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가엘리오를 자기 피 기꺼이 먹여 기르고 살찌우는 맥길리스요.... 흡혈씬 좀 에로틱하게 헷헷헷'
에로틱까진 모르겠고 일...단은. 뭔가 이러저러한 설정이 있지만 그냥 일회용이니까 적당적당히.
맥길리스 파리드는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이었는데, 성냥팔이 소녀의 허황된 망상과도 비슷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등에 닿는 차가운 벽이 아니라 그 너머 안 쪽이 자신의 공간이기를, 따뜻한 벽난로와 부드러운 촉감의 양탄자, 형형색색의 과자들, 케이크는 어떤 맛일까. 다 녹은 초콜릿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맛있었는데. 맥길리스는 불행히도 자신이 평생 먹을 수 없는 단 맛을 더없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쓰레기통에서 주운 초콜릿 포장지를 핥아보고 깨달았다. 기호는 맥길리스가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선택할 권리는 오로지 가진 자만의 것이었고 맥길리스는 무언가 눈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슬퍼졌다. 그러나 자기번민과 괴로움 또한 따뜻하고 배부를 때의 얘기다. 체온이 뚝 떨어지고 불조차 피울 수 없는 이런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날 말고.
몸이 무거워.
좋지 않은 징조였다. 아니 몸은 무겁다 못해 가벼웠다. 속이 텅 비어서 팔다리가 후들거려 손가락 하나도 꼼짝 할 수 없었다. 분명 제 몸뚱아리인데 다기인형마냥 무기질이었고 신경이 이어져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벽에 기대 숨을 쉬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죽음이 목전이라는 사실을, 어린 맥길리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죽음은 아름답지 못하다. 지금의 비참함보다도 딱딱해지고 이내 흐물흐물해지는 과정이 맥길리스는 끔찍하게 싫었다. 그의 얄팍한 미추의 감각으로도 그것은 그렇게나 추했다. 영생을 누리고 싶다는 권력자의 거창한 소망이 아니라 그냥 맥길리스는 죽는 게 싫었다. 징그럽잖아. 그러나 자신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비가 그치면 누군가 발견하고 미관을 위해 누군가 경찰에 신고할 테고, 그럼 쓰레기처럼 실려가서, 아니, 죽은 뒤에야 간신히 다른 사람과 비슷한 평균적인 삶을 누릴지도 모른다: 병원의 영안실.
싫어!
"…인, 여기…ㄱ, 있는데― ."
"무시하세요, 사람은 안돼요."
"아니, 그래도 어리잖아. 이봐, 괜찮은가? 아니 당연히 안 괜찮겠지? 꼬마야?"
누군가 팔을 잡은 것도 같았다. 섬세하게 촉감을 분별할 능력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귀찮게 몸을 흔들어대서 가뜩이나 목 위에서 덜렁거리게 붙어 있는 머리가 자꾸만 흔들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대신 벌어진 입만 자제력을 잃고 달각거렸다. 한 번 시작되니 귓가에 울리는 건 따그닥대며 부딪치는 제 잇소리뿐이었다. 시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윽고 몸이 붕 뜨더니, 벽보다는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그러나 완고한 바구니의 안쪽으로 몸이 들어간 것 같았다. 마른 나뭇잎들조차 어디론가 사라지고 간간히 그 쪼가리만 보이는 계절엔 절대로 맡을 수 없는 청량하고 달작지근한 라일락 향만이 인상 깊게 뇌리에 박혔다.
