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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아즈사쿄] 눈
2018.01.27 일본판 아즈사쿄 원드로. 천천히 캐릭터 잡는 중.
좋은 기억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쁜 기억을 생각하는 쪽이 훨씬 많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누가 그랬지. 고독은 공기 중에 있어서 불현히 들이쉰 숨에서도 순식간에 감염되는 법이다. 상식적으로 그것은 이질이다. 함께 있는데 고독을 기억하는 것, 나쁜 기억을 생각해버리는 것, 사람은 원래 혼자서 태어나는 법이니까.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나름의 노하우를 알려준 선배가 있었다. "우리는 병에 걸린 거야."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해준 적은 없고 그녀도 자신의 얘기를 한 적 없다. 고독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동지애는 있었다. 유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고독에 익사해가고 있었으므로 같은 침대에 누워도 별다른 도움은 되지 못했다.
사쿄 군, 그거 알아? 그런 실험이 있었대.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고 그 사람의 손목을 긋는 거야. 아니, 칼 같은 거 말고. 그냥 조금 따끔한 그런 거. 상처는 나지 않아. 피부가 조금 불거지긴 할까? 그 팔목 위에 물이 뚝뚝 떨어져서 흐르게 만들고 말하는 거지. 당신은 지금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몇 시간 후에 당신은 실혈사할 수도 있겠네요. 그럼 어떻게 되게? 눈이 가려져 있으니 확인할 수도 없고, 손이 묶여 있으니 만져볼 수도 없지. 그럼 체온이 서서히 내려간대.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추위도 느끼지. 실내온도는 그렇게 춥지 않은데.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다는 거야.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는데 정말 실혈사하는 것처럼 천천히.
"술안주치곤 우중충한 얘기군, 유키시로."
"그래? 하지만 어른은 다 그렇지 않아? 사쿄 군은 어때. 외롭지 않았어?"
그렇게 물으면 상대방의 미간엔 살짝 골이 생긴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누구도 외롭지 않은 시간은 없겠지만 뭐라더라,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니까. 유키시로 아즈마는 자신의 고독을 누군가와 처음 나누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 고통을 본인만큼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해하고 기다려 줄 사람이 생겨서 기뻤다. 찬물과 더운물이 섞이는 것처럼, 푸른 잉크가 물에 섞이는 것처럼 같은 액체라도 휘저어줘야 똑같은 온도와 똑같은 성질의 무언가로 변한다. 아즈마는 그것을 기다려주고 있는 극단원들에게 감사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같은 성질의 고독을 아는 사람과의 유대는 좀 더 특별하다.
"외로움을 느낄 만한 시간이 없었지."
아즈마도 본 적 있다. 초대 여름조의 공연 비디오. 저 멀리서 공연을 보고 있는 자그마한 꼬마가 사쿄 군이라고 해서 어쩐지 감격하고 또 웃고 말았다. 무뚝뚝한 사쿄 군에게도 저런 귀여운 시절이 있었구나. 잘 컸네. 하면서 머리를 쓱쓱 문지르면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사쿄가 한 말이라곤 "…그런 건 학생들한테나 해주라고."뿐이었다. 고지식하게 장유유서가 확실한 사쿄가 극단원 중 유일하게 연상인 아즈마에게 함부로 소리 지르거나 잔소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아즈마를 포함한 모든 극단원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외롭다고 느꼈던 건 중학교까지다. 그 다음부턴 돈 벌 궁리만 잔뜩하고, 심심찮게 몰려드는 놈들이 있었으니 외롭진 않았지."
그렇게 말하며 사쿄는 악동처럼 웃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고등학생 때의 활극이라도 생각하는듯 악랄하게 불타올랐다가 사라졌다. 못된 얼굴. 아즈마는 조용히 웃었다.
"사쿄 군은 가끔 어린애처럼 웃어."
"아직 덜 자란 어린애일지도 모르지."
"사쿄 군이? 의외네.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항상 잔소리하고 어른스럽게 굴려고 노력하잖아. 가끔 보면 유치원 인솔 교사 같아."
"평균 17세의 유치원생들이라……. 흥미롭군."
하지만 뭐, 그래. 나는 고집스럽고, 자존심도 세니까. 그런 어리광은 고등학생의 특권이지. …세대차이하곤 별개의 얘기다, 유키시로. 냉정한 사쿄의 자기판단에 아즈마가 또 웃음을 터뜨리면 사쿄는 눈을 샐쭉이며 잔에 들어있던 사케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아즈마도 적당히 들고 있던 잔을 비우면 따뜻한 술은 이미 예전에 식은 모양이었다. 사쿄 군이랑 얘기하면 늘 이렇지. 시간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특별히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에겐 적당히 편한 공기가 있었다. 어린 애들은 벌벌 떨고 있지만 아즈마에겐 그가 잔뜩 꾸며낸 강압적인 분위기보다 오랜 시간 속에 축적해 온 고독의 향취가 먼저 느껴졌다. 가을조는 이상하게 외로운 사람이 많지만 그의 것이, 아즈마는 자신의 것과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다. 혹은 자신의 '손님'들과. 하지만 어떨까.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 우리는 여기가 아니면 만날 일이 없었을 것 같아."
"다 비슷한 것 같은데. 내가 중학생하고 만나게 되면 그 다음에 만나는 건 짭새겠지."
아. 그 말에 아즈마도 저절로 상상이 된다. 온통 검은 옷에 인상 험악한 금발 남자와 그 옆엔 복장부터 시끄러운 딱 봐도 양아치, 그 앞엔. 그렇지. 성 플로라 중의 교복은 앙증맞은 세일러인데다 유키와 무쿠는 남자 중학생이라기엔 지나치게 얌전하고 예쁘장한 아이들이었다. 몇 마디 말만 섞어도 어쨌든 그 불온한 공기는 안전을 위해서라도 한번쯤 경찰을 생각해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경찰차를 탄 사쿄 군은…….
