. 스자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죽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아. 누군가를 지켜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지. 넌 죽고 난 다음의 네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있어? 난 상상해. 내가 죽었으면 나나리도 곧 죽었을 거야. 어머니랑 같이 죽었을까? 아리에스 궁의 알현실 말야. 그 뒤라면 황궁 내의 어딘가 라든가, 독살의 가능성도 있어. 그 때의 우리는 실권을 전부 잃어버린 상황이었으니까. 코넬리아가 힘썼을 거라고 해도 빈틈은 많아. 어머니에 대한 경애와 유피의 호의 같은 정 말고는 실리가 없지. 일본에 와서, 그래 스자크. 너도 봤지. 신원 확인도 못하고 전염병이 돌까봐 그 자리에서 태웠어. 시체 타는 냄새가 그렇게 역겨운 데도 나나리는 헛구역질 한 번 하지 않았지. 그것 말고도 많이 봤잖아? 너는 군인이니까. 유피도…….”
“…가끔 네 뻔뻔함엔 혀를 내두르게 돼, 를르슈.”
“잊지 말라고 얘기하는 거야. 유페미아를 죽인 건 나니까. 좋아. 그럼 전쟁을 무사히 지나쳤다고 해보자. 그 다음 한동안은 괜찮았어. 앗슈포드 백작은 이상한 사람이야. 너도 알잖아? 회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백작을 쏙 빼닮았어. 그렇지만 그녀는 손녀고, 자식은 안 닮았거든. 우리가 졸업하는 순간 우리는 아마 죽었을 거야. 클럽하우스에 계속 기거하고 있었으니 학생들의 이목이 있어 재학 중엔 안됐겠지. 생각해 봐 쓸모가 없잖아. 황족으로 복귀할 마음이 우리에게 전혀 없는 이상 우리는 어딜 가도 쓰레기거든.”
를르슈는 시종일관 웃는 표정이었다. 한 때 스자크는 그를 죽이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한 적 있었다. 그 때마다 그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질척한 체액으로 엉망이 되어 끅끅거리며 짐승의 소리를 냈다. 그를 죽이는 방법을 수도 없이 많이 상상했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웃는 표정은 없었다. 살기 위해서 추악하게 발버둥치는 것이 지금까지 스자크가 상상하던 를르슈의 모습이었다.
“크로비스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 샤리의 아버지는 생각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병사들은 어땠을까. 후회하지 않아. 전부 내 선택이었으니까.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고 누구나 삶을 염원해. 아, 너 빼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신기한 것을 쳐다보는 눈을 하는 를르슈를 동시에 스자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랬다. 우리는 극과 극이었다. 스자크는 아마, 제가 처음 사람을 죽인 일이 없어진다 해도 삶을 종교처럼 맹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는 누구든 평화롭게 살아남을 수 없다. 윤리를 집어던진 인간들이 어떤 저열한 짓을 하고 살아남는지 그도 봐왔을 것이다. 차별, 구속, 억압, 유린, 학살. 사전의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을 늘어놓고 무작위로 섞어 숨이 붙어있다면 생존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가 살인자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스자크와 를르슈는 하다못해 친족을 죽였다. 본래 브리타니아의 수도 펜드래곤의 궁에 거주해야 할 이들이 도쿄 임시 정청에 머물러 있는 이유 또한 비슷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수만의 사람을 한 줌 재와 1초의 단말마도 없이 소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무색할 만큼 통째로 들려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이들의 대지 위로 스자크와 를르슈의 목숨이 붙어있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삶을 기쁘게 여길 재간이 스자크에겐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스자크.”
그래도 어째서 를르슈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뻔뻔해. 그래도 살아있는 게 좋아. 손뼉 치고 뛰놀고 싶을 정도로 기뻐. 추악하고 비겁하지.”
아니야. 스자크는 속으로 말했다.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목 끝까지 들이찬 말을 스자크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틀린 거야.”
스자크의 눈이 세 번, 깜박인다. 커다란 망막에 담기는 제 상을 보면서 를르슈는 또 웃었다. 지금까지 줄곧 스자크는 를르슈에게 틀렸다고 말했지만 를르슈가 그 사실을 한 번도 인정한 적은 없었다. 자존심에 주장을 굽힌 적도 없으니 스자크로서는 놀랄 수 밖에 없는 얘기겠지.