*
맥길리스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가 도로 시선을 돌렸다. 휴대전화에 남은 마지막 기록은 무려 여섯 시간 전으로, 「미안, 오늘 회식!(。ノω\。)゚・。」 이라는 짤막한 문자였다. 뒤에 붙은 이모티콘이 쓸데없이 귀여운 게 얄미워 때리고 싶다.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동거인은 전화는커녕 문자도 없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포기하고 침대에 누운 것도 벌써 한 시간이 지났으나 아무래도 초조함만 더해간다. 계속 뒤척거리느라 한쪽으로 밀려 뭉친 시트가 다리 밑에서 기분 나쁘게 걸리고 있었다. 발로 시트를 밀었다가 더 뒤틀리는 느낌에 움직이는 것도 멈췄다. 맘에 들지 않으려니 세상 온갖 게 거슬린다. 맥길리스는 앞머리를 매만지고, 빙빙 돌리고, 뒤로 넘겼다가 앞으로 잡아당겼다가 옆으로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내리면서도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차가운 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덜그럭거리는 소리, 패브릭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가방을 소파에 던지는 소리일 것이다. 맥길리스는 귀를 바짝 세우고서도 황급히 이불을 잘 편 다음 뒤집어 썼다. 무슨 아빠 오길 기다리던 애도 아니고. 차라리 순진무구한 애라면 정답게 마중이라도 나가지, 머리가 조금 커서 자존심이란 걸 아는 건 애가 아니라 어른이다. 아직 덜 자란 어른. 제 행동이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맥길리스는 너무 길들여졌다. 그러니까, 집에 온 가엘리오가 습관적으로 맥길리스의 방을 열어보는 그런 것에. 가끔 침대나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거, 누군가가 보고 있는데도 막연한 불안감이나 위협보단 어디선가 안도감과 충만감을 느껴버리는 그런 것, 맥길리스가 가엘리오보다 아슬아슬하게 작은 정도로 커진 이후에는 한 번도 한 적 없지만 예전엔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고무같다고 생각한 것은 매끄러운 검은 양가죽 장갑이었다. 맥길리스가 처음 본 가엘리오 보드윈은 높지만 열린 목깃의 셔츠에 얇은 검은 리본을 두르고, 회색의 조끼, 같은 색의 바지, 어두운 색의 양모 재킷, 발등이 높고 날렵한 스트레이트 토의 구두를 신은 우아한 신사였다.
'괜찮니, 꼬마야?'
침대에 누워 뻑뻑한 눈을 깜박이며 쌕쌕대는 것말고는 맥길리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아직 아픈 거구나. 남자는 맥길리스의 깜박이는 눈꺼풀을 재깍 대답으로 알아듣고 쓸쓸하게 웃더니 장갑을 벗고 맥길리스의 이마 위에 손을 얹어주었다. 서늘하게 차가운 손이었다. 기분좋은 한기에 고양이처럼 가르랑대며 맥길리스는 다시 푹 곯아떨어졌었다.
그 때는 단순히 제 열 때문인 줄 알았는데 가엘리오의 손은 늘 차가웠다. 장갑을 잘 벗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열이 내리고 나서 어린 맥길리스가 그와 같이 지내게 되고 난 후에, 한참 자다가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아 깜짝 놀라 몸서리 친 적이 있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뜬 맥길리스는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 기이할 정도로 반짝이고, 보석 같은 균열된 그림자가 있는 눈이 맥길리스보다 더 놀라고, 심지어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양 손을 뒤로 숨기며 쭈뼛거리던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넘겨주지도, 굿나잇키스를 해주려다가 그조차도 하지 못한 채 '잘 자렴.' 애써 밤인사만 건네고 문을 닫고 가버리고 말았다. 거기서 놀라지 않으면 좋았을까. 맥길리스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다행히도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잘만한 야심한 시각에 방문을 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맥길리스의 머리를 만질 땐 늘 장갑을 끼거나, 혹은 쭉 끼고 있다가 벗어주었다. 거기까지 몇 달의 시간이 걸린 것을 고려하면 가엘리오는 정말로 사려 깊은 양육자였다. 당시의 가엘리오가 끼고 살던 육아 프로그램과 관련 서적 어딘가에 무슨 말이 쓰여 있던 것 아닐까 싶다. 부모와 아이의 스킨십이 유대감을 키워준다는, 이미 10살도 넘은 맥길리스에겐 소용 없는 충고들. 그러나 가엘리오는 그걸 진지하게 믿었고, 그래서 맥길리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하지만 맨살로는 너무 차가우니까 꼬박꼬박 장갑을 꼈다가 또 벗으면서 살이 맞닿는 감촉과 '정상적인 인간'의 체온을 동시에 주고 싶었던 거라고 맥길리스는 짐작한다.
