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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7 [맥가엘] 새가 말했다 01
- 2017.04.13 낙서.
- 2017.03.28 [맥가엘] 리퀘박스 일곱 번째
- 2017.03.21 [맥가엘] 리퀘박스 여섯 번째
- 2017.03.12 [맥가엘] 리퀘박스 다섯 번째
글
[맥가엘] 새가 말했다 01
제목은 아무거나....
01.
Aripiprazole 10mg
02.
소년 가엘리오는 정원의 티테이블에 턱을 괴고 불퉁하게 앉아 있었다. 카르타가 맥길리스를 끌고 간 지 벌써 30분은 된 것 같았다. 두 사람 몫의 차는 다 식었고 가엘리오의 잔은 깨끗이 빈 지 오래였다. 뜨거웠던 스콘도 이제는 버터를 올려도 녹지 않을 지경이 되었고, 직전까지 정면으로 들이치던 햇빛은 어느새 옆으로 비껴나 커다란 가문비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었다. 태양의 직접적인 온기를 잃은 바람은 쌀쌀해서 가엘리오는 트레이 밑 칸에 놓여있던 담요를 꺼내고야 말았다. 그 담요는 아주 커서 두르면 어린애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쓸쓸하게 빈 양 옆의 의자를 번갈아 보다 가엘리오는 고개를 돌린다. 카르타와 맥길리스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다. 저 끝에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밑이다. 어제 맥길리스가 오지 않은 사이 토끼가 파놓은 굴을 발견했고 카르타는 아마 그것을 보여주려고 맥길리스가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그를 끌 고 간 것이다. 가엘리오의 눈앞에서.
가엘리오는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콘은 따뜻할 때 버터를 녹여 먹는 게 좋다. 찻잎은 오래 우러나면 떫은 맛이 강해지고 본래의 엷은 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오늘은 체리가 들어간 가향차였다. 그 엷고 부드러운 단 맛은 마시지 않아도 애저녁에 사라졌을 게 뻔했다. 바닥에서 춤추는 가문비나무 잎의 그림자가 증명하듯 테이블에 적당한 햇볕이 드는 시각도 이미 지나버렸다. 곧 있으면 명백하게 해는 지평선과 맞닿을 것이다.
오늘의 티타임은 명백하게 가엘리오가 주인이었고 그들은 손님이었다. 그런데 주인을 바람맞히고 손님들이 휑하니 사라져버리다니!
코끝이 알싸하게 매워지고 눈이 따뜻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게나 억울하면 같이 가서 놀면 될 텐데 가엘리오는 오기로 꿋꿋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가엘리오는 내일이면 아홉 살이었다. 아홉 살의 가엘리오 보드윈은 여덟 살과는 조금 달라야 했다. 매사에 침착하고, 아버지처럼 우아하게 대처하고 유능하게 상황을 이끌어나가야 하며 하찮고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호스트로서의 품위와 예의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어른스럽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싶었던 가엘리오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그의 짧은 다리는 의자 위에서 점점 난폭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전부 카르타 탓이다. 예의 없는 카르타! 남의 집에 놀러 와서 아는 체도 하지 않는 카르타 때문이다. 조심성 없는 카르타! 예쁜 치마가 좋다고 새 옷을 입고 와놓고 잔뜩 흙놀이를 한 다음 더럽혀졌다며 가엘리오 탓을 하는 카르타 때문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카르타! 가엘리오에게 이것저것 시켜놓고 원하는 걸 갖지 못하면 생떼를 부리는 카르타 때문이다.
가엘리오는 고개를 숙이고 매끄러운 담요의 끝자락을 움켜쥐어 조금 더 몸 위로 끌어당겼다. 예의 없고, 조심성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카르타, 가엘리오보다 세 살 많은 카르타는 맥길리스를 좋아한다. 가엘리오는 그것을 카르타보다 더 먼저 알았다. 카르타는 가엘리오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맥길리스에겐 친절했다. 그녀의 얼마 안되는 호의와 친절이 맥길리스에게 무시당하자 이내 본성을 드러냈지만 그래도 가엘리오에게 대하는 것보단 천 배쯤은 친절했다. 좋아한다는 건 아마 상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더 잘해주고 싶은 거고?
‘그렇지만 왜 카르타는 화를 냈다가 싫은 소리를 했다가 잘해주는 걸까.’
그것은 언제나 가엘리오의 수수께끼였다. 오늘도 그렇다. 아침부터 가엘리오의 방에 들이닥쳐서 맥길리스가 언제 올지,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면서도 카르타는 맥길리스는 예쁘지만 품행이 나쁘고, 거만하고, 그렇지만 책을 잘 읽고 머리가 좋다는 험담과 칭찬을 번갈아 했고, 한 시간이 지나도 맥길리스가 오지 않자 ? 당연하지! 맥길리스는 오후 두 시에 오겠다고 했는데 카르타가 온 건 오전 열 시였으니까! - 복도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보드윈 저택에 깔린 양탄자의 갯수를 세어볼 것처럼돌아다니던 카르타는 그것도 질렸는지 가엘리오가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 곰인형에게 못생겼다고 말한 다음 가엘리오가 조립 블록으로 만든 성이 예쁘지 않다고 멋대로 뜯어고치고 가엘리오의 머리가 길었다며 자르는 게 좋겠다고 가위를 들고 쫓아다녔다. 가엘리오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도망칠 즈음에야 맥길리스가 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타는 위협하듯 찰캉거리던 가위를 내던지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 이제야 오다니. 나를 기다리게 한 사람은 누구도 용서할 수 없어.”
카르타는 비장하게 일요일 아침 8시마다 방영되는 아동 드라마의 악당 같은 대사를 말하고는 거울을 보며 묶은 게 맘에 들지 않는다, 오늘은 입술색이 예쁘지 않은 것 같다, 가엘리오의 방에서 부산스럽게도 난리를 피우다가 새침하니 나갔다가, 또 혼자 나가긴 쑥스러웠는지 버럭 소리쳤다. “빨리 나와! 너 때문에 늦었잖아!”
가엘리오도 아직은 맥길리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게 부끄러웠으니 거절하지 않고 같이는 나갔다만 카르타는 맥길리스를 보자마자 대뜸 늦었다고 화를 내다가 잘 왔다고 환대하고 - 여긴 우리 집인데? 가엘리오는 입술을 삐죽였다 -, 앞뒤가 맞는 게 하나도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한텐 뭐든지 잘 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가엘리오는 카르타를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것이 카르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방식이다. 가엘리오는 코를 훌쩍이며 담요를 더욱 바짝 여몄다. 찬바람이 더욱 쓸쓸해졌다.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내버려둔 채 맥길리스의 손을 잡고 쌩하니 가버린 건 가엘리오를 따돌리려고 했던 게 아니다. 카르타는 나쁘지 않다. 그냥 가엘리오와 같이 발견했으니 가엘리오에겐 더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맥길리스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미처 가엘리오는 신경 쓰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애랑은 매일매일 같이 있고 싶고 대화도 많이 하고 싶고……, 이해는 하지만!
“나도 친해지고 싶은데에, …….”
가엘리오는 결국 어른스러워지기를 포기하고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자세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지금은 춥고, 아홉 살은 내일이니까 오늘까진 이래도 괜찮겠지. 옆머리를 배배 꼬며 테이블에 뺨을 납작 붙인 가엘리오는, 다시 일어나 다 식은 스콘을 입에 밀어 넣고 꼭꼭 씹은 다음, 도로 엎어졌다.
지금이라도 카르타를 쫓아가 차를 다시 내올테니 돌아오라고 할까. 그렇지만 흥이 식은 카르타는 테이블 밑에서 가엘리오의 정강이를 퍽퍽 차댈 게 분명했다. 맥길리스는, 평소처럼 무관심하게 앉아서 한마디도 하지 않겠지.
그것을 생각하니 가엘리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쓸쓸하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끝이 차갑고 텅 빈 기분이었다. 뜨거운 눈시울을 자꾸 찡긋거리고 있으면 테이블 모서리에 닿은 가슴팍에선 자꾸만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어제 저녁에 고르고 고른 색종이로 모양을 내고 꽃을 자르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를 붙인 생일 파티 초대장이었다. 맥길리스에게 줄 초대장에는 특별히 꽃과 나비에 더해서 푸른 깃털이 아름다운 새를 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채도 높은 선명한 코발트블루에 눈 주변과 아랫부리 안쪽이 진한 개나리색인 그 새를,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자주 보는 조류 도감에서 처음 보았다.
“예쁘다.”
맥길리스의 어깨 너머로 그가 읽는 책을 흘끔대던 가엘리오는 무심코 감탄사를 뱉고야 말았다. 얼마나 예쁘고 깊은 파란색이던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자연에서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훌륭하게 예쁜 파란색을 가진 커다란 새가 두꺼운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그려져 있었다. 가엘리오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않던 맥길리스는 그 소리에 힐끔 가엘리오를 돌아보았다. 볼썽사납게도, 가엘리오는 목을 쭉 빼고 그림을 보느라 냉담한 눈동자가 가만히 저를 오래도록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시선은 온통 그 커다란 새를 향해 있었다. 맥길리스의 얇고 마른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다 한참 후에 형태를 갖고 움직였다.
“보실래요?”
가엘리오는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돌려 맥길리스를 보았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맥길리스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긴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꺼풀이 한 번 약하게 움찔했다. 가엘리오는 처음엔 맥길리스가 제게 말을 했다는 것도 몰랐다. 한참을 두리번대고, 말없이 책을 옆으로 내밀어주는 맥길리스의 자세를 보고서야 가엘리오는 방금 전의 소리가 저를 향한 말이며, 제게 건네는 제안이었고 맥길리스가 제 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응!”
가엘리오는 꾸물꾸물 무릎으로 기어 맥길리스의 옆에 앉았다.
Hyacinth Macaw. 맥길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책에 쓰인 새의 이름을 읽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는 약 3.3피트. 다른 앵무보다 크고, 금강 앵무 중에서는 가장 큰 종이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읽어주는 내용보다 그의 목소리에, 옆에 닿는 체온들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맥길리스의 어깨는 따듯했고, 머리카락은 가엘리오의 코끝에서 금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는 조용하고 느리고 목울대 어딘가에서 아주 깊이 울려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되게 친한 것 같다.”
그 말은 아마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거란 사실을 가엘리오는 금세 깨닫는다. 낮은 목소리로 푸른 새에 대한 설명을 천천히 읽던 맥길리스가 침묵해, 바람이 잔디와 우거진 나뭇잎을 쓸어내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자 가엘리오는 까닭 없이 적막이 무서워 숫제 울 것 같았다.