“나는 틀렸어. 강자만이 살아남는다. 그게 브리타니아의 국시. 약자였던 주제에, 그토록 아버지의, 브리타니아의 방식을 싫어했으면서도 나도 별 다를 바 없었어."
"지금은 안 그렇다고?"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은 맞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뿐. 죽을 각오가 없으면 남을 죽일 수 없어. 알량한 위선이라고 해도 좋아. 너는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나 죽이는 게 아냐."
를르슈의 올곧은 시선이 스자크를 향한다.
"원래대로라면 넌 어딘가에서 죽었겠지. 네 의사와는 관계없이 내가 너에게 명을 내려 네 목숨을 거뒀고, 가졌다. 그러니 너에겐 정당한 자격도 이유도 있어.“
를르슈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눈치 챘다. 스자크는 쓰게 웃었다. 다른 것들은 꽤 솔직하게 인정하고 내뱉었던 주제에 위로만큼은 서툴러서 이토록 에둘러 말해야 한다.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 쓸데없다고 말하는 스자크에게 를르슈는 그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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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 브리타니아 대륙을 밟았을 때를 생각한다. 지금과 꼭 같이, AREA11부터 브리타니아까지의 9시간 동안 같이 있던 상대를 생각한다.
쿠루루기 스자크는 유복한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일찌감치 죽었고 아버지는 한 나라의 총리였으니 아이에게 할애할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많았으나 그 누구도 스자크의 말상대가 되어주지는 않았기에 스자크는 혼자였다. 전쟁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사람은 넘치게 흘러갔으나 그들은 군인이었다. 흘러만 갔다. 누구도 그의 곁에 남지 않았다.
그런 연유에서 상대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쿠루루기 스자크와 가장 많이 시간을 공유한 사람이며 과거에서 지금까지 연이 이어진 얼마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구속복을 입히고 온 몸을 뒤틀며 되지도 않는 반항을 하는 남자를 기절시켰다. 눈은 가리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 채로 스자크의 맞은 편 시트에 앉아 창공을 지났다. 그 와중에도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아름다움이 보여 스자크는 곤란했다. 쿠루루기 스자크는 때때로 그에게서 그런 것들을 보곤 했다. 지위가 없어도 높은 단상 위에 있는 것처럼 오만해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 모두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경애를 바칠 것이다.
비슷한 형태로는 되었다. 그의 기사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많은 이들이 때로는 자신과 반목함에도 그를 사랑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기만이었다.
긴 비행시간이었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이상하게 목도 마르지 않았다. 사람은 최대 열흘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가만히 앉아서 스자크는 줄곧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만약이 되풀이되었다. 만약 후쿠오카 기지에서 그와 손잡지 않았더라면, 나리타 혹은 도쿄 항만에서 그를 포획했더라면, 그의 정체를 일찌감치 알았더라면, 그가 전쟁 이후 브리타니아로 얌전히 돌아갔더라면, 그가 차라리 일본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의 여동생이 아니라 그가 총을 맞아 죽었더라면――.
만약은 실현되지 않을 것의 총칭이며 소망의 다른 발음이다. 한 번도 제 이외에 누군가가 죽는 것을 염원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기어이 그 지경까지 자신을 내모는 상대가 증오스러웠다. 자신이 바스라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난 8년 동안 수라장 속에서도 줄곧 지켜왔던 신념 -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 자신만을 위해서 힘을 쓰지 않겠다는 - 도 그의 앞에서는 만신창이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부조리한 폭력조차 건드리지 못했던 스자크의 신념을 그는 단 한 방의 총성으로 깨끗이 무너뜨려 버렸다.
너는 내가 잘못되었다고 애기했지.
그는 침묵한다.
아냐. 네가 틀렸어.
—침묵.
너는 그냥.
그는 머리가 좋았다. 500가지의 수신호를 만들고 전교생의 이름과 얼굴을 외울 정도로, 성적을 눈에 띄지 않는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의 지휘를 파악하고 행동 패턴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상대를 속이고 속이고 또 속일 정도로. 그러다 기어이 제 자신도 속여 넘긴 것이다. 그는 스자크에게 늘 바보라고 얘기했지만 이 부분은 분명 스자크가 옳다.
