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샤게를 합니다. 페그오와 앙스타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A3!에서 후루이치 사쿄를 고르신 분들은 부디 제게 연락을....
쵱컾은 아마도 오미사쿄지만 도련님...10년 이상의 친분+방황하는 사춘기는 망상에 좋습니다
당신은 울었다고 했다. 웃다가도 울 수 밖에 없었다고. "글쎄. 그 때는 나도 사춘기였으니까?" 허심탄회하게 웃는 얼굴이 행복해보여서 나는 반대로 조금 서글퍼졌다.
내가 그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명확한 시점을 잡기는 어려웠다. 그가 내게 아이스바를 건네주고 본인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내 손을 잡고 걸을 때였을까. 아니면 비 오는 날 교문 앞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서있었을 때? 지친 듯 안경을 벗고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도 "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냐."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을 때였을까. 마냥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늘 귀찮을 만큼 잔소리가 많았다. 씻고 나올 땐 물 떨어지지 않게 머리를 제대로 닦고 나와, 돈은 허투루 쓰는 게 아니야, 학교는 제대로 가야지, 그렇게 심심하면 부활동이라도 해.,내가 계속 챙겨줄 순 없으니까, …….
당신이 나의 영원한 이해자가 될 거라는 생각은 당연히 해 본 적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타인과 나의 거리를 잘 알고 있었고 가족도 나와는 남이라는 걸 알았다. 머리통에 들어있는 생각은 누구나 다 달라서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듯 당신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내가 그 말에 왜 그다지도 상처 받았는지는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바빠졌다. 평소에 보던 다른 어른들보다 당신은 훨씬 어렸다. 키는 컸고 입은 험했고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그 얼굴엔 아직 지우지 못한 저항과 불만이 섞여
있어 그냥 고등학교 형들처럼 보였다. 처음으로 입은 정장이 멋쩍어서 거울 앞에서 애매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로 어른이 됐다는 뿌듯함보다 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부시게 밝은 백화점 조명 밑에서 일렬로 나란한 눈물점이 혹은 눈물처럼 보여 눈을 비볐던 기억도 있다. 여전히 갈 길을 모른다는 점에서 나는 당신과 어렴풋이 동질감을 느꼈을까?
당신은 머리가 좋아서 금방 할 일이 많아졌다. 이젠 나만을 위해 일하던 당신이 아니었다. 가끔 얼굴을 볼 때마다 당신의 얼굴에선 그 예전의 격정들이 하나씩 지워졌다. 정말로 지워진 걸까. "어른이 됐나보지, 나도."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거지?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체념하는 것이다. 감추는 것이다. 그의 안에 있던 열정들은 지워지거나 영영 묻힌 것이 분명했다. 시시한 어른이잖아, 그런 건.
당신의 공연을 모두 보았다. 정말로 모두 보았다. 당신이 읊조리던 낡은 대본들, 오래된 희곡, 비극과 희극을 오가고 망국의 왕과 배신하는 기사, 욕망에 혼을 바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공주의 대사를 당신은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읊었다. 창문으로 스미는 밤의 희미한 불빛들 속에서도 화려했는데 본 무대에서는 어련했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몰입했고, 당신의 역할을 응원했고, 그리고 울었다. 당신이 지우거나 포기했던 것이 저기에 살아있었다. 당신은 행복해보였다. 또렷한 음성, 짓씹는 단어들, 날렵한 움직임, 노회한 마피아의 보스도 무기력하게 꿈틀대다가도 이윽고 살아 움직이는 당신도, 누군가의 충직한 호위인 당신도 전부 행복해보였다. 커튼콜 뒤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당신은 웃거나 혹은 울 것이다. 당신이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잡은 충만한 기쁨으로.
영원한 이해자가 아니라도 적어도 비슷할 줄은 알았는데 당신은 먼 곳에서 겨우내 움츠리다 간신히 봄을 만난 꽃처럼 만개하고 있었다. 나만 이 겨울에 우두커니 서서 다른 계절의 당신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이름 모를 비통은 가끔은 방향을 모르는 분노가 되는 법이었다.
"나도 사춘기잖아."
당황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나는 뻔뻔하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거절할 리 없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다정한 당신. 우리가 지내 온 겨울을 당신은 분명 잊지 않았을테니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은 인상을 찡그리다, 뭔가 한숨을 내쉬고,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말하겠지.
"맘대로 해."
거 봐.
대신 명확하게 말해둘게. 나는 내 봄으로 가고 싶은 거야. 당신의 봄을 좇아서, 이윽고 나의 봄으로.
꽃 피는 계절이 지나면 기온은 한층 따사로워,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나날이 되곤 한다. 얼굴을 제외하고는 한 끗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 검은 트렌치코트의 목깃을 세우고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 기노자도 기온이 올라가면 별 수 없이 애용하는 코트를 벗어야만 했다. 그래봤자 그 안엔 또 검은 정장이지만 흰 목이 드러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한층 화사해지는 법이었다.
더불어 관공서란 엄격하게 실내온도를 준수해야만 한다. 이상기후에 일찌감치 한낮의 기온은 20도를 넘어섰지만 냉방기기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요즘 같은 때엔 재킷도 벗고 과감하게 흰 셔츠를 드러내니 잘난 얼굴은 더 잘나 보이고 음침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셔츠를 반사판 삼아 햇빛을 듬뿍 머금으니 기노자의 성격을 도통 알 리 없는 타 과의 신입 여직원들은 조그맣게 감탄사를 내지르는 5월.
코가미 신야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충직한 개라면 모름지기 주인이 보이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마주해야 되거늘, 영 꼬리를 흔들 기분이 들질 않는다.
"그거, 기노상, 설마……!"
카가리가 경악에 차 저 멀리로 사라지는 낯선 여자의 등과 기노자의 손에 들린 것을 번갈아 보는 사이, 코가미는 초조하게 담뱃갑을 쥐었다, 놓았다. 아니, 참아야지. 여기에서 담배를 물었다간 코가미가 원하는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할 게 뻔했다. 코가미가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정보는 카가리가 전부 얻어줄 테니 숨을 죽이고 귀만 쫑긋하는 게 상책이었다.
"뭐해요, 기노상! 빨리 뜯어보지 않고."
"…지금 봐야 되는 건가?"
