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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낙서.
오랜만에 책상에 앉았으나 사실 무얼 해야할지는 모르는 낮이었다. 게으름은 학습했다. 시간은 언제나 자주, 빠르게 갔다. 그 정도면 모든 게 변하고도 남았다. 잊고 있던 고독을 채우는 법을 상기했다. 비는 시간이면 조용히 아무도 오지 않는 먼지 쌓인 도서관에 앉아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었다. 그 날들과 지금은 거의 다를 게 없다.
12피트의 높이를 지닌 벽은 전부 책장으로 가득했다. 기억 속에서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소년기의 책들은 지금 밖에 나돈다면 누군가는 장갑을 끼고 만질 것이다. 섬세한 유리관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가 펼쳐진 채로 전시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추억은 모두 바스러진다. 한때는 열렬한 애정이 있었다. 그에 못지 않은 슬픔도, 분노도, 이대로 녹아 사라지고 싶은 밤도 있었다. 우주는 아득하고, 까마득하고, 광대하며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속으로 뛰어들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자의식은 그 때마다 감상적인 무력감을 떨치고 일어났다. 그러고 나면 나는 느리고, 조용하며, 또한 빠르게 우주를 유영하는 기계장치 안에서 습관처럼 발 디딜 대지를 그렸다. 예전에는 그것이 너무 당연했기에, 인류는 우주까지 나아가도 결코 견고한 땅을 버리지 못해 그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으며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양이 돌고 돌아 지금 너와 내가 있었던 곳에 해가 비칠지 자주 상상했고 저 창백한 푸른 점 안에서 네가 이 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 옆에 내가 설 수 있을지도, 아주 가끔 생각했다.
빈 백지에 잉크가 번져 간다. 펜을 너무 오래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처음을 시작할 한 문장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사실은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무언가 필요했기에,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서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펜을 갖고 싶어."
쓸모도 없는 만년필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의미없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이었다. 사관학교 졸업 기념이었다. 명목은 그랬지만 나는 가끔 그에게 모든 걸 전부 주고 싶어서 머리가 어지러울 때가 있었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 한송이, 싱그러운 향기가 나는 오렌지, 매끄러운 윤기가 나는 사과, 바스락거리는 황금색 포장지의 초콜릿을 네게 주려고 내내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끝끝내 녹아버렸을 때 나는 이유없이 서러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의 그 알량한 애정들은 네게 영원히 미약하고 부질없으며 하찮을 것이란 사실을 이제는 안다. 거대한 절망 앞에서 그것들은 아주 가끔, 위로가 될 수는 있어도 평생 너를 구해주지는 못했겠지.
그러니까 내가 문득 너의 빈 가슴께의 포켓을 보며 펜을 갖고 싶다고 말한 건 전혀 의도치 않은 얘기였다. 나는 황급히 취소하려고 했으나 너는 활짝 웃으며 또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고?"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나는 너의 미소에는 너무 약했고, 웃음에는 더더욱 약해서 계절을 잘못 찾은 눈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럼, 종…이를."
그래서 너는 한 권의 노트를 사왔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욱 보기 힘든 질 좋은 종이였다. 잉크를 잔뜩 머금어도 번짐이 적었고 살짝만 그어도 펜촉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너는 내게 수많은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마치 교육열에 들뜬 부모 같았다. 우리 부모님도 그런 말을 한 적 없었는데. 나는 애매한 미소를 흘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과거의 내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네게 영광된 길, 광휘로운 미래, 가장자리가 금으로 장식된 붉은 융단이 깔려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의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은 나의 의도이기도 했으나 또한 명백한 실수였다. 종단면적인 연구는 필수불가결이란 사실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잠이 들었다 깨곤 했다. 게으름과 더불어 무력감과 나태를 학습한 덕택이었다. 하릴없이 쇠털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면 풍경이 바뀌곤 했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도시에 막 세워졌던 새 건물이 어느 새 관광팸플릿에 가장 오래된 건물로 실려있는 식이었다. 식물의 종은 변화했고 동물의 형체도 그러했다. 특징적인 뿔이 짧아지거나 얼룩의 무늬가 바뀌었고 주변은 더 추워지거나 더 더워지곤 했다. 그 사이에서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는 사실 땅에 발을 디디지 못해, 아주 예전에 죽어버린 것일까. '살아있다'는 건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철학적인 고민에 나는 뒤늦은 식욕을 느꼈다. 아무 봉지나 주워들고 열었다. 짭짤한 나초였다. 사둔 지 꽤 됐는지 제법 눅눅했고 유통기한을 확인하니 정말로 내일모레하고 있었다. 긴박함을 느낀 나는 냅킨을 집어들고 나초를 주워먹으며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시간은 유한하다. 무한하게 쓰고 있지만 언젠가는 끝이 오겠지.
그 전에 이 모든 이야기들을 쓰지 않으면 안됐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나의 기억들을 전부 붙잡아 명확하게 구체화하지 않으면 언젠간 오래된 나초처럼 바삭함을 잃거나 형태가 변한 동물의 뿔처럼 될 것이다. 이미 퇴색해버렸다 해도 더 빛바래 낡아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나는 기름기 묻은 손을 냅킨에 아무렇게나 닦고 펜을 쥐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말을 써야될지 모르겠어서.
"일어났어?"
눈을 뜨면 어느새 소파 위였다. 다정한 남자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나의 짧은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긴다. 그또한 오래된 버릇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쓸어넘길 정도의 길이가 아니었다. 세계가 한번 소멸되었다 생겨나고, 갓 태어난 아이가 한 줌 흙이 되고, 애정도 분노도 슬픔도 비통함도 원망도 모두 재의 세계로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결국 똑같은 시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 남자 뿐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였다.
"오늘은 뭐 했어?"
"글쎄."
"무언가 썼어?"
"…아니. 써도 너한테는 안 보여줘. 노트 열어 보지 마."
나는 아직도 잠이 깨지 않은 눈으로 무엇을 했는지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마치 죽은 사람 같지 않은가. 나는 낮에 하던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아주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넓은 평원에서 나는 한 번 대지 위에 잠들었었다. 그 때 이미 인간 된 자격을 상실했기에 어떤 대지에도 발 딛지 못하고 숨쉬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심코 일어나다가 굴러떨어질 뻔한 것을 상대방이 팔을 뻗어 끌어안아 간신히 화를 면한다.
"무리하지 마, 가엘리오."
그는 익숙하게 나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양치, 아직 안 했는데." 지금은 잠들고 싶지 않다는 미약한 저항은 금세 수그러든다. 내게도 그건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품 안에서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여전히 단단한 어깨와 단 냄새가 나는 목덜미였다. 내가 느낄 수 있는 단단함은 오로지 이것 뿐이었다. 사람이 견고한 땅 위에서만 살 수 있다면, 그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남자 옆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또 그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이 남자는 어느 땅 위에 발을 딛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숨이 막혀 온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의 대지가 될 수는 없었다. 나의 그 알량한 애정들은 네게 영원히 미약하고 부질없으며 하찮을 것이기에. 그것들은 아주 가끔, 위로가 될 수는 있어도 삶을 지탱할 근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지나간 시간들 모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고 나는 학습된 무력감으로 눈을 감는다.
노트, 열어보면 안 돼.
그것만이 내가 잠들기 전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너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는 네 말을 한번도 들은 적 없다는 걸 알면서. 어리석은, …가엘리오.