“왜, 맥길리스. 계속 얘기해 줘.”
그러나 무엇이 그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소년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 사실 맥길리스 본인도 이유를 모르기에 가엘리오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평생 알 수 없었다 – 맥길리스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떠났다. 가엘리오의 곁에 남은 것은 푸르고 큰 앵무새의 이미지뿐이었다.
지금도 그 날과 비슷한 것 같았다. 사방은 온통 괴괴한 적막이었고 바람 소리 말고는 일절 들리지 않았으며 이 정원에는 푸른 새의 그림과 저만이 있었다. 소년 가엘리오는 약간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고 기본적으로 내향적이었고, 대신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그 이상으로 감정적으로 예민한 부분이 있어 내버려두면 어느새 찰나의 감정들을 잡아내 그대로 골몰하곤 했다. 보편적으로 이것은 내향적인 아이들의 특기였으나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 또한 그의 내향성에서 기인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그러한 사실들을 말하지 않았고 최대한 숨겼는데 그래서 가엘리오의 공상은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곤 했다.
지금이 그 찰나였고 순간이었다. 가엘리오의 공상이 이 정원에서 하늘로, 우주로, 진공의 블랙홀에서 의식의 까마득한 저변, 무의식의 세계로 밀려나가고 나서야 카르타와 맥길리스는 그늘지고 쌀쌀한 테이블 옆에 나타났다. 마실 수 없는 주인 잃은 차들은 버려진 지 오래였고 접시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치워졌으며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지면과 하늘 중간에 있게 된 시각이었다.
“일어나, 가엘리오.”
카르타는 무의식의 세계를 유랑하는 작은 항해자가 앉은 의자를 걷어찼다.
“꼴사납게 그게 뭐니. 침이나 흘리면서 자고.”
가엘리오는 반사적으로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카르타의 뒤에 있는 맥길리스의 시선이 가엘리오를 슥 스쳐간다. 손등에 묻어나는 것에 벌게지는 얼굴을 무시하고 가엘리오는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어디 갔다 왔어! 기다렸는데!”
침착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목소리였다.
“소리 지르지 마, 얘. 너 오늘 우리한테 줄 거 있지?”
가엘리오를 실컷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 주제에 카르타는 당당하기까지 했다. 고압적인 태도로 손을 내미는 카르타의 태도에 정신 차리고 보니 가엘리오는 이미 품에서 잔득 구겨진 초대장을 내밀고 있었다.
“좋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정원에서 할 건 다 한 거 같아.”
“아, 뭐야 정말! 나는 여기서 계속 기다렸는데! 네가 좋아하는 버터 스콘도 부탁했단 말이야!”
“어머. 그거 좋네. 가자, 가엘리오.”
그러고 카르타는 제 집인양 쏙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가엘리오는 망연하여 사라지는 카르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르타의 뒤를 쫓지도 않은 채 제 옆에 서 있는 맥길리스를 돌아보았다.
“무슨 얘기 했어?”
“아무것도.”
맥길리스는 앞머리를 만지작대며 답한다. 평소에는 말도 안 하는 주제에, 저렇게까지 말하면 카르타와 어떤 대화든 했다는 얘기였다. 무언가 분하고 억울해 가엘리오는 발을 쿵쿵 구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다가 멀찍이서 천천히 걸어오는 맥길리스를 기다리고는, 가엘리오는 또한 구깃구깃한 초대장을 내밀었다.
“내일이 내 생일이니까, 놀러 와!”
봉투에 커다랗게 그린 푸른 앵무새를 맥길리스가 알아보았을지 가엘리오는 잠깐 신경 쓰였으나 분한 게 더 컸다. 치졸한 소년의 마음은 그를 외면해 높고 긴 계단을 쪼르르 올라갔다.
⁕
찬바람을 맞은 탓에 몹시 피곤했는지 앉아서 짧고 깊은 낮잠을 잤는데도 가엘리오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그렇게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홉 살의 아침은 특별하지도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아홉 살이 되면 어른스러워지겠다고 결심한 가엘리오는 어쩌면 그 날은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도련님의 어울리지 않는 음울함을 보드윈의 사용인들은 생일을 맞아 한층 성숙해진 것이라 믿었다.
“아홉 살 생일 축하드려요, 도련님.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그런 건가요? 오늘따라 의젓하시네요.”
가엘리오는 이례적인 우울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내버려두고 혼자 돌아다니거나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평소 같은 일이었으나 어제의 일은 유난히 사무쳤다. 가엘리오는 옷을 챙겨 입고 선생님이 오실 방에 앉아 카르타와 맥길리스를 기다렸다. 생일파티라고 거창하게 초대장을 만들긴 했으나 대체로 그들은 가엘리오의 집에 모여 수업을 들었고 놀다 해가 지면 갔으니 그 날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시각에 그들이 도착했고 짧은 아침 인사 후, 오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기 전에 맥길리스가 한번 이 쪽을 쳐다보는 듯 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필기와 작문, 지리와 역사까지 끝나면 점심시간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면 이미 테이블 위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갓 구운 따뜻하고 쫄깃한 빵과 신선한 양상추에 달고 상큼한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 예쁘게 장식된 과일이 각자의 앞에 먹을 만큼 놓여 있었다. 따뜻한 스프부터 천천히 먹고 있으면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작게 잘려 나왔다. 한 입 크게 넣고 우물거리면서도 가엘리오는 별 맛을 느끼지 못 했다. 시선은 맞은편의 맥길리스에게 고정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맥길리스는 아주 느리게 빵을 썰어 입에 넣었지만 먹는 속도는 가엘리오보다도 빨랐다. 스테이크 조각을 조금씩 베어 물고 샐러드를 오래오래 씹는데도 그랬다. 예전엔 이보다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커다란 빵을 뭉텅뭉텅 떼어 빵가루 하나도 흘리지 않고 입에 넣었다. 그건 가엘리오에겐 마술 같은 일이었다. 따라하고 싶어도 가엘리오는 그 정도의 커다란 빵을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입에 넣는 건 힘들었고 곧 목이 메어서 우유 없이는 씹어 삼키기도 힘들었다. “맥길리스는 대단하구나. 빵을 엄청 빨리 먹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어린 말이었다. 맥길리스의 먹는 속도는 예전보다 훨씬 느려졌지만 여전히 맥길리스는 입가에 소스 하나 묻히지 않고 야무지게 커다란 덩어리를 입에 넣어 깔끔하게 먹을 줄 알았고 여전히 그것은 가엘리오에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스테이크 조각이 들어가고 사라진다. 하나씩 빠르게 맥길리스가 제 몫을 평정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가엘리오는 쉽게 배가 부르곤 했다.
“도련님, 입맛이 없으세요?”
오렌지주스를 가져 온 하녀가 묻는다. 가엘리오는 퍼뜩 시선을 돌렸으나 그 전에 맥길리스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가엘리오는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맥길리스의 접시도, 카르타의 것도 모두 비었는데 제 것만 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아니!”
가엘리오는 허겁지겁 급하게 포크로 찍어 고기를 욱여넣었다.
점심 식사가 모두 끝난 후에야 케이크가 나온다. 의례적인 생일 파티 노래는 매우 무성의했다. 카르타는 건성이었고 맥길리스는 어색하게 입만 뻥끗거렸다. 그 때까지도 가엘리오는 심드렁했다.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가 한 조각씩 앞에 놓여졌다. 너무 달아서 먹고 싶지 않아 포크를 뚱하게 바라보던 가엘리오의 눈앞에 바스락대는 포장지의 봉투가 내밀어지기 전까진 그랬다.
“자, 선물.”
“아 선물은 주네.”
“무슨 반응이 그래? 그럴 땐 고맙다고 말하는 거야. 너도 빨리.”
가엘리오의 심드렁한 반응에 칼같이 쏘아붙인 카르타가 맥길리스의 옆구리를 툭 친다. 맥길리스는 머뭇대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맥길리스?”
“생일, 축하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어서 가엘리오의 기분은 순식간에 다시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고마워!” 아까와는 딴판으로 즉각 나온 말에 카르타는 눈을 흘겼지만 가엘리오에겐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맥길리스의 포장지부터 뜯었다. 작은 판넬 위에 그려진 새였다.
“이게 뭐야? 직접 그린 거야?”
“왕관 앵무.”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충분했다. 뺨이 발그레하고 노란 왕관 같은 긴 앞머리가 서 있었다. 그게 꼭 맥길리스 같다고 생각했지만 가엘리오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예전의 일화를 비추어 보면 맥길리스와의 교우 관계에서 섣불리 말을 하는 건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일 선물 같은 건 한 번도 준비해 본 적이 없다고 맥길리스가 그러지 뭐니. 그렇게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들었어.”
“언제?”
“어제. 네가 꼴사납게 테이블에 침 흘리면서 자던 때 말이야.”
“그건 너네가 날 버리고 가서 그런 거잖아.”
“그럼 생일 선물 준비하는데 받을 사람 데려 가니?”
가엘리오는 그 말에 눈을 깜박였다. “어제 나 빼놓고 간 게 그거 때문이었어?” 가엘리오가 물었다. “그래. 아무거나 그림이라도 그리라고 했지. 내가 그렇게 시킨 거야.” 카르타가 어깨를 으쓱대며 답했다. 가엘리오의 반응이 맥길리스 뿐만 아니라 카르타에게도 고무적인 성취감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콧대가 높아진 카르타를 옆에 두고 가엘리오는 다시 맥길리스를 보았다. 맥길리스는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쑥스러워 하고 있구나! 가엘리오는 그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맥길리스가 준 판넬을 조심스레 내려두고 다음 선물 봉투를 뜯어 보았다. 카르타가 준 건 커다란 인형이었다.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가엘리오는 여전히 작은 인형을 안고 잔다. 그리고 커다랗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연보라색의 망아지 인형은 역시 가엘리오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가엘리오는 그 두 개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고마워 카르타. 고마워 맥길리스!”
도련님의 반나절짜리 의젓함은 선물 앞에서 사라졌다. 한껏 들뜬 가엘리오는 힘차게 포크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카르타도, 맥길리스도 포크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조그만 합창 후에 아이들은 전투적으로 케이크를 먹었다. 기세 좋게 시작한 것에 비해 가엘리오는 곧 질리기 시작했지만 케이크는 훌륭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가엘리오가 그것을 전부 맥길리스에게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맥길리스는 초콜릿 케이크를 아주 잘 먹었다. 예전에 보았던 감동적인 속도로,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가엘리오는 그게 좋았다. 그러니까 초콜릿 케이크와 맥길리스와 카르타와 레몬색의 새와 망아지 같은 게.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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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오랜만에 책상에 앉았으나 사실 무얼 해야할지는 모르는 낮이었다. 게으름은 학습했다. 시간은 언제나 자주, 빠르게 갔다. 그 정도면 모든 게 변하고도 남았다. 잊고 있던 고독을 채우는 법을 상기했다. 비는 시간이면 조용히 아무도 오지 않는 먼지 쌓인 도서관에 앉아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었다. 그 날들과 지금은 거의 다를 게 없다.