"그럼 지금 보지 언제 봐요! 그거 러브레터잖아요? 러브레터라구요! 보나마나 몇 시 어디에서 보자고 쓰여 있을 텐데, 기노상은 지금 안 읽으면 잊어버릴 거고, 그 가엾은 아가씨는 밖에서 기약없는 기노상을 기다릴 테고, 그럼 다음날 기노상은 공안국 공공의 적이라구요?"
"비약이 지나치다만."
"아, 그냥 빨리 뜯어봐요."
카가리가 기어이 은은한 향수냄새까지 나는 분홍색 종이 봉투를 뺏으려고 하자 기노자는 날렵하게 손을 위로 뻗었다. 아, 기노상! 폴짝폴짝 뛰면서 카가리가 안간힘을 써봤자 기본적인 신장차가 있는데 기노자의 팔까지 손이 닿을 리 없었다.
"카가리."
카가리는 어찌됐든 이 중에서는 가장 어리고 가장 주인을 잘 따르는 개였다. 기노자의 냉정한 호명에 제 분수를 알고 부루퉁하게 이죽이며 구원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코가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 팔을 뻗어 낚아 채…려고 했다.
"네게 아냐, 코가미."
눈을 깜박이면서 먹이를 못 찾는 개를 교육시키듯, 다정하고 엄한 목소리다. 아, 뭐, 러브레터가 탐나는 건 아닌데……. 의외의 민첩성에 코가미가 당황하는 사이 재빠르게 봉투를 재킷 주머니 안으로 갈무리 한 기노자는 자연스럽게 제 자리로 피하면서 말했다.
"밀린 보고서, 오늘 다섯 시까지. 5분 늦을 때마다 손톱을 하나씩 펜치로 뽑아버릴 거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에 알아듣는 게 늦었던 카가리가 뒤늦게 소리 질렀지만 기노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시선을 모니터로만 향한다. 기노자가 받은 러브레터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영 글러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코가미는 기노자의 재킷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러브레터는 시대가 변해도 언제나 낭만적인 물건이었다. 오늘 학부생 중 누군가가 학부 공통 교양 직전에 러브레터를 받는 바람에 코가미 주변은 하루종일 러브레터 얘기로 들썩였다. 그도 그럴게 종이도 보기 드문 요즘 같은 시대엔 자필로 쓴 편지라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문 아이템이었다. 인문학부 누구라는 자기소개와 함께 건네, 떠넘기듯 쥐어주고 뛰쳐나간 남학생의 등 뒤로 환호성이 올랐다. 편지를 받은 여학생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이도저도 못하고 편지를 꽉 쥐고 있었다. 당사자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받는 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기노자는 영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오늘의 이슈를 전하는 코가미를 보고 있었다. 사람과의 교류가 서툰 기노자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낯선 것을 보는 표정을 짓곤 했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에 코가미도 이번엔 얼굴을 긁적여야 했다.
"글쎄. 누가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건 기쁜 일이잖아."
"너도?"
"뭐……, 그렇겠지. 편지를 쓴다는 건 굉장히 번거로운 행위니까 나쁜 소리나 이해타산적인 용건이 들어있을 리는 없고,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평가가 올라가지 않아?"
코가미도 몇 번 그런 류의 편지를 받았었다. 그 중 한 명과는 사귀기도 했었는데 매일매일 편지를 써 만날 때마다 한뭉치를 코가미에게 건네주곤 했다. 처음엔 나름 성실하게 답장을 써주곤 했지만 그게 귀찮아 그만두니 얼마 안돼서 헤어졌다. 편지 쓰기가 의외로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사실을 코가미는 그 때 처음 알았다.
"너한테 편지라도 써줄까 기노?"
"왜?"
"재밌을 거 같지 않아? 그런 걸 뭐라 그러던데…… 펜팔? 그냥 편지를 주고 받는 거야. 어때?"
"무슨 내용을 써야되는데?"
"그건 자유지. 할래? 하자, 기노. 내가 먼저 써올게."
기노자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다음날 코가미는 정말로 편지를 써 기노자에게 건넸다. 먼저 그만 둔 것도 코가미 쪽이었다. 몇 번 주고 받다가 시험기간인지 방학인지 흐지부지해져, 열 통 남짓, 3개월도 되지 않는 기간의 답신이었다.?
기노자가 퇴근할 때까지 기노자의 재킷 안 쪽만 바라보다가 근무가 끝나기 직전, 코가미는 10년도 더 된 과거를 간신히 상기해냈다. 필요한 것을 제외하곤 이사올 때 그대로, 풀지도 않고 박스 채 구석에 쌓아두었다. 먼지 쌓인 짐을 하나씩 풀어헤쳐 코가미는 간신히 기노자가 써 준 편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날짜와 내용을 보고 있자니 중간의 두 통 정도는 분실된 모양이었다. 한 통은 물에 젖어 우그러들었고, 짐에 깔려 접혀 있었는지 아예 접힌 것도 있었다.?
시시콜콜한 얘기들이었다. 뭘 써야될 지 모르겠다며 어색하게 말문을 뗀 편지는 그래도 두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금은 전혀 볼 일 없는 기노자의 필체는 획이 생각보다 큼직큼직했다. 두 장은 세 장이 되고 어느 순간부턴 여백없이 꽉 찬 네 장으로 분량이 정해졌다. 그래봤자 별 내용은 없었다. 기노자가 코가미에게 보낸 편지는 하루 일과 보고 같기도 했다. 코가미가 기노자에게 보낸 것도 그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저는 두 장 채우기도 힘들었는데, 기노는 어떻게 네 장이나 채운 거지? 신기해하면서 날짜별로 훑어보지만 끝까지 별 내용은 아니었다. 다임의 건강상태, 공부의 방향, 휴일에 산책하다 본 노을이 예뻤다던가,?지난번에 갔던 어디의 뭐가 맛있어서 한 번 더 가고 싶다던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이젠 슬슬 편지 쓰는 방법을 알았다고, 러브레터를 쓰는 사람의 심정도, 받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는 말이 마지막줄에 쓰여져 있었다.
아, 젠장.