가엘리오는 지금도 집에 늦게 돌아와서 맥길리스가 잠이 든 것 같으면 방문을 열어보고 맥길리스를 지켜보곤 했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기대하면서 누워있는데, 한참이 지나도 그 뒤의 소리가 없다. 혹시 술에 취했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맥길리스는 코웃음 쳤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야지, 맥길리스. 가엘리오는 술을 갤런 단위로 들이켜도 취할 수 없다. 그러면 뭘까. 맥길리스가 듣지 못하는 범위에서 빌어먹을 시종과 얘기라도 하고 있는 걸까. 인간의 영역으로는 당최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걸 맥길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 꼴을 상상하려니 왠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오늘은 얼굴 보기 싫었는데 모르는 척 훼방 놓을 겸 나가볼까 맥길리스가 고민하는 사이 문 너머에선 그 빌어먹을 녀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소령님? 가엘리오 소령님?」
그 소리에 맥길리스는 스프링처럼 침대에서 튀어 나왔다.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형형하게 이 쪽을 쏘아보는 붉은 눈만큼은 너무나도 잘 보였다. 맥길리스는 그 기분 나쁜 시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거실 불을 켰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동공이 수축해 눈 앞의 상을 제대로 잡는 데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미 현관을 향해 나서고 있던 맥길리스의 시야에 축 늘어진 몸뚱이가 명확하게 보였다. 맥길리스도 익히 알고 있는 그, 가엘리오 보드윈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밑으로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도드라졌다. 딱딱하고, 굳어, 마치 죽은 것 같은――
"…멍청하긴."
맥길리스가 내뱉은 욕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알아챈 아인이 입을 달싹였으나 이 경우에 대해선 그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멍청이가 맞았다. 한 쪽 팔을 둘러 메고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끌고 갔다.
"들어올 건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던 아인의 발걸음이 가엘리오가 문지방을 넘어선 순간부터 뚝 멈췄다. 맥길리스가 원치 않는 방문자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분한 듯 이를 벅벅 갈면서도 이 방은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게 준 맥길리스의 공간이었고, 따라서 초대 받지 못한 아인은 이 방의 문을 넘을 수 없다. 셋이 같이 살면서도, 이 집은 아인에겐 완벽히 별개의 공간이었다.
"특무소령에게, 함부로 손 대면……."
붉은 눈이 으르렁대며 맥길리스에게 엄포를 놓는다. 가엘리오가 말하길, 한 때 아인의 눈동자는 깊은 바다의 색이었다고 했다. 황혼이 저물고 막 시작되는 밤의 색이었다고, 코발트 블루, 짙푸른 남색, 깊은 바다의 투명함을 갖고 있었다고. 그러나 정작 아인은 내륙에만 있어서 그 옛날에는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가엘리오는 그래서 아인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 눈이 푸르던 시절에, 바다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 대체로 이런 약속은 사망의 징조가 되지 - 한 번도 바다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억울해서 고집을 부렸다고, 술주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꽉 메인 목소리로 혼탁한 의식 속에서 얘기했다. 가엘리오가 말하고 싶은 게 어떤 것인지 맥길리스는 아주 잘 알았지만 그의 직업은 신부가 아니었다. 어설프게 상대의 고해성사를 들어줄 이유는 없었고 그가 다른 남자의 얘길 하는 건 질색이라 입을 틀어 막았었다. 가엘리오는 아마 그 사실들을 잊었을 것이다.
맥길리스로서는 도무지 저 남자의 눈이 푸르던 시절 같은 건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맥길리스는 그들이 같이한 시간에 끼어들 수 없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시간을 돌이키는 마법은 없으니 현재에 충실하게, 맥길리스는 지금의 가엘리오를 강탈하면 그만이었다. 맥길리스는 희미하게 웃고는 아인의 눈 앞에서 매몰차게 문을 닫았다.
"가엘리오."
귀찮은 건 내쫓았고, 다음은 이게 문제인데.
