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글
[A3!/오미사쿄] 실연
2018. 03. 24. 일본 오미사쿄 원드로 '실연'
실제로는 한시간이 살짝 오버했지만. 실연이라서 오미사쿄 안 사귐.
조수석 문을 닫는 소리가 경쾌하다. 오미는 차분하게 앉아있었지만 어딘가 들뜬 기분이 역력했다. 안전벨트를 매는 오미를 곁눈질로 확인한 뒤 사쿄는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걸리는 엔진소리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활기차게 들린다. 자신이 남에게 이렇게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었나. 사쿄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목적지는 어디?"
"아. 내비게이션으로 입력할게요."
휴대폰이 모든 걸 대체하지 않았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사쿄라면 모를까 요즘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에 무언가를 적어놓곤 한다. 미성년자의 비중이 압도적인 극단 내에서 그나마 연장자인 츠무기나 타스쿠도 휴대폰에 필기를 대신하는 마당에 오미는 종이에 꼼꼼하게 무언가를 적어 왔다.
"보통 휴대폰에 저장하는 거 아닌가?"
"정리하려면 그래도 종이에 필기하는 쪽이 편하거든요."
"꽤나 아날로그하군."
"이런 부분이 의외로 연상에게 어필하는 점이 될까요?"
"…글쎄다. 목적지는… 일단은 점심?"
"네."
내비게이션을 확인한 사쿄는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이 동네에선 조금 떨어진 도심의 레스토랑. 이동경로를 읽은 사쿄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겠는데."
"그런가요?"
"주말에 나가려면 아무래도 막히겠지."
"참고하겠습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직진, 우회전, 도심으로 나가는 큰 도로를 타고 직진하던 사쿄는 시간을 보다 오른쪽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주말 이 도로는 특히 막히니까 여차하면 우회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아."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사쿄의 말에 오미는 볼펜으로 메모장에 꼼꼼히 적어나간다. 가뜩이나 장신의 오미는 그 키에 비례하게 손도 크다. 룸미러로 곁눈질 해 보는 오미의 손에 잡힌 볼펜은 이상하게 작아보여서 사쿄는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뭔가 있었나요, 사쿄 씨?"
"아니. 꽤나 학구열에 불탄다고 생각해서 말야. 학점은 좋을 거 같네."
"열심히는 하고 있어요."
"그런가."
평일 점심의 도로는 교통량이 적어 한가하다. 많이 따뜻해진 봄날씨에 하늘도 제법 새파래진 느낌이다. 여자는 봄,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말이 있지만 계절의 변화는 원래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겨울의 창백한 푸른 색과는 다른 채도 높은 하늘색에 사쿄도 때론 다른 상상을 할 때가 있다. 가을조는 활동량 높은 액션 공연 담당이지만 여름조 같은 코미디를 하면 어떻게 될까. 러브 코미디도 괜찮겠지. 극단원 중 여성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극단에서 러브코미디? 여장을 하게 되는 건 또 타이치일까. 아니. 결과적으로는 그저 난폭한 액션이 섞인 치정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더 너를 사랑해.'
"아. 저기에요."
골목골목을 꺾어 들어가 오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면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간판이 보인다. 3층까지 전면 유리로 인테리어 된 레스토랑을 확인한 사쿄는 건물 옆으로 들어갔다.
"사쿄 씨?"
"이 정도 규모의 레스토랑이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면 당연히 주차장은 건물 뒤편이겠지. 아니면 주차 타워라든가."
사쿄의 말대로 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은 레스토랑의 규모에 맞게 제법 컸다. 주차요원에게 차를 맡기고 나온 사쿄와 오미는 바로 연결된 뒷문으로 식당 내부로 들어갔다. "두 분이신가요?" 그렇게 묻는 직원의 말에 오미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창가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선 한 눈에 동네의 경치가 보인다. 도심이라고는 해도 대로에서 한블럭 벗어나 있으니 제법 한가로운 경치다. "바로 앞엔 작지만 강이 있어서요." 오미는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특히 강변을 따라 벚꽃이 심어져 있어서 꽃이 피면 아주 예쁘다고 하더라구요."