코가미는 그 구절에서 이번엔 참지 않고 담배를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기노자가 편지를 받고 좋았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코가미 며칠을 전전긍긍하거나 말거나 기노자의 러브레터 사건은 그대로 잊혀지는 듯 했다. 카가리는 보고서를 제 시간에 맞춰 쓰지 않았다간 펜치로 손톱이 빠진다는 공포 - 사실 믿지는 않았지만 손톱 대신 카가리의 게임기가 박살날 확률은 충분했다 - 에 쫓겨 아예 잊어버린 듯 했다. 그 외에 아는 사람은 코가미 뿐이었으니 누구도 그의 궁금증을 대신 해결해주진 않았다. 대놓고 그 사람한테 고백은 받았느냐 거절했느냐 물어볼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3일, 그래도 넌지시 물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했더니 시프트가 맞지 않은 게 3일이다. 도합 일주일 가량을 그냥 보낸 코가미가 어슬렁거리며 사무실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으려면 뜻밖에도 식당 근처 외부 휴게실에 기노자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맞은 편엔, ――그 아가씨다.
저도 모르게 기둥 뒤에 숨어 있노라면 간간히 코가미에게도 말소리가 들렸다. 기노자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거절의 말인 모양인지 여자의 "아……." 하는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겠지. 기노가 고백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묘한 안도감에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코가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영 성격 못되먹은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친구가 연애 좀 할 수도 있는거지, 고백 한 번 받았다고 뒤에서 난리라니. 다음부터는 진심으로 잘되라고 기원이라도 해줄까, 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코가미가 자리를 뜨려던 찰나 여자의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렸다. 방금 전까지 훌쩍대던 것도 그치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당차게도 물어봤다.
"편지는 감사히 간직할게요. 읽고 나서 답장 써도 되나요?"
"아…?"
"편지 쓰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답장은 처음 받아봤거든요. 부담스러우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음? 아, 뭐…… 편지 정도는."
편지? 어안이 벙벙해 깜짝 놀라 고개를 쭉 빼고 보면 확실히 여자의 손엔 연한 파스텔 그린의 편지봉투가 있었다. 코가미가 며칠 전에 보았던 편지묶음에 있는 봉투였다!
- 편지를 쓰면 어쩔 수 없이 답장을 기대하게 되어버려.?
검은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져 있던 문장을 코가미는 떠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노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좋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기노자에게 코가미로부터 일방적으로 시작돼서 일방적으로 끝난 펜팔은 기노자에겐 꽤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답장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우물쭈물 넘어가 버려 분명 기노자도 그대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게 기노자는 단 한 번도 답장을 조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실컷 자기 변명을 하고 있으면 동시에 다른쪽에서 멍청이란 생각도 들었다. 기노자 성격에 그런 걸 조를 리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백한 상대랑 다시 편지 주고 받을 생각이 드냐?
방금 전까지 관대하게 다음 연애를 응원해야지 하던 마음은 증발하듯 사라지고 여기엔 다시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코가미 신야만이 남았다. 기노자는 옛날부터 귀가 얇았다. 흐름에 떠밀려 가는 것도 쉬웠다. 여자는 반대로 꽤 추진력 있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어영부영 흘러가 어쩌면 그대로 결혼에 골인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상상이 꽤 그럴싸해서 코가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코가미가 불안을 부채질하는 것처럼 둘의 대화는 끝날 줄 몰랐다. 기노자가 말을 끊으려고 하면 여자는 능숙하게 다시 말꼬리를 부여잡아 답을 안할 수가 없는 방향으로 잡아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상상이 현실이 되게 생겼다. 어지간해서 도저히 기노자가 빠져나올 수 없는 모양새라 코가미는 결심하고 둘의 대화를 쳐부수기로 작정했다.
"여, 기노."
지나가다 마주친양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기노자의 곤란했던 얼굴에 슬쩍 화색이 도는 틈을 타 코우가미는 그대로 기노자의 목을 끌어당겼다. 깜박거리는 눈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코가미의 팔 밑에서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기노자가 코가미를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뭐, 뭐, 뭐야, 코가미!"
간신히 코가미의 우악스러운 팔 밑을 벗어난 기노자가 숨을 못 쉬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대며 소리쳤다. 예고도 없이 눈 앞에 펼쳐진 남의 라이브 키스씬에 당황한 건 여자가 더했겠지만 그 와중에도 소리 지르고 도망간 게 아니라 코가미를 노려보는 꼴이 제대로였다. 저지른 다음엔 모든 게 척척 진행되기 마련이다. 기노자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으며 코가미는 천역덕스럽게도 거짓말을 내뱉었다.
"사실 저희 사귀는데요."
"기노자 씨는 그런 말은 안했는데요. 그렇죠?"
올려다보는 시선에 기노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래서는 택도 없었다.
"그 편지지."
"네?"
"당신이 들고 있는 거, 예전에 기노가 나랑 주고받다가 남은 편지지인데."
코가미가 턱짓으로 여자가 쥐고 있는 편지를 가리키면 여자는 또 말없이 기노자를 올려다본다. 이건 이견 없이 맞는 말이라 기노자가 고개를 주억이니 여자는 사납게 노려보고는 결국 멀어졌다.그 꼴을 보던 기노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든가 말든가 코가미는 제법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냐, 코가미." 넥타이를 바로 하던 기노자가 눈을 치켜뜨며 묻는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노가 곤란해 하는 걸 내가 도와준 것 뿐이잖아."
"혼자서도 할 수 있었어. 굳이 그런 거짓말을……."
"사귀었던 건 맞잖아?"
"…과거형이지."
"키스가 처음도 아니고."
"지금 너랑은 안 해."
쌀쌀맞게 대응하며 용건도 끝났겠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기노자의 팔을 코가미는 가볍게 붙잡았다.
"편지봉투 안 버렸네."
"…열 장 정도 사놨었거든. 그 뒤로 쓸 일이 없어서."
"러브레터 받는다고 답장해 주는 사람은 없어, 기노."
"내 기준에선 답장하는 쪽이 더 정중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답장 써 달라고 얘길 하지."
"넌 재미없는 건 금방 잊어버리잖아, 코가미."
코가미가 쥐고 있는 팔을 정중하게 뿌리치면서 기노자는 가볍게 재킷의 주름을 펴기 위해 툭툭 쳤다.
"쓰기 싫은 편지 쓰는 게 고역이라고 말했던 것도 너였고."
어……. 기노자의 날카로운 말이 코가미를 쿡 찌른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코가미를 남겨둔 채 기노자는 성큼성큼 걸었다. 차마 뒤따라갈 용기는 없어 코가미는 그냥 멍청하게 서있었다. 기억을 더듬으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에는 없지만 제가 할 만한 말이었다. 실제로 의무적인 편지는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 젠장."