맥길리스는 제 침대에 내려놓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안녕, 가엘리오? 이, 한심한, 멍청이, 머저리 씨? 맥길리스가 중얼거리며 이마를 툭툭 쳐도 반응은 없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 척척하게 들러붙은 앞머리를 넘겨주면 준수하고 날렵한 얼굴이 드러난다. 그렇다고는 해도 맥길리스의 억센 턱뼈나 광대, 이마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가엘리오는 눈을 뜨고 있으면 기가 막히게 표정이 많은 남자였다. 단순하게 시간을 물어도 열여덟 가지의 각기 다른 억양과 인사말을 건넬 줄 알았고, 가만 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을 정도로 표정이 다채로운 데다 아이들에게 해주면 좋아할 이야기를 오천 가지쯤 갖고 있었다. 아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주제에 고아원 봉사 활동은 꼬박꼬박 나가질 않나 귀찮다고 하면서도 사람 접대는 왜 이렇게 잘 하는지. 그러고 싶지 않으면 일을 안 하면 될 텐데, 쉬지도 않고 일은 또 열심히 하고, 꼭 하는 일마다 영업부에, 이번 직장은 혈액관리본부와 연결돼서 유통이 뭐가 어쨌다나.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혈액팩 운송 담당자가 사실은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어떤 기분일까.
맥길리스는 꼼짝 없이 굳어버린 남자를 보며 날짜를 더듬어 본다 진작 한 달이 지났다. 애원하고 매달리는 얼굴이 좋아 일부러 모른 척 내버려뒀지만 가엘리오가 매달리느니 그냥 고통을 감내하리라는 사실을 맥길리스는 간과하고 있었다. 가엘리오는 명확하게 흡혈귀나 뱀파이어나 그런 전형적인 어반판타지에 나오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냥 죽지 않고, 늙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피를 마시면 살고……, '시종'을 부리지. 본인도 명확하게는 모른다고 했다. 신의 저주라고도 했다가 악마의 축복이라고도 했고, 어찌됐든 가엘리오 본인의 과오였으며 누구를 탓할 생각도 없고, 그래서 고통은 오로지 본인의 몫이어야 하지만 이상하게 꼬여버렸다고 했다.
'피를 안 먹으면 어떻게 돼요?'
맥길리스가 보고 있던 책을 덮고 물었을 때 가엘리오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는 키우기로 한 이유는 맥길리스가 불쌍해서였지 비밀을 공유할 상대를 원해서는 아니었다. 한 번은 얘기해야 된다는 사실과 설명하기 까다롭다는 버거움 속에서 가엘리오는 적당히 타협을 본 모양이었다.
'그냥 잠들어.'
책상 위에 언제나 놓여있는 바늘을 하나 꺼내들고 맥길리스는 제 검지손가락 마디 끝을 후비듯이 쿡 찔렀다. 이내 동그랗게 올라오는 붉은 핏방울이 커질 때까지 손가락을 잘 누르고 맥길리스는 주문을 외운다. 잠자는 공주를 깨우는 선택 받은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저 아인 달튼도 이 역할은 맡을 수 없다.
"일어나, 가엘리오."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 얇은 입술을 벌려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손가락으로 가지런한 이를 훑었다가 혀를 문지르면 축 늘어져 있던 석상 같던 몸뚱이가 움찔움찔하더니 맥길리스의 손가락에 엉겨 붙는다. 부드럽게 혀가 움직이고, 입이 움직이고, 늘어져 있던 팔이 맥길리스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는다. 손가락을 핥고 빨다가 이내 막힐 작은 바늘구멍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로 손가락을 콱 씹는다. 매번 대비하고는 있어도 윽 소리가 나게 아프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사라질 상처에, 곧 마비되는 데다, 야릇한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온다.
간신히 눈은 떴군.
어딘지 실험용 모르모트를 보는 시선으로 맥길리스는 그를 내려다본다. 영원히 잠들어 있을 것 같았던 가엘리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열리고, 평소엔 동그랗던 동공은 세로로 길게 찢어져 좁혀 들어 있었다. 몇 번을 봐도 경이로운 장면이라, 가끔 맥길리스는 이게 저만이 부릴 수 있는 기적이나 능력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에. 그를 먹는 건 자신이었다. 먹여서 살찌우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핥아 먹는다. 지금까지 키워준 은혜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건 가엘리오가 모르기만 하면 그만이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손가락을 열성적으로 핥고 있는 가엘리오의 입가에서 흐르는 타액을 맥길리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잘 닦아주었다. 꼭 이 때만큼은 식사예절이 나쁘다.