사쿄는 그 말에 가늘게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몽우리도 지지 않은 가지는 앙상했으나 오미의 말마따나 괜찮은 풍경이 될 것이다. 희고 엷은 분홍빛의 벚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며 먹는 점심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좋은 점심이 되겠지. 사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 편에 앉은 상대를 보았다. 점심의 태양이 몹시도 밝고 찬란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태양이 바로 들어오지 않으니 사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마 오미의 기분이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좋네.
코스로 나온 요리도 나쁘지 않았다. 샐러드는 아삭했고 유자와 레몬, 올리브 오일이 섞인 드레싱은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식전빵도 부드러웠다. 사쿄의 입맛에 크림 파스타는 조금 느끼했지만 할라피뇨와 먹으면 깔끔하게 떨어지는 감칠맛이 있었다. 오미가 시킨 스테이크는 웰던이라도 부드러웠고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는 산미가 보통의 것보단 높았지만 기름진 음식을 먹었을 땐 이 정도가 딱 좋은 거 같았다. 적당히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사쿄가 계산을 하고 오미를 데리고 나오면 오미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대학생이겠지."
"제가 사쿄 씨를 데리고 나온 거잖아요."
"어차피 돈 쓸 일도 많으니 이런 아저씨한테 쓰지 말고 아껴둬."
사쿄는 코웃음치며 답했다. 다음 코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 요즘 유행하는 아기자기한 카페일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차분하고 고풍스러운 맛이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앤티크 가구와 우아한 색채를 가진 다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카페에서 사쿄와 오미는 스콘 하나와 차를 시켰다.
"대학생 취향이 아닌데."
"연상이니까요."
"그렇군."
"단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이 집 스콘은 그렇게 달지 않아서 괜찮네요."
"그런 것 같네. 그렇다고 해도."
사쿄는 나이프로 스콘에 버터를 듬뿍 바르면서 말을 이었다.
"나야 이런 종류는 많이 안 먹어봐서 모르겠지만, 네가 만드는 쪽이 더 괜찮은 거 같은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발라서 스콘의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버터 자체는 상등의 무염 버터인데도 사쿄는 어쩐지 입안이 소태처럼 썼다. 뜻밖의 칭찬에 "감사합니다."하고 쑥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오미는 평소보다 어려보인다. 아까 하던 상상을 사쿄는 계속 했다. 츠즈루는 사실 러브 코미디는 잘 못 쓴다. 만약 그런 게 필요하다면 무쿠의 순정만화를 빌려 오겠지? 액션 치정극에 순정만화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대사 정도는 몇 개 빼올 수 있다. 사쿄는 무쿠가 추천해 준 몇 권의 순정만화에 흔히 있던 패턴을 생각한다. 혹은 드라마를. 인공적으로 내리는 비는 여름의 장대비만큼 무겁고 세차게 떨어진다. 몇 분만 나가 있어도 옷이 흠뻑 젖는 폭우 아래에서 선택받지 못한 남자는 두 가지 루트로 나뉜다. 왜 안 돼? 라고 묻는 사람과 안녕. 하고 이별을 고하는 사람. 어느 쪽이든 사실 사쿄는 썩 맘에 들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건 이기적이다. 거절해야 하는 사람은 분명 무겁고 괴로운 마음일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사쿄는 간혹 부러웠다.
"이봐, 후시미."
"네?"
"우리 다음 공연은 어떤 게 좋을 것 같지?"
"글쎄요. 지금까지 한 건 마피아, 야쿠자, SF인데… 청춘이나 러브코미디 같은 건 저희한텐 안 어울리죠."
"그렇지."
"사쿄 씨는 생각해 둔 게 있나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유행이니 영웅물은 어때."
"그걸 연극으로 할 수 있나요?"
"농담이다."