과거의 자신이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코가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만 헝클었다. 입술에 남은 타인의 체온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었다.
지난 12월 9일 디페스타에서 배포했던 코우기노 글을 공개합니다. 배포본이므로 짤막합니다.
시안은 동남아시아에 위치해 열대 온순 기후의 특성을 띠고 있다. 한마디로, 덥다. 8월의 일본보다는 시원한 것 같기도 하지만 1년 중 6개월이 여름 날씨라니. 이제는 제법 이 곳의 지리도, 억양도, 식습관 같은 것도 익었지만 겨울이 없는 계절이 코가미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우기에 오는 비는 무섭도록 습하고 끈적끈적하고 건기가 되면 그나마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그건 그냥 가을이지 겨울이 아니다. 습한 빗줄기에 묵직한 스피넬의 향이 엉겨 붙는 밤이면 나는 어울리지 않게 향수병에 시달리곤 했다.
따뜻한 실내에 있다가 밖에 나왔을 때 그 차가운 대기, 들이쉬는 숨이 얼음처럼 서걱거려 깨끗하게 폐부를 한 바퀴 돌리고 나왔을 때의 상쾌함이 그리웠다. 시린 코끝을 애용하는 겨울 점퍼에 묻어버리고 잔뜩 움츠린 채로 종종걸음 치던 도시의 아스팔트, ‘그렇게 걷지 마, 코가미. 목이 굽어질 거야.’, 사실 그렇게 걷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잔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그렇게 걸었다. 아니면 그 차가운 손을 낚아 채 같이 커다란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걷기도 했다. 완강히 저항하던 손은 결국 체념하고 얌전히 코가미의 주머니 안에 들어간 채로 같이 따뜻해졌었다.
원래 사람은 없는 것만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이 기후에선 이불로도 쓰지 못하는 겨울 점퍼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건 그 향수 때문이다. ‘돌아가려면 하나쯤은 있어도 되잖아?’ 돌아갈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자기합리화하고 배낭에 처박아놓은 게 벌써 3년이다. 일본에선 세 번의 겨울이 지났고 이젠 네 번의 겨울을 맞이할 즈음이었다. 겨울옷이란 게 다 그렇듯 부피는 크고 무게는 무거워 가방에 넣으면 커다란 군용배낭의 절반 이상도 차지한다. 날이 좀 선선해졌으니 모처럼 대청소를 하자며 집안을 뒤집어놓다 발견한 이 커다란 짐덩어리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어쩐지 피곤해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슬슬 버려도 좋지 않을까.
상황은 전보단 안정되었다. 정의롭고 자비로운 시빌라의 은총은 기껏 밤바다를 타고 도망친 이국에까지 미쳐 세상을 악랄한 이분법으로 갈라놓더니 기어이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안락한 둥지 틀기에 성공했다. 표면상의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저항군은 사람들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열망을 잃은 게릴라전에선 인적 물적 자원이 전보다 몇 배로 소모되었다. 재정 부족으로 이 벽지에까지 시스템이 시행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이 나라도 내가 알던 곳과 비슷해질 것이다. 거리마다 일정간격으로 위치한 컬러 스캐너, 시빌라 시스템이 위치한 초고층 건물, 온통 흰색인 교정시설, 그 익숙한 풍경 사이에서 자신의 범죄계수는 몇일까. 아마 이전보다 훨씬 높아, 어쩌면 엘리미네이터가 작동될 정도일지도 모른다. 기노한테 한 번은 물어 볼걸 그랬지. 만났을 때 한 번은, 만났을 때…….
다시 만났을 때 기노자는 덥지도 않은지 보기만 해도 답답한 검은 정장이었다. 기노자는 원래 그랬다. 그의 고지식함은 계절을 가리지 않아서 여름이면 반팔 위에 몰래 홀로그램을 씌워 출근하던 나와는 달리 그만은 분명히 긴 셔츠에 재킷이었다. 여름은 더위 때문에 범죄가 일어나기 쉽고 사이코패스 관리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계절이다. 적정 온도의 냉방은 어느 정도의 의무였고 드래그스토어에선 색상보조제가 불티나게 팔렸다. 만인이 주의를 기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계수의 상승은 빈번해서 여름, 기노자는 셔츠를 하루에 두 번은 갈아입어야 했다. 더위에 지쳐 냉방장치 밑에 녹아내린 기노자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내리다 이윽고 벗겨내는 것은 으레 내 몫이었다.
“기노도 그냥 홀로그램을 쓰지 그래.”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넌지시 권고하면 기노자는 습관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예의가 아니잖아.”
그래서 기노자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은 겨울이었다. 겨울엔 긴 셔츠와 재킷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기노자는 여름보단 겨울이 더 잘 어울렸다. 연말을 맞이하는 희고 푸른 채도의 일루미네이션 아래에선 기노자가 좋아하는 검은 트렌치코트가 길고 늘씬한 실루엣을 유독 강조했고 높은 깃보다도 더 길고 흰 목이 도드라져 보였다. 따라서 나도 여름보단 겨울이 좋았다. 더운 것보다 추운 게 훨씬 낫기도 하고, 여름엔 나란히 앉는 것도 질색하는 기노자가 자연스럽게 거리감을 줄이는 계절이었으니까.
“그렇게 걷지 마, 코가미.”
나란히 걷던 길에서 고개를 돌리면 기노자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왜? 소리없이 그렇게 물으면 기노자는 내게 잡혀 주머니 속에 들어간 손 대신 반대편 손으로 내 등을 힘껏 내리쳤다.
“보기 흉하니까.”
코트 안으로 움츠러 들어간 목이 반동으로 쑥 위로 올라온다. 낄낄대면서 나란히 귀가하는 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바뀐 적이 없었다. 기노자의 한 손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 재킷 주머니에 들어있었고 맞잡은 손은 같이 따뜻해지곤 했다. 길게 마디진 그 손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으면 기노자가 간지러운 듯 움찔거렸지만 역시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 매끈하게 긴 손가락에 액세서리가 있으면 꽤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 건 언제였던가.
