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쓸데없는 욕망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해본다. 어떤 상황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본능일까. 학습된 결과는 아닐까. 그것이 누군가 좋다고 말했기 때문에, 모두 좋다고 생각해버리는 것 아닐까. 사실은 좋지 않을 수도 있지. 첫키스는 레몬맛이라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몬맛도 아니었고 - 그냥, 그랬다 - . 하지만 보통 저건 다 좋다고 말하니까 역시 좋은 거 아닐까.
…하고 후시미 오미는 적막이 내려앉은 방에서 쓸데없이 고뇌하고 있었다.
스무 살, 후시미 오미의 애인은 서른 살, 후루이치 사쿄라는 남자다. 등이 올곧고 눈매가 무시무시하고 잔소리가 심하지만 안경을 벗으면 의외로 섬세한 이목구비에 어려 보이는 얼굴을 가진 남자. 폭풍같던 시절은 옛날옛적에 지나간 줄 알았는데 어찌저찌 잠들지 못하는 밤과 깨어있지 못하는 낮을 반복하여 후시미 오미의 가슴 설레는 사랑은 간신히 해피엔딩으로 종지부를 찍…는듯 하였으나 드라마는 사귀는 과정까지만을 얘기하지 연애의 한중간을 보여주진 않는다.
20명의 극단원에 지배인, 감독까지 총 22명이 기거하고 있는 기숙사에서 연애는 고난과 역경의 대서사시다. 데이트 한 번이라도 하려고 하면 한 편의 스파이물을 방불케 했다. 철저하게 다른 종류의 메신저를 쓰면서 약속을 잡았고 극단에서 지하철로 다섯정거장쯤 떨어진 동네에서 만나 차를 타고 이동하고, 헤어질 땐 중간에 내려 각자 다른 시각에 집에 들어갔다. 오미도 그것에 반대하진 않는다. 극단에선 보는 눈이 많았고, 대외적으로도 열 살 차이에 같은 남자다. 게다가 사쿄의 직업은 일단은 썩 일반적인 종류의 것은 아니고 본인도 그것에 대해 생각이 많은 것 같으니 사쿄의 신중함과 조심성에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류의 데이트를 제외하면 대체 전과 달라진 게 뭐냔 말이야.
손도 잡고, 키스도 한다. 그거야. 좋지. 이전이라면 꿈도 못 꿀 얘기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쿄의 차 안에서만. 그 비좁은 시트에서 나오면 모든 것은 사라지는 신기루같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애인이랑 같은 지붕에서 생활한다니 좋은 거 아니냐고.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건 물론 좋은 일이다. 연습이라도 하게 되면 몇 시간이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고 - 극본의 대사지만 - , 밥도 같이 먹는다 - 그 외 열 명 남짓이 함께하지만 -. 이전이라면 오히려 모르는 척 시선 한 두번이라도 더 마주쳤을 텐데 '애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니 사쿄는 실수로라도 눈이 마주치지 않게 노력하는 바람에 전보다 못하게 됐다. 그나마 혼자 방을 쓰는 사쿄에게 야식을 배달한다는 핑계를 대고 밤에 몰래 가 그럭저럭 애인같은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게 오미의 위안이었다.
사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생활은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면 금방 고개를 돌리는 얼굴에 희미하게 남은 쑥스러운 느낌을 보는 것도 좋았고, 신문을 읽고 있는 것 같지만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는 옆모습에 우월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한정된 공간이긴 해도 자신보다 조금 작은 손의 모양을 면밀하게 손 끝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열네 살짜리 꼬마애처럼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상대를 볼 수 있다는 것, 상대방도 똑같은 열기를 느낀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굉장한 행복이다.
원인은 오늘 낮에 있었다.
"아 진짜 기분 끝내주더라니까."
숟가락까지 내려놓고 열변을 토하던 친구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속닥거렸다. "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기분이 와……. 눈은 떴는데 아직 정신은 못 차리고 있는 게 너무 귀여운 거야. 생각만 해도 좋은지 실룩대는 입술을 숨기려고 친구는 다시 맛도 없는 학식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남의 경험담 같은 건 별로 듣고 싶지 않았던지라 오미는 대충 흘려듣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퍼뜩 상상이 시작된 것이다.