12피트의 높이를 지닌 벽은 전부 책장으로 가득했다. 기억 속에서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소년기의 책들은 지금 밖에 나돈다면 누군가는 장갑을 끼고 만질 것이다. 섬세한 유리관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가 펼쳐진 채로 전시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추억은 모두 바스러진다. 한때는 열렬한 애정이 있었다. 그에 못지 않은 슬픔도, 분노도, 이대로 녹아 사라지고 싶은 밤도 있었다. 우주는 아득하고, 까마득하고, 광대하며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속으로 뛰어들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자의식은 그 때마다 감상적인 무력감을 떨치고 일어났다. 그러고 나면 나는 느리고, 조용하며, 또한 빠르게 우주를 유영하는 기계장치 안에서 습관처럼 발 디딜 대지를 그렸다. 예전에는 그것이 너무 당연했기에, 인류는 우주까지 나아가도 결코 견고한 땅을 버리지 못해 그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으며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양이 돌고 돌아 지금 너와 내가 있었던 곳에 해가 비칠지 자주 상상했고 저 창백한 푸른 점 안에서 네가 이 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 옆에 내가 설 수 있을지도, 아주 가끔 생각했다.
빈 백지에 잉크가 번져 간다. 펜을 너무 오래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처음을 시작할 한 문장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사실은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무언가 필요했기에,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서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펜을 갖고 싶어."
쓸모도 없는 만년필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의미없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이었다. 사관학교 졸업 기념이었다. 명목은 그랬지만 나는 가끔 그에게 모든 걸 전부 주고 싶어서 머리가 어지러울 때가 있었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 한송이, 싱그러운 향기가 나는 오렌지, 매끄러운 윤기가 나는 사과, 바스락거리는 황금색 포장지의 초콜릿을 네게 주려고 내내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끝끝내 녹아버렸을 때 나는 이유없이 서러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의 그 알량한 애정들은 네게 영원히 미약하고 부질없으며 하찮을 것이란 사실을 이제는 안다. 거대한 절망 앞에서 그것들은 아주 가끔, 위로가 될 수는 있어도 평생 너를 구해주지는 못했겠지.
그러니까 내가 문득 너의 빈 가슴께의 포켓을 보며 펜을 갖고 싶다고 말한 건 전혀 의도치 않은 얘기였다. 나는 황급히 취소하려고 했으나 너는 활짝 웃으며 또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고?"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나는 너의 미소에는 너무 약했고, 웃음에는 더더욱 약해서 계절을 잘못 찾은 눈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럼, 종…이를."
그래서 너는 한 권의 노트를 사왔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욱 보기 힘든 질 좋은 종이였다. 잉크를 잔뜩 머금어도 번짐이 적었고 살짝만 그어도 펜촉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너는 내게 수많은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마치 교육열에 들뜬 부모 같았다. 우리 부모님도 그런 말을 한 적 없었는데. 나는 애매한 미소를 흘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과거의 내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네게 영광된 길, 광휘로운 미래, 가장자리가 금으로 장식된 붉은 융단이 깔려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의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은 나의 의도이기도 했으나 또한 명백한 실수였다. 종단면적인 연구는 필수불가결이란 사실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잠이 들었다 깨곤 했다. 게으름과 더불어 무력감과 나태를 학습한 덕택이었다. 하릴없이 쇠털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면 풍경이 바뀌곤 했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도시에 막 세워졌던 새 건물이 어느 새 관광팸플릿에 가장 오래된 건물로 실려있는 식이었다. 식물의 종은 변화했고 동물의 형체도 그러했다. 특징적인 뿔이 짧아지거나 얼룩의 무늬가 바뀌었고 주변은 더 추워지거나 더 더워지곤 했다. 그 사이에서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는 사실 땅에 발을 디디지 못해, 아주 예전에 죽어버린 것일까. '살아있다'는 건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철학적인 고민에 나는 뒤늦은 식욕을 느꼈다. 아무 봉지나 주워들고 열었다. 짭짤한 나초였다. 사둔 지 꽤 됐는지 제법 눅눅했고 유통기한을 확인하니 정말로 내일모레하고 있었다. 긴박함을 느낀 나는 냅킨을 집어들고 나초를 주워먹으며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시간은 유한하다. 무한하게 쓰고 있지만 언젠가는 끝이 오겠지.
그 전에 이 모든 이야기들을 쓰지 않으면 안됐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나의 기억들을 전부 붙잡아 명확하게 구체화하지 않으면 언젠간 오래된 나초처럼 바삭함을 잃거나 형태가 변한 동물의 뿔처럼 될 것이다. 이미 퇴색해버렸다 해도 더 빛바래 낡아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나는 기름기 묻은 손을 냅킨에 아무렇게나 닦고 펜을 쥐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말을 써야될지 모르겠어서.
"일어났어?"
눈을 뜨면 어느새 소파 위였다. 다정한 남자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나의 짧은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긴다. 그또한 오래된 버릇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쓸어넘길 정도의 길이가 아니었다. 세계가 한번 소멸되었다 생겨나고, 갓 태어난 아이가 한 줌 흙이 되고, 애정도 분노도 슬픔도 비통함도 원망도 모두 재의 세계로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결국 똑같은 시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 남자 뿐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였다.
"오늘은 뭐 했어?"
"글쎄."
"무언가 썼어?"
"…아니. 써도 너한테는 안 보여줘. 노트 열어 보지 마."
나는 아직도 잠이 깨지 않은 눈으로 무엇을 했는지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마치 죽은 사람 같지 않은가. 나는 낮에 하던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아주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넓은 평원에서 나는 한 번 대지 위에 잠들었었다. 그 때 이미 인간 된 자격을 상실했기에 어떤 대지에도 발 딛지 못하고 숨쉬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심코 일어나다가 굴러떨어질 뻔한 것을 상대방이 팔을 뻗어 끌어안아 간신히 화를 면한다.
"무리하지 마, 가엘리오."
그는 익숙하게 나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양치, 아직 안 했는데." 지금은 잠들고 싶지 않다는 미약한 저항은 금세 수그러든다. 내게도 그건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품 안에서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여전히 단단한 어깨와 단 냄새가 나는 목덜미였다. 내가 느낄 수 있는 단단함은 오로지 이것 뿐이었다. 사람이 견고한 땅 위에서만 살 수 있다면, 그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남자 옆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또 그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이 남자는 어느 땅 위에 발을 딛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숨이 막혀 온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의 대지가 될 수는 없었다. 나의 그 알량한 애정들은 네게 영원히 미약하고 부질없으며 하찮을 것이기에. 그것들은 아주 가끔, 위로가 될 수는 있어도 삶을 지탱할 근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지나간 시간들 모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고 나는 학습된 무력감으로 눈을 감는다.
노트, 열어보면 안 돼.
그것만이 내가 잠들기 전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너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는 네 말을 한번도 들은 적 없다는 걸 알면서. 어리석은, …가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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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리퀘박스 일곱 번째
리퀘박스 일곱 번째
'후회공 맥길리스 인생 2회차 실패해서 3회차 돌파하는 거 써주세요..가엘리오는 쉬운 남자가 아니니까'
49화 이전에 푼 썰에 막 섞이니까 엉망진창이 되어버려서 뭔가 정신산만하고 대충대충이지만 앞으로도 다른 설정 회귀물 리퀘박스에 두 개쯤 더 있어서 그냥 막 해보았습니다. 퀄리티가 들쭉날쭉 하는데 초안은 너무 오래돼서 까먹었고 이번화가 너무 많이 먹여주니 소화하기도 힘들고 마음이 급하네요.
그 아름답고 고결한 수정 같은 남자가 말하길, "부탁이야. 말하지 말아 줘", ……어찌나 아늑했는지 가끔 눈 먼 장님이 되고 싶었다. 과거는 다리를 얽매고 그를 한 번도 놓아준 적 없었다. 푸른 수정에 비치는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는 세상의 뒷면을 모르는 귀하게 자란 이였다. 잘 마른 양지와 푸른 잔디 위만 걸었던 반들한 구두가 하수도가 역류해 시궁쥐가 뛰노는 곳을 걷는 것은 저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제 과거를 털어놓고 싶은 심정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스칠 희미한 경멸, 당혹감, 어색함 같은 것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소문은 천 리를 가고 모든 일은 길면 꼬리가 잡힌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말은 실증된 격언이었다. 따라서 맥길리스 파리드는 그것을 모르는 척 했다.
그의 고결함, 결벽하기까지 한 완고한 성정은 결국 맥길리스 파리드를 용서하지 않았다. 기도를 꿰뚫은 총탄이 몸 속 어딘가에 박혀있을지 짐작해보려 했다.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 안되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뻗은 손이 매정하게 쳐졌을 때, 그래도 목덜미를 움켜쥔 그 손아귀의 힘에 안도하고 말았다. 끝까지 나를 놓지 않은 너에게 감사한다.
아. 가엘리오. 나는 네가 내 앞에 무릎 꿇기를 간절히 원했다. 내겐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은 것들이 그대에게 팔다리처럼 당연하게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절망의 깊이를 너는 알까. 나는 신에게 기도했다. 구원이 없던 시절부터 기도했다. 새벽의 문이 열리는 시각, 창으로 스미는 푸르스름한 빛을 통해 그의 존재를 느꼈다. 나에게도 권리를 달라고. 네가 가진 것 전부 내가 가질 수 있기를. 비참함, 슬픔, 고통, 체념, 낙망, 번민, 좌절,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대신 네가 갖기를.
그러면 내가,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숨이 멎었기 때문이다.
*
맥길리스가 가엘리오를 만난 건 열 살의 봄이었다. 차에서 막 내린 꼬마아이의 머리카락은 꾀죄죄한 옷차림과는 달리 단정했다. 순간 헛것을 보았나 싶을 정도로 어색해서 맥길리스는 눈을 비볐다. 태어날 때부터 실밥 하나 없는 매끄러운 실크셔츠를 입을 것 같은 얼굴인데 부드러운 살갗이 쓸릴 것 같은 싸구려 옷을 입고 있는 게 그렇게나 낯설었다. 낯선 환경에 조금은 겁 먹고 긴장한 수정 같은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다 맥길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먼 거리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울 것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 맥길리스는 순간 깨달았다.