강도 높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모두를 수반하는 공안국의 월급은 일반적인 샐러리맨과 비슷했지만 야간 근무를 낮처럼 했고 휴일 근무는 평일처럼 했으니 추가 수당을 합치면 훨씬 넉넉했다. 유별나게 아름다운 반지도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도 흐렸다. 그만큼 오래된 얘기였다. 그게 언제였지. 스물의 겨울엔 간신히 익숙해진 일에 매진하는 것만도 벅찼다. 스물 하나의 겨울도 아니지. 그 땐 아직 그 정도의 잔고가 남아있지 않았다. 스물 둘, 셋, 넷…. 아마 그 즈음이었을까. 간신히 어린 티가 남은 기노자의 둥근 뺨이 케이크에 꽂힌 초의 열기에 발갛게 달아올랐을 때 반지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정교한 홀로그램 카탈로그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휴일을 쪼개 기노자 몰래 도쿄의 백화점을 모두 돌고, 기진맥진해서 돌아오는 날이 족히 여덟 번은 넘었다. 단순 계산으론 여덟 번이지만 기노자와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었고 휴일 출근도 일상다반사였으며, 그토록 무언가에 매진하고 흥분했던 적은 살면서 몇 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고백하건대 가끔은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 마디진 손이 여전히 외롭고 그래서 무엇을 채워줘야겠다고 새삼스럽게 깨닫는 건 한 주머니에 손을 맞잡고 넣을 때뿐이었다.
프러포즈라는 거창한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충동적이었다. 그 날이 너무 지쳤어서, 기노자의 얼굴에서 유난히 턱선이 도드라져 보여서. 마지막 집행이 힘들었어서 그런 사소한 이유들이 충동을 부추겼다. 사는 데 몇 개월, 갖고 다니기가 몇 주였던 박스를 꺼내게 한 건 그런 것들이었다.
“결혼할래, 기노?”
그토록 가벼운 말. 차라리 농담처럼 말하고 싶었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의 기노자는 모든 걸 조심스러워했다. 박빙薄氷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클리어 컬러를 보여주면서도 언제 그것이 아주 깊은 바다의 색이나 계곡의 이끼나 붉은 핏빛이 될까 두려워했다. 그 선연한 색의 변화가 가져올 모든 사회적인 변화들을, 그것이 종내 내게 가져다 줄 불이익을. 고백하고 첫 달은 그것을 핑계로 거부했고, 두 달은 그래도 괜찮겠냐고 꾸준히 확인했으며, 반 년은 그런 미래를 자꾸만 상상해보라고 했었다. 짧은 생의 절반이 넘게 그를 괴롭히고 남은 평생을 괴롭힐 그의 불안의 기저를 나는 잘 알고 있었고, 반복되는 확인들을 인내할 여력도 있었으니 대답을 독촉할 생각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 눈을 크게 뜨다가도 찬바람에 마른 얇은 입술을 꽉 깨문 기노자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코가미, 나는.”
…앉아 있다가 지쳐 벌렁 누워버렸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꾼 기분이었다. 이전 세대의 낡은 기억장치에서 기적적으로 선명한 기록들을 꺼내면 이런 상황일까. 기억하는 공기는 입김이 희게 나오는 차가운 날씨인데 숨을 들이쉬면 미지근한 온기가 들어왔다. 아득하면서도 생생한 기억들을 헤집고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혀온다.
기노자는 실로 현명했다. 예상처럼, 기노자는 거절했다. 거절이라기보다는 그의 습관 같은 신중함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모르겠어, 코가미.
몰랐던 건 기노가 아니라 나일 것이다. 형사의 육감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은밀하게 발생한 범죄현장에서 문득 뒤가 아려올 때, 다른 무언가가 숨어있을 것이라 짐작한다든가 모든 알리바이가 완벽한 상황에서도 중요 참고인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 그것을 ‘형사의 육감’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경험인가, 선험인가. 육감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수사에 대한 육감은 없어도 – 일반인인 기노자에게 그것은 없어도 좋았다 – 기노자에겐 다른 종류의 육감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머나먼 미래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의 그림자를 누구보다 기민하게 눈치 챌 수 있는 그런 육감이. 나는 결코 바닥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의 장벽을 넘어, 아주 바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의 기질을.
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서른이 될 때까지 변하지 않으면.
얇게 마른 입술을 질겅대며 기노자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그 때가 되면 다시 말해줄래.
망설이는 눈빛엔 분명 다른 종류의 불안이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요동치는 대지 위에 간신히 한 겹의 단단한 껍질을 올려 최대한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그건 알 거야, 코가미.
거절하면서도 기노자는 매달리듯 말했다.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던 일인데 고작 신중한 거절 한 번에 기노자는 내일이면 당장 내가 어딘가로 가버릴 것처럼 과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너는 말이야, 너는…….
끝내 문장을 마치지 못한 채로 기노자는 입을 다물었다. 나를 위해서였는지, 그를 위해서였는지 기억나진 않아도 우리는 반지를 서로 나눠 가졌다. 나는 기노자의 것을, 기노자는 나의 것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때에 주기로 했다.
그리고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의도하여 넣어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던 물건이었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밀입국하는 배 안에서 손가락 끝에 걸려 올라온 그것을 보고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케이스에 넣어둔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혼자 돌아다니게 되었나. 사사야마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마키시마 쇼고의 존재를 확인하고 부술 때까지 겨울마나 애용하던 점퍼였다. 내 주머니엔 반지나 누군가의 손 대신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가 있는 게 당연해졌고 아무리 구부정하게 걸어 다녀도 내 등을 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애꿎은 주머니만 만지작대다가 실이 닳아 구멍이 났고 정말 우연히도 그 사이로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만이 가능했다.
“잘 지내?”
“지내.”
무뚝뚝한 대답은 완고했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단단함은 그가 지난 세월 동안 갈고 닦은 그의 특기였다. 그래서 아무도 그가 얼마나 다정한지 몰랐다.
“나는 별로야. 여긴 겨울이 없거든.”
“잘됐네. 넌 여름을 더 좋아하잖아. 여름이 잘 어울리기도 하지.”
기노자의 곧은 등, 꼿꼿한 목은 여전했지만 안 본 사이에 그는 훨씬 더 도드라진 광대와 턱선을 갖게 되었고 머리카락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상태로 길었다. 늘 눈가를 가리던 안경이 없어져 깊은 눈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은 정갈한 앞머리 사이에서 얼핏 처연한 듯한 느낌도 들었다. 예전엔 곧죽어도 웃을 줄을 모르더니 기노자는 이제 꽤나 어른처럼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어른처럼 웃는다는 건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비웃거나 냉소할 수 있게 되었단 얘기였다.
