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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오미사쿄] 노을의 끝
선생님X학생 오미사쿄. 만우절 사쿄쨩 감사합니다!!!
노을지는 창 밖에는 야구부의 연습소리만 울렸다. 플레~이~!! 플레이~!! 깡- 하는 경쾌한 소리와 짧은 환호성, 그 틈새로 운동장을 박차고 뛰는 모래소리와 발소리가 울렸다. 오미는 그런 창가의 소란에서 의식을 돌려 적막하기만 한 교실 안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냉정한 시선은 무엇을 보는지 모르겠다. 고등학생들의 시선은 으레 그렇듯 복잡스러웠고 후루이치 사쿄는 통상보다 깊고 복잡한 눈을 가졌을 뿐이다. ―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글쎄.
오미는 교탁의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를 내려다보았다. 후루이치 사쿄는 제법 단정하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 안경을 쓴 사람에 대한 선입관이 그를 조금이나마 단정하고 지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적도 나쁘진 않은 편이었다. 출석률도 우수. 지각도 결석도 드물고 일단 기록만 본다면 학교에선 문제잡힐 게 없는 학생이다. 생활기록부를 상세하게 보기 전까지는.
고전 : 성적은 우수하나 수업시간에 항상 졸고 있음
수리 : 이해력이 뛰어나고 암산에 능하나 수업시간에 늘 잠
체육 : 협동심이 부족함
영어 : 수업에 대한 열의가 없으며 언제나 자고 있음.
그 외 기타등등. 오미의 경제시간에도 제대로 눈을 뜨고 있었던 적이 없어서 언제나 밝은 금발의 뒤통수만 보았었다. 엎어진 등을 툭툭 치면 질리지도 않는다는 듯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일어난 사쿄는 마지못해 교과서를 보는 척하다가도 이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게다가 후루이치 사쿄는 옆 학교에서도 싸움을 걸어올 정도로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얘기를 듣고 몇 차례 교무실로 끌려와 크게 혼난 적도 있지만 영광의 상처인듯 퍼렇게 부은 한 쪽 뺨을 갖고 그저 불퉁하고 불성실한 얼굴로 묵묵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다.
"요즘 수업은 재미있니?"
"안 들어서 모르겠는데요."
최대한 친근하게 걸어 본 말은 당연하지만 단단한 벽 앞에서 맥없이 흩어진다. 단추를 두 개 풀어낸 셔츠 틈새론 움푹 파인 쇄골이 보인다. 겉보기에도 늘씬한 느낌이지만 생각보다 더 말랐을지도. 오미는 면밀히 상대를 관찰하며 다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수업은 열심히 나오잖아."
"고등학교까진 나와야 쓸만하거든요."
"대신 수업시간엔 졸고. 역전의 편의점에서 야간 일을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르바이트 금지는 아니잖아요."
"선생님들이 걱정하고 있어."
"계약서는 확실히 썼고 대학은 안 갈 거니 괜찮습니다."
"사쿄 군."
내내 불만스러운 얼굴로 답하던 사쿄가 책상 앞으로 성큼 다가온 오미를 보며 놀란듯 눈을 깜박인다. 평균 이상의 신장을 가진 오미가 아무 의미없이 걷기만 해도 놀라는 사람도 왕왕 있을 정도인데, 앉아 있는 사쿄 앞에 서면 그 위압감은 실로 압도적이다. 이내 미간을 깊게 구기는 사쿄를 보며 오미는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낮췄다. 그에 맞춰 내려오는 시선이 장난감을 보는 길고양이 같아 웃으면 사쿄는 더욱 깊게 인상을 찌푸린다.
"사쿄 군이라는 말은 너무 딱딱한가. 사쿄 쨩?"
"절대 싫어요."
"초등학교 때는 이렇게 부르는 친구들 있었지, 사쿄 쨩?"
"초등학교 때도 없었던 거 같은데."
"선생님은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사쿄 쨩."
"…하지 마세요."