저건 가엘리오다.
가엘리오 '파리드'였다. 운명이 그에게 가엘리오를 데려다 준 것이다. 완벽하게 소망하는 대로. 비틀린 욕망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눈물을 닦아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완벽한 반대의 위치라면 좀 더 거리낌 없이 한껏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차갑고 어둡고 컴컴한 파리드의 저택으로 끌려 들어가는 가엘리오를 보면서도 맥길리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거기서부터 잘못됐을까.
(중략)
카르타는 종종 "쟤, 널 좋아하는 거 아냐?" 하고 말했다. "글쎄." 좋아하는 거 아냐? 가 아니라 그냥 좋아한다. 가엘리오가 말하기 훨씬 전부터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맥길리스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책을 읽는 맥길리스를 가엘리오가 끊임없이 흘깃대고, 맥길리스가 한 번 읽었던 책들을 그대로 품에 넘치게 안고 종종걸음으로 쫓아오거나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할 때도 시야 한 구석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던 가엘리오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지.
처음엔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몰라서, 그 다음엔 어떻게 써야 될지 고민하느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예전보다 갑절은 노골적이고 몇 곱절은 다정한 그 시선은 모르는 척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나 과거를 기억하는 건 가엘리오 뿐만이 아니다. 맥길리스는 전부 알고 있었고 능란하게 제게 닿는 호의를 한껏 즐긴 다음 자비롭게 애정을 베풀 수 있었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가 까마득한 과거, 혹은 미래, 혹은 다른 세계를 기억한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기에 처음 만났을 때 가엘리오가 펑펑 울면서 맥길리스를 끌어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어울리지 않게 시치미를 뚝 떼고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
맥길리스가 그것들을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눈치였다. 그래서 맥길리스도 모른 척 했다. 그 편이 좋았다. 아는 척 하면 가엘리오는 다시 과거의 분노들을 생각할지도 몰랐다. 약간의 죄책감, 후회 같은 걸 곱씹으며 맥길리스 앞에 언제까지나 약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가엘리오가 좋았다.
그러면서도 불만스러운 건 가엘리오가 결코 그 이상을 맥길리스에게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맥길리스가 가엘리오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은총을 받은 듯 기뻐하면서도 먼저 손 내밀지는 않았다. 과거를 기억하는 가엘리오는 예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그의 대담함은 이 애정 어린 집안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패배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성정, 맥길리스는 한 때 가엘리오가 누렸던 모든 것 - 그의 방, 그의 가족, 그를 사랑했던 사용인들 - 을 마음껏 누리면서 생각했다.
맥길리스가 '보드윈'을 누리는 대신 가엘리오는 '파리드'의 대가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맥길리스라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엘리오."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맥길리스는 대신 호의와 애정 가득한 얼굴로 가엘리오를 보았다.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앞머리를 만지작대는 버릇이 꽤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유야 알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맥길리스'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맥길리스가 앞머리를 배배 꼬고 있으면 가엘리오는 어딘가 안도감을 느끼는 얼굴로 웃곤 했다.
그래. 이제는 다 지난 얘기다.
익숙한 사관학교의 기숙사에서 맥길리스는 방학 동안 저택에 다녀 온 가엘리오를 보며 죄책감을 덜었다. 이즈나리오 파리드는 명백한 소아성애자에 일관된 취향까지 있어서 금발에 여리여리한 팔을 가진 곱상한 아이들만을 탐했다. 그 취향에 금발도 아닌 가엘리오가 어떤 연유로 그의 후계자가 되었는지는 실로 의문이었으나 어쨌든 가엘리오는 이제 열일곱이었다. 예전 과거를 상기하면 - 물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으나 - 가엘리오는 진작 이즈나리오의 시선 밖에 났을 것이다. 아무리 과거를 기억해도 맥길리스는 어린아이였고, 무력했고, 그래서 가엘리오를 구할 수는 없었으니까, 가엘리오도 그랬잖아. 그랬겠지.
"집에서는 잘 쉬고 왔어?"
"응? 아, 아아. 너는, 아 그래. 여동생이 태어난다고 했지. 몇 달째야? 이름은 정했나?"
"알미리아래."
"예쁜 이름이네. 빨리 보고 싶다."
그에게 알미리아는 그저 여동생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가엘리오의 눈동자에 떠오른 애틋함에 맥길리스는 부끄럽게도, 질투해버리고 말았다. 카르타를 볼 때도 가엘리오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애틋함, 애절함, 연민과 사랑은 모두 제 것으로만 남았으면 했다.
아. 그런 사람 한 명 더 있었지.
맥길리스는 지금은 화성 어디엔가 소년으로 남아있을 그를 떠올렸다. 가엘리오가 임관한다면 아마 가장 먼저 그를 찾을 것이다. 임관한 시점에선 아직 아인 달튼은 사관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겠지만 보드윈이든 파리드든 세븐스타즈의 지위를 가진 이상, 그는 매년 입학하는 화성지부 사관생도의 명부를 볼 수 있고 아인 달튼이란 이름을 찾는 것도 시간 문제다. 그리고 그런 아인을 돕기 위해서는 지금은 착취 받는 소년들인 수염 달린 꼬맹이들과의 싸움도 막아야 한다. 가엘리오는 한 번 겪었던 미래를 바꾸고 싶어할 게 자명했다. 바알, 아그니카 카이에르, 그런 허황된 수단과 가엘리오는 거리가 멀지만 과연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지.
맥길리스는 한 번 더 머리를 꼬았다. 맥길리스는 이제 혁명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가엘리오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중략)
"너…, 알고, 있었어?"
셔츠 한 장으로 비에 젖은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핏기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입술을 애써 꽉 깨물며 가엘리오가 맥길리스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투명하게 젖어 달라붙은 직물 너머로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멍과 울혈들이 명백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 남자가, 아직도 가엘리오를 탐하고 있었다고? 머리가 띵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진작 그만뒀어야 하는 행위다. 가엘리오는 애저녁에 그 모든 학대에서 벗어났어야 옳았다. 그는 여전히 커다란 골격과 아름다운 보랏빛 머리카락과 잘 붙은 근육들을 갖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즈나리오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야만 했는데…….
"나를 봐, 맥길리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어질어질한 시야에서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시선과 마주친다.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엘리오는 한번도 그런 감정으로 맥길리스를 대한 적 없었다. 하다못해 그 마지막 최후의 순간조차도 가엘리오는 울었다.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번민에 몸을 태우며 그래도 사람은 똑바로 미래를 걸어야 하기에 가엘리오는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알고 있다고……."
가엘리오의 푸른 눈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빗물과 눈물이 섞여 얼굴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지금도 거부 당할 것 같았다. 맥길리스는 섣불리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알…아."
"즐거웠어? 내가 네 대신 고통스러워 해서?"
"아, 니야."
"모든 걸 알면서도 무시한 거라고?"
가엘리오는 여전히 결벽했다. 맥길리스의 지난 삶을 가엘리오가 똑같이 살았다면 그럴 수 없었다. 오물이 묻고 구겨지고 찢어져 아무리 다시 펴도 예전처럼 깨끗해질 수는 없는데, 가엘리오의 결벽은 지금까지 한번도 상처 입지 않았던 것처럼 견고하고 투명했으며, 그래서 지금, 삭아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나는 가엘리오."
"말해."
"너만 있으면 돼."
진심이었다. 이 세상은 사람 한 명이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맥길리스의 혁명이 그저 반역으로 끝났듯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이 거대하고 형체 모르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을 막을 수는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당장 원하는 것만을 하기에도 벅찬 삶이다. 맥길리스는 그래서 이 인생을 오로지 가엘리오를 사랑하기 위해 쓰기로 했고, 가엘리오가 저만을 사랑하길 원했다. 그렇게 만들었다. 맥길리스도 나름대로 애썼지만 이즈나리오에게서 착취 당하던 꼬마들까지 뭘 어쩌겠는가. 이즈나리오를 죽이라고? 물론 그렇게 하면 가엘리오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을 구할 수는 있었겠지. 그렇지만 이즈나리오를 죽인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될 공산이 컸다. 그건 말도 안 되지. 가엘리오를 만나기 위해 이 인생을 살고 있는데. 몇 년만 참으면 가엘리오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가엘리오가 그 정도 고통도 못 참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건 너무 안이한 변명인가.
맥길리스는 혼란스러웠다. 가엘리오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엄청났던 모양이다. 그는 맥길리스 뿐만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의 고통도 전부 대신하고 있었나. 그토록 타인과 자신의 구별이 확실한 주제에 어째서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 것일까. 예전의 가엘리오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가엘리오는 남과 어울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누군가를 쉽게 헐뜯거나 비난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두를 구원하고 싶다는 성스럽고 고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오만했다. 높은 곳에서, 때로는 맥길리스가 놀랄 정도로 냉담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함부로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가엘리오에겐 없었었다.
무엇이 어떻게 그를 바꾸어 놓은 것일까.
"나는, 이렇게 되어서 너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네가 가진 고통의 반도 몰랐다고 알았으니까 그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네가 행복하면, 누군가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사랑하고 그래서……."
"너를 위해서였어, 가엘리오."
맥길리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모르는 척 하면 행복해질 수 있었다. 정말로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엘리오에겐 납득되지 않겠지. 실제로 가엘리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분노는 여전히 명징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한 때 원했던 격렬한 감정은 지금에 와서는 가장 기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맥길리스는 체념하며 눈 감았다.
너무 어려워.
너무 어려워, 가엘리오. 너를 사랑하기만으로도 벅찬데 내가 다른 것들을 신경 써야 해?
억울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맥길리스가 눈을 감고 이유 없는 분을 삭이는 동안에도 가엘리오의 손엔 여전히 이즈나리오를 쏜 총이 쥐어져 있었다. 가엘리오가 자처해서 손 안의 애완견처럼 굴었는데도 여전히 다른 이를 착취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이즈나리오를 단죄한 수단이었다. 아직은 모르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이 비밀스러운 별장을, 가엘리오의 위치를, 너무 길들여져서 이제는 갈 곳 없는 아이들, 정확하게 미간에 총알이 박힌 이즈나리오 파리드의 시체를.
"아냐. 내가 잘못했지. 맞아. 나는 언제든지 네 고통을 반으로 나눌 수 있으면 했어. 그게 내가 믿는 사랑이었으니까."
"가엘리오?"
"네게는 그게 아니었을 뿐이고. 내가 멋대로 믿은 거야. 멋대로 기댔고 그래서 멋대로 배신 당했다고 느끼는 거지. 네가 내 고통을 나눌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안녕이야, 맥길리스.
이번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두 번째 안녕이라는 말. 목소리는 총성과 빗소리에 섞여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남은 것?
