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9일 디페스타에 냈던 스자루루 소설본 '망각에서 온 편지'의 재고를 통판합니다.
최종사양 A5/중철본 28p으로 가격은 3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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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le
“요즘 내 평판은 어때?”
오만하신 황제폐하는 어느 날 그렇게 서두를 열었다. 따뜻한 햇빛에 반사된 를르슈의 흰 옷이 눈이 부실 정도로 평화로운 오후였다. 원형의 테이블, 왼쪽엔 황제, 오른쪽엔 마녀, 나는 기사인가?
스자크는 한 손으로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기사장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쿠루루기 스자크는 제국의 유일무이한 기사로 그 생을 마쳤으나 스자크는 가끔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기사 서임을 받은 날의 들뜸과 설렘,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이 아득히 멀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면 불쌍하고 어리석어 한 번 걷어 차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떨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황제가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는 얘기?”
C.C.는 긴 구속복의 소매가 거슬리는지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피자를 먹고 있었다.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포로들과 같은 구속복을 C.C.는 그녀의 유니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옷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마트의 포인트 카드를 소중하게 생각하던 를르슈는 최근 재물의 무상함을 깨달았는지 이래저래 잔소리를 하면서도 C.C.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다. 변덕스러운 C.C.의 취향에 맞춰 입고 나갈 데도 없는 드레스를 몇 벌이나 지어주었고 C.C.는 마음이 내키면 그런 드레스를 입고 정청 안을 돌아다니곤 했지만 그 뿐이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내버려두고 초라하고 예쁘지도 않고 심지어 답답한 홑겹의 구속복을 왜 입고 다니는 건지 스자크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봐.”
반대로 를르슈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황제의 복장이었다. 눈에 띄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며 를르슈는 새하얀 천에 금실로 자수하고 다시 보석까지 박았다. 누가 봐도 사치스럽고 향락을 좋아하는 황제폐하처럼 보였다. 제가 만든 주제에 빨래하기 번거롭다며 투덜대곤 했지만 어쩌겠는가. 다 필요한 일인 걸. 스자크는 말없이 잘 구워진 아몬드 쿠키를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가루 떨어뜨리지 마, 스자크.” 대화하는 중에도 어찌나 눈썰미가 좋은지 를르슈는 눈을 흘기며 잔소리 하지만 알게 뭔가. 잘 흘리는 쿠키를 구운 건 너잖아. 톡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고 그러거나 말거나 스자크는 이번엔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예의라곤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를르슈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C.C.의 답변에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뭘? 황비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이천 명의 여자를 가둬두고 하루에 한 명씩 즐기고 있다는 얘기?”
“지난번에 들었던 거잖아.”
“흐음, 거기에 살이 더 붙어서 변덕스러운 황제는 밤에는 그녀를 치하하며 보석을 주고 다음날 생매장한다고 하던데. 수도 펜드래곤의 제로그라운드에 시체를 묻고 말이지. 그건 친히 동족인 포로들을 쓰고 있다고 하더군.”
“내가 일본에 있는데 어떻게 펜드래곤에 시체를 묻는다는 거야?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얘기인데.”
를르슈가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면 C.C.는 낄낄대며 웃었다. 동정에겐 이래저래 가혹한 소문이야. …시끄러워. 그나저나 대체 너는 왜 손수건을 안 쓰는 거야?” 기름진 손을 테이블보에 닦는 C.C.의 손을 낚아채 를르슈는 꼼꼼하게 손수건으로 닦는다.
아주 그냥 쿵짝이 맞는구만.
(중략)
제로 개인의 기본적인 일과는 대단히 단순하다. 기상, 식사, 출근. 아침의 일정은 단지 이 세 가지다. 첫 6개월은 정말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빴다. 끝없는 해외순방, 지역 방문, 나나리의 경호, 정책제안회의, 정책추진회의, 국제수장회의, 끝없는 회의, 회의, 회의……. 앉아서 졸 뻔한 것도 여러 번이고 실제로 졸았던 적도 있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가면은 졸기에도 퍽 유용했고 스자크도 기회가 된다면 그 기능을 십분 써먹고 싶었으나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원래 있었던 누군가라면 모를까, 스자크로서는 조금이라도 회의의 흐름을 놓쳤다간 멍청한 소리나 내뱉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를르슈가 미리 만들어준 서류가 있다 해도 회의별 스크립트는 아니다.