"하나 더?"
흐릿한 눈동자가 끄덕인다.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맥길리스의 두 번째 손가락도 씹어 열광적으로 손가락을 핥고 빨았다. 언제나 단정하고 말이 많고 시끄럽고, 그렇지만 가끔 너무 조용하고, 맥길리스가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모르는 곳으로 멀리 도망치는 남자가 여기 있다. 완전히 순종적인 모양으로, 한 번도 그렇게 본 적 없는 황홀한 눈동자로 맥길리스에게 매달리며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간신히 파리하게 질렸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혈색이 돌기 시작한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의 옆에 앉아 손가락을 잡아 뺐다. 잘 물어 뜯고 있던 뼈다귀를 뺏긴 개처럼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정확히는 움직이는 맥길리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슬슬 맥길리스도 머리가 무거워진다. 가엘리오가 말하길, 이게 '배려'라고 했다.
'아플 거 아냐. 현기증 나고.'
그래서 통증을 쾌감으로 치환한다고? 악마인지 천사인지 신인지 뭐가 돼도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맥길리스는 헛웃음을 지었으나 팽팽하게 당겨오는 신경 앞에선 함부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 주었으니 감사하면 된다. 아인은 맥길리스에게 엄포를 놓았으나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방에 들어올 수도 없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알고, 그저 인간보다 몇 십 배는 좋은 청각으로 그렇게 경애해 마지 않는 특무소령의 교성이나 실컷 들으면 될 일이었다.
맥길리스는 먹이를 흔드는 것처럼 가엘리오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내비치다 천천히 제 목덜미로 가져다댔다. "잘 알고 있지, 가엘리오?" 반짝이는 눈과 마주친다. 벌써부터 열이 돌아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마주친 푸른 시선이 공허하게 흔들렸다. ―아니야. 괜찮아. 맥길리스는 어렴풋이 차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먹어도 좋아."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가엘리오는 맥길리스의 무릎 위로 올라타, 이윽고 손가락이 핏자국을 남긴 부분에 이를 박아 넣는다. 입술을 깨물 정도로 아찔한 고통이 올랐다가 이내 흉폭할 정도의 성욕이 되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제 것인지, 가엘리오의 것인지 맥길리스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나후시로 무나카타가 후시미 패는 얘기. 리퀘스트에 비해서는 폭력 수위는 낮습니다.
본편 이전, 셉터4 입단 직후. 사이드 블루에 등장하는 쿠스하라 타케루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만 저도 케이를 본 지 까마득해서 네타가 이것저것 섞여 있어요.
"실장."
아와시마 세리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서류를 보던 무나카타가 고개를 들어 말없이 묻는데도 아와시마는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나카타 레이시의 시각은 아주 광대하다. 그것이 왕의 이능인지 무나카타 레이시의 자질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취미가 오래 전부터 광막한 2000피스의 백지 퍼즐 맞추기임을 고려한다면 후자일 것 같았다. 그에겐 아마 아와시마가 이토록 오랜 시간 뜸을 들이는 이유도, 이 긴 망설임 끝에 나올 말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와시마가 굳이 말을 꺼낼 필요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와시마는 입에 박힌 껄끄러운 가시 같은 부하를 생각했다.
후시미는 오늘도 뺨에 흰 가제를 붙이고 왔다. 후시미 본인은 한사코 거절하고 있지만 - 정확히는 까고 있지만 - 언젠가 히다카는 가능하다면, 후시미를 붙잡고 옷을 전부 벗긴 다음 에어 파스를 뿌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역력해 보였다. 생활체육을 전공한 히다카는 후시미의 움직임만으로도 어깨와 등, 복부 어딘가에 타박상이 있을 거라고 100%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와시마는 그 모든 상처의 원인이 눈 앞의 남자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를 모른다. 물증도 없다. 왕의 변덕스러운 비위를 맞추는 건 본디 신하들의 도리였으나 그들의 왕이 가진 시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아와시마 세리는 그게 변덕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아와시마 군."