"가…엘리오?"
맥길리스의 앞에 남은 것은, 굳게 닫힌 눈의 얼굴 뿐이었다. 절대적인 거부였다. 눈물을 닦아줄 틈이 없었다.
(중략)
나는 지금 신에게 농락 당하고 있나?
맥길리스는 가엘리오를 흘깃대며 생각했다. 그에겐 그런 면도 있었다. 냉담과 경멸, 원래의 가엘리오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갈무리하는 데 능숙했고, 두 번째의 가엘리오는 그런 감정은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맥길리스를 사랑하고 미래를 다잡는 것만으로도 벅차 정신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 때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다. 무심하게 맥길리스를 스쳐가는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고 단지 투명했다. 이번에는 세븐스타즈의 누구도 아니었다. 세 번째의 맥길리스는 여전히 거짓말처럼 가엘리오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가엘리오는 파리드의 이름을 받지 않았다. 억지를 써서 여행을 핑계로 그렇게나 뒷골목을 찾아 헤맸는데, 그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가엘리오가 멀쩡하게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맥길리스는 그 때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으나 가엘리오의 성격에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보드윈의 은총이 없는 가엘리오는 분명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맥길리스는 또한 어지러웠다. 누구도 믿지 않는 가엘리오는 다른 사람이었다.
간절하게 원했었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비참함, 슬픔, 고통, 체념, 낙망, 번민, 좌절,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대신 갖기를.
그러면 내가 구해줄 수 있을 텐데.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아낌없이 사랑하고, 처음으로 너를 애정한 사람이 되어 영원히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로 자신은 그럴 수 있을까. 어떤 소리도 그에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가엘리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가엘리오는 맥길리스가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었고 실제로 귀찮아서 쳐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언젠가부터 체념했는지 멀리서 보기만 했지만 그조차 부담스러워 외면하는 게 대다수였다. 그래도 가엘리오는 한참을 바라보다 자리를 뜨곤 했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하는 게 이렇게나 터무니 없이 무서울 줄은 미처 몰랐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혼잡한 복도에서 약간 부딪힌 어깨에 일부러 말을 걸어보았으나 가엘리오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대로 뒤돌아서려는 가엘리오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의아함 섞인 시선이 겨우 여기에 닿았다. 맥길리스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입 열었다.
"나는, 맥길리스."
"알고…있는데, 그래서?"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으나 가엘리오는 그래도 성실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변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네 이름을 알고 싶어."
물론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맥길리스는 듣고 싶었다. 신의 농락이든 뭐든 좋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맥길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의향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했다. 차근차근, 제대로.
"…가엘리오."
이번에는 틀리지 않게 너를 사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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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리퀘박스 여섯 번째
리퀘박스 여섯 번째 : 관심받고싶어서 가엘리오한테 너만 알아둬, 곧 퇴직할 생각이야(혹은 사관학교시절로 자퇴선언) 폭탄선언하는 맥길리스 써주세요🙏
그 다음에 뭐 어떻게 하란 말이 없어서 장르는 제 맘대로.
시작은 아주 작은 생채기였다. 피가 난 줄도 몰라서 카르타가 작은 비명을 지르고서야 알았다. 네잎클로버를 찾던 가엘리오의 시선도 이 쪽을 향했다. 하늘에 흐린 구름이 가득 끼는 것처럼 가엘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별 거 아닙…ㄴ네." 반말과 존댓말 사이에서 혀를 깨물 뻔해 엉뚱하게 흐트러진 어미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정원에선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나뭇가지에 긁혔는지, 팔뚝에 조금씩 방울져 배어나오는 피 같은 건 혀로 몇 번 핥으면 그만인 것을 다들 한번도 다쳐보지 않은 것처럼 난리였다. 나는 습관처럼 혀를 대려는 것을 꾹 참았다. 이런 '불결'한 짓은 여기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멀뚱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카르타가 가엘리오를 다그쳤다. "너! 있잖아!" 주어가 없는 문장을 가엘리오는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주머니를 뒤져 잘 다려진 손수건을 꺼냈다. 엷은 푸른색에 자색실로 꼼꼼하게 테두리가 마감된 손수건 끝엔 필기 자수로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G. Bauduin. 물건에 이름을 새길 수 있는 건 소유가 약속된 자들의 오만이다. 작은 손가락이 내 팔뚝에 서툴게 매듭을 묶고 말했다.
"이따가 우리 집 가면 약 발라줄게. 많이 아파?"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쉰 가엘리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사실 말을 꺼내기 전엔 아예 몰랐고, 지금도 느낌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약간."
거짓말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말하고 나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 욱신거리고, 팔뚝에 매인 손수건의 감촉은 부드럽고, 어설프게 매듭진 손수건의 끝을 가엘리오가 눈치채지 못하게 잡아 당겼다. 너무 꽉 매여 눌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 정도가 좋았다.
*
"대체 왜 그러지?"
"글쎄."
가엘리오는 예전보다 훨씬 붕대를 잘 매게 되었다. 필수 이수 과목인 보건이 도움이 되었을까. 환부를 깨끗이 소독하고 시트를 붙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이조차 못했다. 보드윈의 하녀들이 만류하는데도 기어이 본인이 하겠다며 커다란 응급상자를 받아 들고 삐뚤빼뚤하게 가위질을 했다. 깔끔하게 펴지도, 붙이지도 못해 몇 번이나 떼었다 붙였다 하는 바람에 접착력을 잃은 시트가 손등 위에 너덜너덜하게 얹혀진 것을 가엘리오는 미안함과 뿌듯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나를 보곤 했다.
그렇게 보는 가엘리오는 보상을 바라는 개인 동시에 그 지루하고 쓸데없던 시간을 인내했던 나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도 보였다. "고마워." 하고 한 마디 하면 가엘리오는 세상 제일 좋은 어려운 일을 해낸 꼬마처럼 웃었다. 내 손가락 하나에 누군가가 달려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관계의 우위,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가진 권력이었다. 그 땐 미처 몰랐지만 그 기분은 정의하고 나면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희열이었다.
가엘리오는 변덕스럽게 다채로운 카레이도스코프처럼 눈을 가져다 대고 약간만 각도를 바꿔도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다른 곳을 향해 있던 무표정한 얼굴이 말을 걸면 웃고, 비꼬면 화를 내고, 칭찬하면 웃고, 내가 상처 입으면 인상을 찡그리며 아픈 표정을 짓는다. 이상한 일이다. 정작 본인은 한번도 상처 입은 적 없으면서 나의 고통엔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황홀하게 아름다웠으나 비극이 희극보다 감명 깊듯, 슬프게도, 가엘리오의 분노와 슬픔은 그의 기쁨보다 내게 훨씬 감명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에게 주기는 쉽지 않다.
이 때를 빌어 말하건대, 가엘리오 보드윈은 한번도 상처 입은 적 없다. 물리적인 상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의 고귀한 자긍심과 오만한 선의나 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엘리오 보드윈은 완전무결했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는 신의 아이라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눈동자, 우월한 혈통, 건장한 신체. 키가 작고 부드럽고, 때로 유약해 보이던 얼굴은 성장하며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선을 갖고 있었지만 시선은 나날이 깊어졌고 억세지는 턱선 같은 게 눈에 띄었다. 트레이드 마크 같은 엷은 보랏빛, 밝은 빛에선 투명하게 엷은 푸른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어린 시절처럼 언밸런스한 단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약간 처진 눈꼬리는 얼핏 냉정해보이는 그의 얼굴을 꽤나 붙임성 있고 부드럽고 때로는 어울리지 않게 귀엽고 여려 보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 그는 과연 태어나서 이미 저승의 강물에 몸을 담그고 나온 신의 아들인 것인가.
그렇다면 상처 입는 건 나여야만 했다. 물론 상처 입는 것은 쉽다. 그에게는 나의 ―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 약간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실로 가시적인, 육체적인 고통이면 되었다. 고의라는 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긁어낸다. 도구는 어느 것이라도 좋다. 종이책의 단면, 낡은 건물의 거친 벽돌벽, 부서진 유리의 끝. 가엘리오는 그러면 놀란 얼굴로 내게 와서 화를 내고, 내게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고통들을 마치 제 살이 파이기라도 한 양 아파한다. 그는 나의 잦은, 자잘한 부상들에 놀라고, "너는 왜 이런 일에만 부주의한 거야?", 의아해 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의도된 일이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앞에서 기꺼이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다.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을 굳건한 신체가 내 앞에서는 스스럼없이 낮아지고 나는 그러면 어떤 포만감을 느끼면서 너의 숙인 뒤통수를 바라본다.
"사관학교를 그만둘까 해."
"뭐?"
화들짝 놀라 갑자기 고개를 드는 작은 머리에 턱이 부딪혔다. 순간 혀를 깨물 뻔 했다. "우왓, 괜찮아?" 다급하게 얼굴에 손이 닿는다. 마디진 손가락, 예전보다 훨씬 억세고 커진 강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턱, 아랫입술 끝을 문지른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가엘리오." 내가 황급히 그의 손을 쳐내면 가엘리오는 '아.'하고 눈을 크게 뜨더니 "미안." 짧게 사과하고는 묻는다.
"하지만 그만둔다니 무슨 소리야?"
"글쎄……. …아직 고민만 하고 있으니까."
앞머리를 만지작대며 나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맘에도 없는 헛소리였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어떻게 구성되어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실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세븐스타즈는 걀라르호른, 세계의 균형을 지킬 군인만을 배출하기 위한 가문이었다. 게다가 첩의 자식 - 사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지만 - 인 내가 '파리드'의 이름을 갖고 다른 선택이 가능할 거라고 가엘리오는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가엘리오는 정말 믿고 있는 것 같았다. 5일 후에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상하게 절망한 표정이었다. 가엘리오는. 내가 그것을 곁눈질하여 보고 있으면 가엘리오는 자기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아 내 쪽으로 상체를 굽혔다.
"왜? 뭔가 문제가 있어? 혹시 뭔가……."
가엘리오는 수정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적절한 말을 찾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선 어떤 단어들이 떠돌고 있을까. 집단따돌림이라든가 괴롭힘이라든가 그런 저열하고 수준 낮은, 내 출신 때문에 익히 있어왔던 소문들, 그리고 으레 붙어올 행위들이 그려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내게 직접 말하면 내가 자존심 상해 할 거라고? 그의 생각들이 손에 잡힐 듯 투명하고 내 신분을 가장 신경 쓰는 건 역시 가엘리오라고 생각하면 나는 또 빈정이 상해버리고 만다. 대등한 척 하지만 내가 그러하듯, 그는 그대로 이 관계에서 제가 우위라고 생각하나 보다. 나와 다른 건, 그는 의도하지 않아도 언제나 누군가의 우위에 있었으니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숨쉬는 것보다 당연하다는 점이다.