극단원 대부분이 학생인 이상, 어른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모양인지 사쿄가 누군가의 앞에서 무방비한 일은 드물었다. 피곤해도 쉬는 시간에나 잠깐 눈을 감고 있다 뜨는 정도로,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에도 늘 잠은 제대로 본인 방에 들어가 자곤 했다. 오미가 밖에 있던 날, 기숙사 중원에 풀장을 만들어 놀았다는 사실은 아쉽지 않았지만 파라솔 밑에서 안경을 벗고 졸고 있던 사쿄가 감독이 미끄러지는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가 같이 미끄러져 빠졌다는 얘기엔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안경까지 벗고 태양 밑에서 졸고 있는 사쿄라니. 그 날 약속을 잡았던 제가 죄인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합숙을 갔을 때는 사쿄가 강제로 불을 끄는 바람에 잠든 얼굴 같은 건 보지도 못했고 깜짝 놀래키려고 하니 이미 말끔하게 일어나 있었다. 미지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본능이다. 기회가 있었는데도 보지를 못했으니 아쉬움은 두 배고, 한 번 시작한 상상은 멈출 수 없었다. 오미는 남은 오후 강의 내내 사쿄의 이런저런 자는 얼굴이나 잠에서 깨어나는 얼굴을 상상하느라 제대로 필기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회가 이렇게나 갑자기, 타이밍 좋게 눈 앞에 온 것이다.
"사쿄 씨?"
오늘도 핑계용으로 갓 구운 따끈한 스콘 두 개를 들고 오미는 106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기숙사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했고 스콘을 굽고 있을 때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사쿄와도 한 번 마주쳤으니 방 안에 있는 것만은 확실했는데 대답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 문은 쉽게도 열렸다. 어두운 방 안엔 스탠드가 켜있었고 책상 위엔 복잡한 서류들이 널려있었지만 방의 주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작은 숨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들리는 전부였다.
숨소리…….
거기에서 퍼뜩 오미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슬쩍 침대를 보면 언제나 정갈하게 놓여있던 이불이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 틈새로 보이는 작은 금발도. 상식적으로는 수면을 방해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방에 나가는 게 맞겠지만.
나는 애인이잖아? 그 정도는 볼 권리가 있는 거 아냐?
앞선 모든 고민들을 치워버리는 그럴듯한 명목이 이윽고 오미의 머리에 떠오르고야 말았다. 오미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이층 침대의 계단을 올랐다. 조금만 올라도 키가 큰 오미는 금방 그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가버리고 만다. 잠을 잘 생각까진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대로 안경을 쓰고 있었다.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곤히 잠든 사쿄를 깨울까 말까 고민하던 오미는 대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안경을 벗겼다. 다행히 그 정도 자극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게 안경을 벗고 평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그 정갈한 면이 훨씬 두드러지는 데다 작은 눈물점들이 훨씬 맵시있게 보였다. 별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게 콩깍지일까.
오미가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려면 그 때 사쿄의 눈썹이 조금씩 흔들렸다. 느릿하게 올라오는 눈꺼풀의 움직임에 미처 숨지 못하고 보던 순간 이윽고 완전히 드러난 눈동자가 오미를 향했다.
"―후시미."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게 키스를 한 왕자의 기분이 이런 걸까. 아니면 백설공주에게 키스한 왕자라든가? 친구의 말은 맞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도 맞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미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 작은 인삿말이 꿈처럼 들렸다. 안녕하세요, 사쿄 씨. 오미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답하면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사쿄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이더니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다. 인상을 찡그리고 안경을 찾는 사쿄에게 오미는 제가 들고 있던 안경을 내미는 대신 허리를 굽혔다. 이제 막 눈을 뜬 사쿄의 눈이 다시 감긴다. 마른 입술을 축이는 것처럼 오미는 열렬히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