스자크는 마른 침을 삼켰다.
너는 그냥…….
……침묵. 침묵. 침묵. 쓰러진 그는 말이 없다. 침묵은 긍정일까?
스자크는 대신 지금의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 때와는 달리 둘만의 기차 안은 수다스러웠다.
“야만적이야.”
“무식하고.”, “배려심도 없지.”
“안구를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아직도 두통의 기미가 조금 남은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끊임없이 비난을 쏟아내는 쥴리어스의 목소리를 스자크는 시종일관 무시했다.
“내가 죽지 않아서 아쉬워?”
그러나 그 말에는 반사적으로 시선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마주친 눈동자가 ‘걸려들었다’라는 호기를 내뿜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회피할 수도 없어 스자크는 적당히 에둘러 답했다.
“글쎄요.”
“아쉽다는 얘기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쥴리어스는 보송보송하게 마른 안대를 손으로 지분거렸다. 정중한 손놀림으로 얼굴과 머리의 물기를 닦고, 안대를 씌우고, 조심스럽게 소파 뒤로 눕힌다. 죽이려고 생각하면서 상대를 그토록 정중히 돌보는 것. 고지식한 것도 참 힘든 일이다.
“명령만 아니면 죽였을까?”
그가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은 쥴리어스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스자크도 별로 감추지는 않았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따갑게 와닿는 시선은 호위가 아니라 감시다. 경멸과 혐오. 손이 닿을 때마다 꺼림칙해 움츠리는 그의 어깨. 그래도 잡아야 한다면, 으스러뜨릴 듯 손가락 마디마디 온 힘을 실어 쥔다. 의도한 건 아니다. 쥴리어스 킹슬레이가 본 쿠루루기 스자크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할 줄 아는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기사였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어떤 지는 둘째 치고 - 쥴리어스는 스자크가 무의식적으로 얹어두는 왼쪽 가슴에 '처음'으로 받았던 기사장과 깃펜이 들어있음을 알고 있었다 - 그는 결코 배반하거나 약은 꾀를 부리지는 못하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온전히 그의 무의식이었다.
뇌가 으깨지는 고통 속에서도 억센 손아귀와 진득하게 눈알을 핥던 혀의 감각. 스자크가 그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묘하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그토록 사무치는 원한이 제게 닿을 일이 있었나 생각해보지만 스자크와 만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이 죽는 게 무섭나?"
쥴리어스의 맥락 모를 말에 스자크가 눈을 깜박였다.
"기록을 봤어. 쿠루루기 일등병 시절부터 나이트 오브 세븐까지. 전시 중에도 인명구조 기록이 꽤 있더군. 상대방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말하는 게 습관이고 공격할 때는 상대 기체를 가동 불능 상태로 두는 것에만 만족한다지? 뭐, 일격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게 효율성이야 더 좋지만."
"그러면 상관없는 얘기 아닌가요?"
"그냥 궁금한 거야, 스자크. 우리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너는 전쟁의 적조차 죽이려 들지 않으면서 나를 죽이고 싶어 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만큼 억제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적의를 드러내는 것도 사양하지 않지. 그래도 죽이지는 못해. 왜?"
"논점이 이상하군요. 이유는 물어보지 않는 겁니까?"
"말해 줄 만한 이유라면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대해서도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관심은 없어."
"어째서?"
"죽고 사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지?"
당연하게 반문하는 쥴리어스에게 스자크는 말을 잃었다. 그는 정말로 스자크의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스자크가 맘만 먹으면 목이 비틀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쥴리어스는 무방비하고 거만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당장 죽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편한 자세냐, 그렇게 묻고 싶은 표정인데 스자크."
오른쪽 눈을 치켜뜨고 스자크를 바라보는 그는 역시 긴장은커녕 스자크에 대해 한 점의 경계심조차 띄우고 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지. 사람이 죽는 게 두려워?"
"그럴…지도."
"본인이 죽는 건?"
"그건 두렵지 않습니다."
"왜?"
"언제나 원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살아라.
그 명령이 스자크를 지금 여기까지 이끌고 있었다. 그건 하나의 저주였다. 스자크의 가장 싫은 모습을 억지로 만든다. 의지를 배반한 몸이 그의 몸을 멋대로 움직여 스자크의 생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수치스러울 정도로 싫었다.
