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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기어스/스자루루] Lost Paradise
우리가 가야 할 낙원에 대하여. 망국의 아키토 5장 네타 포함.
1.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너는 보기 드물게 침체되어 있었고 나는 이유를 몰랐다. 너는 잃어버린 낙원에 대하여 얘기했다. 그 쓸쓸하고 허무한 상실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그렸을 낙원을 생각해 보았다. 오래된 소설 속, 시간이 흐르지 않는 불변의 세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그리는 낙원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나와 유페미아가 생각하는 낙원은 명확했다. 누구에게나 같은 삶의 질, 표현과 행동의 자유, 잘 정비된 거리와 의료체계, 복지시스템, 평등한 교육, 문화의 풍족함, 한낮에 웅크리지 않고 거리를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 그 넉넉한 표정.
"나를 죽여, 스자크."
나는 어렸을 때부터 꽤나 청개구리 소리를 많이 들었다. 복종은 군인의 미덕이라, 지금은 그럴 일이 거의 없지만 그런 경험은 모두 있지 않은가. 공부하려고 막 마음 먹고 책상에 앉았는데 공부 안하고 뭐하냐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면 하기 싫은 거. 그런 것과 비슷했다. 너를 사랑해보려 애쓴 적은 없었다. 솔직히 얘기할까. 나는 네가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너희 남매의 행방은 내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내 앞가림을 하기도 벅찼는걸. 너희는 좋은 후원자가 있었잖아. 나는 아직도 간혹 그 날의 꿈을 꾸곤 하는데 그건 너희가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이 서럽고, 화가 나기도 했다. 차창 밖으로 나를 보던 너의 얼굴에서 배신감을 느꼈어.
내가 이것을 떠올린 이유는 이 방 안에서는 그렇게나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네가 이 혹독한 툰드라에서 여름을 생각하고 있기에 내가 다시 그 여름을 생각한 것은 어쩌면 자명한 이치였다. 너와 함께한 시간을 같은 단위로 재고 있어도 이 어두운 감옥에서 지낸 시간이 훨씬 길 것 같았다. 나는 너와 처음 만난 날을 생각했고, 그 날 저녁과 그 다음날 아침, 토장에서 간신히 발견한 노끈을 나뭇가지 사이에 걸어두고 네가 어설프게 빨아 널은 하늘하늘하고 얇은 블라우스가 햇빛을 투과했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의 비밀기지에 데려간 날을 생각했다. 나나리가 웃어줬던 날을 생각했다. 흰 손이 흙투성이가 되어 뭉그러진 복숭아를 줍던 순간도 기억해냈다. 눈부시게 흰 블라우스에 짓이겨진 풀물이 들어 다시 빠지지 않은 것도 생각해냈다. 나는 죽도를 잡으면서도 네가 이것을 잡을 수 있을지 생각하곤 했다. 플뢰르는 들어본 적 있지. 그게 뭔데? 가늘고 긴 검이야. 펜싱할 때 사용하는. 나는 네 손에 검이나 혹은 총같은 것들이 들리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흰 손에 들린 총도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은 많았다. 이족보행을 하는 커다란 로봇, 하늘에서 날아와 해변가에 떨어진 그 무자비한 병기들을, 한밤중에도 한낮처럼 빛나는 미사일의 섬광을, 전염병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태워지는 사체들을, 그 냄새들을. 그러나 내가 상상할 수 없다 해서 실제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산의 비탈진 면이 모두 무너져 흙과 바위가 그토록 무거울 줄도 상상하지 못했다. 검은 미사복을 입은 학우의 모습도 상상하지 못했다. 수영장의 염소에 잔뜩 상해서 학생회실에서도 에센스를 꾸준히 바르던 그 긴머리가 아무렇게나 어깨 위에 늘어져 있던 광경도 생각해냈다.
이들 중 몇을 네가 상상하고 있었을까. 검은 머리카락이 윤기를 내며 빛나는 작은 머리통 안에 이 모든 것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것을 그대로 벽에 처박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 으깨고 부수어 그런 잡스럽고 끔찍한 생각 따윈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2.
서툰 목소리로 국가를 부른다. 내 나라가 아닌 이국의 언어로 이국의 국가를 불렀다. 신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영광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충성할 수 있도록 하소서. 비옥한 토지 위에 번영이 있으라. 모든 것이 열악한 숙소에서 커다란 영사기만이 새 것이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황궁의 커다란 홀, 높은 단상 위에 위압적인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그 자체로 제국이었다. 누군가 그를 보고 황제라 칭하지 않아도 그만한 사람처럼 보였다. 경례를 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아버지와 비슷한 위압감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대단해보여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체념 속에서 패배를 받아들였다. 숙명이었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그러나 어떤 것도 내 죄를 합리화할 수 없었다. 여름의 찐득한 공기가 피부를 감싸는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다.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던 날이었다. 그 날에만 가끔 네가 생각났다. 너는 그 부분에 대해선 확실히 나의 선배였다. 비가 내려 쌀쌀한 공기 속에서 작은 몸을 옹송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가 피에 엉겨 계단참에 사지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여 누워있었어.
소곤대는 목소리는 꺼질듯 연약했다. 나는 그 순간이 제일 비참했어, 스자크. 그 날의 무력감을 나는 잊을 수 없어. 누구라도 죽으면 아름답지 않아. 흰 손이 더 하얗게 질리도록 양팔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죽으면 아름답지 않아. 그 작은 목소리에서 어떤 의지를 발견한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끈적한 공기 속에서 너처럼 몸을 웅크렸다.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고 온통 차갑게 식은 내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나는 너를 반추했다. 생에 대한 용기를 얻고 싶었다. 너의 의지를 반만이라도 갖고 싶다고 생각하며 나는 내 죗값을 치뤄야 한다고. 무력한 어둠이 땅바닥의 습기를 타고 올라와 나를 감쌌다. 끈적하고 축축하고 기분 나빴다. 속삭였다. '그래도 죽으면 편하지 않을까.'