“난 겨울이 더 좋은데, 기노. 우리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좋아하는 계절에 대한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던가?”
나는 겨울을 좋아했다. 기노자에게 잘 어울리는 그 계절을. 나는 진심으로, 어떤 방향에선 좀 억울하기까지 해서 기노자에게 항변했다. 우리의 끝이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숱하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서로의 기호는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기노자는 그것을 정말 그렇게 온전히 잊어버렸나. 내 시선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기노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귀찮다는 얼굴로 말한다.
“너는 가끔 네가 좋아하는 걸 착각하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기노.”
“네가 말한 대로 그 오랜 시간 동안 붙어있었기 때문이지.”
너는 겨울에만 나를 사랑하는 척 했잖아.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감하게 낮았다. 기노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웃고는 왼쪽 손의 장갑을 잡아당긴다. 내가 주머니에 넣고 같이 따뜻해지던 손이었다. 길게 마디진 손가락의 윤곽을 더듬는 걸 좋아했다. 우리의 거리감이 조금씩 녹아드는 겨울을, 네가 입은 검은 재킷이 잘 어울리는 계절을.
“너는 좋아하는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편이니까. 호오가 분명하다고는 해도 의외로 사소한 건 잘 모르잖아.”
일정한 규칙들. 빵을 먹을 때는 끝부터 순서대로 먹는 걸 좋아한다든가, 붕어빵은 머리부터, 만두는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걸, 카레우동은 한 번 크게 휘저은 다음 밑에서부터 먹는 걸, 늦봄과 늦여름을 좋아하고 겨울은 싫어해. 추운 게 싫으니까 달라붙는 거잖아.
…—원래 사람은 없는 것만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겨울이 그리운 건 이 나라엔 겨울이 없어서였을까. 기노가 지금 눈앞에 없어서 기노를 그리워하는 걸까? 익숙해지고, 또 익숙한 모양으로 변모할 도시에 내게 가장 익숙한 기노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기노를 그리워하는 걸까. 이제는 그 왼손 약지를, 마르고 곧은 등을, 그 옆모습을.
아마 겨울 점퍼는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곳엔 겨울이 없고 주머니 깊은 곳에 들어 간 반지는 주인을 잃었어도 그랬다. 단순한 향수병이나 변덕이라고 해도 좋았다. 십수 년 동안 익숙한 모습이었다. 계절만큼이나 당연하게 붙어 있었다. 그립지 않은 게 이상하잖아. 나는 눈앞에 없는 기노자에게 변명한다. 사랑하는 척이라면 외롭지 않았어야 했다.
“네 말은 틀렸어, 기노.”
나는 몹시 외로웠고 지금은 없는 계절이 몹시도 그리웠다. 우리가 사랑했던 겨울이, 우리가 사랑을 했던 겨울이.
지난 12월 9일 디페스타에 냈던 스자루루 소설본 '망각에서 온 편지'의 재고를 통판합니다.
최종사양 A5/중철본 28p으로 가격은 30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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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판 기한은 재고가 소진될 때까지입니다. 확인 후 문자로 입금액과 계좌번호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ample
“요즘 내 평판은 어때?”
오만하신 황제폐하는 어느 날 그렇게 서두를 열었다. 따뜻한 햇빛에 반사된 를르슈의 흰 옷이 눈이 부실 정도로 평화로운 오후였다. 원형의 테이블, 왼쪽엔 황제, 오른쪽엔 마녀, 나는 기사인가?
스자크는 한 손으로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기사장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쿠루루기 스자크는 제국의 유일무이한 기사로 그 생을 마쳤으나 스자크는 가끔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기사 서임을 받은 날의 들뜸과 설렘,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이 아득히 멀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면 불쌍하고 어리석어 한 번 걷어 차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떨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황제가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는 얘기?”
C.C.는 긴 구속복의 소매가 거슬리는지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피자를 먹고 있었다.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포로들과 같은 구속복을 C.C.는 그녀의 유니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옷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마트의 포인트 카드를 소중하게 생각하던 를르슈는 최근 재물의 무상함을 깨달았는지 이래저래 잔소리를 하면서도 C.C.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다. 변덕스러운 C.C.의 취향에 맞춰 입고 나갈 데도 없는 드레스를 몇 벌이나 지어주었고 C.C.는 마음이 내키면 그런 드레스를 입고 정청 안을 돌아다니곤 했지만 그 뿐이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내버려두고 초라하고 예쁘지도 않고 심지어 답답한 홑겹의 구속복을 왜 입고 다니는 건지 스자크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봐.”
반대로 를르슈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황제의 복장이었다. 눈에 띄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며 를르슈는 새하얀 천에 금실로 자수하고 다시 보석까지 박았다. 누가 봐도 사치스럽고 향락을 좋아하는 황제폐하처럼 보였다. 제가 만든 주제에 빨래하기 번거롭다며 투덜대곤 했지만 어쩌겠는가. 다 필요한 일인 걸. 스자크는 말없이 잘 구워진 아몬드 쿠키를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가루 떨어뜨리지 마, 스자크.” 대화하는 중에도 어찌나 눈썰미가 좋은지 를르슈는 눈을 흘기며 잔소리 하지만 알게 뭔가. 잘 흘리는 쿠키를 구운 건 너잖아. 톡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고 그러거나 말거나 스자크는 이번엔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예의라곤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를르슈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C.C.의 답변에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뭘? 황비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이천 명의 여자를 가둬두고 하루에 한 명씩 즐기고 있다는 얘기?”
“지난번에 들었던 거잖아.”
“흐음, 거기에 살이 더 붙어서 변덕스러운 황제는 밤에는 그녀를 치하하며 보석을 주고 다음날 생매장한다고 하던데. 수도 펜드래곤의 제로그라운드에 시체를 묻고 말이지. 그건 친히 동족인 포로들을 쓰고 있다고 하더군.”
“내가 일본에 있는데 어떻게 펜드래곤에 시체를 묻는다는 거야?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얘기인데.”
를르슈가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면 C.C.는 낄낄대며 웃었다. 동정에겐 이래저래 가혹한 소문이야. …시끄러워. 그나저나 대체 너는 왜 손수건을 안 쓰는 거야?” 기름진 손을 테이블보에 닦는 C.C.의 손을 낚아채 를르슈는 꼼꼼하게 손수건으로 닦는다.