"아냐, 잊어줘 가엘리오. 농담이었어."
아예 몸을 돌려버리는 나의 냉담한 대응에 가엘리오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허우적대다 "어, 어…." 석연찮게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이제 보지 않고도 그의 눈동자에 드리운 수심의 색과 형태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색이지. 의미 없이 펜을 달각거리며 나는 내 등 뒤로 와 닿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나의 웃는 얼굴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고뇌를 대신 떠안을 것이다.
그리고 실로 그러했다.
그는 나의 말도 안되는 말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양인지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언제 어디서나 정신 차리고 보면 가엘리오의 시선이 내게 닿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말을 걸고, 혹은 내가 말을 걸면 심각한 표정을 하다가도 억지로 웃는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들보다도 진지한 감정, 걱정에 나는 좀 더 들뜨기 시작했다.
"추수감사절 휴일에 둘이 어디 가지 않을래?"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간절하게 가엘리오는 내게 묻는다. 그것은 물음이라기보단 간청이나 애원에 가까웠다. 나는 잠시 고민해 본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나의 망설임이 길어질 수록 가엘리오가 초조해하는 시간도 길어진다. 입 안에서 초콜릿을 녹여 먹는 것처럼 진득한 단맛이 배어 나온다.
"네가 싫으면"
"아니. 그래 좋아."
"정말?"
그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신 있게 말한다. "즐거운 일이 될 거야." 뒤에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네 마음을 어지럽히는 걱정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경의를 담아 조소했다.
*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와는 전혀 다른, 산 중턱에 위치한 보드윈의 겨울 별장이었다. "지금은 겨울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경치도 좋거든." 가엘리오는 나의 눈치를 본다. 위치가 위치다 보니 일부러 내버려 둔 포장되지 않은 도로의 거친 단면이 혹여 내 기분을 거스를까 걱정하는 것이다. 아직은 미숙한 그의 운전실력도 한 몫 했다. 엑셀을 밟을 때마다 거칠게 올라가는 배기음을 들으면서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 보았다. 가엘리오는 전전긍긍하며 좋은 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곳임은 알 수 있었다. 울창한 침엽수림에 상쾌한 공기였다. 저 먼 곳에서는 험준한 산맥과는 동떨어진 너른 평원이었다. 아기자기한 지붕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였다. 밤이 되면 별이 닿을 것처럼 보여. 우리는 그 별의 실체를 알고 있다. 뭉쳐진 먼지 내부가 타오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토록 멀어 보이는 투명하게 흰 달이 사실은 회색의 먼지가 뒤덮인 돌덩이인 것도 알고 있고 우리는 그 위에도 기지를 지어 놓았다. 그 모든 것을 실제로 보기까지 했으면서도 가엘리오는 여전히 별에 대한 동경과 그것이 갖고 있는 낭만적인 함의들을 버리지 않았다.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착했어."
감속과 주차는 성공적이었다. 브레이크를 걸고 시동을 끌 때 가엘리오의 바짝 서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꽤나 신사답게 먼저 내려 나의 문을 내려주고 짐을 꺼내 안으로 옮긴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인들이 없었다. 사람이 사는 집은 아니다 보니 실내는 어딘지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감돌았다. 가엘리오는 애써 그것들을 모르는 척 한다. 게다가 즐거운 일이 될 거라던 가엘리오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날씨는 흐렸다.
"이래서야 저녁에 별 구경은 전혀 못 하겠는 걸."
"……."
"내일 낚시도 불가능할지 몰라."
가엘리오가 끙끙대며 짐을 옮기고 불을 켠다, 난방을 올린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창밖의 호수를 보았다. 저녁엔 별을 보고 다음날엔 낚시를 하고 산책이나 하자던 가엘리오의 멋진 계획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엘리오는 내심 걱정하고 있던 불안들이 내 입에서 나오자 맘에 안드는지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가 어쩔 수 없이 체념해버리고 만다.
"그러게."
"일단 일기예보에선 잠깐 내리는 비라고 했으니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빌어야겠어."
"으응."
"그래서 이젠 뭘 할래, 가엘리오?"
나는 모르는 척 그에게 묻는다. 철저하게 모든 결정을 가엘리오에게 떠넘기는 말이었다. 가엘리오는 대체로 모든 결정을 내게 맡겼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는 몹시 약했다.
"너는 일단 TV라도 보고 있지 그래?"
"너는?"
"나는 저녁을 해야겠지?"
"저녁? 네가?"
"응. 데우기만 하면 되지만 약간 조리가 필요한 것도 있으니까."
가엘리오는 자랑스럽게 밑에 내려둔 아이스박스를 탕탕 치며 말한다. 어쩐지 짐이 많더라니 식재료가 아니라 이미 완제품이라 더 부피가 컸던 모양이다. 하긴. 이 도련님이 요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약간의 의아함과 흥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나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줘, 맥길리스."
방금 전까지의 낙담은 사라지고 쾌활하게 웃는 얼굴로 가엘리오는 말한다. 그의 그늘이 너무나 쉽게 걷히는 것을 보며 외려 내가 낙담하고 말아 버린다. 그는 정말로 완전하다.
TV에선 관심 없는 엔터테인먼트들만이 한창이었다. 공용어도 아닌 언어들로 방송되고 있어 이 프로가 토크쇼인지 개그프로그램인지도 알 수 없는데 무대에 선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 하니 화면 너머의 방청객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채널을 돌린다. 뉴스, 다큐멘터리, 혹은 드라마, 여전히 흥미 없는 것들만이었다. 어두워진 사위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창 밖에선 어느 새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엘리오?"
그러나 빗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는 가운데 실내는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소파에 뉘었던 몸을 느릿하게 움직여 부엌으로 향한다. 부엌엔 사람의 흔적이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열린 아이스박스 안엔 미처 정리되지 못한 재료들이 있었다. 식빵, 잘린 야채들, 과일, 내일 낚시하러 가면 먹게 되는 건 샌드위치인가? 냄비 안에는 포토푀가 끓고 있었고 버터에 예쁘게 구운 감자는 어느새 식어 희게 뜬 기름이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워 하며 낯선 집 안의 곳곳을 뒤진다. 2층, 다락방, 화장실, 거실, 문 뒤, 옷장 안, 탁자 밑까지 둘러보는데도 가엘리오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부엌을 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없었다. 가엘리오가, 어디에도.
다급하게 현관문을 열자마자 빗방울이 거세게 얼굴을 때렸다. 우산을 찾아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산의 해는 가뜩이나 빨리 지는 데다 이미 어둑해지고 비에 젖어 미끄러지는 산에선 우산도 소용이 없었다. 대신 신발장을 뒤져 커다란 랜턴 하나를 찾았다. 초조함이 신물처럼 목을 타고 역류한다. 순식간에 머리와 옷이 젖어가는데도 이상하게 목만은 바짝 말랐다.
"가엘리오!"
차는 있었다. 그는 어디 갈 생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여기 방문한 것도 아니다. 산장 주변,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여전히 그의 흔적은 없었다. 흥취를 위한 벽난로에 던져 넣을 장작이라도 찾으러 간 걸까? 건물 뒤에 쌓인 장작더미들을 보니 그건 아니다. 차로 왔던 큰길을 따라 500m쯤 걷다가 보이는 게 우리가 타고 온 차의 바퀴자국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돌아왔다. 관찰력이 떨어졌다. 나는 분명하게도, 당황하고 있었다. 가엘리오는 어디 갔지? 그의 부재가 어쩐지 나를 심히 공포스럽게 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불안이 내 안에서 세를 불리고 있었다. 비구름만큼이나 무겁고 흐리며 형체가 없었다. 특정 짓지 못하는 것들이야말로 사람을 공포스럽게 만든다. 악마의 계약, 신의 분노, 악귀, 원혼, 비가시적인 무언가들이 그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엘리오 보드윈 또한 그러한가? 그는 보이지 않아서 공포가 되는가? 알 수 없었다. 흠뻑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나는 침착하려 노력했다. 심장이 혀 밑에서 뛰는 것 같았다. 발자국, 발자국을 찾아야 한다. 다시 원점으로, 산장으로 돌아와 바닥을 훑는다. 낙엽과 비와 진흙 사이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너의 흔적을 쫓았다. 몇 번이나 바닥에 붙을 것처럼 훑어 보면 있었다, 측면의 저 끝 비탈길로 향하는 걸음, 끝에서 미끄러진―
"가엘리오!"
10m쯤 되는 급경사의 비탈길이었다.
"아, 하하… 안녕, 맥길리스. 저녁, 많이 늦었지?"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가엘리오는 애써 웃으려 노력했다. 언제부터 밖에 있었던 거지?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이미 듬뿍 젖어 달라붙은 셔츠 색과 같았다. 움츠린 어깨를 어떻게든 펴보려고 가엘리오는 애쓰지만 이미 체온이 떨어져 긴장해 움츠러든 근육들은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혼날 것을 걱정하는 아이처럼 가엘리오의 얼굴엔 안도와 낭패감이 뒤범벅 되어 있었다.
"멍청이냐, 너는!"
생각 이상으로 크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노호성에 가까웠다. 놀란 것은 나와 가엘리오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엘리오는 서툰 변명을 하려다가 대신 손을 뻗었다.
"나 좀 부축해줄래? 미끄러져서 발목을 삐어 버렸어."
혼자서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비탈길을 비슷한 체격의 남자를 부축하고, 비가 잔뜩 쏟아지고 있는데 이미 해가 완벽하게 진 어둠 속에서 올라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의 고행이라 간신히 실내로 돌아왔을 땐 저녁 시간은 애저녁에 지나 있었다.
잔뜩 젖은 신발을 집어 던지고 일부러 소리를 죽이지 않은 채 쿵쾅대며 수건을 찾아내, 간신히 의자에 앉은 가엘리오에게 던졌다. 밝은 곳에서 보니 가엘리오는 엉망진창이었다. 머리카락은 잔뜩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흙투성이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다가도 어울리지 않게 잔뜩 움츠린 어깨를 보고 있자니 할 말이 사라진다. 가엘리오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어떻게든 빠르게 일을 수습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신발을 벗고, 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주 늦었지만 다시 완벽한 저녁을 차리는 그런 것들.
한참을 끙끙대며 가엘리오는 찬 빗속에서 얼어 곱은 손으로 신발끈을 풀었다.
"내가 할게, 가엘리오."