3.
너는 모국어로 모국의 국가를 부른다. 환희에 찬 얼굴이었다. 그 전에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매주 있는 대강당의 조례시간마다 너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국가를 부르는 너보단 나를 위해 가끔 다른 목소리로 나의 모국어를 말하는 네가 훨씬 친근했다. 네 여동생이 짧은 문장만을 구사할 수 있는 것과는 달랐다. 너는 그만큼의 말이라면 몇 가지 언어로 더 할 줄 알았다. 다섯 가지의 다른 언어로 너의 생에 대한 열망을 표현할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너의 모국어 다음으로는 나의 모국어를 가장 잘했다. 지금도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낮은 목소리가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신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영광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충성할 수 있도록 하소서. 비옥한 토지 위에 번영이 있으라. 특히 '영광'과 '번영'을 말할 때의 목소리가 꽉 차게 울렸다. 자신만만해서 거들먹거리기까지 하는 얼굴엔 신이 그것을 주지 않아도 제 손으로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좋아보이시네요."
"설마. 추운 기후는 질색이야."
"이 쪽 날씨로는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닙니다."
"더운 것보단 추운 게 낫긴 하지만 어느 쪽이든 군사를 움직이는 덴 좋지 않지. 그리고 따분해."
본심은 그것이었다. 너는 전략에 필요한 인내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드는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때때로 오는 두통과 한여름 땡볕에 앉아있는 것처럼 목이 바짝 말라하는 것도 싫어했다. 금술이 달려있지만 온통 검은색인 그 옷은 그 자체로 무덤처럼 보였다. 꼭 맞는 검은 옷 안에 잠겨있는 너의 육신은 살아있을지 몰라도 의식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죽은 의식의 무덤을 능멸하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가 부르는 명확한 발음의 국가, 황제 폐하를 위하여, 영광된 브리타니아를 위하여, 자랑스럽게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나는 희열에 찼다.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그를 참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무례함때문이었다. 죽은 그라면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을 수치스러워할 것이므로 이 역겨운 임무에서도 나는 조그마한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벌이다. 너에게, 네가 전복하고 싶어하던 세계가, 너를 추방하고 내리는 형벌이다. 네가 원하는 영광과 번영은 결코 네 것이 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내 마음은 어쩐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문득 나의 영광되고 번영한 나라는 어디일까 생각했다. 그런 나라는, 낙원은,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거짓이라도 땅에 발 붙이고 있는 너와는 달리 나는 여전히 갈 곳이 없었다. 영구동토의 대지는 딱딱했고 추웠다.
4.
"오늘도 덥네."
네가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의 모국어로 너는 말한다. 한기가 드는 찬바닥에 앉아 과거의 계절을 체감하고 있었다.
"봐봐, 스자크. 해바라기가 예뻐."
너는 헐떡이는 숨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의 의식이 네가 그토록 싫어하던 그 여름 위에 부유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모르겠어, 를르슈. 나는 대답한다.
"나는 이런 광경을 본 적 없는데. 정원엔 장미 같은 것만 있었거든."
나나리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토장 앞에 해바라기를 심고 싶어. 나나리가 만질 수 있도록. 씨는 언제 나오지? 그걸 받아서 심자. 그럼 내년에도 볼 수 있겠지. 커다라니까 나나리도 만지기 좋을거야. 이 샛노란 색은 나나리가 좋아하던 드레스를 닮아 있어. 예전에 이런 색깔의 드레스를 입었거든. 부피는 엄청 크지만 나나리는 그런 걸 좋아했거든.
너는 나의 모국어를 잘했다. 이 문장들을 막힘없이 나의 모국어로 말한다. 나는 이제 나의 모국어로 말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가 나의 모국어로 말하는 게 이상했다. 나의 모국, 모국의 대지 위에서 그들을 이끌고 신처럼 추앙받고 있는 게 이상했다. 신이 주지 않더라도 그 여름에 영광과 번영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한, 너 또한 사랑했던 공주를 죽이고 너는 나의 모국어로 내게 속삭인다. 고통이었다.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을 빼앗아 간 주제에 그것을 다시 줄 수 있는 것도 너뿐인 것 같았다. 속삭이는 그 목줄기를 틀어막는다. 유창하게 흘러나오던 나의 모국어는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붉어진 얼굴로 너는 마지막 말을 꺼냈다.
나를 죽여, 스자크.
'죽으면 아름답지 않아.' 그렇게 속삭였던 목소리와 똑같았지만 전혀 다른 문장이었다. 파득거리는 목울대의 움직임이 조른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내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떠올리곤 했던 너의 의지가 순간 나를 움직였다. 발작처럼 떨어진 손가락에서 너는 막혔던 숨을 쉬었다. 아직까지 너의 목울대에 닿아있는 손이 그토록 생생한 움직임을 모두 잡아냈다. 커다랗게 들이쉬는 숨, 움직이는 폐부. 너와 하나가 된 것처럼 나도 크게 숨을 쉬었다. 한여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해바라기, 광활한 대지에 끝없이 펼쳐진 그 꽃의 물결이 나의 의식을 압도하고, 사로잡는다.
"나나리를… 마중나가자. 둘이서, 나나리를……."
나나리를. 둘이서.
내게 남은 건 그것뿐인 것 같았다. 낙원 같은 건 어디에도 없이,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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