노을이 하얀 뺨에 반사되고 있는 건지 그 얼굴이 약간은 붉어진 건지 오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좋은 신호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조금이나마 눈에 보이지 않던 거대한 유리벽이 조금이나마 두께가 얇아진 것 같았다.
"선생님도 예전엔 학교 오기 싫었거든. 친구나 만나러 오는 거였지. 쉬는 시간엔 시끄럽게 떠들었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이크 타고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5개쯤 뛰어서 배기량이 끝내주는 바이크를 사서 보란듯이 학교에 끌고 다녔지. 그 땐 그게 재밌었거든."
"그…래서요?"
관심을 갖는다. 오미는 깜박이는 사쿄의 속눈썹이 제법 길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업할 때도 눈에 띄는 학생이었지만 - 항상 자고 있으니까 - 이렇게 보면 단정하게 생겼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했다. 그 반항적인 눈매만 유순하게 내려뜨린다면 오히려 곱상하게 생긴 편이리라. 코에 걸치고 있는 안경을 벗기면 정말 앳되보이는 얼굴이 될지도 몰랐다.
"그랬더니 시비거는 애들도 생기고 선생님들한테도 혼나고, 부끄럽지만 패싸움…같은 것도 한 적 있지."
"이겼나요."
"거의."
흐응. 색소가 옅은 얇은 입술이 잠깐이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사쿄가 제게 흥미를 보인다는 건 좋은 뜻이다. 그만큼 방벽이 낮아진다는 의미니까. 그러나 오미의 머리는 슬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미가 학기를 시작하고 출석을 부를 때부터 후루이치 사쿄는 눈에 걸렸다. 밝은 금발도 그랬거니와 깊고 무거운 시선들, 머리에 열은 빠르게 올라 욱하는 기질이 있는데도 어딘지 냉정한 느낌. 단정해보이는데 학교 밖에만 나갔다 하면 쌈박질에 맨날 엎어져 자면서 성적만큼은 나쁘지 않은 이상한 고등학생. 사춘기의 학생들은 늘 어렵고 현란하며 복잡하지만 후루이치 사쿄는 이상하게 오미의 눈길을 끌었었다.
"그래서, 개과천선하고 선생님이 된 계기는 뭔가요 후시미 선생님."
"오미라고 불러도 되는데. 나도 사쿄 쨩이라고 부르잖아."
"그건 선생님이 멋대로 부르는 건데요."
"그래도. 다른 애들도 그렇게 부르잖아. 오미미나 오미군이라고 부르는 못되먹은 애들도 있지."
하지만 오미는 그런 친밀감이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는 졸업하는 아이들이더라도 그런 호칭에서 묻어나는 쾌활함은 그 나잇대만이 가질 수 있는 특색이었다. 빨리 어른이 되는 아이들은 일부러 그런 것들을 어딘가에 묻어두곤 했지만 계기만 있다면 금세 꺼낼 수도 있었다. 10대의 빠른 회복력은 신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이 음울한 얼굴에 빛이 드리우면 분명 반짝반짝 빛날 수 있으리라.
"오미…선생님?"
망설이던 입술이 음미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오미의 이름을 부른다. 처음으로 흥미로운 듯한 표정이 오미에게로 향했을 때 오미는 또한 사쿄의 눈이 생각보다 훨씬 투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쿄의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만으로도 그의 얼굴은 훨씬 눈부셨다. 오미는 충동적으로 그의 안경을 벗겼다. 한 겹의 투명한 유리로도 아쉬운 빛이었다. 놀라 크게 뜨인 눈에 힘이 빠지니 오미의 생각보다 더 유하고 얌전한 얼굴이 나타났다. 붉은 노을은 이젠 바닥으로 조금씩 사라져가는데 흰 뺨에는 여전히 미미한 홍조가 돌고 있었다.
"사쿄 쨩."
"네?"
마른 입술을 축이는 혀는 유난히도 붉었다. 오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뜨끈한 볼의 열기가 정말로 아이 같았다. 가까워지는 얼굴에선 이젠 오로지 그 눈만 보였다. 파르라니 떨리는 속눈썹이 내려앉는다. 얇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이로 물어 벌리면 손에 닿은 뺨이 더 뜨거워졌다. 부드럽고 매끈한 점막과 고른 치열을 혀로 느끼는 동안 사쿄의 숨이 가빠지는 게 그의 목 안쪽에서 새는 바람으로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으앗!"