난처해하는 포정을 보면서도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발목을 본다. 생각 이상으로 심하게 삔 모양인지 가는 발목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으로 부어 있었고 열감도 심했다. 어설프게 스쳐 지나간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도 거기만 홧홧할 정도로 뜨거웠다. 살짝 손을 얹기만 했을 뿐인데도 가엘리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불멸자인 신의 아들에겐 단 한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그건 강에서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미가 붙잡고 있었다 발 뒤꿈치라고 했다. '뒤꿈치는 아니지만.' 나는 탄식과 고소가 섞인 잡생각을 내치며 묻는다.
"구급상자는?"
"TV 밑에."
"그냥 겹질린 정도인 게 확실해?"
"부러진 건 아니야."
가엘리오의 목소리는 어쩐지 남일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맥길리스에게 간혹 하던 '아프지 않아?'라는 말을 할 때의 가엘리오와도 괴리가 있었다. 무감했고 그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는 태연하다. 그는 난공불락의 성이고 영원히 무결할 것이다. 하. 이 얼마나, 완전하고, 오만한――!
"화났어?"
"내가 화 날 이유는 없어 가엘리오."
"배도 고플 테고, 비 오는데 쓸데없이 고생했고."
"……."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먼저 씻고 나오도록 해 모처럼 재밌게 놀자고 초대한 건데 외려 일을 불려서 미안해, 맥길리스."
"너는―,"
"응?"
고개를 들어 올리면 가엘리오의 푸른 눈과 마주친다. 그림자 하나 없는 맑은 눈동자다. 저도 모르게 그의 발목에 얹혀진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고통에 미간을 찡그리고, "맥길리스? 저기.",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엔 흐림이 없다. 그 얼굴이 흐려지는 것은 오로지 나를 볼 때뿐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기쁨, 기쁨? 혼효된 감정들이 갈아서 곤죽이 된 야채 주스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맥길리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하지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올려다보는 가엘리오의 시선에 평소와는 정반대의 위치가 되어 있었음을, 내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엘리오가 무어라 답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가엘리오의 시선은 여전히 이 곳으로 닿고 있을까? 그 눈동자는 어떤 색일지, 평소와는 달리 전혀 짐작 되지 않았다. 혹은, 내가 그를 보는 시선, 이.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어딘지 웃고 있는 혹은 당황해 하고 있는 눈을 하고 있는.
알 수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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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엘] 리퀘박스 다섯 번째
본편 전개는 동인질에 하등 도움이 안되니까 마음이 급하군요.
리퀘박스 다섯 번째, '어느날 눈떠보니 좀 멍청해진 맥길리스가 가엘리오 좋아하는게 보고시퍼요,,,'
그래서 맥길리스가 좀 멍청합니다.
가엘리오는 복도를 거의 뛰다시피 날았다. 뭔가 이상하지만 여긴 그런 표현도 된다. 우주니까. 뛰는 것보단 나는 게 빠르지만 속도를 내려면 그만큼의 작용이 필요하다. 아직 전투의 흥분이 다 가시지 않은 복도를 내달려 가엘리오는 전함 가장 구석진 곳에 도착했다. 영관급 장교들의 1인용 숙소 가장 끝은 의외로 구석지고 의외로 인적이 드물다.
"맥길리스가 의식을 차렸다면 바로 구속해서 끌고 가면 될 텐데 왜……."
"성격이 급해졌군."
"……."
러스탈의 가벼운 훈계에 가엘리오는 문을 열자마자 떠들어대던 입을 딱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머리에 잔뜩 열이 올라 지나치게 조바심 내고 있었다. 아직도 못 고친 걸까? 가엘리오는 마른 입술의 거스러미를 이로 질근댔다. 예전에는 쉽게 흥분해 가끔 앞뒤를 잊어버리고 골몰하곤 했다. 가엘리오가 낯선 전함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가장 먼저 주의하기 시작한 부분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가엘리오의 기억 가장 마지막에 있는 저 평야에서의 전투는 전투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조야했다. 냉정했더라면 비등하게는 싸울 수 있었겠지. 전투 중의 고양감이야말로 전투에 있어 가장 큰 적이라는 훈련교관의 말을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만 깨달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조했다. 그래서, 애쓰고 있었는데 방금은 전에 없이 무언가 초조해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어.」
그 간단한 문장이 가엘리오의 의식을 순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인양된 기체, 파일럿 의식 불명. 그렇게 만든 것은 가엘리오 본인이었고 그를 콕핏 안에서 끌어내는 것도 멀찍이나마 눈으로 확인했다. 눈에 띄는 직접적인 상처는 없었다. 제네바 조약에 의거해 그는 구금되기 이전에 적절한 의료 조치를 받기 위해 의료실도 이동되었고……. 자신은 그가 온전하기를 바랐던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가엘리오가 최대한 평정심을 가지려 애쓰며 뱉은 말에 러스탈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러스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침상이 보인다. 약간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뺀다면 평범하게 잠들어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을 보면 분명하게 숨도 쉬고 있다. 사지도 멀쩡해 보이고, 붕대나 거즈 같은 게 붙은 부분도 없다. 안도감에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엘리오는 다시 러스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맥길리스 파리드에게 죄를 묻기는 어려워 질 것 같다."
"…뭐?"
혹시 이대로 빈사 상태라는 건가? 가엘리오는 다시금 치미는 초조감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결과인가. 권력, 위력, 폭력, 그가 믿던 가치에 그대로 패배한 남자의 말로인가. 아득해지는 의식에 가엘리오는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 들 때까지 주먹을 꽉 쥐어 본다.
"아니,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게 맞겠군."
"본론은 빠를 수록 좋아, 에리온 공."
팔짱을 낀 가엘리오의 가시 돋친 말에 러스탈은 한 번 웃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처음엔 경미한 뇌진탕이라고 진단했지. 틀리지도 않았어. 뇌기능에도 별 이상은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Amnesia. 아무래도 그는 지난 과거를 통째로 잊어버린 것 같아. 죄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다면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지. 그의 인생 중 가장 현명한 선택이야."
러스탈은 침상에서 잠든 맥길리스와 서 있는 가엘리오를 번갈아 보았다. 설탕이 가라앉은 라벤더 시럽 같은 눈에 희미한 동요가 떠올랐다. 이전의 가엘리오 보드윈은 언제나 가벼웠고 미래를, 올바른 가치를 짊어지기엔 지금의 무게가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스탈은 그 시럽 같은 달콤함, 결코 오래 버티지 못할 그의 청렴결백함도 꽤 좋아했다. 현실이 아무리 혼란하고 척박하다 해도 한 명쯤은 그 순박하고 어리석기까지한 결벽한 의지를 관철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비록 친구를 죽이고, 저까지 죽일 뻔하고, 여동생을 농락한 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우애하고 동정하며 연민하는 가엘리오가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를 정식 재판에 회부하는 건 무리지. 일반 병실에 그냥 둘 수도 없어. 명백하게 그는 이 체제의 붕괴를 모사했다. 많은 장교들이 목숨을 잃었어. 혹시 모르지. 그에게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은 사람이 사적으로 그를 처단할 수도 있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어디까지지?"
"확실하지 않아. 여러가지 확인해 봤지. 이름은 무엇인지, 인적사항은 어떻게 되는지,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은 있는지. 인적사항과 교우관계에 대해선 훌륭하게 대답했다. 신병 인수자로 자네를 지목했지. 하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은 모호해. 어느 시점까지 기억이 없다면 어제의 날짜라도 대답해야 되는데 그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 몇 년 간의 기억은 아주 없고 생도시절과 임관 이후, 그 즈음에서 혼란하고 있어. 좀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뇌의 문제는 아니고 심적인 이유라는 것 같더군. 앞으로의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게 결론이야."
"1급 경호체제로 돌리고 지구로 이송해."
"아리안로드 함대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지구 본부는 그 쪽대로 지휘체계 및 반역에 참가한 장교들의 처우 관련 문제로 정신이 없네. 당분간은 여기에서 그를 책임져야 해."
"그…래서?"
가엘리오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소름이 돋는 팔목을 슬쩍 문지르며 물었다.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예감이 아니라 정황 근거로 도출된 가정이라는 쪽이 더 맞는 말이며 가엘리오 보드윈의 인지 추론 능력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자네가 그를 좀 지켜봐야겠어."
러스탈 에리온은 활짝 웃으며 가엘리오에게 새로운 직무를 부여했다.
…
*
가엘리오는 잠시 자신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객관적으로 자신은 남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전투 스킬을 가졌다. 공간 감각은 좋았다. 논리력은 살짝 떨어졌지만 그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절대적인 수치에선 모자람 없다. 파일럿은 기계와 시스템을 이해해야 하기에 그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은 있다. 예술은 문외한이지만 기계적으로 외운 탓에 아직도 파블로 피카소가 입체파라는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켰다는 건 알고 있었고 정확한 바이올린 보잉을 위해선 어깨를 움직이는 게 중요하단 것도 안다. 가구엔 인체공학이 필요하고 심적으로 편안한 공간배치를 위한 규칙이 있다. 그렇지만, 기억을 잃은 전 친우이자 현 원수를 다루… 아니, 돌보는 법은 모른다.
"왜 그래 가엘리오 어디 안 좋아? 기분 나빠? 왜?."
"그을쎄에."
너 때문인데. 전부 너 때문이지.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꾹 억누르며 가엘리오는 팔자에도 없는 보모 노릇을 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기억상실이란 말만 했지 성격이 바뀌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한 것 같은데. 가엘리오는 다시금 골머리를 싸맸다.
맥길리스가 깨어나자마자 보인 이상행동에 당장 러스탈에게 연락했지만 「그건 새로운 증상이군. 의료팀에 전달해 두지.」 하고 러스탈은 단박에 통신을 끊어버렸다. 가엘리오는 당장 쫓아 올라가 그에게 따지고 싶었으나 가엘리오가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날라치면 맥길리스가 옷자락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다.
"가지 마, 가엘리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꺼풀을 애처롭게 내리 깔고 조금만 있으면 눈물을 드리울 것 같은 우수에 찬 얼굴은 어느 화보에나 나올 듯 아름답다. 사관학교? 임관 직후? 다 헛소리다. 맥길리스는 막 태어났을 때도 우는 대신 근엄하게 '응애' 소리만 냈을 게 분명했다. 완전 사람이 바뀌었다고!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보낼 수 없다면 자신이 대신 가고 싶었다. 자신은 아발론에 갈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이 쪽이 아니었던가.
몇 안되는 사유물을 들고 방을 옮길 때까지만 해도 가엘리오는 이런 걸 걱정하지 않았다.