사쿄가 부드럽게 우러난 수색을 바라보며 차를 홀짝이면 오미는 그저 웃었다. 봄은 겨울보다 해가 길어져서 아직도 창가로 스미는 햇빛 아래 보이는 오미의 얼굴이 밝고 눈부시다.
오미가 계획한 데이트 코스는 이 뒤로 영화관이었지만 사쿄도 오미도 영화까지 보고 갈 시간은 없어 그 부분은 생략했다.
"어떤 거 같아요, 사쿄 씨?"
"아. 식당도 카페도 나쁘지 않았네. 밥 먹고 바로 카페라니 조금 부담스러운 감도 있지만 첫 데이트니까."
"그런가요?"
"솔직하게 말하면 점심, 카페, 영화관 순서는 너무 식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하하 역시 그렇죠. 그래도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서요."
"연상이 상대라면 오히려 그런 점이 더 풋풋해 보일지도 모르지."
"풋풋……. 저랑은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네요."
"20대니까."
"사쿄 씨도 아직 그 정도 나이는 아니잖아요."
"글쎄다. 나야말로 오늘 도움은 됐나? 하필이면 데이트 예행 같은 걸 나한테 부탁하는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뇨. 많이 도움이 됐어요. 일단은 연상이고 회사원인데다 엄청난 커리어우먼이거든요. 반면에 저는 경험도 없고."
"저 근처라면 괜찮은 분위기의 술집도 알고 있지. 나쁘진 않을 거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 망설인다면 무알콜 칵테일도 파는 곳이니 그걸 추천하도록 해."
"정말요? 감사합니다. 사쿄 씨의 추천이라면 믿을만 하네요."
극단 앞에 도착하면 슬슬 시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스름하게 지평선 너머로 내려가고 있을 오늘의 태양을 생각하며 꽤 시간이 빨리 갔구나 사쿄는 생각했다.
"사쿄 씨는 안 내리나요."
"나는 볼 일이 좀 있어서."
"아 그럼 저녁은요?"
"먹고 들어간다고 얘기해 줘. 오늘 당번은 미나기?"
"감독입니다. 아 설마 카레 먹기 싫어서 도망치시는 건 아니죠?"
머리를 스치는 가능성에 차에서 내린 오미가 문을 닫으려다 말고 안을 쳐다보면 사쿄는 조금 미소 띈 얼굴로 말한다.
"감독한텐 비밀로 해줘. 치카게까지 거들면 울어버릴 테니까."
보기 드문 사쿄의 농담에 오미가 앗 하는 사이 사쿄의 차는 다시 부드럽게 출발한다. 백미러로 보이는 오미는 조금 이 쪽을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가, 사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직 푸른 하늘에 사쿄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보려다 말았다. 지금 상태에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기본적으로 가을조엔 러브코미디같은 건 어울리지도 않고, 비를 맞으면서 '왜 안돼?'라고 묻거나 '안녕.'이라고 이별을 고하는 건 만화나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극적이고 로맨틱한 방법이다. 현실은 이렇듯 쾌청한 날에 조용하게 시작해 조용하게 막을 내리는 것이다.
"뭐. 애초에 이 나이에 실연했다고 우는 것도 이상하잖아."
애초에 실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어차피 가능성조차 갖지 않은 마음은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영원히 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린 채로 자라났으니 마음이 죽을 때까지 빙빙 같은 곳을 도는 거라고 후루이치 사쿄는 생각했다. 다만 차는 어디로든 가야 해서 사쿄는 그저 엑셀을 밟았다. 엔진소리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경쾌했다.
'기타 장르' 카테고리의 다른 글
[A3!/마키사쿄] 여름의 눈 (0) | 2018.03.29 |
---|---|
[A3!/오미사쿄] Chance (0) | 2018.03.26 |
[A3!/오미사쿄] 기상 (0) | 2018.02.05 |
[A3!/켄사쿄] 달려라 사코다 켄! (0) | 2018.02.05 |
[A3!/아즈사쿄] 눈 (0) | 2018.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