그게 됐으면 를르슈의 기어스는 절대준수가 아니라 예지였겠지. 아니면 초능력자나.
기왕이면 그런 능력이나 받을 것이지, 하며 이미 없는 사람에게 투덜대기도 여러 번. 어쨌든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 스자크도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니 능숙하게 회의의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되었고 전세계가 안정국면에 접어든 지금은 그렇게 바쁠 것도 없었다. 제로는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기호일 뿐이니 가끔 행사에나 얼굴을 비추고 빈둥대면 그만이었다. 출근해서 할 일도 없다. 가끔 올라오는 서류를 읽고 인가 도장을 찍고, 뉴스를 보고, 점심 먹고 내방객을 맞이하거나 – 대체로 나나리지만 -, 티타임을 갖는다거나 – 대체로 나나리가 불러서 – 하고는 퇴근이다.
오늘도 그런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기대하며 출근한 제로를 맞이한 건 합중국 브리타니아의 재상,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의 비서 카논 말디니 경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말디니 경.”
“좋지 못한 아침이에요, 제로. 아침 뉴스 못 보셨나요?”
“아니, 전혀…….”
아침부터 카논이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무언가 긴급한 사항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꽤 심각한 문제인 모양이다.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그렇게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카논의 뒤를 제로는 따라 걸었다.
무슨 일일까. 를르슈가 작성한 일종의 예언서, 엔 이 즈음엔 극성 시민단체나 황색 언론이 나나리의 명예를 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쓰여 있었다. 합중국 브리타니아의 대표로 나나리가 선정된 것에 대해선 실제로 말이 많았다. 표면상 합중국인 브리타니에서 황족인 나나리가 대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의견이었다. 악명 높은 황제의 유일한 여동생으로 사형에 처할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기구한 운명의 그녀는 정치적으로 그럴듯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 또한 타당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엔 나라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정치를 하던 인물들은 전부 귀족으로 구색을 맞춰 브리타니아의 대표까지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나나리 본인이 어디까지나 임시이고 향후 10년 내에 의회를 정비하고 환경이 된다면 투표를 진행할 예정이라 발표해 일단락 지은 게 벌써 3년이니 이제와 다시 그녀의 지위에 흠집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나리의 안전에 관한 문제일까. 한 가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생각만으로도 스자크는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단순히 를르슈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다. 다정한 나나리를 스자크도 를르슈 못지않게 아꼈다. 몇 되지 않는 ‘쿠루루기 스자크’와 친밀했던 사람들이다. 여전히 제로가 휠체어를 밀고 있으면 손을 뒤로 올려 제로의 손등을 덮는 그 자그마한 온기를 눈 앞에서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아니 침착하자.’
스자크는 길게 심호흡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정청이 아니라 병원으로 갔을 것이고 이 평화로운 정청은 어수선하고 불온한 공기가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럼 뭐지? 스자크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럴 듯한 일은 생각나지 않았으니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제일이었다.
“카논입니다.” 노크는 형식일 뿐, 보고하자마자 카논은 문을 열었다.
“제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나나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조급하게 제로를 불렀다. 나나리가 무사했다. 스자크가 생각하던 최악의 경우는 이로써 단번에 해소됐다.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요, 나나리 님.”
깍듯한 경어에 나나리의 얼굴에 순간 침울한 기운이 스쳤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도 나나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쩐지 비통함이 서린 얼굴로 나나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소식은 못 들으신 모양이네요.”
“제가 대신 설명드리죠. 오늘 아침 유럽연합의 황색 언론에서 보도한 소식입니다. 프랑스 국적의 시민 단체에서 나이트 오브 제로, 쿠루루기 스자크의 묘를 파헤쳐 그 관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