왕의 아량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아와시마의 기나긴 침묵과 그 이후에 나올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시미 군이 원하는 일입니다."
아와시마는 가볍게 목례하고 물러났다.
"아, 진짜 좀―, ……!"
후시미의 볼멘소리는 미처 문장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대신 커흡-, 신음과 함께 혀를 깨물었다. 날카로운 통증, 발작적으로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가 욱씬거렸지만 밭은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연일 얻어 터지는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사지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일어나세요, 후시미 군."
"아……, 후―, 후, 좋아…, 좋아요, 좋아요 실장."
혀가 찌릿했다. 침과 섞인 피를 바닥에 뱉어나면서 후시미는 검을 짚고 일어났다. 후시미 사루히코는 그를 부를 때 '실장'이라고 부르는 게 좋았다. 미코토 씨나 왕이나 뭐 그런 거창하고 친근감 있는 그런 거 말고 비즈니스적으로, 실장. 깔끔하고 좋잖아. 무딘 손 끝에서 차가운 샤벨의 감촉이 느껴진다. 두껍고 뜨거운 손이 아니다.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단단한 형태의 쇠로 된 검이다.
한 왕이 말했다. 이 손을 잡으라고. 다른 왕이 말했다. 이 검을 잡으라고.
죽기 전에 보일 주마등의 순서를 후시미는 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높은 천장과 샹들리에, 코가 간질간질해 재채기가 끊이지 않고, 일찌감치 나빠진 시력 탓에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흐린 원경으로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선 양친의 얼굴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파티장의 정경을 지나면 후시미가 한 때 매료되었던 부지런하고 평범한 일상의 움직임이 있었다.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것들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뭐, 불타는 세계, 미사키, 관자놀이에서 터지던 폭약의 희끗한 불꽃과, 미사키, 뜨거운 충격, 맞잡은 손에서부터 한 번 전신을 훑었던 열기, 미사키, 우리는 둘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고 나면 분명 그 장면일 것이다.
첫 인스톨레이션의 날. 검을 잡았을 때 놀랄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시미는 그게 좋았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상호 합의만 있다면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후시미에겐 안도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건 동시에 대체재가 생기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라―…….
후시미는 뽑지도 않은 검 끝이 턱 밑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을 간신히 피해 거리를 벌렸다. 모르긴 몰라도 무나카타 레이시는 몇 개의 무술에선 유단자쯤 될 것이다. 그는 검이 없어도 유연하고 강했다. 후시미보다 팔다리가 길어 근거리로 간다면 유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먹은 손속을 봐주지 않았다. 귀한 왕이 내주는 시간이니 아껴 쓰라는 말에, 후시미도 포기할 수가 없다. 후시미가 단 한 번이라도 무나카타의 얼굴에 칼을 들이밀 수 있다면 그걸로 이 지긋지긋한 훈련은 끝난다.
"한 가지만 물, 흡, 어, 봅시다, 실장."
"뭔가요, 후시미 군?"
"내가, 재밌는 소리를 들었는, 데"
딱 소리와 함께 무나카타의 검 손잡이가 관자놀이를 아슬아슬하게 치고 간다. 이건 위협이다. 말도 안 꺼냈는데 성질머리 더럽지, 진짜. 후시미는 이를 악물었다. 익숙한 단검은 금지 당했다. 그걸 안 들고 올 후시미가 아니지만 매번 허리와 소매, 종아리로 숨겨왔지만 무나카타는 기가 막히게 찾아내 탈탈 털어냈다. 후시미의 단검은 저 벽 구석에 처박혀있고 무기는 이름이 입에 붙지 않은 길고 아름다운 검 뿐이었다.
"당신, 이전에,도, 이렇게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며?"