"어이, 유키시로.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상상할 필요는 없어."
불퉁한 얼굴의 사쿄는 한 번 또 째려보고는 술병을 털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 잔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즈마가 "한 병 더?"하면 사쿄는 고개를 젓는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얼굴은 느슨하고 여유롭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고독한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고독에 익사해간다. 그것은 고쳐진 것 같아도 언제나 잠재된 바이러스이므로 시기가 맞는다면 다시 왕성하게 활동해 순식간에 영혼을 좀먹는다. 아무런 상처가 없어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고 고독은 그 정신 안에 있다.
그러나 후루이치 사쿄는 뭘까. 그에겐 그런 고독의 흉터가 있다. 일견 쓸쓸한 옆모습이 있다. 그에게도 홀로 있는 방이 지나치게 넓고, 어둠이 적막하여 반대로 눈이 감기지 않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미래이다. 영혼에 남은 흉터는 죽을 때가지 사라지지 않는다.
"다들 그렇긴 하지만 사쿄 군은 소이네야같은 건 찾지 않을 거니까."
아무리 외롭거나 고독해도 똑바로 대지를 딛는 견고함이 이상하게 그에겐 있었다. 유독 장신인 가을조에서 그는 불행하게도 타이치를 제외하면 가장 작은 신장이다. 그렇다고 아주 작은 것도 아니지만 꽤 험한 그의 직업이나 오랫동안 오는 시비 가는 시비를 가리지 않았다던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비교하면 마른 체구임엔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것은 평소엔 잘 모른다. 옆에 오미 군이 있다면 꽤 작다 싶고, 욕실이 공동인 기숙사에서 가끔 볼 때도 새삼스럽게 놀라곤 한다. 생각보다 훨씬 마르고 작은데 사람들은, 아즈마도 그를 실제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소이네야를 찾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어항에서 익사해가지만, 후루이치 사쿄는 그 세계에 살면서도 유일하게 호흡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유영하며 가라앉는 사람들 속에서도 똑바로 다리를 펴고, 걷고, 숨을 쉰다. 그는 유키시로 아즈마가 아는 유일한, 불치병의 면역자였다.
"유키시로."
"응?"
어떻게 하면 숨을 쉴 수 있을까. 그 방법을 물어도 후루이치 사쿄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 선천이고 후천이다. 지난한 세월과 경험과 그의 강인한 사고가 오랫동안 쌓아 만든 것이니 본인도 모르겠지. 아직도 쓸쓸한 그림자 속에서 있는 것같은 아즈마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봐. 눈이 와."
"아, 정말이네."
아즈마가 한껏 상념에 젖어있는 사이 언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 제법 눈의 크기가 컸다. 바람이 세게 불진 않아 두둥실, 천천히 가볍게 떨어지는 눈들은 어둠 속에서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차게 반짝였다.
"겨울을 좋아해."
창 밖을 보던 사쿄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해도 빨리 지고 추우면 사람이 모이니까. 겨울엔 어머니가 일찍 일을 마치고 오셨거든. 밤에도 딱 붙어 자고. 그래서 좋았어."
"그렇구나."
나는 싫었는데. 아즈마는 약간 비웃고 싶은 기분이 됐다. 지독히도 추웠다. 아무도 없는 방이, 누구와 붙어있어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처럼 한기가 들어 이가 딱딱거렸다.
"눈은 얼음이니까 차갑지만 반짝거리지. 도쿄에선 내리는 일이 드무니까 밤새 내려서 새하얗게 쌓이기라도 하면 다들 모여서 눈싸움 하잖아."
"좋아하는 걸 말하는 시간이야?"
아즈마의 전에 없이 묘하게 날선 반응에도 사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가끔 잠이 안 와서 나침반을 두고 어디가 동쪽인지 확인한 다음 해가 뜨는 걸 볼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햇살에 비친 눈이 반짝거려서, 아름다웠거든."
"사쿄 군?"
내내 창밖을 보고 있던 사쿄의 시선이 아즈마를 향한다.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엄격하고 적당히 쑥스럽고 다정한 얼굴이다. "좋은 이름이지." ……위로가 서툰데 정이 많은 남자는 정말 살기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아즈마는 사쿄의 길고 긴 말들이 결국 오늘따라 수상쩍을 정도로 외로워하던 저를 위한 위로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지나친 에두름에 아즈마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사쿄를 바라보면 멋쩍은 얼굴의 사쿄는 큼큼거리며 일어나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는 쟁반을 들고 일어선다.
"오늘은 이만 하지."
"아주 귀여운 소리도 들었으니 그래야지."
"…시끄러워."
"내일 일어나서 눈이 쌓여있으면 다같이 눈싸움이라도 할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애들은 알아서 눈투성이가 될 거다. 눈투성이로 젖은 현관이라니 끔찍해."
"눈싸움 하는 거 좋다 그러지 않았어?"
방금 한 말을 기억하며 아즈마가 물으면 사쿄는 말이 막히는지 한참 있다 "눈싸움을 좋아한단 말은 안 했어."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 사이에도 잘 자라는 인사는 빼먹지 않는 것이 사쿄의 예의바름이다. 문이 닫히고, 밤은 깊었다. 술자리는 끝났으니 피부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잠이 들 시간이었다. 유키시로 아즈마는 입가심으로 물을 마시면서 문득 생각한다. 혹시 나도 지금 숨을 쉬는 법을 배우고 있지 않을까, 하고. 아까까지는 입고 있는 옷 사이로도 한기가 들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춥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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