아주 그냥 쿵짝이 맞는구만.
(중략)
제로 개인의 기본적인 일과는 대단히 단순하다. 기상, 식사, 출근. 아침의 일정은 단지 이 세 가지다. 첫 6개월은 정말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빴다. 끝없는 해외순방, 지역 방문, 나나리의 경호, 정책제안회의, 정책추진회의, 국제수장회의, 끝없는 회의, 회의, 회의……. 앉아서 졸 뻔한 것도 여러 번이고 실제로 졸았던 적도 있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가면은 졸기에도 퍽 유용했고 스자크도 기회가 된다면 그 기능을 십분 써먹고 싶었으나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원래 있었던 누군가라면 모를까, 스자크로서는 조금이라도 회의의 흐름을 놓쳤다간 멍청한 소리나 내뱉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를르슈가 미리 만들어준 서류가 있다 해도 회의별 스크립트는 아니다.
그게 됐으면 를르슈의 기어스는 절대준수가 아니라 예지였겠지. 아니면 초능력자나.
기왕이면 그런 능력이나 받을 것이지, 하며 이미 없는 사람에게 투덜대기도 여러 번. 어쨌든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 스자크도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니 능숙하게 회의의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되었고 전세계가 안정국면에 접어든 지금은 그렇게 바쁠 것도 없었다. 제로는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기호일 뿐이니 가끔 행사에나 얼굴을 비추고 빈둥대면 그만이었다. 출근해서 할 일도 없다. 가끔 올라오는 서류를 읽고 인가 도장을 찍고, 뉴스를 보고, 점심 먹고 내방객을 맞이하거나 – 대체로 나나리지만 -, 티타임을 갖는다거나 – 대체로 나나리가 불러서 – 하고는 퇴근이다.
오늘도 그런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기대하며 출근한 제로를 맞이한 건 합중국 브리타니아의 재상,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의 비서 카논 말디니 경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말디니 경.”
“좋지 못한 아침이에요, 제로. 아침 뉴스 못 보셨나요?”
“아니, 전혀…….”
아침부터 카논이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무언가 긴급한 사항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꽤 심각한 문제인 모양이다.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그렇게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카논의 뒤를 제로는 따라 걸었다.
무슨 일일까. 를르슈가 작성한 일종의 예언서, 엔 이 즈음엔 극성 시민단체나 황색 언론이 나나리의 명예를 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쓰여 있었다. 합중국 브리타니아의 대표로 나나리가 선정된 것에 대해선 실제로 말이 많았다. 표면상 합중국인 브리타니에서 황족인 나나리가 대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의견이었다. 악명 높은 황제의 유일한 여동생으로 사형에 처할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기구한 운명의 그녀는 정치적으로 그럴듯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 또한 타당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엔 나라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정치를 하던 인물들은 전부 귀족으로 구색을 맞춰 브리타니아의 대표까지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나나리 본인이 어디까지나 임시이고 향후 10년 내에 의회를 정비하고 환경이 된다면 투표를 진행할 예정이라 발표해 일단락 지은 게 벌써 3년이니 이제와 다시 그녀의 지위에 흠집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나리의 안전에 관한 문제일까. 한 가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생각만으로도 스자크는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단순히 를르슈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다. 다정한 나나리를 스자크도 를르슈 못지않게 아꼈다. 몇 되지 않는 ‘쿠루루기 스자크’와 친밀했던 사람들이다. 여전히 제로가 휠체어를 밀고 있으면 손을 뒤로 올려 제로의 손등을 덮는 그 자그마한 온기를 눈 앞에서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아니 침착하자.’
스자크는 길게 심호흡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정청이 아니라 병원으로 갔을 것이고 이 평화로운 정청은 어수선하고 불온한 공기가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럼 뭐지? 스자크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럴 듯한 일은 생각나지 않았으니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제일이었다.
“카논입니다.” 노크는 형식일 뿐, 보고하자마자 카논은 문을 열었다.
“제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나나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조급하게 제로를 불렀다. 나나리가 무사했다. 스자크가 생각하던 최악의 경우는 이로써 단번에 해소됐다.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요, 나나리 님.”
깍듯한 경어에 나나리의 얼굴에 순간 침울한 기운이 스쳤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도 나나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쩐지 비통함이 서린 얼굴로 나나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소식은 못 들으신 모양이네요.”
“제가 대신 설명드리죠. 오늘 아침 유럽연합의 황색 언론에서 보도한 소식입니다. 프랑스 국적의 시민 단체에서 나이트 오브 제로, 쿠루루기 스자크의 묘를 파헤쳐 그 관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12월 9일 열리는 디페스타(동네페스타) J13에서 스자루루 소설본 '망각에서 온 편지'를 판매합니다.
현재 절찬 원고 중으로 대략적인 수요를 가늠하기 위해 간략하게나마 수요조사를 진행합니다.
A5/20페이지 내외 중철본/3000원(예상)
잘 부탁드립니다
▽Sample
“요즘 내 평판은 어때?”
오만하신 황제폐하는 어느 날 그렇게 서두를 열었다. 따뜻한 햇빛에 반사된 를르슈의 흰 옷이 눈이 부실 정도로 평화로운 오후였다. 원형의 테이블, 왼쪽엔 황제, 오른쪽엔 마녀, 나는 기사인가?
스자크는 한 손으로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기사장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쿠루루기 스자크는 제국의 유일무이한 기사로 그 생을 마쳤으나 스자크는 가끔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기사 서임을 받은 날의 들뜸과 설렘,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이 아득히 멀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면 불쌍하고 어리석어 한 번 걷어 차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떨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황제가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는 얘기?”
C.C.는 긴 구속복의 소매가 거슬리는지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피자를 먹고 있었다.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포로들과 같은 구속복을 C.C.는 그녀의 유니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옷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마트의 포인트 카드를 소중하게 생각하던 를르슈는 최근 재물의 무상함을 깨달았는지 이래저래 잔소리를 하면서도 C.C.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다. 변덕스러운 C.C.의 취향에 맞춰 입고 나갈 데도 없는 드레스를 몇 벌이나 지어주었고 C.C.는 마음이 내키면 그런 드레스를 입고 정청 안을 돌아다니곤 했지만 그 뿐이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내버려두고 초라하고 예쁘지도 않고 심지어 답답한 홑겹의 구속복을 왜 입고 다니는 건지 스자크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봐.”