쥴리어스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진다. "쓸모없군." 단호하게 내뱉어진 말에 스자크는 그와 있는 도중, 처음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어째서입니까?”
“이봐, 스자크. 전쟁은 뭐라고 생각하지?”
“또 다른 말이군요.”
“맥락은 그대로야. 답해 봐.”
“군인에겐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고 받들 뿐.”
“회피하기엔 적합하지만 멍청한 답이다.”
쥴리어스의 시선이 스자크가 그를 보는 것만큼이나 경멸스러워졌다.
“일반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그들은 피해자니까. 하지만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주제에 신념조차 없다면 그건 쓰레기야.”
“신념은 있습니다.”
“피해자를 줄이고 싶다는 어설픈 선의 말인가? 그래, 그게 진심이라면.”
“진심입니다.”
“남을 구하다가 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말야. 내심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이 있어?”
신랄한 어투였다. 얼마나 덧없는 말인지도 알고 있었으나 남을 지키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뒤에 이어진 말을 스자크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승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갈망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휘둘리기만 하는 그대는 차라리 이등병이었던 게 훨씬 나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쥴리어스 경. 당신에게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한껏 비꼬는 말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에게 어떤 의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황제의 꼭두각시 주제에 제 처지도 모르면서. 당장이라도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너는 세계를 배반해, 배신당해 여기에 형벌처럼 끌려왔노라고. 바닥에 쳐박혀서 비틀어진 신념을 네 것이라 믿으면서 네가 그토록 증오하던 브리타니아의 밑에서 개처럼 봉사하고 있다고. 사상누각처럼 쓸려나갈 허무한 영광을 으스대고 있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가 어떤 답변을 해도 스자크는 비웃을 자신이 있었다.
“생존은 본능이야. 사회질서가 인간을 고등하게 만들었지만 전쟁에선 불가능해. 살아남기 위해 승리한다. 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욕망이다. 타인의 죽음도, 그래, 두렵지만 나는 내가 죽는 게 싫다, 스자크.”
놀랍도록 원초적인 대답이었다. 스자크는 옳았다. 태평양을 지나며 바다 위에서 그에게 물었던 말의 대답이기도 했다. 침묵은 긍정. 스자크는 옳았다. 나나리도, 마리안느의 일도 모든 것은 핑계다. 그는 그냥 제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을 뿐이다. 구차하게.
“맘에 안든다는 표정인데.”
스자크의 표정에 쥴리어스는 또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관심 없다고 해도 누군가에게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멸시받는 것을 두고 볼 취미는 없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황족보다 아래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내가 위겠지?”
“전시에서는 경의 명을 우선할 수도 있지만 당신에게 복종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상관없어. 그대의 전공은 전술이고 나는 전략이지. 그대를 이 전선에서 가장 빛나게 해주지, 스자크. 이 전선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겠어.”
“무슨 뜻입니까?”
“자네를 철저하게 적을 섬멸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아. 스자크는 역시 그가 싫었다. 또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살아라, 라고. 그게 그의 본질이었다.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남을 기만하고, 쿠루루기 스자크를 괴롭히는 걸 더없이 즐기는 남자.
⁕
―죽고 싶지 않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었다. 창으로 비치는 햇빛에 눈을 깜박인다. 느긋한 하루였다. 오늘은 휴가에요. 나나리가 손을 잡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여유로운 하루를 보장받았다.
시간은 바쁘게 흘렀다. 직접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바빴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매일의 스케쥴은 가득 차 있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차라리 란슬롯으로 9시간 동안 쉬지 않고 비행과 전투를 반복하는 쪽이 더 나은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도 지금은 박물관에 부서진 채로 존재하는 파편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군인이 일해야 되는 나라는 필요 없다. 18살 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소년병으로 살아온 사람도 이제는 바뀐 직책에 익숙해져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종종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얼굴만 잘 가린다면 이제는 알아보는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에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손으로 제 손가락이나 겨우 쥐면 다행일 것 같은 아이가 엄마의 응원에 힘입어 걸음마를 시작한다. 길고양이가 가볍고 힘 있게 걷는다. 크레이프를 파는 노점에는 몇몇 커플이 줄을 서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 밖으로 산책을 나온 피곤해 보이는 직장인들도 있다.