"되바라진 선생님이군."
"아픈데요 사쿄 씨."
"아프라고 때린 거니까 당연하지. 어떻게 해야 이런 전개가 되는 거냐. 불량학생을 선도하는 선생님이라며?"
"하하…에튀드 주제는 흐름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바뀐 주제는?"
"…선생과 학생의 금단의 사랑?"
"네가 선생이 된다면 반드시 학교에 전화를 넣어주마, 후시미."
저리 비켜. 사쿄가 가볍게 걷어차면 내내 쭈그리고 앉아있던 오미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정말로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쓴웃음을 짓고 있으면 사쿄는 얼른 재킷을 벗어버렸다. 반리에게서 빌려 온 교복은 사쿄에게는 품이 조금 커서 헐렁한 셔츠가 붕 떠 있었다. 흐릿하게 드러나는 가는 실루엣이 평소보다 매혹적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교복을 입은 사쿄는 오미에겐 생경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었다.
사쿄에게도 분명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가 있었다. 교복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블레이저? 가쿠란? 블레이저라면 방금 입은 반리의 교복과 비슷한 느낌일 거고 가쿠란이라면 쥬자에게 빌려와야 겠지. 고등학교에 어떤 친구와 무엇을 하고 지냈을지 오미는 궁금했다. 그 때도 극장에 연극을 보러 왔다고 했는데 그 땐 어떤 표정이었는지, 집에 돌아가는 길엔 어땠을지, 얼마나 앳되고 어렸는지 오미는 궁금했다. 지금도 충분히 어려보이는걸, 사쿄는 가끔 지나치게 나이에 연연할 때가 있다.
"애초에 학원물이라면 당연히 이 나이엔 학부형이다."
바로 지금처럼. 투덜대는 사쿄의 말에 오미는 능숙하게 맞받아쳤다.
"진정한 배우라면 나이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사쿄 쨩'? 배짱이 좋은데."
"역할 몰입…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미 선생님은 학생에게 성추행?"
"그건 그… 상대가 사쿄 씨니까?"
오미는 사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오미의 키 탓인지 사쿄가 마른 탓인지 딱 맞게 들어오는 몸이다. 오미가 고개를 사쿄의 목덜미에 파묻으면 아까 느꼈던 뺨의 열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처럼 여전히 높은 온도가 느껴졌다.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앨범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사쿄 씨. 셔츠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 키스하면 목도 뺨만큼 붉게 달아오른다. 그런 거 없어. 안 찍었어요 졸업사진? 안 찍고 안 샀어. 그런 쓸데없는 데 쓸 돈은 없었으니까. 아 그렇구나. 오미는 입꼬리를 흐리며 사쿄의 등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사진이 취미라서 다행이었다. 지나간 시절은 어쩔 수 없어도 지금부터 남기면 되니까.
"그럼 대신 앞으로 사진 더 많이 찍어둘게요. 10년 뒤에 보고 즐거워할 수 있게."
"10년?"
사쿄가 비웃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문다. 후루이치 사쿄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그 시간이 과연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수 계산에 능숙한 머리가 몇 번이고 그 단어를 뇌까린다.
"…맘대로 해."
그토록 먼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는 사쿄에겐 없었다. 다만 시간은 늘 흐르고 오늘과 내일이 쌓여서 일주일, 열흘, 보름, 한 달, 그렇게 1년이 되고 잘하면 10년까지 갈 확률도 아주 낮지만은 않으니.
"감사합니다, 사쿄 쨩."
"너……!"
"아하하. 아직 에튀드의 여흥이 안 빠졌나봐요."
오미는 그렇게 말하고도 한동안 사쿄의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몇 번 빠져나오려고 애쓰던 사쿄가 이내 포기해 얌전해질 때까지. 온몸에 닿는 뜨끈뜨끈한 열이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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