생도 시절과 임관 직후, 그 즈음의 맥길리스와 가엘리오는 막 우정을 쌓고 있었다. 그토록 오래 붙어있었으나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에 대해 아는 건 관찰을 통해 얻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맥길리스는 가엘리오가 몰랐던 사실을 조금씩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이상, 꿈꾸는 미래, 그는 단 맛을 좋아한다. 그를 위해서 가엘리오는 몇 종류의 가향차를 새로 샀다. 캐러멜이나 초콜릿이 첨가된 것들을 맥길리스는 좋아했다. 풍부한 크림이 들어간 시트 케이크, 생초콜릿을 녹여 만든 음료, 디저트를 잔뜩 알아봤다. 맥길리스는 의외로 스포츠를 좋아했고 그래서 종종 대련을 부탁했다. 펜싱이나 맨손 격투, 어느 쪽도 맥길리스는 능숙해서 가엘리오는 매번 패배의 쓴 맛을 보았지만 그것도 재밌었다. 예전처럼 억울하거나 위축되는 것보단 어쩔 수 없지, 하는 체념과 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더 컸다. 맥길리스가 졸업생 대표로 연설할 때 낯부끄럽지만 꽃다발도 준비했다. 화려한 생도 예장도 맥길리스에겐 모자랐다. 세상 모든 영예가 그의 머리에 관처럼 얹어져 있는 것 같았다. 대리석으로 깎은 듯 완벽하고 빈틈없는 맥길리스가 그에게만은 살짝 속내를 보여주는 것에, 그러한 자신의 위치가 그토록 만족스러웠다. 어리석을 정도의 친애였다. 한치의 의심도 없던 과거를 잘 연기할 수 있을까. 그가 내비치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철저하게 가엘리오를 기만하기 위한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대해야 될지,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속내를 까발리면 혹여나 그 생생한 증오를 보여줄까. 그렇다면 그 혐오를, 같은 공간 안에서 얼마나 받아낼 수 있을지.
가엘리오가 걱정하던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턱을 괴고 앉아 누워있는 맥길리스를 보고 있을 때, 결국은 때가 오고야 말았다. 이 지경이 된 지금까지 맥길리스는 여전히 가엘리오에게 어떤 감정들을 주고 있었다. 분노나 증오나 혐오가 아니었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과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들어올려졌다. 흰자위엔 핏줄이 터진 자국도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이 쪽으로 돌아왔다. 시력도 멀쩡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초록이 가엘리오를 응시한다. '안녕, 가엘리오.' 그는 의례적으로 그런 말을 하겠지.
"안녕, 가엘리오."
대사는 예상대로였으나 예상을 벗어난 건 그의 표정이었다. 봉오리 진 꽃이 눈 앞에서 만개하듯 맥길리스는 활짝 웃었다. 웃어? 그야 맥길리스는 언제나 미소 짓고 있었다. 적당히 예의 갖춘, 얇은 입술로 길게 호선을 그리면서 다정하게. 그러나 이건, 좀, 달랐다.
"눈을 떴더니 전혀 모르는 곳이라 놀랐어. 아깐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여긴 어디지? 머리는 왜 그래? 껌이라도 붙었었나? 그러게 조심 좀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니거든."
대체 날 뭘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어처구니 없어 코웃음 치는 사이 침상에서 일어난 맥길리스는 가엘리오의 머리에 손을 뻗는다. 방금 전과는 달리 한껏 침울해진 얼굴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애수 어린 시선으로, 가볍게 가엘리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맥길리스의 손길이 낯설었다.
"아깝게. 네 머리카락, 좋아했는데. 그래도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네. 아닌가, 어른이 된 건가?"
내 기억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단 얘기를 들었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가 있을 거라고. 맥길리스는 전에 없이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몇 살이지, 가엘리오? 간지러운 한숨이 코끝에 닿는다. 가엘리오가 몸을 뒤로 뺀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가엘리오의 머리에 닿던 손은 그대로 멈춰 허공에 떠 있었다.
기억을 잃으면 다 이렇게 되나?
가엘리오는 약간 신선한 느낌으로 맥길리스를 보고 있었다.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맥길리스는 전과 조금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생애 한번도 없었던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맥길리스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맥길리스는 꽉 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뭐?"
"왜 피해?"
"왜, 냐니, 그거야……." 그거야. 가엘리오는 말을 골랐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잖아."
지극히 사실적인 말이었다. 맥길리스는 한 번도 가엘리오에게 먼저 손 뻗은 적 없었다. 가엘리오도 말로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한 번도 맥길리스가 먼저 가엘리오를 향해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친구 사이에서 빈번한 스킨십이라는 것도 이상하지만 가끔 어깨를 짚거나 가볍게 두드리는 것도. 모든 것은 가엘리오의 착각이고 헛된 꿈이었다. "너는 나를 싫어하니까." 이 말은 가엘리오가 미처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튀어나왔다. 별안간 억울함이 치민 까닭이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맥길리스는 크게 뜬 눈으로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뻔뻔하긴. 그의 심신안정을 위해 말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후회했지만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속이려 하다니. 이왕 내뱉은 말 차라리 솔직하게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엘리오는 밀어붙였다.
"싫은 게 아니면, 그래―, 싫은 건 아니었겠지. 너는 나나 카르타를 장기말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니야."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잘해주었지. 감정은 논리와 이성을 이겨. 한 사람에 대한 존경, 애정, 우정, 신뢰. 너는 그 때부터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그것들을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주제에 존재는 인정하고, 이용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가엘리오." 맥길리스의 눈꼬리가 처졌다.
"솔직해져, 맥길리스. 아무 탓도 하지 않을게.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나는 여전히 너에게 화는 나지 않아. 그냥 조금 슬플 뿐이야. 진심을 얘기해 준다면―."
진심을 얘기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엘리오는 훨씬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그냥 그랬구나. 처음부터. 가엘리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었다. 맥길리스가 건네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점이, 가끔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아직도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자고 일어나면 익숙한 자기 방이고 제복을 입고 출근하면 어느 복도에서 맥길리스를 만나 인사하지 않을까 그런 헛생각을 하기도 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은 독이고 덫이고 족쇄였다.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할 다리를 붙들고 옥죄고 육체와 정신을 좀먹고 헐어버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나 맥길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맥길리스의 과장된 동작은 전에는 몰랐는데, 꽤 기이한 버릇이었다. 그는 잔뜩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 누구나 몰입할 정도로 호소력 있는 표정이었다. 얘는 연기를 했어야 했는데 -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야, 가엘리오. 나는 너를 사랑해."
극적인 무대에 극적인 연출. 가엘리오는 질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거짓말. 가엘리오가 그렇게 읊조리면 맥길리스는 숫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내 말을 믿지 않아? 그거야 네가 그럴 짓을 했으니까. 가엘리오는 그 사실이 슬펐다. 자신은 더 이상 맥길리스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맥길리스에게도 꽤 충격이었는지 내내 이 상태다. 가엘리오가 어디 가려고 하면 옷을 붙잡고, 어디 가냐고 묻고, 불안정한 환경과 의식이 맥길리스의 심층심리에 대체 어떤 영향을 미친 건지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가엘리오로서는 당최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맥길리스는 어미를 좇는 새끼오리처럼 가엘리오를 쫓아다녔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엘리오에게 의존했고 끊임없이 가엘리오에게 되뇌였다.
"사랑해. 이 말에 거짓은 없어."
(중략)
특별히 허가를 받아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함정 안에만, 그것도 남의 눈을 피해 있는 건 정신건강에 좋지 않아 - 사실 가엘리오가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 MS도 없이 우주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오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얌전히 슈츠를 챙겨입는 맥길리스는 예전과 같았다. 첫 항해에서 가엘리오는 맥길리스를 꼬드겨 몰래 이렇게 전함 밖으로 나왔었다. 무중력과 고요의 세계에서 단 둘만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로맨티스트가 아닌 가엘리오조차도 설레게 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아마 그것을 동경해서 대지를 벗어나 하늘로, 이 아득한 우주로 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이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맥길리스에게 손을 뻗는다. 그는 좀 놀란듯 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면서 가엘리오의 손을 잡았다. 가엘리오가 맥길리스의 손을 내내 거부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과거조차 잊어버린, 지금은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맥길리스'에게 지금까지 너무 가혹했던 걸까. 가엘리오는 과거의 맥길리스와는 별개로 그를 연민했다. 어쩌면 이건 맥길리스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가 냉정한 이성과 이상에 대한 의지로 져버리고 있었던 솔직한 진심.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믿기 힘들었지만.
제일 처음, 의료용 캡슐에서 눈을 떴을 때 지난 과거를 회상하면서 깨달았던 건 제가 그를 사랑했다는 점이었다. 그 열정, 맹목, 전부 사랑이었다. 그에게 가는 애정이 우정과 친애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란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알았다면 차라리 덜 고통스러웠을까.
지난 2년 동안 그런 수많은 가정들이 가엘리오의 머리를 스쳐가곤 했다. 맥길리스를 좀 더 자세히 알았다면, 그를 경계했더라면, 아니 그를 완전히 사랑했더라면, 우리가 연인이었다면― 아니 이 가정은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실현될 수 없지. 그러나 모든 가정, 후회는 실재가 되지 못한 것들이며 실재가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시간의 흐름은 한 방향이고 이것은 그 어떤 우주에서도 반대가 되지 않는 절대적 진리다.
가엘리오는 충동적으로 헬멧을 벗었다. 맥길리스가 놀란듯 허둥댄다. 이전의 맥길리스라면 전혀 그러지 않았겠지. 아마 조금은 놀란 눈으로, 그러나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야, 가엘리오.'
알아.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나중에 기억을 되찾은 맥길리스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기억한다 해도 가엘리오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지금은 지금이다. 간신히 지금의 그와 예전의 그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맥길리스는 여기 실재하고 있다. 저를 사랑하는 맥길리스가. 예전과는 별개로, 제게 사랑을 말하는 이를 그저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존귀한 사랑에 그가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랐다. 대기가 없는 우주에선 그 어떤 소리도 소리가 되지 못한다.
너, 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산소가 부족한 탓일까. 가엘리오는 흐려지는 시야로 생각했다.
사,
맥길리스가 헬멧을 벗었다.
랑했,
우주에서는 탄 고기 냄새가 난다고 한다. 달에서는 독특한 화약 냄새가, 혹자는 달큰한 라즈베리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그러나 가엘리오는 그 어느 것도 맡지 못했다. 지금 코끝으로 맡을 수 있는 건, 달작지근한 초콜릿 냄새, 이건 아까 맥길리스가 마신 캐러멜 가향차 냄새일까. 모르겠다. 숨이 벅차서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아주 짧은 순간에만 할 수 있는 키스였기에 가엘리오는 거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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