깜박이는 눈꺼풀에 땀이 맺혀 후드득 떨어졌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집으로 등을 세게 얻어 맞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무릎이 무너진다. 무나카타도 예상치 못한 휘청임에 아슬아슬하게 상단으로 들어온 찌르기를 피했다. 바닥으로 처박힐 뻔한 후시미는 간신히 미끄러져 다음 공격을 피했다. 후시미도 그 이름을 잘 알았다. 쿠스하라 타케루의 얼굴은 보지 못해도 장례식은 보았다. 인사과 파일을 정리한 것도 후시미였다. 클랜즈맨은 인스톨레이션 된 순간 모든 감각이 배 이상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날아오는 총알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예민함은 오로지 왕에게만 주어진다. 쿠스하라 타케루는 검술이 발군이고 반사신경이 뛰어났으며 한 순간의 살기를, 총탄의 궤도를 알아챌 정도로 기척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 무나카타가 키우고 있던 소중한 조커였을 것이다.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 인재난에서 그만한 사람은 없겠지. 특무과에 들어와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탑이 될 지도 몰랐다. 특무과는 2인 1조라는 사실을 예전부터 지시해놓고 있었으면서 폐기된 조직개편안 속 쿠스하라 타케루는 혼자였다. 무나카타 레이시의 자만, 불운한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쿠스하라 타케루는 분명, 히다카의 말대로.
"내가 그 자식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장?"
눈이 마주쳤다. 안경은 예전에 집어던진 지 오래였지만 분명히 알았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이 쪽을 내려다보았다. 후시미는 막무가내로 샤벨을 집어던지고는 단검을 잡았다. 짧은 검은 익숙하게 후시미의 손에 잡혔다. 건방지게 옷도 갈아입지 않은 그의 왕의 코트, 목깃, 머리, 눈, 심장을 향해 던졌다. 스바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샤벨이 스바루라면, 저건 아틀라스, 알키오네, 엘렉트라, 마이아 쯤 되나 보지?
재수없게도 무나카타는 전부 막았지만 뺨을 스치고 간 단 하나만큼은 막지 못한 거 같았다. 후시미의 흐린 눈 대신, 떨어지는 소리가 이상한 금속음이 하나 들렸다.
"나한테 누구를 대신하라고 하지 마요, 실장.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밖에 못하니까."
쿠스하라 타케루, 어렸지. 스물 하나? 스물? 후시미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타인의 죽음은 후시미에게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나 남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히다카는 지금도 종종 그의 이름을 꺼낸다. 쿠스하라 타케루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그의 자리는 후시미의 자리일 것이다. 특무부의 분위기는 꽤 좋을지도 모른다. 도묘지의 리포트는 고쳐질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부처가 와도 안 되지. 히다카의 집중력은? 오히려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얼이 빠져서는 고토랑 순찰 나가면 두 시간쯤 늦게 들어올 수도 있고, 후세랑 있으면 만사에 진지해질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은 그것대로의 모양이 있겠지. 후시미는 오래됐지만 세련된 바를 생각했다. 따뜻한 곳이었다. 숨이 막히도록. 후시미는 도저히 그런 것들과는 궤를 같이 할 수 없었다. 그와 만나지 않은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독하게 안 맞을 테니까.
"…훈련은 이만 종료해도 되겠군요."
무나카타의 냉정한 패배선언이었다. 후시미는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애써 멀쩡한 척 서 있었다.
"안 내려갑니까?"
"잠깐, 진정 좀 하고, 요…."
무나카타는 후시미가 어떤 꼴인지, 왜 거기 서있는지 알면서도 비웃기라도 하듯 한참을 구경하더니 가버렸다. 긴장이 풀리니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사지 말단에 뼈가 붙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입에서는 쇠맛과 단맛이 함께 올라왔고, 목구멍은 뻑뻑했으며 등과 배가 욱신욱신 쑤셨다. 어디가 어떻게 된 건지 아까 얻어 맞은 등이 제일 통증이 심했다. 형광등이 눈부셔서 무심코 눈을 감았더니 의식이 저 너머로 까무룩하게 멀어질 것 같았다. 와, 미치겠네. 지금은 안되는데? 후시미는 어떻게든 멀어져가는 의식을 부여잡았지만 순간이었다. 저 형광등도 인생의 주마등에 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컴컴한 의식 너머로, 눈꺼풀 밑에 형광등의 잔상만을 남긴 채 모든 형체가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