반대로 를르슈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황제의 복장이었다. 눈에 띄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며 를르슈는 새하얀 천에 금실로 자수하고 다시 보석까지 박았다. 누가 봐도 사치스럽고 향락을 좋아하는 황제폐하처럼 보였다. 제가 만든 주제에 빨래하기 번거롭다며 투덜대곤 했지만 어쩌겠는가. 다 필요한 일인 걸. 스자크는 말없이 잘 구워진 아몬드 쿠키를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가루 떨어뜨리지 마, 스자크.” 대화하는 중에도 어찌나 눈썰미가 좋은지 를르슈는 눈을 흘기며 잔소리 하지만 알게 뭔가. 잘 흘리는 쿠키를 구운 건 너잖아. 톡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고 그러거나 말거나 스자크는 이번엔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예의라곤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를르슈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C.C.의 답변에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뭘? 황비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이천 명의 여자를 가둬두고 하루에 한 명씩 즐기고 있다는 얘기?”
“지난번에 들었던 거잖아.”
“흐음, 거기에 살이 더 붙어서 변덕스러운 황제는 밤에는 그녀를 치하하며 보석을 주고 다음날 생매장한다고 하던데. 수도 펜드래곤의 제로그라운드에 시체를 묻고 말이지. 그건 친히 동족인 포로들을 쓰고 있다고 하더군.”
“내가 일본에 있는데 어떻게 펜드래곤에 시체를 묻는다는 거야?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얘기인데.”
를르슈가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면 C.C.는 낄낄대며 웃었다. 동정에겐 이래저래 가혹한 소문이야. …시끄러워. 그나저나 대체 너는 왜 손수건을 안 쓰는 거야?” 기름진 손을 테이블보에 닦는 C.C.의 손을 낚아채 를르슈는 꼼꼼하게 손수건으로 닦는다.
아주 그냥 쿵짝이 맞는구만.
(중략)
제로 개인의 기본적인 일과는 대단히 단순하다. 기상, 식사, 출근. 아침의 일정은 단지 이 세 가지다. 첫 6개월은 정말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빴다. 끝없는 해외순방, 지역 방문, 나나리의 경호, 정책제안회의, 정책추진회의, 국제수장회의, 끝없는 회의, 회의, 회의……. 앉아서 졸 뻔한 것도 여러 번이고 실제로 졸았던 적도 있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가면은 졸기에도 퍽 유용했고 스자크도 기회가 된다면 그 기능을 십분 써먹고 싶었으나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원래 있었던 누군가라면 모를까, 스자크로서는 조금이라도 회의의 흐름을 놓쳤다간 멍청한 소리나 내뱉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를르슈가 미리 만들어준 서류가 있다 해도 회의별 스크립트는 아니다.
그게 됐으면 를르슈의 기어스는 절대준수가 아니라 예지였겠지. 아니면 초능력자나.
기왕이면 그런 능력이나 받을 것이지, 하며 이미 없는 사람에게 투덜대기도 여러 번. 어쨌든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 스자크도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니 능숙하게 회의의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되었고 전세계가 안정국면에 접어든 지금은 그렇게 바쁠 것도 없었다. 제로는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기호일 뿐이니 가끔 행사에나 얼굴을 비추고 빈둥대면 그만이었다. 출근해서 할 일도 없다. 가끔 올라오는 서류를 읽고 인가 도장을 찍고, 뉴스를 보고, 점심 먹고 내방객을 맞이하거나 – 대체로 나나리지만 -, 티타임을 갖는다거나 – 대체로 나나리가 불러서 – 하고는 퇴근이다.
오늘도 그런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기대하며 출근한 제로를 맞이한 건 합중국 브리타니아의 재상,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의 비서 카논 말디니 경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말디니 경.”
“좋지 못한 아침이에요, 제로. 아침 뉴스 못 보셨나요?”
“아니, 전혀…….”
아침부터 카논이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무언가 긴급한 사항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꽤 심각한 문제인 모양이다.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그렇게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카논의 뒤를 제로는 따라 걸었다.
무슨 일일까. 를르슈가 작성한 일종의 예언서, 엔 이 즈음엔 극성 시민단체나 황색 언론이 나나리의 명예를 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쓰여 있었다. 합중국 브리타니아의 대표로 나나리가 선정된 것에 대해선 실제로 말이 많았다. 표면상 합중국인 브리타니에서 황족인 나나리가 대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의견이었다. 악명 높은 황제의 유일한 여동생으로 사형에 처할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기구한 운명의 그녀는 정치적으로 그럴듯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 또한 타당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엔 나라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정치를 하던 인물들은 전부 귀족으로 구색을 맞춰 브리타니아의 대표까지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나나리 본인이 어디까지나 임시이고 향후 10년 내에 의회를 정비하고 환경이 된다면 투표를 진행할 예정이라 발표해 일단락 지은 게 벌써 3년이니 이제와 다시 그녀의 지위에 흠집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나리의 안전에 관한 문제일까. 한 가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생각만으로도 스자크는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단순히 를르슈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다. 다정한 나나리를 스자크도 를르슈 못지않게 아꼈다. 몇 되지 않는 ‘쿠루루기 스자크’와 친밀했던 사람들이다. 여전히 제로가 휠체어를 밀고 있으면 손을 뒤로 올려 제로의 손등을 덮는 그 자그마한 온기를 눈 앞에서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아니 침착하자.’
스자크는 길게 심호흡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정청이 아니라 병원으로 갔을 것이고 이 평화로운 정청은 어수선하고 불온한 공기가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럼 뭐지? 스자크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럴 듯한 일은 생각나지 않았으니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제일이었다.
“카논입니다.” 노크는 형식일 뿐, 보고하자마자 카논은 문을 열었다.
“제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나나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조급하게 제로를 불렀다. 나나리가 무사했다. 스자크가 생각하던 최악의 경우는 이로써 단번에 해소됐다.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요, 나나리 님.”
깍듯한 경어에 나나리의 얼굴에 순간 침울한 기운이 스쳤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도 나나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쩐지 비통함이 서린 얼굴로 나나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소식은 못 들으신 모양이네요.”
“제가 대신 설명드리죠. 오늘 아침 유럽연합의 황색 언론에서 보도한 소식입니다. 프랑스 국적의 시민 단체에서 나이트 오브 제로, 쿠루루기 스자크의 묘를 파헤쳐 그 관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