선글라스를 끼고서도 모두가 눈부셨으며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후지산의 사쿠라다이트가 폭발해 재가 창공을 뒤덮었던, 말 그대로 잿빛의 풍경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트메어프레임의 잔해들이 수직낙하하고 어디선가 끊임없이 폭발음이 들리기도 했다. 웅웅거리는 기계음 사이로 간혹 사람의 비명이 들리기도 했었다. 팩트 스피어의 끝자락에서 부서진 채로 날아가는 콕핏과 혹은 떨어지는 사람 같은 것들을 보기도 했다.
―살아라.
그리고 무의식 속에서 점멸하는 붉은 등이 그것들을 온전하게 지워버렸다. 간혹 꿈을 꾸는 날들이 있다.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과 경험이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이 둔했다. 드러나지 않게 온 몸을 칭칭 둘러싸고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남은 것은 칼날이 피부와 근육, 뼈를 관통해서 나아가는 감각뿐이다. 기온도, 소리도, 하다못해 제 뺨에 닿았던 손조차 가면 너머라 그저 턱-하고 가면을 흔든 채로 그저 의미 없이 사라졌다.
흰 옷이 햇빛을 반사해 난연하게 빛났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검은 필름이 붙은 시야는 색맹이다. 번진 빛이 조금씩 까맣게 물들어 죽어갔다.
그대를 가장 빛나게 해주지.
같은 얼굴의 다른 이름인 그가 그렇게 말한 적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가 아름답다. 애늙은이처럼 관조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려면 종종 그 말이 떠올랐다. 그가 끌어안고 있던 인과관계, 겉치레를 벗어던진 순수한 그의 본질이었다. 오만한 그는 자신을 발밑에 꿇리기 위해 말했다.
그대를 이 전선에서 가장 빛나게 해주지, 스자크. 이 전선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겠어.
그가 솔직하게 말하는 데에 서투르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말들은 제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솔직한 말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영달보다도 드높은 찬미가 제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
지금 그 이름을 내뱉는 것은 죄이므로 입술을 짓씹어 삼킨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넘겨주었다. 서로의 소망과 상반되는 행위를 벌로 받았으나 기회는 늘 살아남은 사람에게 있다. 죽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남은 행복도 전부 세계에 바치라고 말했던 주제에, 왜.
—나는 죽는 게 싫어, 스자크.
처음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너무 늦은 얘기라는 것도 떠올렸다.
⁕
황력 2018년, 브리타니아의 수도가 소멸되는 등 세기의 전투 끝에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제 99대 황제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세계를 통일했다.
그의 억압적이고 악랄한 독재 방식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규탄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브리타니아의 세계 지배를 앞당겼을 뿐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브리타니아와 대등한 힘을 갖고 있던 유럽전선이 그해 초, 사실상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비등하게 흘러가던 전쟁의 승기가 브리타니아 쪽으로 흐른 것은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당시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크가 파견된 이후이다. 훗날 세계를 손에 넣은 황제의 기사, 나이트 오브 제로가 된 그의 무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나 전투 기록을 보면 오히려 그의 등장은 매우 적었으며 철저히 전략의 싸움이었다.
브리타니아의 실권을 노리던 유로 브리타니아 세력의 싹을 자름과 동시에 전쟁의 승리를 가져온 명민한 책략가가 거기에 있었음에는 분명하다. 빠르고 정확하며, 주변의 지형과 기습을 아끼지 않는 유연하고 매끄러운, 그러나 잔혹할 정도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고 피아를 가리지 않는 승리만을 거머쥐는 방식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나 제로의 것과도 비슷하나 이 자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서부 유럽 전선에서 쿠루루기 스자크의 활약은 완벽 그 자체였다고 한다. ‘하얀 사신’이라는 이명 역시 그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죽을 때까지 활약한 이였으나 그토록 두드러진 것은 서부 유럽 전선이 유일하며, 쿠루루기 스자크 개인을 논할 때 유럽 전선의 활약을 빼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쟁에서 두드러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살아있음을 반증한다. 쿠루루기 스자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당시의 그는 가장 격렬하게 살아있었노라 말하고 있었다.
- Etude Existence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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